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음택지

風水의 鼻祖 도선

오늘의 쉼터 2010. 4. 8. 21:48

 

風水의 鼻祖 도선

 風水地理學(풍수지리학)의 뿌리는 동양의 우주론, 즉 陰陽五行說(음양오행설)이다.
대부분의 종교는 우주론과 생사관을 바탕으로 하고 그 위에 삶의 규범, 즉 윤리학을
덧입힌 것이다. 음양오행설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힘으로는 알 수 없는 개인과 가문의 운명에 대해, 민족과 국가의 미래에 대해, 권력의 부침에 대해 예측하고 설명하는 종합적인 학문 체계로 발전했다.
그리고 이를 천문지리와 연계하여 파악하는 것이 風水지리학이었다.
 
  선인들의 세상에서 風水지리학은 당당한 철학이었고, 지혜였으며 과학이었다.
서양의 종교와 학문이 들어온 이후 기존 전통사상·종교들과 마찬가지로 風水지리학은 「迷信(미신)」의 골짜기에 밀려나고 말았지만,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風水는 과거 시험의 한 과목으로 당당하게 대접받았다.
 
  우리나라에 風水가 본격 소개된 것은 신라末(말) 道詵 國師(도선 국사·827~898)에 의해서였다. 도선이 우리나라 風水지리학의 鼻祖(비조)라는 사실에 이견이 없다.
後三國(후삼국)의 혼란기에 등장한 도선은 국토 전체를 두루 살피고 명당을 찾아내어
적극 활용할 것을 제시했다.
그는 고려의 개국을 예견하면서 蒼生(창생) 구제를 도모했다.
그는 한두 사람이나 가문의 사사로운 발복을 위해 봉사한 사람이 아니었다.
風水의 본령을 개척하고 그 정신을 만들어 낸 사람이었다.
 
  한국 불교사에서 도선의 위상은 매우 특이하다. 신라는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盛唐(성당) 때의 五家七宗(오가칠종)을 수용했다.
특히 불교의 정수인 禪(선)불교가 성행하여 「九山禪門(구산선문)」을 열었다.
이런 문화적 토양 위에서 도선이라는 인물이 태어난다.
 
  靈巖(영암: 오늘날의 전남 영암군 군서면 구림리 月出山 자락)에서 태어난 도선은(속성은 金氏로 일설에는 신라 王孫이라고 한다) 15세에 出家(출가)하여 화엄사에서 경전공부를 시작했고, 20代 초반에는 구산선문의 하나인 곡성의 동리산 泰安寺(태안사)에서 「桐裏山門(동리산문)」을 연 惠哲(또는 慧徹·혜철)國師에게 師事(사사), 大悟(대오)했다.
이 인연으로 도선은 구산선문 동리산派(파)의 제2代祖(대조)가 된다.
 
  여기까지 살펴보면 도선은 敎(교)와 禪(선)을 겸비한 禪僧(선승)의 면모에 어김없다. 그러나 도선의 무한한 發心(발심)은 禪의 경지를 스스로 확대한다.
 
 
  山川이 곧 佛國土
 
海東風水의 비조 도선 국사.

  密敎(밀교)의 영향을 받은 도선은 밀교의 중심사상인 「卽身成佛(즉신성불)」, 즉 내 몸이 곧 부처라는 사상을 받아들였다. 그는 이 사상을 바탕으로 중국 風水와는 다른 海東風水法(해동풍수법)을 창안, 山川(산천)이 곧 佛國土(불국토)라는 山川曼茶羅(산천만다라) 사상으로 발전시킨다. 山川裨補寺塔論(산천비보사탑론: 병든 산천을 사탑과 당간 등으로 치유하여 세상을 평온하게 한다는 주장)의 근거가 여기 있다. 도선의 風水는 佛國土를 이루기 위함이었고, 창생을 구제하는 佛法의 발현이었다.
 
  도선이 중국에 건너가 밀교 승려 一行(일행)에게 배웠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일행은 唐나라 초기의 사람이고 도선은 唐나라 후기의 사람이니 연대가 맞지 않는다.
 
