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8
제2부 삐딱하게 보고 바로 말하기
9. 서태지를 잊지 않는 이유
진정 나에겐 단 한 가지 소망하는 게 있어.
갈라진 땅에 친구를 언제쯤 볼 수 있을까?
망설일 시간에 우리는 떠나요.
서태지가 (발해를 꿈꾸며)를 불렀을 때 영향력 있는 어느 대학신문은
팽창적 민족주의, 쇼비니즘, 어설픈 감상주의가 혼재된
조악한 통일 이념이 자리잡고 있을 뿐이라고 비판했다.
됐어, 됐어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
전국 구백만의 아이들의 머릿속에 모두 똑같은 것만 집어넣고 있어.
누가 가르쳐도 별로 다를 바 없고 어디를 가봐도 대동소이한 내용을 가지고
전국 9백만의 아이들을 매일 아침 7시 30분부터 불러내는
그 답답한 교실에서 젊음을 보내기 너무나 아까운 청소년들이
(교실 이데아)를 불렀을 때는 서태지가 저항을 일의적으로 소재화했다고 했다.
그러나 입장 바꿔 생각해 보라. 도대체 대중가요가 할 수 있는 일이 어디까지인가를.
통일과 교육 문제에 대한 논문을 써야 하나. 혹은 계몽가나 군가를 만들어야 옳은가?
서태지는 영향력이 크다.
청소년들은 해방 50주년을 기념하는 기념식장에서
통일에 대해 역설하는 대통령의 담화를 기억하지는 못해도 (발해를 꿈꾸며)는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좀더 생각하는 젊은이라면 남북조시대라고 평가했어야 할
신라의 삼국통일(?)로 인해 우리가 잃어버린 역사, 발해를 찾으려 하면서
민족통일이 무엇을 의미해야 할 것인지를 생각해 보았을 수 있다.
서태지는 그 계기를 마련했다.
사랑했다,
이별했다,
그래도 잊지 못한다
여지껏 대중가요는 사랑 타령 일색이었다.
사랑했다, 이별했다, 그래도 난 널 잊지 못한다, 난 네가 밉다,
그래도 여전히 슬프다의 도식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사랑 타령은
사랑이 인간공동체의 유일한 문제인 것처럼 호도한다.
그 결과 `사랑`이라는 신선한 단어는 설레임을 잃어버리고
더 이상 울림이 없는 싸구려 장식품으로 전락했다.
물론 사랑은 사람을 살맛나게도 하고 살맛을 잃어버리게도 하는
영원한 사람의 관심사이기에 대중가요가 사랑을 노래한다는
그 사실 자체는 비판할 일이 못 된다.
단지 대중가요가 사랑만을 주제로 하고 있다면 그때 우리는 거기에서 나는
문화 조작의 냄새 때문에 `사랑 타령`이라고 사랑을 격하시키고 싶은 것이다.
현실이 이와 같은데 그 흔한 사랑 타령에서 벗어난 노래를 만듦으로써
서태지가 많은 젊은이들에게 공동체의 상처에 눈을 돌리는
노래를 갖게 했다면 그것은 긍정적인 일이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공동체의 상처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지까지 서태지의 책임이란 말인가?
그는 정치가도, 행정가도,시민운동가도, 사회과학자도 아니다.
그는 가수다. 그리고 그는 가수로서 충분히 자격 있다.
떠나고 싶은 세상,
그러나 어디로 가나
그 서태지가 잠시 왔다가 갔다.
95년 가을 그들이 (Come Back Home)이라는 힙합 장르의
느린 비트를 가지고 나타났을 때 많은 사람들이 입을 모았다.
역시 서태지!
그들은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고, 날개를 갖고 비상을 꿈꾸지만
비상하고자 하는 에너지는 추락의 에너지가 되는 청소년의 아픔을 위로하고 돌아갔다.
늘 바람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서태지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기다리고 있을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에 나오는 모란을 지향했고 그리고 모란이었다.
찬란한 슬픔의 봄에 필 모란을 기다리듯 그들을 기다리는 청소년들이 있기에
그들은 `서태지가 돌아왔다`는 단순한 사실만으로 음반을 1백만 장 이상 팔 수 있었던 것이다.
서태지의 노래는 형태 파괴적이고 실험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의 노래는 젊다.
형태 파괴적이고 실험적인 것은 싱그러운 개혁의 의지를 본질로 하는 젊음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도대체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더러운 현실을 언뜻 들어 알 수 없는 말로 받아넘긴다.
