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5
제1부 길들지 않은 사랑은 힘이 세다
13 사랑이 집착인 이유 1.
편집증은 병이다.
그렇지만 편집증적 진실은 병이 아니라 진실이다.
문제는 편집증을 쉽게 병으로 광고하는 문화가 편집증적 진실을 억압한다는 데 있다.
어떤 대상이나 사람에게 광적으로 집착할 때 우리는 그것을 편집증 증세라고 부른다.
사실 병으로서 편집증은 대단히 무섭다.
다음은 가까운 교수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다.
선생님, 왜 저만 쳐다보세요?
학기가 시작되고 3주쯤 지난 어느 날 한 여학생이 그를 찾아 왔다.
“선생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정중하게 착석한 그 여학생은 교수에게 진지하게 요구했다.
“선생님, 제발 수업시간에 저만 쳐다보지 마십시오.
다른 학생들이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그 교수는 수업시간에 특정한 학생에게 특별히 시선을 주어본 적도 없는데다
그때까지 그 여학생의 이름조차 몰랐다.
그러나 그 여학생이 그렇게 요구했으므로 그는 생각했다.
혹시 나도 모르는 사이에 특별히 시선을 줬나보다고.
그리고 나니까 그 여학생이 듣는다는 수업에 들어갈 때마다 움찔했다.
전에는 특별히 눈에 띄지 않던 그 여학생이 확연히 눈에 들어왔다.
물론 그때부터는 의도적으로 그 여학생이 앉아 있는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2주가 지나자 그 여학생이 또 찾아왔다.
여학생은 말했다.
“선생님, 왜 자꾸 저만 쳐다봐서 학생들이 우리 사이를 의심하게 합니까?”
순간 그 여학생이 정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스쳤다.
그러나 갑자기 당한 일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아
다시는 쳐다보지 않겠다는 다짐만 주고 돌려보냈다. 사실 그는 무서웠다.
그런데 한 주가 지나자 그 여학생이 또 찾아왔다.
“선생님, 모든 방송국에서 선생님과 저를 소재로 드라마를 만들었습니다.
9시 뉴스에까지 나와서 전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다구요.“
치료받아야 할 전형적인 편집증이다.
편집증을 주제로 많은 영화들이 만들어졌다.
<이웃집 여인>이나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가 전형이다.
<이웃집 여인>을 보았나?
이 영화의 주인공은 대학 다닐 때 사랑했던 남자,
그러나 10여 년의 세월이 흘러 이제는 삶의 축이 완전히 달라져
더 이상 인연이 될 수 없는 남자(그 남자는 이미 결혼했다)를 찾아
의도적으로 그 남자의 옆집에 이사온다.
그녀는 옛애인이었던 이웃집 남자를 유혹한다.
그리고는 권총으로 그를 쏴 죽이고 자기도 자살한다.
자기는 그가 없는 세월을 적응하지 못했는데
그럼에도 자기 없는 세월을 잘 적응한 그 남자에 대한 미움과 분노,
그리고 무엇보다도 집착 때문이었다.
그 영화와 함께 현실적으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방송국 DJ에 대한
끔찍할 정도의 집착을 표현한 영화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는
편집증에 대한 공포를 만천하에 공표했던 영화다.
그런 영화들이 설득력을 갖는 공간에서 내가 고개를 끄덕일 수만은 없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더 무서운 것 때문이다.
내게 편집증보다 더 무서운 것은 바로 편집증적 공표가 강조되는 사회다.
편집증적 공표는 대부분 어떤 대상이나 사람에 대해
애착을 가지는 것이 우습게 치부되는 문화에서 강조된다.
후기 자본주의는 오늘 내가 입었던 옷을 가볍게 버리고
새로운 의상을 쉽게 구입할 수 있어야 지탱된다.
유통의 메커니즘이 빨리 빨리 돌아야만 사회의 경제구조가 지탱되는 곳에서
어떤 것에 대한 강한 애착은 병으로 치부될 수밖에 없다.
사실 물건 혹은 상품과 사람은 다르다.
그러나 과연 다르게 대접받는가?
다음의 시를 읽어 보자.
내가 걸어 다닌 수많은 장소를
그는 알고 있겠지
내가 만나 본 수많은 이들의 모습도
아마 기억하고 있겠지
나의 말과 행동을 지켜보던 그는
내가 쓴 시간의 증인
비스듬히 닳아버린 뒤축처럼
고르지 못해 부끄럽던 나의 날들도
그는 알고 있겠지
언제나 편안하고 참을성 많던
한 컬레의 낡은 구두
이제는 더 신을 수 없게 되었어도
선뜻 내다 버릴 수가 없다
몇 년 동안 나와 함께 다니며
슬픔에도 기쁨에도 정들었던 친구
묵묵히 나의 삶을 받쳐준
고마운 그를
이해인 <낡은 구두>전문
한 켤레 낡은 구두를 선뜻 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인간관계를 어떻게 맺을까?
더 좋은 상품이 나올 때마다 지금 있는 물건을 폐기처분하고
새로운 것을 사야 하는 사람은 또한 어떨까?
사람 대접과 물건 대접 사이에는 어떤 함수관계가 있지 않을까?
차인표만큼 잘생긴 근육질의 남자를 옆에 끼고 다닌 덕택에 친구들의 부러움을 산 여자가
돈도 많고 매너도 좋은 남자를 소개하는 마담뚜에게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이유.
그 이유가 우리에게 어떤 것을 생각하게 하지는 않는가?
거기에 과시욕은 있어도 사랑이 있다고는 믿지 못하겠다.
과시욕이 인격적 관계가 아닌 사물적 관계에서 통용되는 것이라면
지나친 애착을 병이라고 강조하는 문화는
인간이 맺고 있는 관계의 대부분을 사물화하도록 격려한다.
‘폭풍의 언덕’에서 만난 사랑
나는 너무 쉽게 사랑하고 너무 쉽게 이별하면서도
너무 쉽게 사랑과 이별을 합리화시키는, 사랑 없는 사랑을 조장하는 이 시대가 싫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반발을 받을 만한 주장을 한다. ‘사랑은 집착이다.'
생각하는 사람들, 성숙해 보이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은
아마도 ‘사랑은 집착이 아니다’일 것이다.
‘사랑은 집착이 아니다’라는 명제도 물론 틀린 명제는 아니다.
그 명제의 설득력은 상대를 배려하지 않고 내 마음대로 내 방식대로
다듬어지지 않은 열정을 그저 쏟아내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는 데 있지
사랑에 있어 특정한 대상에 대한 열망이 무의미하다는 데 있지 않다.
