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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 괴테 10.

오늘의 쉼터 2011. 5. 6. 21:01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 괴테 10.

 

 

11월 30일
나는, 나는 아무래도 평정을 되찾을 수가 없네.
어디를 가나 어퍼구니없는 사건에 맞닥뜨리게 되니 말일세.
오늘도! 아아, 운명이여! 인간이여!
점심때 강변을 산책했네.
나는 요즘 입맛을 잃었네.
그리고 모든 것이 처량하기만 하다네.
산에서 눅눅하고 차가운 서풍이 불고, 잿빛 비구름이 골짜기로 흘러들고 있었지.
멀리 초록색의 허름한 옷을 입은 사나이가 바위 사이를 기어 다니는 것이 보였네.
약초라도 찾고 있는 것 같았네.
내가 다가가자 발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다 보았는데,
사람의 마음을 끄는 생김새였네.
조용한 슬픔이 어리어 있는 얼굴로, 선량하고 정직한 인간미가 엿보였네.
검은 머리는 두 가닥으로 말아서 핀을 꽂았고,
나머지 머리는 굵게 땋아 등 뒤로 드리우고 있었네.
옷차림으로 미루어보아 신분이 낮아 보였으므로,
그가 하고 있는 일에 내가 관심을 보여도 언짢게 여기지 않을 듯싶어서
무엇을 찾고 있느냐고 물어 보았지.
"꽃을 찾고 있습니다."하고 한숨을 후우 내쉬면서 그는 대답했네.
"그런데 한 송이도 보이지 않는군요."
"꽃이 있을 철이 아니니까요."나는 웃으면서 말했지.
"꽃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하고 그는 내가 서 있는 쪽으로 내려오면서 말했네.
"우리 집 뜰에는 장미와 인동덩굴 두 종류가 있답니다.
그 중 하나는 아버지가 주신 것인데, 잡초처럼 많이 나 있죠.
벌써 이틀째 그걸 찾고 있는데, 보이지 않는군요.
이 근처에도 언제나 꽃이 피어 있지요.
노란 꽃, 파란꽃, 빨간 꽃들이 말입니다.
수레국화도 예쁜 꽃이지요. 그런데 하나도 안 보이는군요"

나는 약간 이상한 기분이 들어서 슬쩍 에둘러서 물어 보았네.
"꽃을 따서 뭘 하려고 그러죠?"
경련하는 듯한 기묘한 미소로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네.
"이건 아무에게도 이야기하면 안 되는데"
하고 그는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대고는 말을 이었네.
"저는 애인한테 꽃다발을 선물하기로 약속했거든요"
"그거 근사하군요."하고 나는 말했지.
"아아! 제 애인은 다른 물건들은 많이 갖고 있어요. 부자거든요"
"그래도 당신의 꽃다발은 기쁘게 받겠지요"
"그녀는 보석을 갖고 있어요. 왕관도 갖고 있지요"
"그 분의 이름은 뭡니까?"
"네덜란드 정부가 나에게 월급을 주었더라면"하고 그는 엉뚱한 말을 했네.
"이렇게 되진 않았을 겁니다. 그래요, 옛날엔 좋았지요.
저는 행복했습니다.! 이젠 글렀어요. 지금은 저도......"