그러나 주제 없이 중언부언 하는 것은 아니다. 주제는 명확하다.
제4집은 강하지 못해 세상에 치이고 애증에 치여서 상처난 젊은이의 노래다.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는 청소년들은 아직 다듬어지지지 않은 막강한 에너지,
폭발적인 에너지를 가졌지만 감성은 아직 여려 그 에너지를 다듬는 법을 몰라 상처받기 쉽다.
정직과 신용을 강조한 교과서 암기를 강요하는 부모와 사회가 아이들에게 바라는 것은
정직한 사람들을 짓밟고 물질만능주의의 주역이 되는 것일 때 그들은 당황한다.
이미 황금만능주의에 물든 이성이 가진 것 없고 비전도 없지만
인간적 자존심을 지키며 당당하게 살고자 하는 자기에게서
성공의 비전이 없다고 도망갈때 그들은 내뱉듯 노래하고 싶다.
`아무도 모르게 내 속에서 살고 있는 널 죽일 거야.
내 인생 내 길을 망쳐버린 네 모습을 없애놓을 거야.
아름답던 기억들을 없애놓을 거야’라고.
그러나 그 상처난 열정을 가지고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완성을 향해 달려가는 젊음을 서태지는 지향한다.
빛을 버리고 어둠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거친 인생이 강렬한 비트음과 함께
어둠 속으로 가라앉지 않고 자기 세상을 향해 비상의 꿈을 노래하는 것이다.
가야 하겠어, 나의 세상으로.
이 슬픈 아픔들이 다 날아갈 수 있게.
숨소리까지 죽여가며 그 노랫말을 찾아내고 때로는 전율하면서
함께 춤을 추며 그 노래를 부르는 청소년은 무엇에 공감했던 것일가?
명확하게 말하고 확실하게 느끼는 아폴론의 소리, 이성의 소리가 아니라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해도 호소력을 갖는 디오니소스의 현란한 춤,
강렬한 비트에 들어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내 삶을 막은 것은 나의 내일에 대한 두려움,
반복됐던 기나긴 날 속에 버려진 내 자신을 본 후...
점점 더 크게 더해 갔던 이 사회를 탓하던 분노가 마침내 증오가 됐어.
진실들은 사라졌어. 혀끝에서.
더 이상 아름다운 젊음은 없다
사실 청소년은 두렵다.
불투명한 미래가. 일반적으로 청소년기는 미래에 대해 열려 있는 자유의 시기라고도 하고
초원의 빛이여, 꽃의 영광이여를 노래할 수 있는 아름다운 열정의 시기라고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젊음의 때를 보낸 사람이 신선한 떨림으로 가슴 설레던
아주 짧았던 한때를 추억하면서 한가롭게 할 수 있는 말일 뿐
지금 청소년기를 살고 있는 사람의 보편적이고 대체적인 정서와는 너무나 멀다.
청소년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 시기는 미래가 가장 불투명하고 억압이 가장 맣은 힘든 시기다.
낙오되지 않기 위해 가져야 한다고 요구되는 것은 돈과 권력에 가까이 갈 수 있는 능력이지만
진작 내가 원하는 것은 그런 가치들에 오염되지 않고도 인간 대접을 받고 사는 것일 때
나의 세계와 기존의 세계와의 간극 때문에 민감해진 청소년들은
나는 무엇을 바라고 살아야 하나를 묻게 되는 것이다.
그 민감한 시기에 이들은 똑똑히 본다.
황금과 권력을 위해서는 어떠한 거짓도 불사하는 사람이 성공하고
그 성공의 길은 불로소득, 무책임, 무사안일에서부터 사기, 테러, 상품화된 성,
마약, 테러 등으로 포장되어 있다는 것을.
그런데도 그 길을 걸어 성공한 이는 콧대를 세우고,
성공하려는 이는 성공을 위해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성공한 이 앞에서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한없이 비굴해지는 것을 볼 기회는 드물지 않다.
그런 현상을 보면서 젊은이들은 당황스러움을 넘어 불안해 하는 것이다.
언젠가 나도 거기에 끼여야 할까봐.
육체의 포식과 안일을 위해 영혼을 팔아먹는 파우스트의 아류가 될까봐서.
아니, 그렇게 살지 않으면 내 곁에는 아무도 남지 않게 될까봐.
미래에 성공과 안일을 얻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보다 더 큰 두려움은
성공과 안일을 위해 최소한의 인간다움도 지킬 수 없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다.