  도선은 穿道寺(천도사)에서 具足戒(구족계)를 받고 太白山(태백산)과 雲峯山(운봉산)에서 토굴을 파고 정진한 후, 천하를 유력하며 산천을 살피다가 광양 백계산의 玉龍寺(옥룡사)에서 후학들을 지도했다. 이로 인하여 스스로 號(호)를 玉龍子(옥룡자)라 지었다.
 
  도선은 「도선비기」, 「옥룡자비기」, 「송악명당기」, 「도선답산가」, 「삼각산명당기」, 「풍수도」(결록기) 등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이 책들 가운데 현존하는 것은 없으나 「고려사」 등의 역사서에 인용되거나, 민간에 秘傳(비전)되어 온 사본들이 있다.
 
  도선은 王建(왕건)의 고려 건국을 예견하고 도왔다. 춘천의 申崇謙(신숭겸) 묘소는 도선이 王建의 身後地(신후지)로 점지했던 자리이고, 黃喜(황희) 정승의 祖父(조부) 묘소는 도선이 점지하고 懶翁禪師(나옹선사)가 이를 재확인한 천하 명당이다.
 
 
  實學者들의 風水 검증
 
  수백 년 앞을 내다보는 형안을 지녔던 「도참의 비조」 도선은, 자기 조상은 어떤 명당에 묻었을까?
 
  이것은 단순한 호기심의 차원을 넘어 風水의 본질과 효용을 묻는 중요한 질문이 된다. 조선후기에 實學(실학)의 세례를 받은 선비들이 지방 郡縣(군현)의 首長(수장)이 되어 부임하면 惑世誣民(혹세무민)하는 미신을 뿌리 뽑는 일부터 착수했다.
 風水가 그중의 하나였던 듯하다.
 
  어느 실학자는 風水들이 「자손 번성할 대지」라고 점지한 묏자리의 후손들을 조사하여 과연 번성했는지를 실증적으로 따졌고, 「부자 낳을 자리」라고 점지한 명당의 후손들이 과연 부자인지 아닌지를 조사하여 「風水의 허황함」을 입증하려고 했다.
 
  그중 하나가 「風水 자신들은 명당에 들었는가? 風水들은 자기 조상들을 명당에 묻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이를 입증하는 일이었다.
 
  그 결과 대부분의 유명·무명의 風水들이 자기 조상 무덤을 명당에 안장하지 못한 것은 물론, 자신의 身後地조차 명당에 잡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렇다면 風水는 믿을 수 없는 허황한 이야기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내놓으려는 것이 이번 호의 주제 중 하나이다.
 
  먼저 도선국사의 경우이다. 스님들에게 있어 「부귀영화」는 중요한 삶의 목표가 아니다. 그러나 어머니의 身後를 안장케 하려는 욕망은 孝心이니 속인과 출가인을 가리지 않고 지니는 욕망일 것이다.
 
  도선국사는 명당을 잡아 어머니의 身後를 모셨다. 그러나 3년 만에 天破(천파: 자연 재해로 묘지가 파손되는 일)가 일어나고 말았다. 여기서 도선은 「하늘의 뜻을 어찌 거역하리」 하고 탄식했다고 한다. 風水라 하더라도 하늘의 뜻을 거스르면서 자신과 자기 가문의 발복을 도모할 수는 없다는 깨달음이었다.
 
 
  無學대사
 
한양 천도를 이끈 無學대사.

  도선이 활동하던 때로부터 500년이 흐른 뒤 이 땅에는 도선을 그대로 빼어 닮은 승려가 한 사람 출현한다. 無學(무학)대사(1327~1405)가 그 사람이다.
 
  무학대사의 俗名(속명)은 自超(자초), 俗姓(속성)은 朴씨이고, 號는 溪月軒(계월헌)이며 佛名은 無學이다. 몽골의 침입을 물리쳤던 박서 장군의 5대손으로 경상남도 합천군 三岐(現 합천군 삼가면)에서 태어났다.
 
