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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 괴테 5.

오늘의 쉼터 2011. 5. 6. 20:10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 괴테 5.

 

 

8월 10일
어리석지만 않다면 나는 최고로 행복한 생활을 누릴 수 있을텐데......
한 인간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기 위하여,
지금 내가 처해 있는 환경만큼 갖가지 조건이 결합되어 있는 일은 별로 없을 걸세.
정녕 우리의 마음만이 우리의 행복을 만들어 내는 것일세.
나는 지금 단란한 가정의 한 식구가 되다시피 해서,
노인들로부터는 친아들처럼 사랑을 받고,
아이들로부터는 아버지처럼 흠모를 받으며, 또 로테로부터도!
그리고 성실한 알베르트,
그도 또한 변덕이나 무례한 언동으로 내 행복을 손상시키는 일은 결코 없다네.
그는 진심에서 우러나는 우정으로 나를 감싸 주고 있네.
그는 이 세상에서 로테 다음으로 나를 사랑해 주고 있다네!

빌헬름이여, 우리가 함께 산책을 하면서 로테에 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을
누가 옆에서 듣는다면 재미있을 걸세.
세상에서 우리 두 사람의 관계처럼 우스꽝스러운 것이 또 어디 있을까.
그걸 생각하면 나는 때때로 눈물이 핑 들곤 한다네.

어느 날, 알베르트는 로테의 훌륭하였셨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나에게 해 주었네.
그 임종의 병상에서 로테의 어머니는
집안 일과 아이들을 로테에게 맡긴다고 말했다는 걸세.
그 이후로 로테는 딴 사람이 된 것 같은 정신적인 자세로 살아 나갔으며,
집안 일에 대한 배려라든가 그 진지성은 진짜 어머니를 방불케 했고,
한순간도 쉬지 않고 바지런히 일하며 동생들을 보살폈는데,
그러면서도 언제나 쾌활하고 상냥한 성품을 그대로 유지해 왔다는 걸세.
그와 나란히 걸어가면서, 길가의 꽃을 꺾어 공들여 꽃다발을 만든 다음,
흘러가는 개울물에 그 꽃다발을 던지고 그것이 천천히 떠내려가는 것을 바라보았다네.

자네에게 이미 알렸는지 어쨌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데,
알베르트는 이 곳에 정주하여 궁정으로부터
상당한 급여가 지급되는 어떤 관직에 앉게 될 모양일세.
그는 궁정에서 꽤 호감을 사고 있는 더이거든,
일을 착실히 하고 부지런히 해 낸다는 점에서 그와 비견할 만한 자를 나는 본 적이 없네.

8월 12일
분명히 알베르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선량한 인간일세.
그런데 나는 어제 그와 더불어 한바탕 기묘한 논쟁을 벌렸네.
나는 작별인사를 하러 그의 집에 찾아갔었던 걸세.
말을 타고 산으로 여행을 하고 싶어졌었거든.
지금 이 편지도 여행지에서 쓰고 있는 것이라네.

그의 방 안을 이리저리 거닐고 있으려니까, 권총이 눈에 띄더군.
"저 권총을 좀 빌려 주시겠습니까? 여행중의 호신용으로 휴대하고 싶은데"
하고 나는 말했지
"좋도록 하세요"하고 그는 대답하였네.
"다만 총알을 장전하는 수고는 당신이 해야만 합니다.
우리 집에서는 그저 장신용으로 걸어 놓았을 뿐이니까요"

나는 권총 한 자루를 집어 내렸지. 알베르트는 말을 계속하였다네.
"지나치게 경계를 하다가 엉뚱한 사건이 벌어진 뒤로는,
이런 총기를 만지지 않기로 했지요"
내가 그 사연을 묻자
"시골에 있는 어느 친구 집에"하고
알베르트는 이야기를 시작하였네.