하늘을 우러러보며 눈물을 짓는 그의 눈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네.
"그러면 그전에는 행복했었군요?" 하고 나는 물었지.
"아아! 다시 그런 날이 오면 좋겠어요.
그 무렵엔 행복했었지요. 즐겁고 기뻣어요.
물 속을 헤엄쳐 다니는 물고기처럼!"
"하인리히!"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한 노파가 우리있는 쪽으로 다가왔네.
"하인리히, 여기 있었구나. 사방으로 찾아다녔다. 자, 가자, 밥 먹어야지"
"할머니의 아드님인가요?" 나는 노파에게 다가서며 물었네.
"네, 제 불쌍한 자식이랍니다."하고 할머니는 대답했네.
"하느님께서 저에게 무거운 십자가를 지우셨어요."
"이렇게 된 지가 얼마나 됐습니까?" 하고 나는 물었지.
"이렇게 얌전해진 지는 반 년쯤 되었어요.
그 전에는 꼬박 1년 동안 어찌나 날뛰고 행패를 부렸는지,
정신병원에서 사슬에 묶여 있었지요.
지금은 행패는 부리지 않습니다.
다만 언제나 임금님이 어떠니 황제가 어떠니 하는 소리만 한답니다.
원래는 온순하고 얌전한 아이였죠.
집안살림도 도와 주고 글씨도 잘 썼는데,
갑자기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기더니 고열이 나고,
그러고는 정신이 돌기 시작하더군요.
그랬다가 지금은 보시는 것처럼 이 모양이랍니다. 그 이야기를 하자면......"

나는 그녀의 말을 가로막고 물었네.
"그토록 행복했었다, 즐거웠었다 하는 건 언제 얘긴가요?"
"바보 같은 소릴 또 했군요!"
노파는 연민의 미소를 머금고 말했네.
"완전히 정신이 돌았던 때의 얘기를 하고 있는 거랍니다.
언제나 그걸 자랑삼아 얘기한답니다.
정신병원에서, 자기 자신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던 때의 이야기지요"
그 말은 벼락처럼 내 가슴을 때렸네.
나는 노파의 손에 지폐를 한 장 쥐어 주고 얼른 그 곳을 떠났네.
'네가 행복했던 때!'
시내를 향해 황망히 걸음을 재촉하면서 나는 외쳤네.
'네가 물 속을 헤엄쳐 다니는 물고기처럼 행복했었던 때!'
하늘에 계신 주여!
당신은 인간의 운명을 이렇게 정하여 놓으셨나이까?
이성을 지니기 이전과, 이성을 잃어버린 이후를 제외하고는 행복해질 수 없도록!
가엾은 사나이여!
그래도 나는 그대의 슬픔과, 그대를 초췌하게 하는 정신착란이 부럽고나!
그대는 희망에 부풀어 행차한다,
그대의 여왕을 위하여----한겨울에----꽃을 따려 하다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면서 한탄을 하되,
어째서 꽃이 보이지 않는지는 모르고 있다.
그런데 나는 희망도 목적도 없니 나갔다가,
집을 나섰을 때와 똑같은 기분으로 돌아온다.
그대는 네덜란드 정부에서 월급만 주었더면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고 몽상하고 있다.
행복한 사나이여!
행복해질 수 없는 까닭을 이세상의 현실적인 장애 탓으로 돌릴 수 있다니.
그대는 모르고 있네,
그대가 비참하게 된 원인이 산산이 파괴된 그대의 마음 속에 있으며,
그대를 미치게 한 머릿속에 있음을.
그리고 지상의 어떤 권력으로도 그대를 거기서 구해 낼 수 없음을.

신병을 고치기 위하여 약효가 있다는 먼 온천장으로 여행을 갔다가,
그 때문에 도리어 병이 악화되어 고통을 당하는 사람을 비웃을 수 있는 인간,
양심의 가책을 면하고 영혼의 고뇌를 없애기 위해 고난을 겪으며
그리스도의 무덤을 찾아 순례의 길을 떠나는 사람을
멸시할 수 있는 그런 인간은 윈안도 받지 못한 채 죽을지어다.
길도 없는 길을 걸어가느라고 발바닥은 상처를 입을지라도,
그 한발짝 한발짝이 괴로워하는 영혼에게 있어서는 한 방울의 진통제가 되는 걸세.
고달픈 여행의 하루하루를 참고 견디어 낼 때마다
가슴 속의 무거운 짐은 그만큼 가벼워지고, 마음은 그만큼 평온해지는 걸세.
푹신한 소파에 앉아서 공허한 이론을 논하는 자들이여,
그대들은 이것을 망상이라 부를 권리가 있는가? 망상!