  그는 18세에 小止禪師(소지선사)를 은사로 출가하여 慧明(혜명)국사에게 佛法을 배우고 공민왕 2년(1353) 중국(元)에 유학하여 먼저 중국에 와 있던 고려승 惠勤(혜근)·指空(지공)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귀국 후에는 王師가 된 혜근의 法을 이어받았다.
 
  風水지리와 역사 변천을 내다볼 줄 아는 혜안을 지녔던 그는 고려가 기울고 조선이 발흥하는 데 기여를 했다. 태조 李成桂(이성계)의 특별한 신임을 얻어 조선 건국 후 王師가 되어 大曹溪宗師(대조계종사)·禪敎都摠攝(선교도총섭)의 직위를 얻었으며, 妙嚴尊者(묘암존자)의 號를 받았다. 그는 태조를 수행하여 계룡산과 한양을 오가며 새 도읍지를 선정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무학과 관련해서는 많은 전설이 전해진다. 특히 이성계와의 일화들이 유명한데, 서까래 세 개를 등에 지었다는 이성계의 꿈을 「왕이 될 꿈」으로 해몽하여 이름 지었다는 釋王寺의 내력에서부터 「무학을 꾸짖은 농부(사실은 삼각산 산신령이었다고 한다)」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실로 화려하다.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는 나라를 열자마자 제일 먼저 수도 이전을 서둘렀다.
 
  먼저 떠오른 땅이 한양이었다. 한양은 백제 678년의 역사 가운데 475년간 송파를 중심으로 번성한 도읍지였다. 고려중기 이래 「松都(송도)의 地氣(지기)가 쇠하여 도읍지로서의 命이 다하였으며 한양이 명당길지」라는 도참설이 떠돌고 있었다.
 
  1392년 7월17일 송도의 壽昌宮(수창궁)에서 즉위한 태조는 즉위 한 달 만인 그해 8월 都評議使司(도평의사사: 고려말 최고 정무기관, 조선 태종 때 議政府로 개편됨)에 한양으로 천도할 것을 명한다. 이에 따라 도평의사사는 즉시 한양의 고려 궁궐을 수리하는 등 遷都(천도) 작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趙浚(조준) 등이 천도를 서둘지 말 것과 천도 이전에 새 왕조의 이름부터 지어야 한다고 주청하는 바람에 한양 천도사업은 일단 보류되었다.
 
 
  한양 천도를 둘러싼 名堂 논쟁
 
  태조 2년 權仲和(권중화)가 새 도읍지의 후보로 계룡산 기슭의 신도안을 천거하자 태조는 직접 계룡산 일대의 지형을 살피고 수도를 계룡산 기슭으로 결정했다. 곧 계룡산 기슭에서는 권중화가 구상한 도면에 따라 새 수도의 건설작업이 시작됐다.
 
  태조 2년 말에 河崙(하륜·1347~ 1416)이 『신도안의 형세가 명당이 아니므로 새 도읍지로 불가하다』는 의견을 내놓았고, 이에 따라 계룡산 기슭의 새 수도 건설작업은 중단됐다.
 
  태조로부터 새 수도의 입지를 물색하라는 명을 받은 하륜은 『毋岳(무악)이 비록 협착하지만 명당』이라고 추천했다.
 
  이에 대해 書雲觀(서운관)에서는 불가함을 주장하고 佛日寺(불일사)와 鐥店(선점)을 도읍지로 천거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도평의사사가 불일사 및 선점의 불가함을 주청하는 등 새 도읍지를 둘러싼 갑론을박이 계속됐다.
 
  태조 3년, 태조는 재상들에게 새 도읍지를 천거해 보라고 일렀다. 성석린은 부소를 천거하고, 정총은 개성을 주장했으며, 하륜은 무악을 주장하고, 정도전은 무악을 반대하는 등 「백 사람이 백 가지 주장을 하는」 난맥상이 벌어졌다.
 
  이때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王師인 무학이었다. 무학은 처음 오늘날의 왕십리 부근을 도읍지로 점지했으나 그곳 땅속에서 도선이 묻어 두었다는 「往十里」(왕십리: 여기서 10리를 더 나가라) 팻말이 나오자 500년 후를 꿰뚫어본 도선의 혜안에 새삼 감탄했다고 한다.
 
