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 괴테 2.
5월 27일
이제 보니 나는 비유와 연설을 늘어놓기에 정신이 팔려서
그 아이들이 그 위에 어떻게 왔는지
자네한테 이야기하는 것을 잊은 것 같구먼.
어제 편지에서 자네에게 단편적으로 이야기했다시피,
나는 그림의 분위기에 사로잡혀서
그 쟁기에 걸터앉은 채 2시간이나 그대로 있었다네.
저녁때가 다 되었을 때 가정주부로 보이는
젊은 여자가 그 아이들에게로 급히 다가왔네.
아이들은 그 때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얌전히 있었던 걸세.
그 여자는 한 손에 작은 바구니를 들고 있었는데,
아이들을 보고 멀리서부터 소리를 지르더군.
"필립! 너 정말 착하구나!"
그녀는 나에게 눈인사를 했네.
나도 눈인사를 하며 일어나서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아이들의 어머니냐고 물었지.
그녀는 그렇다고 대답하고는 큰아이한테 흰빵 반쪽을 준 다음,
갓난아기를 안아 올리더니 어머니의 사랑이 물씬 풍기는 키스를 하더군
그녀는 말했네.
"이 필립에게 아기를 맡겨 놓고서 제일 큰애를 데리고 시내에 갔었지요.
흰빵이며 설탕, 죽을 쓸 질냄비를 사려고요"
보니 뚜껑이 떨어져서 열린 그 바구니 속에 그 물건들이 다 들어 있었네
"한스(이것이 갓난아기의 이름이었네)에게 오늘 저녁에 수프를 끓여 주려고요.
개구쟁이 녀석 큰아이가 어제 질냄비를 깨뜨려 버렸거든요.
남은 죽을 서로 먹으려고 필립과 싸우다가 말씀이에요"
그 큰아들은 어디에 있느냐고 나는 물었네.
풀밭에서 두세 마리의 거위를 뒤쫓고 있노라고 그녀는 대답했는데,
그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 큰아들이 뛰어오더니
바로 아랫동생에게 개암나무 회초리를 선물하는 것이었네.
나는 그녀와 이야기를 계속했는데, 그녀는 그 마을의 학교 교사의 딸이며,
그녀의 남편은 사촌의 유산을 상속받기 위해
스위스에 여행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네
"모두들 남편을 속이려 한 거예요"
하고 그녀는 말을 이였네.
"남편이 편지를 몇 번이나 내었는데도 답장이 안 오는 겁니다.
그래서 그리로 떠난 거지요. 언짢은 일이나 생기지 않아야 할 텐데......
남편한테서 도무지 소식이 없어서요......"
나는 그녀와 그대로 헤어지기가 어쩐지 서운해서,
두 아들에게 1크로이째르씩을 주고 갓난아이를 위해서도
1크로이째르를 그 어머니에게 주면서, 시내에 나가거든
수프에 곁들일 흰 빵을 사다주라고 말했네. 그런 연후에 우리는 헤어졌네.
나의 가장 사랑하는 벗이여,
고백하거니와 도저히 내 마음을 진정시킬 수가 없을 때는,
그런 여인은 안달복달하는 법 없이 행복스럽게 정착하여,
애환의 좁은 테두리를 돌며 그날 그날을 살아 나가는 거라네.
나뭇잎이 지는 것을 보고서도 이제 겨울이 오는구나 하는 것을 느낄 뿐,
다른 생각이라고는 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지.
그 때 이후로 나는 곧잘 그 곳에 간다네.
아이들은 이제 나하고 아주 낯이 익어서, 내가 코피를 마시고 있을 때에는
설탕을 얻어먹고, 저녁에는 버터 빵과 우유를 노나 마시곤 한다네.
일요일에는 그들에게 1크로이째르씩을 꼭꼭 주기로 하고 있네.
예배시간이 지났는데도 내가 거기 가지 못했을 때에는
주막집 여주인에게 나 대신 그들에게 돈을 주라고 해 두었네.
아이들은 스스럼이 없어져서 나에게 온갖 이야기를 다 해 준다네.
특히 마을아이들이 많이 모였을 때면
그들의 드센 감정과 욕망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데, 그것이나를 즐겁게 해 준다네.
이 훌륭한 신사에게 아이들이 폐를 끼치지나 않을까 해서
애들의 어머니가 무척 신경을 쓰는데,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납득시키느라고 나는 꽤 애를 먹었다네.
