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상식/문학관

나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2

오늘의 쉼터 2011. 5. 2. 13:21

 

나는 길들여지지 않는다  2

 

 

  1부    길들지 않은 사랑은 힘이 세다


  1더 이상 결혼이 감미롭지 않은 이유


그래도 사랑은 사적인 자리가 있지만 결혼에는 사적인 공간보다 공적인 공간이 많다.

결혼은 명백하게 공적인 것이다.

물론 `결혼이 공적인 것이다`라고 말할 때 이 말은

“결혼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야. 집안과 집안의 만남이지”라고

 우리 어른들이 곧잘 말하는 그런 의미는 아니다.

 결혼이 공적이라는 것은 결혼은 사랑과는 달리 (사랑이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사회과학적 분석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결혼이 사회과학적 분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결혼의 형식 속에 사회의 중요한 형식이 녹아 있다는 의미다.

 

갑돌이와 갑순이가 사랑을 하던 시절

갑돌이와 갑순이가 사랑을 하던 시절 결혼은 감미로운 것이었다.

갑돌이를 보기만 해도 가슴 떨려 하던 갑순이는 그 가슴 떨리는 것을 감추다가

결국 갑돌이 아닌 남자에게 시집을 가고 갑순이에게 한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꺼내 보지 못한

순진한 갑돌이는 갑순이가 시집가던 날 달 보고 울다가 화가 나서 다른 여자와 결혼했다.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앞두고 들떠 있을 때 그 남자와 여자의 선배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다.

“살아 봐라, 살아 봐! 살아 봐도 그렇게 가슴 떨리고 달 보고 눈물 흘릴 일 있나!”
사랑하는 연인을 두고 세상을 떠나지 못해 안타까워 하는 (사랑과 영혼)의

패트릭 스웨이지를 보고 멋있어 하는 신세대 여성과 데미 무어가 사랑하는 연인이 떠난 자리를

사기꾼으로 채울까봐 안타까워하는 신세대 남성이 결혼을 꿈꿀 때 결혼은 더 이상 감미롭지 않다.

사실 21세기를 눈앞에 두고 있는 이 시점에서 감미로움을 기대하며 결혼을 바라보는 남자와 여자는 드물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감미롭게 들렸던 `결혼`이 갑자기 그 감미로운 화음을 잃어버렸는가?
 

결혼이 감미롭게 들렸던 시절,

결혼에는 성이 숨어 있었다.

다시 말하면 사회가 결혼 이외의 대부분의 장소에서

성을 금기시해 놓을 때 성의 세례를 받는 결혼은 감미로워진다.

금기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비밀이 있다.

또한 어떤 방식으로 금기가 행사되는냐 하는 것은

특정한 사회를 구성하는 중요한 사회적 뼈대라고 봐도 무방하다.

 

결혼의 핵심은 성이다
결혼의 핵심은 역시 성이라고 보아야 한다.

물론 결혼의 핵심을 성이라고 말할 때 특정한 사람의 고백을 떠올리면 안 된다.

금실 좋은 부부나 궁합이 안 맞아 이혼을 결심하는 부부가 “

결혼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문제다”라고 말할 수 있다.

신경정신과 의사가 “행복한 부부 생활을 위해서는 성생활이 만족스러워야 한다”고

말하거나 교통사고를  당해 성기능 장애가 있는 남자와 결혼하려는 여자가

“우리가 섹스 때문에 결혼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극단의 말 모두를 `결혼의 핵심은 성`이라는 주장으로 이해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런 주장은 특정한 개인의 실존적 고백일 뿐이다.
 

나의 주장은 결혼을 중심으로 성이 어떻게 통제되고

반대로 결혼과 관련하여 성에 관한 어떤 담론이 생성되는가를 살펴보면

사회가 존립해 있는 중요한 형식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결혼의 핵심은 성이라고 할 때는 바로 그런 의미다.
서양이나 우리나 봉건 사회에서의 결혼은 크게는 남자의 집안에 여자를 들이는 것이었고

작게는 남자가 크고 작은 일을 도와 줄 여자를 들이는 제도였다.

여기서 핵심은 결혼의 주체는 `남자와 여자`가 아니라 `남자`라는 것이다.
 

조선시대 여자는 일부종사라는 전제하에 순결과 지조를 생명으로 여겼다.
그것은 물론 한 남자에게 성적으로 속하게 함으로써

모든 생활에서 여성을 구속하려는 보이지 않는 의도를 가진 것이었다.

여자를 개 패듯 패는 남자를 지나가는 행인이 말리려고 할 때

 “내 마누라요”라는 한마디로 남자는 그 행인의 간섭을 벗어버릴 수 있었고

무슨 이유인지 모르는 채로도 여자는 남자의 화가 풀릴 때까지 맞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날 밤 남자가 원할 경우에는 다시 남자의 요구를 들어 주어야 했다.

여자는 인격이 아니라 남자의 소유물이었다.

 

조강지처, 그 안정적인 이름
답답하기 그지없는 인현왕후가 미화되고 자기 목소리를 가지려 했던

장희빈이 요부로 천시된 것은 다분히 정치적인 것이지만

(결국 힘의 싸움에서 남인을 이긴 서인의 승리 때문이 아닌가!)

요부를 요부로 천시할 수 있었던 것은 더욱 정치적이다.
왜 장녹수, 장희빈, 개똥이 김상궁을 천하의 요부로 욕할 수 있었나?

이들은 남자들 뿐 아니라 여자들에게도 공포의 대상이 었다.
노예처럼 남자의 말을 듣는 것 이외에 사회적 자리가 허락되지 않은

여자에게 어쩌면 '성'은 출세의 유일한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남자들이 남자의 노리개나 일꾼이어야 할 천한 여자의 발 아래

무릎 꿇는 치욕의 시간이 두려워 성으로 출세한 여자를 미움의 대상으로 삼았다면

같은 여자들은 조강지처의 자리에 흠집이 날까봐 그 여자들을 미움의 대상으로 삼았다.

