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상식/문학관

나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7

오늘의 쉼터 2011. 5. 2. 14:32

 

나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7

 

제2부  삐딱하게 보고 바로 말하기

 

5.   김원준의 귀고리가 멋있는 이유

 

아버지라는 이름만으로 권위를 보장받을 수 있는 시대는 갔다.

엄격한 아버지 밑에서 눈치를 보아 가며 자란 지금의 40대 아버지들은

급작스럽게 달라진 아버지의 위상에 당황해 한다.

40대 남성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것은 자녀들에게 외면당하는 일이다.

내게 전화를 해온 김선생님은 중학교3학년인 외아들 때문에 고민이라고 했다.


  “아, 글쎄, 내가 들어오는 것도 모르고 텔레비젼에서

   남자 가수애가 춤추는 걸 넋을 잃고 쳐다보지 않겠어요.

   좀 화가 났지만 그래도 제가 신세대 아버지 아닙니까?

   옆에 앉아서 같이 봤죠.

   현란한 춤에 무슨 소린지도 모르는 노래를 하는데 나는 그저 시끄럽기만 했습니다.

   그래도 꾹 참고 같이 봐 줬어요.”


그런데 일이 생긴 것이다.

정신 못차리고 화면에 빠져 있던 아이가 갑자기 혼잣말로 그러나 크게 중얼거렸다.
  “야. 쟤 귀고리 멋있네!”
김 선생님은 눈을 똑바로 뜨고 화면을 쳐다 보았다.

화면 속에는 예쁘게 생긴 남자가수가 정말로 귀고리를 하고 있었다.

세상 말세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아들이 더 큰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도 빨리 대학생이 돼야 저런 귀고리를 하고 다닐 수 있을 텐데.”
 

김 선생님은 기가 막혔다.

아들을 똑바로 쳐다봤는데도 아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는 말할 수 없이 화가 났다.

그래서 옆에 있던 쿠션을 집어들어 아들의 어깨를 내리쳤다.
  “야, 이녀석아, 학생이 공부는 안하고 뭐? 니가 여자냐? 귀고리는 무슨 귀고리!

   빨리 텔레비젼 끄고 들어가서 공부해!”
  갑작스런 김 선생님의 공격에 놀란 아들은 분노에 찬 눈으로 아버지를 쳐다봤지만

  감히 대들지 못하고 한마디하는 걸 잊지 않았다.
  “확실히 세대 차이가 나네요.”
  그리고는 방문을 꽝 닫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김 선생님의 고민은 사사건건 아버지를 구세대 취급하고

네, 아니오 이상의 대답을 하지 않는 아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에 있다.

 

세대간의 주파수 맞추기
세대차이, 그것은 확실히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세대 차이가 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세대 차이’가 운운될 때는 이미 대화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대화의 불가능성을 통보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대부분 ‘세대 차이’ 운운하는 상황은 세대 차이의 심각성을 드러내는 것이라기보다

세대간의 주파수를 맞추는 능력의 부재를 드러낸다.
대부분의 갈등은 주파수를 맞추는 능력이 없어서 생겨나는 불협음이다.

나이든 세대와 젊은 세대의 주파수는 조금만 달리 생각하면 금방 맞출 수 있다.
 

귀고리 사건만 해도 그렇다. 가는 말이 고우면 오는 말이 험악할 수 없다.
아버지가 이렇게 했다면 아들이 ‘세대 차이’ 운운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현란한 댄스 뮤직에 빠져 있는 아이에게

대화의 상대자로 다가가기 위해서는 눈높이를 맞춰야 한다.

중고등학교 시절 부모님 몰래(대부분의 부모들이 싫어했을 테니까)

라디오를 틀어놓고 팝송을 들어본 경험을 떠올려 보라.
  “쟤, 누구니? 춤 잘 추는데.”
  그러면 아이는 반드시 아버지를 쳐다보고 대답을 한다.
  “예, 김원준인데요. 멋있죠?”
  “멋있구나.”
  “아빠, 쟤, 귀고리 멋있죠?”
  아들이 그렇게 말할 때 놀랐어도 황당한 표정을 지으면 안된다.

그냥 아들이 한 말을 되풀이하면 된다.

부모 노릇은 결코 쉽지만은 않다.
  “으응, 쟤 귀고리 했구나.”
  “저도 대학에 가면 귀고리하고 다닐 거예요.”
  “귀고리?”
  “예. 멋있잖아요.”
  “넌(이름을 부르는 것이 더 친근하다) 귀고리가 멋있니?”
  “예. 요즘은 남자도 많이 하고 다녀요.”
  “으응, 그럴 수 있겠구나. 그런데 왜 귀고리가 멋있니?”
  “쟤, 보세요. 개성있고 멋있잖아요.”
 

 이쯤 되면 대화가 되는 분위기가 조성된 것이다.

그때 아들과 다른 의견이면 조심스럽게,

그러나 결코 위축되지 않고 말문을 열어 보면 어떨가?
  “쟤는 가수고 가수는 튀어야 주목을 받을 수 있지 않겠니?

저건 상당히 목적 있는 행위라고 할 수 있지.

쟤가 귀고리하고 다니면 많은 애들이 쟤 때문에 그냥 생각 없이 귀고리 하고 다닐 텐데

그러면 오히려 안 하고 다니는 게 개성이고 멋이 아닐까?“
  “에이, 아빤 다른 아빠처럼 귀고리 못하게 하려고.”
  “아니야, 아빤 네 판단을 믿기 때문에 네가 귀고리를 하고 다니면

그럴 수 있겠구나 생각할 거야.

그러나 그러기 전에 쟤가 어울린다고 너에게 어울릴까를 생각해 보라는 거지.

개성이면 따라하는 게 아니라 자기에 맞게 연출하는 게 중요한 거 아니겠니?

아빠라면 남들이 다 하고 다닐 때 안하고 다니는 것도

당당함이고 개성일 수 있다고 생각하겠다.

아마도 쟤는 남자들이 귀고리를 많이 하고 다닐 때면 절대 안하고 다닐 거 같구나.”
 

그렇게 애기해 줄 수 있는 아빠라면 아이가 세대 차이를 느낀다 해도

그때의 세대 차이는 조금 다른 의미일 것이다.

