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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3

오늘의 쉼터 2011. 5. 2. 13:41

나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3

 

 

1부    길들지 않은 사랑은 힘이 세다

 

5. 동성 파트너가 징징 짠 이유
 

공인되지 않는 사랑을 하는 사람의 심정은 절박하다.

그래서 때로는 신파가 묻어나기도 한다.

그 절박성이란 아무래도 아무런 보호 장치가 없는 데서 유래하는 거고

그 절박감 속에는 그 사랑이 길지 않을 것이란 예감이 들어 있을 것이다.
 

어느 날 한 여학생이 어두운 얼굴로 내게 찾아와서 물었다.
  “선생님, 동성연애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글쎄, 그건 왜?”

부산이 고향인 이 여학생은 자취를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자취방에 들여놓을 간단한 가구들은 사기 위해 여학생은 가구점에 들렀다.

그런데 가구점
여종업원이 그녀에게 아주 친절했다. 

알고 보니 그 종업원은 여학생보다 세 살이 더 많았다.

그후로 둘은 언니, 동생 하면서 친자매 이상으로 친하게 지냈다.

그런데 여종업원은 동성연애자였고 자연스럽게 둘은 일 년 동안 동성연애를 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처음엔 그 종업원 때문에 시작했지만 이제는 그 여학생이 더 절실했다.

그런데  일 년여가 지난 지금 종업원은

“나는 정상적으로 살 수 있었는데 너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됐다”며

이 여학생에게 언어 폭력을 휘둘렀다.

처음엔 기가 막혔지만 같은 말을 자주 듣는 동안 ‘그런가’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 종업원은 “난 정상적으로 살아야 하니까 헤어지자”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버릇처럼 헤어지자고 하는 사람은 헤어질 마음과 능력이 없는 사람이라고 했던가.

그 종업원은 스스로 감당해야 하지만 감당하지 못하는 사태를

그 여학생에게 언어  폭력으로 전가함으로써 그 여학생을 괴롭혔다.

참다 못해 여학생이 “그럼, 헤어지자고”고 하면

 “네가 맘이 변했구나”고 한탄하면서 울기만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 연민과 안도감이 동시에 생긴다고 했다.
 

분명 그 종업원은 이중 규범을 적용받고 있는 것이다.

공인되지 않은 생활양식에 대한 두려움과 그 생활양식에 대한 사랑이 그것이다.
종업원은 이 여학생을 만나기 전에도 동일한 형태를 보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지나간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이중 규범을 변증법적으로 통일해 내지 못해

말로는 자기가 버리고 실제로는 버림을 당한 관계를 경험했을 확률이 높다.

성숙하지 못한 태도는 스스로 극복하지 못하는 한 영원히 반복된다.

그럼으로써 운명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성격이 운명’이라는 옛날 어른들의 말을 진리로 확인시킨다.

나는 학생에게 어떻게 하고 싶으냐고 물었다.

학생이 말했다. “그냥 힘들어요, 언니가 나 때문에 괴로워 하는 것 같아서.”
 

나는 절대 아니라고 말했다.

그것은 학생 때문이 아니라 그 언니 자신의 문제라고.
자신을 책임지지 못하는 사람이 사랑을 지켜가는 것을 나는 보지 못했다.


내가 어떻게 얘기하든 그 사랑의 운명은 불 보듯 훤하다.

그런 상대라면 그들은 헤어지게 되어 있다.
내가 그 여학생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그가 책임질 필요 없는 죄책감에 빠지지 않게 도와 주는 일 이리라.

 

 

6.  킹카가 결혼하지 못한 이유
 

잘 나가는 광고 회사의 카피라이터인 건희는 29살에 모처럼 마음에 맞는 남자를 만났다.

그는 33살의 샐러리맨이었다.

홀어머니와 함께 사는 장남이었지만 그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올해 환갑인 그의 어머니는 명문대학을 나온 예의바른 여자였고

강남에 빌딩만도 두 채가 되는 알부자였기 때문이다.

시동생이 될지도 모를 남동생이 하나 있지만 그도 잘나가는 레지던트였다.
 

게다가 당사자도 부족할 게 없다..

