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 괴테 4.
7월 6일
로테는 여전히 그 위독한 부인을 간호해 주고 있네.
언제나 변함없이 남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치는 인정 많은 로테라네.
그녀의 눈길이 닿으면 고통이 덜어지고 마음 깊은 곳에서 행복이 솟아오른다네.
어제 저녁에 로테는 마리아네 와 어린 말헨을 데리고 산책을 나갔네.
나는 그것을 알고 도중에서 만나 함께 걸었네.
1시간 반 정도 산책한 다음 동네 쪽으로 돌아와, 그 샘터에 다다랐네.
그 샘터는 나에게 있어서는 아주 소중한 곳이 되었다네.
로테는 나직한 돌담에 걸터앉고, 우리는 그 앞에 서 있었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네.
그러자 아아, 내 마음이 그토록 외로웠던 그 무렵의 일이 눈앞에 선하게 떠오르는 걸세
<그리운 샘터여>하고 나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네.
<그 뒤로 나는 한 번도 시원한 네 곁에서 쉬지를 못했구나.
급히 지나쳐 버릴 뿐, 너를 걸들 떠보지도 않았던 적조차 더러 있었지>
아래를 내려다보니, 말헨이 집에다 물을 떠 가지고 부지런히 올라오고 있었네.
나는 로테를 보았네.
그리고 그녀가 나에게 있어서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가를 새삼 절실히 느꼈다네.
그 사이에 말헨은 다 올라왔네.
마리아네가 그 물 컵을 받으려 하자"안 돼!"하고
말헨은 그지없이 사랑스러운 표정으로 소리를 질렀네.
".....로테 언니, 언니가 먼저 마셔요!"
나는 말헨의 그 천진한 애정에 감동되어 얼른 그 애를 안아 올리고 키스를 퍼부었네.
나는 내 감동을 그렇게 밖에는 나타낼 수가 없었던 걸세.
그런데 말헨은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네.
"선생님이 잘못하신 거예요"로테가 말했네.
나는 당황하여 어쩔 줄 몰랐지.
"저리 가자, 말헨"하고 로테는 그 애의 손을 잡고 돌계단 아래로 내려갔네
"자, 솟아나는 이 깨끗한 물로 씻어라. 얼른얼른 씻는 거야. 그러면 아무 일도 없어"
나는 거기에선 채로 그 어린아이가 물에 적신 작은 손으로
제 뺨을 열심히 닦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기적의 샘물에 모든 부정한 것이 말끔히 씻겨 내려가서,
보기 흉한 수염이 뺨에 나게 되는 일을 면할 수 있게 될 것으로 믿고 있는 모양이었네.
"이제 그만 됐다!"하고 로테가 말해도 그대로 계속 닦고 있었네.
많이 하는 편이 효과 있을 것으로 믿고 있는 것처럼......
빌헬름이여, 나는 일찍이 세례의식에도 이토록 경건한 마음으로 참여하진 않았네.
로테가 다시 올라왔을 때,
나는 만민의 죄를 깨끗이 씻어 준 예언자라도 대하듯 그녀 앞에 넓죽 엎드리고 싶었네.
저녁때, 나는 내 마음속의 기쁨을 숨길 수가 없어서 이 사건을 어떤 남자에게 이야기했네.
분별이 있는 인물이라 인간의 마음에 대한 이해가 있을 것으로 기대했었는데,
그 결과는 전혀 뜻밖이었네.
그는, 그건 로테가 잘못한 거라면서,
아이들에게 터무니없는 생각을 불어넣어서는 안 된다는 걸세.
그것이 온갖 망상과 미신의 근원이 되기 때문이라나,
그런 데 빠지지 않도록 우리는 어린이들을 일찍부터 지켜 주어야만 한다는 거야.
나는 그 사람이 바로 1주일 전에 자기 아이들에게 세례를 받게 했다는 사실을 생각해 냈네.
