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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 괴테 7.

오늘의 쉼터 2011. 5. 6. 20:44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 괴테 7.

 


만일 내 말이 틀렸다면, 나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앞으로 10년 동안
지금 매여 있는 이 노예선 속에서 뼈가 닳도록 일하겠네.
게다가 이 곳에서 서로 곁눈질을 하면서 눈치를 보고 있는
비루한 인간들의 한심스러운 그 비참하고 따분함.
서로 한 발짝이라도 먼저 기어 올라가려고 쉴새없이 눈을 번득이고 있는 출세욕.
서글픈 집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사람들.

가령 여기에 한 여인이 있다고 치세.
그녀는 누구한테나 자기네 가문과 영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그녀를 잘 모르는 사람은 그 이야기를 듣고, 어리석은 여자로군,
대단찮은 가문과 영지를 내 세우고 다니다니,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걸세.
그러나 사실 그 여인은 이 근처 태생으로 서기의 딸에 지나지 않는다네.
이렇게 스스로 망신을 자초하는 분별이 없는 족속을 나는 이해할 수가 없네.
날이 갈수록 더욱 절실히 느끼고 있는 일이지만,

친구여, 자신의 척도로 남을 판단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 일세.
나는 나 자신의 일만으로도 힘에 벅차고 가슴 속에 이토록
폭풍우가 휘 몰아치고 있으니, 남의 일에는 참견하고 싶지도 않네.
다만 나로 하여금 나의 길을 갈 수 있도록 해 달라는 것뿐일세.
무엇보다도 비위에 거슬리는 것은 숙명적인 그 시민근성일세.
물론 나도 계급의 차별이 필요하다는 사실과
나 자신이 그것으로 이익을 보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네.
다만 내가 이 지상에서 지극히 미미한 기쁨이나 또는 행복을 맛볼 수 있게 된 때에
그런 것이 들어서 방해를 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다는 것일세.

요즘 나는 산책길에서 B라는 아가씨를 만나 서로 알고 지내게 되었네.
애교있는 아가씨로, 딱딱한 격식을 차리는 생활 속에 묻혀 지내면서도
선천적인 순박성을 풍부하게 지니고 있네.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우리는 서로 마음이 통해서,
작별할 때 내가 <댁으로 한 번 찾아가도 괜찮겠습니까?>했더니,
그녀는 아무 거리낌 없이 승낙을 하는 것이었네.
나는 그녀를 찾아갈 적당한 때가 오기를 기다리느라고 조바심이 날 지경이었다네.
그 아가씨는 이 고장 태생이 아니고 아주머니 뻘 되는 친척집에서 묵고 있는 중이라네.
그 나이 많은 부인은 인상이 그다지 좋지 못했네.
나는 그 부인에게 신경을 써서 이야기도 주로 그녀와 나누었는데,
반 시간도 되기 전에 사정을 대충 파악할 수 있었네.
사정이란 나중에 아가씨가 나에게 털어놓은 것으로,
그 부인은 그 나이에 만사가 여의치 못하다는 걸세.
이렇다할 만한 재산도 없고 재능도 없으며,
조상의 족보 이외에는 의지할 만한 것이 없다는 걸세.
그녀를 보호해 주는 것은 자신이 몸을 담고 있는 계급뿐이요,
낙이라고는 2층 창문으로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일 정도라네.

젊었을 적에는 제법 미인이었던 모양으로 마음내키는 대로 즐기며 지냈다는데,
변덕스러운 성격 때문에 여러 명의 젊은이들을 괴롭혔다는 걸세.
한창때를 지난 후에는 어떤 나이 많은 장교와 동거생활을 했는데,
그의 사랑을 받으며 얌전히 지냈다네.
그 장교는 상당한 생활비를 제공하며
그녀의 40대 반려자로 지내다가 얼마 후에 죽었다네.
지금 그녀는 50대로 의지할 곳도 없는 신세인데,
마침 상냥한 조카딸이 있어 그녀를 돌보아 주며 여생을 보내는 모양이었네.

1772년 1월 8일
한심한 무리들일세.
정신은 온통 격식에만 사로잡혀서 자나깨나 머릿속을 꽉 메우고 있는 생각은,
어떻게 하면 식탁에서 한 자리라도 더 상석에 앉을 수 있을까, 하는 걸세!
달리 할 일이 없는 것도 아닐세.
할 일이 없기는커녕 태산같이 쌓여 있는 실정이지.
사소한 일에 신경을 쓰느라고 중요한 일이 제대로 진척되지 않는 걸세.
지난주에는 썰매놀이를 갔었는데,
거기서 또 말썽이 생겨서 모처럼의 즐거움을 잡쳐 버리고 말았네.