서태지는 먹이에 의해 먹이만으로 사육되는 양계장의 닭처럼 돈에 의해 움직이는
쓸개 빠진 인간이 되지 않고 인간의 기를 유지하고 싶은 젊은이를 대변하는 것이다.
돈의 노예, 이미 너에게 남은 자존심은 없어졌어.
그들이 네게 시키는 대로 움직여야 해. 끌려다녀야 하는데.
까맣게 썩은 돈이 나를 유혹할 때 그러면 돈의 많고 적음에 따라 인간 등급이 매겨지는 세상,
윤리도 없는 돈을 위해서는 전쟁, 마약, 살인, 테러도 불사하는 세상에서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단순하게 말하면 그것은 검은 돈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돈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이란
돈으로 명예를 사고 친구를 삼는 썩어버린 세상에서의 추방이다.
돈을 벌지 않기로 결단하는 젊은이의 미래란 돈으로부터 해방된 건강한 미래가 아니라
누구와도 화해하기 힘든 고독하고 이상한 미래다.
청소년이 미래를 설계하려 한다면 인간의 자존심을 한없이 허물어 뜨리는 돈을
저주하면서도 돈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서태지가 설득력을 갖는 공간은 바로 거기다.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미래를 향해 사육되는 열정들이
세계의 입구에서 일련의 번호표를 달고 달리기를 강요하고,
그들이 달려야 하는 그 문명의 길 위에서 까맣게 썩어버린 검은 돈이 심판관일 때
그 풍경 속에서 느끼는 한없는 막막함이 서태지에 열광케 하는 청소년의 밑배경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정직한 사람들의 시대 논쟁
그런 청소년을 끌어안지 못하면 지도자의 자격이 없다.
내가 당황하는 것은 ‘가사내용이 전반적으로 부정적’이라며 (시대유감)이라는 곡에서
‘정직한 사람들의 시대는 갔어...
네 가슴 속에 맺힌 한을 풀 수 있게 되기를’
이 대목을 삭제하라고 명한 공륜의 태도다.
“사회를 부정적으로 표현하는 노랫말이 청년들에게 좋지 못한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라는데
아무래도 이 태도는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사회를 부정적으로 표현하는 노랫말이청년들에게 좋지 못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부정적으로 만드는 정직하지 않은 사람들, 깨끗하지 않은 돈의 거래가
청소년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공륜의 이번 결정은 서태지가 청소년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해서였다고 한다.
그런 보도를 보면서 나는 공륜이 잊고 있는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서태지가 우상인 것이 아니라 서태지를 공감하게 하는 상황이
서태지를 우상으로 만든 것이라는 점이다.
젊은이들이 서태지를 선택한 것이지 서태지가 젊은이들을 끌고 가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단순히 산재한 분위기를 구체화해 주는 계기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슬플 때는 슬픈 음악이, 기쁠 때는 환희에 찬 음악이 듣기 편한 것처럼
부정적인 것은 부정적으로, 긍정적인 것은 긍정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선전 도구나 환상이 아닌 예술을 만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노랫말 수정 요구에 침묵으로 항의했던 서태지의 태도는
길들지 않은 젊은이다운 자신감을 보여주었다.
10. 미국적 시선을 벗기고 싶은 이유
요즘 미국 언론이 문제를 삼는 것 중에 재미있는 것이 있다.
원숭이를 실험용으로 쓸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그것이다.
의학하는 사람들은 쥐를 가지고 실험을 자주 한다.
그런데 쥐는 사람과 너무 다르다. 예를 들면 특정한
약이 쥐의 비만을 치료했다고 해서 인간의 비만을 치료한다고 확신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원숭이는 사람과 너무 닮아 있다.
살아 있는 사람의 인체를 해부할 수 없으니까 원숭이의 몸에 칼을 대서
그 변화를 보고 인체에 적용하는 것은 인간의 병을 치료하는 데 결정적 도움이 된다.
원숭이의 실험, 그것은 의학자에게 절실할 거라는 것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의학의 발전을 위해 해마다 만 마리 이상의 원숭이가 실험 대상이 되고
그 중에는 죽을 때까지 실험의 대상만 되다가
실험실에서 차갑게 버려지는 원숭이도 있다고 한다.
그래서 동물애호가들이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동물의 동물권 문제다.
동물도 인간과 똑같이 이 지구상에서 당당하게 살아갈 권리가 있다는 것,
그것이 동물권이다.
동물의 세계를 다큐 형식으로 보여주는 프로가 많이 생겼다.