사실 남녀 사이의 사랑의 본질은 집착이다.
그러나 사랑의 집착이 때로는 사랑까지도 병들게 할 정도로 강하기 때문에
사랑은 집착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한편에선 ‘사랑은 집착이 아니야’라고 멋있게 말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 나 아니면 안 되는 사랑을 꿈꾸는 게 사랑이다.
그런데 나 아니면 안 되는 거, 너 아니면 안 되는 거, 그게 집착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편집증이 곧 사랑은 아닐테지만 편집증적 진실이 없으면 사랑도 없다.
편집증적이어서 버리고 싶은 사람이 아니라
가끔씩은 가슴쓰리게 기억나는 사람이 아마도 ‘폭풍의 언덕’의 히드클리프일 것이다.
평소의 나는 사랑 예찬론자는 아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살아 가는 일에 바쁜 나는
사랑 속에서만 살 수 없다는 것을 몸으로 아는 보통사람이다.
그럼에도 가끔씩은 폭풍을 몰고 다니는 남자 히드클리프와
그 폭풍을 사랑할 줄 아는 생동감 있는 여자 캐더린의 이야기인
<폭풍의 언덕>의 느낌을 생생하게 전달받는다.
루이제 린저의 평은 거짓이 아니다.
“히드클리프는 있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에서 그 이상으로 선명하게 드러나는 인물은 없다.
히드클리프의 영원한 연인 캐더린과 캐더린의 딸 캐더린 또한 그렇다.
누가 그녀들처럼 행동할 수 있을까?
그 여성들은 영국소설 가운데 가장 매력있는 여성들이다.”
13 사랑이 집착인 이유 2.
<일반독서가>에서
<폭풍의 언덕>을 읽을 때 다가서게 되는 상상의 공간에서 나는
히드클리프가 되고 캐더린이 되면서 폭풍의 사랑을 현실보다 더 현실적으로 느낀 적이 있다.
그럴 때면 일상의 공간은 텔레비전 화면처럼 현실감이 없고
소설이 마련해 준 공간이 나를 온통 지배한다.
그 공간이란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삶을 지탱하기 위해 내 속에 가둬 두었던 시간이다.
폭풍의 언덕에서 나는 내가 감춰두었지만 결코 지우지 않았던 그 시간,
편집증적 진실이 숨쉬는 시간으로 마음껏 빠져 들어간다.
있을 수 없는, 그러나 선명한 사랑
폭풍의 언덕에는 누가 살고 있나?
폭풍처럼 어둡고 열정적인 그 남자 히드클리프와
그 어두운 열정을 끌어안을 수 있는 그 여자 캐더린이 살고 있다.
짙은 눈썹.까만 피부. 무표정한 얼굴.
그 얼굴에 맞게 살려는 듯 그 누구에게도 친절을 베풀 줄 모르는 거친 남자,
그가 바로 히드클리프다.
히드클리프는 폭풍처럼 늘 그 주변을 공포로 몰고간다.
그러나 그는 증오스럽지 않다.
히드클리프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산처럼 주변을 늘 불안하게 한다.
그러나 그는 믿을 만할 뿐더러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왜 그럴까?
그가 몰고오는 공포에는 절망의 심연이 드러나고 그에게서 풍겨나는 불안에는
그 심연에서 솟아나는 뜨거운 인간의 절규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내 궁정을 무너뜨리고 대신 오두막집을 지어 주고는
착한 일 했다고 만족하지 말란 말이오.
당신이 정말로 이자벨라와 내가 결혼하기를 바란다면 난 차라리 내 목을 베겠소.”
사랑하는 여자 캐더린이 이자벨라와 결혼하라고 권했을 때
참을 수 없었던 히드클리프가 캐더린에게 던진 유명한 말이다.
확실히 편집증적이다. 그러나 편집증인가?
캐더린은 사라진 히드클리프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에
친절하고 부유한 에드거와 결혼한다.
그녀는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천국에 버금가는 생활을 누린다.
우아하고 세련된 사람들, 풍요한 삶.
린튼 가의 여주인은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천국 같은 린튼 가의 모든 것이 캐더린에게는 낯설었다.
'내 전부라고 할 수 있는 히드클리프'와의 추억을 떠나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낯설었고
히드클리프가 아닌 에드거가 남편이라고 친근하게 구는 것도 낯설었다.
캐더린은 린튼 가라는 천국의 이방인이었다.
그리하여 그녀가 쾌활하면서도 사려깊은 성격을 잃어버렸을 때
우리가 동의하는 것도 편집증적 진실 때문이 아닐까?
차라리 유령이 되어 내 곁에 있어 주오
가끔은 약한 육체가 강한 진실의 원인이다.
육체의 병은 현실 파수꾼인 의식을 약화시킴으로써 무의식을 솔직하게 표현하게 한다.
캐더린은 '악성 뇌척수막염'을 앓았다.
그녀가 죽어가는 것을 안 히드클리프는 에드거가 교회에 간 틈을 타 그녀를 찾아 온다.
이미 약해진 캐더린의 육체는 진실의 말, 인간의 소리를 낸다.
"히드클리프, 내가 바라는 건 우리 두 사람이 다시는 헤어지지 않는 거야."
히드클리프 앞에서 마지막 격정을 꿈꾸듯 부드럽게 쏟아내며
때로는 우울해하고 때로는 투정하는 캐더린,
그 캐더린의 절규 어린 유언은 계속된다.
“당신은 튼튼하기도 하네요. 내가 죽은 뒤에도 얼마나 오랫동안 살 생각인가요?...
당신은 날 잊겠지요? 내가 땅에 묻힌 뒤에도 행복하겠지?”
“당신이 한 모든 말은 마음에 뿌리를 내려 당신이 죽은 뒤에도
내 속에서 생명력을 갖는다는 걸 모르오? 캐디,
내가 내 자신을 잊지 못하듯 당신을 잊지 못한다는 걸 당신은 알지 않소?...
이제까지 당신이 얼마나 잔인하고 위선에 차 있었는가 이제야 알겠소!
왜 당신은 날 멀리 했지? 캐디, 왜 마음을 속였냔 말이오.
당신은 나를 사랑했소. 그런데 무슨 권리로 나를 버렸지? 무슨 권리로!
빈곤도, 타락도, 죽음도, 하나님이나 악마가 내릴 수 있는
그 어떤 재앙도 우리 두 사람을 갈라놓을 수 없었소.
당신 가슴에 못을 박은 것은 내가 아니라 바로 당신 자신이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내 가슴에도 못을 박았소!”