어리석은 녀석들일세.
원래 지위 같은 건 문제가 아니고, 가장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자가
최고의 역할을 하게 되는 일은 존처럼 없는 법인데, 그런 것을 알지 못하는 걸세.
대신들의 뜻에 따라 조종되는 왕이 그 얼마나 많으며,
또 비서관들의 뜻대로 움직이는 대신들이 그 얼마나 많은가!
그런 경우, 누가 제일이란 말인가? 나더러 말하라면,
다른 사람들의 의중을 꿰뚫어보고, 자신의 정열과 능력을,
자기 계획을 성취하기 위하여
구사 할 수 있는 역량이나 지략을 지니고 있는 인간이라 하겠네.

1월 20일
사랑하는 로테,
당신에게 이 글을 쓰지 않고는 베길 수가 없습니다.
나는 지금 시골 농가의 조그마한 방에 있습니다.
휘몰아치는 눈보라 때문에 이리로 피난을 온 것입니다.
그 서글픈 둥지와도 같은 D시에서 나와 인연이 없는 사람들,
내 망음에 전혀 아무런 연관도 없는 사람들 틈을 돌아다니고 있었을 때에는,
당신에게 편지를 쓸 만한 마음의 여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오두막집에 혼자 적막하게 갇혀
눈보라가 펑펑 쏟아지며 창문을 세차게 흔드는 속에서,
내가 무엇보다도 먼저 생각한 것은 당신이었습니다.
이 집에 들어서는 순간, 당신의 모습, 당신의 추억이,
아아, 로테! 순결하고 따뜻하게 나를 엄습했습니다.
행복한 순간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아무것도 없습니다!
말하자면 나는 요지경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난장이와 조랑말들이 내 눈앞에서
바삐 돌아가며 움직이는 것을 보고 자신에게 물어 봅니다.
혹시 착각이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나도 글들과 같이 연기를 하고 있으면서,
아니, 꼭두각시처럼 조종을 당하고 있으면서,
때때로 곁에 있는 연기자의 나무손을 잡았다가는 소스라치게 놀라곤 합니다.

밤이 되면, 내일은 해가 뜨는 것을 바라보며 즐기리라 결심하지만,
막상 아침이 되면 침대에 그대로 누워 있는 것입니다.
낮에는 또 낮대로, 오늘 저녁이 되면 방 안에 그대로 틀어박혀 있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일어나며, 무엇 때문에 잠자리를 들게 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내 생명을 발효시켜 주고 있던 효모가 없어져 버렸습니다.
전에는 마음을 약동케 하는 것이 있어서 밤이 깊어도 졸음을 느끼지 못했고,
아침이 되면 퍼뜩 잠에서 깨어나곤 했습니다만
그런 것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겁니다.

참으로 여성다운 여성을 이 고장에서 한 사람 발견했습니다.
B라는 아가씨로, 당신을 닮은 여자입니다.
혹시 누군가가 당신을 닮을 수 있다고 한다면 말입니다.
<어머!> 하고 당신은 말하겠죠.<비행기를 잘도 태우시는군요>.
아닌게 아니라 그것도 전혀 틀린 말은 아닙니다.
얼마 전부터 나는 남의 비위를 꽤 잘 맞추게 되었습니다.
제담도 곧잘 한답니다.
그래서 이 곳 부인네들은 나만큼 칭찬을 잘 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합니다
(그리고 거짓말도 잘 한다는 말을 덧붙여야 하겠지요.
아무래도 거짓말을 하지 않고는 그렇게 칭찬을 잘 할 수가 없으니까요.
그렇지 않습니까).

