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상식/문학관

나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9

오늘의 쉼터 2011. 5. 2. 14:50

 

나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9

 

제2부  삐딱하게 보고 바로 말하기

 

13. 결손 가정이 결손된 가정이 아닌 이유1.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가정은 참으로 소중한 것이다.

가까이 있기 때문에 많이 싸우지만 또 쉽게 이해하고 화해할 수 있는 사람들,

그들이 가족이다.

가정에서는 허술한 것이 죄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특정한 연출이 없이도 마음이 편할 수 있다.

가정이 언제나 지친 마음을 쉴 수 있는 곳은 아니지만

지친 마음을 돌아오게 하는 곳이기는 하다.

행복한 가정을 가졌든 불행한 가정을 가졌든

가정은 많은 사람들의 기본적인 삶의 출발점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이혼은 참을 수 없는 결혼의 가벼움?
삶의 양태가 급변하게 바뀌고 있다.

특히 남자와 여자의 결혼으로 시작되는 가족의 양태가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있다.

전통적 의미의 가정을 꾸미는 일이 ‘필수’가 아닌

 ‘선택사항’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이다.

가정을 이루는 일이 ‘선택’이 된다는 것은 한편에서는 독신이 증가한다는 것이며
다른 한편에서는 이혼이 상대적으로 자유롭다는 것이다.

 확실히 이혼률이 높아지고 있다.

94년도 통계에 따르면 94년 한 해에 40만 쌍이 결혼을 했고 10만 쌍이 이혼 청구를 했다.

이혼 청구는 30대가 44퍼센트로 가장 많고

20대가 34퍼선트로 그 다음을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결혼한 지 5년 이내의 이혼 청구가 70퍼센트로 가장 많은데 그중에서도 3~5년이 46퍼센트다.

이혼 사유 중 가장 많은 것은 배우자의 부정이나 부당한 행위라고 보고되었다.
 

그런데 이 통계 자료를 해석하는 언론의 시각이 재미있다.

한결같이 2, 30대 부부들의 가벼움, 인내심 부족으로 그 원인을 해석하고 이다.

그리고 이들은 한결같이 이혼한 부부 사이에서 방황하고 갈등을 겪으며

아이들이 장차 결손 가정에서 자라게 될 것을 염려하고 있다.

이와 같은 언론의 태도는 소위 ‘청소년 비행’이 터질 때마다

‘비행’에 가담한 한 사람이라도 ‘결손’ 가정 출신이기만 하면 예언가의 진단인 양

막강한 무게를 실어 청소년 비행의 원인으로 ‘결손 가정’을 제시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인형의 집을 나선 로라의 운명
 “산천 초목에 붙는 불은 세우라도 끄지만은

  이내 가슴 타는 불은 억수가 와도 아니 꺼지리.”
 “세월은 고향만을 비켜 흘러가는 것인지

  고향은 내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옛모습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괴어서 썩어가는 듯한 고향의 시간 속에서

  어머니는 그 버림받은 한 생애를 마감하고 있었다.”(윤홍길,‘에미’)


통계 수치상으로 보면 확실히 이혼률과 독신률이 상당히 늘었다.

지난 70년대만 해도 5퍼센트를 넘지 않았던 이혼률이

20여 년 만에 20퍼센트 이상으로 늘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과연 이 현상을 신세대 부부들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 때문으로 이해해야 하는가?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그동안 한국의 가정을 유지시켜 준 기둥이 무엇이었는가를 물어보면 간단하다.
 

무쇠처럼 단단하고 대포처럼 강력한 우리 가정을 받쳐주고 있었던 것은

부부의 사랑이나 그 사랑에 근거한 평화가 아니라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였고 그 이데올로기의 포로가 된 여자들의 희생이었다.

물론 그 희생도 선택의 여지가 있는 상황에서 스스로의 삶을 던진 숭고한 희생이라기보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강요된

지긋 지긋한 허위의 기둥에 가까운 것이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들에게 익숙한 것이라곤 남성의 시선뿐이다.

그리고 여자들에게 가장 서툰 것은 스스로 살아가는 법이다.

이 여자들은 가부장제가 만든 가정에서 개인적으로는  방되지 못한다.

이것은 이들의 운명을 대표하는 ‘인형의 집’ 로라를 상상해 보면 분명해진다.

인형의 집 바깥에서의 로라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바로 이런 질문이 대표적인 우문이다.

