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상식/문학관

나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6

오늘의 쉼터 2011. 5. 2. 14:20

 

나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6

 

제2부  삐딱하게 보고 바로 말하기

 

2.  몸을 사랑하는 이유
 

마음이 아프면 몸이 반응한다. 화가 나면 열이 든다. 허열이 뜬다고 한다.
소화기능이 열 받았을 때 먹으면 체하기 쉽다.

기대하던 일이나 사람을 얻게 될 것 같은 마음, 기쁜 마음이 들면 몸은 달뜬다.

안 먹어도 배가 고프지 않고 피식 피식 웃게 된다.

때로는 행복감을 견딜 수 없는 몸이 잠을 방해하기도 한다.

마음으로 사랑을 하면 얼굴이 예뻐진다. 확실히 생기가 돈다.

그러다가 실연을 당해 마음이 다치면 몸에 어두움의 색깔이 밴다.

너, 무슨일 있니, 묻고 싶어진다.
 

아, 몸이 없으면 마음 둘 때가 어디일까?

아니, 몸이 없다면 마음이 어찌 있을까?

몸이 없다면 열정도, 욕망도 없고 그리하여 마음도, 삶도 없는 것을.
나는 몸을 사랑한다.

몸을 사랑하기 때문에 마음을 사랑하고, 몸 사랑을 통해 마음 사랑의 울림을 감지한다.

나는 몸을 박대하고 마음으로 견뎌야 하는 일의 고달픔을 안다.

그래서인지 나는 마음만을 강조하는 사람들의 마음 사랑을 절대 믿지 않는다.

마음만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이데아계를 사랑하는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라기보다

남의 몸을 착취함으로써 남의 마음을 억압하고

그리고도 무엇을 억압했는지도 모르는 무심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무심한 사람들은 자기 몸을 그렇게 대접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주 민감하다.
 

주변에 마음만을 강조하는 사람이 있으면 찬찬히 보라.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혹시 모든 것을 마음으로 때우려는 사람은 아닌가?

내가 일을 하는 것은 바로 너 때문이라고 하면서

무작정 기다리게 하는 것이 능사인 그런 마음을 만난 적이 없나?

우리는 모두 한마음 한가족이라는 사장님의 듣기 좋은 말이

임금 적게 주고 효과적으로 부리기 위한 것일 때 그 지긋 지긋한 마음이 싫어서

그저 허탈한 웃음을 지어본 적이 없나?

그런 경험이 없다면 당신은 행운아다.

나는 몸을 믿는다. 몸을 믿는 나는 안다.

지친 몸을 마음 하나만으로 버텨내야 하는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처절하고 황폐한 것인가를.

그리고 마음으로 버티게 하는 사람의 무심한 잔인함을.
그런데 요즘 몸이, 섹스 어필이라는 코드로 강조되어 유행병처럼 번지는 것을 보면 당황스럽다.

 

96년은 몸의 해?
몸 바람이 분다. 태풍처럼 강하게 분다.

여자뿐만 아니라 남자들도 그 바람에
내몰리고 있다. 이제는 남자들도 섹스 어필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그 섹스 어필에 저항할자 누구인가?

 `얼굴만 예쁘다고 여자냐, 마음이 고와야 여자지`를 읊는 남자들인가?

남자들이 이 노래에 의미를 부여하는 대개의 경우는

얼굴 예쁜 여자의 마음을 얻고자 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다.

여자들이 그 노래를 즐겨 부르고 싶어 한다면? 두말할 것도 없다.

내세울 외모가 없는 여자의 한풀이거나 한마디 해야 하는 자의 외교적인 발언으로 읽힌다.
 

무엇이 진실인가? 외모가 중요하지 않다는 명사의 말은

외모가 중요하다는 말을 강조하는 반어법으로 읽히는 이때에.
 섹스 어필 바람의 안전지대는 없어 보인다.

그 바람이 부는 자리에서 “아니야”를 외칠 때

그 외침은 저항력이 되는 게 아니라 코미디가 되거나 사람들을 졸게 만든다.


그러나 어느 잡지에 다이어트법이 실렸을 때 졸던 눈은 초롱해진다. 

섹스 어필한 화장법을 소개하는 기사는 언제라도 시선을 붙잡는다.

잡지에서 일 년 열두 달 다이어트 코너는 빠지지 않고 화장법과 옷 입는 법은 빠지지 않는다.
  “아니야”를 외쳤던 어떤 평론가들은 더 이상 저항이 저항력이 되지 않자
솔직함을 무기로 대중에게 다가서고자 섹스 어필편을 들기 시작했다.

섹스 어필의 철학을 제공하기에 이른 것이다.

몸 그자체가 중요하다고. 96년은 `몸의 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갑자기 몸이 화두로 등장했다.
뜬금없이 몸이라는 말이 왜 등장했을까?

 마음을 강조한 것에 대한 반도이겠지만 우리가 언제 마음을 강조했는가?

나는 그 반동이라는 게 `반동`이 아니라

빈곤해진 평론계가 살아남기 위해 이미 진부해진 `감성` 혹은 `개성`의 코드를
보다 섹스 어필하게 `변형`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사실 마음이 그 힘을 상실한 지는 꽤 오래다.

10여 년 전 포스트모던 바람이 불 때 이미 마음은 KO패를 당했다.

그때 마음을 이긴 것은 감성이었다.

이성이 아닌 감성이 개성 강조를 내세우며 소비시장을 주도해 오지 않았나!

개성의 지향점은 `톡톡 튀는거`였고 그 톡톡 튐의 중요한 내용은 섹스 어필이었다.
그러나 개성의 이름으로 진행된 것은 소비였다.

00청바지를 사고 00운동화를 신고 00화장품으로 화장을 하고 00디자인의 옷을 화려하게 걸쳤다.

전혀 개성과 관계 없어 보이는 세탁기, 냉장고,

하다못해 전화기까지 개성이라는 이름으로 팔려 나갔다.

 

지금, 또 다른 몸의 억압을 본다
  `섹스 어필`은 이제 먹고 사는데 걱정이 없어진 우리 시대의 화두인지도 모른다.

