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수배자 (4)
장미는 입을 열기 전에 심호흡부터 했다. 차근차근, 천천히, 서둘지 말고.
"어머니, 저 거기서 나왔어요."
저기란 바로 조홍인의 별장이다.
그렇게 말한 것은 김희선의 반응을 보려는 의도였다.
그러자 김희선이 대답했다.
"안다. 그런데 너, 지금 어디 있어?"
"시내요."
"서울?"
"네."
"그럼 여기로 오지않고 왜?"
"어머니."
어금니를 물었다가 푼 장미가 입을 열었다.
"별장에서 무슨 말 못들으셨어요?"
"네가 잘 알텐데."
그 순간 장미의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마지막 순간까지 한 가닥 실낱같은 희망을 김희선에게 품고 있었던 것이 떨어져 나간 것이다.
이 늙은 요물은 내 입에서 사실이 뱉어지기를 노리고 있다.
"어머니는 2억 받으셨죠?"
이제는 반격이다.
김희선이 녹음을 하고 있거나 도청을 하는 경찰에게 줄 선물이 될 것이다.
"그게 무슨 말야?"
김희선의 목소리가 조금 당황한 것처럼 느껴졌다.
전쟁이다.
늙은 뱀과 젊은 여우의 전쟁. 장미가 차근차근 말했다.
"조 회장한테 제가 한 달 수청드는 대가로 말예요.
조 회장은 어머니한테 2억 드렸다고 저한테 직접 말해 주셨어요."
"이 미친 년이."
"조 회장님이 증인이거든요."
"이 년아."
마침내 김희선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인내심 싸움에서 김희선이 진 것이다.
"이 년아, 죽은 사람한테 둘러 씌우지마. 이 여우같은 년."
"어마나."
장미가 놀란듯 목소리를 높였다.
"조회장이 죽다뇨? 그게 무슨 말예요?"
"가정부 아줌마가 다 증언했어. 넌 살인자야. 알아? 살인자로 수배되었다고."
"거짓말."
했지만 장미의 얼굴은 하얗게 굳어졌다.
나주댁, 그 마귀가 재주를 부렸다.
장미의 머릿속에서 순식간에 계산이 이루어졌다.
나주댁이 자신에게 뒤집어 씌운 것이다.
금고의 CD까지 다 씌웠을 수도 있다.
도둑년들, 다 이쪽의 등을 치고 간을 빼먹는 도둑년들이다.
"너, 자수해. 엉뚱한 수작 말고."
"어머니."
다시 장미의 목소리가 차분해졌다.
그러자 기가 질린 듯 김희선이 말을 끊었다.
장미가 나긋나긋 말했다.
"녹음하고 계신다면 제 말 두번쯤 다시 들으세요.
어머니가 지금까지 저를 이용해서 뚜쟁이 노릇을 한 장부를 다 갖고 있거든요?
자금 내역도 다 있고. 그리고 어머니가 접촉했던 명사들 명단도 제가 다 꿰고 있죠."
"이 미친 년이 지금."
"잘 들으세요. 어머니."
"들을 필요없어. 이 년아."
"10억 준비해 놓아요.
그렇지 않으면 이 명단을 정리해서 언론사에다 다 폭로해 버릴테니까."
"이 살인자가."
그러자 장미가 깔깔 웃었다.
"제가 나주댁이라는 그 교활한 년한테 당했는데 어디 두고 봅시다.
어머니, 기간은 일주일 드리죠."
"너, 내가 누군지 알고."
"어머니 금고에 얼마 들었는지,
지금 데리고 노는 명사가 누군지 뚜르르 꿰고 있는 딸이죠."
"네, 이년."
"어머니, 기간은 일주일. 쓸데없는 일을 하시면 그냥 폭로합니다.
돈은 현찰로 준비하시도록. 왜, 그, 사과박스 있잖아요. 그럼."
그리고는 핸드폰 덮개를 닫은 장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곳을 떠나려는 것이다.
요즘은 핸드폰 위치 추적이 되었고 지금 경찰이 출동했을지도 모른다.
매사 빈틈없이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장미는 가방을 집어 들면서 어금니를 물었다.