그런 프로를 즐겨 보면서 동물의 세계에 빠져들면
동물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부부생활을 가장 오래 하는 동물은 학이다.
학은 보통 50년간을 일부일처제로 산다.
어쩌다가 자기 짝이 사고로 죽으면 학은 다른 파트너를 구하지 않는다.
죽을 때까지 혼자 산다.
그런데 외로움 때문인지 짝이 죽은 지 3년 안에 거의 죽는다.
그것을 고고함의 표상이라고 읽어도 학에게 실례는 안 될 것 같다.
생긴 모양과 성격은 다르다는 것을 가르쳐 준 동물이 있다. 고릴라가 그것이다.
고릴라는 수줍음이 많아 다른 동물이 가까이 오는 것을 꺼린다.
힘이 엄청 세서 10미터 굵기의 대나무를 순식간에 뚝 끊을 수 있는 고릴라가
수줍음이 많다는 사실에 웃음이 나왔다.
힘센 자는 수줍다는 명제가 고릴라에게 어울릴 법한 얘기다.
재밌는 건, 그 큰 덩치의 고릴라가 채식주의자라는 것이다.
밀림에서 풀과 나무덩쿨을 먹고 사는 채식주의자 고릴라는
가족 중심으로 생활하며 공격하지 않으면 결코 대들지 않는 유순한 동물이다.
이렇듯 동물의 세계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
동물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미국 사람들이 그런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며칠 전 미국에서 원숭이를 의학 실험용으로 쓰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고 했을 때 나는 이상했다.
동물까지 그렇게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 나라가
어떻게 인간에 대해서는 저리도 무심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미국이 원숭이까지 생각해 주는 것을 보고
미국 사람들은 동물까지도 알뜰 살뜰 사랑하는,
날 때부터 휴머니스트인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문제가 있는 발상이라는 것이다.
동물은 사랑할 수 있어도 이해관계가 얽히면 인간까지도 저버릴 수 있는 나라가 미국이다.
우리는 미국의 원죄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요즘 미국이 세계의 패권을 잡고 있으니까 모두둘 영어 배우느라 정신이 없어
미국의 본질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
나는 한번쯤은 미국이 어떤 나라인지, 그 태생의 한계는 무엇인지를
미국이 가르친 관점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관점에서 생각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라스트 모히칸’ 같은 영화는 미국을 미화하는 일등 공신이다.
미국은 철저히 힘의 논리를 따르는 나라다. 독립운동을 할 때부터 그랬다.
미국의 독립이란 미국의 관점에서는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이겠지만
세계사의 관점에서는 인디언들에 대한 침략사다.
영국에서 아메리카, 그 넓은 땅으로 건너온 영국사람들이
그 땅에서 제일 먼저 한 게 무엇이었는가?
그건 그 땅에 살고 있는 인디언들을 쫓아낸 일이었다.
인디언들을 쫓아내기 위해 소위 ‘신대륙’에 들어온 영국사람들은
인디언들을 인간 이하라고 규정하고 멋대로 죽이면서
아메리카 땅을 자기 땅으로 만들지 않았는가!
원숭이까지 사랑한다면서 인디언이 영화의 전면에 등장하는 영화로 기억되는
좋은 영화 두 편이 있었다. ‘미션’과 ‘늑대와 춤을’이 그것이다.
이 두 영화를 좋은 영화로 평가하고 싶은 이유가 있다.
사실, 이 영화들이 만들어지기 전에도
미국 영화에서 인디언이 등장하는 영화는 매우 많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서부 영화들이 모두 그렇다.
제목도 기억할 수 없는 많은 서부 영화가 있었는데
대체로 그 영화들의 구도는 정의의 사도로서 보안관이 나오고
그 보안관에게 잡혀도 좋은 ‘악한’인디언이 나온다.
6, 70년대 많이 상영되던 서부 영화에 나오는 인디언은
대체로 잔인하고 게으르고 미련한 사람의 표상이다.
이런 영화가 암암리에 조장한 것은 무엇인가?
잔인하고 게으른 인디언은 정의의 사도인 보안관의 손에 죽어 마땅하고
그러므로 영국에서 건너온 백인들의 서부 개척은 정당하다는 것이다.
미국은 백인 우월주의를 관철시키기 위해 이미 그 땅에서 억울하게 쫓겨간
그 땅의 옛 주인인 인디언들의 역사를 지우려 했던 것이다.
그런 미국적 현실에서 영화 ‘미션’과 ‘늑대와 춤을’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은 일단 대단한 일이라고 보아야 한다.
‘늑대와 춤을’은 많이들 보았을 것이다.