B양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던 참이었는데,
그 아가씨는 풍요로운 영혼의 소유자로,
그녀의 푸른 눈이 그것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아가씨는 자기의 신분이 자신의 소망을
하나도 이루어 주지 못하기 때문에 그 신분을 짐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녀는 또 언제나 시끄러운 것으로부터 도피하려 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곧잘 몇 시간씩 순수한 행복에 충만한
전원생활을 상상하면서 시간을 보내곤 합니다.
아아,
그리고 당신에 대한 생각도 물론 빼놓을 수 없지요!
그녀가 당신에 대하여 충심으로 경의를 표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의무적인 것이 아니라, 자진해서 그렇게 경의를 표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언제나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며,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아아, 그 그리운, 그 정다운 방에서 당신 발 아래 앉아 있을 수 있다면
우리의 그 아이들이 모두 내 주위를 깡총거리며 돌아다녀 주었으면.
아이들이 너무 떠들어서 당신을 귀찮게 하면,
나는 무서운 옛날 이야기를 꺼내 애들을 내 주위에 모을 텐데.
태양은 찬연한 설경 저 너머로 장려하게 넘어가고 있습니다.
눈보라도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나는.......... 또 다시 돌아가서 우리 속에 감금되어야만 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알베르트 씨는 당신 댁에 있는지요?
어떻게 지내고 있습니까?
주여, 이런 질문을 용서하옵소서!

2월 8일
1주일 내내 아주 고약한 날씨가 계속되고 있네.
그러나 나로서는 오히려 고마운 기분일세.
왜냐하면 내가 이 곳에 온 이후로 아무리 날씨가 좋은 날이라도,
딴 사람으로 인해 그런 날씨를 잡쳐 버리거나
기분이 언짢아지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일세.
그래서 비가 내리거나 눈보라가 치거나,
아니면 길바닥이 얼어붙거나 눈이 녹아서 진흙탕이 되거나 하면 나는 한시름 놓는다네.
<집에 있는 게 바깥 세계에 나가는 것보다 오히려 낫지.
어쩌면 그 반대일 수도 있으련만. 아무튼 잘 된 거야>하고 말일세.
아침에 해가 떠오르고 날씨가 좋을 듯하면,
나는 언제나 이렇게 외치지 않을 수 없네.
<자, 오늘도 녀석들은
또 하늘이 내리신 은총을 저희들끼리 서로 빼앗으려고 악다구니들을 하겠군!>
무릇 그들이 서로 빼앗으려고 악다구니를 하지 않고 지낼 수 있을 만한 사물은 하나도 없지.
건강도 명성도 기쁨도 휴양도.
그것은 대체로 어리석음이나 무지, 좁은 도량 등이 그 원인인데,
그런 주제에 그들의 말에 의하면, 최선의 호의로써 남을 위해 그런다는 걸세.
때때로 나는 그들 앞에 무릎을 꿇고 부탁하고 싶어진다네.
제발 그렇게 미치광이들처럼 자신의 창자를 마구 휘젓는 짓은 하지 말아 달라고 말일세.

2월 17일
공사와 나는 더 이상 타협해 나갈 수 없을 것 같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사람일세.
그가 일을 처리하는 방식은 참으로 가소로와서, 나는 이의를 제기하기도 하지만,
내 나름대로의 판단에 따라 적당히 처리해 버리기도 한다네.
그것이 그의 비위를 건드릴 것은 당연하지.
그런 일로 해서 그는 최근에 나에 대한 불만을 궁정에 보고한 모양일세.
그 결과, 나는 장관으로부터 가볍긴 하지만 아무튼 질책을 받았네.
그래서 사표를 낼 결심을 했지.
그런 참에 장관으로부터 사신이 왔다네.
그 편지를 읽고 나는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그 고결하고 깊은 사려에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었네.
장관은 내가 너무나 감각적인 경향이 있음을 훈계한 다음,
활동성이라든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영향,
일을 하는 데 있어서의 철저성 등에 대하여 내가 지니고 있는
패기만만한 생각을 청년다운 기개로 높이 평가하고
그것인 참되게 활용되어 유효한 성과를 거둘 수 있도록 하라고 궈고해 주었네.
덕택에 1주일쯤은 용기를 얻고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네.
마음의 평화라는 것은 값진 걸세.
그것 자체가 하나의 기쁨이라고 할 수 있지.
친구여, 다만 이 아름답고 귀중한 보석이 쉬 부서지지만 않으면 좋으련만.

