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 괴테 3.
그리고, 빌헬름이여, 정직하게 고백하지. 나는 맹세를 했다네.
내가 사랑하고 갈구하는 이 소녀로 하여금
결코 나 이외의 사람과는 왈츠를 못 추게 하겠노라고 말일세.
설령 그 때문에 내가 파멸하는 한이 있더라도......그 기분, 알아주겠지?
우리는 잠시 쉬기 위하여 천천히 걸어서 홀을 두세 차례 돌았네.
그런 다음에 로테는 자리에 앉았네.
내 몫으로 갖다 놓았던 몇 개의 오렌지가 그 때 남아 있는 유일한 과일이었는데,
그것이 아주 요긴하게 쓰였네.
그런데 그 오렌지를 로테가 한 자리에 앉은
염치없는 여자들에게 노나 줄 때는 가슴이 쓰리더구먼.
세 번째의 영국식 댄스에서 우리는 두 번째 조가 되었네.
사람들의 대열 속을 누비며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만끽하고,
순수한 즐거움을 숨김없이 드러내면서 춤추고 있는 로테
나는 황홀감에 젖은 채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그 팔을 끼고 춤을 추었네.
그러다가 어떤 부인 옆을 지나게 되었네.
그 부인은 이미 젊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애교있는 얼굴이었으므로
그전에도 눈여겨본 적이 있는 여자였지.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로테에게 시선을 보내더니
위협하듯이 손가락 하나를 쳐들고는 우리가 스쳐 지날 때
의미심장하게 알베르트라는 이름을 두 번씩이나 입밖에 내는 것이었네.
"알베르트가 누군가요?" 하고 나는 로테에게 물었지.
"묻는 것이 실례가 될지도 모르지만......"
로테가 대답을 하려는 순간에 우리는 커다란 8자를 그리기 위해 서로 떨어져야만 했네.
그랬다가 그 도중에 서로 스쳐 지나게 되었을 때 보니,
그녀의 얼굴에 뭔가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이 나타나 있더군
"뭘 숨기겠어요" 프롬나드로 이행하기 위해 나에게 손을 내밀면서 그녀가 말했네.
"알베르트는 착실한 분으로, 저하고는 약혼한 것이나 다름없는 사이에요"
그건 처음 듣는 말은 아니었지(오는 도중에 그 아가씨들한테 들었으니까).
그런데도 나는 처음 듣는 소리 같았네.
잠깐 사이에 나에게 이토록 소중한 존재가 된 이 여인과
그 이야기를 결부시켜 생각하지 않았었기 때문이지.
나는 머리가 혼란해지고 멍청해져서, 엉뚱한 조의 두사람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 버렸네.
그 바람에 전체적인 진행이 뒤범벅이 되었지.
그런데 로테가 침착하게 나를 이끌어 주었으므로, 곧 원상으로 회복이 되었네.
댄스가 아직 끝나기 전에 번개 치는 도수가 잦아지기 시작했네.
벌써 아까부터 지평선 저 쪽에서 번쩍번쩍했는데,
나는 그 것을 기온이 내려가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지.
그런데 이젠 천둥소리가 음악을 압도해 버릴 지경이 되었네.
이윽고 여자 셋이 대열에서 빠져나가자, 그 파트너인 남자들이 그 뒤를 쫓아갔네.
홀 전체가 뒤숭숭해지고, 음악소리가 그쳤네.
한창 즐겁게 놀고 있을 때 불행이나 공포가 엄습해 오면,
보통 때보다 더 강한 인상을 받게 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지.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앞뒤의 감정적인 대조가 뚜렸하게 느껴지기 때문이요,
또 한 가지 더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의 감각이 활짝 열려
그만큼 강한 인상을 받기 쉽게 되어 있기 때문일세.
몇몇 여자들이 갑자기 얼굴을 기묘하게 찌푸린 것도
그러한 원인에서 빚어진 결과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
분별이 있는 한 여자는 홀 한구석에 가서 창문을 등진 채 귀를 막고 있었네.
또 어떤 여자는 그 앞에 꿇어앉아서 상대방 여자의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네.
또 한 여자는 그 두 사람 사이에 파고들더니, 눈물을 흘리며 친구를 껴안았네.
이성을 잃고 어쩔 줄 몰라하며,
엉큼한 젊은 남자들의 무례한 행동을 막아 내지 못하는 여자들도 있었지.