5월 30일
지난번에 내가 그림에 대해서 썼던 것은, 시에도 그대로 들어맞는 말일세.
멋진 대목을 찾아 내어 그것을 대담하게 표현하면 되는 걸세.
그렇게 하면 물론 적은 말로써 많은 것을 나타낼 수가 있지.
내가 오늘 목격한 광경을 그대로 묘사한다면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가가 될 걸세.
그러나 문학이니 정경이니 목가니 하는 그런 것들이 무슨 소용이겠나.
우리는 자연현상 그 자체에 흥미를 느끼면 됐지,
그것을 이렇게 저렇게 주물럭거릴 필요는 없네.
이런 서론을 늘어놓았다고 해서 그야말로 대단한 일을 기대한다면,
자네의 그 기대는 완전히 어긋날 걸세.
그토록 세차게 내 흥미를 끌었던 것은
어느 농가의 한 젊은 머슴에 지나지 않으니까 말이야
내 이야기는 언제나 그렇듯이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을 것이고,
또 자네는 으레 내가 과장해서 이야기한다고 생각하겠지.
아무튼 그 무대는 역시 발하임인데,
이런 희한한 이야기가 생길 만한 곳은 역시 발하임밖에는 없다네.
그 보리수 아래에서 코피 파티가 있었네.
나는 거기 모인 사람들이 별로 탐탁지 않았으므로,
핑계를 대고 한데 어울리지 않고 따로 떨어져 있었네.
농사꾼 차림의 한 젊은 청년이 그 근처의 농가에서 나오더니,
지난번에 내가 걸터앉아서 스케치를 했던 그 쟁기를 손질하기 시작했네.
그 인상이 마음에 들기에 나는 그에게 신상에 대한 이야기를 물어 보았네.
우리는 곧 가까와졌고, 이런 부류의 사람들과는 늘 그렇지만,
곧 흉허물없이 이야기를 주고 받게 되었네.
그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어떤 과부 집에서 머슴살이를 하고 있는데, 좋은 대우를 받고 있다는 것이었네.
그 여주인에 대한 이야기를 자꾸 하면서 칭찬을 늘어놓는 것을 보고,
나는 곧 이 청년이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여주인을 사모하고 있음을 알아챘지.
그의 말에 의하면, 그 여주인은 이제 젊지도 않고,
첫 결혼에서 하도 시달림을 당했기 때문에 재혼할 마음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네.
그의 말투로 미루어, 그 여주인이
이 청년에게 있어서는 다시없이 아름답고 매력있는 존재이며,
또 첫결혼에서 겪은 그 쓰라린 상념을 지워 버리기 위해서도
그녀가 자기를 선택해 주기를 열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똑똑히 알 수 있었네.
이 청년의 순수한 모정, 그 사랑과 진정을 그대로 되풀이해야만 하겠지.
여간 위대한 시인이 아니고서는 그의 몸짓이며 표정,
목소리에 담긴 정감, 눈길 속에 깃들여 있는 정열 등을 동시에
자네에게 전달하기는 불가능할 걸세.
아니, 아무리 위대한 시인이라도
그의 태도와 표정 속에 어리어 있는 그것을 재현한다면 서투른 실패작이 될 뿐이지.
특히 내 마음을 감동시킨 것은, 내가 자기와 여주인과의 관계를 좋지 않게 받아들이고,
여주인의 정숙한 처신을 의심하지나 않을까 하고,
그가 진심으로 걱정스러워하는 점이었어.
여주인의 얼굴 생김새며, 젊음의 매력은 이미 사라졌는데도
꼼짝없이 자기를 사로잡는 그녀의 몸매에 대하여 얘기하는
그 청년의 태도가 얼마나 매력적이었던가 하는 것을,
나는 다만 마음속으로 되풀이할 수 있을 뿐일세.
나는 출생 이후 오늘날까지,
안타까운 욕정과 뜨거운 소망이 이토록 순수한 형태로 나타난 것을 일찍이 본적이 없네.
아니, 그런 것은 꿈에도 생각한 적이 없네.
이러한 순수성과 진실을 생각하면 내 영혼은 그 심중으로부터 불타오른다네.
그 진실과 애정의 생생한 모습은 어디를 가나 나를 따라오네.
마치 그 불꽃이 나에게 옮겨 불기라도 한 것처럼 숨가쁘고 애가 탄다네.