180센티의 키에 명문대학을 나와 모 재벌 회사에서 야심차게 근무하고 있는 그 남자는

영어 잘하고 매너 있고 돈도 쓸 줄 아는 노총각 킹카였다.

특별한 날이 아니더라도 가끔씩 꽃을 안겨줄 줄도 알고
장 자크 아노나 팀 로빈스 감독의 영화를 사랑하는 그 남자를 보고

건희는 왜 이 남자가 여태 총각일까 궁금할 지경이었다.

물론 건희가 마련한 답은 ‘눈이 높아서’였다.

점차 건희는 늦게 찾아온 자기의 행운에 취했다.

그런데 건희는 어느 날 그 킹카가 왜 결혼하지 못했는지 진짜 이유를 알게 되었다.

 

누가 내 잘난 아들을...
둘 사이에 결혼 약속이 오가고 만난 지 6개월이 지난 후 건희는 킹카의 어머니를 만났다.

어머니는 너무나 예의바른 탓에 상대방을 주눅들게 하는 재주를 가진 여자였다.

배운 냄새를 풀풀 풍기는 그의 어머니는

며느리가 될지도 모를 여자에게도 깍듯이 존대말을 했다.

물론 그 예의바름이 촌부의 촌스러움보다도 더 거북스러웠음은 쉽게 짐작이 된다.

건희는 찬찬히 뜯어보는 킹카 어머니의 시선이 부담스러웠지만

인륜지대사인 결혼을 위해서 이 정도쯤이야 하면서

그의 어머니가 물어 보는대로 똑똑히 대답했다.

사실, 아버지가 대기업 이사이고 명문 대학을 나왔으며

좋은 직장을 가지고 있는 전형적인 커리어 우먼인 건희는

꿀릴 것이 없다고 자신 있어 했다.

그런데 대답을 하면서도 건희는 이상했다.

도대체 킹카가 다 알고 있는 정보를 그의 어머니가 다시 물어 보고 있다는 것이

 건희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이런 저런 애기를 적당히 미소를 섞어서

지능적으로 물어 보던 그의 어머니는 건희에게 물었다.
  “몇 살이지요?”
  “예, 스물아홉입니다.”
  “아, 그래요, 그렇게 나이 들어 보이지 않는데....”
 

건희는 그 자리에서 결코 싫은 내색을 하지 않은

그의 어머니와 애매하게 웃으면서 헤어졌다.

문제는 그 다음에 발생했다.

그의 어머니가 건희와의 결혼을 심하게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킹카는 평소에 어머니와 심각한 대화는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어머니를 좋아하지 않았다.

어머니가 너무 세속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를 존중한다고 했다.


알고 보니까 건희는 그이 다섯번째 여자였다.

대학 다닐 때 사귀던 첫번째 여자는 은행원이었다.

어머니는 그녀를 고졸이라고 반대했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와서 만난 두번째 여자는 직장 동료였다.
어머니는 그녀의 키가 작아서 고목나무에 매미 붙어다니는 꼴은 못본다고 반대했다.
 

세번째 여자는 키가 작지 않은 중학교 교사였다.

어머니는 그 여자가 직장이 없는 아버지 밑에서

동생을 책임져야 하는 가난한 집의 딸이라고 반대했다.
 

그러다보니 28살이 됐고 그도 지쳤다.

그저 일에만 푹 빠져 지냈다.
30살이 되자 어머니는 큰아들 결혼 걱정을 심하게 했고,

할 수 없이 어머니 친구의 소개로 한 여자를 만났다.

물론 어머니 기준에 다 갖춰진 여자였다.

그도 대충은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우연한 기회에 어머니는 그 여자가 성형미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극구 반대했다.

물론 그는 결혼을 하지 않았고 그 다음부터는 일체 소개를 받지 않았다.

그는 마마보이는 아니었다.
 

킹카의 집안 사정을 아는 친구 부인의 억척스런 권유가 아니었다면

그는 어머니 생전에는 여자를 소개받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러다 만난 건희가 그는 마음에 들었다. 

그가 볼 때 건희는 모든 것이 제대로 갖춰진 여자라서

어머니도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여겼다.