그것은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에 대한 무시가 이니라

경륜이 쌓여 배울 것이 있는 부모 세대에 대한 존중일 것이다.
그런 문화 속에서 성장한 아이는 결코 매스컴의 오락 프로나 CF가 주도하는
소비의 메커니즘을 맹목적으로 추종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어느 날 만일 그 아이가 귀고리를 하게 된다면 그것은 맹목적인 추종이 아니라

생각 있는 선택일 것이기 때문에 아버지는 아들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아버지 세대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할아버지 세대가 아버지 세대를 향해

“우리 클 땐 저러지 않았는데” 라고 혀를 차며 했던 말이다.

 기성세대의 눈에 신세대는 늘상 불안하고 가벼워 보인다는 것,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세대간의 주파수를 맞추는 첫 걸음일 것이다.

 

6.  양귀자와 신경숙이 뜨는 이유1.


한 작품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물론 그 이유는 긍정적일 수도 부정적일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찾는 것은

저급한 것이라는 판단은 일리 있는 판단일 수 있지만 언제나 정당한 것은 아니다.
요즘 베스트셀러가 되는 소설들이 있다.

양귀자의 (천년의 사랑), 신경숙의 (외딴 방)등이 그것이다.
 

선한 꿈을 꾸지만 언제나 시대의 변두리에서 그 꿈을 박탈당하고 떠돌 수밖에 없는 사람들,

억척스러우면서도 울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기 (원미동 사람들)
이후 양귀자는 변신을 거듭했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에 이어 전생에 이루지 못한 애틋한 사랑을 이루기 위해

이생에 태어나 현실 속에서가 아니라 텔레파시 비슷한 도를 통해

상대방을 불러내는 사랑 이야기 (천년의 사랑)을 펴내 계속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자 비슷한 모티브를 가지고 할리우드 영화 기법을 흉내낸 영화

(은행나무 침대)가 개봉되어 96년 한국 영화 최고의 흥행 기록을 남기며 쾌재를 불렀다.
 

이름만으로도 많은 독자를 확보할 수 있는 신경숙은 가진 것 없어 그 존재가 희미한 사람들,

거대한 세계에서 너무나 왜소해 망연해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기록을

나직나직하게 그려내는 가장 내면적인 문체로 가장 자본주의적인 성공을 기록하고 있다.

단편 (풍금이 있던 자리)로 시작해서 장편 (깊은 슬픔) (외딴 방) 모두 상당히 많이 팔려나갔다.
한마디로 7,80년대의 소설이 사회 부조리에 대항한 외적 싸움이라면

90년대에 들어서 읽히는 소설들은 상당히 개인적이고 그런 점에서 실존적인 소설들이다.
신경숙의 (깊은 슬픔) (외딴방)이 그렇고

양귀자의 (천년의 사랑), 은희경의 (새의 선물)이 그렇다.
 

이들의 공통점은 그 이전의 소설가들이 음으로 양으로 보여 주었던 역사나
민족을 향한 열정이 없거나 그 열정의 허구성에 기대는 것이 특징이다.
삼각관계를 축으로 불가능한 사랑의 무늬를 보여 주었다고 평가되는

신경숙의 (깊은 슬픔)이 그렇고, 별로 설득력 없는 전생을

별로 설득력 없게 들먹여 소설은 허구임을 편안하게 확인시키면서

상상의 나래를 활짝 풀어헤친 양귀자의 (천년의 사랑)이 그렇다.

또한 공지영은 공동체에 대한 정의를 외쳤던 운동권 남자가

자기 아내와의 관계에서 폭력적인 남자였음을 드러냈다.

그러자 우리는 80년대 모래시계 세대의 ‘정의’가 그것이 대항해 싸운

'폭력‘만큼이나 폭력적이거나 적어도 공허하다는 데 동의하면서

그것을 공동체의 허구성과 연결시키고 개인의 문제로 돌아갔다.

위선에 대항해서 위악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극명하게 보여 주는

은희경의 (새의 선물)도 그러한 특징을 벗어나 있지 않다.
 

그 소설들이 읽히는 공간에는 무엇이 있나?

90년대 오늘에서 이들을 찾게 만드는 문화철학적 이유는 무엇일까?

헤겔은 말했다. “사상은 그 시대의 아들”이라고.

그 말이 너무 딱딱하다면 이렇게 바꾸면 어떨가.

인간이 그 시대를 떠나 꿈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그러면 90년대의 문학계 스타들을 통해 우리가 만나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이념보다 더 슬픈 소녀의 고백
90년대는 70년대부터 불붙기 시작한 참여/순수의 논쟁이

더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하는 시대다.

그것은 그 논쟁의 결론이 나서라기보다 아무도 그 논쟁에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더 이상 이데올로기에 집착하지 않는다.

80년대에 의미도 모르고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끼고 다니던 글자에 익숙한 세대들은

이제 뜻도 모르고 마르크스를 비판하는 줄에 서 있다.

스스로가 이데올로기에서 탈출해 있다고 믿는 우리들의 관심은

정치적 억압이 없는 사회, 노동자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사회,

함께 사는 사회라는 거창한 이념이라기보다 새로울 것 없이

그 날이 그 날인 일상을 살아내야 하는 왜소한 자기에 대한 관심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신경숙의 외딴 방을 의미 있게 읽었다.

외딴 방은 1980년 서울의 봄이 신군부의 장갑차에 짓 밟혔을 때

공장에 다녔던, 후에는 소설가로 성공한 소녀의 고백이다.

그 상처 많은 소녀가 피로한 눈매로 겨우 점심시간에 옥상에서 햇빛이나 쬐는

경제성장의 음지에서 창백하게 존재하는 희재 언니와

가난한 살림에 동생까지 돌봐야 하는 피붙이 오빠,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막막하고 삭막한 공간에서

결코 예외자일 수 없는 자기 자신의 내면을 나직히 그려 냈을 때

삶에 대한 열정이 상처 속에 감춰지는 시대와 그 시대 아이들의 슬픔을 만났다.
 

제도는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원론적 이야기조차 절망적으로 이야기해야 했던 시절이었다.

가위눌림 같은 폭력적 제도의 강한 힘이 일그러진 인간의 표정으로 확인될 때

그것은 어떤 말보다도 강한 여운을 남긴다.
그런데 우리의 일상을 구조화하고 있는 폭력의 공간에

우리가 대응하지 않고 내면으로 눈을 돌려,

자기 속에 외딴 방을 만들고 외딴 방으로 숨어들기를 택하는 이유는 뭘까?

그 이유는 명백하다.

그것은 그가 자페증 환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를 열고 그 누군가,

무엇인가를 자기 안에 초대했을 때 받은 상처 때문일 것이다.