가시나무새는 생의 마지막이 되어서야 소리 높여 운다고 한다.
죽어가는 캐더린 앞에서 히드클리프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폭풍같은 진실을 쏟아낸다.
“나는 나를 죽인 자를 사랑할 수 있어도 당신을 죽인 자는 도저히 용서 못해.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
가시나무새는 자신의 한을 푸는 눈물을 쏟고 죽으면 그만이다.
그러나 히드클리프는 캐더린을 무덤에 묻고 살아야 한다.
살아 있지만 살지 않는 자,
그래서 삶이 살아내는 것이어야 하는 자의 고통과 고독이야말로
캐더린을 잃어버린 히드클리프의 몫이다.
히드클리프는 캐더린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는 캐더린의 주검 옆에서 천국에 가지 말고 차라리 유령이 되어
자기와 함께 있어 달라고 애원한다.
“오오, 너는 내 괴로움 따위는 상관이 없는가?
그렇다면 내게도 한가지 기도가 있지!... 내가 살아 있는 한 네게도 안식은 없을지어다....
유령이 되어 날 찾아다오.... 나와 함께 있어다오.... 차라리 나를 미치게 해다오.
네가 없는 이 지옥에서 나를 혼자 버려두진 말아다오.... 오오, 하나님, 너무하십니다.
내 생명인 캐더린 없이 내가 어찌 살 수 있겠습니까?
내 영혼 캐디 없이 난 살 수 없단 말입니다.”
그후 히드클리프의 절망어린 방황은 20여 년간 계속된다.
그는 캐더린과 자신의 건강한 삶을 방해한 모든 사람들을 치밀하게 파멸로 인도하면서
캐더린의 빈자리를 잔인함과 경멸스러움과 축축함과 어두움으로 채색해갔다.
히드클리프는 주변의 모든 사람을 계획적으로 파멸시키면서
캐더린이 없는 그의 절망을 확인했고 그럼으로써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캐더린을 자신의 삶에 잔인하고 거칠게 실현시켜 나갔다.
또한 그는 밤이면 캐더린과의 추억이 서린, 이제는 침침하고 음산해진
다락방 창문을 열어 놓고 원망과 원망으로 캐더린의 유령을 간절히 기다렸다.
히드클리프는 자기를 잃어버리고 살아갈 수 있었지만
캐더린을 잃어버리고는 살아가지 못했다.
그 어떤 것으로도 캐더린의 빈자리를 채우지 못하는 그는
영혼이 없는 악마처럼 거칠고 경멸스러웠다.
히드클리프를 편집증 환자라고 몰아붙일 수 없는 이유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히드클리프를 증오하거나 응징할 수 없다.
왜 그럴까?
히드클리프의 격렬한 잔인함에는
인간의 숙명적 고통과 절규가 터질 듯 녹아 있기 때문이다.
히드클리프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이 인간에 대한 이기적인 배반과 폭력이라기보다는
한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사랑으로 인한 고통이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히드클리프를 이해하고 사랑하려 하는지도 모른다.
히드클리프는 고독하다.
캐더린이 없는 이상 그의 말을 이해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사랑은 편리한 대로 이리 저리 옮길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사랑에 영혼을 걸었고 사랑이 세상을 떠나자
자연스럽게 영혼을 잃고 방황하는 싸늘한 육체로 살아야 했던 것이다.
더 이상 살 의미와 의욕을 느끼지 못하는 그에게 삶의 시간은 숨막히는 인내의 시간이었다.
캐더린이 떠남으로써 그는 인간의 말을 잊었으며 자기 속으로 점점 깊이 굽어들어갔다.
그가 인간의 말을 회복하는 때는 천상에서 쫓겨나 히드클리프를 찾아
폭풍의 언덕으로 달려온 캐더린의 유령이 불러줄 때뿐이었다.
그러나 히드클리프의 고독은 친근하다.
이 사람은 이래서 좋고 저 사람은 저래서 좋고
그 사람은 그래서 좋은 것이 현대의 사랑법이다.
이 경우 ‘이래서’와 ‘저래서’와 ‘그래서’가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우리가 사랑이라 불렀던 것도 함께 사라질 것이다.
대상화시키는 사랑의 메마름에 익숙하지만
그것에 길들지 않는 자는 히드클리프의 고독에 친근한 것이다.
대상화된 사랑은
“이루어진 사랑은 포만으로 사라지고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은 허기져 죽는다”고
말하면서 영원한 사랑을 웃음거리로 만든다.
그러나 캐더린에 대한 히드클리프의 사랑엔 그런 대상화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들의 사랑이란 서로를 통해 세계를 보는 그런 사랑이다.
히드클리프는 캐더린을 통해 세계를 보고 캐더린은 히드클리프를 통해 세계를 느낀다.
이들의 사랑은 완전한 자기화가 이루어진 사랑이다.
성격이나 지위나 명예 때문이 아니라 그냥 그 사람이기 때문에
그 전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면서 세계와 운명과 그런 것이 경험하게 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사랑. 그것이 캐더린과 히드클리프의 사랑인 것이다.
서로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서로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는 그들이야말로
확실히 ‘인간의 말’을 하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이다.
캐더린과 그런 공간을 공유한 히드클리프의 고독이 친근한 것은
불가능한 사랑의 몸짓을 통해 절박한 사랑의 가능성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그의 싸늘한 절망 속에 숨어 있는 치열한 열망을 보고 어찌 그를 저주할 수 있을까?
갑자기 찾아온 히드클리프의 죽음은 분명 캐더린의 영혼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리라.
살아서 행복하지 못했던 자신의 사랑을 히드클리프는 죽음으로 부활시켰으리라.
이들의 사랑은 캐더린을 닮은 캐더린의 딸 캐더린 린튼과
히드클리프를 닮은 헤어튼의 사랑으로 이어진다.
히드클리프와 캐더린의 사랑이 어두웠던 만큼
어둠의 그늘에서 태어난 이들의 사랑이 역전되어 밝은 앞날을 예감케 한다.
히드클리프의 사랑은 편집증적 사랑이다.
그러나 누가 그게 사랑이 아니고 편집증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
14. 견우와 직녀가 프로이트와 친한 이유
담배를 피워 문 남자가 그려내는 풍경보다
부엉이 울음소리 처량한 밤에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는 남자가 그려내는 풍경이 더 쓸쓸하다.
땅을 치고 통곡을 하는 여인이 그려내는 풍경보다
아무도 깨지 않은 새벽녘에 보따리를 껴안고
무표정한 얼굴로 떠나는 여인이 만들어내는 풍경이 더 슬프다.