이런 소리한다고 나를 나무라지는 말게.
나는 될수록 빠른 시일 안에 그녀를 만나 보고 싶네.
아니, 다시 생각해 보니 그녀를 만나는 건 피하는 게 났겠네.
애인의 눈을 통하여 그녀를 보는 편이 나을 것 같네.
직접 보면, 지금 내 마음속으로 그리고 있는 그녀와는 딴판일 우려가 있으니까.
그 아름다운 영상을 무엇 때문에 깨뜨려 버릴 것인가?
6월 16일
왜 편지를 하지 않았느냐고? 그런 소릴 묻다니, 그러고도 자네는 학자 축에 끼는가?
그래, 짐작이 가지도 않는단 말인가? 나야 으레 건제하고, 아니, 건제 이상일세.
게다가 한마디로 말하면, 새로운 친지가 생겼는데, 그것으로 내 마음이 가득하다네.
나는, 글쎄, 뭐라고 써야 할지 알 수가 없네.
그지없이 사랑스러운 한 여인과 어떻게 하여 알게 되었는지.
그 자초지종을 차근차근 이야기한다는 것은
나로서는 불가능해. 나는 행복하며 만족하고 있네.
그래서 훌륭한 사실 기록자가 될 수 없는 걸세.
천사라네! 제기랄, 이건 누구나 자기 애인을 가리켜 하는 소리 아닌가.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그녀가 얼마나 완벽한가 하는 것을 자네에게 설명할 수가 없네.
요컨대 그녀는 내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 버렸다네.
더없이 총명하면서도 순진하며, 더없이 착실하면서도 다정하고,
더없이 발랄하고 활동적이면서도 차분한 마음을 지니고 있는 여인일세.
그녀에 대하여는 어떤 말을, 어떤 식으로 하더라도 모두가 하찮은 잔소리,
어줍지 않은 추상적 표현이 될 뿐, 그녀의 모습을 올바르게 나타내지 못할 걸세.
이 다음에 아니지, 이 다음으로 미룰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이야기하지. 지금 이야기하지 않으면 기회가 없을 것 같으니까 말일세.
왜냐하면, 그건 우리 사이니까 하는 얘기지만,
이 편지를 쓰기 시작한 뒤로 나는 벌써 세 번이나 펜을 놓고 뛰쳐나가려 했다네.
나는 오늘 아침에, 오늘은 그녀에게 가지 않겠다고 스스로 맹세를 했던 터일세.
그런데도 자꾸만 창가로 가서는, 해가 어디쯤 떠 있나 살펴보곤 하는 걸세.
나는 나 자신을 이겨 내지 못했네.
그녀에게 가지 않을 수가 없었네.
거기 갔다가 지금 막 돌아온 참일세. 빌헬름이여,
나는 밤참으로 빵을 먹고 자네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는 걸세.
그녀가 귀엽고 발랄 한 어린이들,
곧 8명의 동생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광경을 보면, 내 영혼은 크나큰 환희에 젖는다네!
이런 식으로 써내려 가면, 아무리 읽어 봤자 자네는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없겠군.
좋아, 그렇다면 억지로라도 내 마음을 가라앉혀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함세.
지난번에 자네에게 이야기했던 바와 같이 나는 법무관인 S씨를 알게 되었는데,
그 분은나에게 자기 은둔처 라기보다 자기의 작은 왕국으로 한번 놀러 오라고 했었지.
그런데 나는 그 분 집에 놀러 가는 걸 미루어 오고 있었다네.
만일 우연이라는 것이 나로 하여금 그 한적한 고장에 숨겨져 있던
그 보물을 발견하게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결코 거기에 가지 않았을 것일세.
내가 알게 된 젊은이들이 시골에서 무도회를 개최하였는데,
나도 기꺼이 거기에 참석했었지.
나는, 마음씨가 곱고 예쁘장하기만 할 뿐 달리 이렇다 할 장점이 없는,
이 도시에 살고 있는 소녀에게 파트너가 되어 줄 것을 부탁했네.
서로 협의를 한 결과, 내가 마차를 세내어 파트너인 그 아가씨와
그녀의 사촌 동생을 태우고 무도회장으로 가되,
그 도중에 샤를로테 S네 집에 들러 그녀를 데리고 가기로 합의가 되었지.