그 뻔뻔스러운 젊은 남자들은, 하늘을 향해 올려지는 불안에 잠기 여인들의 기도를,
그 아름다운 입술에서 고스란히 자기 것으로 가로채기에 바쁜 것 같았네.
몇몇 신사들은 천천히 담배나 피우려고 아래로 내려갔네.
나머지 사람들은 이 집 여주인이 임기웅변의 제안으로,
덧문이 있고 커튼이 쳐져 있는 방을 제공하겠노라고 해서 그리로 가게 되었지.
우리가 그 방에 들어서자 로테는 바지런히 오락가락하며 의자들을 둥그렇게 놓더니,
사람들을 자리에 앉히고 뭔가 게임을 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을 하는 것이었네.
"키스타는 달콤한 벌을 받게 될 수도 있겠는걸"하고
벌써부터 입술을 쑥 내밀며 신명을 내는 사람들도 있었지.
"숫자 세기 놀이를 해요"하고 로테가 말했네.
"자, 잘 들으세요. 제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차례대로 숫자를 세는 거예요.
각자 자기 차례의 숫자를 부르고 그 다음 차례로 넘기는 거지요.
그걸 도화선의 심지가 타 들어가듯이 빨리빨리 불러야만 애요.
막히거나 틀린 숫자를 부르는 분은 뺨을 맞게 됩니다.
자, 그럼 시작하겠어요. 천까지예요" 정말 그건 가관이었다네.
그녀는 한쪽 팔을 내뻗고서 돌아가기 시작했네.
<하나>하고 첫 번째 사람이 부르고 그 다음 사람이 부르고 그 다음 사람이 <둘>,
또 그 다음 사람이 <셋>, 이런 식으로 진행되어 가는 거야.
로테는 차츰 더 빨리 돌아가기 시작했네
그러자 누군가가 틀렸네. 찰싹, 로테가 뺨을 때렸네.
와아 하고 웃는 사이에 그 다음 사람도 찰싹!
그러고는 더욱더 빨리 돌아가는 거야. 나도 두 번 뺨을 얻어맞았는데,
다른 사람보다 더 세게 때리는 것 같아서 무척 흡족스러웠네.
온통 웃고 떠들어 대는 바람에 천까지 가기 전에 게임은 끝나 버렸지.
가까운 사람끼리 저마다 짝을 지어 자리를 뜨기 시작했네.
소나기는 어느새 그쳐 있었거든. 나는 로테를 따라 다시 홀로 나갔지.
그 도중에 그녀는 말했네.
"뺨 때리는 데 정신이 팔려 모두들 소나기고 뭐고 다 잊어버린 것 같더군요"
나는 대답할 말이 없었네
"저는" 하고 그녀는 말을 이었네.
"누구보다 겁이 많은 편인데도, 용기가 있는 체하고
다른 분들의 기분을 북돋우어 주려 하고 있는 사이에 저도 모르게 힘이 나기 시작하더군요"
우리는 창가로 다가갔네.
천둥소리가 멀리서 울리고 아름다운 비가 조용히 땅을 적시고 있었네.
더할 수 없이 상쾌하고 향기로운 장미냄새가 따뜻한 공기 속에 충만하여
우리 있는 데까지 풍겨 왔네.
로테는 창틀에 팔꿈치를 괴고 서서 조용히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네.
하늘을 우러러보다가 이윽고 나를 보았는데,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괴어 있었네.
그녀는 자기 손을 내 손위에 얹으며"클롭시록!" 하고 말했네
나는 곧 로테가 생각하고 있는 클롭시록의 그 장려한 찬가를 마음속에 되새기며,
그녀가 암호와도 같은 그 말로써 나에게 전달하려 한 감정의 흐름 속에 잠겨들었네.
나는 벅찬 감명을 억누를 길이 없어,
몸을 구부려 환희에 넘치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그녀의 손에 키스를 했네.
그러고는 다시 그녀의 눈을 쳐다보았지 거룩한 시인 클롭시록이여!
이 눈앞으로 다시는 그대의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더럽혀지지 않기를 바라노라!
6월 19일
지난번 편지는 어디서 끝냈는지 생각이 나지를 않네.
다만 생각나는 것은, 내가 집에 돌아와서 누운 것이 새벽 2시였다는 것,
그리고 편지를 쓰지 않고 이야기를 했더라면
아마도 아침이 될 때까지 자네를 붙잡고 지껄였으리라는 것뿐일세.
