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강안여자

9. 함정 (1)

오늘의 쉼터 2010. 10. 15. 17:55

 

9. 함정 (1)

 

 

함정이다.

장미는 쓴웃음을 짓고는 커피잔을 들었다.

길 건너편 아진빌딩의 1층 제과점에 앉아있는 김희선이 다시 팔목시계를 보았다.

오전 11시 5분 전이었다.

약속시간은 11시 정각이었다.

김희선은 차를 빌딩 옆 주차장에 세워 놓았는데 장미가 시킨대로 승합차를 가져오긴 했다.

승합차 안에는 2억씩 든 사과박스 5개가 쌓여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한 모금 커피를 삼킨 장미의 시선이 주차장 옆 자동차 정비업소로 옮겨졌다.

승용차가 네 대. 두 대는 정비 중이었고 두 대는 정비 순서를 기다리는 것처럼

주차되어 있었는데 다섯 명의 사내가 얼쩡거리고 있다.

아주 바쁜척 오가기도 하고 안의 대기실에서 신문을 보는 척도 하지만

온 신경이 제과점 쪽으로 쏠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장미는 건너편 빌딩 6층에서 직선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다.

이곳은 고시원 쪽방으로 장미가 만들어놓은 안가 중의 하나였다.

이곳에 오면 장미는 공무원 시험을 준비 중인 학생이 되는 것이다.

커피잔을 내려놓은 장미가 창틀에 놓인 망원경을 들어 눈에 붙였다.

그러자 김희선의 얼굴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초조한 표정이다.

김희선의 앞쪽 테이블 위에 핸드폰이 놓여 있었는데 시선이 자주 그쪽으로 옮겨졌다.

 망원경의 방향을 돌리자 정비업소가 렌즈에 비쳤다.

사내들은 모두 20대였다.

그중 하나만 30대로 지휘자인 것 같았다.

정비업소 직원하고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지만 저는 열심히 말하는데 직원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바빠 죽겠는데 쓸데없는 이야기를 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핏 보면 차 문제로 상의하는 것 같다.

망원경을 눈에서 뗀 장미가 건물 아래쪽에 시선을 주었다.

바로 밑의 길가에 차 한 대가 또 주차되어 있다.

고시원 빌딩 아래층은 당구장에다 편의점, 식당에다 보험회사 사무실,

노래방까지 밀집되어 있었지만 주차장은 건물 지하층이다.

길가에 이렇게 오래 불법 주차하는 차는 드물다.

아마 이 건물 안에서도 몇 명이 제과점을 감시하고 있을 것이다.

장미는 핸드폰을 들었다.

버튼을 누르자 신호가 세 번 울렸을 때 망원경에 김희선의 앞에 놓인 핸드폰이

진동으로 반짝이며 떠는 것까지 보였다.

김희선이 서둘러 핸드폰을 집더니 귀에 붙였다.

"여보세요."

"저예요. 어머니."

장미가 다정스럽게 물었다.

"지금 어디 계세요?"

"어딘 어디야? 제과점이지. 넌 왜 안와?"

"차가 막혀서요."

"언제 오는데?"

"그런데 어머니, 돈은 준비 하셨겠죠?"

"했다. 너도 그 자료인지 뭔지 다 갖고 있겠지?"

"물론이죠."

"그럼 빨리와."

"그런데요. 어머니."

"뭔데?"

"그 차는 거기다 두시구요. 저는 남산의 타운호텔 커피숍에서 뵙죠."

"뭐? 타운호텔?"

놀란듯 김희선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차를 여기다 그냥 두라구?"

"네, 키는 제과점에다 맡겨 놓으시구요."

"그건 못해. 네 년이 나타나지 않으면 내 돈만 날아가게?"

"그럼 관두세요. 어머니."

장미의 목소리도 차가워졌다.

"어차피 믿지 못하는 건 저도 마찬가지니깐요.

어머니가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고 있는지 어떻게 알아요?"

"난 그런 짓 안해."

"할 거예요? 말 거예요?"

장미가 망원경으로 김희선을 노려보며 물었다.

"우리 신사적으로 합시다. 난 돈 받으면 깨끗이 잊겠다구요.

자료인지 지랄인지 다 버리겠지만, 만일."

한 호흡 말을 멈췄던 장미가 말을 이었다.

"지저분하게 놀면 다 터뜨릴거야. 알아서 해. 어머니."

그리고는 장미가 핸드폰을 닫았다.