"석 달 정도 머물렀던 적이 있었지요,
나는 한 쌍의 소형 권총을 장전도 하지 않은 채 갖고 있었는데,
그래도 밤에는 아무 걱정없이 잘 잤답니다.
그런데 비가 내리던 어느 날 오후,
무심히 앉아 있노라니까 어찌된 영문인지,문득 강도가 언제 덮칠지도 모른다.
그러면 권총이 필요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 기분, 당신도 이해하겠지요?
그래서 나는 하인에게 권총을 내주며,
손질을 좀 하고 총알을 장전하라고 일렀어요.
그런데 그 하인이 하녀들과 장난을 치느라고 권총으로 위협하는 시늉을 하고 있는 중에
어쩌다가 그만 권총이 발사되었지 뭡니까.
총구 청소용 꽂을대가 꽃힌채 발사되었는데,
그 꽃을대가 하녀의 오른손 엄지 손가락에 발혀 엄지손가락이 박살이 나 버렸지요.
울고불고 소동이 벌어진데다가 나는 치료비까지 물어 줘야 했답니다.
그러뒤로 나는 총기에는 일제 총알을 장전하지 않고 놓아 두기로 했어요.
아무리 조심해 봤자 소용이 없어요.
위험이란 예측할 수 없는 것이거든요. 하긴......"

그러데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알베르트란 인물을 무척 좋아하지만,
그건<하긴......> 이런 말을 꺼내기 이전의 그에 한정되는 걸세.
어떤 일반적인 명제라 하더라도 예외가 있는 것은 뻔한 일 아닌가.
그러데 이 인물은 자기 말이 꼭 정론이 되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걸세.
약간 경솔한 말을 했다거나, 일반적인 말,
혹은 불확실한 발언을 했다 싶으면,
그는 먼저 한 말을 새로이 한정하기도 하고,
수정하기도 하며 한없이 늘어놓아서,
나중에는 어떤것이 본론인지 모르게 되어 버리곤 하는 걸세.

이번에도 그는 장황하게 파고들며 변론을 벌이는 것이었네.
결국 나는 그의 말에는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고,
엉뚱한 환상에 빠져 권총 부리를 내 오른쪽 눈 위의 이마에다 갖다 대었다네.
"저런!" 하면서 알베르트는 내 손에서 권총을 빼앗았네.
"이게 무슨 짓이오?"
"총알도 없는데 뭘 그러십니까!"하고 나는 말했지.
"총알이 들어 있지 않더라도, 이게 무슨 짓입니까.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가 없어요.
어떻게 인간이 자신을 쏠 정도로 어리석을 수가 있는지......
생각만 해도 불쾌해요"

"당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하고 나는 외쳤네.
"어떤 일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것은 어리석다,
그것은 현명하다, 그것은 좋다, 그것은 나쁘다,
이런 식으로 말을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모양인데,
그렇게 말함으로서 어떤 행위의 내면적인 사정을 다 헤아릴 수 있나요?
어째서 그러한 행위가 행하여졌겠는가,
어째서 행하여지지 않을 수 없었는가,
그 원인을 명확히 설명할 수 있나요?
만일 그것이 가능하다면 당신들도 그렇게 성급한 판단은 내리지 않을 겁니다"

"당신도 시인하겠지요"하고 알베르트는 말했네.
"어떤 종류의 행위는, 그것이 어떤 동기에서 행하여지든간에
죄악이라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나는 어깨를 움츠리며 그의 말에 동의했네.
"그렇지만 말입니다"하고 나는 응수했지.
"거기에도 약간의 예의는 있어요.
도둑질이 죄악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요.
그러나 자기 자신과 가족들이 당장 굶어 죽게 되었을 때,
아사를 면하기 위하여 도둑직을 했다면, 그자는 동정을 받아야 할까요?
아니면 벌을 받아야 할까요?
정당한 분노가 치받치어 부정한 아내와 그녀의 비열한 유혹자를 살해한 남편,
환희의 한때에 이성을 잃고 억누를 길 없는 사랑의 환락에 몸을 내맡긴 소녀,
이들을 향해 누가 냉혈적인 기준마저도 감동하여 형벌을 유보하지 않습니까?"
"그건 별문제지요"하고 알베르트는 대답하였네.
"걱정에 사로잡혀 이성을 잃는 인간은 사려분별이 전혀 없어져 있기 때문에,
술취한 사람이나 미친 사람과 같이 간주되니까요"

 

 