잘살기 위해 몸 바쳐 일한 70년대 경제성장 주역의 아들, 딸로 태어나
잘살기 위해 몸 바칠 필요가 없어진 세대에게 몸이란 단순한 노동력이 아니라
그 자체를 즐거워해도 좋을 생명이 된 것이다.

더군다나 제조업보다 소비로부터 더 많은 생산을 유도하는 3차산업 중심의 사회가 될 때

몸이 단순한 노동력일 수 없는 것은 정당하기까지 하다.
 

후기 산업사회에서 누가 연예인을 광대라고 하는가?

연예인은 천한 광대가 아니라 화려한 스타다.

돈 벌고 유명해지는 연예인을 꿈꾸는 청소년들이 얼마나 많은가.

70년대의 청소년들에게는 인기 직업 순위에도 올라와 있지 못했던 연예인은

이제 단연코 청소년들이 선호하는 직업 1위가 되었다.

모두들 연예인의 꿈을 꾼다.

그리고 화려하게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스타군단을 따라 성형하고 다이어트를 하고 운동을 한다.
 

아, 섹스 어필!

섹스 어필하지 않는 여자의 실력이 대가 센 것으로 읽히고
섹스 어필하지 않는 남자의 성실함이 지루함으로 읽힌다.

섹스 어필한 여자가 가련하게 굴면 청순가련형이 되고

섹스 어필하지 않는 여자가 가련하게 굴면 코미디가 된다.
섹스 어필한 배역을 맡아 멋있어진 차인표, 이정재가 뜨고,

섹스 어필한 춤으로 엘리베이터 안에서까지 사랑을 꿈꾸는

박진영의 EQ(감성지수)에 몰입하고자 하는 사람이 늘어날 때,

누가 감히 마음의 아름다움을 설교할 수 있을 것인가?

영화 (코르셋)의 주인공 이혜은이 `공선주`라는 살찐 여자 콤플랙스 연기를 통해서가 아니라

영화에 데뷔하기 위해 찌웠던 살을 몇달 만에 40킬로그램대로 빼는 데 성공하여

우리 시대의 스타가 되는 것을 보고 누가 살과의 전쟁이

실존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몸이 강호동인 사람이 “몸보다는 마음이 중요하다”고 말하면 모두들 웃는다.

몸을 보고 마음을 평가하는 시대, 아니, 마음을 떠난 몸이 중요해진 시대가 된 것이다.
그런데 몸이 강조되는 시대에 나는 몸의 억압을 생각한다.

몸이 몸의 해방을 위해 강조되는 거라면 살아 있다는 것에 대한 쾌감이 스치겠지만

몸이 백화점의 물건값처럼 값을 매기기 위해 강조되는 거라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지금이 모의 시대라면 그것은 모두들 `섹스 어필`이 주는 무게를 눈치채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섹스 어필한 것은 중요한 것이다.

섹스 어필은 생명을 만드는 중요한 신호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섹스 어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섹스 어필이 제 문맥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몸을 무시한 마음이 마음을 허위의식으로 만들 듯 마음을 떠난 섹스 어필은

몸을 관능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생선적`으로 만든다(물 좋다고 하지 않나!).

관능적인 것이 하룻밤의 욕망이 아니라 함께 일상을 나눠 갖고 싶은 사람에 대한 열정이라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마음과 분리되지 않은 몸이다.

마음과 분리되지 않은 열정은 우리를 가뿐하게 한다.
그런데 섹스 어필이 마음을 떠나 있다면

그것은 참을 수 없는 무게로 다가와 우리에게 불안감을 조성한다.

끊임없이 `물이 좋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낳는 것이다.

우리가 섹스 어필이라는 기호에 사로잡혀 있는 한 우리의 불안감은 끝이 없다.

물 좋은 것이란 기호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에

끝없는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인기를 먹고 살아야 하는 연예인들의 공통 정서가

바로 이 불안감인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물 좋은 육체에 대한 강박관념
그대는 그대보다 물이 좋지 않은 육체를 보고 우월감을 느끼는가?

그렇다면 그대는 분명히 그대보다 물 좋은 육체에 기가 죽는다.

영원한 우월감은 없다.

비교가 되는 육체, 그것이 몸을 강조함으로써 우리가 얻어내고자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살아있는 몸의 문화가 아니라 생선처럼 취급되는 육체의 문화다.

그렇다. 육체의 문화다. 몸이 살과 피가 도는 살아 있는 인간의

생명력이 숨쉬는 공간이라면 몸으로부터 떨어져나간 육체란 물 좋은 생선과 같다.

물좋은 생선을 고르는 주부들의 시선을 냉정하다.
물론 그 냉정함은 평가의 목적에서 온다.

그 목적이 소비의 창출이든, 하룻밤의 꿈이든,

사무실의 분위기든 살아 숨쉬는 몸에서 떨어져간 `육체` 혹은 
`섹스 어필`이라는 코드가 몸이라는 살아 있는 말을 오염시킬 때 나는 슬프다.
몸을 회복하기로 결단한다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전쟁은

더 이상 힘이 없는 마음과의 전쟁도, 살과의 전쟁도 아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육체와의 전쟁이다.
 

지금의 억압은 마음의 억압이 아니라 육체의 억압니다.

생각해 보라.

매일 아침 분칠하고 출근해야 하는 일의 번거로움과 화장독으로 트러블이 생기는
피부에 대한 연민을 화장을 하고 출근해야 하는 회사라면 화장을 해야 할 것이다.
너무 살이 쪄서 늘 많은 사람의 주목의 대상이 되어

“살찐 것은 죄가 아니다”를 항변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다이어트를 하고 주목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게 편할 것이다.

살찐 것이 보기 싫어서가 아니라 그에 대해 항변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퇴근 후나 주말에 마음 편하게 만나야 할 친구나 연인이

섹스 어필이라는 이름으로 화장을 강요하거나 차인표, 채시라를 들먹이며

그 몸매를 만들라고 한다면, 그 만남을 포기하라.