그러나 망원경은 눈에서 떼지 않았다.

 

 

 

 

예상했던대로 김희선은 제과점을 떠났지만 정비업소의 한 팀이 남았다.

30대 사내와 두 사내, 차 한 대와 사내 두 명은 김희선이 탄 모범택시를 따라 떠난 것이다.

이제 제과점 주차장에는 승합차가 남았다. 차 키는 제과점에 맡겨 놓았을 것이다.

정비업소에 남아있는 사내 셋은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아예 한 놈이 제과점 주차장 입구 근처까지 진출해서 얼쩡거렸고 30대와 또 하나는 언제라도

달려갈 자세로 승합차와 제과점을 주시했다.

장미는 다시 핸드폰을 들고 버튼을 눌렀다.

11시 10분. 신호가 두 번 울렸을 때 연결이 되면서 사내가 응답했다.

 

"예."

"지금."

장미가 한 마디만 하고 핸드폰을 닫았다.

주차장에는 30여대의 차가 주차되어 있었는데 승합차 위치는 딱 가운데였다.

드문드문 빈 자리가 절반 정도 남아 있었는데도 김희선이 일부러 그 위치를 잡은 것이다.

제과점과 정비업소에서도 환히 보이는 위치였다.

장미가 팔목시계를 내려다보고 나서 머리를 들었을 때 연기가 보였다.

검은 연기. 주차장 바로 뒤쪽 골목에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이다.

장미는 다시 핸드폰을 켰다. 119 버튼을 누르자 금방 연결이 되었다.

"네, 119입니다."

"불이 났어요."

장미가 다급하게 말했다.

"천호동 대동전선 사거리에서 올림픽도로 쪽으로 꺾어져서 200m 지점요."

"건물입니까?"

"아뇨, 건물 뒤에서 불길이 크게 솟아오르고 있어요."

그 순간 골목에서 불길이 크게 솟아올랐고 사람들이 뛰고 모였다.

장미는 핸드폰을 껐다.

더 자세하고 더 다급한 신고가 더 쏟아질 것이다.

소방차가 출동한 것은 정확히 7분 후였다.

사이렌 소리와 함께 나타난 소방차는 세 대.

창가에 붙어선 장미는 먼저 소방차 한 대가 정비업소 앞을 가로막고 선 것을 보았다.

또 한 대는 골목 진입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제과점 주차장으로 들어서고 있다.

장미의 시선이 정비업소로 옮겨졌다.

망원경의 렌즈에 30대 사내가 나타났다. 당황한 표정이다.

위치를 옮기자 소방차에 가로막힌 사내의 승용차가 보였다.

불이 꺼질 때까지 저 차는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다.

그 시간에 제과점으로 들어선 경찰이 주인에게 말했다.

"저, 차. 5315 빨리 빼요!"

"예? 5315?"

불이 나는 바람에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겨우 정신을 차린 주인이 경찰에게 되물었다.

그러자 경찰이 와락 소리쳤다.

"주인이 누구요? 빨리 빼야 소방차가 들어갈 것 아녀?"

"아, 거시기."

바로 그 차다. 웬 여자가 키를 맡겨 놓으면서 누가 키를 달라거든

꼭 저한테 확인을 받고 주라던 차. 그래서 그 여자의 전화번호를 받아놓고 있다.

"아, 뭐해요? 누구냐니깐?"

경찰이 다시 소리치자 주인이 서랍을 열고 키를 내주었다.

확인이고 지랄이고 차부터 빼는 수밖에 없다.

지가 뭔데 이 상황에 확인을 받으란 말인가?

아까도 짜증이 나서 키를 맡지 않으려다가 말았다.

키를 받아든 경찰이 서둘러 밖으로 나가자 주인은 다시 불구경을 했다.

제과점까지는 불이 번지지 않을 것이다.

제과점 뒤쪽 골목에 주차된 차는 지금 전소되는 중이었다.

"나원 참. 깜짝 놀랐잖아?"

주인이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그때 주인은 방금 키를 받아간 경찰이 승합차를 빼내 출입구로 빠져 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러자 소방차가 그 빈 자리로 들어와 조금 더 골목과 가까운 위치에 자리잡았다.

굵은 물줄기가 쏟아지자 불길이 멈추더니 이제 검은 연기만 뿜어졌다.

"방화야."

같이 구경하던 옆집 복사점 주인이 제과점 주인에게 말했다.

"어떤 놈이 차에다 불을 지른거야."