무도회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올 때의 일은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오늘도 역시 그런 이야기를 하기에 알맞은 날은 아닌 것같네.
그야말로 근사한 해돋이였어.
사방은 온통 이슬에 젖은 수풀과 싱그럽게 되살아난 들판이야.
마차 안에서, 동행한 여자 둘은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였네.
로테는 나를 보고, 선생님도 좀 주무세요, 하고 권했네.
자기 때문에 체면 차릴 필요는 없다는 거야
"아가씨가 잠자지 않는 동안에는" 나는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눈을 응시하였지.
"그 동안엔 나도 졸립지 않아요"그리하여 우리 두 사람은
로테네 집에 닿을 때까지 그대로 깨어 있었네.
하녀가 문을 열어 주었는데, 로테의 물음에 대하여,
아버님도 애들도 여느 때와 같이 아직도 자고 있어요, 하고 대답했네.
헤어질 때 나는 그 날 중으로 한 번 더 만날 수 있게 해 달라고 그녀에게 말했지.
로테는 승낙했네.
그래서 나는 그녀를 찾아갔지
그 때 이후로, 해와 달과 별들은 물론 변함없이 그 궤도를 돌고 있겠지만,
나에게는 이제 낮도 없고 밤도 없어졌다네.
세계가 온통 내 주위에서 사라져 버린 걸세.
6월 21일
나는 하느님이 성자들을 위해 마련해 둔 것 같은 그런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네.
설령 앞으로 내 몸이 어떻게 되든 간에, 내가 인생의 기쁨,
가장 순수한 기쁨을 맛보지 못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걸세.
나의 발하임을 자네 알고 있지? 나는 그 곳에 아주 정착하였네.
거기서 불과 반시간이면 로테네 집에 갈 수가 있다네.
그 집에 가면 나는 나 자신의 존재를 느낄 수 있는 걸세.
그리고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행복을....
발하임을 산책의 목적지로 선정했을 때,
나는 그곳이 그토록 천국에 가까운 곳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네.
멀리까지 산책을 나가, 나의 모든 소망을 간직하고 있는 그 사냥별장을,
때로는 언덕 위에서, 때로는 강 건너편의 평지에 서서 바라보기 그 몇 번이었던가!
사랑하는 친구여!
나는 인간의 내부에 숨겨져 있는 욕망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보았네. 인간은 자기를 발전시키고 새로운 발견을 하기 위하여 여기저기를 헤매어 다니지.
그런가하면 자진하여 속박에 몸을 내맡기고,
습관이란 궤도를 전혀 돌아보지 않는 내적 충동도 간직하고 있는 걸세.
신기한 일이지. 이 곳에 와서 언덕 위에서 아름다운 계곡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내 주위의 모든 것이 내 마음을 매료하는 거야.
저 작은 숲! 아아, 저 숲 그늘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었으면!
저 산봉우리! 아아, 저기서 이 고을 전체를 내려다보았으면!
연이어져 뻗어 있는 언덕과 정다운 계곡들!
아아, 저 속에 융합될 수 있었으면!
나는 서둘러 그 곳으로 갔다가 되돌아왔네.
내가 바라던 것은 그 곳에 없었네.
아아, 저 너머 먼 곳은 미래와 비슷해!
크고도 어렴풋한 것이 우리 앞에 조용히 가로놓여 있지.
우리의 감정도 또 우리의 눈도 그 속에 융합되어 가네.
그리하여 우리는 동경하는 걸세.
아아! 우리의 전존재를 내팽개치고,
단 하나의 위대하고 숭고한 감격의 환희에 충만하고 싶구나, 하고 말일세.
그러나 아아! 서둘러 그 것에 가 닿아
<저 너머 먼 곳>이 <여기>가 되고 보면, 모든 것이 지금까지와 마찬가지인 걸세.
우리는 여전히 비관과 옹색 속에 서 있는 거야.
그리고 우리의 영혼은 어느 틈에 빠져 달아나 버린 청량제를 추구하여 헐떡이는 거지.
그래서 아무리 마음을 잡지 못하는 방랑자라도
최후에는 자기의 고향을 그리워하게 되는 걸세.
자기의 작은 집, 자기 아내의 품, 자식들의 재롱, 처자를 부양하는 일,
그런 것들 속에서, 넓고 넓은 세계를 돌아다니며 찾아도 찾을 수 없었던
기쁨을 발견하게 되는 거라네.