아아, 당신네 이성적인 사람들이여!"
하고 나는 미소를 지으며 외쳤네
."걱정! 술취한 사람! 미친 사람!
당신들은 그렇게 말하며 마치 남의 일처럼 태연하군요.
훌륭한 도덕군자들입니다.
술취한 사람을 나무라고, 정신착란자를 외면하며,
성직자들처럼 그 옆을 지나서는, 바리세인들처럼
자기가 그러한 인간 가운데 하나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하느님께 감사하겠지요.
나는 술취한 적이 여러 번 있습니다.
격정에 사로잡혀 거의 제정신을 잃은 적도 있었지요.
그러나 나는 어느 경우에 있어서나 후회하지 않습니다.
위대한 업적,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던 일을 성취할 비범한 인간들은
옛날부터 모두 주정뱅이라느니 미치광이라느니 하는
지탄을 받았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자유롭고 고결하며 남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일을 어떤 사람이 할라치면,
그 일하고 있는 도중에 거의 예외없이,
저 놈은 미쳤어, 저 놈은 바보야, 하고 매도를 하니,
이건 정말 참기 어려운 일입니다.
부끄러운 줄을 아시오.
정신이 말짱한 당신네 들! 부끄러운 줄을 아시오,
당신네 현명한 사람들이여!"

"그것 역시 당신의 편력된 생각에서 나오는 말이지요"하고 알베르트는 말했네.
"당신은 무엇이나 지나치게 과장을 합니다.
적어도 이번의 경우, 당신의 논리는 부당해요.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건 자살인데,
그것을 당신은 위대한 행위에 비하고 있으니 당치않은 일이지요.
자살은 아무래도 의지가 박약한 행위로 밖에는 볼 수 없어요.
왜냐하면, 고통스러운 인생을 꿋꿋이 견디며 살아 나가기보다는
죽어 버리는 편이 편하다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요"

나는 그만 논쟁을 끝맺으려 했네.
남은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데 시덥쟎은 상투적인 문구를 들고 나오니,
그것처럼 못 견딜 노릇이 없거든.
그런데 그의 이런 말은 전에도 여러 차례 들었고,
나도 몇 번 화를 낸 일이 있으므로,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약간 쾌활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네.

"의지가 박약한 행위라뇨, 제발 겉만을 보고 오판하지 마세요.
폭군의 지독한 압정에 시달리고 있던 민족이
침내 궐기하여 그 압정의 쇠사슬을 끊었을 때,
그것을 당신은 의지가 박약한 행위라 할 수 있나요?
집에 불이 난 것을 보고 놀라서 온몸에 힘이 불끈 솟고,
여느 때에는 움직일 수조차 없는 무거운 물건을 번쩍 드는 사람이라든가,
또는 모욕을 당하고 격분해서 여섯 사람을 상대로 맞싸워 그들을 때려눕히는 사람,
그러한 사람들을 의지가 박약한 인간이라고 해야만 옳단 말입니까?
그리고 또 긴장하고 노력하는 것이 꿋꿋한 행위라면
지나친 긴장이 어째서 그 반대가 되어야만 한단 말입니까?"

알베르트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말했네.
"기분 나빠하지 말아요.
방금 당신이 든 예는 이 경우에는 전혀 합당치 않은 것으로 생각되는군요"
"그럴지도 모르지요"하고 나는 말했네.
"나는 여러 차례 비난을 받은 바 있어요,
나의 연상이 때때로 엉뚱한 곳으로 뻗어 나간다고 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논법으로 내 의견을 말해 보겠습니다.
보통의 경우라면 즐거워야 할 인생을
포기해 버리려고 결심하는 사람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그것을 다른 방법으로 상상할 수가 없는지, 우리 한번 시도해 봅시다.
요컨대, 우리는 공감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어떤 사항에 대한 이야기를 할 만한 자격이 있는 것이니까요.
인간의 본성에는 어떤 하계가 있는 겁니다.
기쁨이나 슬픔, 고통 등도 어느 일정한 한도까지는 견뎌 낼 수가 있지만,
그 한도를 넘어서면 파멸하고 맙니다.
이건 사람이 약하다든가 굳세다든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통을 어느 한도까지 견뎌 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지요.
정신적인 면에서나 육체적인 면에서나 말입니다.
그런데 나로서는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게 있어요.
당한 것은, 악성 열병으로 죽는 인간을
비겁한 자라 함이 부당한 것과 마찬가지가 아니냐 이겁니다"