케빈 코스트너를 세계적 스타로 만든 그 영화는 백인/선, 인디언/악의 구도를 깨고
백인과 인디언이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우연히 인디언들의 세계로 들어간 케빈 코스트너가 인디언과 친구가 되면서
‘늑대와 춤을’이라는 인디언식 이름을 얻는다.
범신론적인 문화를 가진 인디언들은 자연의 어떤 사태의 흔적을 포착하여
이름을 붙이는 상당히 철학적인 문화의 소유자들이다.
이름을 얻었다는 것은 그 사회 공동체의 일원으로 초대받았다는 것과 통한다.
‘늑대와 춤을’이라는 이름을 얻은 백인은 인디언과 우정을 나누면서
자연에 친숙한 인디언 문화의 아룸다움을 본다.
자연을 파괴한 자리에 문명의 나라를 세운 백인이 자연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시점에서
자연과 벗하며 살아가는 인디언과 정서적인 교감을 나누는 것이다.
물론 이 영화에서도 관점은 백인의 관점이다. 그것이 이 좋은 영화의 한계다.
이것은 우리가 농촌에 가서 참 아름답다,
여기서 살고 싶다고 한마디 해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실지로 농촌 사람들의 고뇌는 이해하려 들지 않으면서
좋은 공기, 흐른는 냇물 같은 데만 감탄하는 것이다.
‘늑대와 춤을’이 18세기 이전에 아메리카의 주인이었던 인디언 문화에 대해
미국이 어느 정도 긍정적 관심을 갖기 시작한 영화라면 그보다 한발 앞선 영화는 ‘미션’이다.
‘미션’에는 백인들이 들어와서 자기들이 살던 땅을 잃어버리게 된
인디언들의 치열한 삶이 어느 정도 드러나 있고
그 인디언들을 총칼로 위협하면서 영토를 넓혀간 백인들의 잔인성도 반성하고 있다.
인디언들이 아름다운 화음으로 추기경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은
우리도 노래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항변하는 것이다.
그런데 기술의 발달로 총칼과 자동차를 가지고 인디언을 습격한 백인들은
그 사건을 조사하러 온 추기경 앞에서 자신들의 잔인함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렇게 말한다.
“저들의 노래는 노래가 아니라 단지 소리일 뿐입니다.
저들은 자기 자식도 죽이는 동물입니다.”
그 당시 인디언 사회에는 분명히 자식을 죽이는 풍습이 있었다.
물론 모든 자식이 아니라 셋째 아이부터다.
그러면 왜 인디언이 자기 아이를 죽였을까?
그 풍습은 인디언의 전통이 아니라 백인들이 총칼을 들고
소위 ‘신대륙’에 들어온 후에 생긴 것이다.
인디언들은 백인들이 총칼로 위협하면 자식을 들쳐업고
도망가야 종족이 보존되는 극한 상황에 있었다.
신식 무기를 피하기 위해서 아이를 들쳐 업고 뛸 때
그나마 기동성을 갖기 위해서는 부부가 한 아이씩 업어야 한다.
두 아이를 업을 수 없으니까 셋째부터는 보호하기 힘들다.
그런 상황에서 셋째 아이를 죽이지 않고 살려 두면 어떻게 될까?
자식이니까 일단 정이 들면 적이 공격해 오는데 두고는 못 간다.
함께 도망가기 위해 모두가 함께 움직이면 기동력이 약해져 종족이 전멸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보면 인디언들이 자식을 살해한 행위는
차라리 종족을 보존하기 위한 치열한 삶의 행위다.
한 칼에 비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미국 역사의 기원에는 인디언들에 대한 원죄가 있다.
지금 그 원죄에 대한 반성이 생각 있는 작가나 영화감독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국가적 차원에서 원죄에 대한 반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말이다.
인디언이 다시 힘을 갖고 요구하기 전에는 국가적 차원의 반성은 기대할 수 없겠지만.
우리도 균형 감각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이런 것부터 고쳐야 한다.
세계사 시간에 우리는 이렇게 배웠다.
1492년에 콜룸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했다고.
얼마나 웃기는 말인가! 신대륙 ‘발견’이라니. 발견이라는 말은 처음일 때 쓰는 말이다.
최초가 아닌데 발견이란 말은 쓸 수 없다.
콜룸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했다면 콜룸부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발을 들여놓은
최초의 인간이라는 말일 텐데 그게 전제하는 것이 무엇인가?