성숙이 덜 된 사람들, 전혀 성숙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사람들과

지속적으로 만나야 하는 것은 몸을 피곤하게 하는 일이다.
그대의 맨얼굴을 아껴주지 않는 사람, 맨얼굴의 풍부한 표정을,

편한 옷의 자연스런 행동을, 잔주름을 아끼지 않는 사람과 어찌 평생을 함께 하겠는가?
그대도 마찬가지다.

상대방의 맨얼굴에 짜증이 나고  상대방이 아플 때 피하고 싶다면

그대가 그를 사랑하는지 심각하게 물어 보라.

사랑하는 것은 어떠한 연출이 없이도 마음이 편할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이 편하다는 것은 몸이 편하다는 것이다.

몸을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일상의 작은 사건 하나 하나에서 입장 바꿔 깊이 생각해 주고 싶은 것이 아닐까?

 

3.   노틀담에 짝사랑만 있는 이유1.


  콰지모도가 다시 태어났다.

1996년 여름 디즈니에서 애니메이션으로 태어난 콰지모도는 19세기 초(1831)

위고가 낳은 그 모습을 완전히 벗어 버렸다.
19세기의 콰지모도가 노틀담 성당의 종소리로만 세상과 소통한 외로운 영혼이었다면

21세기를 바라보는 이 시점에서 새로 태어난 콰지모도는

유머와 지략과 익살로 우리를 유혹하는 귀여운 개그맨으로 나타났다.
사실 (레미제라블)과 달리(노틀담의 곱추)는 평론가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작품이다.

너무나 뻔하고 너무나 과장이 많은 사랑 이야기로 특별한 것이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 작품은 특별한 것은 찾는 평론가들에겐 단지 특별할 게 없는 사랑이야기일지 모르지만

그날이 그날인 권태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일반인의 시선을 끌기에는 충분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젊은 위고가 만든 (노틀담의 곱추)의 매력에 자주 끌려간다.
벌써 (노틀담의 곱추)는 극영화로도 4번이나 만들어졌다.

내가 본 것은 안소니 퀸이 콰지모도로 나온 작품으로 재미있게 보았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현란한 화면으로 시작과 청각을 꽉 채우는 영화보다는

역시 상상력을 동원할 수 있는 원작을 더 좋아한다.

 

  (노틀담의 곱추)의 어이없는 변신

원작을 영화화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러다 보니 원작과 영화의 관계가 자주 논의된다.

물론 소설과 영화는 장르가 다르다.

그러므로 원작이 있는 작품을 영화화할 때 원작을 바탕으로 하되 원작에 구애될 필요는 없다.
그런데 월트 디즈니 사는 해도 너무 했다.

그 회사는 원작을 소화한다기보다 뒤트는 그런 재주를 가졌다.

월트 디즈니는 만화영화라는 점을 부각시키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원작의 정신을 쉽게 바꾸어 버린다.

예쁜 다리를 얻어 왕자와 결혼한 디즈니식(인어공주)가 그랬고,

원작엔 없는 가스통이 등장하는 (미녀와 야수)가 그랬다.

그럼으로써 운명 같은 사랑의 의미를(인어공주), 성인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미녀와 야수)인지를 햄버거식으로 바꿔 버렸다.
 

이번에 나온 (노틀담의 곱추)도 원작과 완전히 달랐다.

이 애니메이션을 보고 (노틀담의 곱추)를 얘기하는 사람이 없기를!
무엇보다도 인물들의 성격이 다르다.

나는 영화를 보고 허탈해서 나왔다.

`아, 저렇게도 영화를 만드는구나` 했다.

내가 보기에 원작과 같은 것은 사람 이름과 성당 이름뿐이었다.
영화는 처음부터 작품의 정신을 구현할 의도가 없었다.

단지 작품의 지명도를 이용해서 관객을 모은 후 미국적 자본주의 정신을 선포할 뿐이었다.
 

나는 거기서 현대판 아메리칸 드림을 보았다.
원래의 콰지모도는 아무에게도 다가설 수 없고 다가서지도 않으며

종소리에 배어나는 울림으로만 자신을 표현해내는,

의롭다는 말조차 사치스러운 외로운 종치기였다.

그러나 신세대 콰지모도는 노틀담을 배경으로 노틀담의 석상과
새들과 함께 노래하고 춤추는 귀여운 어린이로 둔갑했다.

그는 유머감각도 있고 머리도 좋은데 억울하게도

악한 프롤로 부주교에게 억압당하는 귀엽고 천진한 만인의 친구(개그맨?)였다.

에스메렐다는 섹시한 매력으로 모든 사람의 영혼을 사로잡는 집시다

(현대판 일류배우가 모델이었을 것이다).
 

원작에서 날건달인 피버스는 정의의 사도로 변해 있었고,

신과 인간 사이에서 고뇌하는 프롤로 부주교는 스스로를 선하다고 믿는

영원히 철들지 않는 괴물이 되었다.

그래서 정의의 사도로 변한 피버스와 만인의 친구가 될 자질을 갖추었면서도

프롤로 부주교에게 눌려 사는 콰지모도,

그리고 섹시한 여자 에스메렐다가 힘을 합쳐 세상은 악하고 나는 선하다고 믿는 악당

프롤로를 쳐부수는게 줄거리가 됐다.

물론 악은 격퇴되고 선은 이긴다. 해피엔딩의 (노틀담의 곱추)다.
 

그런데 해피엔딩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

섹시한 에스메렐다를 누구와 결혼시킬 것인가.

절름발이에다 곱추인 못생긴 콰지모도와 결혼시킬 것인가?
영화는 그림을 맞추기 위해 잘생긴 피버스에게로 결론이 났다.
그리고 못생긴 콰지모도에겐 시민의 영웅이라는 자리를 내준다.

나눠먹기식의 그림이다.

그것은 우격다짐으로 만들어진 선에 대해

절대 눈에 보이는 보상을 빼먹지 않는 미국의 당근이었고,

확실히 흥행이 목적인 할리우드 영화였다.