나의 존재 이유여야 할 공동체와 역사가 나의 손길을 아껴 주지 않고

휴지처럼 대우해서 일방적으로 당했다는 느낌을 갖게 만든다면

개인이 자기의 내면으로 굽어드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면 도대체 전후시대도 아닌 1990년대의 한복판에서 그 상처는 왠 말일까?
모든 것이 풍성해 보이는 이 시대에 내가 믿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인간은 철저히 고독한 존재라는 실존주의적 깨달음(?)이 퍼져가는 이유는 뭘까?

나는 그 중요한 이유가 우리 문화공동체의 핵 속에 녹아 있는 정치,

경제적 배반감이라고 생각한다.

 

역사의 자리에 들어선 여성 작가들
6.10항쟁 10주년이다.

시민의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를 어렵게 얻어냈건만
시민의 영웅이었던 양 김씨가 반목함으로써 군사정권을 끝장내지 못했을 때
정치와 역사에 대한 허무감이 우리의 문화공동체에 퍼져가기 시작했다.

그 사람도 그 사람이었다는 인식은 뼈아픈 배반감이었다.
확실히 DJ는 지난 시대(7,80년대 초반)의 영웅이었다.

그러나 DJ가 역사 발전의 순기능을 하던 시대는 지났다.

87년 민주화 항쟁의 결과로 얻어낸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 단일화를 이뤄내지 못했을 때부터

DJ는 YS와 함께 역사에서 역기능을 하기 시작했다.

그후 역사에서 이들의 역할이란 해소되어야 할

지역감정을 기반으로 그들의 정치적 생명력을 연장시키는 일이었다.

이들은 지역감정의 피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들을 볼모로

정치적 생명을 연장시키는 지역감정의 수혜자다.
이들이 지역감정을 정치적 생명력을 연장시키는 중요한 통로로 사용하니까

그 와중에 그것을 볼모로 살아남은 자가 있다.

유신과 함께 사라진 JP가 지역감정과 함께 돌아온 것이다.

이 웃지 못할 코미디를 지역등권론으로 미화할 것인가,

아니면 역사발전은 단순히 일직선적이지 않다고 위로하며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지역등권론은 각 당이 지역감정를 부추겨서 정치적 지분을 확보하려는 획책이 아닐까?

그것은 낡은 정치세력의 담합일 뿐이다.

이러한 코미디를 닫아들일 수 없는 사람들이 정치공동체에 대해

허무를 선언하면서 공동체세서 개인의 문제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때마침 불기 시작한 부동산 투기의 바람을 타고 정당하지 않게

투기로 돈을 번 가진 자들이 몇 천만 원짜리 외투를 걸치고

몇 백만 원짜리 핸드백을 가볍게 열면서 생색나지 않는 불우 이웃 돕기는 절대 안 해도

자기 아이들에게는 백만 원짜리 수표를 편안하게 던져줄 때

백만 원을 벌기 위해 뼈빠지게 일하는 성실한 보통사람들은 공동체는 없다는 냉소로 대응,

신성한 노동을 무시하는 자들에 대해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켜간다.

이제는 가진 자들이 꽂동네에 가서 찍은 광고용 사진을 보고

불우 이웃을 도왔다고 믿는 순진한 시민은 없다.

높은 사람이 북한산에서 휴지 줍는 장면이 나오면

“쟤 저러고 골프장 가서 운동하고 룸살롱 가서 놀 걸” 하며

선수를 치는 것이 자연스러운 상황이 되었다.

큰 얘기들에 현혹되지 않으며 잘난 사람들을 믿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함께 일궈내야 할 공동체에 대한 허무가 선포된 자리가 바로 신경숙,
양귀자, 공지영 등의 글쓰기가 설득력을 가지는 자리였던 것이다.
 

극악스러웠던 시대를 헉헉거리면서 견뎌온 우리들에게는

민족과 공동체라는 구호만을 외치는 사람보다는 그 시대가 만든 설움 속에 웅크리고 앉아

소리 없이 우는 시대의 아이가 더욱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열두 살 어린애가 어른의 세계를 미리 알고 위악적일 수 있다는 것은

그 아이가 벌써 삶의 이면을 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삶의 이면은 누가 볼까?

그것은 편안하게 살기에 거부된 사람이다.

그렇다면 어린아이가 이미 공동체로부터 쫓겨나 있다는 것이고
어린애를 쫓아낸 공동체는 위선에 찬 공동체일 것이다.
그 공동체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자의 관심은 지독히도 개인적인 것이 된다.
민족과 역사, 공동체에 대한 불신의 선언이 우리의 삶을

지극히 개인적인 것으로 만들어간다는 것은 어찌 보면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목숨 걸고 싸울 일에 진력이 난 우리들은 목숨을 바칠 일보다작은 일상을
함께 나누는 일이 더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물론 이때 우리들이 망각의 강물에 띄워 보낸 것은 일상은 그저 일상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제도의 힘 속에서 이미 구조화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6.  양귀자와 신경숙이 뜨는 이유 2.

 

천년의 사랑과 신데렐라
가족보다는 민족이 우선인 투사는 집안일은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서

남의 일에는 감 놓아라 대추 놓아라 참견하길 좋아하는 무력한 사람과 동격이다.
아내보다는 정의가 소중한 투사와 살아가기보다는 사랑을 위해 태어난 사람,
전생에 이루지 못한 애절한 사랑을 이루려는 염원으로

한 여자의 남자이기를 바라는 것 이외에는 소망이 없는 맑은 남자(?)와

나직 나직 가만 가만 살아가는 일이 더 소중해진 것이다.
 

어쩌면 양귀자의 (천년의 사랑)은

우리 시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모델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관심을 가질 일은 역사적이고 민족적인 일이 아니라

개인이 행복감에 젖어 사는 것일 뿐이다.

물론 행복감이 행복인지는 더 물어 봐야 한다.
많은 평론가들이 (천년의 사랑)을 양귀자가

“동양적 상상력으로 우리를 흥분시킴은 물론 그 흥분으로 우리의 삶을 반성”

시키고 있다고 극찬했을 때, 그리고 “과학적이고 맹목적인 서구 이성에 짓눌려온

천년의 지혜 곧 동양정신을 되살리는 일”에 골몰했다고 존경을 보냈을 때

나는 `잘나가는 작가`라는 또 다른 힘에 기댄 자본적 평가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평론가들의 말마따나 소설이 과학적일 필요는 없으며 서구적일 필요는 더 더욱 없다.

오히려 과학과 자본과 서구문명의 허울을 벗어제치고

인간의 말을 찾아가는 것이 소설의 길일 것이다.