그래서 나는 그가 말하는 것을 잠자코 듣고 있었지만,
마음속으로<우리는 하느님이 우리를 대하듯 어린이를 대해야 한다.
하느님이 우리를 즐거운 망상속에 사로잡아서 몽롱한 기분에 잠기게 할 때에
우리가 가장 행복해지는 것처럼>이라는 진리를 되새기고 있었네.
7월 8일
어쩌면 이다지도 어린애 같을까!
단 한 번만이라도 나에게 눈길을 돌려주기를 바라다니!
어쩌면 이다지도 어린애 같단 말인가!
우리는 발하임에 갔었네. 여자들은 마차를 타고 우리는 걸어서 갔는데,
나는 걸어가면서 내내 이런 생각을 했다네. 로테의 검은 눈동자 속에 분명히......
나는 바보일세, 용서해 주게나, 자네에게도 보여 주고 싶네,
그 눈을. 간단히 말해서(지금 졸음이 와서 자꾸만 눈이 감기는 형편이거든) 이런 이야기일세.
여자들은 마차에 올라타고, 젊은 W군과 젤시타트, 아우드란,
그리고 나는 마차 주위에 둘러서 있었네.
마차 안의 여자들과 바깥에 둘러선 남자들 사이에 대화가 오고갔지.
모두들 수다스럽고 쾌활한 친구들이거든. 나는 로테의 눈길을 잡으려하고 있었지.
아아, 그 눈길은 다른 사내들에게로만 이리저리 보내졌네.
그런데 나에게는! 나에게는! 나는 따돌려진 채 체념을 하고 서 있었네.
그 눈길은 나에게는 단 한 번도 돌려지지 않았다네!
나는 마음속으로<잘 가요>하는 인사를 천 번도 더 하고 있었는데 말일세!
그런데도 그녀는 나를 보지 않는 거야!
이윽고 마차가 떠나갔네! 내 눈에는 눈물이 핑 돌았네.
멀어져 가는 마차를 바라보고 있으려니까, 머리 장식이 마차의 문 밖으로 내비치더니,
그녀가 뒤를 돌아다보는 게 아닌가. 아아! 나를 보기 위해서 그랬을까?
친구여! 어느 쪽인지 알 수가 없어서 나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네.
아마 나를 돌아다본 것이겠지, 하는 것이 나의 유일한 위안일세----
잘 있게나! 아아, 어쩌면 나는 이다지도 어린애 같을까!
7월 10일
사람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로테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의
바보스러운 거동을 자네에게 보여 주고 싶네!
누군가가 내게 로테가 마음에 드느냐고 묻기라도 하면,
더구나, 마음에 든다! 나는 그런 말이 딱 질색일세.
로테가 마음에 드는 사람 치고
모든 감정이나 생각이 그녀로 인하여 충만 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마음에 들다니! 며칠 전에 나에게 오시안(아일랜드의 전설적 시인)이
마음에 드느냐고 물은 사람이 있었지.
7월 11일
M부인의 용태는 매우 위독하다네.
나는 부인의 생명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네.
로테와 괴로움을 함께 나누고 있는 터이니까 말일세.
내가 그 부인 집에서 로테를 만나는 건 아주 드문 일이지만,
오늘 로테는 나에게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네
M이라는 노인은 아주 탐욕스러운 수전노로서,
태껏 그 부인을 몹시 고생시키고 야박하게 굴어 왔다는 걸세.
그러나 부인은 어려운 대로 겨우겨우 살림을 꾸려 왔다는 걸세.
며칠 전, 의사가 그 부인에게 앞으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리자,
그녀는 남편을 병상에 불러 놓고(로테는 그 자리에 있었다네)다음과 같이 말했다네.
"당신에게 고백해야 할 일이 한 가지 있어요.
제가 죽은 뒤에 분란이 일거나 불쾌한 사태가 벌어져서는 안 되겠기에 드리는 말씀이에요.
