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강안여자

7. 수배자 (3)

오늘의 쉼터 2010. 10. 5. 17:21

7. 수배자 (3)

 

 

11.

 

 

 정색한 나주댁이 장미를 보았다.

깊은 밤. 주위는 조용해서 앞에 앉은 나주댁의 숨소리까지 들렸다.
나주댁이 한 모금 소주를 삼키더니 말을 이었다.

"금고 안에 얼마 들어 있는지는 자식들도 몰라. 오직 영감만 알지."

장미는 외면했고 나주댁의 말이 이어졌다.

"영감은 별장을 오갈 때 손가방 하나만 들고 다녀. 그 손가방이 지금 금고 안에 있다구."

"……."

"그 손가방에 영감의 재산이 들어있는거야. 이건 내 생각이지만."

술잔을 내려놓은 나주댁이 장미를 보았지만 시선은 마주치지 못했다.

"주식관계 서류, 부동산 서류, 그리고."

나주댁의 목소리가 낮고 굵어졌다.

"CD 알아?"

"뭔데요?"

"양도성 예금증서."

그때서야 장미의 시선을 받은 나주댁이 그것도 모르느냐는 듯이 쯧쯧 혀를 찼다.

"고액권 수표나 마찬가지야. 사채 시장에 가면 얼마든지 바꿔줘. 소지인한테 말야."

"……."

"저 영감은 나하고 같이 지낼 때도 보통 몇 백억은 갖고 다녔지.

CD로 말야. 아마 지금은 더 있을걸?"

장미가 다시 외면했고 나주댁은 제 잔에 소주를 채웠다.

밤 12시반이 되어가고 있었다.

오늘로 별장 생활 13일째. 아직 절반도 안 채웠지만 장미는 이제 한 시간이 하루 같았다.

오늘 오후에는 가슴이 터질 것 같아서 별장 뒷마당에서 펑펑 울다가 나주댁한테 들켰다.

나주댁은 잠자코 바라만 보다가 몸을 돌렸는데 밤에 장미가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갑자기 이층 침실 안의 금고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한 모금에 술을 삼킨 나주댁이 말을 이었다.

"아침에 영감이 산책나갔을 때 침실 금고를 열고 20억만 꺼내자구. 그래서 10억씩 나누는 거야."

놀란 장미가 다시 시선을 주었지만 나주댁은 거침없었다.

 
"1억짜리 10장이야.

5억짜리면 2장씩 나눠 갖는 것이고.

10억짜리면 1장씩 사채시장에 가면 금방 바꿔줘.

신원 확인도 필요없어. 이자만 좀 셀 뿐이지."

"아주머니."

 
"금고 비밀번호는 내가 알아.

지금도 영감 죽은 마나님 주민등록번호를 쓸 테니까. 내가 외우고 있어."

"……."

"딱 그것만 빼내 나눠 갖자는 거야.

그러다가 기한 채우고 떠나면 되는거야.
저 영감은 빼내 간줄도 모를테니까."

"……."

"다른 데로 옮기면 기회가 없어져.

본가에는 사람이 너무 많고 제주도 별장에 따라 가도 거긴 금고가 달라.

열쇠까지 있어야 되는데다 번호도 두 개야."

"아주머니."

마침내 머리까지 저은 장미가 정색하고 나주댁을 보았다.

"전 안해요. 아주머니."

그리고는 아랫입술을 물었다가 풀었다.

"그러니까 절 끌어들이지 마세요."

나주댁은 한동안 장미의 시선을 받더니 이윽고 길게 숨을 뱉고 나서 외면했다.

"그러지."

"미안해요. 아주머니."

"아니. 괜찮아. 할수없지 뭐."

쓴웃음을 지은 나주댁이 잔에 술을 채웠다.

이층 침실의 금고에 접근하려면 장미의 도움이 있어야 되는 것이다.

조홍인은 밖에 나갈 때는 꼭 침실의 열쇠를 채운다.

아래층 식당으로 내려올 때도 그렇다.

다만 아침에 늦잠을 자는 장미를 침실에 남겨놓고 한 시간 정도 산책을 나갈 때는 예외였다.

 
"흔적도 안 남는 일이어서 그랬어."