콜룸부스 이전에 아메리카에 살고 있던 인디언들은 사람도 아니라는 얘기가 아닌가!
오만불손한 미국 상무장관
이런 방자함을 우리가 그대로 인정해주니까 동물의 삶도 보호해 주는
정말 괜찮은 나라라고 광고하면서 또 다른 한편에선
여전히 옛날 인디언에게 했던 힘의 논리를 우리에게 여전히 사용한다.
얼마 전에 미키 켄터 미국 상무장관이 우리나라에 왔었다.
우리 시장에 개방 압력을 넣기 위해.
예를 들면, 자동차 시장 더욱 확대 개방하라,
통신 시장 추가로 개방하라, 그런 거 부탁하러 온 것이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그런 부탁하러 온 사람이 장관의 청사로 찾아오지 않고
우리 장관을 자기가 머무는 호텔로 찾아오게 했다고 한다.
말이 되나? 우리나라의 미국에 대한 무역수지는
96년에 1백억 달러 정도의 적자가 예상된다고 한다.
상황도 그런데 오라 가라 하는 건 말이 안 된다.
이것은 우리가 우습게 보였다는 것이고 여전히 미국은
우습게 보이는 나라에 대해서는 예전에
인디언에게 했던 방식과 비슷한 방식을 취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는 정면 승부를 걸어야 한다.
그런 사람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여론이다.
나는 우리 장관이 그 호텔에 못 가겠다 하고 여론을 일으켜야 했지 않나 하는 아쉬움이 든다.
그렇게 고자세로 나오는 사람과 협상이라는 거 해봤자 협상이 아니라 수용이다.
요구하는 거 일방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미국은 철저히 힘의 논리를 따르는 나라다.
인디언을 쫓아낸 원죄를 가진 미국은 흑인들에 대한 동물적 폭력을 휘둘러왔다.
그들은 아프리카에 가서 그 땅에서 잘살고 있는 흑인들을 노예로 쓰기 위해
투망으로 흑인들을 잡아온 나라다.
그리고는 인권, 인권 외치다가 이제는 동물권까지 보호해야 한다고 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여전히 흑인들을 차별하는 나라다.
제발, 우리 독립기념관의 주봉인 흑성산 위의 미군 기지부터 치워 주고
동물 사랑을 노래했으면 좋겠다.
세계 어느 나라에 그 나라 독립의 상징인 독립기념관의 주봉에
다른 나라 군대가 들어와 있는 경우가 있나! 나는 그 예를 모른다.
우리는 미국 시민이 아니다.
얼마 전에 미국의 클린턴에 제안해서 G7 정상들이 리옹에서 반테러 선언을 했다.
사우디에서 폭탄 테러가 일어난 직후에 있었던 일이다.
물론, 테러는 근절되어야 한다.
그런데 나는 테러는 나쁘니까 반테러는 정당하다는 식의
단순한 논리는 지양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면 어떻게 되나?
윤봉길 의사가 상해 홍구 공원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수뇌부를 폭살한 사건이나
안중근이 봉천에서 이등방문을 살해한 사건도 테러인가?
그 사건들도 그 당시에 서구의 언론들이 전형적으로 테러로 규정한 사건들이다.
반테러, 좋다.
그런데 테러의 성격을 한번쯤 규명한 후에 반테러를 말해도 좋지 않을까?
중동에서는 테러가 자주 일어난다.
그 원인은 무엇보다도 미국의 해외주둔군이 원인인 경우가 많다.
테러는 몽땅 근절되어야 할 폭력이라고 몰아붙이는 건 너무나 짧은 생각이다.
예전엔 안중근, 윤봉길 같은 우리의 애국선열들은 서구 언론이 일본편을 들어서
테러리스트라고 몰아붙였던 참담했던 역사가 생각나서
일방적으로 미국의 시선, 서구의 시선만을 고집할 수 없다.
우리는 절대 미국 시민이 될 수도 없고 될 필요도 없다.
우리는 미국의 평화=세계의 평화이고 미국의 평화를 위협하는 것은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는 것이라는 미국식의 논리에 익숙해져서는 안 된다.
11.체념이 힘을 발휘하는 이유
태도를 바꾸면 훨씬 편해질 수 있는데 태도를 못 바꿔서 힘들게 살아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며칠 전 한 아주머니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 아주머니는 도시의 전형적인 중산층으로 외아들과 외동딸을 두었다.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이다.
누나인 외동딸은 5년전에 시집을 가서 잘살고 있고
28살 된 외아들이 결혼을 한 달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외아들이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아들의 어머니가 억장이 무너지는 고통을 겪고 있으리라고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아주머니가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문제는 바로 아들의 여자였다.