 

 

 

 

 

하남시쪽으로 달리던 승합차가 갑자기 오른쪽 일차선 도로로 꺾어지더니 속력을 늦췄다.

장미는 머리를 돌려 뒷쪽을 보았다.

따라오는 차는 없다.

오토바이의 엔진음이 경쾌했고 온몸에 퍼지는 진동은 맛사지를 받는 느낌이었다.

장미는 지금 오토바이를 타고 승합차 뒤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헬멧을 눌러 쓴데다 어깨가 넓은 방수 작업복을 입었고 두꺼운 바지에 군화까지 신은

차림이어서 영락없는 남자다.

승합차는 마을을 통과하고 나서 다시 왼쪽 샛길로 들어섰다.

그러자 산길이 펼쳐졌다.

인적도 없고 차도 다니지 않는 비포장도로. 승합차가 먼지를 자욱하게 일으켰으므로 장미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속력을 늦췄다.

낮지만 숲이 무성한 야산을 오른쪽으로 끼고 달리던 승합차가 이윽고 멈춰선 곳은

산 모퉁이의 농가 앞마당이다.

농가는 폐가여서 대문은 없어졌고 담장은 절반이 부숴졌는데 마당은 꽤 넓었다.

승합차 옆에다 오토바이를 세운 장미가 헬멧을 벗었을 때 운전석에서 경찰이 내렸다.

제과점에서 키를 받아간 경찰이다.

 "한대가 쫒아오다가 대동전선 사거리에서 신호를 걸려버린것 봤지요?"

 하고 경찰이 웃음띈 얼굴로 물었다.

20대 후반쯤으로 눈 사이가 좁은데다 콧날이 높아서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장미가 머리만 끄떡이자 경찰이 경찰제복 저고리를 벗어던졌다.

 "어휴, 입고 있으니까 왠지 자꾸 답답해져서."

 셔츠 차림인 사내의 체격은 우람했다. 팔에는 굵은 알통이 튀어나왔다.

 "자, 봅시다."

 하고 사내가 승합차 뒷문을 열어 올린 순간 쌓여진 박스가 드러났다.

5개. 현금 2억씩 넣어진 사과박스. 장미는 팔짱을 낀채 가만히 서 있었고

사내가 박스 하나를 들어 마당에 내려놓았다.

묵직하게 보였지만 사내는 팔의 근육만 일어났을뿐 간단히 내려놓는다.

 "흥. 단단히 묶었는데."

 쓴웃음을 지은 사내가 주머니에서 나이프를 꺼내더니 날을 세웠다.

크다. 거기다 넓은 날이 날카롭게 번쩍였다.

사내가 박스를 감은 테이프에 칼을 꽃더니 선을 따라 찢었다.

그리고는 박스 뚜껑을 젖혔다.

 "아니."

 사내의 입에서 신음같은 외침이 뱉아졌고 같은 순간에 장미는 아랫입술을 물었다.

박스 안에는 책이 들어있었던 것이다.

갖가지 책. 요리책 표지도 보였고 주간지도 있다.

 "이런 X발."

 눈을 치켜든 사내가 몸을 돌리더니 차안에서 박스 하나를 다시 마당으로 내놓았다.

이번에는 내동댕이치듯 던지고서 칼을 아무데나 푹 쑤셔 넣고는 박스를 잡고 찢었다.

 "썅."

 사내가 이를 악물었다. 이번에는 안에 신문 뭉치만 가득 담겨져 있는 것이다.

번쩍 시선을 든 사내가 장미를 쏘아보더니 몸을 돌려 차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잠시후에 차 안에서 책과 신문, 종이 조각이 마당으로 던져졌다.

책 한권은 장미의 발에 맞았다.

 "이게 뭐야? X발."

 마당에 다시 나온 사내가 장미를 쏘아 보며 소리쳤다.

 "돈이 들어있어야 하잖아? 이거 가져오려고 내가 그 쇼를 한거야?"

 사내의 입가에 흰 거품이 붙여졌다.

사내 이름은 함동석. 용역회사 직원으로 장미한테서 1억을 받는 조건으로 이번 작전에 참여했다.

임무는 제과점 뒤에 주차된 차에다 불을 지른후에 경찰 행세를 하고 승합차를 몰고 여기까지

오는 것이다.

 "야. 1억 내놔."

 하고 사내가 한발짝 다가선 순간이었다.

장미는 점퍼 가슴속에 넣었던 손을 빼내었다.