조강지처는 버리지 않는다는 힘 센 말의 도움을 받는 봉건사회에서
‘조강지처’란 신선하고 살맛나는 이름은 아니어도 얼마나 안정적인 이름이었던가!

조강지처를 거쳐서 시어머니가 된 여자가 집안에서 누릴 수 있는 막강한 권력을 생각해 보라.

아들이 있는 조강지처는 정말로 안정된 자리였다.
 

전통 사회에서 여자는 한 남자의 성에 속해서 그 남자의 성을 가진 아이를 낳는 존재다.

그러므로 결혼은 특히 여자의 성을 통제하는 중요한 방식이었다.
결혼제도 속에 통제되지 않는 여자는 자유로운 여자가 아니라 거리의 여자였다.
거리의 여자란 한 남자에 속해 있지 않는 여자였고 그래서 안정적일 수 없는 여자였다.
 

숙종의 여자였던 장희빈보다 연산군의 여자였던 장녹수가 더 욕을 먹는 것은 당연하다.

장녹수를 들먹일 때마다 하는 얘기가 “거리에서 몸 팔던 여자래”가 아닌가!

죽어도 무덤을 만들어 줄 수 없는 천한 여자가 왕의 권력을 나눠 쓰려 했으니

용서되지 않는 일이었던 것이다.
 

사회가 봉건제도의 틀을 벗고 자본주의 제도로 들어섰을 때도 결혼의 꿈은 여전히 감미로웠다.

일부일처제를 채택했다는 점에서 자본주의 사회는 예전의 봉건사회와는 달랐다.

그러나 사회는 자본의 축적이라는 대명제를 성취하기 위해 남자의 노동력에만 임금을 지불하고

공식적으로는 성을 결혼 내로 한정시켰기 때문에 많은 젊은이들에게

 ‘결혼’은 여전히 감미롭게 기대되었다.
그리고 남자에게 만능 비서 붙이듯 여자를 하나씩 붙여줌으로써

여자에게는 결혼의 안정감을 보장한 후에 여성의 노동력을 마음껏 착취하며

자본의 확대 재생산을 효과적으로 진행시켜 나갔던 것이다.
 

성을 금기의 항아리 안에 가둬 놓고(특히 여성에게) 철들지 않게 한 후
가부장제라는 권력을 휘둘러 나갈 때에만 결혼은 감미롭다.

그 감미로움에 취했던 자가 철든 후에는 이미 아이를 셋 가진 선녀 아닌가?

이미 세 아이의 어머니가 된 선녀는 하늘 나라의 꿈을 포기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나무꾼 신랑과 함께 사는 길 이외에 이 구차한 현실을 견딜 방법이 없다.

 

섹스를 최고의 대화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제 결혼이 더 이상 감미롭지 않은 것은 결혼과 성의 필연적 연결고리가 끊어졌기 때문이다.

지금은 ‘섹스가 최고의 대화’라는 데 많은 선남선녀들이 동의하는 시대다.

성의 금기가 풀리면서 결혼이 그 감미로운 환상을 벗고
현실로 다가오자 구세대와 신세대 사이에 갈등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어른들이 버릇처럼 되뇌이는 말이 ‘옛날엔 안 그랬는데’다.

몇 번 만나 호감을 갖게 되면 자연스럽게 손을 잡고 다니는 신세대는

결혼 혹은 약혼 전까지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그럴 수 없었던

어른들의 눈에 불안하게 보일런지도 모른다.

친구들과 조촐하게 언약식만 하고도 꽤 진한(?) 사이가 될 수 있는 신세대는

어른들 눈엔 당연히 겁없는 아이들로 비칠 것이다.

또 잠시 한눈을 팔았다는 이유로 그 진한 관계를 깨끗이 청산하는 가벼운(?) 신세대를 보고

어른들은 ‘영원히 사랑할 거야’라는 말 한마디 없이도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지지고 볶고 살았던 그들의 삶이 더욱 무게 있는 것이라 생각할지 모르겠다.
 

확실히 이혼율이 높아지고 있다.

그것도 급격하게 높아지고 있다. 신세대 커플 네 쌍 가운데 한 쌍이 이혼을 한다고 한다.

옛날 눈으로 보면 신세대는 상대적으로

너무 빨리 결혼하고 너무 빨리 헤어지는 세대라는 생각이 들 만도 하다.

그러나 그 사실이 신세대가 결혼을 겁없이 너무 쉽게 생각하는

가벼운 세대라는 가설을 검증해 주는가?

나는 그 사실이 보여주는 것은 시대가 달라졌음을 보여 주는 것일 뿐

그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 할아버지 세대만 해도 가부장적 농경사회에서 살았고

그 사회에서 결혼이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다고 인정된 성인 남녀의 선택이 아니라

가족과 가족의 관계 맺음이었다.

가부장적 사회는 가족 단위로 움직이는 사회였기 때문이다.

가족 내에서 누군가 잘못 되면 사돈을 포함하여 3대가 멸족되기도 했다.

상황이 그렇다면 결혼은 결코 두 사람의 선택일 수 없다.
 

그런데 이제는 시대가 달라졌다.

이제 결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다고 인정된 성인 남녀 두 사람의 선택이다.