  무학의 주장에 따라 도읍지는 한양으로 정해졌다. 그러나 한양에서 궁궐의 배치와 都城(도성)의 구상이 또 문제였다.
 
  이 문제를 놓고 다시 신하들 간에 격론이 일어났다. 무학대사는 인왕산 아래를 주장했고, 정도전은 북악산 아래를 주장했는데 결국 정도전의 주장대로 경복궁이 건립됐다. 이 선택이 잘못됐다는 것은 그 이후의 조선왕조史가 잘 설명해 준다. 오늘날의 청와대도 이때의 잘못된 선택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궁궐을 짓고 새 도시를 건설하면서 한양의 風水지리학적인 결함이 지적되었고, 그러한 결함을 보완하는 장치가 마련되었다. 한양 궁궐에서 남쪽으로 보이는 관악산이 火山이기 때문에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 궁궐 앞에 해태 같은 물짐승을 앉혀 놓은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처럼 명당자리를 활용하면서 땅이 지닌 나쁜 점을 보완하여 全국토를 불국토로 만들자는 것이 도선국사의 비보사탑론이고, 이를 이어받은 것이 裨補風水이다. 무학은 도선의 비보풍수를 계승했다고 볼 수 있다.
 
 
  河崙
 
  한양 천도의 일등공신은 말할 것도 없이 무학대사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큰 역할을 한 사람은 河崙이었다. 하륜은 공사가 진행되고 있던 계룡산 신도 건설을 중단하게 하고 한수 이북의 무악을 천거함으로써 한양 천도의 가능성을 다시 열었다.
 
  그는 태종 이방원의 책사로 이방원이 왕권을 쥐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나, 무엇보다 큰 치적은 이미 진행 중이던 계룡산 수도 건설을 중단시키고 논의를 원점으로 되돌린 일이었다.
 
  오늘날 행정복합도시라는 이름의 新행정수도 世宗市(세종시) 건설의 문제점들을 이러쿵저러쿵 떠들면서도 정작 온몸으로 그것을 중단시킬 만한 강골의 선비나 관료가 보이지 않는 현실에 비춰볼 때 하륜의 공적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물론 하륜이 그 같은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風水지리에 대해 깊은 조예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중기에 이르면 도선과 무학의 비보風水는 거의 자취를 감추고 대신 祈福(기복)도참의 전형인 發蔭 發福(발음 발복)을 목적으로 명당찾기에 몰두하는 현상이 벌어졌다. 이러한 풍조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風水지리학이 국가 민족의 운명을 개척하는 대국적 지혜에서 사사로운 발복의 수단으로 전락한 것이다.
 
  風水의 名人(명인)들이 무학 같은 高僧大德(고승대덕)이나 하륜 같은 巨儒(거유)에서 기교적인 전문가로 변화되는 징후의 전형을 보인 사람으로 조선 중기 明宗 때 활약했던 전설적인 名風水 南師古(남사고·1509~1571)를 들 수 있다.
 
  남사고는 경상북도 울진(현재의 울진군 근남면 수곡리) 태생으로 易學(역학), 讖緯(참위), 天文(천문), 觀相(관상), 卜筮(복서)의 비결에 두루 뛰어났다. 특히 風水에 밝아 그에 얽힌 수많은 전설 같은 이야기들이 야사에 전한다. 본관은 영양이고 호는 格庵(격암)이다. 호를 딴 「格庵遺錄(격암유록)」과 「南師古秘訣(남사고비결)」, 「南格庵十勝地論(남격암십승지론)」 등 도참서의 내용이 「鄭鑑錄(정감록)」에 수록되어 전해져 오고 있다.
 
 
  才勝薄德의 南師古
 
  남사고는 어릴 때 佛影寺(불영사) 도승으로부터 비결을 전수해 이를 발전시키고, 退溪(퇴계)의 門人(문인)이기도 했으나, 才勝薄德(재승박덕)한 인물이었다.
 