 

짝사랑이 사랑인가?
애니메이션의 (노틀담의 곱추)는 우리가 흔히 보는 만화영화 이상의 의미가 없다.

그래도 광고를 많이 했으니까 꼭 봐야겠다고 마음 먹은 사람들은
영화관에 가기 전에 원작을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원작 (노틀담의 곱추)는 재미도 있지만 도대체 사는게 뭔지,

운명이 어떤 건지를 생각해 보게 한다.
 

 나는 이 작품을 세 번 읽었다.

좋은 작품은 자꾸 읽게 만드는 거라고 누가 그랬는데,

사실 이 작품은 읽을 때마다 감동이 다르다.

내가 크면서 작품도 같이 크는 것 같다.
고등학교 시절 (노틀담의 곱추)를 읽었을 때

나는 콰지모도의 순애보적 사랑을 가슴 아프게 사랑했다.

이념적인 것을 중요하게 여겼던 대학시절엔 (노틀담의 곱추)를 읽으며

중세 말기의 가진 자들(왕, 신부)의 위선과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자들의 비참한 삶을 읽어냈다.

노틀담 거리의 불량배들, 거지들, 집시들의 억눌린 삶과

기득권을 가진 자들의 허위에 찬 삶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얼마 전 다시 그 책을 읽었을 때 나는 다른 것을 읽었다.

사랑은 운명이고 그 운명이 삶의 전부는 아닐지 모르지만 삶의 핵이라는 것이었다.
아마도 위고는 이 작품을 통해 그것을 말하려 했던 것 같다.
실제로 위고는 (노틀담의 곱추)를 노틀담 사원 종탑의 벽에 새겨진 `운명` 이라는

희랍어를 보고 구상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분명히 사랑에는 운명이라는 말로밖에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 들어 있다.
 

 (노틀담의 곱추)의 여주인공인 에스메렐다는

우연히 자기를 위기에서 구해 준 잘생긴 장교 피버스를 사랑하지만,

잘생겼다는 것을 무기로 여자를 데리고 노는데 익숙한 건달 피버스는

자기와 엄청난 신분의 차이가 나는 집시 에스메렐다를 창부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에게 푹 빠져 있는 에스메렐다가 “저를 사랑하세요?”라고 물을 때

사랑한다고 아주 쉽게 지껄이면서도

에스메렐다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가벼운 남자가 피버스다.
 

후에 에스메렐다가 피버스를 살해한 억울한 혐의로 죄없이 죽을 때도

그저 창부 하나가 죽게 되었다고 생각하여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않고 너는 죽어라,
나는 나의 길을 가련다는 심정으로 결혼한다.

그런 피버스를 디즈니가 정의의 사자로 둔갑시켰을 때 나는 자본의 힘에 감탄했다.

원래 에스메렐다의 사랑은 영원한 짝사랑이었다.

사실 노틀담에서는 모든 사랑이 짝사랑이다.

우직한 콰지모도는 모두가 자신을 멸시하는 자리에서

한 모금의 물을 건네준 인간적인 에스메렐다를 천진하게 짝사랑하고,

고뇌하는 영혼인 프롤로는 에스메렐다를 간교하게 짝사랑해서 질투의 불꽃을 피워낸다.

그런데 짝사랑이 사랑인가?
 

사랑은 일상을 함께하면서 서로의 꿈에서 서로를 보고

그의 눈빛에서 나의 미래를 보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에게 짝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그렇지만 사랑이란 내 손을 떠나 있는 운명 같은 것이어서

그것이 찾아오면 어쩔 수 없이 사랑의 마력에 쩔쩔 맬 수밖에 없다고 믿는 사람에게

짝사랑은 아주 중요한 사랑이다.
그 믿음으로 사랑은 신선한 충격이라고 생각하게 된 사람에게

짝사랑은 사랑의 중요한 측면을 드러내 보여준다.

아무런 보상 없이도 그저 그 사람의 존재 자체가 이 세상의 모든 의미가 되는 것이 사랑이라면,

바로 그 보상을 기대하지 않는 사랑의 순수성을 짝사랑 이상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없다.
짝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존재하는 노틀담은 비극을 만드는 자리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숙명은 그 자체가 비극일 테지만

노틀담을 통해 위고가 드러내려고 했던 비극이 보여 주는 것을 무엇일까?

그리고 그 운명 때문에 설사 죽음의 비극을 맞는다고 해도

사랑은 때로는 죽음과 맞바꿀 수 있을 만큼 가치 있는 것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3.   노틀담에 짝사랑만 있는 이유2

 

거역할 수 없는 운명 같은 사람
16세기의 아름다운 집시 여인 에스메렐다는

춤을 추고 노래를 하면서 동냥으로 살아가는 천한 거리의 여자다.

이 여자를 누가 사랑하는가? 스스로를
하나님께 바치기로 결단한 프롤로 부주교다.

그는 버려진 아이 콰지모도를 길러낸 지적인 사람이다.

종교적으로 선하게 살기 위해 세속적 욕망을 버린 프롤로는

늦은 나이에 찾아온 자기의 사랑에 번민한다.
 

세속의 가치를 법복 속에 가두어왔으나 에스메렐다가 받아주기만 한다면
법복까지 벗을 수 있다고 맹세하는 프롤로는 에스메랄다에게 사랑을 구걸하는 불쌍한 남자다.

원작에서 그는 사랑할 수는 없어도 이해할 수는 있는 인물이다.
물론 피버스에게 빠져 있는 에스메렐다는 프롤로의 사랑은 외면한 채

멋있게 생긴 건달 장교 피버스와의 결혼을 꿈꾼다.
보통은 `삐뚤어진 영혼`의 소유자로 치부되지만

노틀담 성당의 주인 프롤로는 악한 자라고 쉽게 단정지어 버릴 수 있는 인물은 아니다.

선과 악의 이분법의 구도에서 보면 프롤로는

에스메렐다를 죽게 한 나쁜 놈인지는 몰라도 조금 생각해 보면

프롤로는 짝사랑과 질투라는 감정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는 매우 인간적인 인물이다.