아직도 결혼은 양가 집안의 만남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은 결혼을 통해 기득권에 스크럼을 짜서 오랫동안 기득권을 보호해 보려는 얄팍한 계산일 뿐

실제로 결혼이 집안간의 제도적 얽힘이기 때문은 아니다.
결혼이 스스로 성을 결정하고 삶을 결정할 수 있는 성인 남녀의 선택이 아니었던 시절에는

이별이나 이혼도 선택 사항일 수 없었지만

결혼이나 만남이 선택이 된 상황에선 이혼이나 이별도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이제 여자들은 더 이상 가사나 육아 문제에 전혀 관심이 없는 남자나

부인 따로 애인 따로 두면서도 조강지처는 버리지 않는다고 말하는 웃기는 남자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리고 더 이상 남자들도 사회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으면서

남편과 아이들에게 입 속의 혀처럼 구는 현모양처를 이상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신세대는 위기 상황에서 목숨을 걸어줄 수 있는 동지보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일을 함께 할 동반자를 더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것
신세대가 가벼워서 만남이나 사랑에 무게를 실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시대가 달라졌기 때문에 결혼이나 사랑의 내용이 달라진 것이다.

산골짜기에서 캐낸 돌과 강가에서 캐낸 돌이 다른 것처럼 말이다.
사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어쨌든 사랑은 진실하고 진지하다.

사랑하는 사이라면 누구나 같이 잠들고 같이 아침을 맞고 싶어하며,

같이 늙어가고 싶어한다.
물론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랑은 여전히 맹목적이다.

사랑하는 님을 따라 혹은 이루어지지 않은 사랑으로 인해

고무신 두짝을 나란히 벗어놓고 바다로 뛰어드는 것이 옛날식 맹목성이라면

이미 떠나간 사랑을 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잊지 못하는 사랑의 이면을 보여 주는 것이 오늘의 맹목성일 것이다.
우리의 신세대는 결코 가볍지 않다.

단지 그들은 그들 부모와는 다른 조건에 놓여 있을 뿐이다.

 

 

 

2.순결이 웃기는 이유


젊은 여성이 애청자라며 편지를 보내 왔다.

순결이라는 아주 오랜 역사를 갖는 문제를 상담하는 편지였다.

 

일부를 소개해 본다.
저는 두달 전에 약혼을 했습니다.

우리는 올 가을에 결혼할 예정입니다.
약혼자는 끔직이도 제게 잘해 줍니다.

그는 어린 왕자 같은 사람입니다.
섬세하고 부드러운 남자거든요.

요즘 저는 고민이 하나 생겼습니다.

생각해 보면 별 거 아닌데도 저는 자꾸 걸립니다.

다른게 아니라 저의 과거입니다.

대학 다닐 때 사귀던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와 4년을 사귀었고 그는 저를 무척 사랑했습니다.

저도 그를 사랑한다고 생각했구요.

그런데 아니었습니다.

우습게도 그는 부모님이 반대한다는 이유로 저를 버리고

돈이 많은 집의 딸과 결혼하여 치과를 개업했습니다.

저는 무척 놀랐고 가슴 아팠으며 그를 증오해왔습니다.
다시는 결코 남자라는 인간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때 지금의 남자가 나타났습니다.

거칠은 세상에 혼자 존재한다는 느낌을 지워주는 남자였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제 의견을 먼저 물으며 저를 보물처럼 대합니다.

신기하게도 남자에 대한 증오심이 사라졌고

헤어진 그와 결혼하지 않은 게 다행이라 여겨졌습니다.
언젠가 선생님께서 방송에서 말씀하신 대로

악연은 인연으로 가는 징검다리인 것 같습니다.

저는 과거의 악연이 지금의 인연을  만든 것 같아 감사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민이 생겼습니다.

먼젓번의 그와 사귀면서 손만 잡은게 아니거든요.
순결은 중요한게 아니라고 생각은 하지만 약혼을 하고도 결혼할 때까지는

같이 잠자리를 하지 않을 이 사람에게 정직하지 않은 것 같아 순간 순간 불안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상황은 매우 단순하지만 의외로 많은 젊은 여성들이 고민하는 문제다.

 

영웅호색과 깨진 쪽박
순결은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평가의 문제라는 점을 밝히기 위해

나는 순결을 문제 삼는 사회가 어떤 사회인지

그 역사적인 흔적부터 추적하기로 했다.

여자의 순결을 문제 삼는 곳에서 항상 문제되지 않는 것이 남자의 동정이다.
사실적 차원에서 본다면 여자의 순결과 남자의 동정은 짝개념이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여자의 순결이 강조되거나 강요되는 곳에선 하나같이

남자의 정조를 문제 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습게까지 생각한다.

남자가 성에 대해 자유로우면 영웅호색이고 여자가 성에 대해 자유로우면 깨진 쪽박이다.

유교를 통치의 이념으로 삼았던 우리의 조선시대가 그랬다.

그 시대는 여자의 정조가 곧 여자의 생명이었다.

이때 나타나는 표현이 몸을 버린다는 것이었다.

지금의 관점에서 생각해 볼 때 상당히 구역질나는 속물적인 표현이지만

그 표현은 매우 힘 있는 것이었다.
 

사실 숨이 붙어 있는 한 몸은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몸을 버린다고 표현함으로써

몸을 버렸다고 공인이 되면 사회적으로 폐기 처분되는 것이 당연했다.

정조 관념이 있는 여자, 정조 관념이 삶의 중심축인 여자를 양성했던 것이다.
 

연산군의 백모인 박씨 부인이 연산군에 의해 소위 ‘몸을 버렸기 때문에’
자살한 사건은 너무나 유명한 조선조의 야사다.

수절을 해야 할 과부가 덜컥 임신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만천하에 ‘나 수절 안했다’고 공표하게 된 사건이었으니

그때 그 여자에게는 조선조 양반공동체에서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박씨 부인은 정조를 못 지킨 것이 두려워 자결한 것이 아니다.

정조를 안 지킨 여자, 혹은 몸을 버린 여자라는

죽음의 낙인을 받았기 때문에 살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여자를 죽게 한 남자는

명분이나 힘의 게임 때문에는 죽어도 여자 때문에 죽지는 않는다.

왕이 그만한 일로 어떻게 죽는가라고 반문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왕이 아니더라도 남자는 여자로 인해서는 죽어서도 휘둘려서도 안 된다.