윤후명의 소설 <돈황의 사랑>에는 더 슬픈 여인의 풍경과 더 쓸쓸한 남자의 풍경이 있다.
‘돈황’에 한 사내가 있다.
그는 금옥이라는 소녀를 멀찌감치에서 그러나 친근하게 알고 있는 사내다.
금옥은 사내의 부모가 맺어준 그의 정혼자였다.
그런데 어느 해 금옥의 아버지가 괴질로 죽었다.
그러자 혼자 살기 벅찬 금옥의 어머니는
소녀 금옥을 남겨둔 채 남사당패를 따라 나서게 되었다.
‘고아가 된 금옥이 그 마을을 떠났다'
윤후명이 짧게 묘사했을 때 나는 한 풍경을 상상했고 거기에서 아주 슬픈 울림을 들었다.
한번도 제대로 만난 적이 없는 정혼자였지만
그 사내는 누구보다도 친근하게 금옥을 느끼고 있었다.
금옥이 떠났다는 소식에 그는 난감했다.
들리는 소문으론 금옥이 강령 땅에서 기생이 되었다고 했다.
그러던 중에 사나이의 여동생이 강간을 당하고
부엉이 울음소리 처량한 밤에 비상을 먹고 죽었다.
사나이는 동생을 욕보인 남자를 죽이고 그 마을을 떠났다.
세월이 흘러도 금옥의 모습은 그를 떠나지 않았다.
그 괴로움은 사그러지기는커녕 나무옹이처럼 점점 더 부풀어만 갔다.
그것은 단순히 어른들의 섣부른 약속이라기보다 원초적인 무엇이 있었다.
졸지에 살인자가 되어 도망자가 된 사내는 이리 저리 떠돌아다녔다.
어느 날 그 사내는 버려진 쓸쓸한 빈집에서 밤을 새우다 쥐에 물렸다.
쥐에 물린 상처는 대단했다.
그런데 상처는 아픔이라기보다 진한 슬픔으로 다가왔다.
그 슬픔 속에서 그는 무의식 속에 꼭꼭 감춰두었던 여인이
육체의 상처를 통해 의식의 표면으로 튀어오름을 경험한다.
그는 금옥을 찾겠다고 결심한다.
금옥의 모습에 사로잡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는
사내가 만들어내는 풍경은 금옥이 만들어내는 풍경만큼이나 쓸쓸하다.
왜 그런 풍경들이 쓸쓸하고도 슬픈 울림을 만들까?
그것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마음의 사랑 혹은 에너지 때문이다.
소란스러운 사랑보다 쓸쓸한 사랑이 더 절절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절제미가 주는 극적 긴장감 때문이 아닐까?
나는 가끔씩 그런 극적인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상황이야말로
인간의 문화를 만들어내는 화이트 홀(White Hole)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나의 이런 생각이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미워한다?
알려져 있듯이 프로이트는 인간에게 원초적인 것을 성적인 본능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프로이트가 모든 억압은 성적인 억압이라고 했다고 해서
성의 자유를 허용하면 인간의 모든 억압이 풀릴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모든 욕망의 근원은 같다고 보는 것이 훨씬 생산적이다.
인간을 포함해서 살아 있는 유기체는 에너지 덩어리다.
프로이트가 그 에너지의 원천을 성적인 것이라고 했다면 그 이유는 뭘까?
나는 그 이유가 인간이 만들어내는 각양각색의 행위와 사건이
결국 동일한 에너지의 변형이라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모든 행위에는 성적인 관심이 숨어 있다는 식으로 프로이트를 해석할 수 있겠지만
나는 그런 해석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외디프스 콤플렉스만 해도 그렇다.
그것도 어머니에 대한 아들의 숨겨진 욕망이라고 읽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해석해서 우리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그런 해석은 출발점일 수 있지만 도착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라르는 성적인 본능보다 모방 본능이 더 원초적인 존재 욕망이라고 설명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외디프스 콤플렉스는 아들이 아버지같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일컫는다.
아들은 왜 아버지같이 되고자 할까?
이에 대한 프로이트의 해석이 재미있다.
아들에게 어머니는 최초의 연인이다.
어머니는 어린 아들을 한번도 거부하지 않는다.
그런데 아들의 인식이 생성되는 시기인 만 3세가 되면 아들은
어머니의 침대가 자신에게 거부되어 있다는 것을 인지하며
그 원인이 아버지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때 아들은 자신의 연적인 아버지를 미워하고 증오하게 되어
‘아버지가 없었으면’하는 살인 충동을 가지게 된다.
최대의 연적인 아버지가 없어진 자리에서 아들은 어머니와의 삶을 꿈꾼다.
프로이트는 그 살인 충동을 무의식적으로 그려낸 것이 <외디프스 왕>이라고 해석한다.
여기서 무의식적이라고 하는 것이 중요하다.
무의식은 의식에 들키지 않기 위해 자신의 속내를 위장하기 때문이다.
외디프스는 테베의 왕인 라이오스를 아버지인 줄 모르고 살해한 후 테베의 왕이 된다.
그리고 나서 그는 라이오스의 처이고 자신의 어머니인
조카스타와 결혼해서 2남 2녀를 낳는다.
외디프스가 라이오스가 아버지인 줄을,
조카스타가 어머니인 줄을 몰랐다는 것은 프로이트에게 중요하지 않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한 이야기가 불후의 명작으로 남는 이유다.
외디프스 왕의 이야기는 무의식이 의식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부정(아니다 혹은 몰랐다)의 형식을 차용했어도
인간의 근본적인 욕망을 보여 준다고 하는 것이 프로이트가 독해하는 ‘외디프스 왕’이다.
극에서 아들은 아버지를 살해할 만큼 강했지만 현실의 아들들은 힘이 없다.
그렇기에 아들은 아버지를 어쩌지 못한다.
아버지에게 반항해 봤자 돌아오는 것은 매뿐이라는 것을 아는 아들은
복종이 반항보다 이롭다는 것을 깨닫고 반항 에너지를 복종 에너지로 전환한다는 것이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복종하면서 자신에게 가해지는 어떤 금지를 인정하는 이유는
언젠가 자신도 아버지와 같은 지위와 권력을 가질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다.
아들은 그런 기대감을 갖게 되면서 이제 어머니보다도 금지의 원천인 아버지를 따른다.
어머니에 대한 배타적인 지배권을 가지는 힘 있는 아버지를 보면서
아들은 미래에 자신이 갖게 될 권위를 기대한다.
그것은 아들이 자신의 현재의 욕망을 변형하고 지체할 수 있는 힘이 된다.