건희를 만나기로 한 날 아침에 어머니에게 결혼을 약속한 여자가 있다고

어머니에게 거의 통보 형식으로 얘기한 것도

말이 통하는 것 같으면서도 결코 말이 통하지 않는 어머니에 대한 분노와

건희에 대한 세속적 자신감의 표시였다.
 

그런데 어머니는 키가 작지도 않고 선이 고우면서도 얼굴에 칼을 댄 적이 없을 뿐더러

전형적인 중산층의 딸인 건희를 나이가 많다는 이유를 들어 반대한 것이다.

킹카는 자기 나이 많은 것을 생각해서 건희가 나이가 많다고 생각해 보지 않았기때문에

어머니의 그 반응을 예상하지 못했다. 

분명 그 남자는 어머니의 뜻대로 움직이는 마마보이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남자의 중요한 사건마다 어머니가 개입하여

그 남자의 선택이 존중되지 않는 건 무슨 이유에서일까?
 

그것은 그 어머니가 가진 재산 때문이었다.

킹카는 부자인 어머니  밑에서 돈 쓰는 데는 구애받지 않고 살았다.

그가 가지고 다니는 좋은 차, 친구들이나 여자들과의 만남에서

결코 초라하게 굴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역시 어머니 덕이었다.

어머니의 돈에 길들여진 아들은 돈의 위력을 알고 있었고

어머니를 배반했을 경우 찾아들게 될 가난이 두려웠다.

그 점에서 그는 현실적이었고

어머니는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아들이 현실적이라는 점을 간파했다.

그래서 그녀는 아들이 며느릿감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여자와 결혼을 할 경우

한푼도 주지 않고 내보낸다고 조용히 말하곤 했다.
 

그러나 이번엔 경우가 달랐다. 건희가 가난하지 않았다.

이미 킹카네 집에서 반대한다는 것이 알려진 직후라

건희네 집에서도 반대하는 여론이 높았지만
저축이 꽤 되는 건희는 작은 전세 아파트를 얻어서

소박하게 시작하자고 킹카에게 건의했다.

킹카도 어느 정도 동의했다.
 

건희가 돈에 맞는 아파트를 보러 다닐 즈음 상황이 달라졌다.

막판에 그의 어머니가 결정적인 발언을 한 것이다.

니가 하는 결혼이나 니 마음대로 해라.
그러나 내게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마라.

니가 마누라를 얻는 거지 내가 며느리를 보는 게 아니지 않니?

이것으로 우리의 관계도 청산해야겠으니까 상속도 절대 기대하지 마라.
두 달을 끌다가 건희는 스스로 선택하는 결혼은

절대로 할 수 없는 그 허울 좋은 킹카와 헤어졌다.
 

킹카는 마마보이라서가 아니라

어머니의 부를 포기할 수 없어 어머니가 반대하는 결혼을 피했다.

이 경우 어머니의 부는 그 아들과 어머니 관계의 아킬레스건이다.

그건 그들 관계의 현실적 힘이다.

명분이 있어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하기 위해 명분을 찾는 사람과의 명분 싸움은 부질없는 짓이다.

그 경우 아킬레스건에 칼을 대야지

아킬레스건을 놔두고는 언제나 동일한 사태만이 반복된다.

어머니의 부에 관심이 있는 아들은 계속 사랑의 승자를 늘여갈 것이고

아무리 숫자가 늘어도 동일한 사태를 반복할 뿐

그런 불행한 결말을 극복하지는 못할 것이다.
 

아들은 어머니의 부를 포기해야만 자기의 사랑에 상처를 내지 않을 수 있다.
또한 어머니의 부를 포기해야만

어머니와의 정상적인 관계도 회복될 수 있을 것이다.

 

 

7 여자가 사랑에 목매는 이유


성교육을 시키면서 남자는 모두 도둑놈이라고 가르치거나

남자는 감각적 쾌락을 위해 여자의 몸을 구한다고 말하는 사람의 말은

대체적으로 경험담일 것이다.

그러나 그 경험을 강조할수록 묻어나는 것은

깊이가 아니라 혼란이며, 신비감이 아니라 피로감이다.

그런 경험을 강조하는 사람일수록 여자를 사랑속에 묻어두는데

그때 사랑이란 신선한 생명력이라기보다 비하하고 싶은 소녀적 감상이다.
 