아아, 하느님!
저의 눈물을 보소서!
인간을 이토록 가난하게 창조하신 당신께서는
어찌하여 이 얼마 되지 않는 가난한 소유분까지도
빼앗아 가 버리는 동포를 덤으로 주셨나이까?
그 동포는 당신께로 향한 얼마 되지 않는 믿음까지도 빼앗아 가 버립니다.
만물을 사랑하시는 주여!
약초를 믿으며, 뚝뚝 떨어져 내리는 포도즙을 믿는 그 마음은,
당신께로 향한 믿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만물 속에,
우리에게 한시도 없어서는 안 될
진정제와 치료제의 효력을 간직해 놓으신 것으로 믿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정체를 알 수 없는 하느님 아버지시여!
전에는 당신께서 제영혼을 구석구석까지 충만케 해 주셨으나,
지금은 저를 외면해 버리셨습니다.
부디 저를 당신 곁으로 불러 주십시오.
이 이상 더 침묵하지 마소서!
당신의 침묵은 갈망하는 이 영혼에겐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뜻밖에 자기 아들이 돌아와서 매달렸을 때
화를 낼 수 있는 아버지가 있을까요?
그 아들은 외칩니다.
"아버지, 제가 돌아왔습니다.
노여워하지 말아 주십시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좀더 오래 참고 견디어 계속해야만 할 편력을,
저는 중도에서 그만두고 돌아왔습니다.
세상은 어디를 가나 마찬가지입니다.
고생을 하고 노동을 하면 보수와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저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저는 아버지가 계시는 곳이 가장 좋습니다.
아버지가 보시는 곳에서 괴로움도 즐거움도 맛보고 싶습니다."

아버지시여,
하늘에서 굽어 살피시는 아버지시여,
당신께서는 이 아들을 물리치시겠습니까?

 

 

12월 1일
빌헬름이여!
자네에게 이야기했던 그 사나이, 그 행복하고도 불행한 사나이는
로테의 아버지 밑에서 일하던 서기였다네.
로테를 사모하며 그것을 남몰래 가슴 속에 간직하고 있다가,
마침내 그것을 고백한 끝에 해고당했다는 걸세.
가슴 속에서 불타던 정열이 이 사나이를 미치게 한 거지.
이 덤덤한 편지를 읽고 헤아려 주기 바라네,
그 이야기를 듣고 내가 얼마나 심한 충격을 받았겠는가를.
알베르트는 태연스레 이 이야기를 나에게 해 주었네.
아마 자네도 태연스레 이 글을 읽어 나갈 테지.

12월 4일
부디 이 심정을 헤아려 주게.
나는 이제 글렀어. 이 이상 더견딜 수가 없네!
오늘 나는 그녀 곁에 앉아 있었네.
그녀는 피아노를 치고 있었지.
갖가지 곡을, 온갖 감정을 나타내면서! 온갖 감정을 다 말일세!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녀의 어린 여동생이 내 무릎 위에 앉아서 인형에게 옷을 입히고 있었네.
나는 눈물이 날 것만 같았네.
고개를 숙였더니 로테의 결혼반지가 눈에 띄더군.
눈물이 왈칵 솟았네.
그때 그녀가 그 그리운, 황홀한 멜로디를 치기 시작하였네.
그것을 실로 돌발적이었어.
내 영혼은 구석구석까지 위로를 받았네.
그와 동시에 지나간 날들의 추억이 내 마음 속에서 소용돌이쳤네.

전에 이곡을 들었을 무렵의 일,
로테 곁을 떠나 있었던 음울했던 날들,
울화가 치밀었던 일,
차례차례 무너져 버린 희망 등등이,
나는 방 안을 이리저리 걸어다녔네.
복받쳐 오르는 감회에 숨이 막힐 것만 같았네.
"제발"하고 나는 격력한 감정을 못 이겨 로테 곁으로 내달으며 말했지.
"제발 그만두어 주십시오!"
로테는 손을 멈추고 나를 빤히 쳐다보았네.
"베르테르 씨" 하고 그녀는 미소지으면서 말했네.
그 미소는 내 마음 속에 고스란히 스며들었네.
"베르테르 씨, 몸이 편찮으신 모양이군요,
그렇게 좋아하시던 곡이 귀에 거슬리는 걸 보면,
그만 돌아가시도록 하세요. 그리고 제발 마음을 진정시키세요"
나는 훌쩍 그녀 곁을 떠났네.
하느님! 당신께서는 제 비참한 모습을 보고 계시겠죠.
어서 이 불행이 끝나게 해 주십시오.