손에는 이미 가스총이 쥐어져있다.

놀란 사내가 입만 쩍 벌렸을 때 요란한 총성이 울렸다.

사내는 1m쯤 앞에서 총에 맞았다. 정통으로

 

 

 

 

 

 

"오빠, 뒤쪽에 밤색 점퍼입은 사람있지?"

 하고 장선이 앞쪽만 본채 말했다.

 "뒤를 돌아보지마. 오빠."

 강한의 시선을 받은 장선이 입술끝만 올리고 웃었다.

 "빚쟁이야. 오빠. 우리 엄마가 엄청 빚을 져서 그래."

 "……"

 "아침부터 내가 집에 들어갈 때까지 사람을 시켜 따라다니게 하는거야.

    그리고 내가 만나는 사람 뒷조사를 해."

 강한은 잠자코 발을 떼었다. 영등포 시장 뒷길은 저녁 무렵이면 언제나 혼잡하다.

먹거리가 풍부한 곳인데다 유동 인구도 많아서 거리는 활기가 넘쳤는데 특히 주머니가

가벼운 젊은 남녀가 많다.

강한도 장선이 말하기 전에 밤색 점퍼 사내를 보았다.

장선과 지하철 입구에서 만났을 때부터 눈치챈 것이다.

형사다. 장미 때문에 미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장선은 빚쟁이라고 둘러붙였다. 강한이 장선의 손을 잡았다.

 "그럼 우리, 저놈 떼어놓자."

 장선의 귀에 대고 강한이 말을 이었다.

 "저기 오른쪽 이쁜이집 옆쪽 골목으로 들어가자마자 냅다 뛰는 거야, 알았어?"

 "응."

 장선이 강한의 손을 꽉 잡았다가 놓았다.

 "넌 나만 따라오면 돼. 내가 여기 지리는 훤하거든."

 "알았어. 오빠."

 강한은 장선의 콧등에서 배어나온 작은 땀방울을 보았다.

귀여운 용모였다.

몸매도 날씬하고 화장기가 없는 얼굴이었지만 윤기가 났다.

거기에다 성품도 곱다.

 "오빠, 미안해."

 골목 앞으로 다가가면서 장선이 말했다.

 다시 강한의 손을 힘주어 쥔다. 장선과 재즈바에서 만난것이 5일 전이었다.

오늘은 세번째 만나는 날이었으니 이틀에 한번 만나온 셈이다.

이틀전에는 재즈바로 장선이 혼자 나왔었는데 술을 많이 마셨다.

그래서 강한이 겨우 택시를 태워 보냈다.

골목 입구로 다가간 강한이 먼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뛰었다.

 "뛰어!"

 머리를 돌리고 소리치자 장선이 뛰어 들어온다. 강한은 앞서 뛰었다.

이쪽 골목은 좁은데다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다.

거의 10m 간격으로 자꾸 구부러진다.

강한은 사람들을 헤치며 뛰었고 장선이 뒤를 따른다.

골목을 10여 차례나 더 꺾어 달리고나서 큰 길로 나왔을 때는

10분쯤이나 지난 후였는데 장선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택시."

 지나가는 택시를 세운 강한이 장선을 먼저 태우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없다.

흑색 점퍼는 진득 떼어놓은 것이다.

택시에 탄 강한이 운전사에게 말했다.

 "일산으로."

 장선이 힐끗 강한에게 시선을 주었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저녁 8시반이다.

장거리 손님에 신이 난 운전사가 혼잡한 영등포 거리를 기운차게 빠져 나갔다.

 "오래 걸리지 않을거야."

 강한이 부드럽게 말했다.

 "왜? 불안하니?"

 "아니."

 머리를 젓던 장선이 몸을 기울여 강한의 어깨에 상반신을 기댔다.

 "오빠. 나 오늘 집에 안들어가도 돼."

 "어머니가 걱정 안하셔?"

 "친구 집에서 잤다고 하면 돼."

 "너. 자주 그래?"

 "보면 알거야."

 하더니 장선이 눈을 감았다.

어깨에 얼굴을 붙이고 있어서 긴 속눈썹 밑의 그늘이 짙었다.

강한의 말대로 올림픽대로와 자유로를 냅다 달린 택시는 30분도 안되어서 일산 시내로 진입했다.

 "오빠."

 시내로 들어섰을 때 장선이 강한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우리 그냥 방으로 가."

 눈만 크게 뜬 강한을 향해 장선이 이맛살을 찌푸려 보였다.

