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終)
제2부 삐딱하게 보고 바로 말하기
14. 내가 길들여지지 않는 이유2
사람들은 한번쯤 완전한 사랑을 꿈꾼다.
완전한 사랑이란 무엇일까? 평생 헤어짐 없는 사랑?
그러나 이 세상에 헤어짐 없는 사랑은 없다.
죽음 없는 삶이 없는 것과 같다.
사실 그것은 끊임없는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는 세상의 법칙이다.
만남이 축복이라면 헤어짐도 결코 저주나 불행이 아니다.
우리는 만남을 통해 살아 있는 인간의 표정을 배운다.
인생에서 사랑이 중요한 건 사랑을 경험하면서
자기 안에 있는 여러 형태의 눈을 뜨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 윤후명의 사랑에는 법은 없고, 길만 있다고 했던가.
한용운과 화해하기까지
내 첫사랑은 좀 늦은 나이에 찾아왔다.
사실 내가 사랑에 늦게 눈뜬 것은 정치적인 문제가
대학을 지배하던 어렵던 시절, 투사가 되지 못할 망정
사랑놀음이나 할 수 있겠느냐는 자학적 분위기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잘못된 교육과 그에 대한 저항 때문이었다.
나는 사회가 가르친 여성의 정서를 끔찍이 싫어했다.
얌전함과 연약함, 결혼과 함께 내 문화를 버리고
남자 집안의 문화에 길들여져야 하는 것 등등.
나는 내성적이긴 했지만 얌전하지는 않았고
수긍이 되면 받아들일 줄은 알았어도 순종적인 애는 아니었다.
그리고 특별히 자랑할 만한 내 문화적 분위기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내가 사랑했던 것,
익숙해졌던 것을 버릴 수 있을 만큼 비굴해지기는 싫었다.
나는 누구보다도 나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내게 사랑이 찾아오기까지 나는 여자가 사랑을 한다는 것은 순종의 정서,
복종의 정서에 길들여져야 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 정서는 정말로 지겨운 것이었다.
고등학교 때 생활관의 영향이었을까?
국어시간에 배운 한용운 시의 영향 때문이었을까?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2학년 때 생활관 교육을 시켰다.
30여명의 학생들은 3박4일 동안 생활관에서 합숙하면서 전통예절을 익혔다.
생활관 합숙은 사감선생님이 무섭고 규칙은 엄했어도
말 많고 웃음 많은 여학생들의 축제였다.
우리는 밤이면 자지 않고 몰래 모여 귀신 이야기,
최면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냈다.
공부밖에 할 게 없었던 시절, 그 시간은 쏜살같이 지나가는 아쉬운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 나이에도 교육 내용은 영 못마땅하게 느껴졌다.
제사 예절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사감선생님은 정말로 정성껏 제사 음식 차리는 법, 제사 지내는 법을 가르치셨다.
양반이면 꼭 이렇게 해야 된다고 하셨다.
그때 기독교인인 친구 하나가 선생님께 당당하게 자기 의견을 말했다.
“선생님, 우리는 기독교 집안이기 때문에 제사를 안 지내는데요?”
늘 받은 질문이었던지 선생님은 여유 있게 대답하셨다.
“여자는 시집을 가면 남자 집안의 문화를 따라야 해요.
학생네 집안에서 제사를 안 지낸다고 해서
시댁에서도 제사를 안지내라는 법은 없잖아요?“
그 자리에서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지만 나는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여자는 남자네 조상을 위해 상을 차리고
정작 제사에서는 얌전히 비켜 있는 거라는 것도 마음에 걸렸지만
아니, 여자라는 이유로 무조건 자기가 익숙한 문화를 포기해야 하다니,
나는 그게 싫었다. 어디 생활관 교육뿐이었겠나!
국어 시간, 한용운의 시를 해석하는 데도
여성의 자리는 생활관 교육을 벗어나 있지 못했다.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 하지만은 나는 복종을 좋아해요.
자유를 모르는 건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데 복종하는 것은 참 자유보다도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다른 사람에게 복종하라고 하면 그것만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이 시를 가르치던 남자 선생님은 이 시의 특성을 설명하면서 여성적이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시험에 잘 나오는 거니까 밑줄을 그어 놓으라고 말했다.
나는 밑줄은 커녕 설명을 받아 쓰지도 않았다.
나는 선생님께 질문했다.
선생님, 한용운은 남자인데 남자가 쓴 시를 여성적이라니요?
선생님은 좋은 질문이라고 추켜 세워 주신 후 당당하게 말씀하였다.