12월 6일
어디를 가나 그녀의 모습이 나를 따라다니네!
자나께나 그 모습이 내 마음 속을 차지하고 있네!
눈을 감으면 마음의 눈길이 쏠리는 머릿속에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나타나네.
바로 여기에! 딱 들어맞는 표현을 할 수가 없군,
어쨌든 눈을 감으면 나타나는 걸세.
바다와도 같이, 심연과도 같이,
그것은 내 앞에, 아니, 내 속에 조용히 자리잡고 내 생각을 충만케 해 준다네.
반신(半身)이라 찬양되는 인간의 꼴을 보게나!
가장 힘을 필요로 하는 바로 그때에 힘이 빠져 버리니 말일세.
기쁨에 겨워 날뛸 때도, 슴픔의 구렁텅이에 빠져들 때도,
바야흐로 무한한 자의 충만 속으로 녹아 들어가 버리고 싶어지는 그 순간에,
언제나 덜미를 잡혀 둔하고 차가운 의식 속으로 되끌려오고 말지 않는가.

12월 12일
사랑하는 빌헬름이여,
나는 지금, 악령이 씌었다고 여겨졌던 그 불행한 사람들과 같은 상태에 있다네.
때때로 뭔가가 나를 엄습해 오는 걸세.
그것은 불안도 아니고, 욕방도 아니고, 불가해한 내적 발광이라네.
그것이 내 가슴을 쥐어뜯으려 하고, 내 목을 조르는 거야.
아아, 불행하도다!
나는 견딜 수가 없어져서,
인간에게 적의를 품고 있는 이 계절의 황량한 밤경치 속으로 나가 헤맨다네.

어젯밤에도 나는 밖으로 나가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네.
갑자기 눈석임물이 불어나서 강물이 범람했다는 소리를 들었거든.
강마다 물이 넘치고, 발하임의 아래쪽 그 그리운 골짜기가 물에 잠겼다는 거야.
밤 11시가 지나서 나는 집을 뛰쳐나왔네.
무시무시한 광경이었네.
바위 위에 서서 내려다보니까, 달빛속에서 탁류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네.
밭도 목장도 산울타리도, 모두가 그 모습을 감추었고,
넓은 골짜기는 온통 바람이 휘몰아치는 거친 바도로 변해 있었네!
이윽고 검은 구름 속에 숨었던 달이 다시 얼굴을 내밀자,
그 물바다는 섬뜩할이만큼 아름답게 빛을 반사하면서
저 먼 곳을 향해 요란하게 굽이치면 내 눈앞을 흘러가는 것이었네.
전율과 그리움이 나를 엄습하였네.

