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강안여자

10. 함정 (2)

오늘의 쉼터 2010. 10. 15. 17:57

10. 함정 (2)

 

 

 

 

 

 

 

  "나주댁."

 

 차분한 목소리로 부른 장미가 담배 연기를 빨아들이고 나서

길게 뱉는 동안 수화구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누구냐고 묻지도 않고 전화를 끊지도 않는다. 장미는 다시 불렀다.

 

 "나주댁, 나예요."

 "그래."

 

 나주댁의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긴장한 것이다.

쓴웃음을 지은 장미가 다시 담배 연기를 마셨다가 뱉고 물었다.

 

 "어때요? 대전, 살만해요?"

 "……."

 "거기 길 건너편에 있는 서울마트는 물건값이 좀 비싸던데.

사거리 하나만 건너면 시장 아녜요? 거길 다니지 왜."

 "너."

 

 하고는 나주댁이 다시 말을 끊었으므로 장미가 입을 열었다.

 

 "이 여우같은 년."

 

 그러나 목소리는 가볍고 밝아서 욕 같지 않았다.

한국말을 모르는 외국인이 들으면 인사했다고 해도 믿을 것이다.

 

 "너, 내가 맘만 먹으면 지금 당장이라도 널 죽일 수 있어."

 "아니, 이년이."

 

 하고 나주댁이 겨우 말대답을 했지만 놀란 것은 분명했다.

전화를 끊지 못하는 것이 그 증거였다.

겁이 나면 전화를 못끊는다. 차라리 붙들고 있는 것이 덜 무서운 것이다.

 

 "이년, 나한테 살인 누명을 뒤집어 씌우고나서 금고를 열고 CD를 다 꺼내갔지?

    너, 네 계획대로 될 것 같으냐?"

 "아니, 이년 봐. 나한테 뒤집어 씌우는 것 좀 봐. 아이구, 기가 막혀."

 

 번쩍 정신이 든 나주댁이 악을 썼다.

통화 내역이 녹음되고 있을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이년이 나한테 누명을 씌우네!"

 

 나주댁이 다시 악을 썼을 때 장미가 말했다.

 

 "네가 지금 월세로 들어가 있는 그 연립주택에서 넌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어.

    나가면 너도 죽어."

 

 나주댁은 가만 있었고 장미의 말이 이어졌다.

 

 "아무 인연도 없는 대전으로 도망가 있으면 내가 못찾을 것 같았니?

    나한테 몽땅 뒤집어 씌우고 말야."

 

 "아이구, 기가 막혀."

 

 나주댁이 다시 기를 썼을 때 장미가 차근차근 말했다.

 

 "어떻게 할 거야? 네가 훔쳐간 CD 절반을 내놓을 거냐?

    아니면 지금 당장 납치당해서 다 뺏길래?"

 

 "이년이."

 

 "베란다 밖을 내다봐, 이년아."

 

 장미가 이제는 잇사이로 말했다.

 

 "길 건너편에 승합차 한 대가 세워져 있을 거다.

    그리고 연립주택 뒷문에도. 네 년을 잡으려고 내가 여섯 명을 고용했다."

 

 "……."

 

 "조 회장 별장 금고에서 훔쳐간 CD는 그대로 갖고 있겠지?

    지금 바꿨다간 들통날 테니까 시간 지나기를 기다리고 있겠지."

 

 "기가 막혀."

 

 했지만 나주댁의 목소리는 약했고 끝이 떨렸다.

그때 장미의 말이 이어졌다.

 

 "어쩔래? 경찰 불러도 돼. 내가 협박을 했다고 하라구.

    CD 내놓으라구 했다는 이야기도 다 하고.

    나도 경찰에다 진술을 녹음해서 보낼 테니까."

 

 "……."

 

 "그럼 경찰이 어쨌든 CD는 수색하게 되겠지.

    네가 살인 누명을 나한테 뒤집어 씌운 증거는 못찾겠지만 CD는 수색하게 될거야."

 

 "……."

 

 "아마 네가 훔쳐간 CD는 영영 팔아먹을 수 없게 될걸? 경찰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말야."

 

 "……."

 

 "10분간 생각할 여유를 주겠어. 이년아."

 

 그리고는 장미가 코웃음을 쳤다.

 

 "베란다 밖을 내다보면서 궁리해 봐.