 

 “당신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어.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야.
  당신의 노래는  당신의 춤보다 더 매력적이었어. 난 달아나려고 했어.

그러나 불가능했어. 나는 모든 구제책을 다 써보려고 했어.

수도원도, 제단도, 연구도, 책도.... 참 미쳤지!

오, 정열만이 머리에 가득찰 때 학문은 너무나 공허했어!
그후 나는 책과 나 사이에 무엇이 있었나를 알 수 있었어.

당신이었어. 당신의 그림자였어....

나는 당신이 보고 싶었고 당신의 몸을 만져 보고 싶었고 당신이 누군지 알고 싶었어.

너무 괴로워서 어느 땐 현실로서 내 환상을 깨뜨리고 싶었지. 그래서 당신의 찾았어.

그런데 당신을 다시 보았을 때 나는 천번이라도 당신을 보고 싶었어.“

 

  그러나 그의 간절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랑은 허공에 뜬다.

그러다가 피버스와 에스메렐다가 만나는 걸 본 프롤로는 질투 때문에 피버스를 죽이는데
피버스와 함께 있었던 에스메렐다가 살인누명을 쓴다.

에스메렐다는 살인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게 되고

그녀를 짝사랑하던 콰지모도가 에스멜랄다를 구해서
신성불가침의 피난소인 대성당 안으로 도피시킨다.
결국 에스메랄다는 마녀재판을 받아 죽고 그녀가 죽자

절망감으로 미쳐버릴 것 같은 콰지모도는 그녀의 시신을 안은 채 그녀와 함께 죽어간다.

원작은 비극이다.

 

길들지 않은 사람의 사랑
비극이 중요한 이유가 있다. 비극은 단순히 슬픈 이야기는 아니다.

`비에 젖어 눈물에 젖어 슬픔에 젖어` 하는 것만으로 비극이 되지는 않는다.

모든 것을 버리고도 진주처럼 남는 생의 중요한 측면을 드러낼 때 비극이 된다.

그리하여 니체는 비극을 미학적 범주로까지 결상시킨다.

비극이 미학적 범주라면 비극이야말로 인생의 아름다움이 뭔지를 극명하게 그려내 줄 것이다.
(노틀담의 곱추)에서 모든 사람은 사랑 때문에 파멸한다.

에스메렐다는 피버스를 사랑했기 때문에 죽음으로 가는 함정에 빠지고.

프롤로 부주교는 사랑의 질투가 원인이 되어 모든것을 잃어버리고,

콰지모도는 치매하다고까지 할 만한 천진한 사랑으로

에스메렐다가 죽은 자리에서 죽음을 선택한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고 그저 자기 욕망에만 급급한 피버스만 죽지 않고

에스메랄다가 죽은 자리에서 편안하게 결혼한다.

여기처럼 편안한 삶이 부럽지 않은 곳이 있을까?
 

비극성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 위고가 관심을 가진 인물은 역시 노틀담의 종치기 콰지모도다.

원작의 콰지모도는 원래 버려진 아이다.

곱추에다 가슴뼈가 불거져 나왔고 한쪽 눈은 보이지 않는 그런 아이다.

그런 아이를 노틀담의 부주교인 프롤로가 주어다가 키운 것이다.

워낙 다른 아이와 달랐기 때문에  특별히 공부 같은 것을 시킬 수도 없었던

프롤로는 콰지모도를 성당의 종치기로 키운다.
종치기를 하다가 귀까지 멀은 콰지모도는 말까지 어눌하게 하는,

인간의 형상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괴물이 된다.

그는 도저히 세상과 화해할 수 없는 인물이다.

물과 기름처럼 일반인과 다른 콰지모도는 종소리만으로 세계에 자기의 존재를 알리고

종소리의 울림만으로 세계를 느끼는 외로운 영혼이다.
추악하기 때문에 남 앞에 나서길 꺼리는 그가 남 앞에 나섰을 때는 영락없이 놀림의 대상이 된다.

남과 사귀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어떤 친구도 없었던 그는

일반인의 관점에서 보면 심술궂은 청년이다.

동물처럼 아무거나 잘 먹고, 종이나 열심히 치는 힘센 청년이 콰지모도인 것이다.
 

위고가 콰지모도라는 인물을 통해 의도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길들여지지 않는, 아니 길들여져서는 안 되는 인간의 야성일 것이다.

야성이란 길들여지지 않는 생명력이다.

보통 인간은 사회화 되면서 돈의 힘에 길들여지고
권력의 맛에 길들여지고 명예의 환상에 길들여진다.
 길들지 않는 사람의 사랑은 순수한 사랑이다.

대체로 세상에서는 순수한 것은 무력하다.

그러나 사랑은 순수할 때 힘이 세다.

그 힘이란 자본을 모으는 힘이 아니라 죽음을 내줘도 아깝지 않은 열정이다.

언젠가는 죽을 건데 사랑 때문에 죽음을 두려움 없이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로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일이 아닌가!

물론 그것은 절대로 의도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예쁜 여자를 찾는 남자들의 심리에는
세속의 사랑에 권력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은 이제 강조할 일도 아니다.
언젠가 철학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누군가 말했다.

요즘엔 양귀비도, 클레오파트라도 조세핀도 없다고,

나는 대꾸했다. “현종이 없고 안토니우스가 없고 나폴레옹이 없나 보죠?”
 

사실 여자들이 양귀비가 되고자 하고, 숙종의 총애를 잃지 않는 장희빈이 되려 하고

클레오파트라나 조세핀을 부러워 하는 것은 사랑을 부러워 해서가 아닐 것이다.

그건 그 시대의 최고라고 평가되는 자의 사랑을 받음으로써

이 세상의 온갖 세속적 가치를 누려보겠다는 것일 뿐이다.
그러면 남자들이 양귀비, 클레오파트라 운운하는 건 뭘까?

정말 아름다움을 체험하고 싶다는 순수한 동기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예쁘다고 공인된 여자를 자기 여자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사회적으로 예쁘다고 공인된 여자를

자기 여자로 만들 수 있는 것은 남자의 중요항 능력이라고 평가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나, 괜찮은 사람’이라고 광고하는 의미 밖에 없다.
 