그런데 단지 이루지 못할 사랑을 이루기 위해 태어났다는 대중화된

윤회(이건 분명 불교적인 윤회도 아니다) 이야기만 하면

서구적 삶을 반성케 하는 동양적 지혜가 될까?

사실 90년 대라는 상황에서 제목으로 시선을 끌고 작가의 문장력으로 버티긴 했어도

(천년의 사랑)은 소설로서는 좋은 소설이 아니다.

그것은 그 소설이 비과학적인 윤회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남성 중심 사회의 이데올로기인 신데렐라 동화의 변형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신데렐라는 말할 수 없이 누추하며 자신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능력도, 의욕도 없는 여성의 표상이다.

그녀는 멍청할 정도로 착하다는 것 이외에는 장점이 없다.

그렇게 무력한 그녀가 착하고 예뻐서 왕자비가 된다는 것이 신데렐라 동화의 주축이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르면서 착하고 예쁘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그것은 예쁘고 착하다는 평가를 내려줄 왕자(남자)의 시선에 따라 자기를 보며
그러므로 그 남자의 마음대로 부려질 줄 아는 남자의 노예라는 것이 아닐까?
사실 신데렐라 동화나 그 동화와 흡사한 콩쥐팥쥐가 특정한 사회에서 퍼져가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런 동화는 남성 지배문화의 결과이면서 동시에

남성 지배문화를 돈독히 하는 이데올로기 역할을 한다.
 (천년의 사랑)에서 여자를 사랑 혹은 구원하기 위해 태어난 남자 성하상은
계모(운명) 밑에서 보낸 모진 세월을 단박에 보상해 줄 수 있는 왕자의 변형이며

우여곡절 끝에 성하상의 품 안에서 어려운 세월을 치유받는 오인희는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자극하면서 독자들에게 다가서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천년의 사랑)은 평론가들의 말처럼 우리가 알고 있는,

혹은 어쩌면 풍덩 빠져 있는 서구 과학의 남성적 논리를 해체하는 작품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하는 작품이다.
 

도대체 뜬금없는 사랑 노래 하나로 인생이 설명될 수 있을까?

사실 나는 인생에서 사랑이 무지 무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할 일 없는 사람들, 팔자 좋은 사람들이 아무데서나 맥락 없이

부르는 사랑 노래라면 그 ‘사랑’은 사랑 타령이 돼서 울림이 전혀 없는 지겨운 말이 된다.

적어도 인간의 말을 하는 소설이라면 도대체 왜 특정한 사랑이

겹겹의 세월을 뚫고 다시 나타나야 했는지. 그 사랑의 복잡한

운명이 무엇인지를 결코 단순하지 않은 삶 속에서 치열하게 보여 줘야 한다.
 남성 중심 사회에 길들여져 신데렐라 동화를 사랑하다가 결혼생활에 들어간
대부분의 여인들의 운명이 `재투성이 아줌마`였던 것처럼

`천년의 사랑`식 사랑을 기대하고 사랑한 사람의 운명이 배반일 거라고 말하면 지나친 공상일까?

깊은 숨을 쉬고 빈방을 나와야 한다
현대는 자본이 힘을 가지고 경쟁의 논리가 지배하는 후기 산업사회다.

이 사회에서 위대한 정의는 아마도 보다 많은 자본을 끌어댈 수 있는 힘일 것이다.
강한 것만이 아름다운 이 시대는 과학과 기술의 힘에 기대 자본을
확대재생산하는 메커니즘을 예찬하는 시대다.

이 시대를 살아내기 위해 우리는 기술을 익혀야 하고 조직이 필요로 하는

자격증을 취득해야 하며 그런 점에서 남보다 한 발짝 앞서 가야 한다.

세 발짝 앞서가는 것은 사이코지만 같은 템포로 가는 자는 조명받지 못하며

한 템포가 늦으면 살아남기 힘든, 끊임없이 긴장해야  하는 시대가 우리 시대다.
 

살아남기 위한 경쟁은 삶을 생사를 건 투쟁판으로 만든다.

전체적으로 볼 때 현대는 전체의 이름으로 개인을 억압하는 시대다.

그런 시대에 살고 있으므로 우리는 듣는다.

억압으로 왜소해진 자들의 작은 신음을.

그것이 바로 90년대의 실존주의적 바람 혹은 개인주의적 바람이다.

그러니까 그 바람은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가장된 전체주의에 대한 허무의 선언이고

기만적 이타주의에 대한 불신의 선언이라는 점에서는 긍정적이다.
현실에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조명받을 수 없는 왜소한 자,

사소한 것들이 현실을 배반하고 깊은 울림으로 빛날 수 있는 세계가 있다는 것은 신나는 일이다.

특정한 체제나 조직이 힘과 이성의 이름으로 유도하고 가르친

`위대한 선`과 `정의`의 허구성을 폭로할 수 있는 세계를 본다는 것은 살맛 나는 일이다.
그런데 엄격한 자본의 논리, 권력의 논리에서 미끄러져나와 들어간 상상의 세계,
감성의 세계에서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이 단순히 어떤 상황에서도 안전판이 될거라고 믿는

신데렐라식의 꿈이거나 역사도 민족도 공동체도 없이

그저 나만 잘살면 된다는 속물적 이기주의의 변형이라면?
 

생명운동을 하는 시인 김지하는 주장한다.

철저히 개인적인 요즘 젊은이들이 실현하고자 하는 삶의 내용이

한 우주 입자나 단위 생명일 뿐이라면 그것은 실현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지만

개인 안에 있는 어마어마한 신비인 생명의 총체라면

그것은 너무나 중요한 가치라고.무슨 말일까?

그것은 개인 속에 우주가 있다는 사상을 계승한 것일 것이다.
개인의 삶을 소중히 해야 하는 이유는 이기적 삶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아니다.

그것은 삶이 작게는 이웃과 민족에서 크게는 인류까지

개인에서 개인으로 연결되어 부단히 순환하고 있기 때문이다.

함부로 쓰는 세제와 공장의 폐수가 무절제하게 하천을 오염시키면

마실 수 없는 수돗물 때문에 고민해야 하고

공장의 굴뚝이 시커먼 연기를 피어올리고 거리의 자동차들이

그 맵시를 뽐내며 배기가스를 품어내면 탁한 공기를 걱정해야 한다.
 

어디 순환하지 않은 삶의 풍경이 있던가!