   널 찾느라고 나도 돈 꽤나 들었으니까.

   내가 널 놓칠것 같으냐?"

 

 장미는 핸드폰의 덮개를 닫았다.

 

 

 

 

 조 회장 살인 사건은 아직 수사중이어서 나주댁은 지난주에 수사본부에 출두해서 추가 증언을 했다.

그랬다가 기다리고 있던 용역회사 직원들한테 미행을 당한 것이다.

나주댁은 나름대로 열심히 제 거처를 숨겼고 날쌔게 움직였지만 숨어 있을 수만은 없는 입장이었다.

살인 사건의 증인 신분이 되어 있는 터라 수사본부 앞에서 진을 치고 기다리는 추적자를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경찰이 뭐가 이쁘다고 나주댁을 봐주겠는가?

원칙대로 부르고 조사하면 되는 것이다.

정확하게 10분이 지났을 때 장미는 다시 전화를 했다.

 나주댁이 새로 장만한 핸드폰에 신호가 갔고 신호음이 세 번 울렸을 때 응답했다.

 

 "그래."

 "어떻게 할거야?"

 장미가 묻자 나주댁이 2초쯤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너, 내가 뭘 갖고 있다는거야? CD?"

 숨을 들여마신 장미가 가만 있었고 나주댁이 다시 물었다.

 "CD가 뭐야?"

 "전화 끊어."

 장미가 웃음띤 목소리로 말했지만 눈은 치켜 뜨고 있었다.

 "널 데려 와야겠다."

 "살인에다가 공갈 협박, 그리고 이제는 납치까지 하려구?"

 나주댁의 목소리에도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이 어린 것이 별짓 다하네. 이년아, 내가 벌써 경찰에 신고를 했어.

    어디, 어떤 놈이 여길 오는가 보자."

 "……."

 "그래, 진술을 녹음해서 경찰에다 넘겨라.

    이년이 살인 강도죄를 넘기려고 별 수작을 다 부리는구먼."

 "……."

 "이년아, 그렇게 살면 못써. 어린 것이 그래,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니?

    회장님을 그렇게 죽이고 강도짓을 해?"

 

 심호흡을 한 장미는 핸드폰의 덮개를 닫았다.

녹음하고 있는 것이다.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다.

장미는 손가방 안에서 다른 핸드폰을 집어들고 덮개를 열었다.

버튼을 누르자 곧 연결이 되었다.

 

 "네."

 

 굵은 남자 목소리. 장미가 짧게 말했다.

 

 "경찰에 신고했대요."

 "알았습니다. 그럼."

 

 전화가 끊겼으므로 장미는 창밖을 보았다.

나주댁의 월세집은 지붕만 보였다.

직선 거리는 50m 가량이지만 가려면 골목을 두 개나 건너 다시 꼬부라져야 한다.

이곳은 오피스텔 12층이어서 거리는 다 보였다.

나주댁은 문을 걸어 잠그고 경찰을 기다릴 것이었다.

물론 경찰에 녹음 테이프를 들려주고 신변 보호를 요청할 것이었다.

그때 핸드폰이 진동을 했으므로 장미는 시선을 내렸다.

덮개를 연 장미가 핸드폰을 귀에 붙였을때 사내가 말했다.

 

 "준비되었습니다. 지금 현관 앞입니다."

 "지금 나가요."

 

 자리에서 일어선 장미가 주위를 둘러보고는 발을 떼었다.

커피숍에는 손님이 장미 한 사람 뿐이었다.

오후 3시경이어서 어중간한 시간이기도 했지만 이곳은 밤에 카페식으로

운영되는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장미가 오피스텔 현관으로 나왔을 때 승용차 한 대가 옆으로 다가와 섰다.

시선이 마주친 운전사가 눈 인사를 했다.

장미가 뒷자리에 오르자 차는 금방 출발했다.

 

 "감시를 두 명 붙여 놓았으니까 놓치지는 않을 겁니다."

 운전사가 앞쪽을 향한채 말했다.

 "하지만 당분간은 접근하기 힘들게 되었는데요.

    어쨌든 경찰 보호를 받게 될 테니까 말입니다." 

 

 사내 이름은 이용구. 용역회사 사장으로 미행, 도청 전문이라고

광고까지 내면서 사업을 해오다가 이번에 장미의 일을 맡게 되었다.