  그가 明宗(명종) 말년에 東西分黨(동서분당)을 예고하자 그대로 되었고, 다시 명종 19년 『내년에 반드시 태산을 봉하리라』 하였는데 바로 그해에 문정왕후가 죽어 태릉에 묻혔다. 그리고 『임진년에 왜적이 쳐들어올 터이니 부디 조심하라』고 일렀는데 과연 임진년에 왜적이 쳐들어왔다.
 
  野史(야사)에서 전해 오는 이러한 행적의 진위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의 十勝地說(십승지설)은 조선후기 이래의 변혁운동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이 사실이다.
 
  남에게 명당 찾아 주는 일에는 천하에 다툴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던 남사고인지라 자신의 어머니가 죽자 당연히 명당에 묻기 위해 온갖 재주를 다하고 노력을 아끼지 않았을 터이다.
 
  그런데 어머니를 명당에 묻어 놓고 다음에 와보니 명당이 아닌지라 옮기기를 아홉 번이나 하였다. 마침내 열 번째 九龍爭珠地(구룡쟁주지)를 얻어 어머니의 유골을 이장하고 봉분을 짓는데 초립동이 하나가 지나가며 노래하기를 『남사고야, 남사고야. 九十葬 남사고야. 九龍爭珠穴인 줄 알겠지만 九蛇掛樹(구사괘수)가 아니냐』 하고 사라져 버렸다.
 
  깜짝 놀란 남사고가 묘를 다시 파려고 했으나 문득 생각해 보니 여기서 더 이장하면 천벌을 받을 것이 분명하므로 자신의 적덕하지 못함을 한탄하고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名堂에 묻히지 못한 南師古
 
  남사고는 이처럼 어머니를 명당에 묻는 것은 실패했으나 자신의 身後地만은 전날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그는 병들어 죽게 되자 여섯 아들을 불러 놓고 일렀다.
 
  『나는 적덕하지 못하여 조상을 凶地(흉지)에 묻었으니 이는 하늘의 뜻이다. 그러나 내 자리는 웬만한 자리를 잡아 놓았으니 어기지 말고 꼭 그 자리에 묻도록 하여라』
 
  남사고가 죽자 아들들은 장례 전날 아버지가 생전에 점지해 둔 자리에 광을 파고 그 위에 배석을 덮어 두었다. 그날 밤 梅花里 尹씨네에 시집간 남사고의 딸이 몰래 壙中(광중)에 물을 부어 놓았다.
 
  다음날 광중에 물이 고인 것을 본 남사고의 아들들이 아무리 아비의 유언이라 하나 물구덩이에 장사 지낼 수는 없으므로 오늘날의 수곡리 초등학교 뒷산에 새로 자리를 정하여 묻었다.
 
  전설적인 風水 남사고의 무덤은 명당과는 거리가 멀다. 묘는 을씨년스럽고 그가 태어난 집터는 성황당이 돼버렸다.
 
  남사고가 원래 점지해 둔 자리에는 훗날 尹씨가 묻혔다. 그 때문에 尹씨는 번창하고 南씨는 상대적으로 쇠락했다. 南씨와 尹씨 간에 곱지 않은 감정의 앙금이 생긴 것도 이때부터였다고 한다. 수곡리에는 개천을 건너는 다리조차 南哥다리 따로 있고 尹哥다리 따로 있을 정도로 두 집안은 소원한 사이가 된 것이다.
 
  조선중기 이후의 風水가 모두 기복의 명당찾기 기교로만 흘렀던 것은 아니다. 風水 전문가가 아닌 학자 奇人(기인) 중에 도참에 안목을 갖춘 인물들이 가끔 나와 천문지리를 꿰뚫으며 이를 창생구제에 활용한 경우가 있었다.
 
 
  토정 이지함
 
충남 보령시에 있는 토정 이지함의 묘.

  土亭 李之函(토정 이지함·1517~1578)은 「土亭秘訣(토정비결)」의 저자로서 요즘 사람들에게도 잘 알려진 학자 奇人이다. 본관은 韓山(한산), 호는 水山(수산) 또는 土亭(토정)이며 고려말 巨儒(거유) 牧隱 李穡(목은 이색)의 6代孫으로 현령 李穉(이서)의 아들이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맏형 李之蕃(이지번)에게 글을 배우다가 徐敬德(서경덕)의 문하에 들어갔는데 數理(수리)·醫學(의학)·陰陽(음양)·卜筮(복서)·術書(술서) 등에 두루 능통한 것은 서경덕의 영향이었다고 한다.
 