로라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테니까.
인형의 집에서의 로라의 운명은 성서에 나오는 탕자의 운명을 반복한다.

결국 아버지에게 용서를 구하고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이 탕자의 초상이었던 것처럼

로라의 최상의 삶은 남편이 버티고 있는 ‘인형의 집’으로의 복귀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탕자나 로라의 방황이란 부처님 손바닥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아버지에게 돌아가게 되어 있는 탕자의 위상이나

돌아갈 집이 있는 로라의 운명은 안정적이면서도 절망적이다.

언제라도 용서를 빌기만 하면 관대하게 받아들여 주는 거처가 있다는 점에서

안정적이라면 그 거처는 그곳으로부터 도망가고자 하는 모든 몸부림을

가위눌림처럼 헛된 저항으로 만들어 버린다는 점에서 절망적이다.

 

눈물을 쑥 빼놓은 멜로 영화들
시대를 이해하기 위해서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시대에 사랑받았던 영화나 드라마를 살피는 일일 것이다.

60년대, 70년대에 만들어진 우리 영화들은 대체적으로 순결(?)했던 여인이

예정대로 순종적인 아내로 아이들에게 무조건적으로 사랑을 주는 어머니로 변신,

가정을 지키기 위해 남편의 외도를 희생으로 끌어안은 과정이거나

가난으로 창녀가 되지만 고귀(?)한 성품의 남자를 만나 한 가정의 아내가 되는 과정,

아니면 남편의 외도를 희생으로 참았으나 결국 남편의 사랑을 얻지 못하다가

병으로 죽는 과정에서 남편이 조강지처의 고마움을 깨닫는다는 내용이 주축이다.
 

사실, 가정을 돈독히 하려는 이데올로기는

신데렐라의 동화와 함께 어릴 적부터 주입된 것이다.

불행한 어머니들을 보면서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소녀들이 꿈꾸는 것은 스스로 사는 삶이 아니라
‘왕자에 의해 구원되는 신데렐라’다.

그런 딸들의 환상은 열심히 예쁘게 예쁘게 살도록 하는 힘이 된다.

남성의 시선에 의해 자신을 보고 남편의 관점에서 사회화되는 것이다.
그러나 신데렐라를 꿈꾸며 가정으로 들어간 여성들은 초라한 아줌마가 되어
결코 행복하지도 주체적이지도 않았던 그들 어머니들의 삶을 되풀이한다.

인형의 집을 뛰쳐나올 힘이 없는 그들은 인형의 집에 어울리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 여인들이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자신의 굴레를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나아가서 그 굴레를 받아들일 힘을 얻는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지금 그때의 ‘멜로 영화’들은 가끔씩 코미디 프로에 등장,

뭇사람들을 웃길 정도로 우리의 정서와는 동떨어졌지만

한때는 뭇 여성들의 손수건을 적셨던 영화들이다.

이제는 50대 이상이 되어 있는 여성들은

왜 그 영화들을 보면서 영화의 주인공이 되어 함께 울었을까?

그것이 그들의 상황이고 세계였기 때문이었다.
 

이 영화들은 가정 내의 여자/

가정 밖의 여자, 사랑/

쾌락, 자유로운 남자/

순종적인 여자, 권위적인 남자/

그 권위를 사랑하는 여자의 구도를 갖는다.


그리고 가정 밖의 여자를 남자의 쾌락 혹은 죄악의 원천으로 규정한다.

물론 쾌락은 소중한 사랑이 아니라 떨쳐버려야 할 죄악이기 때문에 보호받을 수 없다.

그러나 이때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은

자유로운 남자가 아니라 자유로운 남자를 유혹한 여자다.

간혹 창녀로 규정된 이 불쌍한 여자들은 남자에 의해 가정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창녀가 주부가 되었다는 것이 가정 내의 여자

/가정 밖의 여자의 구도를 깨지 못할 뿐 더러

가정 내의 여자를 가부장제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모든 여자가 가정으로 들어가야 하며

가정 밖에 버려진 여자는 구원의 여지가 없는 죄인이라는 구도를 강건하게 할 뿐이다.

상황이 그렇다면 가부장 세계의 포로인 여성들은 자신들의 상황에 대해
논리적 체계를 세우는 것이 대책 없이 가출한 로라와 같은 운명이라는 것을
머리로 이해하진 못해도 피부로는 알게 마련이다.

