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 괴테 8.
4월 19일
두 통의 편지, 고맙네.
답장을 하지 않은 것은, 사표가 수리 될 때까지는 잠자코 있고 싶어서,
동봉한 편지도 써 놓기만 하고 부치지 않았기 때문일세.
어머니께서 장관께 부탁을 하여 내 계획을 방해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어서였지.
그러나 이젠 끝났네. 나의 해임이 재가되었어.
해임발령을 내리기까지 얼마나 우여곡절이 많았는지,
장관이 나에게 어떤 편지를 써 보냈는지,
그런 것들은 이야기하지 않기로 하겠네.
그건 자네들의 새로운 비탄을 유발할 뿐일 테니까.
황태자께서 전별금조로 25두카텐을 하사해 주셨네.
그와 함께 보내 주신 글을 읽고 나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네.
덕택에 전번에 어머니께 내가 부탁드렸던 돈은 필요없게 되었네.
5월 5일
내일 이 곳을 떠나네.
내가 태어난 고장이 그리로 가는 길에서 6마일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니까,
오래간만에 잠깐 들러 볼 생각일세.
꿈결처럼 행복하게 지냈던 그 옛날의 날들을 회상해 보고 싶은 걸세.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어머니와 내가 마차를 타고,
정든 그 고장을 떠날 때 지나온 바로 그 성문을 거쳐서 들어갈 생각이라네.
잘 있게. 빌헬름! 가는 도중에 또 소식 전하겠네.
5월 9일
성지 순례자 같은 경건한 심경으로 고향 방문을 마쳤네.
뜻하지 않은 갖가지 감회가 나를 사로잡았네.
S쪽을 향해 시내에서 15분 정도 나간 곳에 커다란 보리수가 한 그루 있지.
그 근처에서 마차를 세우고 내렸네.
걸어가면서 지난 추억을 새로운 기분으로 생생하게 마음껏 되새겨 보고 싶었던 걸세.
그런데 그 보리수 아래세서 걸음을 멈추고 보니,
아아, 어쩌면 이렇게도 달라졌을까!......
그 곳은 옛날 소년시절에 내 산책의 목적지요 또한 종점이기도 했는데,
그 무렵에는 아무것도 모른채 행복 속에 잠겨 미지의 세계를 동견하곤 했었지.
그 넓은 세계로 나가면 갈망하고 동경하여 마지않는
이 가슴을 채워 줄 풍부한 양식과 기쁨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걸세.
그런데 지금, 나는 그 넓은 세계로부터 돌아왔네.
아아, 친구여! 그 많은 희망은 헛되이 사라지고,
다채롭던 계획은 여지없이 허물어져 버렸네.
눈앞에 보이는 저 산들을 향해 나는 수없이 소망을 걸었었네.
몇 시간 동안이나 이 곳에 앉아 먼 곳을 동경하며,
정다운 모습으로 내 눈앞에 다가 드는 수풀과 골짜기에 마음이 융화되어
나도 모르게 무아지경에 빠져들곤 했었지.
이윽고 날이 저물어 집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되어도
나는 이 곳을 떠나기가 한없이 아쉽기만 했었네.
시내로 가까이 가면서 나는 낯익은 하나하나에 대하여 인사를 보내었네.
새로 생긴 집은 마음에 들지 않았네.
집뿐이 아니라, 그 밖에 여기저기에 보이는 변화가 모두 마음에 들지 않았네.
시내로 들어가는 성문을 지나면서부터는
곧 내가 완전히 옛날의 나로 되돌아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네.
친구여, 너무 장황하게 늘어놓지는 말아야지. 그
것이 나에게 있어서 그리운 것이면 그리운 것일수록,
이야기를 하면 단조로운 것이 되어 버릴 테니까 말일세.
나는 시장 맞은편, 우리의 옛 집 바로 곁에 있는 여관에 묵기로 하였네.
그리로 가는 도중에 발견한 것인데,
성실한 노부인이 우리 개구장이의 어린 시절을
곧잘 가두어 넣었던 그 교실은 잡화점이 되어 있었네.
그 속에 갇혀서 겪어야 했던 불안과 눈물, 그리고 지루함과 애달픔이 회상되었네.