아아, 나는 두 팔을 벌리고 심연을 향하여 선 채 깊이깊이 숨을 들이쉬었네.
그리고 이 괴로움,
이 번뇌를 노도처럼 휩쓸어가 버리는 환희에 싸여 나는 넋을 잃었네.
아아, 그러나 나는 땅에서 발을 뗌으로써 모든 고통을 종식시켜 버릴 수는 없었네.
내 운명의 모래시계는 아직도 모래가 다 흘러내리지 않았던 걸세.
나는 그것을 절실히 느꼈네.
아아, 빌헬름이여!
저 폭풍우로 구름장을 찢어 대 홍수를 일으킬 수만 있다면,
나는 나의 인간적 존재를 기꺼이 내던질 텐데.
아, 그런 큰 환희는 얽매인 몸에는 주어지지 않는 것일까?
어두운 마음으로 언젠가 어느 무더운 날
산책을 나갔다가 로테와 함께 쉬었던 그 그리운 버드나무 아래를 내려다보니,
그곳도 물에 잠겨 있었네.
버드나무도 거의 알아볼 수가 없었네.
로테네 목장, 로테네 집 주위는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의 정자는 격류에 볼품없이 허물어져 버렸겠지,
하는 생각들을 하고 있는 사이에, 죄수의 마음 속에 숨어 들엉오는
자기 집의 가축 떼와 목장, 영광스러운 직위에 대한 꿈들처럼,
지나간 날들의 햇살이 내 마음 속에 비쳐들었네. 나는 그대로 오래 서 있었네!
나는 이제 나 자신을 책망하지 않네,
죽을 용기는 있으니까. 나는 차라리......
그러나 지금 나는 여기에 한 노파처럼 앉아있네.
죽음을 향하여 다가가고 있는,
기쁜도 없는 생명을 한순간이라도 더 연장하고 유지하기 위하여
남의 집 울타리에서 땔나무를 주우며, 이집 저집의 문간에서 빵을 구걸하는 노파처럼.

12월 14일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친구여. 나는 나 자신에 대하여 놀라고 있네.
로테에 대한 나의 사랑은 더없이 성스럽고 청순한, 형제와 같은 사랑이 아니었던가?
일찍이 단 한 번이라도 내 가슴에 죄가 될 만한 소망을 품은 적이 있었던가?
단언하지는 않기로 함세.
그런데 꿈이란 것은!
아아, 이토록 모순된 갖가지 작용을 불가사의한 힘의 조화로
돌려 버린 사람들의 감각은 그야말로 올바른 것일세!
어젯밤! 그 이야기를 하려고만 해도 몸이 떨리네.
나는 그녀를 내 가슴에 꽉 껴안고, 사랑을 속삭이는 그녀의 입술에 끝없는 키스를 퍼부었다네.
나의 눈은 그녀의 황홀해진 눈 속에 어리어 있었네.
주여! 저는 벌을 받아야 할까요?
지금도 그 불길 같은 기쁨을 설레는 마음으로 되살리면서,
형언할 수 없는 행복을 느끼고 있으니 말입니다.
로테! 로테!
이제 끝장이 나려나 보네!
감각이 혼란에 빠지고, 벌써 1주일 동안이나 사고력을 상실하고 있어.
눈에는 언제나 눈물이 그득하네.
어디를 가나 즐겁지가 않네.
그런가 하면 어디를 가도 즐겁네.
아무런 소망도 희망도 없어. 이제 나는 떠나는 편이 나을 것 같네.

이 세상을 하직하려는 결심은
이런 상황 속에서, 베르테르의 가슴 속에 점점 더 굳어져 갔습니다.
로테의 곁으로 돌아온 이후로 그것은 언제나 그의 최후의 기대였으며 희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를 타이르고 있었습니다.
그 행위가 조급하고 경솔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최선의 확신으로써가능한 한 침착한 결의와 더불어 결행해야만 한다고 말입니다.
그의 회의 및 자기 자심과의 갈등을 엿볼 수 있는 쪽지가 있습니다.
빌헬름 앞으로 쓴 편지의 서두인 듯한데,
날짜는 없고, 역시 다른 글들과 함께 발견된 것입니다.

("그녀가 살아 있다는 사실,
그녀의 운명, 내 운명에 대한 그녀의 공감,
그러한 것들이 재가 되어 버린 내 머릿속에서 아직도 최후의 눈물을 짜내고 있네.
막을 올리고 그 안으로 들어간다!
단지 그뿐 아닌가! 그런데 이 망설임은 어떻게 된 건가?
그 안이 어떤 곳인지 모르기 때문일까?
한 번 들어가면 다시는 돌아오는 자가 없기 때문일까?
확실한 것을 알지 못하면 혼란과 암흑을 예상하지.
그것이 우린네 인간정신의 특성인가 보네!")