"그건 궤변입니다! 말도 안 되는 궤변입니다!
알베르트가 외쳤네.
"당신이 생각하듯이 그런 궤변은 아닙니다"하고 나는 응수를 했지.
"이런 것은 당신도 시인하리라 믿어요.
가령 육체가 몹시 병들고, 기력도 기능도 쇠약해져 버려서
어떠한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도 정상적인 삶의 영위가 불가능할 때,
우리는 그걸 죽을 병이라 함이 마땅하겠지요.
그런데 이것을 정신에 적용해 봅시다.
생각을 외곬으로만 모이며 끙끙 앓는 인간을 잘 관찰해 보세요.
갖가지 인상이 그에게 작용하여 관념이 고정되고,
마침내 격정이 더욱 항진되어서 냉철한 사고능력이 상실된 끝에 그는 파멸하고 마는 겁니다.
냉철하고 이성적인 인간이 이 불행한 인간의 상태를 위에서 내려다 보며,
이래라저래라 말을 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는 거예요.
건강한 인간이 환자의 병상 곁에 서 있다 하더라도,
자기 힘을 그 만분의 일도 환자에게 주입시켜 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지요"

내 말은 알베르트에게는 너무나 일반적인 것이었네.
그래서 나는 얼마 전에 연못에 투신자살한 한 소녀의 일을 그에게 일깨워 준 다음,
그 이야기를 그에게 되풀이해 주었지.
"착한 아가씨였지요.
일정한 집안 일을 돌보며, 지극히 좁은 세계에서 자라났답니다.
낙이라고는 조금씩 저축해서 장만한 나들이옷을 입고
일요일이면 같은 또래의 친구들과 어울려 교외로 산책을 나간다거나,
큰 축제일에 무도회에 참석한다거나,
남들의 평판이며 뒷 소문 이야기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웃집 처녀들과 하염없이 수다를 떤다거나 하는 따위가 고작 이었죠.
그런데 이 아가씨의 열정적인 성질이 마침내 좀더 깊은 요구를 품기 시작하였는데,
남자들이 치켜 주는 바람에 그런 요구가 더욱 부풀어올라
여태까지 낙으로 여겨 왔던 일들이 차츰 시들해졌던 겁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한 남자를 만나게 되었지요.
여태껏 알지 못했던 감정에 정신없이 끌려들어서,
자기의 모든 희망을 그 남자에게 걸고 주위의 세계를 잊어버렸지요.
자기에게 유일한 존재인 그 남자 이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 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 것도 느끼지 않게 된 상태로,
오로지 유일한 존재인 그 남자만을 그리워하게 된 것입니다.
일찌기 바람이 나서 부질없는 쾌락을 즐기는 따위의 해독에 물든 적이 없는 아가씨였으므로,
그녀의 소망은 오직 그의 아내가 되는 것이었지요.
지금까지 누려 보지 못했던 모든 행복을 동경해 오던 일체의 기쁨을
그와의 영원한 결합 속에서 찾아 내려 한 것입니다.
희망의 실현을 보증하는 거듭된 약속,
그녀의 욕정을 더욱더 향진시키는 그의 대담한 애무,
이러한 것들이 그녀의 영혼을 송두리째 사로잡아 버렸지요.
황홀경 속에서 그녀는 온갖 기쁨을 예감하며,
극도로 긴장된 심경으로 마침내 자기의 소망을 품에 안으려고 두 팔을 벌렸답니다.
그때 애인은 그녀를 버린 것입니다.
그녀는 넋을 잃고 깊은 연못 앞에 멈춰 섭니다.
사방은 온통 암흑이요,
아무런 목적도, 아무런 위안도, 아무런 희망도 없습니다.
오직 그 남자 속에서만 자신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는데,
그 사람에게 버림을 받았으니까요. 자기 눈앞에 있는 넓은 세계도 보이지 않고,
잃어버린 보물을 보상해 줄는지도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도 눈앞에 들어오지 않는 겁니다.
전세계로부터 버림을 받고, 혼자 외토리가 된 자신을 느낍니다.
그리하여 눈앞이 캄캄해지고,
견디기 어려운 마음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연못에 몸을 내던집니다.