저는 여태까지 최대한으로 절약하면서 집안 살림을 꾸려 왔어요.
그러나 당신에게 용서를 빌어야만 할 일이 있는데,
그건 제가 30년 동안 줄곧 당신을 속여 왔다는 사실이에요.
당신은 우리가 결혼했을 때, 부엌살림에 소용되는 경비와
집안살림의 비용 조로 얼마 안 되는 금액을 결정하셨지요.
그 뒤로 우리의 살림 규모도 늘고 장사가 확장되었는데도,
매주 당신이 주시는 돈은 변함이 없었어요.
좀더 올려 달라고 제가 아무리 간청을 해도 당신은 들어주시지 않았어요.
길게 말하지 않더라도, 살림 규모가 가장 커졌을 때에도
1주일에 7굴덴의 돈으로 꾸려 나가라고 말씀하셨던것은 당신이 더 잘 아시겠지요.
저는 당신 말대로 고분고분 그 7굴덴을 받았고,
모자라는 돈은 매주 가게의 매상금 중에서 따로 떼어 충당해 왔지요.
주부가 매상금의 일부를 훔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않을 테니까요.
하지만 저는 조금도 낭비를 하지 않았어요.
이런 고백을 하지 않더라도 마음편히 저세상으로 갈 수 있을 거예요.
다만 제 뒤를 이어 살림을 꾸려 나갈 사람이
그 돈으로는 어림도 없을 텐데 당신은 또 보나마나
그전 마누라는 그 돈으로 거뜬히 꾸려 나갔노라고 우기실 테니,
그 생각을 해서 이렇게 말씀드리는 거예요"
나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하여 로테와 이야기를 했네.
대충 2배 정도의 경비가 소요된다는 것이 눈에 뻔히 보이는데도
7굴덴으로 꾸려 나가고 있다면 그 이면에 뭔가 비밀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텐데,
그것을 그대로 지나쳤다니......
그러나 나는 자기 집에<예언자의 무진장한 기름단지>가 있는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이 있음을 알고 있네.
7월 13일
이건 나의 망상이 아닐세!
나는 그녀의 검은 눈동자 속에 나에 대한
그리고 나의 운명에 대한 진정한 공감이 어리어 있음을 알 수 있다네.
나는 그것을 느낄 수 있네. 그녀는, 아아, 천국을 이런 말로 표현해도 괜찮을까.......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일세!
틀림없이 나를 사랑하고 있네!
그걸 알고부터 내가 나 자신에게 있어서 그지없이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네.
나는 얼마나 나 자신을......
자네에겐 이런 소릴 해도 괜찮을 테지. 자네는 나를 이해하니까.
존경하게 되었는지 모른다네. 그녀가 나를 사랑하게 된 뒤부터!
이것은 나의 지나친 자만일가, 혹시 잘못 생각하는 건 아닐까?
로테의 마음 속에 깊은 인상을 심어 주기라도 할까 봐 걱정스러워지는 그런 인물은 없네.
그러나 로테가 그녀의 약혼자에 대해 열의와 사랑을 드러내며 이야기할 때,
나는 명예와 지위를 모조리 박탈당하고 대검까지 빼앗겨 버린 사람과 같은 느낌이 든다네.
7월 16일
어쩌다 내 손가락이 그녀의 손가락에 닿거나,
우리의 발이 테이블 아래에서 맞닿거나 할때면,
아아, 뜨거운 피가 내 혈관속에서 소용돌이를 치네.
불에 닿기라도 한 것처럼 얼른 그 손가락이나 발을 움츠렸다가는,
감각의 신비로운 힘에 이끌리어 또다시 스르르 앞으로 내밀게 된다네.
모든 감각이 일시에 마비되어 현깃증이 날 지경이라네.
아아! 그런데도 그녀의 천진난만하고 구김살 없는 영혼은
자기의 그런 대수롭지 않은 친근감의 표시가
나를 얼마나 괴롭히는가를 전혀 알지 못한다네.