여자에게 섹스는 남자를 사랑한다는 표시이고

남자에게 섹스는 단지 육체적 욕망이라는 이분법은 꽤 오래된 우리의 상식이다.

물론 상식이 그냥 만들어지는 법은 없다.

상식은 생활양식속에서 배어난 것이다.

여자에게 다가가는 남자의 궁극적 목적은 “함께 자는 것”이라고 말하는

프란체스코 알베로니의 (에로티스즘)은 그런 상식을 적은 책이다.
 

여자가 몸을 허락한다면 바로 그건 여자가 남자에게 모든 것을 바치는 것이어서

남자는 승리한 전투의 무용담을 이야기하는 군인처럼

 “나 누구 누구를 정복했다”고 떠벌린다는 알베로니는 여성적 에로티시즘과

남성적 에로티시즘이 어떻게 다른지를 상식의 차원에서 구별해 낸다.

그에 따르면 여성적 에로티시즘은 완벽한 총체성을 꿈꾸지만

남성적 에로티시즘은 철저히 분리적이다.
 

사랑과 성을 분리시키는 남성에게 성의 차원은 사랑의 차원과  다르다.

또한 사랑과 삶을 분리시키는 남성에게 사랑은 결코 삶의 핵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성과 사랑을 분리시키지 않을 뿐더러 사랑에서 삶을 떼내지 못하는 여성에게

성이란 삶이란 전체의 판이 짜이기 시작하는 삶의 핵이다.

여자는 몸을 섞은 남자와 모든 행위를 나누고 싶어한다고 한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는 그런 상식을 충실히 반영한 영화다.

메릴 스트립을 사랑하면서도 역마살을 누르지 못하는 로버트 레드포드는

메릴 스트립 곁을 떠난다.

남성적 에로티시즘을 상정하는 그에게 정착이란 거세와도 같기에

그는 사랑을 가슴 아프게 간직하면서도 야성의 세계를 선택한다.
물론 그가 사랑을 가슴 아프게 간직할 거라고 믿는 것은

많은 여성 관객에게 호소하기 위한 영화적 환상이다.

남자에게 사랑은 세계 그 자체가 아니라
철저히 삶의 일부이며 그것도 다른 삶에게 늘 밀리는 차선이다.
 

그런데 여자는 다르다고 한다.

남자가 여자를 만나는 것은 사회생활을 위한 단순한 활력소인데 반해

여자가 남자를 만나는 것은 사회생활을 포기 하는 것이라고 전한다.

남자가 세계인 여자는 자기 세계가 되어 줄 남자가 채워짐으로써

기존의 세계를 포기하고 사랑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말이다.
 

나는 그런 상식을 지리하게 늘어놓은 책이나 영화를 보면 참으로 용감하다는 생각과 함께

아직도 힘을 행사하려 드는 그 봉건적인 상식을 대할 때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난감하다.
도대체 그 구역질나는 상식을 통용시킨 생활양식은 어떤 것인가?

  

남자에게 사랑은...
나는 이화여대에서 7년 동안 (문화와 사상)과 (현대사상의 조류)를 강의했다.
여학생을 가르칠 때마다 피부로 느끼는 것은 그들의 절망감이다.
이화여대에는 졸업해서 다른 일 하지 않고

소위 ‘곱게 시집 가겠다’를 희구하는 여학생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들의 대부분은 사회에 나가 세파를 가르며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고자 하지만

그들이 여러 번의 이력서를 쓰면서 만나는 것은 역시

여성에 대한 우리 사회의 편견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물론 그 편견과 싸워 이긴 여성이 적지 않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더 많은 여성들이 열심히 일자리를 찾을수록

여성으로서 사회인이 되기에는 어려움이 너무 크다는 데 절망한다.

그들이 숨이 막혀 헉헉 거릴 때 그들 앞에 서 있는 남성이

결혼 상대자로 보이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자기의 정체성을 증명해 주는 것이 주민등록증밖에 없을 때

여성은 남성이 직장을 갖듯이 남성을 선택함으로써

절망감을 감추고 쉽게 사회의 메커니즘으로 들어간다.