이제야 내막을 알았다.
나주댁이었다.
11시반 정각이 되었을 때 카운터에 놓인 전화벨이 울렸다.
마침 카운터에 앉아있던 주인 아줌마가 전화를 받는다.
"누고?"
했다가 머리를 돌린 아줌마는 시선을 주고있는 장선을 보았다.
"선아, 친구가 찾는데이."
장선이 일어나 전화기를 받았다.
오뎅집 안에는 손님이 한 테이블 뿐이어서 아직 한가했다.
"나야."
장선이 낮게 대답하자 수화구에서 장미가 물었다.
"돈 냈어?"
그러자 장선이 아랫입술을 물었다가 풀고나서 말했다.
"아니."
"바빴니?"
"언니."
장선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 그 돈 날치기 당했어."
장미는 가만 있었다. 다급할 때 장미는 절대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
장선은 언니가 한번도 놀라거나 화났다고 소리지르는 꼴을 못보았다.
그래서 장선은 언니가 더 무섭다. 장선이 말을 이었다.
"가방 속에 넣고 가다가 집 앞에서 날치기 당했어."
"……."
"오토바이 탄 놈이 가방끈을 끊고…."
"……."
"언니, 어떡해? 돈뿐만 아니라 언니 편지까지 다 들었는데."
장선이 울먹이며 물었을 때 장미가 말했다.
역시 침착하다.
차분한 목소리여서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다.
"괜찮다. 돈만 빼고 버렸을테니까."
"언니."
주인이 잠깐 지나갔으므로 말을 멈췄던 장선이 목소리를 낮췄다.
"어떡해? 그 돈을."
"걱정마. 언니 돈 또 있어."
"언니."
"너, 요즘도 형사가 따라 다니지?"
"응, 지금도."
장선이 힐끗 밖에다 시선을 주었다.
있다.
이제는 낯익은 30대 형사. 마음씨 좋아보이는 아저씨.
길 건너편 편의점 앞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는 중이다.
오늘은 사흘 전에 가져간 돈 처리 문제로 11시반 정각에 장미가
이곳으로 전화를 해오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선아."
장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거긴 다시 들르면 의심받을 테니까
사흘 후 오후 1시 정각에 네 친구 은정이 핸드폰으로 연락할께.
은정이하고 같이 있어. 알았지?"
"알았어."
"엄마는?"
"괜찮아."
"정말이냐?"
"밥 안먹고 약 안먹으면 언니가 죽는다고 했더니 말 들어."
"그럼 사흘 후 1시다."
"언니."
다급하게 불렀던 장선이 침을 한번 삼키고나서 말을 이었다.
"미안해. 언니."
"괜찮아. 그까짓."
"정말 미안해. 언니."
"괜찮다니까."
"몸 조심해. 언니."
장선이 울음섞인 목소리로 말했을 때 수화구에서 장미가 짧게 웃었다.
"바보야, 울지마. 뚝. 알았어?"
"응."
"끊는다."
전화가 끊겼을 때 주인 아줌마가 다가와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아뇨. 누가 몸이 아파서요."
그렇게 말한 순간 장선은 짜증이 났다.
언니라면 좀 더 세련된 거짓말을 했을 것이었다.
우정집을 나온 장선이 힐끗 편의점 쪽을 보았다.
발을 떼었다.
형사도 장선이 눈치채고 있는지를 아는 것이다.
사흘 전 가방을 날치기 당했을 때는 황당한 표정으로 뒤에 서 있기만 했다.
벨을 누른지 그야말로 1초도 안되어서 문이 열렸다.
누르자마자 문이 열린 것이다.
"들어와, 형."
문에서 비껴선 최지현이 눈웃음을 쳤다.
"나아 참."
하면서 들어선 강한이 방안을 둘러보는 시늉을 했다.
선릉역 근처의 모텔방 안이다.
신축 건물이어서 방은 깨끗했고 넓었다.
장식도 세련된데다 베란다 쪽으로 선릉의 짙은 숲까지 보였다.
"형, 나 다 씻었어."
하고 최지현이 다가서더니 강한을 똑바로 보았다.
몸에서 상큼한 비누냄새가 맡아졌다.