2월 20일
내 사랑하는 분들이여, 하느님이 당신들을 축복하고,
나에게는 내려질 수 없는 좋은 날들을 모두 당신들에게 베풀어 주기를 빕니다.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알베르트 씨,
당신이 나를 속인 것에 대하여.
나는 당신들이 결혼날짜를 알려 줄 것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날 나는 엄숙히 로테의 실루엣을 벽에서 떼어 내어,
그것을 다른 서류들 속에 넣어 둘 생각이었지요.
지금 당신들은 하나로 맺어졌고, 실루엣은 여전히 벽에 걸려 있습니다.
이제 그냥 놓아 두렵니다.
이대로 두어서 안 된다는 법은 없으니까요. 그렇습니다,
나는 당신들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당신에게는 누를 끼치는 일 없이, 로테의 마음 속에 있는 것입니다.
나는 그 자리를 유지해 나갈 것이며, 그러지 않고는 베길 수가 없습니다.
만일 로테가 나를 잊어버린다면 나는 미치고 말 것입니다.
알베르트 씨, 이 생각 속에는 지옥이 숨어 있습니다.
알베르트 씨, 안녕히 계십시오! 그리고 그대 천사여, 안녕!

3월 15일
불쾌한 일을 당했네.
이제 더 이상 이 곳에 있을 수 없네. 제기랄!
이 불쾌감은 보상할 길이 없네.
이렇게 된 것도 모두 자네들 책임일세.
나를 부추기고, 재촉하고, 졸라서,
마음이 내키지 않는 이 자리에 앉힌 것은 바로 자네들이니까 말일세.
이런 파국을 초래한 근원은 모두 나의 극단적인 사고방식에 있다고,
자네들은 이번에도 그렇게 말할 테니까,
나는 여기에 사건의 자초지총을 있는 그대로 간명하게 적겠네.

연대기의 기록자와 같은 필치로 말일세.
C백작이 나를 아껴 주고 돌보아 주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가 다 알고 있고,
자네에게도 벌써 몇 번인가 이야기했었지.
어제는 식사에 초대를 받아서 그 C백작 댁에 갔었다네.
저녁에는 그 집에서 상류사회 신사 숙녀들의 파티가 열리기로 되어있었는데,
나는 그것을 알지 못했고, 나와 같은 졸때기가
그런 모임에 동석할 수 없다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치 못했었네.
아무튼 나는 백작과 식사를 같이 하였고,
식 후에 홀 안을 왔다갔다 하면서 백작과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마침 들어온 B대령과도 대화를 나누었네.
그러는 사이에 파티 시간이 다가왔네.
그러나 나는 그걸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네.
근엄한 S부인이 남편과 더불어 들어왔네.
그들은 거위 같은 딸을 데리고 왔었는데,
그녀는 납작한 가슴에 근사한 코르셋으로 허리를 꽉 죄어붙인 아가씨일세.
이 세 사람은 걸어 들어가면서,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거만한 귀족적인 눈매와 콧구멍을 보여 주었네.
이런 족속들을 보면 그야말로 속이 메스꺼워지는터라,
나는 이를 계기로 그만 물러나와야겠다고 생각하고,
C백작이 그들과의 시시한 잡담에서 빠져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지.

마침 그 때 그 B양이 들어왔네.
이 아가씨를 만나면 언제나 조금은 기분이 밝아지므로,
나는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서 그녀의 의자 뒤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었지.
그러데 조금 지난 연후에야 비로소 깨달았는데,
B양은 나하고 이야기를 하면서도 여느 때와는 달리
뭔가 서먹서먹하고 난처한 듯한 태도더라 이 말일세.
나로서는 참으로 뜻밖이었네.
<이 여자도 다른 무리들과 마찬가진가>,
이런 생각을 하니 속이 터질 것 같아서 그만 물러나오려 했네.
그러나 나는 한동안 거기에 눌러 있었네.
그녀의 그런 태도가 나의 잘못된 느낌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고,
또 조금 있으면 그녀가 다정한 말 한마디쯤은 해주리라는 기대를 했기 때문이었다네.
그럭저럭하는 사이에 손님들이 그득히 모여들었네.
프란츠 1세의 대관식 무렵의 예복을 입은 F남작,
직책 관계상 귀족 칭호를 받고 있는 궁중 고문관 R과 귀가 어두운 그의 부인.
시대에 뒤떨어진 의상의 해진 부분을
요즘 유행하는 천으로 기운 초라한 옷차림의 J씨도 빠드릴 수 없지.
이러한 무리들이 줄을 이어 들이닥쳤네.