나는 아침해가 떠오름과 동시에 발하임으로 나가네.
주막집 채소밭에서 완두콩을 따 가지고, 걸상에 앉아 그 깍지를 까며 호메로스를 읽지.
좁은 부엌에 가서 냄비를 하나 찾아내어 버터를 떠 넣은 다음,
냄비를 불 위에 얹고 완두콩을 볶는다네. 냄비뚜껑을 덮고 그 옆에 앉아서,
때때로 냄비를 흔들어 완두콩을 뒤섞기도 하지.
그러고 있을 때 나는,
오딧세우스의 정숙한 아내 페넬로페에게 구혼하는 뭇사나이들이
소와 돼지를 잡아서 각을 떠 그것을 불에 굽는 광경을 눈앞에 떠올린다네.
나로 하여금 이렇게 평온하고 진실한 감정으로 충만케 해 주는 것은
부족사회 시대의 생활상, 바로 그것이라네.
다행이도 나는 그것을 아무런 꾸밈없이 내 생활 속에 얽어 넣을 수가 있는 걸세.
행복한 기분일세. 내 마음은 순진하고 단순한 인간의 기쁨을 감지할 수가 있네.
그 사람들은 손수 가꾼 양배추를 식탁에 올리고 그것을 맛본다네.
아니, 양배추만이 아니지. 그것을 심었던 맑게 갠 아침,
거기에 물을 주며 무럭무럭 자라나는 과정을 즐겼던 흐뭇한 저녁,
좋았던 나날의 그 모든 것을, 식탁 앞에 앉은 그 시간에 다시 맛볼 수가 있는 것이지.
6월 29일
그저께, 시내의 의사가 법무관 집에 찾아왔었네.
그 때 나는 로테의 동생들에게 둘러싸여 놀고 있었지.
어떤 아이는 내몸에 매달리고, 또 어떤 아이는 나에게 장난을 걸었으며,
나는 또 그들을 간질이면서 한데 어울려 떠들어 대고 있었다네.
그 의사는 줄곧 커프스 주름이나 칼라 장식을 매만지는 위인인데,
우리가 놀고 있는 광경을 보고, 인간의 품위를 손상시키는 행동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네.
그의 표정을 보고 그것을 알 수 있었지.
그러나 나는 그런 것에는 아랑곳없이, 점잖은 설교 따위 할 테면 하라지, 하고
아이들이 무너뜨린 카드로 만든 집을 다시 지어 주었네.
그런 일이 있은 후에 그 의사는 온 시내에 험담을 퍼트리고 다닌 걸세.
법무관네 아이들은 원래 버릇이 없었는데,
베르테르가 들어서 더욱 못쓰게 되어 버렸다는 거지.
빌헬름이여,
이 지상에서 내 마음과 가장 가까운 것은 아이들이라네.
아이들을 지켜보고 있으면, 사소한 일에서도
장차 그들이 지녀야만 할 일체의 덕성과 힘이 싹트고 있음을 알 수 있네.
그들의 거짓 속에 미래의 의연하고 꿋꿋한 성격을 볼 수 있으며,
장난 속에 세상살이의 위험을 극복해 나가는 유머와 재치를 엿볼 수 있지.
그 모든 것들이 조금도 손상되지 않고 그대로 나타나는 걸세.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나는 언제나 이류의 스승인
예수의<너희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이라고 하는 황금 같은 말씀이 생각나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친구여,
우리와 같은 동등한 존재, 우리가 모범으로 삼아야 할 어린아이들을
우리는 마치 예속물처럼 다루고 있지 않은가.
우리네 어른들은, 어린아이들은 그들의 의지를 가져서는 안 되는 줄 알고 있네
그렇다면 우리네 어른들도 의지를 갖고 있지 않단 말인가?
나이가 많고 분별이 있기 때문인가!
오오, 하느님, 당신의 눈에는 다만
나이 많은 어린이와 나이 적은 어린이가 있을 뿐일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쪽을 당신이 더 기뻐하시는지는
당신의 아들 예수께서 벌써 옛날에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당신의 아들은 믿으면서도,
그 분의 말씀에는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습니다.
물론 어제 오늘에 비롯된 일은 아니지만,
어른들은 아이들을 어른의 틀에 넣어서 기르고 있네
안녕, 빌헬름이여! 더 이상 수다를 떠는 건 그만두기로 함세.