그것이 동서를 막론하고 봉건사회의 가부장제가 가르친 것이었다.

오히려 여자를 죽게 했으면서도 고개를 들고 당당히 살아갈 수 있는 것이 바로 남자였다.
 

병자호란 직후에 생긴 ‘환향녀’라는 이름을 기억하나?

전쟁중에 우리의 딸들이 청나라로 포로로 끌려가 온갖 수치를 당했다.

인조대왕이 삼전도로 끌려가 청의 누루하치에게 이마에 피가 나도록 절을 하면서

굴욕적인 사죄를 하고 청을 섬기겠다고 약속한 후 전쟁이 끝났다.

전쟁이 끝나자 청은 그동안 그들이 겁탈해왔던 우리의 딸들을 우리나라로 돌려보낸 것이다.

이들이 바로 돌아온 여자들, 환향녀다.
 

그런데 여자에게 정조를 목숨이라고 가르친 유교 사회가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손가락질과 돌팔매질을 한다.

더러운 여자라고.

가부장적 사회에서 가부장들이 무력해 수모를 당하면서도 억울한 세월을 견뎌온

우리의 여인들을 남자들의 그 알량한 권위로 다시 한번 내쫓은 것이다.

돌아온 여자들은 고향이나 집에서 자기 자리가 없었다.

그때 여자들은 대부분 자결하고 자결하지 않은 여자들은

환향녀라고 손가락질 당하면서 질긴 목숨을 이어간다.

이때부터 환향녀는 지독한 욕이 된다.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으면서 그저 힘이 없어 이마에 피가 맺히도록 사죄하고,

힘 앞에서 굴욕적으로 충성을 맹세한 억울한 왕과 그왕을 섬겼던 억울한 남자들이

이제는 똑같은 힘의 논리로 사회적 약자인 여자의 피눈물을 요구할 때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다.

여기서 힘이 없으면 망한다는 약육강식의 논리를 다시 확인해야 하는가?

 

가슴 떨리는 사랑에도 권력이

남녀 사이에도 권력(힘의 논리)이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 철학자는 미셸 푸코였다.

남녀관계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른 것이 사랑의 관계인데

그 사랑의 관계가 권력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이때 권력이란 정치 권력이라기보다 힘이 관철되는 특정한 방식이다.

사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 생각이 낯선 생각이 아니라는 데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남자는 사랑하는 사람, 여자는 사랑받는 사람이라는 논리가 아직도 팽배하다.

21세기를 바라보는 시점에서도 “저와 결혼해 주시겠어요?‘라든가

”매일 저와 함께 아침을 맞이하지 않으시겠습니까?“하는 식의 말은

여자의 말이 아니라 남자의 말이다.

얌전히 고개를 끄덕인다거나

”당신의 사랑을 받아들이겠어요“라고 말하거나

아니면 남자가 내민 손에 자신의 손을 가만히 올려놓고

미소를 보내는 것은 아무래도 여자에게 어울린다.
사랑을 청하는 남자가 어쩌면 한 번뿐인 값비싼 순결을 바쳐도 될 만한
남자인지를 탐색 할 능력이 없는 여자는 손해를 감내 할 수 밖에 없다.

순결을 바치고 나면 엄청 세일을 해야 할 ‘헌 여자’가 될고 마는 여자는

남자가 성실한지, 책임감이 강한지를 살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자가 순결을 바칠 때 그 순결을 거두는 남자는

힘 있고 성실한 남자여야 여자 입장에서는 안전한 것이다.
 

나는 그런 말이나 행동이 보여 주는 진지함에도 불구하고 구역질이 난다.
아니, 그런 행위가 진지하면 진지 할 수록 난감하다.

사실 몸이란 더럽혀 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순결이란 물건 상납하듯 바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누가 힘이 있고 누가 약자인지를 알려 주는 권력 관계의 바로미터 일 뿐이다.
사실 강자는 거두고 약자는 바치고 하는 것은 오래된 전통이다.

바치는 자는 언제나 약자다.

어디 왕이 신하에게 바치는 것이 있었나?

강대국이 약소국에게 바치는 것이 있었나?

신하가 왕에게 충성을 바치듯 여자는 남자에게 순결을 바침으로써

당신의 세계에 속한 사람임을 끊임없이 드러내야 한다.

대칭이어야 할 관계에서 한쪽에 일방적으로 의무가 강요되거나 강조 될 때

존재하는 것은 사랑이나 평등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권력 일 뿐이다.
 

중세의 영주에게는 초야권이 있었다.

장원에 속한 농노가 결혼을 하기 위해선 장원의 주인인 영주의 허가가 필요했다.

영주는 농노의 결혼을 허략하는 대가로 초야권을 가지게 된 것이다.

초야권이란 영주가 농노의 여자와 첫날밤을 지낼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그런 논리가 왜 존재했나? 이유는 간단하다.

장원의 주인인 영주가 농노와 결혼할 여자가 처녀인지 아닌지를 심판해 주겠다는 거였다.
 

영주와 잔 여자는 물론 처녀로 인정되었고 처녀로 인정된 여자는 처녀와 다를 바 없었다.

모든 권력의 역학관계가 그렇듯 그것도 주인이 누구인지의 게임이었지

사실을 밝히는 게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농노의 처가 영주의 아이를 임신할 수도 있지 않았나!

그러나 그 아이가 농노의 아이로 자라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장원은 모두 영주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농노의 처가 이웃 농노와 바람이 나 아이를 낳을 경우

자기의 처를 영주에게 바친 그 농노는 생사를 걸고 아이의 아버지를 밝힐 것이다.

농노가 모셔야 하는 것은 영주이지 다른 농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농노가 영주에게 지조를 지켜야 하고 여자는 남편에게 순결을 지켜야 했던 것은

권력이 생활양식에 자연스럽게 실현된 형태인 것이다.
 

순결이나 정조는 물건이 아니다.