이제는 나주댁이 외면한 채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이렇게 영감 뒤치닥거리나 하면서 한달에 겨우 150만원 받는 내 인생이나

거기 인생이 비슷한것 같기도 했고."

그러더니 나주댁이 감정이 북받쳤는지 손등으로 눈을 씻었다.

 

12.

"일어나!"
장미는 흔드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났다.

목소리는 나주댁, 흐린 눈을 비비면서 눈의 초점을 잡았을때

나주댁의 하얗게 질린 얼굴이 드러났다.

"큰일났어!"

서둘러 몸을 일으킨 장미에게 나주댁이 소리쳤다.

"이걸 어쩌면 좋아!"  
"아니, 왜, 왜요?"

그때서야 장미는 옆자리가 비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창밖이 부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조홍인이 아침 산책을 나갈 시간이다.

그때 나주댁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영감님이 이층에서 떨어졌어?"  
"네?"

놀란 장미가 소스라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회, 회장님이요? 그, 그래서요?"

"죽은 것 같아."

"어머나."

 
장미가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가 풀었다.

 
"지금 어디 계세요?"

"아래층, 계단 밑에."

"빨리 119를."

 
"죽었는데 어떻게."

그러더니 나주댁이 어깨를 늘어뜨리면서 길게 숨을 뱉었다.

숨결에 역한 술냄새가 맡아졌다.

"소용없어. 죽었어."

"그, 그래도."

 
장미의 목소리는 더 높아졌다.

"이러고 있을 수만은 없잖아요!"

"시끄러!"

따라 소리친 나주댁이 눈을 부릅떴다.

"정신 차리란 말야! 이 기집애야!"

"아니, 뭐라구요?"

"경찰이 오면 뭐라고 하려고? 넌 뭐하는 여자냐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할래?"

말문이 막힌 장미의 눈에서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사람이 죽었잖아요!"

"내가 처리할테니까 넌 짐 싸들고 나가."

그순간 정신이 든 장미가 나주댁을 노려보았다.

"아줌마."

"내가 금고를 열고 어젯밤에 말한만큼 꺼내 줄 테니까 그걸 갖고 나가."

"아줌마, 그러지 말아요!"

"넌 이 집안에 없었던 거야. 그러니까 걱정 안해도 돼."

그러더니 나주댁이 침대 위쪽으로 다가가더니 벽에 걸린 액자를 떼내었다.

그러자 벽에 부착된 금고가 드러났다.

멍한 시선을 주었던 장미는 그때 나주댁이 손에 면 장갑을 끼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주댁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비밀 번호를 누르더니 손잡이를 쥐었다.

그 순간 장미는 숨을 삼켰다.

금고가 열린 것이다.

장미는 벽에 등을 붙인채 꼼짝하지 못했다.

밖에는 조홍인의 시체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

금고 안에서 가방을 꺼낸 나주댁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아줌마, 그러지 마요."

장미가 겨우 그렇게 말했을 때 나주댁이 가방 안에서 한 뭉치의 서류를 꺼내 들었다.

얼굴이 상기되었고 눈은 번들거리고 있었다.

"거봐, 내말이 맞았지?"

나주댁이 종이 뭉치에서 몇 장을 헤아리더니 장미에게 내밀었다.

"5억짜리 한 장, 1억짜리 다섯 장이야. 자, 가져가."

"아줌마."

"어서 짐 꾸려!"

버럭 소리친 나주댁이 이제는 서둘렀다.

"서둘러! 그리고 네 흔적을 이 집안에서 다 지우란 말야!

그래야 경찰이 와도 의심을 하지 않을 테니까."

몸을 편 나주댁이 장미를 노려보았다.

"영감은 지금 계단 밑에 죽어 자빠져 있다구.

빨리 신고를 해야 될 테니까 서둘러.

네가 있으면 저 영감 체면은 죽어서도 똥칠이 될 것이고

남은 자식들도 두고 두고 웃음거리가 될 테니까 말야. 어서 짐 싸라니깐!"

 

 

 

 13.

 

 

커피숍 안으로 들어선 박용수는 강한을 보더니 눈부터 흘겼다.

오전 10시 정각이다.

바쁘게 다가온 박용수가 털썩 앞자리에 앉았을 때 강한이 먼저 물었다.