그런 사람들은 사랑을 과시하며 살아도 사랑을 위해서 죽는 법은 절대로 없다.

당연하다.

사랑이 우리 삶이 만나게 되는 하나의 운명 같은 사태가 아니라
나의 삶의 그럴듯함을 자랑하기 위한 것이라면 잘살자고 한 짓인데 죽을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런 상황에서 사랑 때문에 자연스럽게 죽어간 콰지모도는 그 모습이 아무리 추해도 빛이 난다.

콰지모도가 아름다운 것은 사랑의 우직성 때문이다.
콰지모도가 어눌하게 말하는 것은 눈빛은 말보다

더 분명하게 사랑을 전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이고

콰지모도가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은 사랑은 그 울림만으로도

다앙한 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 아닐까?

 

4.   이현세의 까치에 반한 이유


 절망이라는 무거운 감정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극단적인 방법은 희망을 포기하는 것이다.

희망을 포기한다면 절망할 수 있는 길이 원천봉쇄되기 때문이다.
기형도는 그런 분위기를 보여 주고 떠난 대표적인 시인일 터이다.

그럼에도 희망을 포기하는 자를 보는 것은 왠지 슬플 뿐더러 서럽다.

그래서인지 나는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상황에서 절망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기도라도 해주고 싶다.

 

국어책을 외워서라도
고등학고 때 아주 착하고 순진했으나 공부는 잘하지 못했던 정미라는 친구가 있었다.

정미는 “공부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다“를 외치고 다녔던 우리 반 꾸러기였다.

공부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고 절규하고 싶은 것은 그 당시 우리들의 공통 정서이긴 했으나

그 절규야말로 공부가 인생의 전부였던 시절의 반영인 것을.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그렇게 외치고 다니면서 인기를 모았던 정미가

노는 시간에도 책을 붙들고 있는게 아닌가! 국어책이었다.

국사 시간에 졸고 수학 시간엔 엎드려 자고 체육 시간에만 펄펄 날던 정미였다.

그런 정미가 국어 시간에눈을 초롱하게 뜨고 선생님 말씀에 귀기울이게 된 것이다.

정미는 그당시 우리 학교에 처음으로 부임해 온 국어 선생님을

그 순진한 성격에 맞게 공개적으로 짝사랑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학입시가 우리들의 꿈과 낭만을 짓눌렀던 시절이었으나

그래도 생생하게 살아 있던 시절이라 시도 때도 없이 웃던 때,

정미는 우리의 웃음보였다.
 

그러나 정미의 그런 노력에도 선생님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한 기색이었다.
어떻게든 선생님 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싶은 정미는

어느 날부터 국어 시간 전이면 어김없이 매점엘 갔다.

캔 음료를 사기 위해서다.

그리고는 선생님이 앞문으로 들어오는 바로 그 시간에 맞춰 배시시 웃으며

뒷문으로 와서 탁자 위에 캔 음료를 올려놓고 자기 자리로 걸어 들어갔다.

아이들은 박수를 쳤고 정미는 그런 방식으로 스타가 되었다.
국어 공부만 하던 정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시험보기 전날 밤 밤을 샜다고 했다.

국어 시험 때문이었다.

유별나게 짝사랑 한다고 비아냥거리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나는 정말로 정미가 국어 시험을 잘 보기를 기도했다.

반장이었던 나는 선생님의 채점을 도우면서 정미의 국어 시험지를 유심히 보았다.
67점이었다. 정말 가슴이 아팠다.
그 후로도 정미는 지치지 않고 국어 공부만 했지만 매달 보는 국어 시험에서 73점을 넘지 못했다

(그 당시 국어, 수학, 영어는 매달 시험을 보았다).

바탕이 없는 상황에서 무조건 외우는 것으로는 점수를 올리는 데 한계가 았었을 것이다.
 

2학기도 끝나가는 정미는 환하게 웃으며 짝사랑 포기를 선언했다.

그게 어디 사랑이었겠는가? 자기 자신에 대한 시험이었지.

정미는 자기 자신에 대한 그 시험에 결과가 없자 지친 것이다.

그리고는 수업시간에 조는 것이 취미였던 예전의 정미로 돌아갔다.
지금도 그때 그 시절, 우리를 웃게 만들었던 내 친구 정미를 생각하면 나는 왠지 가슴이 저린다.

희망을 가지고 덤볐으나 결국 깨진 희망의 파편을 안고 현실로 돌아간 정미는

고교 시절 내가 감지한 사회의 어렴풋한 모습이었다.
절망한 사람이 그 절망에서 빠져나오는 유일한 출구가 희망의 포기인 체념뿐이라면

아, 그 세계는 얼마나 절망스러운가!

산다는 것은 허무한 것일지라도 희망을 붙드는 일일 텐데.

어쩌나.까치와 엄지는 짝인 것을!
 

나는 아무런 노력도 없이 공짜로 희망을 주워담고

현실을 주워 담는 자의 행운에 취해 본 적도 없지만

절망해야 할 상황에서 절망하지 못하고 출구를 더듬는 몸짓을 보면 가슴을 졸이게 된다.

그리고 그를 위해 기도해 주고 싶다.
내가 기도해 주고 싶은 인물은 까치이고 절대로 기도해 주고 싶지 않은 인물은 엄지다.

그런데 어쩌나, 엄지와 까치는 짝인 것을!
 

맞다. 나는 이현세의 만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얼마 전 우연히 서점에 들렀다가 대학 시절 좋아했던 이현세의 초기만화들이

다시 깨끗하게 포장되어 새로운 독자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공포의 외인구단)이고 (지옥의 링)이고 (까치와 고독한 영웅들)이었다.

어쩌면 80년대 젊은이들의 정서를 읽을 수 있는 그 작품들은

각각이 모두 스케일이 큰 장편만화지만 주제나 등장인물의 성격 면에서만 본다면

같이 다뤄도 무방한 하나의 작품군이다.