한 발짝 걸음을 옮길 때마다 뭔가 다른 추억이 되살아나곤 했네.
성지를 찾은 술례자라 해도 이처럼 숱한 종교적인 회상의 장소를 대하게 되는 일은 없을 걸세.
그리고 또 그 마음이 이토록 신성한 감동으로 충만되는 일도 드물 걸세.
이야기하고 싶은 일은 수없이 많지만, 한 가지만 더 이야기하겠네.
나는 강을 따라서 어떤 저택이 있는 곳까지 걸어 내려갔네.
여기도 역시 옛날에 내가 곧잘 다녔던 길로,
우리 소년들이 납작한 돌멩이를 물 위에 던져서 물수제비뜨기 시합을 했던 곳이었지.
나는 때때로 이 곳에 서서 이상한 에감에 가슴을 부풀리며
흘러가는 물길을 따라 시선을 보내곤 했다네.
그 때 나는 그 물줄기가 닿을 머나먼 고장,
신비에 가득 찬 세계를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지.
그러다 보면 내 상상력은 한계에 도달하여 더 상상할 밑천이 없어져 버리는데,
그래도 여전히 생각은 앞으로 앞으로 자꾸만 나아가서
마침내 눈에 보이지 않는 먼 세계 속으로 들어가 망연해지곤 했었지.
친구여, 우리의 훌륭한 조상들은 한정된 세계 속에 살면서도 그토록 행복하지 않았던가!
그들의 감정, 그 시가들은 또 얼마나 천진난만했던가!
오딧세우스가 무한한 바다, 무한한대지에 대하여 이야기했을 때
그 말은 진실하고 인간적이며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온 것이요,
절실하고 신비로운 것이었네.
내가 지금 지구는 둥글다고 국민학생들도 다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해 본들
그런 지식이 무슨 소용이 있겠나.
인간은 지상에서 살면서 지하에 잠들기 위해서라면 더욱 적은 땅이 있으면 되는 걸세.
지하에 잠들기 위해서 라면 더욱 적은 땅으로 충분하지.
지금 나는 공작의 사냥별장에 와 있네.
공작과는 그럭저럭 기분 좋게 지낼 수 있을 것 같네.
그는 직선적이고 꾸밈이 없는 사람일세.
그런데 그를 둘러싼 기묘한 사람들의 정체는 나로서는 가늠할 수가 없네
악인들 같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진실한 인간들 같지도 않네.
때때로 진실해 보이는 경우도 있느나, 어쩐지 믿을 수가 없네.
그 밖에 유감스러운 일은 ,
공작이 딴 사람한테서 들었거나 책에서 읽은 이야기를 곧잘 하는 점일세.
더구나 그것을 딴 삶에게서 들은 듯한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걸세.
게다가 공작은 나의 지성과 재능을 나의 영혼보다 높이 평가하고 있네.
영혼이야말로 나의 유일한 자랑거리인데 말인세.
그것만이 모든 힘, 모든 기쁨, 모든 불행의 원천이 아닌가.
아아, 내가 지니고 있는 지식은 누구나 익힐 수 있는 것이지만,
나의 영혼 그것은 나만이 지니고 있는 걸세.
나는 한 가지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그것이 실현되기 전에는 자네들에게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네.
그러나 그것도 무산되어 버린 지금에 와서야 아무런들 무슨 상관이랴.
나는 전쟁터에 나갈 생각이었네.
이 계획을 나는 오랫동안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었지.
공작을 따라 이 곳에 온 것도 주로 그 때문이었네.
공작은 XX근무의 장군이거든. 같이 산책을 나갔을 때 이 계획을 공작에게 털어놓았더니,
그는 나를 타이르며 그만두라는 것이었네.
따지고 보면, 내 가슴 속에서 요동하고 있었던 것은
정열이라기보다 변덕에 불과했는지도 몰라.
나를 움직인 것이 정열이었다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진 않았을 테니까.
6월 11일
자네가 뭐라고 하든 난 이 이상 더 이 곳에 머무를 수가 없네.
공작은 나를 한껏 극진히 대접해 주고 있으나 여긴 정주할곳이 못 되네.
우리 두 사람은 근본적으로 공통되는 점이 없어.