가부장 사회가 그것을 그세계에 속하는 대가로 지불해야 하는

하나뿐인 물건으로 취급해 왔기 때문에 순결을 바친 여자는

이제 다른 남자들이 거들 떠보지 않는 ‘따먹힌’ 여자가 되었다.

한 번 따먹힌 열매는 이미 존재하지 않듯이 따먹힌 여자는 끝난 여자가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순결이나 정조가 여자를 한 남자에게 묶어 두기위한

사회적 전략이었음을 똑똑히 보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그래야 따먹는 자 - 먹히는 자의 주객 구도에서

동반자라는 평등한 인격적 관계로 전환하는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다.

인격적이지 않은 건강한 관계는 없다.

그러나 전망은 어둡지 않다.

이제 사회는 ‘순결이나 정조는 물건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은 가부장제로부터 탈출 해가고 있다.

 

모든 사랑은 첫사랑이다
모든 사랑은  첫사랑이다.

신선함으로 다가오는 사랑은 사랑속에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힘이 있다.

그렇다면 인간을 순결하게 하는 것은 물건 취급 당한 ‘순결’이 아니라 사랑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지조를 지킨다.

그때 지조는 지키기가 강요되는 억압의 메커니즘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지키고자 하는 자연스런 힘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닐까?
 

그러면 다시 편지로 돌아가서 편지의 주인공은 어떻게 해야할까?
사랑 속에서 다시  태어난 주인공은 지금의 남자에게 과거 얘기를 할 필요가 없다.

그 이야기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아픈 과거는 이미 현실 속에 녹아 이 주인공이 새로운 사람을 알아보고

보다 넉넉하게, 보다 관대하게 사랑하는 힘의 밑천이 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과거는 걸림돌이 아니라 새로운 관계 형성의 거름이다.

이미 거름이 되어 현실의 힘이 된 과거를 굳이 끄집어낼 필요가 있을까?
 

과거를 얘기하지 않는 것이 지금의 사람에게 거짓 태도를 보이는 거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거짓이 아니라 어쩌면 가부장 문화의 때를 완전히 벗어버리지 못했을

상대방이 떠 안을 수 없는 짐을 떠넘기지 않는 것일 뿐이다.
그때 과거를 얘기하지 않는 것은 거짓의 문제가 아니라 지혜인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런 얘기를 해야 할 상황이 온다 해도

그런 문제가 지금의 소중한 내 삶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이유가 없다는 식으로 웃고 넘겨야 한다.

절대 심각해져서도, 심각해질 이유도 없다.

 

3.목욕탕집 둘째 며느리가 슬펐던 이유

사랑에 매달려 사는 사람은 가볍다.

물론 사랑이 그를 지지해 주는 한에서다.
그때 그 사람은 연못 위를 지지해 주는 한에서다.

그때 그 사람은 연못위를 통통 튀는 조약돌같다. 

가벼워서 환한 얼굴, 그 얼굴은 존재의 무게에 짓눌려 사는

일반적인 삶을 환하게 비취줄 수는 없어도 그 삶에 어떤 미소를 준다. 
그러나 만일 사랑이 그를 지지해 주지 않는다면.... 그는 노래를 부른다.


‘사랑은 없다’고.

그러나 그가 “사랑은 없다”고 말할 때 우리는 본다.

그가 기대하는 사랑을.
그가 시를 읊는다.

사랑은 없다고.

그러나 그것이 사랑이 그를 버렸을 때의 절망감이라면

그 절규는 분명 사랑의 이면이다.
 

여기 사랑의 노래, 허무의 노래를 부르는 여자가 있다.

그 여자(KBS 목욕탕집 남자들의 윤여정)는 왕자에게 구원받은 신데렐라처럼

평생을 시처럼 음악처럼 우아한 사랑을 하며 살게 될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멋있는 왕자여야 할 남편은 펑퍼짐한 아줌마가 되지 못하는 아내를 못미더워하고

그래서 부부의 불협화음은 끊일 날이 없다.

물론 그 여자가 나이 오십에 늦동이를 임신하기 전의 일이다.
 

여자임이 자랑스러운 그 여자는 쉰이 가까워도 모자를 쓰고 다니는 귀여운 여자다.

그러나 그 여자가 정작 사랑받기를 갈구하는 남편은 냉담하다.

부부 침실 영하 50도라나.
고상하고 우아하게 살기를 원하는 그 여자는 분위기 있게 촛불을 켜는 것을 좋아하고

가끔은 남편과 함께 연극도 보고 음악회도 다니면서 그 의미를 나누고 싶어한다.

하지만 일상이란 그저 일상이어야 한다고 믿는 남편은 그런 생활에는 관심이 없다.

그의 눈에는 언제나 소녀이기를 꿈꾸는 아내가 유난스러워 그만하라고 짜증이나 내기가 일쑤다.
그 여자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늘 하늘 청초하기만 하던 청춘은 어느덧 가고

아무리 거울을 보아도 얼굴에선 세월의 흔적을 지울 수 없는데,
남편은 점차 멀어져만 가고 금이야 옥이야 키운 자식은 결혼해서 제 식구 편드느라

사사건건 대들 때, 아무도 제 편이 없다고 느끼는 여인은 슬프다.

그때 그 오십에 가까운 여인은 울고 싶을 것이다.

목 놓아 울고 또 울고 싶을 것이다.
목 놓아 울지 않으려고 그 여자는 시를 읊는다.

시에 자신의 마음을 싣는다.
 

그 여자는 혼자 있을 때 시를 읊지 않는다.

언제나 그 여자의 시 읊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 때 시를 읊는다.

대체적으로 그 상대방은 냉담한 그 여자의 남편(남성훈 분)이다.

그것은 그 여자를 상처내고 있는 사람이 누군가를 드러내 준다.

동시에 그 여자의 삶의 터전이 어디인가도 보여 준다.