자기를 감싸줄 죽음 속에서 모든 고뇌를 잔재워 버리려고 말입니다.
알베르트 씨, 이것이 많은 사람들의 운명입니다.
아까 말한 병자의 경우와 이치는 마찬가지가 아니겠어요?
서로 얽히며 싸우는 갖가지 힘의 미궁 속에서
생명의 탈출구를 찾아 내지 못하여 결국 그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곁에서 보고,
<소견없는 여자로군! 기다리고 있으면 될 텐데. 시간이 흐르면 절망도 진정될 것이요,
그녀를 위로해 줄 다른 남자도 나타날 텐데 말이야>
이런 소리를 하는 자는 저주를 받아 마땅할 거요. 그것은
<저 녀석은 바보야, 열병으로 죽다니!
체력이 회복되고 정력이 되살아나서,
광란하는 치가 진정될 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면 될 텐데.
그러면 만사가 다 호전되고 지금까지도 살아 있을 텐데 말야>하는 것이나 다름없어요"

 

 

알베르트는 이 비유도 납득할 수 없는 모양으로, 여전히 몇마디 반론을 제기했네.
그러면서 그는 이런 말을 했네. 즉, 내가 말한 것은 한낱
무지한 여자의 얘기로, 만일 그렇게 외곬으로만 치 달리지 말고
좀더 넓게 생각하는 분별력을 가졌던들 그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거라는 걸세.
"알베르트 씨"하고 나는 소리쳤네.
"인간은 다 마찬가지랍니다.
얼마쯤 이성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걷잡을 수 없이
정열이 고조되어 한계점에까지 몰렸을 때는 거의,
아니 다음 기회에 다시 이야기하기로 합시다"

그렇게 말하며 나는 모자를 집었네.
아아, 내 가슴은 꽉 메는 듯하였다네.
이리하여 우리는 서로 이해하지 못한 채 헤어졌지.
남을 이해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인 것 같네.

8월 15일
이 세상에서 사랑보다 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없을 걸세.
로테는 나를 잃는 것을 두려워 하고 있다네.
나는 그것을 그녀의 태도에서 느낄 수가 있네.
아이들도 내가 날마다 찾아 주리라는 것을 조금도 의심치 않는다네.
오늘 나는 로테의 피아노를 조율해 주러 갔었는데,
그 일은 건드리지도 못했네.
아이들이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졸랐고,
로테도 아이들의 청을 들어 주라고 했기 때문일세.
나는 아이들에게 저녁 빵을 잘라 주었지.
아이들은 이제 내가 빵을 잘라 주어도
로테가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꺼이 받아 먹는다네

그런 다음에 나는 골방에 갇힌 공주 이야기를 해 주었네.
그것은 내가 곧잘 해 주는 이야기로,
공주가 굶어죽을 지경이 되었을 때
천장에서 여러 개의 손이 내려와서 먹을것을 주었다는 내용이지.
얘기하면서 나는 배우는 게 많다네.
아이들이 내 이야기를 듣고 어찌나 깊이 감명을 받는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네.
이야기 속의 세세한 대목은 창작해서 들려 주기도 하는데,
먼저 했던 것을 잊고 좀 다른 소리를 하면,
이이들은 곧 지난번에는 그렇지 않았다고 말하는 걸세.
그래서 지금은 조금도 틀리지 않게,
마치 노래라도 부르듯이 정확하게 암송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네.
여기서 한 가지 깨달은 점이 있는데,
저작자가 자신이 지어서 일단 출판했던 책을 개정해서 재판을 내면,
설령 예술적으로는 더 나아졌다 하더라도
그 저서는 반드시 손상을 입게 마련이라는 걸세.
독자들에게는 아무래도 첫인상이 좋은 법이거든.
인간은 아무리 엉뚱한 이야기라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끔 생겨 먹었단 말일세.
더구나 일단 받아들여진 인상은 곧 머릿속에 달라붙어서 떨어지지를 않는 걸세.

8월 18일
인간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이
또한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원천이 됨은 불가피한 일이란 말인가?
내 마음 속에 충만해 있는 생동하는 자연에 대한 열렬한 감정은
나로 하여금 기쁨에 넘치도록 하면서
나를 둘러싼 세계를 낙원으로 변모시켜 주고 있었는데,
그것이 지금은 가혹한 박해자요,
고뇌의 정령이 되어 어디를 가나 내게 달라붙어 다니네.