다시 말해 아버지가 만든 금지를 인정하고 아버지에게 복종하는 아들의 복종 에너지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가 빚어낸 저항 에너지가 전이된 것이다.
사실 에너지란 무한정일 수 없다.
무한정일 수 없기 때문에 여러 방면으로 흩어지려는 에너지의 출구를 막아
에너지의 흐름을 구체적인 목적과 관련된 방향으로 틀어야 한다.
견우와 직녀 이야기도 예외는 아니다.
견우와 직녀가 사랑하면 농사가 안 돼
옛날에 견우와 직녀가 있었다.
농사를 짓는 견우와 베를 짜는 직녀가 서로 사랑을 함으로써
땅에서는 농사가 안 되었고 여인들은 베를 짜지 않았다.
견우와 직녀가 하늘에서 신선놀음을 하고 있는 동안
땅에서는 흉년이 들어 사람들은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
보다 못한 옥황상제가 견우와 직녀를 떼어 놓고
일 년에 한 번씩 칠월 칠석에만 만나도록 했다.
그제서야 견우는 소를 몰고 농사를 짓고 직녀는 베를 짜기 시작했다.
견우와 직녀가 일을 하자 땅에서도 풍년이 들고 사람들이 먹고 사는 데 걱정이 없었다.
왜 견우와 직녀가 사랑을 하는데 농사가 안 돼
사람들이 먹고 사는 일에 지장을 받았을까?
이런 문제가 바로 프로이트적인 문제이고,
프로이트의 정신을 잇고 있는 마르쿠제가
“에로스와 문명”에서 제기하고자 했던 문제의식이다.
“에로스와 문명”에 따르면 인류의 문명은 에로스를 억압한 결과다.
에로스를 억압한 에너지가 없었다면 인류 문명은 만들어질 수 없었다.
견우와 직녀의 에너지를 문명의 에너지로 전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에너지가 전적으로 사랑의 에너지가 되는 길을 차단해야 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인류가 지금의 질서를 유지할 수 있게 된 데는
근친상간을 금기시하고 타인의 사람이나 물건이라고 인정된 것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하는 등 중요한 금지 사항들이 필요했다.
물론 에로스를 통제했다는 것이 에로스의 분출구를 모두 차단했다는 것은 아니다.
견우와 직녀에게 일 년에 한 번씩 만날 수 있도록 허용함으로써
무분별한 열정을 지연시키고 그 지연시킨 열정을 견우와 직녀의 노동력으로 썼던
옥황상제처럼 에로스의 분출 통로를 사회가 갖는 것이다.
우리의 문명은 소를 모는 견우와,
칠월 칠석 날을 기다리며 베틀을 돌리는 직녀에게서 왔다.
베틀을 돌리는 직녀의 힘과 소를 몰아 밭을 가는 견우의 힘의 원천은
또한 서로를 향한 그리움이고 사랑이다.
그들이 서로를 향해 꿈꾸기를 하는 공간은 서로의 부재를 확인하는 공간이지만
부재가 확인된 자리를 견디기 위해 그들은 오늘도 각자의 일터에서 일을 한다.
그러니까 견우와 직녀가 일을 해서 농경문화의 꽃을 피우는 자리는
견우와 직녀가 못다한 사랑의 자리다.
견우와 직녀가 오작교에서 만나 회포를 풀 때 나는 다시 “돈황의 사랑”을 생각했다.
꽉찬 그리움의 통로를 마련하지 못해 이리 저리 떠도는 쓸쓸한 사내가 금옥을 만났을까?
시적인 소설인 “돈황의 사랑”에는 그것이 명시적으로 나와 있지 않다.
그러나 이 소설은 쓸쓸한 사내가 역시 쓸쓸한 얼굴을 탈 속에 감춘 채
재인 광대들에게 춤과 노래를 가르치며 세월을 보내고 있는
금옥을 만났음을 암시하고 있다.
금옥이 마련한 탈춤판에서 먹중탈에 고깔을 쓴
어느 먹중이의“헤까라, 헤까라!” 소리,
그것은 그 사내의 소리였을 것이다.
먹중이 사내의 “헤까라, 헤까라!” 소리는 무엇일까?
그것이 바로 삶이 내지르는 애환의 에너지가 아닌가!
회포를 풀고 다시 일터로 돌아가는 견우와 직녀처럼
이제 금옥과 사내는 이전의 애환과 슬픔을 춤판에 실어나르며
광대로서의 삶을 살아 갈 것이다.
제2부 삐딱하게 보고 바로 말하기
1. 사주팔자에 ‘남자가 없는’ 이유1.
목욕탕집 둘째딸(KBS 주말연속극 ‘목욕탕집 남자들’)은
결혼하기 전 한참 사주 보기를 취미로 했었다.
그리고 그것을 근거로 허튼소리를 해대기 일쑤였다.
친구에게 남자친구를 빼앗겨 전전긍긍하는 동생에게는
“넌 언제나 남자친굴 친구에게 빼앗기게 되어 있어”라고 악담(?)을 하고
페미니스트를 자처했던 언니에게는 사주에 결혼운이 없으며
결혼을 한다 해도 첩팔자라고 말한다.
결국은 궁합이 꼭 맞는 이몽룡과 결혼해서 살고 있지만 그를 만나기 전 그녀 자신은
사주가 마음에 안드는 남자와 맞선 보기로 하고 투덜거리는 것이 다반사였다.
대중적 공감대를 끌어낼 수 있다는 확신이 없으면 방송계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는다는
인기 작가 김수현이 사주팔자를 모티브로 삼을 리 없다.
김수현뿐인가?
베스트셀러가 된 “토정비결”은 아예 직접적으로 사주를 다루고 있으며
양귀자, 이인화 등 베스트셀러 작가들의 작품에 사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현상은 우리 대중문화 속에 사주팔자 보기가 얼마나 일반화되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사실, 나는 음양오행 체계를 해석할 줄 안다.
나처럼 서양철학을 전공하는 ‘이성적인’ 사람들에게
음양오행설을 바탕으로 하는 사주 해석을 공부한다는 것은 금기다.
그것은 철학이 아닐 뿐더러 가까이 할 경우
사이비 철학자로 치부되는 비이성적이고 저급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그런 금기를 깨고 내가 결코 적지 않은 시간 그 공부를 해온 데에는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에 사주팔자를 둘러싼 담론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아마도 미국 사람들이 신경정신과를 찾는 횟수와
우리나라 사람들이 점집을 찾는 횟수는 비슷할 것이다.