 

나는 안면이 있는 한두 사람에게 말을 건네었는데,
이상하게도 모두들 말수가 적었네.
왜들 이러는 거지, 하면서 나는 B양 쪽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네.
그래서 나는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 사이에 여자들이 홀 한구석에서 수군덕거리고,
그것이 남자들에게로 전파되었으며,
이윽고 S부인이 백작에게 이야기를 해서
(이것은 모두 나중에 B양이 나애게 이야기해 줘서 알았지),
마침내 백작이 나에게로 걸어왔네.
그리하여 그는 나를 창가로 데리고 가서는,
"자네도 알고 있겠지만"하고 말문을 열었네.
"우리네 신분상 관례는 아주 미묘하거든.
자네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 모두를 아무래도 못마땅한 모양일세.
나야 아무렇지도 않지만......"
"각하" 하고 나는 말을 가로막았네.
"대단히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벌써 깨달았어야만 할 일입니다.
각하께서는 저의 이러한 결례를 용서해 주실 줄 믿습니다.
아까부터 그만 물러가야지 물러가야지 하면서도,
미련스럽게 어물어물하다가 이렇게 됐습니다".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덧붙이고 나는 절을 하였네.
백작은 어떤 감회가 어린 동작으로 내 손을 잡았는데,
그것으로 모든 말을 대신하고 싶었던 모양일세
나는 그 고귀한 무리들 사이를 슬며시 빠져 나와서,
2륜마차를 타고 M으로 갔네.
그리하여 그 언덕 위에서 넘어가는 해를 바라보며, 호메로스를 펼치고,
오딧세우스가 돼지치기에게 대접을 받는 감동적인 대목을 읽었지. 흐뭇한 기분이었네.

해가 진 뒤에, 식사를 하러 시내로 돌아왔네.
레스토랑에는 아직 손님이 별로 없었네.
몇사람의 단골들이 구석자리에서 테이블보를 벗겨 놓고 주사위를 굴리고 있었네.
거기에 아델린이라는 고지식한 친구가 들어오더니,
모자를 벗고 나에게로 다가와서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건네었네.
"당신 화가 났겠군요?"
"뭐가요?"하고 나는 되물었지.
"백작이 당신을 파티에서 내쫓았다면서요?"
"파티 따위가 뭐 말라빠진 거요!" 하고 나는 말했지.
"밖에 나와서 시원한 바람을 쐬니까 기분이 상쾌해졌어요"
"그렇다면 다행이군요"하고 아델린은 말했네.
"당신이 대수롭쟎게 생각하니까 무엇보다도 다행이에요.
그런데 아무래도 불쾌한 건 벌써 어디를 가나 그 소문이 퍼져 있다는 사실이오"

그 소리를 들으니까 비로소 오늘 있었던 일이 충격적으로 되살아나더군.
<그렇다면 식사하러 왔다가
내 얼굴을 흘끔흘끔 보고 있던 녀석들은 모두 그 때문이었단 말인가!>
그렇게 생가갛니 분노가 치밀더군.
오늘은 어디를 가나 동정을 받는 신세가 되었네.
더구나 나를 시기하고 있던 녀석들이 의기양양해서,
<이제 깨달았겠지, 머리가 남보다 좀 뛰어나다고
신분이나 관례를 초월해도 좋은 것처럼 생각하는
거만한 사내가 어떤 꼴을 당하게 되는가를>하는 등
온갖 험담을 늘어놓고 있는 것을 들으면, 내 심장에 칼을 꽂고 싶은 심정일세.
<남들이 뭐라든 자기는 자기야. 무시해 버리면 그만 아닌가>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하찮은 건달들이 남의 약점을 잡고
이러쿵 저러쿵 지껄여 대는 소리를 꾹 참고 얌전히 듣고 있을 수 있는 인간이 있다면,
그런 사람의 얼굴을 한 번 보고 싶네.
아아, 그 험담들이 점혀 근거 없는 소리라면 못 들은 체해 버릴 수도 있으련만.

3월 16일
모든 것이 나를 화나게 하고 있네.
오늘 가로숫길에서 B양을 만났네.
우리가 일행에서 조금 떨어지게 되자,
나는 저번의 그녀의 태도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지 않을 수 없었네.