일찌기 바위 위에서 강 건너 저 쪽 언덕에가지 이어진 풍요한 골짜기를 굽어보며
내 주위의 모든 것이 싹트고 생기에 넘치는 것을 바라보았을 때,
또 기슭에서 산봉우리에 이르기까지 큰 나무들이 울창하게 뒤덮여 있는
저 산들과 아름다운 숲그늘 아래 구불구불 뻗어 있는 저 골짜기들을 바라모았을 때,
조용히 흐르는 시냇물은 소곤대는 갈대 사이를 미그러지듯 빠져나가면서
다정스런 저녁바람이 일렁일렁 불어 보내는 사랑스러운 구름을 그 수면에 비추고 있었지.
그리고 새소리는 사방에서 기차게 춤추고,
풍뎅이들은 태양의 마지막 섬광을 받으며
풀숲에서 해방되어 붕붕거리면서 날아다녔었지.

나를 둘러싼 웅성거림에 이끌리어 땅 위로 시선을 돌리면,
내가 서 있는 단단한 바위에는 이끼가 달라붙어 양분을 빨아들이고,
메마른 모래언덕의 사면에는 저 멀리 아래쪽까지 관목이 자라 있어서,
자연히 펼펴 보여 주었었지.
그 때 나는 이러한 모든 것들을 내 뜨거운 가슴 속에 감격적으로 받아들이고,
넘치는 풍요로움 속에서 나 자신이 되기라도 한 것 같은 느낌에 잠기기도 했었다네.
그리하여 무한한 세계의 갖가지 장려한 모습들이
내 영혼 속에서 활기에 넘쳐 약동했었다네.
거대한 산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고, 깊은 연못이 내 눈앞에 가로놓여 있었으며,
골짜기를 흐르는 맑은 물은 소용돌이치며
아래로 떨어져 내려서 내 발 아래를 흘러갔고,
숲과 산들에 메아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네.

그 때 나는 구명할 수 없는 그 모든 힘들이
대지의 밑바닥에서 서로 뒤섞이며 작용하는 것을 보았네.
그렇게 하여 창조된 온갖 생물들이 지금 이 대지 위를 뒤덮고,
하늘 아래서 꿈틀거리고 있는 걸세.
생명을 지닌 것들이 천태만상으로 이 세계에 가득 차 있단 말일세.
그런데 인간은 그 조그마한 집에 모여 살면서 몸의 안전을 도모하고,
거기에 보금자리를 틀고 있는 주제에 넓은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줄알고 있는 걸세!