사주를 보는 것이 고급한 사람들이 무시한다고 없어지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것은 우리 문화의 핵심에 자리잡고 있다.
그렇다면 알아야 했다.
때로는 아는 것이 병이며 모르는 것이 약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모르는 것은 병이며 아는 것이 힘이다.
누가 성경을 가지고 점쟁이 같은 말을 하면 나는 절대 넘어가지 않는다.
성경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신비의 이름으로 기대어 있는
음양오행의 해석체계를 몰랐기 때문에 나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아무말도 할 수 없다는 것은 답답한 것 이상이었다.
더군다나 그것이 앞으로 이렇게 저렇게 되겠다는
천기에 관한 것일 때 때로 그것은 협박이고 공포였다.
그래서 나는 음양오행에 관한 서적을 들여다보는 것은
배웠다는 사람이 해서는 안 되는 천한 짓이라는 금기를 깨고 열심히 읽었다.
몰랐을 때는 두려움이고 신비이던 것이 알고 나니까 별 거 아니었다.
그 곳에서도 똑같이 우리에게 익숙한 인간의 삶이 있었다.
계급이 있었고 권력이 있었고 성이 있었고 돈이 있었다.
그것은 천기가 아니라 사람들의 생활이었고 신비한 것이 아니라 우리 문화의 한 단면이었다.
문화철학을 하는 내게 그것은 대단한 수확이었다.
오늘도 미아리 고개는 바쁘다
당신은 태어난 해, 달, 일, 시간이 네 기둥이 되는 사주팔자가 궁금한 적이 없었는가?
한동안 사주팔자 보기는 무조건 미신이라고 무시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미신이라는 규정으로 사주팔자를 내놓고 궁금해 하기를 꺼리게 되었을 뿐
자신이나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의 생일을 들고
소위 ‘동양철학관’에 드나드는 숫자가 줄어들지는 않았다.
비공식적인 통계이기는 하지만 그 시장에 뿌려지는 돈이 일 년에 5조를 넘는다고 한다.
사주풀이가 얼마나 대중의 관심을 끄는가는 지하철만 타보아도 알 수 있다.
지하철 내 구독율이 가장 높은 신문이 스포츠 신문이다.
이들 스포츠 신문 가운데 점을 쳐 주지 않는 신문은 없다.
여성지나 주부를 대상으로 하는 텔레비전 프로 그리고 4,50대를 겨냥한 심야프로는
1월 내내 사주팔자를 잘 본다는 사람들을 찾아나선다.
심심풀이라고도 하고 맹신해선 안 된다는 멘트를 붙이기도 하고
틀렸다고 말해 주기도 하지만 그 정치적인 멘트가 그 프로를 보는 사람들에게
‘나도 한번 사주를 볼까’하는 실제적 충동을 억제시킨 적은 없다.
남 몰래 그것을 맹신한 사람 가운데는 정치인이 많다고 한다.
그들은 중요한 국사를 점쟁이와 논의한다고 한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할 것이 별로 없는 정치문화건만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정치문화가 바로 점쟁이 문화다.
박정희 전직 대통령이 사주쟁이, 관상쟁이, 풍수쟁이를 끼고 있었다는 것은 유명하며
점술가로 널리 알려진 박재완 옹이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점을 쳐주었다는 비밀은 이제 공공연하다.
오늘도 미아리 고개는 바쁘다.
취업을 해야 하는 산업예비군들,
올해는 기어이 시집 장가를 가리라고 벼르는 선남선녀들,
승진을 기다리는 샐러리맨들, 선거를
치러내야 하는 선량들의 부인들이 한 해를 점치기 위해 미아리 고개를 찾는다.
아, 이젠 효자동 거리, 신촌 입구도 분주하다.
장관도 고개 숙이게 만드는 직업
도대체 사주팔자란 무엇인가?
궁합이 안 맞는다는 이유로 사랑하는 남녀의 결혼을 반대하는 부모가 있고
오행이 상생하는 좋은 날이라고 하는 날엔 예식장 예약이 하늘의 별따기라고 한다.
큰 행사를 준비하는 정치인들 가운데 유명 점쟁이를 찾아
날짜를 뽑아달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 우리 문화의 현실이다.
점치는 문화가 얼마나 뿌리깊은 정치문화인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실이
총선 날짜를 붙박이한 것이다.
언제 총선을 치르는 것이 좋겠습니까를 물어 날짜를 정했기 때문에
그런 문화를 청산한다는 의미에서 날짜를 붙박이한 것이 아닌가!
그러니 점쟁이들은 말한다.
이 직업이 얼마나 좋은 직업인 줄 아느냐고. 장관도 고개 숙이게 만드는 직업이라고.
물론 음양오행설은 단순히 미신이라고 치부하고 마음 편할 만큼
그렇게 단순하지도 비역사적이지도 않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세계의 기본은 변화라는
근본적 세계관에 입각한 나름대로의 이론 체계를 갖추고 있다.
그 덕택에 수천 년이 넘도록 전승되어 온 우리 문화의 한 단면이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말 인간은 사주대로 사는가’라는 물음에 그렇다고 대답할 수는 없어도
사주팔자의 해석체계를 들여다보면 우리 문화의 중요한 뿌리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우리의 음양오행설 해석 체계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를 드러내놓고 규명해 보기로 했다.
음양오행설을 이야기할 때 기본은 남자는 양, 여자는 음이 본체라는 것이다.
외관상으로 이것은 단순히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밝은 양과 어두운 음의 이미지를 생각해 볼 때
이 구분에는 인과 의를 추구해야 하는 `남성`(양)은 드러나야하며
이(이익)을 쫓고 의를 저버려 간사한 `여성`(음)은
감추어지는 것이 미덕이라는 가치관을 강요하면서 출발하고 있다.
남편 복 있는 여자, 여자 복 있는 남자
결혼을 하고자 하지만 하지 못하는 남자나 여자에게
“결혼운이 없다”고 악담을 하는 점쟁이들이 있다.
일반적으로 남자의 경우 재가 부인이며 여자의 경우
관이 남자라는 해석에서 재가 없는 남자나 관이 없는 여자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러한 해석은 단순히 글자를 해석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배경에는 무엇이 있나?
남자의 여자인 재는 내가 싸워 이기는 글자다.
나에 해당하는 글자가 나무 일 경우 토가 재다.
나무가 흙에 뿌리를 박고 흙 속의 양분을 갈취하는 이미지다.
내가 물일 경우는 내가 꺾을 수 있는 불이 재다.
물이 불을 끄는 이미지다.