이 커플은 결혼식만 안 올렸지 10개월 전에 약혼을 하고 양가 합의하에 동거를 시작했다.
아들의 여자는 아주머니를 어머님, 어머님 하고 따랐고
아주머니도 우리 며느리, 우리 며느리 하면서 딸처럼 대해 주었다고 한다.
아들이 세상을 떠났을 때 아들의 여자는 임신중이었다.
벌써 임신 3개월이 되었고 그 사실을 아주머니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아들의 여자가 장례식이 끝나자 친정으로 돌아가서 소식을 끊었다고 한다.
아주머니는 하소연조로 말했다.
요즘 애들 너무 영악해서 세상에 나오겠다고 생긴 애 어떻게 하면 어떡하냐고.
연락도 안 하는 걸 보니까 아이를 어떻게 할 생각인지도 모른다고.
딸처럼 아꼈던 애가 배반감을 주는 데 참을 수 없이 화가 나서 화병이 걸렸다고.
아주머니가 어떻게 해야 하나가 내가 생각해야 할 문제였다.
아들은 죽고 없고 아들이 남길 수 있는 손주가 있다고 생각하면
그 손주를 보고 싶은 마음은 이해가 된다.
그 아주머니는 계속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나라면 아이를 낳아서 기를 텐데, 나라면 아이를 낳아 기를 텐데... 나쁜 애 같으니...
나도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함께 아들의 여자를 미워하는 것이
그 아주머니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아 슬쩍 말을 돌리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
아주머니면 아이를 낳아 키우셨겠죠?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주머니의 대답이 이어졌다.
그럼요, 나라면 아이를 낳아서 잘 길렀죠.
그래서 나는 또 물었다.
그런데 만약 그런 사건이 따님에게 생겼다면
그때도 아이를 낳아 키우게 하시겠느냐고. 그랬더니 아주머니는 주춤했다.
이 사건에서 가장 슬픈 사람은 아들의 어머니일지 모르지만
그 상황에서 가장 당황해서 슬플 겨를도 없는 사람은 역시 아들의 여자다.
그럴 때 어른인 어머니가 시각을 좀 바꿔주어야 한다.
시각을 조금 바꿔주면 훨씬 마음이 편해질 수 있는 일이 세상엔 많다.
이제 아이의 문제는 시가의 문제가 아니라 아이의 엄마 아빠의 문제다.
내가 시어머니의 입장이라면 우선 며느리가 되었을뻔한 여자를 만났을 것이다.
그래서 모든 가능성을 열어 주었을 것이다.
아이의 문제는 전적으로 네게 맡기겠다.
그런데 만일 네가 아이를 낳아 기르겠다는 쪽으로 결론이 나면
네가 원하는 쪽으로 우리가 도와 주겠다.
나더러 키우라고 하면 우리가 잘 키울 거고
그리고 나더러 아이의 법적인 문제만 해결해 주고 관심을 갖지 말라고 하면
관심을 갖지 않고 그저 고맙게만 생각하겠다.
만일 네가 너의 앞길을 위해 또다른 선택을 할 경우에도 개의치 않겠다고.
사실 요즘은 이런 일이 드물지 않다.
사고가 예고 없이 자주 발생하다 보니 이런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이 많다.
교통사고가 너무 많이 난다.
혼전의 경우만이 아니라 결혼한 후에도 이런 문제가 종종 발생한다.
그때 가장 당황하는 사람은 삶의 설계도가 한순간에 뒤엉키는 여자인 것이다.
둘 사이의 사랑의 결실이던 아이가 갑자기 삶의 족쇄로 변한다.
임신했다는 사실이 변하는 게 아니라
임신을 받아들여야 할 태도가 변해서 상황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여자들이 아이를 어떻게 하고 싶어한다고 생각하면 오해다.
여자들은 아이를 낳아 키우고 싶어하는 경우도 꽤 된다고 한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아이를 낳아 키울 여건이 안 되어서 낳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때 시가에서 무조건 낳아야 한다는 부담만 주지 말고
구체적으로 법적인 문제나 경제적인 문제를 어떻게 해줄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제시해 주는 것이 현실적으로 여자를 도와 주는 길이다.
그래서 그런 가능성을 전제한 뒤에
여자가 마음 편히 어떤 쪽으로든지 결정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이런 문제를 단순히 윤리적인 문제로만 생각해서
여자를 한쪽으로 몰아세우면 도망가고 싶어질 것이다.