남자가 썼더라도 복종의 정서, 순종의 정서는 여성의 정서이기 때문에
‘복종’은 여성적인 시라고.
남자가 여성적일 수 없다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한 것이 아니었지만 나는 거기에서 그만 그쳤다.
뭐라고 할 말이 있을 것 같았지만
그 말이 무슨 말이어야 하는지 당장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후에 나는 애매하게 한용운을 미워하는 것으로
교과서가 가르치는 여성적인 정서와 멀어져갔다.
그러나 기대하지 않았던 사랑의 열병을 앓은 후에
비로소 나는 한용운과 화해했다.
한용운의 정서는 여성의 정서가 아니라 사랑의 정서였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 스물여섯 살까지 여자의 사랑은 재미없는 것이라 생각했을까?
이유는 간간하다. 길들여지는 것이 무조건 싫었기 때문이다.
길들여진다는 것, 그것은 무엇일까?
원래 길들여진다는 것은 ‘어린왕자’ 때문에 유명해진 말이다.
어린왕자가 장미꽃에 길들여진다는 것은 장미꽃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이때 길들여짐은 인격적인 사랑의 질서다.
사랑하는 사람에 길들여진 자는 ‘나’ 속에서 ‘너’를 보고 ‘우리’를 본다.
내가 우리 속에서 다시 태어나, 나도 아니고 너도 아닌 우리가 함께
삶의 궤적을 그려갈 때 길들여진다는 것은 생명의 생기다.
그리고 이것은 대단히 철학적인 화두다.
그러나 생활 속에서, 실제 연애 관계 속에서 사랑을 할 때,
이 철학적이고 아름다운 ‘길들여짐’이 가능할 것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세상은 여전히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길들이려 하고,
힘 센 자가 약한 자를 길들이려 하기 때문이다.
나는 ‘어린왕자’에서처럼 철학적이고 아름다운 길들여짐이 자신 없어,
아예 길들여지지 않는 쪽으로 내 인생의 흐름을 정했다.
나는 그렇게 살 것이다.
나는 적극적으로 표현하며 살 것이지만, 주류보다는 비주류 쪽에,
강자보다는 약자 쪽에, 힘이 센쪽보다는 약한 쪽을 강조하는 목소리를 낼 것이다.
제2부 삐딱하게 보고 바로 말하기
15. 맺는글
아름다울 수 없는 약자의 자리
“타락하고 싶다”고 말하는 선배가 있었다.
그는 노력한 것보다 더 얻고, 자기의 능력보다도 더 대접받는 것을 타락이라 불렀다.
그가 느끼는 타락의 매력은 성공의 매력이었다.
그는 타락하지 못했고 여전히 타락을 꿈꾸는 사람의 대열에 있다.
많은 우리들처럼 그는 성공하지 못했고
그리고 여전히 성공을 위해 아부해야 하는 약자로 남아 있다.
약자는 아름다울 수 없다.
이루지 못한 꿈이 그를 괴롭히고 이루지 못할 꿈을 위해 끊임없이 초라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순결’하지 못한 것이 걸려 스스로를 세일하려 하는 여자는 가부장제라는 덫에 걸린 약자다.
시댁일은 사소한 것까지 챙기면서 친정일은 무관심으로 일관,
“무소식이 희소식이지”중얼거리던 나의 어머니가
외할머니의 죽음 앞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통곡할 때 나는 약자의 얼굴을 보았다.
거기서 한의 아름다움을 논할 바에야 나는 차라리 미학의 소멸을 조장하고 말리라.
낮은 코를 높여 주고 건강한 외꺼풀에 칼을 대서 쌍거풀을 만들고
광대뼈를 깎고 주름살 제거 수술에 막대한 돈을 투자하는 짓이
아름다운 얼굴, 매력 있는 몸매라는 이름으로 빠른 속도로 번져 나갈 때
나는 아름다움을 향해 질주하는 약자의 슬픔을 만난다.
약자는 아름답지 않다.
약자가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는 사람은 기득권을 절대로 포기할 마음이 없는 강자밖에 없다.
문화의 시대라고들 한다.
문화상품이 세계 시장의 주류를 형성하는 시대가 왔다.
문화의 흔적을 헹궈내고 이 시대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문화의 시대에 약자는 문화상품의 단순한 소비자이다.
이렇게 물어 보자.
문화의 시대인가, 문화의 상품화 시대인가?
이 화려한 문화의 시대에‘문화적으로 살기를 포기할 수 없는’사람들은
끊임없이 문화상품을 ‘소비’해야 한다.