여자는 남편을 사랑하지만 남편은 나이가 들어서도 소녀 같은 아내가 부담스러워 미칠 지경이다.
그 갈등 상황에 여자의 시 읊기가 있고 그 갈등 때문에 여자에게 시 읊기는 점점 대단해진다.

마지막 보루처럼. 예민한 그 여자의 시 읊기는 그 여자의 유일한 탈출구다.

그 여자는 시 읊기를 양보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의 상처를 달랜다.

 

시 읊는 아내가 징그러운 남자
물론 우리는 그 남편도 이해할 수는 있다.

남편이 기대하는 것은 나이에 걸맞는 변화 혹은 나이에 걸맞는 삶이다.

남편은 도망치고 싶어한다.

나이가 들어서도 연극을 좋아하며 시를 사랑하고 사랑한다는 말을 주고받고 싶어하는 아내에게서.

그래서 그 남자는 징그러워 한다.

할머니라고 불러줄 손자가 있는 여자가 시나 읊으면서 자신을 바라봐 주기를 바랄 때

그 여자가 감성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싶어하는 그 곳에서 그 남자는 확인한다.

세월의 낙인이 없이 유치의 극치인 아내를.
 

그 남자는 시를 모르는 삶을 경멸하는 고급한 그녀의 순수함(?)을

나이의 무게가 없어서 철이 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할 수 밖에 없다.

그 남자의 눈엔 그 여자의 시 읊기가 살아내기 위한 실존적 선택이라기보다

아무도 자신을 돌봐 주지 않는다는 투정어린 감상으로만 보인다.

그래서 그 남자는 바란다.

그 여자 스스로가 그것을 깨달아 주기를.
 

정말 그럴까?

그 여자는 사랑의 노래, 허무의 노래만을 불렀지 자신이 부르는 노래가

한갖 투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그 여자는 구원받을 수 없는 나르시스트인가?
연못 속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와 사랑에 빠진 나르시스는 어떤 점에서는 자기애의 표상이다.

그 나르시스를 부정적으로 말하려고 할때 우리는 강조한다.
자기 속에 갇혀 있는 자기애는 사랑이 아니라고.

사랑이란 자기 세계를 뛰쳐나와 상대의 세계에 도달함으로써

비로소 자기의 세계가 충만해지는 어떤 것이라고.
 

분명 그 여자, 이웃에 대한 배려가 힘든 것처럼 보이는 그 여자는 나르시스트로 드러나 있다.

페미니스트인 시조카가 독신주의를 선포할 때
“지가 박사야, 교수야”라고 말해 페미니스트의 어머니인 동서의 화를 자극하기도 하고,

생각 없이 툭툭 말을 내뱉어 식구들을 당황하게 하는 데 천부적이다.
자기 감정에 예민한 그 여자는 남의 감정에 무딘 탓에 자기의 세계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그 여자를 나르시스트로 드러낸 것은

그 여자가 처한 심각한 상황을 코믹하게 처리함으로써

웃음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작가의 능력일 뿐

그 여자가 어려운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나르시스트의 가면을 거둬 보면 그 여자는 심각한 상황 속에 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남편과 그 남편의 사랑을 갈구하지만 아니,

남편과 일상에서 잏어나는 자잘한 일들을 나누고 싶어하지만

그 아내의 작은 꿈을 결코 받아들여 주지 않는 남편.

그렇기 때문에 아내는 더더욱 시 읊기를 중단할 수 없다.
어부는 물고기를 바라고 살고, 농부는 가을을 바라고 살고...

나는 무엇을 바라고 사나.
 

얼마나 허무한 상황인가?

그 여자는 허무해서 죽겠다고 헐떡대면서 유일한 탈출구로 시를 읊어댄다.

허무한 상황에서 웃게 만드는 여자
그러나 그 상황은 좀처럼 허무하지도, 아프지도 않고 그냥 웃음만을 만들어낸다.

분명히 슬픈 상황인데도 슬퍼 보이지 않는 여자가 그 여자다.

그 여자가 심각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지쳐 보이지 않으며

오히려 우리를 웃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역시 작가의 역량이다.
웃게 하기 위해 김수현은 그 여자를 푼수로,

그 여자의 남자를 바람을 안 피우는 성실한 남자로 만들었다.

그 여자를 푼수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그 여자의 허무한 상황을 감춰내는 것이다.

그러나 그 여자는 허무의 노래를 부르고 싶어하는 50대 중년의 표상이어야 하기에

그 여자의 남자로 하여금 그 여자를 받아주지 못하게 갈등을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여자는 일상을 나누기 위해 남편과 대화를 하고 싶어하고

부부 사이에 무슨 말이 필요하냐는 남편은 여자의 말을 수다로 규정하고 들어 주지 않는다.

갈등은 자연스럽지만 의도된 것이다.

그 갈등 상황에서 여자는 추락하지 않기 위해 꿈을 꾼다.
언제나 화사한 꿈을 꾸는 그 여자는 질척거리는 삶 속에서

치고 받고 경쟁해야 하는 무리들 속에 들어와 있지 않을 뿐 아니라

그런 생활인들의 비속함을 ‘동물’로 비하하면서 계속 인간(?)의 꿈을 꾼다.

그러나 그녀의 꿈의 대상이 ‘동물’인 한 사람을 향해 가볍게 날고자 하는

그녀의 날개는 땅으로 무겁게 추락한다.

이미 더러워진 손으로 진흙창에 박힌 날개를 털어낼 때

그 여자의 날개는 더욱 무거워지고 더 이상 날지 못하는 날개를 가지고 그녀는 헛꿈을 꾼다.

시를 읊는다. 날지 못하는 날개를 가지고 날기를 꿈꾸는 가련한 새야....

그녀가 동물이라고 비하할 성싶은 사람이 웃는 공간에서 그녀는 심각하다.

정말 인생은 이렇듯 허무한가 하고.