마침내 베르테르는 이 슬픈 생각에 점점 더 깊이 잠겨들었고,
그 결의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빌헬름 앞으로 보낸,
애매한 내용의 편지가 한 증거가 될 것입니다.

 

12월 20일
고맙네, 빌헬름.
그 말을 그렇게 해석해 준 자네의 우정에 사의를 표하네.
물론 자네 말은 옳네. 나는 떠나는 편이 나을걸세.
그러나 자네들 곁으로 돌아오라는 제안에는 따를 수가 없네.
나는 역시 먼 곳으로 떠나고 싶네.
자네가 나를 데리러 와 주겠다는 말, 정말 고맙네.
다만 앞으로 2주일 정도 더 미루어 주게나.
나중에 편지로 자세한 것을 알려 줄 테니까, 그 때까지만 기다려 주게.
무엇이나 무르익기 전에는 따지 말아야 하는 법이거든.
2주일 동안 더 있고 덜 있는 것의 차이는 대단한 것일세.
어머니께 말씀 좀 전해 주게, 아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그리고 여러 가지로 쓰라린 일을 겪게 해 드린 것을 부디 용서해 달라고.
기쁘게 해 주어야 할 사람들을 슬프게 하는 것이 나의 운명이었네.
잘 있게, 가장 친애하는 나의 친구여.
하늘의 모든 축복이 자네에게 내리기를! 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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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
로테의 마음 속에 어떤 생각이 오가고 있었으며,
남편에 대한 배려와 그녀의 불행한 친구에 대한 상념이 어떠했었는지,
우리는 그것을 말로 표현하기가 곤란합니다.
다만 우리는 로테의 성격을 알고 있으므로 대강은 짐작을 할 수가 있고,
또 상냥한 마음씨를 지닌 여성이라면 로테의 심정이 되어 생각하고,
로테와 더불어 느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즉, 로테는 베르테르를 멀리하기 위하여
모든 수단을 다 강구하려고 굳게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로테가 그 실행을 망설였다면, 그것은 친구에 대한 진정한 배려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이 베르테르에게 있어서 얼마나 쓰라린 희생인지,
아니,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그녀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정말 진지하게
그 결심을 실행해야만 할 필요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그런 만큼 더한층 자기의 지조가 남편의 그것에 비해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이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되었던 것입니다.

마지막에 수록한 편지를 베르테르가 친구 앞으로 쓴 것은
크리스마스를 앞둔 일요일이었는데, 그 날 저녁때 그는 로테를 찾아갔습니다.
로테는 혼자 있었습니다.
그녀는 마침 어린 동생들을 위한 크리스마스 선물용 장난감을 정리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베르테르는 아이들의 기쁨을 예상하고,
자기의 유년시절, 갑자기 문이 열리면 촛불이며 과자며 사과 등으로 장식된 트리가
눈앞에 나타나서 천국에 들어간 것같이 황홀한 기분이 되었던 이야기를 했습니다.
"당신에게도"하고
로테는 사랑스러운 미소로써 당혹스러운 심정을 감추며 말했습니다.
"당신에게도 선물이 있을 거예요. 얌전하게 하고 계시면요.
기다란 양초라든가 그런 걸......"
"얌전하게 하고 있는다는 건 무슨 뜻인가요?" 하고 베르테르는 외쳤습니다.
"어떻게 하면 되는 겁니까, 로테?"
"목요일 저녁이 크리스마스 이브예요.
아이들도 오고 아버지도 오십니다. 모두들 각각 선물을 받게 되지요.
그 때 당신도 오세요. 그렇지만 그 전에는 오시지 마세요."
베르테르는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부탁이예요"하고 로테는 말을 이었습니다.
"어쩔 도리가 없어요.
저를 안정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하시고 제발 그렇게 해 주세요.
이대로 가다간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베르테르는 그녀에게서 눈길을 돌리고,
방 안을 오락가락하면서 입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안 된다......' 그
러한 거동으로 미루어 베르테르가 빠져든 상태를 알아챈 로테는,
이런 말 저런 말을 하면서 그의 마음을 풀어 주려 했으나 소용이 없었습니다.
"좋아요, 로테"하고 베르테르는 외쳤습니다.
"이제 다시는 당신을 만나지 않겠습니다!"
"어째서 그런 말씀을 하세요? 베르테르 씨,
당신은 저희 집에 오셔도 좋고, 또 오셔야만 해요.
다만 지나치지만 않게 해 주세요.
아아, 어째서 당신은 이토록 격렬하게,
한 번 손에 잡은 것을 꽉 붙잡고 놓지 않으려 하실까요?
무슨 일에나 억누를 수 없는 정열을 솓는 성품이시군요! 제발"
로테는 베르테르의 손을 잡고 말을 이었습니다.
"분수를 지켜 주세요!
당신만한 인격, 당신만한 학문, 당신만한 재능이면
달리 얼마든지 재미있는 일을 즐기실 수가 있어요.
대장부다와지도록 애쓰세요.
저 같은 여자에게 이런 슬픈 애착을 같지 마시고,
당신을 측은하게 생각하는 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해 드릴 수가 없는 여자인걸요"