직장이 남자의 삶의 주축이라면 같은 이유로 남자는 여자의 삶의 주축이 된다.
그와 같은 상황일 때 여자는 선택의 여지없이 자신의 삶에 주축으로 들어설
남자를 선택하는 일이 중요해지고, 이에 따라 여자에게는

남자와 함께하는 사랑과 성이 함부로 결정해서는 안되는 중요한 일 이된다.

사랑을 총체적 삶의 영역으로 확대하는 여자가 많다면

그것은 직장이 자기 얼굴인 남자가 직장에서 소외되지 않으려 애쓰는 것처럼,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여자의 삶의 질과 직접적인 여관을 갖도록

사회가 요구해왔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한다.
 

사실 총체성이라는 말은 대부분 긍정적인 의미로 쓰이는 말이다.

소외가 아닌 연관성을 말할 때 총체적이라는 말을 쓴다.

관계와 관계가 단절되어 있지 않고 유기적 연관을 갖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여성의 에로티시즘이 총체적이라고 말할 때 그때의 총체성은 전혀 다른 의미로 쓰인다.

여성에게 성이 사랑과 관계하고 또한 사회적 안정감과 관계한다고 말하는 것 이면에는

어떤 남성에게 어떤 여성이 성으로 묶이면 그 이외에서는 별 쓸모가 없다는 이념이 들어 있다.
쉽게 말하면 특정한 남성에 속한 표시로 미시즈 아무개라고 불리면서부터
여성은 그 남성과의 삶에서만 총체적으로 성과 사랑과 사회적 안정감을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미시즈 여성에겐 이제 다른 사회적 삶이란 없어도 좋다는 것이 아닌가?

그 속에는 확실히 여성이 사회에서 무력한 약자였던 시절의 여운이 배어 있다.

 

남자와 여자의 원초적 본능
물론 나는 여기에서 여성적 에로티시즘처럼 분리적인 성향을 갖는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원초적인 측면에서 남성과 여성의 에로티시즘이 어떻게 구별될 수 있을 것인지 나는 모른다.
구별될 수 있다는 데 동의하더라도 이분법적 구도를 갖지 않으리라는 것은 명백하다.

모든 단순노리가 그렇듯이 이분법적으로 구별하는 것은 상황을 선명하게 드러낼 수는 있지만

그만큼 현실과 동떨어져서 구별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여자와 남자의 속성을 비교하는 대부분의 작업이 그렇다
무엇보다도 내가 믿지 못하는 것은 원초적 본능에서부터

여성과 남성이 다르다는 것을 강조한 후에 남성을 여성 위에 군림시키려는 남성적 음모다.
푸코는 분명히 사랑에까지 권력이 개입되어 있다고 말하지만

사랑에까지 권력이 끼여든다면 정들지 않는 세상, 더 정들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8  연하의 남자가 배우자로 좋은 이유
아들의 머리는 엄마를 닮는다는 보도가 있었다.

X염색체가 머리를 주관하는데 XY인 아들은 엄마로부터만 X염색체를  물려받으니까

아들의 머리는 전적으로 엄마에게 달렸다는 것이다.
그 보도가 나가자 신세대 청년들이

그들의 연인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겠다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얼굴 예쁜 것은 잠깐이고 자식 공부 못해 속썩이는 건 영원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그 보도는 대단한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어떤 남자 원로 교수와 함께 식사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도 그 얘기를 했다.

그에게는 똑똑한 동생이 있는데 부잣집 딸과 연애결혼을 했다.

우리 대부분이 가난했던 70년대 초반이었다.

가난 때문이었는지 식구들은 한결같이 부잣집 딸과 결혼하는 것을 찬성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그 교수는 그 결혼을 반대했다.

여자 집안 식구들이 모두 머리가 나쁘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는 동생에게 진지하게 충고했다.
 “돈 많은 거 그거 별거  아니다. 더구나 너는 미래가 있는 애 아니냐.

그런데 어쩌자고 머리 나쁜 여자랑 결혼을 하려고 하니.

너 지금은 편하게 시작할지 모르지만 20년 후에 후회한다.”
 

그리고 20여년이 흘렀고 유명한 회사 사장이 된 동생은

하나같이 엄마를 닮아 공부를 못하는 자식이 유일한 걱정거리라고 했다.