뿐만아니라, 그녀는 이야기를 한창 하는 도중에 자기 손을 내 손위에 얹기도 하고,
이야기에 열중해서 나에게 몸을 바싹 대기도 하여
그녀의 순결한 입김이 내 입술에 와 닿는 일조차 있다네.
그럴 때면 나는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넋을 잃고 스러질 것만 같다네.
빌헬름이여, 혹시나 내가 언젠가 감히 이 천국을, 이 신뢰를......!
내마음 알아 주겠지? 내마음은 그토록 타락하지는 않았네!
다만 약할 뿐일세! 정말 약하단 말일세!
그러나 이 약하다는 것이야말로 타락이 아닐까?
그녀는 나에게 있어서는 신성 불가침의 존재일세.
그녀 앞에 나서면 일체의 욕망이 잠잠해지네.
그녀가 곁에 있으면 내 기분이 어떤지조차도 알 수 없어지네.
영혼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져 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걸세
그녀는 한 멜로디를 천사처럼 소박하고 진지하에 피아노로 연주하네.
그것은 로테가 가장 좋아하는 곡이지.
그녀가 그 최초의 음을 치는 소리가 울리기만 해도
나는 고뇌와 혼란, 그리고 우울로부터 해방된다네.
나는 이제 음악의 마력에 대한 옛날 이야기가
허무맹랑한 거짓말이 아니라고 여기게금 되었네.
그 소박한 멜로디가 내 마음을 꼼짝없이 사로잡아 버리는 것을 보면 알 만하지 않은가!
로테는 내가 자신의 이마에 총알을 한 방 쏘고 싶어지는
그러한 때에 곧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네.
그러면 내영혼의 미망과 암흑은 홀연히 사라져 버리고
나는 다시금 생기를 되찾아 호흡을 할 수 있게 된다네.
7월 18일
빌헬름이여, 사랑이 없는 세계에서 산다면 우리의 마음은 어떻게 될까?
램프 없는 환등이나 다를 바 없는 걸세!
작은 램프를 끼움과 동시에 갖가지 영상이 흰 스크린에 나타나지.
그것이 한낱 그림자요, 일시적인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가 어린애들처럼 그 앞에 서서 신비로운 광경에 가슴 설렌다면 ,
그것은 역시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일세.
오늘 나는 로테네 지벵 가지 못했네.
피치 못할 모임이 있었기 때문이지. 나는 하인에게 로테네 집에 갔다오라고 시켰지.
로테의 곁에 가 있다가 온 인간을 내 몸 가까이에 있도록 하고 싶었던 걸세.
얼마나 마음을 죄며 그 하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는지 모른다네.
이윽고 그가 돌아오는 것을 보고 나는 가슴 설레도록 반가왔다네.
체면 때문에 차마 그러지는 못했지만, 그의 목을 껴안고 키스를 해 주고 싶었네.
형광석은 햇빛을 흡수해서, 밤이 되어도 얼마 동안은 빛을 발하다고 하더군.
그 젊은 하인이 나에게 있어서는 그와 같은 존재였네.
그녀의 눈길이 그의 얼굴, 그의 뺨, 그의 웃저고리 단추,
그리고 그의 외투깃에 닿았었다고 생각하니,
그 모든 것이 나에게 신성하고 소중한 것으로 여겨졌네.
그 순간, 누가 천 탈레르를 준다고 해도 나는 그 하인을 딴 사람에게 넘겨주지 않았을 걸세.
그가 내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더 할 수 없이 흐뭇했거든.
제발 비웃지는 말게나. 빌헬름이여, 우리를 즐겁게 하는 것, 그것이 한갓 환영일까?
7월 19일
<그녀를 만나야지!> 아침에 눈을 뜨면 나는 외친다네.
밝은 마음으로 아름다운 태양을 맞이하면서 <그녀를 만나야지!>하는 거야.