"어머나, 베르테르 씨"하고 그녀는 진정어린 목소리로 말했네.
"제가 불안스러워했던 것을 그런 식으로 해석하셨어요?
제 성질을 잘 아실 텐데요.
홀에 들어섰을 때부터 선생님 때문에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몰라요.
어떻게 되리라는 것을 빤히 알 수 있었거든요.
선생님께 귀띔을 할까 하고 몇 번이나 망설였는지 모른답니다.
S부인과 T부인은 선생님과 동석할 바에야 남편과 함께 퇴장하겠다고까지 했거든요.
그리고 백작으로서도 그 분들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지요.
그래서 일이 그 지경에 이른 거예요"

"그랬었나요?"하고 나는 충격을 감추며 반문했네.
그저께 아델린이 나에게 한 말이 그 순간에 열탕처럼 내 혈관 속을 소용돌이쳤네.
"저도 그 때부터 얼마나 가슴이 쓰라렸는지 몰라요"하고
다정스러운 그 여인은 눈물을 글썽거렸네.
나는 자제력을 잃고, 그녀의 발 아래 꿇어 엎드릴 듯이 몸을 구부렸네.
"분명히 말해 주십시오"하고 나는 외쳤네.
눈물이 그녀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네.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네.
그녀는 눈물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고, 그것을 닦으면서 이야기를 시작하였네.
"저의 아주머니를 아시지요?
그 분도 아세요? 베르테르 씨,
아주머니는 엊저녁에도 또 오늘 아침에도,
제가 선생님과 교제를 하는 데 대한 설교를 늘어놓으셨어요.
듣고 있을 수 밖에 없었어요.
선생님을 변호하려 했지만, 제가 생각한 것의 절반도 말을 할 수가 없었어요.
아주머니가 말도 못 하게 하는걸요"

그 한마디 한마디가 칼끝처럼 내 가슴을 찔렀네.
그녀는 그런 소리를 아예 하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은혜로운 일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던 거지.
그래서 그녀는 이야기를 더 계속하여, 이런 소문이 퍼질 것이라느니,
전부터 나를 비난하고 있던 사람들은 남들을 대할 때의 내 거만한 태도와
사람을 업신여기는 듯한 거동에 벌이 내렸다면서
고소하게 여기고 기뻐할 것이라느니 하는 소리들을,

빌헬름이여, 진심으로 동정어린 목소리로 들려 주었다네.
그 모든 이야기를 다 듣고 나는 허탈상태에 빠졌네.
지금도 미칠 것만 같네.
차라리 누군가가 면대해 놓고 나를 비난한다면,
그 놈의 가슴을 단도로 푹 찔러 버릴 수 있으련만.
피를 보면 얼마쯤 마음이 진정될 거야.
아아, 나는 백 번도 더 칼을 손에 쥐었네.
이 답답한 가슴에 바람구멍을 내고 싶었던 걸세.
좋은 혈통을 이어받은 말은 지나치게 흥분했을 때
본능적으로 혈관을 물어 뜯어 호흡을 진정시킨다고 하더군.
나도 그러고 싶어지네. 혈관을 절개함으로써 영원한 자유를 얻고 싶은 걸세.

3월 24일
나는 궁정에 사표를 제출하였네.
아마도 수리될 걸세. 미리 자네들의 허락을 받지 않은 점은 아무쪼록 용서하게나.
어차피 나는 이 고장을 떠날 수밖에 없으니까.
나를 만류하기 위해 자네들이 충고할 말도 알고 있네.
이 사실을 우리 어머니께 넌지시 좀 전해 주기 바라네.
나 자신을 나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으니,
내가 어머니께 힘이 되어 드리지 못하더라도 양해해 주십사고.
물론 어머니는 슬퍼하시겠지.
모처럼 아들이 추밀원 고문관이나 공사가 되기를 지향하며 발걸음을 내디뎠는데,
이렇게 중도이폐하고, 망아지는 마굿간으로 되돌아가게 된 셈이니까!
아무튼 이 문제에 대해선 자네들 좋을 대로 생각하게나.
내가 유임할 수 있었을 것이라든가,
유임했어야만 할 것이라든가 마음대로 말해도 괜찮지만,
아무튼 나는 떠나서 어디로 갈 거냐고 묻겠지?
이 고장에 XX공작이라는 분이 있는데.
나와 교제해 보고 싶은 생각이 있는 모양일세.
내 결심을 전해 듣고는 함께 자기의 영지로 가서
거기서 아름다운 봄을 같이 지내지 않겠느냐고 나를 초대해 주었다네.
나 하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행동해도 좋다는 약속도 해 주었고,
어느 정도 서로 이해하고 있는 터이기도 해서,
운을 하늘에 맡기고 그와 동행할 작정일세. <통지서 대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