공작은 극히 세속적인 지성인일세.
그와의 교제는 나에게 재치있게 쓰여진 책을 읽는 것 이상의 즐거움을 주지는 못하네.
1주일간 이 곳에 더 있다가 그 뒤엔 다시 정처없는 여행을 떠나야겠네.
여기서 내가 한 일 가운데 최상의 것은 스케치일세.
공작은 예술에 대해 어느 정도의 센스는 갖고 있네.
만일 역겨운 학문적인 취향이나 틀에 박힌 상투적인 술어에 얽매이지 않았다면,
더욱 날카로운 감수성을 지닐 수 있었을 걸세.
내가 상상력을 동원하여 자연과 예술의 세계에 대해 여러 가지로 설명해 줄 때,
그는 진부한 용어를 들고 나와 그 한 마디로 문제가 해결된 듯이 여긴다네.
그럴 때 나는 몹시 안타깝다네.
6월 16일
그렇다네.
나는 다만 한 사람의 나그네.
이 지상의 한 순례자일세.
자네들은 그 이상의 존재일까?
6월 18일
어디로 갈 작정이냐구?
자네에게만 살짝 알려 주지.
앞으로 2주일 동안은 이 곳에 있어야만 하네.
그 뒤엔 XX광산을 찾아가야지,
하고 나 자신을 속이고 있었는데 사실인즉 그건 구실에 지나지 않네.
나는 다만 로테 곁으로 다시 가고 싶은 걸세.
그게 내 마음의 전부야. 나는 그런 나 자신의 마음을 맘껏 비웃고 있네.
그러나 결국은 내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라 줄 수밖에 없네.
7월 29일
모든 것이 그것으로 족할 텐데, 내가 그녀의 남편이라면!
아, 저를 만드신 하느님,
당신께서 그런 기쁨을 제게 내려 주셨더라면 저는 평생토록 끊임없이 기도를 올렸을 것입니다.
당신께 항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저의 이 눈물을 용서하소서. 이 덧없는 소망을 용서하소서.
그녀가 내 아내라면!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그녀를 내 품에 껴안을 수 있다면.
아아, 빌헬름이여,
알베르트와 결혼하기보다는 나와 결혼하는 것이 더 행복해질 수 있었던 걸세.
알베르트는 그녀의 마음 속의 소망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인물이 못 되네.
사물에 대한 감각에 모종의 결함이-이건 자네 좋을 대로 해석하게나-있네.
예를 들면, 마음에 드는 책을 같이 읽고 있다가 내 마음과 로테의 마음이
서로 공감하여 하나로 합쳐지는 그런 대목에서 그의 심장은 끄떡도 하지 않네.
로테와 내가 약속이라도 한 듯 절로 감탄의 소리를 내는 경우에도 역시 마찬가지라네.
사랑하는 빌헬름!
그러나 그는 로테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네.
그만한 사랑이라면 어떠한 보답이라도 받을 만한 가치가 있지!
반갑지 않은 손님이 와서 방해를 당했네.
눈물은 말라 버리고 마음이 몹시 산란하네. 잘 있게나, 빌헬름.
8월 4일
이런 꼴을 당하는 것은 나만이 아닐세.
인간은 누구나 희망에 속고 기대에 배반당하는 거지.
보리수 아래에 살고 있는 그 마음씨 고운 부인을 찾아가 보았네.
큰아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달려나왔네.
그 소리에 이끌리어 그 아이의 어머니도 나왔는데, 전과는 달리 기운이 없어 보였네.
그녀가 한 첫마디는 이랬다네.
"아이구, 선생님이시군요. 우리 한스가 죽었어요"
그 막내동이 얘기였네. 나는 그만 말문이 막혔네.
"그리고 바깥양반도" 하고 그녀는 말했네.
"스위스에서 돌아오긴 했지만, 빈털터리였어요.오는 도중에 열병에 걸려,
친절하신 분들이 돌봐 주지 않았더라면 구걸을 하며 올 뻔했답니다"
나는 할말을 잃고 아이의 손에 돈 몇 푼을 쥐어 주었을 뿐일세.