"바쁜 일인가요?"

"바쁘긴 네 놈이 나보다 더 바쁜 것 같던데 뭐. 맨날 연락도 안되고."

눈을 치켜든 박용수가 다가온 종업원을 손을 흔들어 돌려 보냈다.

알바 종업원은 군소리 않고 TV 앞으로 돌아갔다.

이제는 강한이 시선만 주었으므로 박용수가 입을 열었다.

"야, 장미말야."

"예, 잡았다는 소식입니까?"

"잡기는 개뿔."

해놓고서 박용수가 정색했다.

"그 기집애는 지금 살인 강도 혐의로 수배됐어. 지금 전국에 지명수배가 되었단 말이다."

강한이 눈만 크게 떴고 박용수의 말이 이어졌다.

"너, 백동그룹 조 회장 알지? 조홍인."

"모르는데요."

그러자 입맛을 다신 박용수가 말을 이었다.

"좀 밝히는 영감이야. 거동도 불편하고. 하지만 현금은 엄청나게 많은 영감인데."

"……."

"장미 그게 그 영감하고 계약 동거를 한거야. 한달에 3천이라던가?

그 영감한테 소개시켜준 뚜쟁이의 진술서를 읽어 보았더니 가관이더만."

"……."

"그런데 그 기집애가 조홍인을 이층 계단에서 밀어 떨어뜨려 죽이고나서

금고를 열고 60억 가까운 양도성예금증서를 빼내 간거야."

다시 입맛을 다신 박용수가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가정부가 신고를 했어. 가정부를 아침 일찍 심부름 보내놓고 범행을 저지른 것이지.

제 물건을 다 챙겨갔지만 옷가지하고 면허증이 든 지갑을 빠뜨렸더구만, 나쁜 년."

"……."

"어쨌든 그년은 곧 잡힐거다.

전국에 지명수배를 내렸으니까.

백동그룹에서 기를 쓰고 언론을 막아서 보도는 안되었지만 수배 전단은 다 붙을거다."

"싱겁게 되었네요."

마침내 강한이 한마디 했다.

"제가 직접 잡아서 족치려고 했더니 말입니다."

"얀마, 잡으면 1계급 특진야. 나도 나서야겠다.

원더우먼이 장미라는 것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단 말이다.

그걸 알고 있는 인간은 너하고 나, 둘이지."

"……."

"내가 잡으면 원더우먼에다가 살인 강도범까지 함께 잡는거다."

"형님."

강한이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는 박용수를 보았다.

"그 기집애가 CD를 갖고 있다면 우리한테 올 가능성이 많겠네요."

"그렇지."

쓴웃음을 지은 박용수가 머리를 끄덕였다.

"다시 네 앞에 나타날지 모른다."

남대문 사채 골목에서 CD를 할인하는 비율은 아마 거래량의 80%쯤 될것이다.

강한의 시선을 받은 박용수가 말을 이었다.

"경찰이 사채 시장에 쫙 깔리겠지만 어디, 현장에 있는 너희들보다 정보가 빠르겠냐?

다 너희들한테 의지하겠지."

"그래서 형님도 겸사겸사."

"자식이."

눈을 흘긴 박용수가 곧 머리를 끄덕였다.

"얀마, 공생공사다. 상부상조 하는 것이고."

"제가 정보원을 쫙 깔아 놓지요. CD 할인하러 연락이 오는 연놈들을 다 추적할랍니다."

"보통 기집애가 아니야."

"이젠 안 넘어갑니다."

그러더니 강한이 주머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박용수에게 내밀었다.

"형님, 용돈 쓰세요. 100만원 넣었어요."

박용수는 가난한데다 삥땅도 못뜯는다는 것을 강한이 알고 있는 것이다.

 

 

14

 

 


"이거 무슨 돈이야?"

눈을 부릅뜬 박용수가 강한을 노려보았다.

얼굴빛까지 상기되어 있었다.

"니가 왜 나한테 돈을 줘?"

"돈이 생겼거든요."

"돈이 생기다니?"

박용수가 다그치듯 물었다.

"어떻게?"

"당연히 받을 돈 받고 수수료 받은 것이니까 괜찮아요."