그리고 진종일 그 이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네.
모든 것이 이 소망 속에 잠겨 버리는 걸세.
7월 20일
나더러 공사를 수행하여 xx로 가는 게 좋겠다는 것이 자네들의 의견이지만,
나는 그럴 의향이 없네.
나는 남에게 애속되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거든.
게다가 모두들 나를 알다시피 그 공사라는 사람은 비위상하는 인물일세.
어머니께서 내가 활동하기를 바라고 계시다는 자네 글을 읽고, 나는 웃지 않을 수 없었네.
내가 지금 활동하고 있지 않단 말인가?
완두콩을 세고 있건 잠두콩을 세고 있건 결국은 그게 그거 아닌가!
세상만사 따지고 보면 다 하잘것없는 것들일세.
그리고 자기 자신의 정열이나 욕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남이 시키는 대로 허덕지덕 뼈빠지게 일을 하면서
돈이라든가 명예 따위를 얻으려 하는 자들은 한마디로 말해서 바보일세.
7월 24일
그림 그리기를 등한히 하지 말라고 자네는 충심으로 충고하고 있지만,
그 문제는 잊어버리고 싶네.
바른 대로 말해서, 그 이후로 나는 그림을 거의 그리지 않고 있는 실정일세.
지금처럼 내가 행복했던 적은 일찍이 없었네.
돌멩이 하나에서 풀잎에 이르기까지
자연에 대한 감수성이 내 가슴 속에 지금처럼 충만했던 적은 없다는 걸세.
그런데, 이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겠군.
나의 표현력은 미약해서, 모든 것이 내 영혼 앞에서 아른거리기만 할 뿐,
윤곽조차도 포착할 수가 없네.
그러나 진흙이나 백랍이라도 있으면, 뭔가를 만들어 볼 생각이 들 것 같네.
이런 상태가 지속된다면, 진흙을 주물럭거리게 될지도 모르겠네.
그래서 완성되는 것이 비록 케이크 따위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말일세.
나는 로테의 초상화를 세 번이나 그리기 시작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네.
전에는 꽤 솜씨있게 그릴 수 있었는데. 그래서 한층 더 울화가 치밀어오르더군,
그 뒤 나는 그녀의 실루엣을 그렸다네. 그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지.
7월 26일
잘 알았소, 사랑하는 로테여.
만사 잘 알아서 처리할 테니, 부디 일을 많이 맡겨 주시오.
될수록 자주 일을 시켜 주기 바라오.
그런데 한 가지 부탁이 있소.
내게 서 보내는 편지에는 잉크를 말리는 모래를 뿌리지 말아 주시오.
오늘은 편지를 입술에 갖다 대었더니, 입술이 깔깔합디다.
7월 26일
로테를 너무 자주 찾아가지 말자, 하고 몇 번이나 결심을 했는지 모른다네.
그러나 그게 지켜질 리 없지.
매일 스스로 유혹에 넘어가 버리고 나서는, 나는 또 엄숙히 맹세를 하는 걸세.
내일은 찾아가지 말아야지, 하고 말일세.
그랬다가 그 내일이 되면, 나는 또다시
그러지 않을 수 없는 이유를 찾아 내고는 어느새 벌써 그녀 곁에 가 있게 되는 걸세.
가령 전날 밤에 로테가 <내일도 오시겠어요?>하고 말했다면,
그 누가 가지 않고 배길 수 있겠는가?
그녀가 어떤 일을 부탁했을 경우도 있지.
그러면 내가 직접 가서 그녀에게 그 결과를 알려 주는 것이 예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는 걸세.
또 어떤 때는 날씨가 하도 좋아서 발하임으로 산책을 나간다네.
거기가지 가고 보면 로테네 집가지는 불과 반 시간이면 갈 수 있거든.
거기서부터 벌써 그 분위기에 젖어드는 걸세.