농부가 제초제와 농약을 잔뜩 뿌린 농산물을 시장에 내어 놓으면 도시민의 건강이 위협을 받으며

정치인이 정책은 제대로 세우지 못하면서

제 뱃속 챙기는 일에만 지대한 관심을 보이면 국가 전체가 흔들린다.

불로소득으로 물 쓰듯 돈을 쓰며 떵떵거리는 자가 많으면 박탈감을 갖는 시민들이 많아진다.

내 삶 속에 네 삶이 있고 우리의 삶 속에 공동체의 미래가 있다.

 

속앓이를 치유한 소설을 기다리며
내가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는 배반감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는 소설은 현실을 배반하는 소설이다.

권력이 빨갱이라는 최악을 내세워 민족주의 세력을 꽁꽁 묶은 후

현대판 매국을 애국으로 둔갑시킬 때 아예 선악의 개념을 폐기하면서

선악으로 재단할 수 없는 삶의 단면을 보여 주는 일은 숨통을 터주는 일이다.

가진 자가 자본의 힘으로 인간을 자본의 확대재생산의 도구로밖에 생각하지 않을 때

그 메커니즘에서 희미해져 가는 개인의 상처를 들여다보는 것은 의미 있다.

물질문명의 이기를 누리는 일이 지상 최대의 과제인 양 더 많은 이기를 누리기 위해

생명도, 사람도, 사랑도 무시하는 이 사회에서 속앓이를 하는 자의

가슴 시린 사랑 얘기는 나쁘지 않다.

그 모두가 건강한 삶의 지향이 아닌가!

건강하게 살려고 하는 인간의 삶에 칼을 들이대는 현실을

배반하는 이야기는 아무리 곱씹어도 물리지 않는다.
 

그런데 이제는 소설이 소설에서 배반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한때 전체에 치인 개인의 속앓이가 현실의 배반이었다면

그 속병이 모두 알려진 이때에 이제 아프다는 외침은 단순한 유행이고 투정일 뿐이다.

언제까지 아무도 초대하지 않은 빈빙에서 깊은 숨이나 쉬고 있을 것인가?

병이란 건강하게 살기 위해 확인하는 것이지 그저 앓기 위해 확인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 더 이상 소설들이 속앓이만을 하지 않았으면 한다.

깊은 숨을 쉬고 일어나 어떻게 살 것인가를 구체적인 내용을 가지고 고민했으면 한다.

그리고 그 고민이 `나`의 삶에 초대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식의

기고만장한 이기주의의 변형이거나 신데렐라의 꿈이 아니라,

현실에서 왜소해진 자들이 함께 사랑하며 살기 위해 하는 고민이었으면 한다.

 

7.   매력이 속임수인 이유1.


 CF를 들여다보면 세상이 보인다.

여자를 지키는 힘은 칠푼이 거짓 화장이고

남자의 매력은 여자의 허영심을 만족시켜 줄 수 있는 중후(?)한 돈이다.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넓은 집이냐,

아니옵니다.

좋은 차냐,

아니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날씬한 몸매이옵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광고 카피는 오늘의 현실이다.

젊은 여성이 구하는 것은 좋은 집이나 차가 아닌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얻는 조건이 될 날씬한 몸매인 것이다.

날씬한 몸매, 모델 같은 얼굴은 넓은 집, 좋은 차를 보장해 줄
남자를 가깝게 한다고 믿는 것이다.
 

그 믿음은 인도한다.

차밍 스쿨이나 성형외과로. 아직도 성형외과가 교통 사고나 화재 등

 사고를 당한 사람에게 원래의 모습을 찾아 주는 곳이라고 믿는 사람이 있을까?
무엇이 기준인지 모르지만 낮은 코를 높여 주고

건강한 외꺼풀에 칼을 대서 쌍거풀을 만드는 사람들은 너무 흔하다.

광대뼈를 깎고 턱을 깎고 멀쩡한 이마의 머리 부문을 도려낸 후

실리콘을 집어넣어 강수연 같은 짱구를 만드는 사람도 적지 않다.

눈썹 문신이나 주름살 제거 수술은 흔히 행해지며

도톰한 입술을 만들기 위해 입술을 부풀리기도 한다.

짱구 이마 8백만 원, 윗입술, 아랫입술 각각 2백만 원,

광대뼈와 턱 깎는데 각각 4백만 원. 부르는 게 값이다.
이 미친 짓이 아름다운 얼굴, 매력 있는 몸매라는 이름으로

오랑 시에 페스트 번지듯 빠른 속도로 번지고 있다.
 사실 나는 특정한 직업을 동경해 본 일도, 경멸해 본 일도 없다.

그런데 결코 성형외과 의사라는 직업을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성형외과가 만들고 있는 아름다움은 징그럽고 그 매력이란 것은 괴물 같다.

 

롱다리 신화의 비밀
연못에 비친 자기 자신의 모습에 반해 자기 자신과 사랑에 빠졌다는 나르시스 신화는

우리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게 한다.

그런데 화려하게 화장을 한 어떤 여성이

쇼윈도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훔쳐보고 있다면 그것은 어떠한가?

그때 그 여성은 누구를 보고 있는 것일까? 자기 자신일까?

혹시 그때 그 여성이 훔쳐 본 얼굴은 누군가와 비교된 그 자신이지 않을까?
현대 소비사회에서 매력 혹은 미는 차이의 질서 속에서 기능하는 잉여적 개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미 자체가 아니라 미에 대한 관념에 관여하며
이 미에 대한 관념은 기호화되어 사회적으로 규정됨으로써 분화되어 나간다.
예를 들면 지금 우리 사회에서 아름다움을 규정하는 한 개념이 신장이다.
혹시 키가 작아 생활이 불편하다거나 병들어 죽었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옛날에 문관들은 키가 큰 것을 꺼려 했다.

다리품을 팔아 먹고 살게 될 상이라고 했다.

작은 키는 일상생활을 영위하는데 그 자체로 문제될 일이 아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적어도 165 센티는 되어야 한다`는 근거없는 낭설이 퍼진다.

그리고 그것은 강력한 이데올로기로 작용하여 사람들에게 각인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165센티라는 기호를 기준으로 167센티, 163센티, 170센티, 160센티...

등의 기호에 주목하는데 각각의 기호는 그 자체로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데리다의 말대로 상이한 것들의 차별성 속에서 의미로 드러나는 것이다.

다시 말해 160이라는 기호는 155라는 기호와 165라는 기호 사아에서

의미를 부여받는 것이지 그 자체로 구체적 내용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10센티의 작은 차이는 원래 생활하는 데 불편함이 없었던 필요 신장. 
예를 들면 150센티를 완전히 없는 것으로 치부해 버리고

과잉 신장들의 차이의 질서 속에서 우리를 규정하기에 이른다.