"그런데 왜 나한테 돈을 내놓아?"

"형님한테 여러가지로 신세 입었으니까."

"시발놈이."

"형님도 3년 전에 나한테 용돈 줬잖아? 세 번이나."

탁자 위에 봉투를 내려놓은 강한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형님은 융통성이 없어서 항상 궁한 거 내가 알아요. 없을 때 서로 돕고 사는거지 뭐."

"야, 한아."

하고 박용수가 불렀지만 강한은 발을 떼었다.

박용수가 쫓아와 봉투를 도로 줄까 걱정이 된 강한은 서둘러 커피숍을 나왔다.

박용수는 따라나오지 않았다.

윤리지한테서 5억5000만원을 받아낸 것이다.

최강문과 윤리지를 다시 밴에 싣고 미리 잡아놓은 근처의 빈 농가에 들어갔는데

작업은 한 시간도 안돼서 끝났다.

윤리지는 돈 5억5000만원보다도 이광그룹 한창수와의 거래가 폭로될까 두려워했다.

강한이 몇 억을 더 내라고 해도 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확실한 강도가 된다.

강한은 5억5000만원을 받아 유경의 박기준한테 주고 딱 30%인 1억6천500만원을 받았다.

이번 작업에는 팀원 넷에다 KK단 조재일까지 포함이 되었으므로 각각 3000만원씩 분배를 했고

강한의 몫은 4천500만원이 떨어진 것이다.

박용수와 헤어진 강한이 강남대로를 달려 내려갈 때 옆에 놓인 핸드폰이 울렸다.

오전 11시15분. 강남대로는 차량 소통이 잘 되어서 강한도 차에 속력을 내는 참이다.

"형, 동향 보고."

핸드폰을 귀에 붙이자 천상태의 목소리가 울렸다.

목소리에 활기가 차 있다.

 

"장미의 동생 장선의 행동에서 수상한 장면 포착."

"그래?"

강한이 차의 속력을 줄이고는 강남대로에서 논현로 쪽으로 우회전했다.

그때 천상태의 말이 이어졌다.

"장선이는 감시받고 있는 것을 알아. 형사가 바짝 붙어 따르고 있는데도

그 기집애는 전혀 뒤에다 신경을 쓰지 않는 척하지. 하지만 난 힌트를 찾아냈어."

"말해."

"장선이가 다니는 학교 앞 오뎅집."

"오뎅집?"

강한이 길가에 차를 세우고는 핸드폰을 고쳐 쥐었다.

 

그러자 천상태의 말이 이어졌다.

"그래. 무정집이라는 오뎅집인데 장선이 그 기집애가 책가방을 매고 갔는데."

"……."

"장선이를 미행한 형사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은데 그 기집애가 나왔을 때

그 가방이 더 무거워져 있었어. 그 집에서 뭘 넣은거야."

 
"……."

"지금 전철을 타고 집에 가는 것 같은데. 형, 어떻게 하지?"

"가방을 뺏어."

불쑥 강한이 말하자 천상태가 긴장했다.

"지금?"

"그래, 걔가 집에 들어가기 전에."

"애들 불러야겠는데. 지금 형사가 바짝 붙어있단 말야."

"집에 도착하려면 얼마나 남았어?"

"50분 정도. 여긴 을지로 3가야."

"좋아. 집 앞에서 날치기 한다."

강한이 자르듯 말했다.

"용철이한테 연락해서 사당동으로 보내. 오토바이는 명준이 시키고."

"알았어, 형."

천상태가 서두르듯 먼저 전화를 끊었다.

박명준은 중국집 배달 출신으로 오토바이 전문이다.

오토바이만 타면 신이 나서 별짓 다하고 실제로도 그만한 재주꾼이 없다.

가방 채는 건 일도 아니다.

 

 

15.

 

 


팀워크는 사기가 근원이 된다. 강한 팀의 사기는 요즘 그야말로 충천한 상태였다.

며칠 전, 윤리지 작전이 끝나 수당을 나눌 때 팀원 셋의 감동한 얼굴이 그 증거가 될 것이다.

다른팀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

실력이나 경륜이 높은 팀장이 군림하고 있어서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 같아도

사기는 바닥이다.