결국은 그 여자의 인생이고 그 여자의 결단이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아주머니가 아들의 여자에게 온갖 가능성을 열어 줄 수 있고
결국 아들의 여자가 결정할 문제에 대해 초조해 하지 말고 결정을 기다린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마음이 편해질 것이다.
때로는 체념이 행복을 가져다 주는 명약일 수 있다.
12. 누구나 칭찬하는 사람을 중용해서는 안 되는 이유
세상에 태어나 그 누구 하나 자기편으로 만들지 못하는 사람은 고독하다.
나는 그런 사람의 고독을 사랑하기 힘들다.
반면 누구에게나 칭찬받는 그런 사람의 행복(?)도 부럽지 않다.
자기의 활동무대에서 누구에게나 괜찮다는 평을 듣는 사람들은
대체로 소심해서 성격이 희미한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이 괜찮다는 평가를 듣는 이유는 소극적으로 적이 없기 때문이지
적극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덕이 되는 일을 했기 때문은 아니다.
사실 모든 사람에게 덕이 되는 일이란 환상이다.
일을 하기 위해서는 선택과 배제가 확실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배운 티가 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며 온갖 경우의 수를 제시하고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람을 볼 때
신중하다는 생각보다는 소심하다는 생각이 들고
중요한 일을 의논해서는 안 되겠다는 다짐을 하곤 한다.
때로는 손해를 보더라도 비밀을 지키고 자기의 길이 아니다 싶으면 손을 뗄 수 있는 사람,
자기 판단이 있고 결단력 있는 사람이 일의 중요한 매듭을 짓는다.
그런 사람에겐 중요한 일을 의논하고 싶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사람의 유일한 장점은
언제나 다수의 의견이 자기의 의견이라는 점이다.
일이 되어질 때는 순리라는 명분으로 ‘되어가기 때문에
되는 일’에 참여하는 그는 좋은 시절에는 그저 성실한 사람이다.
그는 맡은 일을 하지만 절대로 일의 책임을 지지는 않는다.
일의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은
사람의 결단이 일의 필요조건이 아닌 경우에는 구별되지 않는다.
문제는 항상 어려운 시기에 터진다.
어려운 시기가 오면 대세를 타야 하는 그 사람은 나를 돕던 손을 거두고
대세를 따라 적에게 손을 내밀 수 있는 사람이 되기도 한다.
물론 그의 머리에선 그런 일은 ‘대세’라는 민주주의의 원칙일 뿐이지 결코 ‘변절’이 아니다.
대세 덕택에 그는 비싼 인간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언제나 희미하게 표정이 없는 사람으로 기억될 뿐이다.
중요한 자리에 중용을 할 때 모든 사람에게 나쁜 놈이라고
욕을 먹는 사람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그런 희미한 사람이 중요한 자리에 중용되는 것이다.
사실 모든 사람에게 자기 실속만 챙기는
나쁜 놈이라고 욕을 먹는 사람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런 사람을 중요한 자리에 앉히는 바보는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외로 희미하고 소심한 사람이 중요한 자리에 기용되는 경우가 많다.
어부지리는 원래 적이 없는 것이 유일한 장점인 사람에게 돌아가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욕 먹지 않기 위해 일을 안한다.
오히려 그가 하는 일이란 일을 잘못한 사람들을 대세의 이름으로 벌 주는 일이다.
그때 벌을 받는 사람은 일을 한 사람들이다.
나는 자기 목소리가 없는 사람이 싫다.
자기 표정이 없이 그저 남의 표정을 읽으려고만 하는 사람,
눈치만 보는 사람을 보면 지리하다 못해 무섭다.
욕심은 없어도 당당한 야심에 가슴 쭉 펴는 사람이 아름답다.
그러다가 일을 잘못하기도 하는 사람에겐 인간의 냄새가 난다.
내가 좋아하는 냄새다.
치밀하고 완벽해서 절대로 적에게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지 않고
오로지 성공을 향해 계산대로만 사는 지략가보다는
때로는 나락으로 구르더라도 자기 얼굴이 아닌 일에는 “아니야”를 외치고,
때로는 손해가 있더라도 자기가 해야 할 일은 결단하고
그 일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고 한판 승부를 벌이는 그런 사람이 좋다.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해 결국 높은 자리에까지 올라갔으나
인간의 표정을 잃어버린 중종보다는
비운의 장수로 끝나더라도 자기 표정이 있는 계백이 좋다.
그런 사람이 중요한 일을 할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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