이용구는 지금 장미가 어떤 상황인지를 안다.

장미가 다 털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주댁한테서 CD를 받으면 반씩 나누기로 했다.

이용구는 현재 장미의 유일한 보호자인 셈이다.

 

 

 

 

편의점 벽에 걸린 벽시계가 오후 2시 3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얘, 그만 나가자."

 하고 이은정이 다시 재촉했을 때 노래가 울렸다. 요즘 유행되는 '가지마'였다.

이은정의 핸드폰 착신 음악이다. 이은정이 서둘러 가방 안에 든 핸드폰을 꺼내

먼저 발신자 번호부터 보더니 머리를 갸웃했다.

그러더니 곧 귀에 붙인다.

 

 "여보세요."

 

 그러더니 얼굴을 활짝 펴고 웃는다.

 

 "어머, 언니."

 

 이은정이 귀에서 뗀 핸드폰을 장선에게 내밀었다.

 

 "언니야."

 

 기다리고 있던 장선이 핸드폰을 받아 들었다.

2시 정각에 은정의 핸드폰으로 연락을 해오기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언니."

 

 "그래, 별 일 없지?"

 

 장미가 버릇처럼 먼저 그렇게 묻는다.

머리를 든 장선이 창밖의 거리를 보았다.

오늘은 짧은 머리의 형사로 바뀌어 있었다.

사흘 전 강한과 영등포에서 달아난 후부터 감시가 더 강화되었지만 대놓고 나무라지는 않았다.

짧은 머리 형사는 이쪽에 등을 보인 채 편의점 문옆에 서 있었는데 조금 전에는 안에 들어와

훑어보고 나갔다.

손님이 그를 포함해서 넷뿐인터라 둘러볼 것이 없는데도 시위를 한 것이다.

 

 "엄마는?"

 

 장미가 묻자 장선이 불쑥 대답했다.

 

 "밥 잘 먹고 똥 잘 싸."

 

 "선아."

 

 가라앉은 목소리로 장미가 불렀으므로 장선은 아랫입술을 물었다.

짧은 머리가 지나가는 여자 엉덩이를 유심히 보았다.

머리가 이쪽으로 돌려졌으므로 장선은 전화기를 귀에서 떼었다가 원상으로

회복되었을 때 다시 붙였다.

그때 장미가 말했다.

 

 "시간이 지나면 언니 결백이 다 드러날거야. 넌 언니 믿어야 돼."

 "알았어. 언니."

 "돈 찾았니?"

 "응."

 

 이번에는 장미가 택배로 학교 연구실의 동아리 친구한테 보낸 돈을 찾은 것이다.

현금과 수표 3000만원. 날치가 당한 인터넷 사기 금액의 변상은 뒤로 미루고 이 돈은

당분간의 생활비로 쓰일 것이었다.

 

 "그런데 언니."

 장선이 창밖을 보면서 조금 서둘러 말했다.

 "이제는 은정이 핸드폰으로 연락하지마."

 "아니, 왜?"

 "은정이가 좀 귀찮아 하는 것 같아서."

 

 핸드폰을 넘겨준 은정은 저만치 떨어져서 물건을 보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장미가 가만 있었으므로 장선이 가늘게 숨을 뱉었다.

그때 장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어디 연락해 줄 사람 없을까? 믿을만한 사람말야"

 "……."

 "네 친구나 아니면 아는 사람. 잘 가는 식당도 좋고."

 "다 한두번씩 써먹어서 의심받을 것 같아."

 그랬다가 장선이 퍼뜩 시선을 들었다.

 "언니, 전화번호 적어봐."

 그러더니 핸드폰 번호를 불러주었다. 번호를 받아적은 장미가 물었다.

 "누구니?"

 "남자 친구야."

 "뭐? 남자친구?"

 놀란 장미가 목소리를 높였을 때 장선이 차분하게 말했다.

 "믿을 만해. 내가 동수씨한테 연락해서 말해 놓을게."

 "이름이 동수야?"

 "응, 김동수. 오퍼상을 하는데 언니는 회사 다닌다고 말해 놓았어.

    어머니가 빚이 많아서 채권자가 날 따라 다닌다고 했고."

 "……."

 "동수씨한테도 연락 해놓을게."