최지현은 반팔 셔츠에 스커트 차림이었는데 맨발이었다.
강한이 최지현의 시선을 받고는 마침내 쓴웃음을 지었다.
'하긴 나도 마찬가지지. 못 이긴 척 끌려왔지만 말야.'
"나 보고싶지 않았어?"
그러면서 바짝 다가선 최지현이 두 팔로 강한의 허리를 감아 안았다.
"난 얼마나 보고 싶었다구."
"하고 싶었겠지."
강한도 최지현의 엉덩이를 두 팔로 당겨 안았다.
그러자 하반신이 딱 붙으면서 최지현의 입에서 옅은 신음이 뱉아졌다.
"아아, 벌써부터 좋아."
"넌 색골이야."
"그건 요즘 칭찬이야."
최지현이 딱 붙인 하체를 비비면서 말했다.
강한의 남성이 딱딱해져 있는 터라 최지현의 숨결은 더 가빠졌다.
"형, 그냥 해줘."
강한의 바지 혁대를 풀면서 최지현이 말했다.
"그냥 넣어줘. 애무도 필요없어."
"그렇게 급해?"
최지현의 스커트 지퍼를 풀어내리자 놀랍게도 알몸의 하반신이 그대로 드러났다.
스커트 밑에 아무것도 입지 않은 것이다.
최지현이 강한의 바지와 팬티를 한꺼번에 벗겨 내리더니 무릎을 끓었다.
그리고는 강한의 남성을 입에 넣었다.
"으음."
신음을 뱉은 강한이 최지현의 머리칼을 움켜 쥐었다.
"그만."
강한이 최지현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냥 넣어 달라면서?"
"형 기름칠 해준거야."
입을 뗀 최지현이 얼굴을 들고 웃었다.
강한은 최지현의 어깨를 잡아 일으키고는 번쩍 안아 들었다.
그리고는 침대로 다가가 던지듯이 내려놓았다.
"형, 거칠게."
최지현이 두 팔을 벌리면서 말했다.
"아주 거칠게 해줘."
강한은 최지현의 몸 위에 올랐다.
그리고는 곧장 진입했다.
"아아앗."
최지현의 신음이 방안을 울렸다.
오전 10시반경이 되었을 때 최지현이 전화를 해온 것이다.
선릉역 근처에 있다면서 급한 일이라고 해서 강한은 무슨 일이 일어난 줄 알았다.
그러나 강한이 선릉역 근처에 도착했을 때 최지현은 모텔 방에서 기다리고 있다면서
방 번호를 알려주었던 것이다.
"아아. 좋아."
최지현의 샘이 조금 젖어 있었지만 흠뻑 젖었을 때와 감촉이 달랐다.
그것을 최지현은 고통과 함께 즐기는 것 같았다.
"형, 더 세게. 더."
신음같은 탄성을 뱉으면서 최지현이 소리쳤다.
강한이 한번 움직일 때마다 최지현은 두 다리로 허공을 찼고 이어서 비트는 동작을 되풀이했다.
격렬한 동작이었고 얼마 되지 않아서 최지현은 저 혼자 터졌다.
폭발한 것이다.
"아악!"
절정에 오른 탄성은 방안의 열기까지 발화시키는것 같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른다.
강한은 최지현을 안고 그대로 있다가 다시 시작했다.
"형, 이제 천천히."
심장이 터질 것처럼 숨을 몰아쉬면서 늘어져있던 최지현이 이제는 겨우 말했다.
"이제는 천천히 즐기면서, 형."
사내가 다가섰을 때 장선은 머리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그 순간 장선은 사내의 눈동자가 약간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는 정상으로 되돌아갔는데 시선은 이제 똑바로 장선에게 향해져 있다.
서교동의 재즈바 엘스는 작지만 아담했다.
외국인 어중이떠중이도 보이지 않았고 혼잡하지도 않다.
음악에 맞춰 다섯 평 쯤 되는 플로어에서 7, 8명의 남녀가 아주 가볍고 부드럽게
몸을 흔들었고 10여개의 테이블에 앉은 손님들의 분위기도 밝다.
"출까?"