우리 할머니는 곧잘 자석산 이야기를 해 주셨지.
배가 그 산 가까이 다가가면, 별안간 배 안의 쇠붙이란 쇠붙이는
모두 그 산으로 빨려 들어가 버리는 바람에 뱃사람 들은 가엾게도
산산이 흩어진 널빤지를 잡고 버둥거리다 죽는다는 내용이었지.
7월 30일
알베르트가 돌아왔네. 이제 나는 이 곳을 떠나야만 하겠지.
비록 그가 기품있고 훌륭한 인물로서,
모든 점에서 내가 그보다 한 수 처진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토록 아름답고 완벽한 여성을 소유하고 있는 그를
눈앞에 두고 본다는 것은 정말 감당하기 어려운 노릇일세.
소유! 그렇다네, 빌헬름.
어쨌든 그녀의 약혼자가 돌아온 걸세.
그는 훌륭한 청년신사로, 누구나 호감을 갖지 않을 수 없는 인물이세.
다행히 나는 그가 돌아올 때 마중하는 자리에는 있지 않았네.
만일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을 걸세.
그는 사려 깊은 사람이라, 내가 보는 앞에서는
아직 한 번도 로테에게 키스를 한 적이 없다네.
하느님, 사려깊은 그의 행동에 상을 내리소서! 그
가 로테를 존경하고 있다는 것으로 해서 나는 그를 경애하지 않을 수가 없네.
그도 나에게 호의를 보이고 있으나, 짐작컨대
그것은 마음에서 우러났다기보다는 로테가 그렇게 유도했기 때문인 듯하네.
그렇나 점에서는 여자란 빈틈이 없으니 말일세.
한 여자가 자기를 좋아하는 두 남자들이 서로 사이좋게 지내도록 할 수가 있다면,
덕보는 것은 언제나 여자 쪽이거든. 하긴 언제나 그렇게 잘 되어 가지는 않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알베르트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네.
그의 의젓함은 두드러지게 침착성이 결여된 내 성격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네.
그는 감수성도 풍부하며, 로테의 가치도 잘 알고 있네.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는 일도 별로 없는 듯하네.
불쾌한 감정이야말로 내가 무엇보다도 증오하는 죄악이라는 것은 자네도 알고 있지 않은가.
알베르트는 나를 사려깊은 인간으로 여기고 있는 모양일세.
로테에 대한 나의 애모, 그녀의 일거수 일투족에 대한 나의 열렬한 기쁨,
그러한 것으로 인해 그가 느끼는 승리감은 더욱 커지고
따라서 그는 더 한층 로테에게 사랑을 쏟게 되는 걸세.
그가 때때로 사소한 질투로 로테를 괴롭히는 이리 있지나 않은지,
그런 것은 덮어 두기로 하겠네.
내가 알베르트의 처지라도 질투라는 악마의 손아귀에서
깨끗이 벗어날 수 있으리라고 장담할 수는 없으니까.
그런 것은 어찌되었든, 로테 곁에 있을 수 있는 나의 기쁨은 이제 사라져 버렸네.
내가 어리석었다고 함이 옳을 것인가,
눈이 멀었다고 함이 옳을 것인가? 뭐라고 하든 그게 무슨 상관이랴.
사실 그 자체가 웅변으로 말해 주고 있는 것을!
지금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알베르트가 돌아오기 전부터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다는 사실일세.
로테에 대하여 그 어떤 요구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알고 있었고
또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았지. 왜냐하면 이토록 사랑스러운 존재를 보면서
아무런 요구도 하지 않고 견딜 수 있는 한도 안에서의 사랑이었던 것일세.
그런데 마침내는 그 약혼자가 나타나서 그녀를 빼앗아 가 버리자,
이 바보 같은 인간은 눈이 휘둥그래져 있다네.
나는 이를 악물고 나 자신의 비참한 몰골을 비웃는다네.