"아름다운 아가씨를 알게 되실 거예요"
수풀 속에 널찍하게 나 있는 길을 따라,
그 사냥 별장을 향해 달려가는 마차 속에서 내 파트너인 그 소녀가 말했네
"반하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하고 그녀의 사촌동생이 덧붙이는 걸세
"왜요?"
하고 나는 물었지.
"그 아가씨는 벌써 약혼한 분이 있으니까요"
하고 내 파트너인 소녀가 대답하더군.
"약혼자는 아주 훌륭한 분인데, 지금 여행중이랍니다.
그분의 아버님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정리할 일도 있고,
또 좋은 일자리를 물색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요"
그런 소리를 들어도 나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네.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기 15분전에 우리는 그 집 문 앞에 닿았어. 몹시무더웠다네.
여자들은 소나기가 한바탕 내리지나 않을까 하고 걱정들을 했네.
지평선 일대에 우중충한 잿빛 구름이 깔려 있어서 한 소나기 몰고 올 것만 같았네.
나는 어설픈 기상학의 지식을 둘러대며 여자들의 걱정을 달래긴 했으나,
나 자신도 속으로는 무도회가 소나기로 중단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네.
내가 마차에서 내리자 하녀가 문간에 나오더니,
로테 아가씨가 곧 나오실 테니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말하더군.
나는 안뜰을 지나서 우람한 안채를 향해 걸어갔지.
입구의 계단을 올라가서 현관 안으로 들어서자,
일찍이 본 적이 없는 정겨운 광경이 눈에 띄었네.
현관방에 2살에서 11살 사이의 아이들 여섯이 한 소녀를 둘러싸고 있었네.
몸매가 아름다운 중키의 그 소녀는 청초한 흰옷을 입었는데,
팔과 가슴에 연분홍 장식 끈이 달려 있었네.
소녀는 흑빵을 손에 들고 자기를 둘러싼 아이들에게
각각 그 연령과 식욕에 따라 한 조각씩 잘라 주었는데,
어느 아이에게나 그야말로 다정스레 그것을 건네주는 것이었네.
아이들은 빵을 채 자르기 전부터 저마다 그 작은 손을 높이 들어올린 채 기다리고 있다가,
빵조각을 받으면 아주 천진스럽게 "고마와요!"하고 소리를 지르는 걸세.
그러고서 아이들은 각자가 받은 몫에 만족하며,
자기들의 언니인 로테가 타고 갈 마차와 손님들을 보려고, 어떤 아이는 뛰어나오기도 하고,
또 어떤 아이는 얌전한 성품인지 천천히 걸어서 대문께로 나왔다네.
"미안합니다"하고 그녀는 나를 보고 말했네.
"선생님께서 여기까지 이렇게 오시도록 하고, 또 아가씨들을 기다리게 해서......
옷을 갈아입고, 또 제가 잘라 주어야만 한다고 막무가내랍니다"
나는 그저 상투적인 인사를 했지.
내마음은 온통 그녀의 자태와 목소리, 그리고 그 동작에 집중되어 있었네.
그녀가 장갑과 부채를 가지러 거실로 뛰어갔을 때,
나는 비로소 제정신으로 돌아와 이 최초의 놀라움으로부터 헤어날 수 있는 여유를 찾았다네.
아이들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나를 보고 있었네.
나는 막내둥이에게로 다가갔다네.
그 애는 매우 귀염성스러운 얼굴의 사내아이였는데,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치더군.
그 때 로테가 되돌아와서 "루이야, 사촌형님하고 악수해야지"하고 말했네.
그 아이는 시키는 대로 스스럼없이 손을 내밀었네.
콧물을 흘려 코밑이 약간 지저분했지만 나는 그 애에게 마음에서 우러난 키스를 했네.
"사촌형님이라뇨?"하고 로테에게 손을 내밀면서 말했지.
"나를 아가씨의 친척이 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을 만한 사람으로 생각해 주시는 건가요?"
"아, 그건"하고 로테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네.
"저희들에겐 사촌이 아주 많답니다.
설마 그들 가운데서 선생님이 가장 나쁜 분은 아니겠지요......
"출발하면서 로테는 자기 바로 아랫동생인 소피에게 아이들을 잘 보살피도록 이른 다음,
승마산책을 나간 아버지가 돌아오시거든
인사 못 드리고 떠났다고 잘 말씀드려 달라고 부탁하였네.
그리고 다른 아이들에게는,
소피 언니를 자기처럼 생각하고 말을 잘 들어야 한다고 타일렀네.