철없는 여자애들은 까치에 반했고

철없는 남자애들 역시 그까치에 반했지만 그 이유는 달랐다.

여자애들이 까치에 반했던 이유는 목숨 걸고 자기를 지켜 줄 강한 남성에 대한 선망이었고

남자애들이 까치에 반했던 건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결국 해내고야 마는 의지였고

(현실은 아니다. 세 작품에서 까치는 장님이 되거나 죽거나 한다)

믿을 수 있는 인간에 대한 선망이었을 것이다.
 

나도 철이 없어서인지 지금까지 까치가 좋다.

그는 동탁이나 도협이처럼 성공을 향해 질주하는 사람의 대열에 서 있지만

그는 성공이 목적인 사람이 아니라 강해지지 않으면 지킬 수 없는 진실을 지키기 위해

그 대열에 끼려 했던 진짜 사나이다.
진짜 사나이?

 이 말은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한 후 처음 써 보는 말이다.

말에 배어 있는 여성을 무시하는 듯한 시선. 남성 우월주의의 냄새가 너무 싫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현세 만화를 말할 때는 이 말을 쓰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이 말을 쓰는 의도는 청순하고 약하다는 것을 무기로

달콤한 것을 찾아 이리 저리 날아다니는 엄지의 의미를 지우기 위해서다.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이현세 초기만화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처절한 승부의 세계에서 노는 남자들만 있기 때문이다.

이현세 초기만화에 등장하는 여자 주인공 엄지는 청순가련형의 여우이고

그외의 여성 인물들도 질투와 질시라는 남성적 시선을 벗어나지 못한다.

사는 것처럼 사는 것은 남자들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현세 만화는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읽으면 너무나 재미가 없다.
 

재미있게 읽으려면 시각을 바꿔 줘야 한다.

어떻게? 사나이만이 인간이었던 시절의 이야기로 읽으면 된다.

사실 이현세의 초기만화는 가부장제가 마지막 불꽃을 피우던 시대의 산물 아닌가!

그러니까 가부장제가 만화 보는 재미의 걸림돌이 되지 않으려면

그것을 거둬내고 읽어야 하는 것이다.

그대가 여성일지라도 엄지가 되지 말고 까치가 되고 마동탁이 되고 백두산이 돼 봐야 한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엄지는 떳떳한 한 인간이라기보다

(절대 엄지를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까치와 마동탁이라는 다른 두 인간형의 삶과 진실을 그려내기 위한 매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현세는 돈과 돈이 될 수 있는 명성이나 인기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성공이 목적인 인간형 마동탁(그는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주목하라)과

현실 감각이 있으면서 그 마동탁을 넘어서 진실을 구하고 있는

까치 오혜성의 세계를 대립시키고 있는 것이다.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목숨이라도(공포의 외인구단)에서 어린 까치는

술주정꾼인 아버지와 단 둘이 사는 가난한 아이다.

가난은 깨끗하게 살 수 없도록 만드는 것이여서 까치에게는 언제나 냄새가 난다.

그래서 까치 곁에는 아무도 없다. 그때 우연히 짝이 된
착한 엄지가 까치에게 친절을 베풀고 단짝이 된다.

생일을 기억해 주고 전과를 빌려 주고 같이 놀아 준다.

까치는 비로소 지키고 싶고 지켜야 한다고 믿는 세계를 갖게 되고

그 세계를 지키기 위해 성실한 길을 걷는다. 까치의 진실이다.
 

그러나 엄지네는 서울로 이사를 간다.
(지옥의 링)에서 까치와 엄지는 함께 보육원에서 자란 고아다.

초등학교 시절 엄지는 과일가게 주인이라는 원대한 꿈(?)을 가진 까치와 결혼하여

과일가게 안주인이 되는 것이 꿈인 소녀였다.

그러나 부잣집 양녀로 들어가 철이 들면서 엄지는 고아원의 시절을 지워 버리고 싶어 한다.

반면 까치는 삭막한 세상에서 자기가 지켜내야 할 엄지를 생각하며 어른이 되어 간다.
이 두 만화의 공통점은 까치가 가진 진실의 핵은 어린 시절이지만,

그 어린 시절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까치의 세계인 엄지와 이별함으로써 단절된다는 것이다.

어린 시절은 무한한 가능성으로 열려 있는 때라고 하지만 그 가능성이란

가난해서 집도 절도 친구도 없는 이들에게는 영원히 도래하지 않는 가능성일 뿐이다.

까치는 그 가난 속에 삶의 이유를 부여해 준 따뜻한 기운(생명의 기운?)을 키워내는 것이

진실이라고 믿고 단절된 기운을 찾아 나선다.

 

4.   이현세의 까치에 반한 이유2.


 (공포의 외인구단)에서 가난한 까치는 엄지를 찾기 위해 야구에 매달리고
엄지를 찾지만 엄지는 야구 스타 마동탁의 애인이 되어 있다.

(지옥의 링)에서 엄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과일가게 주인이 된 까치는

엄지를 찾아오지만 부에 길들여진 엄지는 차갑게 까치를 돌려 보낸다.
(공포의 외인구단)에서 우여곡절 끝에 엄지의 마음을 회복한 까치는

엄지의 육체를 회복하기 위해(꿈만 꾸고 살 수 없으니까)

손 감독의 외인구단에 합세하게 된다.

6개월만 기다려 달라고 말하면서.

그러나 외인구단의 지옥훈련이 2년으로 길어진다.

그 사이 엄지는 까치를 포기하고 까치를 최대의 경쟁자라고 생각했던

야구계 스타 마동탁과 결혼하여 아이를 낳는다.

돌아온 까치는 야구계 최대의 스타로 부상하지만 사는 의미가 없다.

왜 야구를 했는데...
그때 마동탁은 까치의 팀에 번번히 지자 실의에 빠지고

남편의 슬럼프를 보다 못한 엄지는 까치에게 부탁한다.

“넌 내가 원하는 것이면 뭐든지 들어준다고 했지. 부탁이야 한번만 져 줘.”
 