하고 사내가 낮게 물었으므로 장선은 피식 웃었다.
사내는 혼자 왔다.
조금 전 장선이 은정과 함께 들어올 때 바로 앞에 서 있던 손님이었다.
"좀 있다가요."
장선이 일단 거절은 했지만 여운은 두었다.
그러자 사내가 선선히 머리를 끄떡이더니 옆쪽의 백인 여자에게로 다가갔다.
여자는 백인 남자와 동행이었는데 둘 다 금방 눈에 띄는 용모였다.
특히 여자는 어깨까지 늘어뜨린 금발에 미끈한 몸매, 거기에다 얼굴은 니콜 키드먼같다.
그러고 보면 남자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닮았다.
그래서 바 안의 시선이 그쪽으로 모였고 장선도 은정이 정신없이 남자 옆자리로 가는 바람에
여기 앉게 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사내가 니콜 키드먼에게 다가갔으니
바 안의 시선이 집중될밖에. 플로어에서 춤을 추던 남녀들도 그쪽을 힐끗 거렸다.
"어머."
은정은 놀라서 낮게 신음을 뱉기까지 했다.
디카프리오의 상대를 건드리다니. 그 순간 장선은 숨을 삼켰다.
니콜 키드먼이 사내의 손을 잡고 일어선 것이다.
디카프리오는 멋쩍은 웃음을 띄우고만 있다.
장선은 사내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남자답다.
키도 컸고 체격도 좋다.
그러고보니 옷도 세련되게 입었다.
사내는 바 안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키드먼을 데리고 플로어로 나갔다.
그러자 DJ가 새 음악을 틀었다.
"어머머."
은정의 입에서 이제는 거침없는 탄성이 뱉어졌다.
사내의 춤은 잘 어울렸다.
음악과도. 키드먼하고도. 그리고 바 안의 분위기하고도 아주 잘 맞았다.
"멋지다."
감탄한 은정이 머리를 돌려 장선을 보았다.
저 멋진 남자를 장선이 1차로 거부한 것이다.
장선의 주가는 순식간에 높아졌지만 거품이 될지 아직 장담 못한다.
장선은 플로어의 둘을 찬찬히 보았다.
키드먼은 아름다웠다.
여자인 자신이 봐도 사랑스럽고 섹시했다.
짧은 치마에 반팔 셔츠 차림의 차림새도 귀여웠고 몸매는 볼수록 부러웠다.
저런 여자가 어떻게? 하는 표정이 되어서 사내에게로 시선을 돌린 장선은 다시 숨을 멈췄다.
천정의 조명등에 비친 남자의 얼굴 윤곽은 뚜렷했다.
굳게 다문 입. 사내의 눈은 잔잔한 웃음기가 떠올라 있다.
그때 사내가 키드먼의 허리를 당겨 안더니 귓속말을 했다.
그러자 키드먼이 웃음띤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그때 키드먼이 두 팔을 사내의 어깨 위에 얹더니 회전했다.
그러자 하반신이 딱 붙으면서 키드먼이 늘씬한 엉덩이 바로 밑의 허벅지까지 드러났다.
"어머머."
은정이 다시 감탄했을때 사내가 키드먼을 끌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이제 겨우 웃음기만 띠고 있는 디카프리오에게 키드먼을 인계한 사내가 장선에게 다가와 섰다.
"출까?"
사내가 다시 물었으므로 장선은 시선을 들었다.
사내의 눈동자가 지금은 흔들리지 않는다.
이쪽 약을 올리려고. 또는 제 주가를 높이려고 키드먼을 데리고 나갔다고 해도 상관없다.
머리를 끄덕인 장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내가 장선의 손을 자연스럽게 쥐더니 다시 플로어로 나갔고 또 시선이 모여졌다.
장선은 심호흡을 했다.
그러나 가슴은 무섭게 뛰는 중이다.
지금까지 이렇게 가슴이 뛴 적은 없다.
"난 김동수라고 해. 나이는 스물 여덟. 직원 둘 데리고 오퍼상을 한다."
자리로 돌아와 앉았을 때 강한이 말했다.
이제 강한은 장선과 이은정의 테이블에 합석해 있다.
"오퍼상요?"