 

 그리고는 장선이 전화를 끊었다.

김동수는 그날 술에 취한 자신을 모텔방에다 내버려두고 도망갔다.

손도 한번 안대고.

 

 

 

 

 

다가온 김양희는 강한의 옆쪽 의자에 앉았다.

저녁 8시 5분. 사당동 사거리의 커피숍 안이다.

 "오빠, 내일 쉰다면서요?"

 김양희한테서 옅은 향내가 맡아졌다.

좀 비릴 것 같으면서도 연한 냄새였다.

젖먹이의 숨냄새 같다.

 "응, 그런데 왜?"

 내일은 토요일. 일이 많을 때는 일요일에도 출근했지만 요즘은 한가했다.

그래서 일요일까지 이틀간 팀원에게 휴가를 준 것이다.

김양희가 시선을 내리더니 낮게 말했다.

 "우리, 바닷가로 가지 않을래요? 1박2일로."

 "이 여자 좀 봐."

 눈을 크게 뜬 강한이 김양희의 옆모습을 보았다.

 "임신하면 어쩌려고."

 그 순간 김양희가 머리를 돌려 강한을 흘겨보았다.

 "오빠, 장난 마."

 김양희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고 두 눈이 번들거렸다.

금방 울 것같은 표정이다.

 "미안."

 강한이 팔을 뻗어 김양희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근데, 넌 너무 긴장하는 것 같다. 내 앞에서 말야. 그래서 장난친 거야."

 "잘 안돼."

 김양희가 아랫입술을 물었다가 풀고는 말을 이었다.

 "가벼워지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더 굳어져. 나도 미치겠어."

 "저런."

 "오빠를 좋아해서 그런가봐."

 "클났네."

 "오빠하고 섹스나 한번 하면 좀 분위기가 풀릴것 같아."

 "나아, 참."

 쓴웃음을 지은 강한이 의자에 등을 붙이더니 투덜거렸다.

 "근데 이곳은 장사 하는거야? 안 하는거야? 저 알바들은 물도 안갖다 놓네."

 "오빠. 여긴 셀프야. 나가서 시켜야 돼."

 "그런가?"

 놀란 강한이 상체를 세우고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보다 네가 정신이 더 들었구만 그래. 난 너한테 홀린 기분이다."

 "오빠, 가자. 동해안으로."

 김양희가 머리를 강한의 어깨에 붙이면서 졸랐다.

아직도 얼굴은 달아올라 있었지만 긴장은 좀 풀린 것 같았다.

 "응? 1박2일로."

 평소에는 새침했고 사무실 안에서는 시선도 잘 주지 않던 김양희였다.

그러나 지난번 최지현과 사건이 만들어진 후부터 김양희는 오히려 더 적극적이 되었다.

최지현과의 관계를 전혀 개의치 않는 것이다.

오늘도 김양희의 제의로 만들어진 만남이다. 강한은 김양희의 머리칼 냄새를 맡았다.

부담없는 만남이다.

김양희의 말마따나 섹스를 하고나면 더 분위기가 좋아질지도 모른다.

그때 주머니에 넣은 핸드폰이 진동을 했으므로 강한은 상반신을 세웠다.

핸드폰을 꺼내 발신자 번호를 보았지만 모르는 번호였다.

그러나 강한은 핸드폰을 열고 귀에 붙였다. 어느덧 긴장한 표정이 되었다.

 "예."

 그러자 수화구에서 2초쯤 뜸을 들이고 나더니 여자 목소리가 울렸다.

 "김동수씨세요?"

 그순간 강한은 숨을 멈췄다.

온몸에 전류가 흐른 느낌이 들었으며 저절로 두 눈이 치켜 떠졌다.

자리에서 일어선 강한이 김양희에게 눈짓을 해 보이고는 비상구 쪽으로 다가갔다.

그쪽은 외진곳이어서 소음도 적다.

그동안에 이쪽도 2초쯤 시간이 지났다.

 "예, 그렇습니다만."

 강한이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가 곧 이것이 장미와의 첫 전화 통화라는 것을 떠올리고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장미, 이 여우가 드디어 걸려들었다.

 "누구신지요?"

 강한이 묻자 저쪽은 다시 2초쯤 가만 있더니 말했다.

 "선이 아시죠? 장선, 걔 언니예요."