그러나 만일 나더러, 단념해라, 어쩔 도리가 없지 않느냐, 라고 말하는 자가 있으면,
나는 그자를 몇 배나 더 비웃어 주겠네. 그런 정신을 가진 인간은 없어져 버려라!
나는 숲속을 걸어 돌아다니다가 로테네 집으로 간다네.
그러면 알베르트가 정원의 정자에 그녀와 함께 앉아 있다네.
그것을 보면 나는 그만 더 이상 자중할 수가 없어져서,
마음껏 장난기를 발동시켜 어릿광대 같은 짓을 하곤 하는 걸세.
"제발"하고 오늘 로테는 나에게 말했네.
"어저께와 같은 그런 행동은 하지 말아 주세요.
그런 식으로 지나치게 쾌활하게 구시면 어쩐지 무서워져요"
자네에게만 고백하지만,
나는 알베르트가 일이 바쁜 때를 노리고 있다가 그 틈을 타서 얼른 찾아간다네.
그래서 로테가 혼자 있으면 좋아하곤 한다네.
8월 8일
용서하게나, 빌헬름이여.
어쩔 도리가 없는 운명에는 얌전히 순종할 수밖에 없지 않느냐고 말하는
그런 인간은 딱 질색이라고 내가 매도했던 것은, 자네를 두고 한 말은 결코 아니었네.
자네도 그러한 의견일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았었지.
그런데 근본적으로는 자네 말이 옳아.
그러나 친구여, 내 한마디만 더 함게. 세상 일이란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딱 부러지게 결말이 나는 경우는 극히 드문 법일세.
인간의 감정과 행동에는 실로 다양한 변화와 차이가 있는 걸세.
마치 매부리코와 사자코의 중간에 무수한 변화의 단계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지.
그러니 자네 의견이 전적으로 옳다고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내가<이것 아니면 저것>의 중간노선을 헤엄쳐 나가려 하더라도
제발 나를 나쁘게 생각하지는 말아 주게나.
자네는 어느 쪽이든 결단을 내리라고 말하는 거지?
로테에게 희망이 있는가 없는가?
희망이 있다면 끝까지 밀고 나가서 소망을 성취하도록 하라.
그러나 희망이 없다면 용단을 내려서,
온 정력을 좀먹는 불행한 감정으로부터 탈피하도록 노력하라, 이 말이지?
친구여! 그 말인즉 지당하네.
그러나 말은 쉽지만 실천은 어렵다네.
서서히 악화되어 가는 질병으로 인해 하루하루 죽음에 가까와져 가고 있는
불행한 인간을 보고, 단도로 푹 찔러서
단박에 그 병고에 종지부를 찍어라, 하고 권유할 수 있겠는가?
환자의 정력을 좀먹는 질병은 또한 그 질병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려는 용기마저도 빼앗아 가는 것이 아닐까?
자네는 다른 비유를 끌어다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겠지.
즉, 우물쭈물하다가 생명을 위태롭게 하기보다는
상처난 팔을 끊어버리는 편이 낫지 않느냐고 말일세.
나는 모르겠네!
비유를 끌어다 대면서 논쟁을 벌이는 짓은 그만두기로 하게.
아뭏든 빌헬름,
때때로 나는 모든 고뇌를 털어 버리고
뛰쳐나갈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치솟을 때가 있다네.
그래서......만일 내가 가야 할 곳이 어딘지를 알게 되기만 하면,
나는 그 곳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할 걸세.
8월 8일 저녁
얼마 동안 팽개쳐 두었던 일기장을 오늘 무심코 펼쳐보고 놀랐네.
나는 번연히 알면서도 현재의 이런 사태 속으로 한걸음 한걸음 빠져 들어오고 있었던 걸세!
자신의 입장을 언제나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어린애같이 처신해 왔네.
지금도 나는 그걸 분명히 알고 있네.
그러면서도 여기서 헤어나게 되지를 않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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