 

어머니의 하늘

나는 우리 어머니가 허무하다고 하는 소리를, 아니, 표정을 가끔씩 보았다.
내가 그 여자를 그냥 지나치지 않은 것은

그 여자는 나르시스트라는 가면 속에 가리워져 있기는 해도

7,80년대를 살아온 우리 어머니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우리 어머니와 그 여자의 차이는 그 여자는 푼수이고 우리 어머니는 심각하다는 것뿐이다.
내가 어렸을 적 어머니는 가끔 하늘을 보았다.

감나무에 열린 감을 보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어머니가 보고 있는 것이 감나무 사이 너머 하늘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용하고 무거운 어머니의 얼굴을 훔쳐볼 때면 막연한 두려움이 나를 감쌌다.
그런 날이면 난 더욱 명랑한 척 어머니의 치마꼬리를 따라다녔다.

어머니의 하늘은 내겐 하나의 벽이었다.
 

어머니는 우리들이 웃는 것을 좋아했다.

사랑이 없는 것은 살아갈 이유가 없는 거라고 푼수 같은 내 동생이 선수를 치면

어머니는 우리들의 성장에 대견해 하면서도 말 없이 미소만 보냈다.

그 미소가 사랑하는 법 대신에 살아남는 법을 배워야 했던

어머니의 삶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았다.
어머니는 시를 읊지는 않으셨다.

하지만 시가 상처 속에서 핀 꽃이라면 우리 어머니의 삶은 하나의  시였다.

나는 목욕탕집 둘째 며느리를 보면서 우리 어머니와 모든 중년 여성의 허무를 생각하곤 한다.

그 허무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허무가 진지하게 묘사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따분하게 받아들일 것이다.
그래서 작가 김수현은 그 그림을 코믹하게 그려내는 전략을 썼고

그것을 통해 중년 여성의 허무를 따분하지 않게 전달시키지 않았나 싶다.

 

 

4.  섹스가 운동이 된 이유
 

성의 해방 혹은 문화적 진보를 표방하며 각종 포르노들이 우리를 유혹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영화, 비디오, 만화 등에 제한된 것이 아니라

연극, 가요, 무용, 출판에 이르기까지 두루 두루 나타나고 있다.
세계적인 팝가수인 마돈나는 아예 “섹스는 자유와 힘의 원천”이라고 선언하면서

남성 지배 사회의 위선을 ‘섹스 어필’로 대응하고 있다고 평가된다.

지난 해까지 <미란다><마지막 시도>를 계기로 우리 연극계에 불어닥친

예술이냐, 외설이냐의 논쟁은 아직도 그 열기가 가시지 않고 있다.
논쟁이 무의미한 <젓소 부인>시리즈는 너무도 유명하다.

에로티시즘을 주제로 하는 많은 작품들이 발표되었으며

그 가운데는 단순히 외설로 평가할 수 없는 작품들이 상당수 끼여 있다.

 

 “섹스는 운동이잖아요”
에로티시즘을 다룬 영화 중에서 내가 비교적 충격적으로 본 영화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와 <데미지>였다.

말론 브란도와 마리아 슈나이더가 주연한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를 보았나?

사실 나는 이 영화들에 대해, 현대인의 상습적으로 앓고 있는 고독이라는 이름의 병을

도덕도 윤리도 뛰어넘는 섹스라는 원초적 행위로 풀어내고 있다는 상습적인 평에는 관심이 없다.

흥행을 위해 섹스에 끼워져 싸구려로 팔리는 고독은 어색 할 뿐더러 천박하기까지 하다.
 

“나는 섹스를 좋아해요. 건강한 운동이잖아요. 밥맛도 생기고.”
잔느 역의 마리아 슈나이더가 이렇게 말할 때 나는 묘한 충격을 받았다.

그 충격의 실체가 무엇이었을까는 한참 후에야 알았다.

‘성’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달라진 것이다.

옛날의 ‘성’이 생명을 잉태하는 신성하고 신비한 생명력으로 금기시된 것이었다면

요즘의 ‘성’은 쾌락과 운동이라는 오락으로 개방된 것이다.

사실 잔느의 문장은 성에서 신비의 베일을 거둬낸 이 시대의 성 풍속도 이외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그 신비의 베일은 확실히 금기에 근거해 있는 윤리적 규범들이다.

그 금기들이 깨어질 때 그 금기들에 의해 불륜으로 규정된 행위들이 원초적 본능의 이름으로

혹은 본능의 해방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것은 논리적이다.

이때 때론 인생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실존적 변명과 함께

아들의 연인과의 정사가 가능하며(데미지) 진보의 이름으로 동성애 혹은

양성애가 정당화된다(크라잉게임, 패왕별희).
비교적 영화의 요소를 갖춘 이런 영화 이외에도(사실 내가 안 본 영화가 더 많을 것이다.

그러나 안 본 영화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많은 포르노 영화와 만화가 출시되어

이제 성에 눈을 뜨고자 하는 청소년을 유혹하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 사회의 성 관념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가까운 일본에서는 매춘의 방법이나 성적 자극의 방법을 가르쳐 주는 책이

 1백만 부 이상이나 팔려 나갔다고 한다.

공식, 비공식 채널을 통해 그런 책들이 우리 사회에 상륙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한 편에서는 이런 저질 문화의 유입을 원천 봉쇄해야 한다고 한다.

또 다른 한 편에선 아예 완전 자율화를 시행해서

관람자 혹은 독서하는 사람 자신이 판단하게 해야 한다고 한다.

완전히 풀어 놓으면 관심이 시들해져 굳이 보려 하지 않는다나!