아들의 머리는 엄마를 닮는다는 최근 보도를 보고 그는 자신의 선견지명을 대견해 했다.
나는 “맞아요”라고 맞장구칠 수 없었다.

머리가 안좋다고 생각하는 많은 여자들에게

그 아들이 공부 못하는 것까지 뒤집어 씌우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선생님, 제수씨가 선생님을 껄끄러워하겠네요.”
 “아니, 이 선생이 그걸 어떻게 알아요?”
 “제수씨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머리 나쁘다고 공인된 것도 서러운데

머리 좋은 시아주버님이 무시하는 듯한 시선을 보내니 얼마나 시아주버님이 부담스럽겠어요?” 

그는 절대 내색한 적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안다. 우연히 만나 식사하게 된 나에게까지 그 사실을 들킨 사람이면

반드시 집안에서 그런 기색을 보였으리라는 것을.

아들의 머리는  전적으로 모계유전이라는 명제에 대해

생물학자가 아닌 내가 그 문제를 직접적으로 논쟁할 자격은 없다.

그러나 나는 남자 아이의 머리가 모계유전이라고 했을 때

우리가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태도에 대해서는 많은 관심이 간다.

머리는 살아가는 데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그게 모계유전이 확실하다면 아빠보다도 엄마의 중요성이 인식되어야 한다.

단순히 아이들은 엄마하고 커야 한다는 그런 의미에서가 아니라

아이의 사회적이고 법적인 위상이 엄마의 그늘 하에 있어야 한다.
 

조선시대로 가보자.

그때 아이에게 남자의 성을 갖게 하기 위해 통용되었던

유명한 이념이 남자는 씨, 여자는 밭이라는 말이었다.

여자는 개성 있는 식물이 아니라 어떤 씨앗도 다 받아내는 밭이기 때문에

자기 주장을 할 수 없는 무개성의 존재이고

반면 남자는 콩이니 배추니 하는 씨이기 때문에 개성이 존중되는 존재였다.

그런 전통에서 여자는 단지 남자의 정신을 담을 몸을 주는 것이었고

아이의 정신이나 머리는 남자에게서 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남자아이의 머리는 모계유전이라고 밝혀지면 어떻게 해야 하나?
남자아이에게 머리를 주는게 여자라는 사실이 밝혀졌으니까

남자아이의 성은 엄마를 따르게 해야 된다는 논의를 해야 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한술 더 뜬다.

여자 고를 때 머리 나쁜 거 참으면 안된다고. 

나는 여기서 남자아이게게는 엄마의 성을 주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보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들은

그게 사실이기 때문에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실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의 태도 혹은 시선 때문에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이방인)에서 주인공 뫼르소는 아라비아인을 사막에서 살해한다.

‘태양이 뜨거워서’가 동기라고 한다.

이건 용서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태양이 뜨거워 사람을 죽이다니!

법의 관점에서 보면 사형감이고 뫼르소는 실제로 사형을 당한다.

그러나 작가인 카뮈의 시선에서 보면 용서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기보다
존재 이유가 없는 실존의 정황을 드러내는 것이다.
 

내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사실’이라는 게 사람의 태도를 바꿔놓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태도가 사실을 규정해 간다는 것이다.
평균수명이 길어진다.남자보다도 여자의 평균수명이 5년 이상 길다고 한다.
그러면 아무래도 남자가 홀아비로 사는 시간보다 여자가 과부로 사는 시간이 많아지게 마련이다.

여자가  남자보다 평균 3~5년 어릴 때 결혼하니까

평균 10년 정도를 여자 혼자서 살게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물론 재혼하지 않는 경우다.
그 사실을 두고 2,30년 전만 해도 뭐라 그랬나?

여자는 혼자 사는 데 능숙하고 남자는 혼자 사는 게 힘들어서 여자 수명이 긴 것은 괜찮다고 했다.

그런데 요즘은 다르다.

그러니까 연하의 남자와 결혼해도 괜찮다고 한다.

여자 수명이 긴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다를 게 없지만

예전 같으면 도대체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이다.
언제나 사실보다는 그 사실을 담아내는 태도가 더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