회사에서 맡긴 일은 물론이고 외부 주문 작업이 끝났을 때 배당은 팀장 8에 팀원 2의 비율인

것이다.

팀원 서너명이 그 2할의 몫을 나눠 가졌지만 불평하지 못했다.

분배나 관리는 전적으로 팀장 권한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팀은 팀원이 수시로 바뀌었다.

한달이 안되어 그만둔 놈들도 있었고 석 달 이상 근무한 놈이 드물었다.

인력이야 얼마든지 있어도 그런 팀의 능률이 높을 리가 없다.

강한 팀의 팀원은 모두 2년 가까이 되었고 능률은 다른 팀의 평균 세 배.

 그래서 다른 팀의 팀장들이 팀원 수당을 슬슬 높이려는 시도는 했다.

그러나 팀장의 이직도 빈번해서 도로아미타불이 되는 때가 많았다.

제가 그만두는 경우도 있었지만 실적 미달이 되면 팀장을 가차없이 자르기 때문이다.

오후 1시. 강한이 장안동 영남호텔 뒷골목의 한식당 전주집 방안으로 들어섰을 때

기다리고 있던 천상태와 백용철, 그리고 운동모를 거꾸로 쓴 사내가 맞았다.

요놈이 바로 오토바이 치기배, 박명준이다.

 박명준이 방안이었지만 허리를 기역자로 꺾고 절을 했으므로 강한이 싱긋 웃었다.

"보자."

강한이 자리에 앉으면서 말하자 박명준이 가방을 두 손으로 내밀었다.

등에 멘 가방을 면도칼로 잘라온 것이라 끈이 산뜻하게 잘려져 있다.

강한이 가방을 받아 백용철에게 건네 주었다.

그러자 백용철이 익숙한 손놀림으로 가방에 든 내용물을 식탁 위에 쏟아 놓았다.

"으음."

잠시 후에 강한의 입에서 신음같은 탄성이 울렸다.

"이런."

눈을 둥그렇게 뜬 백용철이 감탄했고 천상태는 시선이 집중된 비닐 뭉치를 집어 내용물을 꺼냈다.

수표다.

그것도 여러번 사용한 소액권 수표뭉치. 10만원권, 50만원권까지 다양했는데 고액권은 없다.

천상태와 백용철이 수표를 세어 분류해 놓았다.

"7천500만원인데, 형."

천상태가 말했을 때였다.

"여기."

하고 박명준이 가방 옆쪽 주머니에서 접혀진 종이를 꺼내 강한에게 내밀었다.

천상태와 백용철이 여러 번 가방 안을 뒤집고 엎어서 털어보기까지 했지만 발견하지

못했던 종이였다.

종이를 받은 강한은 그것이 편지라는 것을 알았다.

강한은 편지를 읽었다.

'선아, 6천500만원은 내가 인터넷 사기로 번 돈이야.

정확히 6천470만원 사기를 쳤는데 피해자는 53명이지.

내가 나중에 입금 통장을 제출하면 다 밝혀질거야.

하지만 내가 돈을 내놓는다고 내 죄가 없어지는건 아니겠지.

어쨌든 6천500만원을 챙겨서 네가 강동경찰서 형사과장 앞으로 보내.

나도 서류를 따로 보낼 테니까.

그리고 나머지는 엄마하고 네가 써.

당분간 엄마 시장에 못나갈 테니까 병원이나 약값도 꽤 들테니까 말야.

그리고 엄마한테 절대로 걱정하지 말라고 해. 돈 갚았으니까

잘 해결 될거라고. 만일 엄마가 아프거나 기운 떨어지면 나 죽어 버린다고 꼭 전해.

그럼 다시 연락할께. 언니가.'

강한이 다 읽고 머리를 들었을 때 기다리고 있던 천상태가 물었다.

"형. 얘가 바쁘다는데."

옆에 앉아있는 박명준을 눈으로 가리킨 천상태가 팔목시계를 보는 시늉을 했다.

"택배 일하다가 달려와서 말야."

머리를 끄덕인 강한이 턱으로 탁자 위에 놓인 수표 뭉치를 가리켰다.

"1000만원 떼어줘."

그리고는 강한이 박명준을 보았다.