두세 아이는 그러겠노라고 약속을 했으나
6살쯤 된 숙성해 보이는 금발머리 소녀는 이렇게 말하더군."
그렇지만 소피 언니는 로테 언니가 아니잖아. 우린 로테 언니가 더 좋단 말이야"
사내아이 둘은 어느 틈에 마차 뒤에 올라타고 있었네.
내가 사이에 들어 조정을 해서,
로테는 숲 입구까지 아이들이 그대로 마차를 타고 가도 좋다고 허락했네.
그 대신 아이들은 장난치지 않고 얌전히 있겠다는 약속을 해야만 했지.
우리는 제각기 자리에 앉았어. 여자들은 인사를 나눈 다음,
서로의 옷맵시, 특히 모자에 대한 이야기를 몇 마디 주고받은 후,
그 날 저녁 무도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네.
그 이야기 도중에 로테는 마차를 세우게 하고 동생들을 내리게 했네.
아이들은 로테의 손에 다시 한번 입을 맞추고 싶어하더군.
큰 아이는 15세 소년다운 정감이 어린 키스를 했으나, 작은아이는 후딱 해치워 버리더군.
로테는 동생들에게 얌전히 잘 있으라는 말을 다시 한번 하였고,
우리가 탄 마차는 달려가기 시작했지.
내 파트너의 사촌동생이, 일전에 보내 준책을 다 읽었느냐고 로테에게 물었네.
"아뇨"하고 로테는 대답했네.
"그 책은 마음에 들지 않더군요. 돌려 드리겠어요. 그전의 책도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
어요"
"어떤 책인데요?"하고 내가 묻자 어떤 책이름을 댔는데,
나는 그 대답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네.
나는 그녀가 하는 모든 말에서 착실한 성품을 감지할 수 있었네.
그녀가 한마디 할 때마다 새로운 매력, 새로운 정신이 그 얼굴에서 번뜩이는 걸세.
그리고 그녀의 모습은, 자기 말을 내가 이해해 준다는 사실에 만족하여
점점 더 부드러워져 가는 것 같았다네.
"좀더 어렸을 때는"하고 로테는 말했네.
"저는 소설을 제일 좋아했었어요. 어떻게나 재미있는지,
일요일이면 방 한구석에 앉아서 미스 제니라든가
그런 주인공의 행운과 불운에 정신없이 빠져들곤 했었지요.
지금도 그런 책에 마음이 끌린다는 것을 부정할 생각은 없어요.
그렇지만 요즘은 좀처럼 책을 읽을 기회가 없기 때문에,
이왕에 읽을 바엔 제 취향에 맞는 책을 읽고 싶어요.
제가 좋아하는 작가란 그 작품 속에서 저 자신의 세계를 발견할 수 있고,
저와 같은 처지의 생활묘사로 친근감이 가고 흥미 있는 이야기를 쓰는 그런 작가예요.
저희 가정생활이 물론 천국과 같지는 않지만,
아무튼 뭐라 표현할 수 없는 행복의 원천이지요"
이 말을 듣고 나는 마음속의 감동을 감추느라고 무척 애를 섰다네.
그러나 그렇게 오래도록 감추고 있을 수는 없었네.
그녀가 골드스미드의 소설 <웨이크필드의 목사>를 비롯한 몇몇 소설에 언급하면서,
그것들에 대해 아주 정확한 견해를 피력하는 것을 들었을 때,
나는 그러다가 얼마 후에 로테가 다른 사람에게로
말머리를 돌렸을 때에야 비로소 나는 깨달았네.
다른 두 여자들이, 그 사이에 줄곧
자기네들이 완전히 무시당하는 것이
기가 막히다 는 듯이 눈이 휘둥그래져 있었다는 사실을 ......
그 사촌동생이란 여자는 몇 번이나 콧등에 잔주름을 지으며 비웃듯이 나를 쳐다보았는데,
나는 그런 것을 조금도 개의치 않았네.
화제는 댄스의 즐거움에 대한 것으로 바뀌었네
"이런 열정이 결점이라고 하더라도"하고 로테는 말했네.
"서슴없이 고백하겠어요. 저는 무엇보다도 댄스를 좋아합니다.
뭔가 걱정거리가 있을 때라도, 피아노 앞에 앉아서
엉터리로나마 무곡을 치고 있으면 그런 대로 기분이 풀리곤 해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안에도
나는 그야말로 홀린 듯이 그녀의 그 검은 눈을 쳐다보고 있었다네.