오, 가엾고 어리석은 존재여!
너는 너 자신이 미소하기 때문에 만물을 그와 같이 우습게 보는 것이다!
그러나 영원한 창조자의 영혼은 근접할 수 없는 산악에서
인적미답의 황야를 넘어 미지의 대양의 끝에 이르기까지 충만해 있으며,
그것을 느끼며 삶을 영위하고 있는 온갖 생물을,
티끌과 같은 존재에 이르기까지도 기뻐하시는 거라네.
아아, 그 때 나는 머리 위를 날아가는 학의 날개를 빌어,
망망한 대해의 저 건너편 기슭으로 얼마나 날아가고 싶어했는지 모른다네.
신의 술잔에서 거품을 일으키며 넘쳐나는 더없는 생명의 환희를 마시고,
단 한 순간이나마 만물을 자신의 내부에서 스스로 창조해 내고 있는
지고하신 분의 지극한 행복을 맛보기를 얼마나 갈망했는지 모른다네.
친구여, 그 당시를 회상하는 것만이 내 기억을 북돋우어 주는 일이라네.
형언할 수 없는 그 무렵의 감정을 되새겨 보려는 노력만으로도
내 영혼은 승화되고 고양된다네.
그러나 이윽고는 현재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의 불안함을 더한층 절실히 느끼게 된다네.
내 영혼 앞에 드리워져 있던 장막 같은 것이 걷혀 버린 듯싶네.
무한한 생명의 무대는 이제 내 눈앞에서 영원히 입을 벌리고 있는
깊고깊은 무덤으로 변해 버린 걸세.
모든 것은 흘러가고, 모든 것은 번개처럼 빠르게 사라져 가네.
그 지극히 짧은 동안의 존재조차 온전히 누리는 일도 없이
변전의 분류속에 휩쓸리는가 하면,
물밑에 가라앉기도 하고, 바위에 부딪혀 으스러져 버리기도 하는 걸세.
그런데 자네는 어떻게<이것은 존재한다>고 말할 수가 있는가?
한순간 한순간이 자네와 자네 주위의 사람들을 좀먹어 가고 있는 걸세.
한순간 한순간마다 자네 자신이 파괴자가 되고 있으며,
또 그렇게 도지 않을 수 없는 걸세.
무심코 산책을 할 때만 해도 수많은 벌레들의 생명을 빼앗고 있지 않은가.
한 발자국을 내딛다가 공들여 쌓아올린 개미들의 전당을 무너뜨려,
그 작은 세계를 참혹한 무덤으로 화하게 하지 않는가.
어쩌다가 일어날 뿐인 세계적인 대재앙이나,
마을들을 휩쓸어 버리는 홍수, 도시를 삼켜 버리는 지진,
나는 결코 그런 따위의 일을 두려워하고 있는 게 아닐세.
자연의 온갖 사물 속에 잔재되어 있는 잠재력,
이것이 내 마음의 터전을 파헤쳐 무너뜨리는 걸세.
자연 속에서 창조된 일체의 것은 예의없이
자기의 이웃과 자기 자신을 파괴하고 있는 걸세.
나는 불안하다 현기증이 난다네.
하늘과 땅, 그리고 거기서 작용하고 있는 것은,
영원히 집어삼키고 영원히 반추를 하고 있는 괴물뿐이라네.

8월 21일
아침에 가슴 답답한 꿈에서 어렴풋이 눈이 뜨이면,
나는 헛되이 그녀를 찾아 두 팔을 내뻗는다네.
그녀와 나란히 초원에 앉아 그녀의 손을 잡고
거기에 수없이 키스를 퍼붓는 착각에 빠져
한밤중의 침대 속에서 나는 헛되이 그녀를 찾는다네.
아아, 그리하여 아직도 덜 깬 도취경 속에서 손으로 그녀를 더듬다가
퍼뜩 제정신이 들면 미어지는 듯한 가슴 속에서 눈물의 분류가 솟구쳐 오르는 걸세.
그리하여 나는 절망 속에서 어두운 내일을 생각하며 엎드려 운다네.

8월 22일
비참한 심경일세.
빌헬름! 내 활동력은 이상을 일으켜 불안스러운 나태로 변해 버렸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이런 허탈상태에 빠져 있을 수도 없는데.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큰일일세.
나에겐 이제 사고능력도 없고, 자연을 감상할 흥취도 없네.
책따윈 더구나 진절머리가 나네.
자기 자신을 상실하다는 것을 뜻하지. 거짓말도 아니고 과장도 아닐세.
때때로 나는 날품팔이꾼이 되고 싶은 생각이 드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그 날 하루의 목표가 뚜렸다고,
자신을 긴장시키는 그 무언가를 기대하는 마음을 지닐 수 있을 테니까.
나는 때때로 알베르트가 부럽다네.
서류 속에 파묻혀 있는 그가 나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상상을 하곤 한다네.
나는 벌써 몇 번이나, 자네와 장관에게 편지를 내어
공사관에 자리를 하나 얻어 달라고 할까 생각했었지.
그런 자리라면 거절당하지 않을 것 같았고,
자네도 또한 보증해 줄 걸로 믿고 있었기 때문일세.
그전부터 장관은 나를 아껴 주었고, 어떤 자리에든 앉아서 실무를 보라고 권유해 왔거든.
한순간 그럴까 하는 마음이 들다가도 이내 생각이 달라지곤 하네.
어떤 말이, 자신이 누리는 자유가 지겨워져 제 몸에 안장을 언고
마구를 얹어 달래서 사람을 태우고 다니다가, 마침내 지쳐 쓰러지고 말았다는 그 우화가 생각나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갈피를 못 잡게 되고 마는 걸세.
친구여! 환경의 변화를 구하는 마음은 초조감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것은 어디를 가나 나를 뒤쫓아오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