그런 그들이 그들과 닮은 꼴인 가부장제에서 나온 영화를 보면서

가부장제에 의해 억눌리고 이지러진 그들의 삶을 눈물로 토해내면서

견뎌갈 힘을 얻는 것은 당연한 귀결처럼 생각된다.
 

오로지 눈물과 인내로 스스로의 억압을 견뎌나가는 것은 언제나 약자의 버릇이다.

인형의 집 바깥에서 로라가 당할 운명을 아는 현명한 여인들은
가부장제 사회를 거부하지 않음으로써 살아 남았다.

그것은 생존이라는 절박한 이름이었지 주체적인 삶이라는 당당한 이름은 아니었다.

살아내기 위해 그들은 남자보다도 더 가부장적인, 가부장제의 파수꾼이 되었던 것이다.

가부장제라는 어마 어마한 세계에서 여성들이 자신을 보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을 내리누르는 ‘피할 수 없는 세계’의 파수꾼 이 되는 길이다.
 

물론 약자가 파수꾼이 된다는 것은 앞잡이가 되는 것일 뿐이다.

앞잡이는 자기의 삶을 사랑하되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방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다.
절망적 상황을 절망감으로 체화할 겨를도 없이

오히려 모든 에너지를 그 상황을 돈독히 하고 강건하게 바치는 앞잡이란

동정할 수는 있지만 사랑하기는 힘든 이름이다.

주인의 힘을 자신의 힘으로 착각하는 앞잡이란 체제의 피해자이면서도

‘나는 보호받고 있다’는 착각에 황홀해 하는 사람이며
칼자루를 쥐고 있다는 환영 속에서 썩어가고 곪아가는 자신의 내면을 망각하는 사람들이다.

 

단지 약자라는 이유만으로
   “목이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식구라는 이름으로 저희끼리만 끼리끼리 뭉쳐서

    자기를 따돌리고 비웃고 약 올리는 것 같아 외롭고 서러웠다.”
     (박완서 ‘그 해 겨울은 따뜻했네’)

 

13. 결손 가정이 결손된 가정이 아닌 이유2.

 

의식이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마르크스는 확실히 뛰어난 과학자다.

여성의 지위가 차츰 변하기 시작한 것은 갑자기 로라가 똑똑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로라를 둘러싼 사회적 상황이 조금씩 바뀌었기 때문이다.

로라에게 숨구멍이 트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자 단지 약자라는 이유 때문에 뒤집어 쓰게 되어 있는 허물에 대해

쓰기를 거부하고 반항할 줄 알게 된 것이다.
이때 구습과의 갈등은 필연적이다.

아직도 엄연히 큰 힘을 발휘하고 있는 가부장제는 그것이 만든

가족제도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품을 떠나고 있는 사람들을 탕아로 규정한다.

왕성한 권력은 이제 싹을 키우려 하는 저항 세력을

인정하기 않으려고 흠집내기를 하는 것이다.

이때 필요한 것이 이데올로기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말 가운데 하나가 ‘결손 가정’이 아닐까?
 ‘결손 가정’이란 무엇인가? 부모의 이혼으로 한쪽 부모와 살고 있는 아이,
미혼모인 어머니와 살고 있는 아이가 결손 가정이다.

만일 남편과 아내가 온전히 존재하는 것이 가정의 조건이라면

그중 하나가 없는 것이 결손 가정일 것이다.

그런데 가정을 그렇게 규정해야 할 선험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없다고 생각한다.

있다면 자본주의 산업 사회라는 역사적인 이유가 있을 뿐이다. 

 

이혼은 선택의 문제
가정이란 무엇일까?

이에 대해 나는 가정에 대한 선험적인 규정을 할 의도는 없다.

사실 가족의 형태가 역사적인 필요나 요구에 의해 규정되어 왔다고 믿는 나는

가정에 대한 선험적 규정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가족 공동체는 가장 가까운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공동체라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가족의 기쁨은 나의 기쁨이 되고, 가족의 상처는 나의 상처가 된다.

가족이 행복의 공동체라고는 말할 수 없어도

삶의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 사회의 가정은

남자와 여자가 결혼 관계에 들어감으로써 새로운 가정이 성립된다.