그 생동하는 입술, 그 발갛게 상기된 볼이 내 마음을 여지없이 사로잡았네.
그녀의 멋들어진 말에 넋을 빼앗겨 나는 몇 번이나 그녀의 말을 잘못 듣곤 했다네.
나를 잘 알고 있는 자네니까 능히 짐작할 만하겠지.
아무튼 무도회장 앞에 이르러 마차에서 내렸을 때,
나는 마치 몽유병 환자처럼 저물어 가는 세계 속으로 꿈결처럼 빨려 들어갔고,
불이 밝혀진 홀에서 울려 나오는 음악소리도 내 귀에는 거의 들르지 않을 지경이었네.
두 신사, 아우드란 씨와 다른 한 사람 모씨는,
이름 따위를 어떻게 일일이 다 기억하겠는가?
우리 마차가 있는 곳까지 와서 우리를 맞이하여 주었는데,
그들은 내 파트너의 사촌동생과 로테의 댄스 파트너로서
각자 자기의 상대 여성을 무도회장으로 인도해 갔네.
나도 내 파트너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지.
우리는 이리저리 뒤얽히며 메누엣을 추었네.
나는 잇달아 다른 여자에게 같이 추기를 청했었는데,
반갑쟎은 상대일수록 한번 어울리면 좀처럼 떨어져 나가려 하지 않더군.
로테와 그 파트너는 영국식 댄스를 추기 시작했네.
이윽고 차례를 따라 그들이 우리 조와 한데 어울려 선회를 시작하였을 때,
내가 얼마나 기뻐했는지는 자네도 짐작할 만하겠지.
그녀가 춤추는 모습을 자네에게도 보여 주고 싶네!
그녀는 몸과 마음을 온통 춤에만 집중시켜 그 속에 몰두해 버리는 걸세.
몸전체가 하나의 화음일세. 아무런 근심도 거리낌도 없으며,
오직 춤만이 전부요, 춤 이외의 일은 생각조차도 하지 않는 것 같다네......
그 순간에는 다른 모든 것이 그녀에게서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네.
나는 로테에게 두 번째 대무곡의 상대가 되어 주기를 청했네.
그녀는 세 번째 대무곡에서 상대가 되어 주겠노라고 약속을 하고는,
그지없이 사랑스럽고 솔직한 태도로,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것은 독일식 댄스라고 분명히 말하는 것이었네.
"여기서는"하고 로테는 말을 계속했다네.
"한 조를 이루고 있는 두 사람은 독일식 댄스를 출 때에도 그대로 짝을 짖는 것이 관례예요.
그런데 제 파트너는 왈츠를 잘 못 추니까,
그걸 안 춰도 되면 좋아할 거예요.
선생님의 파트너도 왈츠는 출 줄을 모르고 또 좋아하지도 않아요.
영국식 댄스를 출 때 보니 선생님은 왈츠를 잘 추시더군요.
그러니까 독일식 댄스의 상대로 저를 희망하신다면,
선생님께서 제 파트너에게 그렇게 이야기해 주세요.
저는 선생님의 파트너에게 이야기할께요"
나는 그러겠노라고 약속의 악수를 했네.
그리하여 우리가 짝을 지어 춤추는 동안,
로테의 파트너인 그 신사는 내 파트너의 상대가 되어 주기로 이야기가 되었지.
드디어 춤이 시작되었네.
우리는 얼마 동안 팔을 이리저리 바꿔 가며 춤을 즐겼지.
그녀의 춤추는 모습은 경쾌하고 매력적이었네.
이윽고 왈츠가 시작되어 천계의 별들처럼 서로의 주위를 선회하기 시작하자
그걸 제대로 출 줄 아는 사람은 극소수였으므로 처음에는 다소 어수선했네.
우리는 혼란이 진정되기를 느긋하게 기다렸지.
그리하여 서투른 사람들이 물러가고 홀에 거치적거리는 대상이 없어졌을 때,
우리는 가볍게 춤추기 시작했네,
우리 조와 아우드란 조만이 오래도록 춤을 추었지.
일찍이 그토록 경쾌하게 춤추어 본 적은 없었네.
마치 꿈속을 해 메는 것 같았네.
그지없이 사랑스러운 여인을 품에 안고 번개처럼 춤추며 돌아가다 보니,
내 주위의 모든 것이 다 사라져 버리는 걸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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