이에 따라 나타나는 현상은 굽 높은 구두의 소비, 나아가서 롱다리 수술이다.
 

사실 롱다리가 미남, 미녀의 조건이 된 것은 미 시장의 세계화(?)와 관계가 있다.

화면발이 잘 받는 롱다리의 할리우드 남녀 배우들을 모방하는 측면도 있고

키가 큰 외국 여자들이 출전하는 미스 유니버스 대회나

세계 모델 선발 대회가 대중적 관심을 끌면서 거기에 참가할 수 있는 외모인지 아닌지가

우리 세대에게 내면화된 것이 롱다리의 신화다.

물론 롱다리를 선호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롱다리이기를 바라며

또한 롱다리가 아니라는 것이 콤플렉스가 되기도 한다.
이 조작된  콤플렉스를 이용한 장사도 꽤 잘된다.

다리를 절단해서 이물질을 끼운 후에 다리를 길게 만드는 수술이 늘고 있고

아직 자라지 않은 어린이들이 미래에 롱다리가 되기 위해 성장 호르몬 주사를 맞는다.

이쯤 되고 보면 이것은 사람을 살리는 의술이라 할 수 없고 이윤을 남기는 장사다.
 

도대체 이런 현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런 현상은 ‘화면’에 의해 현실이 놀아나는 것이다.

화면의 매력에 취해 현실을 보면서 매스컴이 보여주는 대로 소비 하는 자,

그들이 바로 신세대, X세대, 미시족이다.
예를 들어 미시족은 여전히 매력(?)을 추구하는 개성 있는 아줌마들이다.
아이를 들쳐업었거나 세파에 지친 모습으로 생선 한 마리를 싸게 사려고

시장을 돌고 돌던 아줌마들을 구경하기란 이제 너무나 힘들다.

그보다 서울 거리에서 익숙한 풍경은 짧은 미니스커트에 통굽구두를 신고

모델인지 배우인지 확인할 수 없는 화장을 한 소위 `미시족`들이다. 매력 있나?
 

요즘 젊은이들이 추구하는 매력의 실체는 무엇일까?

견적이 얼마인지 확인할 길 없는 성형된 얼굴, 누구의 간섭도 받기 싫은 나만의 오피스텔,

롱코드, 헵번 브라운, 맵시 있는 차, 통굽 구두, 색색을 넣은 염색머리,

근사한 레스토랑, 그리고 주말여행 등이다.

여기에 존재하는 것은 무엇인가?

모든 권위와 도덕으로부터 해방되어 `나는 나만의 세계를 고집한다`면서

 쌍거풀과 코 높이는 수술은 기본으로 하고 추가로 턱을 깎거나

이마에 실리콘을 넣어 넓은 이마를 만들어 매력 있는 얼굴을 만든다.

CF 스타들이 입고 나오는 옷과 장신구로 비슷한 분위기를 만든 후에

염색 머리를 섹시하게 빗어 넘기고 맵시 있는 차를 뽑아 그에 어울리는 동반자와 함께

여행을 떠나 길에다 돈을 뿌리고 싶어하는 사람들,

그 매력 있는 인간들에게서 무엇을 확인하나?

근검절약을 미덕으로 살아 왔던 우리 부모들의 삶과는 판이하게 다른 삶을 살아감으로써

부모들의 삶의 형식을 해체하고 개성적(?) 문화를 주도하는

신세대, X세대, 미시족은 정말로 매력 있는 이름인가?

 

매력을 팔았던 산소 같은 여자
현대사회에서 소비란 일종의 신앙이다.

신앙의 세계에서 하나님과 관련이 없는 인간은 `이방인`으로 그 존재가 미미해지는 것처럼

소비사회에서 소비와 관련이 없는 인간은 `매력 없는 인간`이 된다.

이렇게 볼 때 현대의 매력 있는 인간들이 지향하는 소비구도는

논리의 측면에서는 종교와 흡사하다.

왜 신을 믿느냐 라는 질문에 인간이니까 하는 대답 이외에는

필요가 없는 신자가 가장 철저한 신자인 것처럼

왜 도톰한 입술이지 하는 질문에 섹시하니까 라는 말 이외에

다른 말이 필요가 없는 자들이 현대 소비사회의 신자들이다.

김혜수를 따라 입술 바깥으로 루즈를 칠하면서 섹시하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은

한때 섹시하다는 이유로 얇은 입술을 원했던 사람들이다.
 

94년 봄빛 찬란할 때 트로픽 오렌지를 바르고 우리의 시선을 끌었던 여인의 이미지가

그 가을에 재즈 와인의 이미지로 유혹했을 때 정말 계절 감각이 있는 세련된 여인상,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아름다움을 향하여 자신을 개발해가는 에로스의 현신을 만났었나?

화장기 전혀 없는 얼굴, 환상적인 음악과 함께 재즈 와인으로 유혹하는 모습이 아니라

그저 시장바구니를 들고 있는 모습의 그 여자를 만났다고 상상해 보자.

특정한 이미지를 창출했던 여인들을 장터에서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럽다.
 

`이영애`라는 기표는 대부분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이름을 사용하는 특정한 여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화면을 통해서만 의미를 가지는 어떤 이미지를 지칭하기 때문이다.
이영애와 함께 트로픽 오렌지, 재즈 와인을 찾아갔던 여인들이

이제 더 이상 그것을 찾지 않는다.

이제 그 여인들은 `내가 변하면 세상도 변한다`고 믿으면서
나의 변화를 또 다른 색 파스텔 로즈나 레게 베이지로 시도,

누군가를 유혹하고 누군가에 의해 유혹당하고 싶어하는지도 모른다.

트로픽 오렌지, 재즈 와인. 스켄들 레드는 더 이상 우리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이제 우리가 관심을 갖는 색은 또 다른 유혹의 색으로 선포되는 헵번 브라운이다.
 