그런 점에서 새로 혼인관계를 맺은 부부들은 자신들의 선택과는 상관 없이

소극적으로 가족의 구성원이 된 그들의 아이들과는 달리
적극적으로 가정을 꾸민 주체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주체들이 많은 이유로 이혼을 할 때 이들이 꾸민 가정이 해체되면서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어머니를 따라가거나 아버지를 따라가게 된다.

그리고 이때 우리가 소위 ‘결손 가정’이라고 말하는 부정적인 가정의 형태가 생긴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가정의 형태가 부정적이기만 한가 하는 것이 나의 문제의식이다.
모든 사회적인 제도가 그래야 하는 것처럼

가족 제도도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인간을 억압해서는 안 된다.
 

사실 매일 얼굴을 봐야 할 뿐더러 타자의 행동이 곧

그 구성원에게 직접적으로 경제적. 심리적 영향을 주는 가족 공동체는

그 속에 속한 개인에게는 누구에게나 의미 있는 운명 공동체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운명 공동체에서 아내나 남편이 함께 살아가는 것이

서로의 운명에 상처만 준다면 이혼하여 각자의 삶을 찾아가는 것이

오히려 건강한 삶일 수 있다.
물론 내가 이혼을 부추기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남자 혹은 그 여자와 살아간다는 것이 싫고 힘들어서 살아가는 일 자체가

괴롭거나 무의미한 사람들이 이혼할 때 얄팍하고 어설픈 윤리를 내세워

그것을 참을 수 없는 가벼운 결정이라고 매도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혼과 아이들
내 주변에는 친한 친구들이 이혼을 한 경우가 더러 있다.

그들은 모두 특정한 파트너와의 삶을 청산한 것에 대해서는 매우 홀가분해 하지만

 ‘이혼’한 사실에 대해서는 떳떳해 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그것은 그들이 당당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가 그 사건을 ‘가벼운 사람만이 저지를 수 있는

가볍지 않은 사건’으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신중한 결정이어도 사회적으로 드러날 때는 가벼운 결정이 되고 만다.
한번도 가볍게 살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가볍게 살 수 있는 삶을 동경한

그런 무거운 삶을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들이 제일 힘들어 했던 것은 역시 아이들 문제였다.

사실 아이들에게는 부부가 만나면 서로 상처만 내는 가정에서

부부와 함께 사는 것보다는 한 부모와 평안하게 사는 것이 더 나은 삶일 수 있다.

그러나 사회는 ‘결손 가정’으로 규정, 보이지 않는 폭력을 행사한다.
소위 ‘결손 가정’의 아이들이 ‘결손 가정’의 일원이라는 것 때문에

불행해야 할 이유가 없는데 사회가 ‘결손 가정’이라는 이유로

개인을 주눅들게 한다면 이것은 폭력이 아닌가?

눈에 보이지 않는 폭력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것에 대항해서 싸우려는 시도를 헛되게 한다.

적이 보이지 않는 싸움은 더욱 무서운 법인 아닌가!
 

나는 아버지 없이 어머니와 살아가는 청소년들의 얼굴이

‘결손 가정’출신이라는 칼 끝에 맞아 상처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또 어머니 없이 살아가는 청소년들의 푸른 마음이

‘결손 가정’이라는 보이지 않는 폭력으로 멍들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결손 가정’이 사회 악의 원천이라는 보도가 있을 때마다

아무 잘못도 하지 않고 몰래 몰래 위축되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집단의 횡포가 아닌가?
 

위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결손 가정’은 특정한 관점에서만 결손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결손 가정’의 형태들은

가부장제의 관점에서 규정된 가족의 형태를 이데아로 생각했을 때만

 ‘결손 가정’으로 규정되는 것이다.
새로운 시대의 가정은 자본주의와 가부장제가 만든

가족의 형태를 유일한 형태로 인정하지 않아야 한다.

물론 이 말은 그것이 가족의 형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부부 중심의 가족 형태는 가정을 규정지을 수 있는 중요한 형태지만

유일한 형태가 아니라는 것일 뿐이다.

 

결손가정, 그 폭력의 언어
그런 의미에서 나는 ‘결손 가정’이라는 말을 쓰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부부만이 가정의 적극적인 주체가 될 선험적인 이유는 없다.

부자 중심, 부녀 중심, 모자 중심, 모녀 중심 등의 가정들도

서로를 아껴 주고 사랑해 주는 소중한 가족의 형태에서 배제될 이유가 없다.