남자의 여자가 재라는 것은 나무가 토를 이기고 물이 불을 이기듯
남자는 여자를 이겨야 한다는 가치관의 변형이다.
더 더욱 재미있는 것은 재를 제대로 건사하기 위해 남자는 신왕(기가 강해야)해야 한다는 데 있다.
재를 간수할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적당히 기가 강하면서 재가 든든한 남자는
여자가 많아도 스캔들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해석한다.
기가 강하면서 재가 든든한 남자는 응분의 대가를 치를
능력이 있는 남자이기 때문에 스캔들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 내재하는 가치의 단면은 여기서도 확인된다.
물론 여자의 경우는 이와 다르다.
여자의 남자는 재가 아니라 관이다.
관이란 내가 지배하는 글자가 아니라 나를 지배하는 글자, 나를 치는 글자다.
나를 상징하는 글자가 나무일 경우 금이 남자가 되고 내가 금일 경우 불이 남자다.
나무는 금으로 만든 도끼에 패이며
그 금을 녹이는 것은 용광로의 불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리면 된다.
여기에 무엇이 있나? 여자는 남자를 섬겨야 한다는 것,
즉 여자는 남자에 의해 길이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금이 불에 의해 단련되듯 말이다.
물론 관이 든든한 여자는 건왕한 남자가 있다고 해석한다.
이 경우 남자가 많아도 건사할 능력이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든든한 남편이 있다고 해석한다.
괸찮은 남자와 조용히 사랑해서 거침없이 결혼할 수 있는 복(?) 많은 여자이기 때문에
나를 지배하는 글자가 힘 있게 특출한 여자는 깨진 사랑의 절망을 고독하게 노래할 이유가 없다.
관은 건왕해야 하나 여자 사주에 관이 많고 도화살이라도 있으면
바람이 날 사주라고 해석해서 결혼을 꺼린다.
사랑의 상처로 인해 모든 유행가가 자기 노래 같은 여자는 상관이 발달한 여자다.
상관이란 관을 치는 글자를 말한다.
예를 들어 내가 금일 경우 그 속에 들어가면 내가 무조건 녹아내리는 불이 나의 관인데,
상관이란 그 불을 끄는 물이다.
금이 자기를 조련시키는 불은 약한데
그 불을 끄는 물의 기운이 세면 금은 조련되지 않는다는 이미지다.
기가 강한 여자가 상관도 발달했으면 남자의 지배를 싫어하고
모든 지배를 벗어나 한줄기 바람처럼 살고자 한다고 해석한다.
당연히 상관이 강한 여자는 결혼생활에 어울리는 여자가 아니라고 한다.
관을 치는 그녀는 남자를 치고 남자의 앞길을 막는 여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도 남자에게는 다른 해석을 입힌다.
상관이 발달한 남자는 여자의 뿌리가 든든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 체계가 무엇을 가정하고 있는가는 자명하다.
여자는 남편에 의해 지배당하는 것이 아름답다는 것이다.
1. 사주팔자에 ‘남자가 없는’ 이유2.
여자를 지배하는 남자는 자유로운가
그러면 여자를 지배하는 것이 정상으로 간주되는 남자는 자유의 표상인가?
남자가 기대어 목숨을 일구어 온 사슬은 없나? 당연히 존재한다.
다만 그 질긴 사슬은 여자가 아니라 질기디 질긴 업이다.
관적일 수도 있고 회사일 수도 있으면 단체나 조직일 수도 있다.
남자를 지배하는 그 업의 체계는 당연히 남자가 지배하는 여자까지 지배한다.
업은 남자와 여자를 동시에 지배할 수 있는 것으로서
그 지배를 받을 수 있는 인간은 성공한 인간으로 추앙된다.
사실 조직이 남자와 여자를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전체주의적 가치체계에 편입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단적인 증거일 뿐
선험적으로 조직의 우월성을 증명해 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유교사회의 신분제도였다면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소비의 매개가 되는 돈을 만들 수 있는 메커니즘인 것이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조직에 이길 수 없으며
금이 용광로의 불에 들어가야만 무기가 되어 쓸모있게 나오듯이
조직의 쓴맛을 경험해야 비로소 인간이 된다는 관에 대한 이 해석은 전체주의의 한 단면일 뿐이다.
이는 후기 구조주의자 라캉이 팰러스 중심주의라고 불렀던 것이 문화에 실현된 한 방식이 아닐까?
인간은 언어를 배우면서부터 구체적인 언어로 표현되는 상징계의 질서를 내재화한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라캉은 진실은 에고에서 발견되지 않는다고 한다.
에고는 상징계의 질서를 드러내줄 뿐이다.
그렇다면 진실은, 언어습득 때부터 인간에게 젖어드는 이 상징계를
그대로 복창하는 에고에서가 아니라 그 상징계를 통해 특정 문화가
꾸는 전체주의의 꿈이 무엇인지를 거리를 두고 볼 때 기지개를 켤 수 있다.
후기자본주의 사회체계를 비판하는 라캉의 언어나 봉건체제에서 만들어져서
여태껏 살아남은 팔자 해석 체계는 분명 다른 언어임에도 불구하고
그 언어 체계가 보는 것은 동일하다.
하나가 과학과 이성의 이름으로 치장한 전체주의의 꿈을 깨우려 한 것이라면
다른 하나는 신비의 이름으로 전체주의의 꿈을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팰러스 중심주의에 녹아 있는 것이 개인속에 각인된 전체주의라면
신비의 베일을 벗긴 팔자 해석에선 남성 우월주의와 전체주의의 꿈이 샘물처럼 솟아난다.
전체를 위해서 개인을 휴지처럼 버릴 줄 아는 관은 냉정하나,
관이 발달한 사람은 그 냉정함에 잘 적응할 수 있는 능력 있는 사람으로 평가된다.
물론 관이 적절히 발달한 남자는 관의 사랑을 받아 고관이 될 수 있는 남자라고 읽힌다.
조직에 순응해서 조직의 사랑을 받아야 성공할 수 있다는 가치관을 읽을 수 있다.
조직은 조직을 지키고 키우기 위해, 남자가 그에 의해 길들지 않는 여자를
대가 센 여자로 버리는 것보다 더 냉정하게, 자기 목소리를 가진 개인을 용납하지 않는다.
조직에 의해 길들지 못하는 남자나 남자에 의해
길들 수 없는 여자는 우리 공동체 공동의 적인 것이다.
대가 센 그들은 그 대가 부러질 때까지 도전당할 것이고 그리하여 상처입을 것이다.
사명대사 신이 말하는 게 겨우...