한때 그렇게 매력적이라고 여겨졌던 색이 이제 촌티를 내고

한때는 시선을 끌지 못했던 색이 지적인 색으로 등장하는 것은 과연 계절의 변화 때문인가?
혹시 계절의 변화가 아니라 계절의 변화를 내세운 유행의 변화 때문이 아닐까?
트로픽 오렌지의 여인이 이미지였고

그 이미지가 트로픽 오렌지가 상정한 제품에 대한 결핍 관념을 만들어냈던 것처럼,

그리고 재즈 와인의 여인이 이미지였고

그 이미지가 재즈 와인이 상정한 제품에 대한 결핍 관념을 만들어냈던 것처럼,

이제 헵번 브라운의 여인의 이미지에 유혹된 사람은

그 이미지가 뒤로 감춘 상품에 대한 결핍 관념이 조장되어 그 상품을 욕망한다.
개인의 개성 연출(?)의 도구가 될 새로운 제품에 대한 욕망은

기존에 자기 연출 도구로서 사용되던 제품을 촌스럽게 보이게 만든다.
립스틱으로 말하면 더 이상 트로픽 오렌지,

재즈 와인이 개성 연출의 도구로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때 이런 것들이 레게 베이지로 대체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제 아직 반도 채 쓰지 않은 재즈 와인은 그의 선배 트로픽 오렌지가 그랬던 것처럼

`헵번 브라운의 유혹`으로 폐기, 쓰레기가 된다.

그것이 립스틱뿐일까?

 

7.   매력이 속임수인 이유2

 

영원한 아름다움은 없어야 한다?
영원한 아름다움이란 없다고 한다. 왜 없는가,

아니 없어야 하는가?

영원한 아름다움이 존재하지 않아야만 오늘의 매력이 내일의 천박함이 될 수 있고
그래야만 또 다른 매력을 추구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영원한 아름다움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는

현대 사회가 소비를 창출하기 위해 선포하는 `말씀`이다

영원한 아름다움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영원한 아름다움이 없어야

유행을 따르는 것이 아름다움으로 등장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유행에 뒤진 것을 해체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해체의 목적은 아름다움의 본질 규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소비 패턴을 유도하는 데 있다.
 

내가 내 모습에 점수를 매겨 (이것이 생활 속에서 기호화가 침투된 구체적인 예다)

성형수술을 하거나 화장품이나 유행하는 옷으로서 나의 개성을 표현한다면

나는 사회적으로 규정되고 그럼으로써 분화되는 미의 기호의 차이의 질서 속에 편입된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이때 나의 `나만의 세계` 추구는 나의 세계의 포기가 된다.
끊임없이 유행을 창출하고 그 유행을 창출했음을 상징하는 모델을 만들어내야 하는 기업은

그 새로운 매력의 표상이 될 신인을 찾아나선다.

물론 기업이 찾은 CF 스타는 다시 `매력이 있다`고 인정된다.

끊임없이 새로운 상품을 개발하여 그것을 팔아야 하는 기업에게

영원한 상품이 없듯이 영원한 스타란 없으며 영원한 스타가 없듯이 영원한 아름다움은 없다.

영원한 아름다움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는

이런 과정에서 이런 방식으로 힘을 얻어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 명제의 사회적 역할은 분명하다.

사회는 아름다움에 대해 영원한 아름다움은 없다고 규정함으로써

아름다움을 향해 달려가는 인간들에게 탄타루스의 물처럼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을 심는 것이다.

물론 그 욕망은 인간을 시달리게 만드는 욕망이다.

이 채워질 수 없는 욕망은 결핍 관념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사용가치를 무시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촌티와 매력 사이엔 유행이...
매력 있는 인간이 되기 위해 차밍 스쿨에 다니고 섹시한 입술을 갖기 위해
성형외과를 찾으며 미시족이 되기 위해 헬스클럽에 다닌다.

개성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빨간 머리, 노란 머리를 하고

주말을 즐기기 위해 스포츠카를 뽑는다.
다시 한번 물어 보자.

정말로 개성 있고 매력 넘치는 모습인가? 아니다.

다만 유행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유행을 창출한 기업의 이윤창출에 도움을 주었을 뿐
매력 있거나 여유 있는 실존을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유행은 그것을 따르는 자에게는 매력을 아는 자,

아줌마가 아닌 개성 있는 미시족의 칭호를 훈장처럼 붙여 주고

그것을 따르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촌티`로서 응징한다.

미인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강조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만들어지는 미인을 위한 필요조건이 되는

상품들을 소비하도록 우리를 소비시장으로 내몬다.

여기에서 인간은 소비의 주체로 선포되지만 실상 그는 소비의 노예일 뿐이다.

사실 우리는 `그렇게 입는 것이 왜 매력적이지?`에 대한 이유를 현실 세계에서는 찾을 수 없다.
 

그것은 분명히 기호의 세계에서 유도된 것이기 때문이다.

“왜 사냐면 웃지요”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시인처럼

매력이 규정되는 방식을 스폰지가 물을 흡수하듯이

받아들여가고 있는 현대 소비사회의 사도가 된 우리에게

 “왜 아름다운가, 왜 매력적인가?”를 묻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소비의 주체인 것처럼 보이는 이들은 사실상 소비의 객체일 뿐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아무때나 우리네 안방을 침해해 우리를 유혹하는 매스컴이

주체라고 말하는 편이 더 보여 주는 것이 많다.
 

인간은 단지 매력의 창조자인 매스컴의 품에서

다시 태어나기를 기다리는 연약한 피조물일 뿐이다.

남자에게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해 여자를 지키는 힘인 화장품을 바르고,

그런 여자를 소유하기 위해 무슨 무슨 이름의

중형차를 굴릴 줄 아는 여유 있는 남자가 되기를 동경한다.

무조건 군림하는 남편이 아니라
처제가 결혼할 땐 `대형냉장고`를 선물하는 자상한 남자,

집안일을 멀리하는 남자가 아니라

 `대형세탁기`로 빨래를 할 줄 아는 남자가 매력적인 것이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소비가 매개인 분위기를 만드는 여자,

그 여자의 분위기를 창출할 돈을 가진 남자가

매력의 필요조건이라는 그림일 뿐 현실적인 인간은 아니다. 

 

확실히 매스컴은 자신들이 만든 이미지의 현실성을 확보하기 위해 살아 있는 남자/여자를

그 이미지를 내용물로 갖는 포장지 정도로 대접할 뿐이다.

여기서도 현실적인 남자와 여자는 의미가 없다.

도대체 의미 있는 것은 후기 자본주의의 소비시장이 창출한 이미지에 맞게

`시장`에서 `소비`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나르시스와 허수아비
사실 인간의 소외가 그 특징인 현대문화의 타락은

대부분 결핍에서 유래한다기보다는 너무나 편리해진 생활조건(상품)에 기인한다.

상품이 주는 생활의 편리함이란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삶을 무력하게 만드는 측면이 더 강하다.
  (상품미학비판)에서 하우크의 말을 빌려 보자.