가정이란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미워하더라도 서로의 정서가 소중한 사람들이

함께 건강한 삶을 꾸며보고자 하는 곳에 존재하는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이혼을 죄악시하거나 ‘결손된’채로 잘살고 있는 사람들을

 ‘결손 가정’으로 매도하는 것은 상처를 덧내는 것일 뿐이다.

당사자가 아니라면 침묵할 일이고 당사자와 가까운 사람이라면

이혼으로 난 상처를 치유할 수 있도록 감싸 주고

새 삶의 가능성을 함께 모색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죄악시해야 할 일이 있다면 이혼이나 ‘결손 가정’ 자체가 아니라

이혼의 전제가 되는 결혼 관계를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지배하는 시장으로 만드는 일이다.

한평생 살아갈 사람에게서 자신과의 인간적인 관계보다

그 사람의 직업,경제적 능력, 집안 등에만 관심이 있다면

그런 결혼 관계가 지속되는 것이야말로 슬픈 일일 것이다.
 

우리나라 결혼 시장의 규모가 연 5조억 원을 넘어섰다고 한다.

과히 시장이라 할 만하다.

혼수 시장의 규모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허영심으로 꽉찬 결혼 관계가 늘어날 것이고

그것은 축복하고 싶지 않은 결혼이 그만큼 증가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혼 사건을 단죄하기 전에 이혼 사건의 전제가 되는 결혼 사건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돌아보는 일이 더 현명한 일이 아닐까?

 

14.  내가 길들여지지 않는 이유


우리 어머니는 나를 늘 불안한 눈으로 지켜보곤 하셨다.

시계는 맞으면 그만이라며 어느 땐 남자들이 차고 다니는 시계도 그냥 차고 나가고,

다려 주지 않으면 제 손으론 한번도 옷을 다려 입고 외출한 적이 없으며,

화장품이라고 있는 게 로션뿐인 딸은 어머니가 보기에 우아한 여성은 될 수 없는,

그래서 여자로서 성공할 수 없는 불안한 딸이었다.

법대를 다니면서 고시공부는 안 하고 철학책이나 사회과학책을 사들이지 않나,

어느 날 갑자기 철학과 대학원에 가겠다고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지 않나,

기독교를 믿는 애가 사주팔자 책을 탐독하질 않나,

아무튼 어머니에게 나는 영원히 길들지 않을 야생마였고

불안하기 짝이 없는 딸이었다.
 

그러나 어찌 나뿐이랴.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사회의 설교에 쉽게 길들여지지 않는 사람이

어쩌면 우리 시대의 모든 아이들이 기존의 방식으로는

쉽게 길들여지지 않는 아이들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기존의 ‘길들이기’방식이 빈약하고 협소한 까닭이지

 결코 우리가 특별하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내가 길들여지지 않는 인간형이라는 평가를 받는다면

그것은 아마도 흔히 주변적인 것이라고 사소하게 취급되는 것들,

그래서 시험에 잘 나오지 않는 것들에 특히 관심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주류보다는 비주류가, 시험에 나오는 것보다는

시험에 나오지 않는 것 중에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것이 많다.

그리고 그 곳에 진정 인생의 비밀이 숨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이 책을 쓰는 일도 마찬가지다.

학문하는 동네는 어느 분야든 상관없이 보수적이기로 이름난 동네다.

그런 보수적인 학계의 ‘길들이기’문법을 따르자면 나같은 신출내기 학자는

내 나름의 코드로 ‘세상 읽기’를 할 것이 아니라

남의 땅, 남의 문화에서 성장한 학자들의 코드를

 충실히 해석해 내는 책을 써내야 한다.

물론 학계에 계신 많은 훌륭한 스승과 선배님들을 존경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분들과 같은 걸음을 옮겨놓을 수가 없었다.

 

내 표정을 찾아 준 첫사랑
스물여섯 살 무렵이었던가, 한동안 나는 겨울을 앓았다.

아니, 20대의 나는 늘 앓고 있었다.

무엇이 그렇게 나를 아프게 했을까,

지금 생각하면 아련하기만 하다.

나는 내성적인 편이었으나 명랑하고 낙천적이려고 애썼던 까닭에
내성적인 내 성격을 주위 사람들에게 쉽게 들키지 않았다.
그 무렵의 나는 등산을 좋아했다.

아니, 등산을 좋아했다기 보다 일상에서

놓여날 수 있는 시간을 좋아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대한민국에 있는 산은 안 밟아 본 곳이 없는 것 같다.
 