베르테르는 이를 악물고 어두운 표정으로 로테를 보았습니다.
로테는 그의 손을 잡은 채로 말했습니다.
"잠깐만 차분히 생각해 봐 주세요, 베르테르 씨!
당신은 당신 자신을 속이고 있는 거예요.
일부러 자신을 파멸시키려고 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생각되지 않으세요?
어째서 저를?
저는 남의 아내인데 어째서 이런 사람을......
저는 이런 생각이 들어요.
저를 당신 것으로 할 수가 없다,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이 당신의 망음을 끌고 있는게 아닐까요? 그렇지 않을까요?"

베르테르는 로테에게 잡혀 있던 손을 빼내고,
시선을 고정시켜 불쾌한 듯이 상대방을 지켜보았습니다.
"훌륭하시군요!" 하고 베르테르는 외쳤습니다.
"정말 훌륭하십니다.
알베르트가 그런 대사를 꾸며 낸 거로군요. 전략가야, 훌륜한 전략가!"
"그 정도 말이야 아무라도 할 수 있어요"
로테가 응수했습니다.
"이 넓은 세상에 당신의 소망을 채워 줄 만한 아가씨가 한 사람도 없을까요?
한 번 마음먹고 찾아보세요. 틀림없이 그런 사람이 눈에 띌 거예요.
이런 말씀을 드리는 건 벌써 오래 전부터,
당신을 위해서나 저희들을 위해서나 걱정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예요.
요즘의 당신은 일부러 자신을 좁은 세계로 몰아넣고 있는 것 같아요.
용단을 내리세요! 여행을 하면 틀림없이......기분도 풀릴 거예요!
부디 당신에게 어울리는 좋은 분을 찾아 내도록 하세요.
그리하여 진정한 우정을 누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베르테르는 차갑게 웃었습니다.
"그 말을 인쇄를 해서 온 세상의 가정교사들에게 배부해 주시도록 하지요.
로테, 앞으로 얼마간만 더 나를 이대로 내버려 두어 주십시오.
그러면 만사가 다 잘 될 테니까요!"
"아뭏든 베르테르씨, 크리스마스 이브 전에는 오지 마세요, 네?"
베르테르가 뭐라고 대답을 하려 했을 때 알베르트가 방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두 사람은 어색한 저녁인사를 나누고, 둘 다 거북한 듯 방 안을 서성거렸습니다.
베르테르는 내용도 없는 잡담을 꺼냈으나,
그것도 곧 바닥이 나고 말았습니다.
알베르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다가 알베르트는 아내에게, 자기가 부탁했던 일은 어떻게 했느냐고 물었더니,
아직 하지 못했다는 대답을 듣고는 두세 마디 잔소리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베르테르에게는 그것이 매우 차갑게 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