 “처음에는 꼭 필요하지 않았던 상품들은

필요하면서도 자질구레한 일들을 훨씬 쉽게 만들어 준다.

그러다보면 그 일은 그 상품의 도움없이는 매우 어렵게 되어

불가피하게 그 상품을 구입하게 만든다.

그래서 이제 필수적인 것은, 그것 없이는 더이상

생활할 수 없게 되어 버린 불필요한 것과 구별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

이와 같은 상황은 화장을 해본 경험이 있거나 승용차를 사용하는 경우 쉽게 이해된다.
 

화장은 처음엔 화장한 사람을 예쁘게 만들어 줌으로써 그를 당당하게 서게 하는 것 같다.

그러나 화장을 해본 사람은 화장을 하지 않고는 외출하기 힘들다고 하지 않는가!

얼굴이 너무 초라해 보인다는 것이다.

이제 화장을 하면 기본이고 화장을 하지 않으면 마치 나체로 길을 나서는 것과 같아

화장품은 얼굴을 매력적이게 하는 보조품이 아니라 없으면 안 되는 필수품이 된다.
피부를 망쳐가며 비싼 화장품을 발라야만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승용차의 경우도 그렇다.

승용차를 가진 사람은 승용차 없이는 움직이지 못한다.

그리고 사회에서 좋은 차라고 인정된 차를 가진 사람은

매력의 중요한 조건을 구비한 것이 된다.

티코를 타고 다니는 40대는 매력 없어 보인다.
그랜저를 타고 다니는 30대는 동경의 대상이다.

사실 교통수단이라는 본래의 의미에서 볼 때,

그리고 서울이라는 교통 지옥의 현실을 감안한다면

주차하기 힘든 그랜저보다는 티코가, 티코보다는 버스가 편할 수 있다.

그러나 매력의 관점에서 본다면 역순이 된다.

그래서 불편하고 비경제적이라도 큰 차를 선호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소비에 길들여지는 사이에 가장 강력하게 등장하는 것은

역시 `화폐물신화`현상이다.

모든 인간관계가 소비를 매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소비를 할 수 없는 인간은 볼품 없는 인간, 매력 없는 인간이 된다.

사실 매력적인 인간에 대한 현대의 상식은 정말로 비상식적이다.

어떤 사람이 매력적인가에 대해 필요충분조건을 나열할 수는 없어도

분명한 것은 소비와 관련이 없는 인간은 매력 있는 인간이 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여전히 쇼윈도를 훔쳐볼 것인가
나르시스의 자기 사랑은 자아가 눈을 떴다는 것의 상징적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 반성해 볼 기회를 가졌다는 것과 통할 것이다.

그런데 쇼윈도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훔쳐보는 것은 어떠한가?

그때 당신이 보는 것이 화면(이미지)에 나타난 어떤 유명 연예인과 비교된 자기자신이라면

당신은 자아에 눈을 뜬 나르시스와는 달리 사회적으로 규정된 그 어떤 것에 함몰된 것이다.

우리를 둘러싼 미에 대한 기호를 해체시킬 수 있는 반성적 능력을 키워가지 못할 때

인간해방에 대한 우리의 꿈은 영원히 꿈으로만 남을 것이다.

 

 

8. 숏다리가 아름다운 이유


도대체 아름답다는 것은 무엇일까?

원래 아름답다는 것은 `아는 사람답다`는 뜻이다.

물론 아는 사람답다고 했을 때 그 알다라는 것은

여자를 아는 남자, 남자를 아는 여자라고 쓸 때와 같은 문맥에서다.

안다는 것은 어떤 것을 대상화시켜 평가하는 눈으로 내려볼 때가 아니라

그 속에 내 삶의 의미와 흔적이 녹아 있을 때 쓰는 말이다.
 

언제 아름다운가?

개성 추구라는 미명하에 높은 굽으로 롱다리의 소망을 실현하려 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신체를 가꾸어 준다는 환상 속에서

높이고 깎고 문신하고 칠푼이 팔푼이 거짓 화장으로 꾸며낸

그 외모가 아름답다고 생각되나?
 

돈이 없어도 편하게 만나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고

그의 상처가 곧 내 상처가 되어 그 온기로 상처가 자생적으로 치유될 때

아름다움은 바로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닐까?

그때 외모란 단지 내 사람을 지시하기 위한 특징으로 소중할 뿐
화면에 의해 기준을 제시받아 등급이 매겨지지는 않는다.

노틀담의 꼽추가 아름답고 히드클리프가 매력적이고 벙어리 삼룡이가 가슴 시린 건

그들이 롱다리의 미남이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상처 속의 진실 때문이 아닌가?
 

그런 점에서 숏다리가 아름답다.

물론 롱다리 그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 아니듯이

숏다리도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와 세계를 공유한 그가 바로 숏다리여서

숏다리가 내게 그를 연상시킨다면 그 숏다리는 소중한 것, 아름다운 것이다.
 

매스컴이 만들어 낸 개성 있는 미남 미녀라는 폭력에 의해

어느 날 갑자기 추남이 되기도 하고 미녀가 되기도 하는 이 세대는

늘상 보이지 않는 매스컴의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는 점에서 불행하다.
매스컴이 만들어내는 미를 찾아 불나비처럼 달려드는 일의 귀결은 분명하다.
물 좋은 사람을 찾아가고 그 물 좋은 사람에 걸맞는

물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을 하는 것이다.

물론 이때 인간은 정신이 있는 살아 있는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물 좋은` 생선과 질적으로 다른 것이 별로 없는, 값이 매겨져
기호화되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인간 사이에 `넌 얼마짜리`라는 평가만 있고

따뜻한 시선이 결핍된 신세대는 그래서 불행한 세대다.

그들이 신경숙의 (깊은 슬픔)에 나오는

   `나 그들을 만나 불행했다.

    그러나 그 불행으로 나 그 시절을 견뎠다`는

문장을 좋아하는 것은 불행까지도 삶의 증거가 되는

그 만남의 아름다움을 체험했기 때문이 아니라
체험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과장인가?

물론 그들이 체험하고자 하는 것은 불행 자체가 아니라

불행까지도 껴안는 것이 의미가 되는 그 만남의 진지성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외모 중심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비록 옷 입는 법에 서툴고 화장을 할 줄 몰라도 인간 냄새를 풍기는 사람,

비롯 숏다리에 버스를 타고 다녀도

상대방의 마음을 따뜻하게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 매력적이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