7월 1일
로테가 곁에 있다는 것이 환자에게 있어서 얼마나 기쁜 일인지,
나 자신의 경우에 비추어서 잘 알 수 있네.
내 불행한 마음은 병상에서 쇠약해져 가고 있는 사람들보다 더 비참한 용태라네.
로테는 시내의 어떤 신실한 부인 집에 가서 며칠을 지내게 되었네.
그 부인인, 의사의 진단에 의하면 임종이 멀지 않았는데,
그 최후의 며칠 동안 로테의 간호를 받고 싶어하고 있다는 걸세.
지난주에 나는 로테와 함께 성......라는 마을의 목사를 찾아갔었네.
산 속으로 1시간 정도 들어간 곳에 있는 작은 마을인데, 우리는 4시경에 그 곳에 당도했네.
로테는 둘째 여동생을 데리고 갔었지.
두 그루의 커다란 호두나무 그늘에 덮여 있는 목사 관의 안뜰에 들어섰을 때.
그 선량한 노목사는 문간 앞의 벤치에 앉아 있었네.
로테를 보더니 노인의 얼굴에 생기가 돌더군.
마디투성이인 지팡이를 짚는 것도 잊어버리고, 로테를 맞이하기 위해 일어서려 하였네.
로테는 얼른 달려가서 노인을 앉히고 자기도 그 곁에 앉아 아버지의 안부를 전한 다음,
목사가 늘그막에 얻은 막내동이라는 못생기고 더러운 아이를 끌어안는 것이었네.
로테가 그 노인을 대하는 모습을 자네에게도 한번 보여 주고 싶을 정도였네!
그녀는 반쯤 안 들리게 된 노인의 귀에 잘 들리도록 목소리를 높이고,
뙭?튼튼하면서도 갑자기 죽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며,
카를스바트 온천물이 좋다는 이야기,
그리고 노인이 이번 여름에 그 곳에 가기로 결심한 것을 칭찬해 드리고
지난번에 뵈었을 때보다 훨씬 건강이 좋아 보인다는 등등의 이야기를 하였네.
나는 그 동안에 목사 부인에게 인사를 하고, 그녀와 이야기를 했지.
노목사는 그새 기운을 많이 되찾았네.
그래서 내가 시원스러운 그늘을 드리워 주고 있는 커다란 호두나무를 칭찬하자
얼마간 더듬더듬하면서도 그 나무의 내력을 이야기해 주었네
"오래된 쪽 나무는 누가 심었는지 몰라요.
이 목사가 심었다고도 하고, 저 목사가 심었다고도 하거든요.
그런데 저 안쪽에 있는 나무는 우리 집사람과 동갑으로, 오는 10월로 50살이 됩니다.
집사람의 아버지, 곧 내 장인이 아침에 저 나무를 심었는데,
그 날 저녁에 집사람이 태어났다는 거예요.
장인은 나의 선임목사였는데. 이루 말할 수 없이 저 나무를 애지중지했답니다.
저도 역시 마찬가지지요. 지금부터 27년 전의 일입니다만,
내가 가난한 대학생으로서 처음 이 안뜰에 들어섰을 때,
집사람은 저 나무 아래 있는 재목더미에 앉아 뜨개질을 하고 있었답니다"
따님은 어디 갔느냐고 로테가 물으니까,
시미트 씨와 같이 목장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로 갔다더군.
그러고 나서 노인은 그 선임목사가 자기를 무척 아껴 주었고,
그의 딸도 자기를 사랑해 주었으며,
처음에는 부목사가 되었다가 얼마 후에 후계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네.
이야기가 막 끝났을 무렵, 그 목사의 따님이,
조금 전에 이야기가 나왔던 그 시미트라는 사람과 같이 채소밭 쪽에서 들어왔네.
그녀는 진심으로 로테를 환영하더군. 솔직히 말해서, 그녀는 꽤 매력이 있었네.
갈색 머리에 몸매가 좋고 발랄한 아가씨로,
얼마 동안이라면 시골에서 이야기 상대가 될 만한 여인이었네.
그녀의 애인(시미트 씨가 곧 그런 관계라는 것을 나타내는 태도를 취했거든)은
괜찮게 생겼으나 말이 없는 남자로,
로테가 아무리 말을 걸어도 우리의 이야기에 어울리려 하지 않았네.