어느 날 치악산에서 나는 묵묵히 걸아가는 한 남자를 만났다.

온종일을 함께 걸으며 나는 그에게 끌리고 있음을 알았다.
그와 친해졌고 그는 내 첫사람이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건 그 앞에서는

진짜 내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끊임없이 긴장해야 하는 사회 생활,

은근한 경쟁으로 피 말리는 동료들, 일류이기를 기대하는 부모....

머리 속으론 늘 그런 모든 것에 의연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결코 속까지 의연해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턱턱 숨막히게 하는 현실은 매일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주선했지만

그건 접촉이었을 뿐, 마음 붙일 수 있는 만남이 되지 못했다.
 

사람을 접촉하는 일에 익숙해지면 익숙해질수록 나는 그 일이 지겨웠다.

내 일에 자신감이 붙고 베테랑이 되어 갈수록

뭔가 잃어버린 듯한 느낌도 지울 수가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내 일을 사랑하지 않거나 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의 포기는 자유가 아니라 실패한 인생임을.

그것이 현대인의 운명임을 사회생활 몇 년 만에 이미 알아 버렸기 때문이다.

가끔씩 혼자 즐기는 칵테일 몇 잔과 함께 나는

 ‘잘나가는 인생’이라고 자위해 보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따라나오는 이유 없는 눈물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는 그 무렵 만난 사람이었다.

나만큼이나 열심히 살아 온 그는 또 나만큼이나 속병을 앓고 있었다.

학교를 졸업한 후론 너무 멀리 떠나가 버린 책 읽기,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

그러나 의연한 표정을 짓고 여유롭게 대응해야 하는 많은 일들.

그 역시 비슷한 상황이었고, 다람쥐 쳇바퀴 돌리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인생을 견디는 방법으로 등산을 선택한 남자였다.
 

우리의 만남은 결코 거창하지 않았다.

퇴근 후에 만나 밥집에서 밥을 먹고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잡다한 이야기들을 늘어놓거나 일요일이면 가까운 산을,

연휴가 되면 지리산이나 치악산을 함께 오르는 것이 우리 만남의 전부였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마음을 트게 되면서 우리의 밥상엔 생기가 돌았으며,
“야, 비가 온다”는 말 같지 않은 말에도 힘이 생겼다.

시청역에서 즉석 복권을 두 장 사서 동전으로 긁기 전에

 “있잖아, 이게 5백만 원에 당첨되면 차를 한 대 사서...”

하는 식의 허무맹랑한 말이 어떤 영화보다 재미있는 것이었고
어느날 건네준 장미 10송이는, 그 장미가 말라 벽에 기대 있을 때까지

그것은 나만이 읽어낼 수 있는 추억이고 암호였다.

 

어느덧 우리는 닮아가고 있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오누이냐고 물었다.
신기했다. 형제도 자매도 아닌데 닮았다니.

나는 눈이 크고 깊으며 윤곽이 뚜렷한 얼굴이지만 그는 아니었다.

우리는 사실 눈도 코도 입도 닮지 않았다.
그러나 만나면서 분위기가 닮게 되었고

그리하여 어느덧 속얼굴이 닮아 있었던 것이다.

 

그때 나는 확인했다.

이 작은 만남이 힘이라는 것을.

썩어가고 곪아가고 있으면서도 건강해질 엄두는 내지 못한 채

그저 시지프스 신화의 진실만을 붙잡고 있던 내게

 만남은 유치하게도 힘이었다.

왜 그렇게 힘이 났을까.
그때 나는 사랑이 정말 마약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일어설 준비가 된 나는 달라져 있었다.

타인들에게도 진정한 관심이 생겼고 남을 보고도 웃을 줄 알게 되었다.

고통과 기쁨에 민감해지는 것, 그게 내가 본 사랑이었다.
우리는 우리라는 사실 때문에 더 이상 외롭지 않아도 되었다.

그건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미래를 견딜 만한 힘이었다.
분명 내가 사랑했던 사람은 그 사람뿐이었는데

그로 인해 나는 그 사람 외에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도

너그러워지는 법을 배웠다.

타인을 향해서 웃을 줄 알게 된 나는 더 이상 내 속에 숨어 있지 않았다.

나는 내성적이기를 그치고 무엇이든 힘 있게 표현하는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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