 

 

 

 

   "아아."

 하고 강한이 밝아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선이한테서 이야기 들었습니다."

 "제가 바쁘신데 실례한 것 아니죠?"

 장미가 묻자 강한이 어금니를 물었다가 풀었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널 놓칠 것 같으냐? 이 도둑년아.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하지만 목소리는 밝고 정중하게 나갔다.

 "말씀하십시오."

 말 끝에 웃음기까지 섞어 넣었다. 그러자 장미가 말했다.

 "저기.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요."

 "예. 말씀하세요."

 "제 어머니가 부채 때문에 채권자들 한테 시달리고 계세요. 알고 계시죠?"

 "선이한테서 대충은 들었습니다."

 부드럽게 말했지만 강한의 눈이 또 치켜 떠졌다.

어금니를 물었다 푼 강한의 귀에 장미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래서 저도 집에 못들어가고 선이는 채권자들이 따라다니고 있답니다."

 "그 자식들 나쁜 놈들입니다."

 강한이 비상구를 노려보며 말했다.

 "저도 지난번에 선이하고 영등포에서 뒤를 따르던 놈을 떼어 놓은 적이 있었지요.

    들으셨습니까?"

 "그건 못들었는데요?"

 "골목으로 빠져나가 마구 달려서 도망친 겁니다. 선이하고 말이죠."

 "그러셨군요."

 장미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섞여져 있다.

 "정말 죄송해요. 부끄럽구요."

 "아니. 무슨 말씀을."

 "선이한테 들었는데 오퍼상을 하신다구요? "

 "예. 직원이 둘이었는데 하나가 며칠 전에 나가서 저하고 둘입니다."

 "제가 그 사무실 주소로 뭘 좀 보내면 안될까요?"

 "뭔데요?"

 "어머니한테 드릴 생활비하고 약이나 생필품 따윈데요. "

 "아, 보내세요. 얼마든지."

 "집으로 직접 보내면 채권자들이 가로채거나 뜯어서 엉망으로 만들어놓는 바람에."

 말을 멈춘 장미가 송화구에다 가늘고 긴 숨을 뿜었고 강한은 수화구를 통해 바람소리를 들었다.

 "죄송해요. 김동수씨."

 "아닙니다. 그럼 주소를 불러 드릴테니까 적으시죠."

 그리고는 강한이 또박또박 주소를 불러 주었다.

주소는 논현동의 오피스텔. 강한의 팀이 평소에 채무자를 불러다 족치는 용도로 사용해온 방이다.

물론 대성금융의 소유이긴 했지만 강한은 이 작업을 위해 방문 앞에 '신우트레이딩'이라는

명패까지 만들어 붙이고 올해 고등학교를 졸업한 여직원 한 명까지 채용했다.

물론 여직원 미스 황은 신우테레이딩이 오퍼상이며 강한을 사장으로 굳게 믿고 있다.

주소를 다 받아적은 장미가 나긋나긋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조만간에 한번 찾아뵙고 인사드릴게요."

 "아니. 괜찮습니다."

 했지만 강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오냐. 불러라.

어금니를 물었다가 푼 강한이 부드럽게 말했다.

 "바쁘실텐데 그냥 전화만 해주셔도 됩니다. 그리고."

 강한이 비상구를 다시 쏘아보며 말을 이었다.

 "어려운 일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제가 도와 드릴테니까요."

 "말씀 만이라도 고맙습니다."

 "선이 친구로 당연한 일입니다"

 "선이 좋아하세요."

 

 불쑥 장미가 물었으므로 강한은 2초쯤 가만 있었다.

그리고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착해요. 아직 때묻지 않았구요"

 "그래요."

 이번에는 장미가 2초쯤 뜸을 들이고나서 말을 이었다.

 "선이한테서 들었어요. 그날."

 "네?"

 "그날이 바로 영등포에서 도망치신 날인것 같군요. 일산 가신 날."

 "……."

 "모텔 방에서 선이한테 술을 먹이고 그냥 가셨다면서요?"

 "……."

 "그말을 듣고 동수씨가 믿을만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이런 어려운 부탁도 드리게 되었어요."

 "아니. 이것이 뭐가 어렵다고."

 그러자 장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 말씀드렸지만 다시 연락드리겠어요. 뵙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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