내 마음이 서글퍼진 것은 그가 우리와 어울리려 하지 않는 것이
식견의 부족 때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고집과 심술 때문이라는 것을 그의 표정으로 알 수 있었기 때문일세.
그 사실은 유감스럽게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의심할 여지가 없어졌네.
우리가 다같이 산책을 나갔을 때 프리데리케는 로테와 짝이 되기도 하고
어쩌다가 나와 나란히 걷기도 했는데,
그런 때면 그렇쟎아도 가무잡잡한 그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지는 걸세.
그래서 로테는 기회를 보아 내 소매를 잡아당김으로써,
프리데리테에게 지나치게 친근하게 굴지 말라고 일깨워 주었다네.
아무튼 뭔가 못마땅한 일이 있다고 해서 사람들이 서로 상대방에게 괴로움을 끼치는 일,
특히 인생의 한 창때로서 모든 기쁨에 대하여
가슴을 활짝 열어 젖힐 수 있는 젊은이들이 얼굴을 찌푸리고,
서로의 얼마 되지 않는 행복한 날들을 망쳐 버리는 것처럼 불쾌한 일은 없네.
그들은 훗날에 가서야 비로소 자기들이 낭비해 버린 세월을
보상받을 길이 없음을 깨닫게 되지만, 그 땐 이미 늦은 거지.
이런 생각으로 울화가 치민 나머지,
나는 저녁 무렵 목사관 안뜰의 테이블에 둘러앉아 우유를 마실 때,
화제가 이 세상의 고락에 미치자 실마리를 잡고
변덕스러운 불쾌감이란 것에 대해 마구 공격을 해대지 않을 수 없었네
"우리 인간들은 곧잘 푸념하기를, 복된 날은 적고 언짢은 날은 많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인 것 같습니다.
하느님이 날마다 내려 주시는 은혜를 우리가 항상 마음을 활짝 열고 즐기려 한다면,
언짢은 일이 생기더라도 그것을 거뜬히 견뎌 낼 만한 힘이 날 것입니다."
"하지만"하고 목사 부인이 응수하였네.
"자신의 감정도 자기 뜻대로는 잘 안 되거든요.
신체의 상태에 따라 크게 좌우되는 거예요.
몸이 좋지 않을 때에는 뭘 봐도 마음에 들지 않는 걸요"
나는 일단 그 말을 시인하고 말을 이었네.
"그렇다면 그것을 병이라 간주하고, 그 병을 치료할 방법이 없을까 생각해 봅시다."
"좋은 말씀이군요"하고 로테가 말했네.
"그건 자기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고 생각해요.
제 경우에 비추어서 알 수 있어요. 뭔가 속상하는 일이 있어서 불쾌한 기분이 들면,
저는 벌떡 일어나 나가서 정원을 왔다갔다하며 대무곡을 두어 곡조 노래합니다.
그러면 곧 기분이 가라앉거든요"
"그게 바로 제가 말하고자 했던 겁니다"하고 나는 말했네.
"불쾌한 감정은 게으름과 같다고 할 수 있죠. 아니, 게으름의 일종이지요.
우리는 선천적으로 게으름에 젖기 쉬운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 분발하면 일은 척척 진척되게 마련이요,
활동 속에서 진정한 기쁨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프리데리케는 열심히 경청하고 있었네.
그러나 시미트라는 그 청년은 이론을 제기하고,
인간이 자기 자신을 지배할 수는 없다,
더구나 자신의 감정을 좌지우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네.
"지금 문제삼고 있는 건 불쾌감으로"하고 나는 말했지.
"그건 누구나 회피하고자 하는 감정입니다.
자신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시험해 보지 않고는 아무도 알 수 없는 겁니다.
병이 나면 누구든지 이 의사 저 의사를 찾아다니고,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아무리 괴롭더라도 절제하고,
아무리 쓴 약이라도 거부하지 않을 겁니다"
그 성실한 노목사가 우리의 토론에 참여하고 싶어서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을 눈치챈 나는,
목소리를 높여 노인 쪽을 보고 말했지.
"죄악에 대한 설교는 허다하게 들었습니다만,
불쾌감을 훈계하는 설교는 아직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 설교는 도회지 목사나 해야겠지요"하고 목사는 말했네.
"농부에겐 불쾌감이란 없어요.