야구장에서 까치는 지기 위해 죽을지도 모르는 패를 쓰다 장님이 되고,

그 장면을 목격한 엄지는 분열증에 걸린다.

결국 정신분열증에 걸려서야 동탁의 손에서 놓여난 엄지는 장님이 된 까치와 만난다.

까치는 장님이 되는 대가를 지불하고 나서야 자기의 세계를 회복한다.

 

죽음과 맞바꾼 진실
 (지옥의 링)에서 엄지의 홀대를 받은 까치는 엄지가 돈에 무너지고 있다고 판단하여

엄지를 구해내겠다고 돈을 버는 방법을 강구한다.

그런데 돈이 돈을 버는 세상에서 까치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

빠른 시간에 돈을 벌어야 하는데 말이다.

그래서 까치는 복서의 길을 걷는다.

그는 승승장구하지만 그것은 강펀치가 아니라 강한 맷집 때문이다.
만약에 소질이 스포츠의 필요조건이라면 펀치가 약한 그는

복서로서의 필요조건을 결하고 있는 셈이다.

그는 상대방의 펀치를 견디는 강한 맷집으로 승부사가 된다.

강펀치가 자연이라면 그의 맷집은 정신이다.
 

그의 정신이 약육강식의 자연을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을 것인가?
강하지 않으면 진실도 놓치는 그런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까치가 자기의 세계를 확보하기 위해 강해지는 싸움을 하고 있는 동안

엄지는 재벌 2세인 마동탁에게 접근했다가 실패하고,

동탁보다는 못하나 역시 재벌 2세로서 사람 좋은 한수를 붙잡는다.

엄지는 한수에게 기대 야무지게 말한다.
 “제가 바라는 건 결코 화사함만은 아니예요. 화려함 속에 따뜻한 정,
부자들이라고 해서 삭막하게 살아야 한다는 법은 없잖아요.?”


맞는 말일 수 있다.

그러나 화사함을 위해 따뜻한 까치를 버린 엄지에게 이 말은 영악한 말일 뿐이다.

엄지는 언제 철이 들까?

결국 한수에게도 버림받은 엄지는

강펀치를 만나 KO패를 당하고 죽어가는 까치 앞에 나타난다.

까치가 말한다.
  “네게만은 꼭 알려주고 싶은 내 비밀이 있어...”
  “뭔데?”
  “다른 사람들은 날 보고 맞아도 끄덕없는 매...맷집왕이라고 했지만...

사...사실은 그게 아니었어. 나...난... 한대씩 맞을 때마다... 죽고 싶도록
시...심한 고통을 느꼈다. 한마디로 내게 링은 지옥이었어."
  "이 바보...그런 걸 왜 한다고 덤볐어?“
  “왜... 왜냐고?”
 

왜냐고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까치는 숨을 거둔다.

신음하듯 왜냐고를 반복하며 죽어가는 까치는 외관상 자기의 세계를 지키는 데 실패했다.

그러나 실패했는가? (공포의 외인구단)에서 까치가 장님이 되어서

자기의 세계를 확보한다면 그세계란 그만큼 가치 있는 것이라고 읽어야 하지 않을까?

지옥의 링에서 왜냐고라는 신음을 엄지에게 남겨 주고 죽은 까치가

그 죽음으로 그의 세계의 울림을 들려 줄 때

누가 그것을 가치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수 있겠는가?
 

내가 아는 어떤 친구는 이현세 만화는 읽지 않는다고 했다.

너무 무섭다는 거였다.

사실 이현세의 만화는 무섭다.

진실을 지키는 대가로 진실을 지키는 주체의 죽음을 요구하는 사회도 무서운 사회이고

(그리하여 그 사회의 노예로 살기를 결단하고

자기 존재 증명을 하지 않는 사람만 살아 남지 않는가!)

그 진실을 지키기 위해 죽음까지 불사하는 인간도 무서운 인간이다.
그러나 무서움의 색깔은 확실히 다르다.

하나의 무서움이 차갑다면 또 하나의 무서움은 따뜻하다.

그 따뜻함은 이제 홀로 남은 자들에게 무서운 사회에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무서운 사회에서 자기의 세계를 확보하는 길을 열어준다.
까치는 실패하지 않았다. 아니. 실패하면 안 된다.

까치가 숨을 거둔 자리에서 엄지는 진실이란 구걸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힘으로서 지켜내야 하는 것임을 배우게 될 것이다.
 

이 구도는 (까치와 고독한 영웅들)에 그대로 이어져 엄지는

까치가 죽은 자리에서 그녀가 쉽게 내팽겨쳤던 진실의 가치를 생각하도록 요구받는다.

모든 것을 잃고 새롭게 시작해야하는 그녀는 다시는 쉽게 살지 않을 것이다.

 

이현세가 본 이중적 현실
이현세는 80년대 이전 문화의 음지에 있었던 만화를

대중문화의 중요한 장르로 부각시킨 대단한 인물이다.

까치와 엄지와 동탁이라는 삼각 관계를 축으로 전개되는

이현세의 만화에는 사랑이 있고 인생이 있다.

소외된 자들의 한이 있고 현실이 있다.

아무리 스포츠가 매개된 만화라고 해도 결코 3S (섹스, 스크린, 스포츠를 일컫는 말로

대중을 우매하게 하는 것들이라고 평론가들이 비하했던 것들이다.

왜냐하면 독재국가 혹은 비민주국가가 정치에 집중되는 대중들의 관심을

분산, 해체시키는 도구로 이들을 종종 이용해 왔기 때문이다)의

 한 형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이현세 만화는 이중적으로 현실적이다.

그 하나는 이 사회의 그늘이 결코 미화되지 않고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는 점이다.

가지지 못한 자가 어떻게 대접받는지.

그리고 그 가지지 못한자가 스크럼을 짜고 기득권을 보호하고 있는

가진 자의 대열에 서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에 가까운 게임인지를 과장없이 그려내고 있다.

불가능에 가까운 게임을 하면서 산 사람의 냄새를 풍기는 주인공이 까치다.

나는 까치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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