 "여관방에 술 사들고 가서 마셔. 괜히 돈 낭비하지 말고."

 

 

 

 

 

 

모텔방에서 장선은 술을 많이 마셨다.

강한이 주는대로 받아 마시더니 나중에는 저 혼자서 자작을 했다.

일산 변두리의 모텔방은 신축 건물인데다 시설이 고급스러웠고 가격도 쌌다.

서울에서 한 시간도 안되는 거리였으니 장사가 잘 될 만했다.

강한은 저고리만 벗은 셔츠 차림이었고 장선 또한 재킷을 벗고 반팔 셔츠만 입었다.

반쯤 열어놓은 베란다 창으로 서늘한 밤 바람이 몰려 들어왔다.

베란다 안쪽 둥근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둘은 마주앉아 있었다.

밤 11시반. 주위는 조용했다.

베란다에서 내려다 보이는 밖은 어둠에 짙게 덮인 야산이다.

강한은 잠자코 앞에 앉은 장선을 보았다.

다시 잔에 위스키를 채운 장선이 한 모금에 술을 삼키더니 시선을 들었다.

 "오빠, 안마셔?"

 "마시고 있어."

 강한이 술잔을 쥐면서 말했지만 장선과는 석 잔에 한 잔꼴로 마시는 중이다.

장선 혼자서 위스키 반 병은 마셨다.

아직 눈을 똑바로 떴고 눈동자의 초점도 잡혀 있었지만 어느 순간에 풀릴지 알 수 없다.

한 모금 술을 삼킨 강한이 이번에는 장선의 빈 잔에 술을 채웠다.

둘이 모텔방까지 들어왔으니 성적 긴장이 고조되어야 정상이다.

그리고 장선은 지금 그 긴장감으로 술기운이 억눌려진 상태일 것이었다.

술을 이용해서 여자를 넘어뜨린 경험이 없는 강한이었지만 그쯤은 예상할 수 있는 것이다.

장선은 지금 기다리고 있다.

다시 한 모금에 술을 삼킨 장선이 입으로 더운 숨을 뱉으면서 강한을 보았다.

 "오빠. 나, 싫어?"

 마침내 장선이 그렇게 물었다.

모텔방에 들어온지 한 시간 가깝게 된것이다.

그동안 둘은 이야기도 몇 마디 하지 않았고 그것마저 건성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강한도 기억이 나지 않았으니 장선은 더할 것이었다.

 "아니, 좋아."

 맨정신으로는 이런 대화를 주고받지 못할 테지만 둘은 진지했다.

술에 더 취한 장선은 더 열심이었다.

 

 "그럼 왜 그래?"

 장선이 다시 물었다.

 "왜 가만있어?"

 "술 좀 더 마시고."

 

 어느새 잔을 비운 장선의 잔에 위스키를 채우면서 강한이 말했다.

 

 "밤은 길어. 서둘 것 없다."

 "오빤 이상해."

 "너, 이런 경험이 많은 것처럼 이야기 하는구나."

 "겪어보면 알겠지."

 

 그러더니 장선이 한 모금에 위스키를 입안으로 털어넣었다.

이제는 강한과 장선이 1대5의 비율쯤으로 마시고 있다.

 

 "네 언니가 있다고 했지?"

 술잔을 든 강한이 외면한 채 물었다.

 "직장 다닌다고 했던가?"

 "응, 이뻐."

 

 빗나간 대답을 한 장선이 강한을 보았다.

이제는 점점 장선의 얼굴빛이 하얗게 굳어져가는 중이었다.

 

 "너보다 이뻐?"

 "응, 훨씬."

 

 머리를 끄덕인 장선의 눈동자가 초점이 흐려졌다가 다시 모여졌다.

강한이 말을 이었다.

 

 "나도 남동생이 하나 있어. 근데 자식이 마음이 여려서 걱정이다."

 

 술잔을 만지작거리던 장선이 생각났다는듯이 한 모금에 삼켰다.

그때 강한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침대에 가 있어. 나, 씻고 올테니까."

 "응."

 장선이 머리만 끄덕였으므로 강한이 다가가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일으켰다.

 "어서."

 "놔, 내가 갈게."

 

 그랬지만 장선은 비틀거렸다.

강한이 장선을 번쩍 안아 들고는 침대로 다가가 눕혔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화장실로 다가가며 말했다.

 

"불 끌 테니가 누워 있어."

 

화장실로 들어서면서 강한은 방의 불을 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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