사람들이 점점 다양성을 추구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 다양성의 본질은 이 시대의 점쟁이의 점괘를 벗어나는 일이 없다.
장관도 고개 숙이게 만드는 직업인 영험한 점쟁이가
사주팔자를 들먹이면서 신비를 팔 때 그 앞에 공손히 엎드린 사람들의
긴장되고 초롱한 눈빛이 추구하는 삶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돈이고 직위이며, 돈과 직위를 가져다 줄 남편복과 여자복인 것을.
그것이 이 세상 사람들의 관심의 전부다.
막강한 것은 돈의 권력이고 돈의 권력을 벗어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부자는 아무리 추하게 생겼어도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인을 아내로 맞이할 수 있다고 말한
마르크스의 예언은 실현되었다.
어떤 늙은 부자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돈을 주지 않아도 여자들은 나를 좋아한다.
여자들이 나를 좋아하는 것은 돈 때문이 아니라 나의 매력 때문이다.”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는 없어도 참 야무진 말이기는 하다.
그런 말을 당당히 내뱉을 수 있는 야무진 영감님이
돈의 힘을 힘을 빌리지 않고도 그렇게 매력적일 수 있을까?
나이 들어서도 “사람은 나이 때문에 늙는 게 아니라 마음가짐 때문에 늙는다”며
영원한 카사노바를 꿈꾸는 철들지 않는 사람을 보면 나는 서먹하다.
도대체 그런 사람을 철들지 않게 한 힘은 무엇일까?
그것이 돈 때문이라면 그런 사람에게 돈은 축복인가, 저주인가?
돈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돈 많은 남자는 ‘돈 아닌 매력’을 강조하면서 돈의 위력을 보여 주지만
돈 없는 남자와 여자는 연애할 수 없는 젊음을 구차스러워 하고
새파랗게 살아 있다는 사실을 부끄러워 한다.
고급 차를 타 사람이 대접받고 늘씬한 미인을 옆에 끼고 나타나는 남자가 부러움을 산다.
막강한 돈의 힘으로 월트 디즈니는
미녀와 야수, 인어공주, 노틀담의 곱추를 뒤바꾸어 비튼다.
콰지모도가, 인어공주가, 가난한 남자와 여자가,
그리고 평범한 우리들이 비틀려 상처날 때 나는 쩔쩔 맨다.
사실 돈은 중요하다.
아무리 성격이 좋다고 광고해도 가난한 농촌 총각이 결혼하지 못할 때,
그보다 더 가난한 연변의 처녀가 밥줄을 위해 형제와 친구를 떠나
아무런 연고도 없는 우리의 농촌으로 시집와서 행복하다고,
연출된 미소를 지어 보일 때 나는 돈의 위력을 본다.
돈의 위력은 그것이 인간을 초라하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부가 인간과 인간의 문화를 더 초라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나는 현대 문화를 통해 똑똑히 본다.
까맣게 썩은 돈이 인간을 유혹할 때
그 유혹에 넘어가지 못하는 인간은 성공할 수 없는 약자이며,
그 유혹에 넘어가는 인간은 인간으로서 별로 믿을 수 없는 약자다.
결국 우리는 언제나 약자다.
돈과 문화가 결혼해서 권력을 휘두르는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가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이 있을까?
나는 이 시대의 문화 현상을 과장 없이 그려 보고 싶었다.
왜 이 시대는 미신으로 매도되던 사주팔자가 신비의 이름으로 공인되는지,
편집증을 병으로 치부해야만 했는지,
콰지모도가 달라지고 달라진 섹스의 의미를 유통시키는 자,
그리고 실존의 이름으로 양귀자와 신경숙의 소설들이 팔려나가는지를
우선은 과장 없이 드러내 보고 그런 자리에서 허황된 욕망에 끊임없이 시달리는
많은 약자들의 자리를 마련해 보고 싶었다.
그 과정에서 내 목소리가 지나치게 높아진 경우도 있겠고
대책 없이 문제만 나열해 놓은 경우도 있을 것이다.
나는 애초부터 ‘정답’을 제시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내 글을 통해 생각의 실마리라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큰 수확이라고 생각한다.
풍성한 토론의 문화가 이 땅에 활짝 피어나기를 바라며 글을 맺는다.
end
'종합상식 > 문학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느 창녀의 죽음 1 김성종 (0) | 2011.05.04 |
---|---|
귀향(歸鄕) / 모파상 (0) | 2011.05.04 |
나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9 (0) | 2011.05.02 |
나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8 (0) | 2011.05.02 |
나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7 (0) | 2011.05.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