음양오행설의 해석 체계가 학운, 결혼운, 직업운, 재물운, 명예운을 점쳐 주기 때문에
관심의 대상이 된다면 그 전제는 특정 사회에서
그 사회가 성공한 삶이라고 말하는 규정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일 것이다.
미아리 고개에 가서 간판 몇개를 확인하면 우리는 그 성공이 어떤 것인지를 쉽게 짐작한다.
궁합, 결혼운, 학교운, 직업운, 재물운, 명예운.이 밑바닥에서 솟아나는 것은 무엇인가?
누가 어떻게 더 많은 돈과 지위와 그에 걸맞는 배우자나 자식을 얻을 수 있는가의 물음에
답하는 것이 팔자 해석 체계의 목적이라면 그것은 신비한 그 어떤 것이 라니라
신비의 이름으로 물질 만능주의의 세계를 옹호하고 있는 것일 뿐이고
이에 따라 돈과 지위를 향해 달려가려는 욕망을 부추기는 것일 뿐이다.
사실 점쟁이나 무당에게 듣기 원하는 축복의 말이란 내 삶의 아킬레스건이다.
팔자 해석을 해주는 역술가나 사명대사 신, 최영 장군 신, 단군 신이 내렸다고 주장하면서
신이 말한 대로 말한다는 무당에게 우리가 듣고 싶은 축복의 말은 사실 대동소이하다.
3월에 승진할 거야, 5월에 만난 여자가 네 여자야,
이번 선거에 남쪽으로 가면 당선되겠어, 서쪽에 있는 학교에 가면 붙어,
8월에 사업 시작하면 되는데 물로 하는 사업이어야 성공해....
약간은 애매모호하게 때로는 권위를 위해(신이 말하는 것이니까)
점 보러 간 사람, 기도하러 간 사람에게 반말로 들려 주는
축복 혹은 저주의 말을 들으며 신통력에 놀라워 하는 우리는
신비를 통해 겨우 물질을 향한 맹목적인 욕망을 정당화하고 있지는 않은가.
팔자 해석이나 신기의
지향점이 부나 권력, 혹은 명예가 모이는, 성공의 가능성이 열리는 삶이라면 그
속에 들어 있는 것은 헛되고 기만적인 가치들이 지배하는 현실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돌팔이 점쟁이와 돌팔이 인생의 궁합
옛부터 중도는 선비의 중요한 덕목이었다.
그러나 균형감각을 가지고 살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크고 작은 사건들이 인간의 어깨를 내리누르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실존주의자인 카뮈가 인간의 삶에서 나타나는 부조리함을
오랑 시의 페스트에 비유했겠는가?
페스트는 죄 있는자, 부정한 자에게만 옮기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이유 없는 것이다.
사실 균형감각이란 그럴 때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아무런 대책 없이 사건을 당할 때 비로소 발휘해야 할 균형감각은
그때 이미 사라지고 그동한 허망하다고 코웃음쳐 왔던 세계에까지 기대고 싶어진다.
올해는 과연 건축경기가 풀려 돈을 벌 수 있을까?
자꾸만 침체되는 건설 경기에 여기 저기 점치려 다니는 건축업자의 마음은 다급하다.
그때 재운이 없다는 점쟁이는 돌팔이라고 소문이 나고
올봄부터 건축경기가 풀려 여지껏 묶여 있던 재운이 트인다고 말하는 점쟁이는 귀신이라는 소문이 난다.
그래, 귀신 같은 점쟁이에게 기분 좋게 10만 원을 내고 나올 때
과연 심리치료의 긍정적 효과를 운운하며 점치는 문화의 순기능에 편들어야 할까?
`작명:상-10만 원, 중 5만 원`이라고 버젓이 써붙인 점쟁이를 보고는 웃어야 할까, 울어야 할까?
평생 한 번인데 이왕이면 하고 10만 원을 내면서 자식의 화려한 미래를 꿈꾸는
순진한 인간이나 그 꿈에 장단을 맞추면서 좋은 일하고 돈도 벌었다고 여기는 점쟁이는
물질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확실히 찰떡궁합인 한 쌍이다.
돌고도는 이 세상에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절박한 사람들에게 주는 위로감을 제외하면
사주팔자로 길흉화복을 예견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그 논쟁을 검증할 방법이나 반증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신왕한 사주에 비겁운이기 때문에 대학가기가 어렵다”든가
“사주가 재가 부족해 인성운에 부인과 이혼할 수밖에 없다”든가 하는 말은
그 말의 당사자가 설혹 대학에 들어가지 못했고 이혼을 했더라도
그 자체가 검증된 것도, 반증된 것도 아니다.
물론 이런 말을 하게 만든 음양오행설이 보여 주는 것은 있다.
음양오행설 그 자체 내에서는 그 자체가 힘 있는것, 그 자체가 약한 것은 없다.
예를 들면 물을 먹고 사는 나무는 불을 살려 주고 불은 흙의 모태이며 흙은 금의 뿌리다.
또 금 속에서는 물이 나며 물은 다시 나무를 살린다.
모든 것은 돌고 돌 뿐 어떤 한 곳으로 모이지 않는다.
흙에 뿌리를 내려 양분을 취하는 나무는 토를 이길 수 있는 것이지만
자신을 치는 도끼에는 지며 나무에 이기지 못했던 토는 물과의 싸움에서는 이긴다.
나무를 이겼던 금은 불에는 이길 수 없지만
그 불은 토의 지배를 받았던 물과의 싸움에서는 이길 수 없다.
어떠한 것도 영원한 승자가 될 수는 없다.
팽팽한 대립 속에서도 모든 것은 순환해야 한다.
이러한 음양오행설이 보여 주는 것은 변화가 기본인 세계에서
가장 좋은 것은 균형과 조화라는 것이다.
기가 셀 경우 기를 빼주거나 쳐 줘야 하고
기가 약할 경우 기를 보충해 줘야 한다는 것이 그 정신이다.
체계를 알고 난 후 내 생각은 이렇게 정리되었다.
음양오행설은 언제나 그 시대의 근본 질서를 반영한다.
다시 말해 음양오행설의 기본 이념에 상관 없이 시대에 따라 달리 해석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수많은 점쟁이들이 해석해 들려 주는 사주팔자는
우리 사회의 체계와 한계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남자 중심이고 조직 중심인 사회에서 음양오행설은 남자 중심, 조직 중심으로 해석된다.
만일 여자가 차별받지 않고, 돈이 숭배받지 않고, 전체보다 개인이 존중되는 사회라면
당신과 나의 사주팔자는 완전히 다르게 해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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