그 어머니가 사과 몇 알을 주기에 그것을 받아들고, 나는 슬픈 추억의 장소를 떠났네.
8월 21일
내 마음은 손바닥을 뒤집듯이 잘도 변한다네.
어떤 때는 날이 밝아 오는 것같이, 인생의 즐거움이 다시 찾아올 것 같은 마음이 든다네,
아아! 그러나 그것은 다만 한 순간에 지나지 않네.
아련한 꿈속 같은 기분에 잠겨 있을 때
<만일 알베르트가 죽는다면?>하는 생각이 떠오르는 것을 억제할 수가 없다네.
그렇게 되면 아마도 내가......그리고 고녀가......그리고......
이런 공상을 끝없이 추적해 나가다가 마침내 심연의 일보 직전까지 가는 걸세.
그랬다가는 몸서리를 치고 뒤로 몰러선다네.
성문을 지나 로테를 무도회에 데리고 가기 위하여
처음으로 마차로 지나간 그길을 걸어가 보니,
참으로 많아 변했더군! 모든 것이 다 사라져 버렸어!
지난날의 그 모습은 흔적도 없고, 그 때의 그 감정은 자취조차 없네.
일찍이 전성기를 자랑한 영주가 임종하면서 사랑하는 아들에게 물려주었던
견고하고 호화로운 성곽이 완전히 잿더미가 되어 버린
폐허에서 망령이 되어 돌아 다니는 기분일세.
9월 3일
가끔 가다 나는 이해할 수가 없어지네.
내가 그녀를 이토록 깊이, 이토록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이 그녀를 사랑할 수가 있으며,
그 사랑이 용납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말일세,
나에게는 그녀 이외의 세계는 없네.
그녀 이외에는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단 말일세.
자연의 계절이 가을로 접어드는 데 따라서
내 마음도, 또 내 주변도 가을이 되어 가네.
나라는 나무의 잎은 누렇게 물들고,
내 주변의 나뭇잎들은 벌써 떨어져 버렸네.
언젠가 어느 농가에서 머슴살이하던 집에서 쫓겨났다고들 하는데,
그 이상의 소식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었네.
그런데 어제 다른 마을로 가는 도중에 우연히 그 청년을 만났네.
말을 걸었더니 청년은 사정 이야기를 해 주었는데,
그것을 듣고 나는 거듭거듭 감동하였네.
자네에게 그 이야기를 하면 자네도 곧, 과연 그럴 만하구나 싶어질 것일세.
그러나 내가 무엇 때문에 그러한 이야기를 자네에게 하려는 거지?
어째서 나는 나를 불안하게 하고 슬프게 하는 일을
내 가슴 속에만 간직해 두지 못하는 걸까?
어째서 자네 마음까지 어둡게 만드는 걸까?
어째서 언제나 자네가 나를 측은해 하고 책망할 기회를 주는 걸까?
아마 이것도 내가 타고난 운명인가 봐!
처음에 그는 잔잔한 슬픔을 드러내 보이며 내 물음에 대답했네.
얼마간 머뭇거리는 기색이 엿보였지.
그러나 그것도 처음에만 잠깐 그랬을 뿐,
이윽고 자기와 나와의 관계를 새삼스레 깨닫기라도 한 것처럼,
탁 터놓고 자신의 과오를 고백하고는 불행한 신세를 하소연하는 것이었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그대로 자네에게 들려 주고, 자네의 판단을 들었으면 싶네.
그는 고백하였네. 아니, 고백하였다기 보다는
추억에 따르는 행복감과 쾌감에 젖은 듯한 어조로 이야기를 하였네.
여주인에 대한 정열은 날이 갈수록 더해 가서,
나중엔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이 표현에 의하면 머리를 어디로 돌려야 할는지조차도 모르게 되어 버렸다는 걸세.
먹을 수도 마실수도 잠을 자 수도 없게 되었으며, 목구멍도 막혀 버렸다는 걸세.
해서는 안 될 짓을 하고, 시키는 일은 잊어버리는 등,
마치 도깨비에 홀린 것같이 되었는데.
마침내 어느날, 그 여주인이 2층방에 있는 것을 알고 뒤따라 올라갔다는 걸세.
저도 모르게 그리로 이끌려 올라간 셈이지.