미국에서 폴 버호벤 감독의 <쇼걸>이 흥행에 실패한 것을 보면

말초적 신경을 건드리는 작품은 어쩌면 금기시 되었을 때만 보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성 윤리가 급속도로 변하는 것이 정말로 저질 만화, 저질 포르노

혹은 에로티시즘을 다룬 영화의 영향인가?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한 개인이 특정한 만화나 비디오 혹은 영화에 묻혀 살 때

그런 것들이 그 개인에게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 편안한 상태에서

비디오나 영화를 볼 때 그것들은 단순한 오락이지만
구체적인 상황에 직면해서 그 기억들은 모방사건을 만드는 무기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성윤리에 대한 변화의 원인을 사회 전체적으로 규명하지 않고

비디오나 만화에서 찾는 것은 고리키의 <어머니>가

러시아 혁명의 원인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허무한 것이다.

 

생식이 절박하지 않는 사회
 '성’을 둘러싼 금기가 무너지고 마침내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는 명제를 무슨 선언처럼

강조할 수 있게 된 것은 우리 사회에서 기존의 ‘성’에 대한 담론을 유도함으로써

얻어낼 수 있는 이익이 많아졌기 때문이라고 보야야 한다.
기존의 사회에서 성에 관한 금기 중 강력한 금기는 동성연애였다.

그런데 요즘들어 그 금기까지 빠른 속도로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나는 가끔씩 학생들에게 동성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하는 질문을 받는다.

그에 대해 한 번도 진지하게 검토해 본 적이 없는 나는 반대할 이유가 없다는

애매모호한 말로 상황을 넘기지만 정말로 반대할 만한 이유가 없다는 답밖에 가진 게 없다.

생각해 보면 동성애는 생식이 거세된 성 이외에 다름이 아니다.
 

현대 사회는 더 이상 종족 보존의 ‘본능’이라는 어마 어마한 권위로

생식을 절박하게 만드는 사회는 아니다.

생식이 사회적 생존의 문제에서 제외된 것이다.
현대 사회는 이미 성에서 생식을 떠나보냈다.

그것은 해방의 이름이었으나 그것이 가능한 것은 생식을 통한

사회적 노동력의 창출이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하는 세상이 된 것이다.

닭보다 먼저 일어나 부엉이보다 늦게 잠들어야 가족과 함께 먹고 살 수 있었던

농경사회에서 한 아이의 출생은 고달픈 삶을 나눠갈 중요한 원동력이었다.
남아의 탄생이 여아의 탄생보다 오만 배쯤 기쁜 것은

여자의 노동역이 남자의 노동력보다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가부장적 사회에서 여자의 노동력은

남자의 집으로 출가함으로 인해 빼앗길 노동력이었기 때문이다.
사회가 변했다.

인간의 노동력이 바로 사회적 생산력으로 연결되지 않는 사회는

가족의 강한 연대를 요구하지 않게 된다.

가족이 여지껏 그가 담당했던 사회적 노동력의 생산을 하지 않아도 되었을 때

생식은 개인에게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 되었다.

물론 가족의 연대가 느슨해진 상황에서 자녀는 부모의 노후대책으로 연결되지도 않는다.

이때 성은 확실히 생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생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성은 남자에게 뿐 아니라

여자에게도 쾌락을 향해 질주해도 좋은 것이 되었다.

그리고 동성애 논의를 양성화했다. 생각해 보라.
성에서 생식이 문제되지 않을 경우 무엇이 남는지. 사랑이나 쾌락이 남는다.
만일 성의 목적이 쾌락일 뿐이라면 인위적으로 생식을 거세한

남녀간의 성이나 생식이 자연적으로 거세된 동성애는 다를 것이 없게 된다.
동성애의 논의가 활발해지고 예술/외설 시비가 대중화된 것은

갑자기 성 문제가 절실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성을 둘러싼 사회적 담론의 상황이 조금씩 바뀌었기 때문이다.
 

철학도인 내가 그래도 늘 속수무책인 체로 받는 질문이

바람직한 사랑의 윤리 혹은 성 윤리가 무엇이냐는 질문이다.

그 질문이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백년 가약해야 한다’고 강요하는 가부장제가

자신의 품을 떠나고 있는 사람들을 탕아로 규정하기 위한 것이건, 아니면‘사랑은 감정이다.

순간적인 감정에 충실하지 않는 것은 허위의식’이라며 순간적인 쾌락을 옹호하려는 것이건

사회적 존재를 무시한 순수한 의식의 윤리를 묻는 물음은 그 순수성만큼이나 의미가 없다.
가부장제라는 권위에 도전하지만 쾌락 혹은 순각적인 사랑이 주제인 영화를 볼 때

나는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다.

쾌락을 억압해 온 이 폭력적이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가부장적 권위를 강요해 온 제도가

굴욕적이라면 아무리 해방의 띠를 둘렸어도 사랑이 없는 쾌락은 허무해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본능의 해방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쾌락을 향한 욕망’이 쾌락을 매개로

자신을 확대 재생산하려 하는 자본에 의해 점점 더 거품처럼 부풀어 오를 때 나는 슬프다.

<젖소부인>시리즈가 돌아다니고 그 비슷한 영화들이 성의 해방을 부르짖으며

우리들 앞에 노출되어 있을 때 나는 문명의 진보 앞에서 문화의 퇴보를 생각한다.

호텔, 레저 산업 등 고도의 소비문화에서부터 각종 비디오와 출판물에 이르기까지

욕망의 해방을 내세워 장사를 하는 문화는 이윤이 목적인 산업이지

살아 숨쉬는 생명의 문화는 아니기 때문이다.
쾌락을 억압해 온 성이 폭력적이라면 사랑이 근원적으로 거세된 쾌락은 절망스럽다.

무엇보다도 ‘쾌락이 사랑으로부터 떠나 있으면 우리가 마음 붙일 곳은 어디인가’를

깊은 숨을 쉬며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내가 닻을 내리고 싶은 곳은 말이 통하고 기가 통하는 인간의 마음이지

가부장제라는 거대한 권위체계도, 쾌락이라는 길들여진 욕망도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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