장선은 가만 있었는데 은정이 반응했다.
눈을 크게 뜬 은정이 강한을 보았다.
"오빠, 그럼 사장이야?"
"사장은 무슨. 내가 사무실 청소까지 다 하는걸 뭐."
쓴웃음을 짓고 말한 강한이 장선을 보았다.
플로어에서 20분쯤 같이 추고 나온터라 그동안에 이름은 말해 주었다.
장선도 춤 추면서 이름과 학생 신분이라는 것까지는 밝혔다.
"그래서 오빠 영어가 통하는구나."
은정이 힐끗 옆자리의 키드먼에게 시선을 주면서 말했다.
"하지만 역시 한국여자가 낫죠?"
"그럼."
강한이 빈 맥주병을 들어 보고나서 종업원을 불러 양주를 시켰다.
"내가 한잔 살게."
"좋아요."
은정이 대답하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빠. 이번에는 나하고."
춤을 추자는 말이다. 강한이 장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선아. 괜찮아?"
"내가 왜?"
눈을 크게 뜬 장선이 되물었다.
"내가 오빠 애인이라도 돼? 괜히 엮지마."
"알았어."
쓴웃음을 지은 강한이 은정의 손을 쥐고 플로어로 나갔다.
물론 이곳 재즈바에 온 것은 장미의 동생 장선을 엮기 위해서였다.
지금 옆자리에 앉은 마샤와 보리스는 러시아 무용수로 강한이 일당을 주고 고용한 바람잡이다.
장선은 엮지 말라고 했지만 이미 엮어지도록 각본이 잘 짜여졌다.
혼자 앉아있는 장선의 옆으로 다가선 사내도 그 각본에 포함되었다.
바로 강한 팀의 행동대 백용철인 것이다.
"한번 추실까?"
눈을 치켜떴지만 입술은 웃는 표정으로 백용철이 묻자 장선은 외면했다.
대답도 하기 싫다는 태도였는데 백용철의 임무가 철저한 악역이었으니 잘 만난 셈이다.
"어이, 아가씨. 내 말 안들려?"
하고 백용철이 말했으므로 장선이 마지못해 시선을 돌렸다.
"싫어요."
"시발년아. 그럼 먼저 그렇게 말했어야지. 머리만 돌리면 돼?"
그러자 장선의 얼굴이 하얗게 굳어졌다.
백용철은 만일의 경우 장선이 춤추러 따라 나갔어도 행패를 부리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에이, 재수없어. 시발년."
하고 백용철이 몸을 돌렸으므로 장선은 어깨를 늘어 뜨렸다.
좋았던 분위기는 산산조각이 났다.
그래서 강한과 이은정이 돌아왔을 때 장선은 양주를 벌써 넉 잔이나 마시고 난 후였다.
"어, 혼자 마셨어?"
술병을 본 강한이 빙긋 웃더니 손짓으로 종업원을 불렀다.
그리고는 장선에게 말했다.
"오늘 잘 놀았어. 내가 계산하고 갈 테니까 다음에."
다가온 종업원에게 계산서를 가져오라고 하고나서 강한이 장선을 보았다.
"인천공항에 나가야 되거든."
"오빠, 꼭 나가야 돼?"
하고 이은정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었으므로 장선이 눈을 흘겼다.
"얘, 그만좀 해."
종업원이 계산서를 가져왔고 강한은 장선의 테이블까지 계산을 하고 일어섰다.
"그럼 다음에 보자."
장선에게 연락처도 남겨놓지 않았지만 곧 만나게 될 것이다.
그 시간은 5분에서 10분 사이로 계산이 되었다.
왜냐하면 강한이 나가고나서 백용철이 다가와 시비를 걸테니까.
강한은 바를 나왔다.
현관에서 나와 열 발짝쯤 걸었을 때 뒤에서 서두르는 발자국 소리가 났다.
여자 발자국 소리였다.
"야, 이 기집애들아."
뒤에서 울리는 굵은 사내 목소리의 주인공은 백용철이었다.
강한은 세 걸음을 더 걷고나서 머리를 돌렸다.
그때 10m쯤 뒤쪽으로 다가와 있던 이은정이 불렀다.