그녀가 그이 소망을 들어 주지 않았으므로, 그는 폭력으로 그녀를 정복하려 했다네......
어째서 그렇게 되었는지 자신도 알 수가 없다,
하느님도 증인이 되어 주실 것이다,
그녀에 대한 자기의 소망은 언제나 진지한 것이었다,
진심으로 바랐던 것은 다만 그녀와 결혼해서 한평생 같이 살아가는 일이었다......
이렇게 얼마 동안 이야기를 하더니 청년은 주춤거리기 시작했네.
아직 말하고 싶은 것이더 있기는 한데,
시원스럽게 털어놓기가 난감한 듯한 기색이었네.
드디어 그는 머뭇거리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고백하였네.
여주인은 자기가 얼마쯤 허물없이 대하는 것을 용납해 주었으며
어느 정도의 접근은 인정해 주었다는 걸세.....
그 이야기를 하면서 그는 두세 번 중단했었는데, 이윽고 열심히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네.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은 여주인을 나쁜 여자로 몰기 위해서가 아니다,
자기는 그녀를 전과 다름없이 사랑하며 존경하고 있다,
이런 소리는 여태껏 한 번도 입밖에 낸 적이 없다,
당신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건
내가 도리를 모르는 인간이 아니라는 걸 알아 주기 바라서이다, 하는 것이었네.
친구여, 여기서 나는 또다시 입버릇처럼 하는 소리를 되풀이 하겠네.
자네 앞에 그 청년을 세워 보고 싶네!
그가 내 앞에 서 있었던 꼭 그대로,
그리고 지금도 내 눈앞에 서 있는 모습 그대로 말일세.
자네에게 모든 것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리하여 내가 얼마나 그의 운명에 동정하고 있으며,
또 동정하지 않을 수 없는가 하는 것을 자네가 알아 주었으면 싶은 걸세,
그러나 이제 그만둠세. 자네는 내 운명도 알고 있으며,
나라는 인간 자체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내가 어째서 모든 불행한 인간, 그 중에서도 특히
이 불행한 청년에게 이끌리게 되었는지 자넨 너무나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말일세.
이 편지를 다시 읽어 보았더니, 이야기의 결말을 빼먹어 버렸군그래.
하긴 자네라면 쉬 짐작할 수 있을 테지.
여주인은 자기 몸을 지키기 위해 오빠라는 사람은 전부터 그 청년을 미워하고 있었으며,
그를 그 집에서 쫓아내려 하고 있었다네.
누이동생이 재혼을 하면 자기 아이들에게 돌아올 유산이 줄어들게 될 것을 두려워했던 거지.
누이동생에게는 아이가 없었으므로 그 유산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던 걸세.
그는 청년을 당장에 내쫓고 왁자하게 소문을 퍼뜨렸으므로,
여주인으로서는 설령 그럴 생각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 청년을 집에 들일 수가 없어져 버린 거야.
지금은 다른 고용인을 썼는데, 그 고용인과의 관계로 해서도 오빠와 사이가 틀어졌다는군.
게다가 마음사람들은 여주인이 틀림없이 그 고용인과 결혼할 것이라고들 말하고 있는데,
청년은 목숨을 걸고 그걸 막을 결심이라고 말했네.
지금가지 한 이약에 과장은 없네. 미화하지도 않았네.
오히려 가능한 한 덤덤하게 이야기한 셈일세.
게다가 세속적이고 상투적인 말들을 씀으로써 딱딱하게 된 느낌이 없지 않네.
다시 말해 이 사랑, 이 진실, 이 정열은 결코 문학적 창작이 아니란 말이세.
이건 살아 있는 걸세.
우리가 교양이 없다느니 상스럽다느니 하고
말하는 계층의 사람들 사이에 그야말로 순수한 형태로 살아 있단 말일세.
그런데 우리네 소위 교양있는 인간들은 교양으로 인해 왜곡되고 무능하게까지 되어 버렸네!
부디 이 이야기를 진지한 망음으로 읽어 주기 바라네.
이 이야기를 쓰다 보니, 오늘은 마음이 차분해졌네.
글씨만 보아도 알겠지? 황망하게 휘갈긴 여느 때의 글씨와는 다르지 않은가.