"돈 감춰두고 당분간 쓰지마. 걸리면 내가 먼저 널 죽일 테니까."

 

 

16.


"아니, 그렇게 갑자기 떠나면 돼?"

당황한 이석훈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말야."

"미안해요. 석훈씨."

전화기를 고쳐쥔 장미가 창밖을 보았다.

하늘이 맑다. 구름 한 점 떠있지 않은 맑은 하늘.

시선을 돌려 비행기를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자신은 지금 LA행 비행기를 타려고 인천공항에 나와있는 것이다.

물론 이건 이석훈에게 말해준 내용이다.

시선을 내리자 길 건너편 빌딩에 붙여진 간판이 보였다.

'수원통닭.' 그렇다. 여기는 수원이다. 인천공항이 아니다.

"아, 탑승 시간이 되었네요."

장미가 서두르듯 말했다.

"제가 도착해서 연락할게요."

"미국 연락처를 알려줘."

"아버지 회사에다 해도 되지만 내가 따로 사무실을 낼 계획이어서요."

'급할 수록 천천히. 차근차근. 당황하지 말 것.'

장미가 평소 좌우명으로 외우는 문구를 머릿속에 떠올리면서 차근차근 말했다.

 
"곧 새 전화번호가 나오면 바로 연락을 할게요. 석훈씨."

"그럼 집에 해도 되지 않겠어?"

"전 집으로 남자가 전화 걸어온 적이 없어요. 아직."

웃음띤 목소리로 말했지만 장미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조금 짜증이 난 것이다.

"시장조사 하러 한국에 왔다가 남자 친구나 사귀고 왔다는 잔소리 듣기도 싫거든요."

"알았어."

이제 석훈의 목소리도 가라앉았다.

조홍인의 별장에서는 이틀에 한번꼴로 연락을 했다.

지방에 가 있다는 핑계를 대었는데 갑자기 공항에서 연락을 받은 석훈이 당황한 것이다.

이석훈과는 이제 이별이다. 우연히 만난다면 모를까 이쪽에서 찾지는 않을 것이다.

이석훈은 청량제 역할이었다.

액세서리 역할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그와 같이 았는 동안은 현신을 잊고 이장미가 되어서 즐길 수 있었다.

그것뿐이다.

그와 사랑하고 결혼할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던 것이다.

"석훈씨. 그럼 연락할게요."

장미가 말하자 석훈이 다짐했다.

"꼭 연락해."

"알았어요."

그리고나서 장미가 서비스로 한마디 덧붙였다.

절대 아쉬워서 그런게 아니다. 음식 먹고 팁 줄때의 기분과 같았다.

"사랑해요. 석훈씨."

그러자 이석훈이 다급하게 맞받았다.

"사랑해, 장미. 진심이야."

이석훈의 진심이 목소리로도 느껴졌으므로 장미는 방긋 웃었다.

팁 줬다가 큰 사은품을 선물로 받은 기분이었다.

"안녕."

"꼭 연락해."

장미는 핸드폰의 덮개를 덮었다.

그리고는 잠깐 핸드폰을 내려다 보다가 전원을 껐다.

이 핸드폰은 버려야 될 것이다.

심호흡을 한 장미는 다시 푸른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이곳은 수원 변두리의 오피스텔 빌딩이어서 앞쪽 도로는 한산했고 주위도 조용했다.

한동안 창밖을 내다보던 장미가 탁자 위에 놓인 다른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버튼을 누르고 신호음을 듣고 있을 때 문득 조 회장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다.

계단 안쪽에 눕혀져 있어서 외면한 채 지나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별장을 도망쳐 나온지 오늘로 닷새째가 되는데도 조홍인의 사망기사는 보지 못했다.

신문을 다섯개나 이틀간 훑어 보았어도 부고란에 조홍인이란 이름이 끼어있지 않았다.

그때 신호음이 끊기더니 김희선의 목소리가 울렸다.

"여보세요."

김희선은 이 전화번호를 모른다.

"어머니, 저예요."

그러자 김희선이 2초쯤 가만 있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아니. 너 장미 아니냐? 너 지금 어디 있어?"

장미는 창밖을 쏘아보았다.

조홍인은 이 여자한테 내 몸값으로 2억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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