하긴 때로 그런 설교를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적어도 목사 부인이라든가 법무관 님께는 약이 되기도 할 테니까"
그 말에 모두들 웃었네. 노목사 자신도 유쾌하게 웃어젖혔는데.
밭은기침을 쿨룩거리는 바람에 토론은 잠시 중단되었네.
이윽고 그 청년이 다시 입을 열어 이렇게 말했네.
"당신은 불쾌감을 죄악이라고 하셨는데,
그건 좀 지나친 말씀인 것 같이 생각되는군요"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하고 나는 말했지.
"자기 자신과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에게
두루 괴로움을 끼치는 일이 죄악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서로를 행복하게 해 주지 못한다는 그것만으로도 죄악이라 하기에 충분한데,
우리 각자에게 허용된 기쁨까지 서로 빼앗아야만 할 까닭이 뭡니까?
자기 자신은 불쾌하지만 혼자 견디어 내며 남들에게는 그것을 나타내지 않고,
주위 사람들의 즐거운 기분을 망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이 있다면
그 분이 누군지 알고 싶습니다. 불쾌감이란 오히려
자격지심에서 비롯된 마음속의 울분, 자신에 대한 불만,
그리고 그것들과 결부된 어리석은 허영심에 의하여 북돋워진 질투가 아닐까요?
행복한 사람을 보고서도, 그 사람이 자기로 인해 행복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불쾌해 하고, 그것을 용납 못할 일로 생각한단 말입니다"
로테는 나를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네.
프리데리커의 눈에는 눈물이 어리어 있었네.
거기에 용기를 얻어 나는 말을 계속했지.
"어떤 사람의 마음을 지배할 수 있는 처지에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의 마음속에서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단순한 기쁨의 한 순간이
그런 폭군의 질투 섞인 불쾌감으로 인하여 망쳐진 것을 보상할 수는 없는 겁니다"
그 순간, 나는 가슴이 꽉 메는 기분이었네.
지난날의 갖가지 추억들이 되살아나면서 눈물이 핑 돌았네.
"우리가 날마다 자신에 대하여 이렇게 타이른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고 나는 큰 소리로 말을 이었네.
"너는 네 친구들에게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어.
다만 그 친구의 기쁨을 방해하지 않고 즐거움을 함께 나눔으로써
그 행복을 더욱 북돋우어 주는 일 이외에는......
네 친구의 영혼이 타는 듯한 정열로 인해 시달리며 고민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너는 한 방울의 완화제나마 그 친구에게 줄 수가 있는가?
그리고 또, 한창때의 꽃다운 시절을 너로 인해
허망하게 보내 버린 한 소녀가 중병이 들어
가슴아플 정도로 수척해진 채 드러누워 있다고 치자.
소녀의 눈은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임종의 진땀이 창백한 이마에 자꾸만 번져 나오고 있다.
그리고 너는 저주받은 자같이 그 병상 곁에 서서, 자신의 능력을 다 짜내어도
그녀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죽어 가는 사람의 기운을 돋우는 한 방울의 약, 용기를 되살려 줄 수 있는
한 가닥의 불꽃이라도 주입해 줄 수 있다면 모든 것은 다 바쳐도 좋겠노라고,
애끓는 슬픔에 잠겨 있다. 그러면서도 너는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는 거야......"
이렇게 말하고 있는 사이에, 내가 일찍이 당면한 적이 있었던
그와 같은 광경이 무서운 기세로 나를 엄습해 왔네.
나는 손수건을 눈에 갖다 대고는 자리에서 앉아 있었네.
"그만 돌아가요"하는 로테의 목소리에 나는 겨우 제정신을 차릴 수 있었네.
돌아오는 길에 로테는, 내가 모든 일에 지나치게 열중하는 것 같은데,
좀 자중하라고 간곡히 충고하는 것이었네.
"선생님은 그 때문에 몸을 망치게 될지도 몰라요! 자기 몸은 자기가 돌보지 않으면 안 돼요!"
아아, 나의 천사여! 나는 오직 당신을 위해 살아가겠소!
'종합상식 > 문학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 괴테 5. (0) | 2011.05.06 |
---|---|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 괴테 4. (0) | 2011.05.06 |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 괴테 2. (0) | 2011.05.06 |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 괴테 1 (0) | 2011.05.06 |
마지막잎새(The Last Leaf:1905) (0) | 2011.05.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