읽은 다음에 생각해 주게, 이건 자네 친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것을.
맞았어, 이건 내 신상에 일어났던 일일세.
아니, 앞으로 일어나게 될 일이야.
나는 이 가엾고 불행한 청년에 비하면 절반도 결단력이 없네.
비교하기 조차도 면구스러울 지경일세.
9월 5일
로테는 일 관계로 시골에 가 있는 남편 앞으로 편지를 썼네.
그 서두는 이러했네.
<사랑하는 이여, 될 수록 빨리 돌아와 주세요.
무한한기쁨과 더불어 그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때 한 친구가 찾아와서,
알베르트는 일의 형편상 빨리 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네.
편지는 저녁때까지 그대로 놓여 있었기 때문에 내 눈에 띄었다네.
나는 그걸 읽고 미소를 지었네.
왜 웃느냐고 로테가 물었네.
"상상력이란 하느님이 내려주신 선물이군요"하고 나는 큰 소리로 말했네.
"나는 잠시 이것을 내 앞으로 쓴 편지라고 상상해 보았거든요"
로테는 입을 다물어 버렸네.
기분이 언짢은 모양이었네. 나도 입을 다물고 말았네.
9월 6일
결단을 내리기가 무척 힘들었지만,
마침내 결심을 하고 로테와 처음으로 춤출 때 입었던 푸른 연미복을 벗어 버리기로 했네.
이젠 아주 낡아서 추레해졌거든.
그래서 깃이며 소매를 그것과 똑같이 해서 새로 한 벌 마췄네.
조끼와 바지도 그런 것과 같이 노란 빛으로 했지.
그런데 어쩐지 아직도 옷이 몸에 붙지를 않네.
하지만 날이감에 따라 차차 마음에 들게 되겠지.
9월 12일
로테는 알베르트를 마중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서 며칠 동안 집에 없었네.
그런데 오늘 찾아가니, 로테가 나를 맞이해 주었네.
나는 기쁨에 넘쳐서 그녀의 손에 입을 맞췄지.
카나리아 한 마리가 경대 위에서 로테의 어깨로 날아와 앉았네.
"새로운 친구예요"하고 그녀는 새를 자기 손바닥 위에 앉혔네.
"아이들을 위해 갖고 왔지요. 여간 귀엽지 않아요.
이것 보세요! 빵을 주면 날개를 파닥거리면서 얌전히 쪼아먹어요.
저에게 키스도 해요. 이것 보세요!"
그녀가 입술을 내밀자 새는 아주 귀엽게 고개를 갸우뚱하고
그녀의 감미로운 입술에 부리를 갖다 대는 것이었네.
자신이 누리고 있는 행복을 알기라도 하는 듯이 말일세.
"선생님께도 키스시켜 드릴께요"하고 로테는 나에게로 내밀었네.
그 조그만 부리가 로테의 입과 나의 입을 간접적으로 닿게 해 주었네.
그 감촉은 사랑에 넘치는 입김과도 같았고, 또 어떤 예감과도 같은 것이었네.
"이 키스에는"하고 나는 말했지.
"뭔가를 달라고 요구하는 듯한 느낌이 있군요. 먹이를 찾는 것 같아요.
응석을 부려도 아무것도 주지를 않으니까
허전한 기분으로 돌아가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랄까......"
"제 입으로 주는 모이를 잘 받아 먹는답니다"하고 로테는 말했네.
그리고 그녀는 빵조각을 입에 물고 새에게 먹여 주었네.
그 입술은 천진난만한 애정의 기쁨에 넘쳐서 미소짓고 있었네.
나는 얼굴을 돌렸네. 그녀는 그런 짓을 하지 말았어야 했네!
그런 그림과 같은 광경, 천국과 같은 청순하고 복된 정경을 보면,
내 상상력은 자극을 받지 않을 수 없거든.
생활에 대한 무관심으로 일껏 잠든 내 마음을 다시금 일깨워 놓게 된다 이 말일세.
그렇다고 로테가 못할 짓을 한 건 아닐세.
그녀는 그토록 나를 믿고 있는 거야!
내가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를 잘 알고 있으면서 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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