"동수 오빠!"
이은정의 뒤에 장선, 그 5m쯤 뒤쪽에 백용철과 황택수. 오늘은 천상태는 따라오지 않았다.
"오빠."
다시 이은정이 부르면서 뛰듯이 다가왔을 때 백용철의 외침.
"이 시발년들. 거기 안서?"
걸음을 멈춘 강한의 옆에 이은정과 장선이 붙어섰다.
어둠속으로 백용철과 황택수가 거침없이 다가왔다.
둘 다 점퍼차림으로 윗도리가 두툼했는데 행동이 조금 거북했다.
그러나 그것을 장선이나 이은정이 알 리가 없다.
둘 다 검도용 보호구를 윗도리 밑에다 걸쳤기 때문이다.
"왜 그래?"
장선과 이은정을 둘러본 강한이 백용철에게 시선을 주면서 물었다.
이곳은 재즈바 오른쪽 골목 안으로, 조금 더 나가면 일차선 도로가 나온다.
왼쪽 길보다 한산해서 강한이 이곳으로 위치를 잡은 것이다.
"오빠, 이 사람들이."
이번에는 장선이 말했다.
백용철이 저를 목표로 삼고 있으니 저한테 책임이 있는 것이다.
이은정에게 넘길 수는 없다.
"바 안에서부터 욕을 하고 쫓아왔어요."
장선이 말하자 이은정이 식식거렸다.
"112에 신고할거야."
"이 시발년이."
눈을 치켜뜬 백용철이 한발짝 다가와 섰다.
신고하기 전에 맞아줘야 하는 것이다.
황택수도 나섰다.
"시발년들 쥑여."
"야, 너 비켜."
하고 손끝으로 강한의 턱을 가리킨 백용철이 잇사이로 말했다.
"시불놈아, 비켜. 너한테는 용건 없으니까."
"야, 그만해라. 밖에까지 나와서 이거 뭐하는 짓이야?"
강한이 점잖게 꾸짖었고 이번에는 황택수가 나섰다.
먼저 기가 막히다는 듯이 허허 웃는다.
"허, 이 시불놈이 지가 무슨 배트맨이나 된다고. 너 죽을래? 안비켜?"
"오빠, 112."
다급하게 이은정이 수선을 떨었을 때 백용철이 먼저 선수를 쳤다.
발길질로 강한의 배를 찬 것이다.
그것도 정통으로. 나중에 실감나게 연기하려다가 그렇게 되었다는
핑계거리가 있기 때문인지 진짜로 차올렸다.
기세가 거칠다.
"어머!"
이은정의 놀란 외침. 그러나 백용철의 발길질은 빗나갔다.
몸을 비튼 강한이 오히려 발을 휘둘러 백용철의 옆구리를 찼다.
"퍽!"
가죽을 댄 보호구에 맞은 터라 소리가 크게 울렸다.
"억!"
소리에 놀란듯 백용철도 비명같은 신음을 뱉었는데
다시 강한의 발길이 날아가 반대쪽 옆구리를 차자
이번의 소리는 더 컸다.
"퍽!"
"아이구."
신음과 함께 백용철이 엎어졌고 이어서 황택수가 덮치듯 달려들었다.
그러나 보호구를 댄 옆을 차라고 두 팔을 치켜들고 있다.
하지만 기세는 사납다.
"퍽!"
아무리 보호구를 대고 있지만 정통으로 옆구리를 채인 황택수의 몸이 빙글 돌더니
담장에 어깨를 부딪치며 넘어졌다.
"아이고 나 죽네!"
이건 황택수가 서비스로 지른 비명인데 강한이 보기에는 좀 오버였다.
그러나 여자들한테는 더 실감이 느껴진 것 같았다.
강한이 몸을 돌리자 이은정이 등을 밀면서 외쳤다.
"오빠, 도망가요! 저 사람 죽을 것 같애."
황택수의 연기가 먹힌 것이다.
강한은 서둘러 발을 떼었다.
그 옆을 장선이 딱 붙어 따른다.
강한은 심호흡을 했다.
이만하면 됐다.
장미,
그년한테 한발짝 다가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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