  1573년 조정에 천거되어 淸河(청하: 지금의 포천) 현감이 되었다. 포천현감으로 재직 중 임진강의 범람을 미리 알아 많은 생명을 구했다.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갔으나 이번에는 아산현감으로 등용되었다. 벼슬살이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일단 현감으로 부임하자 그는 즉각 걸인청을 만들어 노약자와 걸인들의 구제에 나섰다. 奇人이 아니라 가장 정상적인 목민관이었던 셈인데, 당시의 관료들의 행태와 너무 달랐기 때문에 奇人으로 불린 것뿐이었다.
 
  토정은 생애의 대부분을 마포 강변에 흙담 움막을 짓고 살았다. 토정이라는 호는 여기서 비롯된 것이었다. 토정이 의학과 복서에 밝다는 소문이 나자 사람들이 신수를 묻기 위해 몰려왔다. 이에 복서의 대중화를 위해, 즉 가난한 서민들을 위해 지어 낸 것이 「토정비결」이었다.
 
  토정은 전국 산천을 두루 다니며 명당길지를 점지했는데 그 목적은 「사람을 살리기 위함」이었다. 즉 창생구제가 風水의 목적이었다. 그 때문에 분당 중앙공원 내에 있는 한산李氏 묘소를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 토정이 점지한 자리가 여럿 있다. 그러나 토정 자신의 묘는 명당과 거리가 있었다.
 
  충남 보령시 주포면 고정리 국수봉 기슭, 보령화력발전소 부근 서해를 내려다보는 산기슭에 토정의 가족묘지 10여 基(기)가 모여 있다. 토정의 부모와 형제들, 그리고 후손들이 모여 있다.
 
  어떤 이들은 토정 가족묘를 두고 『左靑龍 右白虎(좌청룡 우백호)가 뚜렷하고 바다 건너 삼태봉 가운데 중심봉의 안산이 수려하여 흠잡을 데 없는 명당』이라고 한다.
 
  그러나 필자가 본 토정 묘는 명당과 거리가 있었다. 보령 앞바다의 지형은 인위적 변화가 심하여 현재 보이는 형상만으로 안산이 수려하느니 할 형편이 아니었다. 게다가 10여 基의 묘지들은 眞穴(진혈)에 든 것이 없었다. 위로부터 3열의 오른쪽 무덤 하나가 생기를 발하고 있어 유일하게 정혈에 든 경우였다. 토정 이지함의 무덤 바로 앞 상석 아래쪽도 강한 생기가 솟아나는 정혈이었으나 아깝게도 토정은 정혈을 비껴나 있었다.
 
  토정의 가족묘가 자리한 국수봉 기슭의 형기론적 국세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자리라는 데는 필자도 동의한다. 그 때문에 무덤군의 뒤편과 위로부터 3열 우측, 그리고 토정묘 상석 아래, 마지막으로 산비탈에서 주차장으로 이어지는 잘룩한 부분에 정혈이 있었다. 천하의 토정 이지함은 내룡의 형세를 보는 안목은 탁월했으나 그 좋은 국세 속에서 정혈을 찾는 데는 실패했다는 증거다.
 
 
  海溢을 물리친 許穆
 
허목

  강원도 삼척시에는 조선 현종 때 삼척부사를 지낸 眉? 許穆(미수 허목·1595~1682) 선생의 「陟州東海碑(척주동해비)」가 있다. 烏石(오석)에 篆書體(전서체)의 대가였던 미수 자신이 大篆體(대전체)로 쓴 비석이다.
 
  비석이 만들어진 사연과 그 내용은 더욱 기이하다. 삼척부사로 부임한 미수 선생은 해마다 해일이 바닷가 마을을 덮쳐 주민들이 재산과 목숨을 보전하지 못하는 딱한 실정을 보고, 동해를 예찬하는 글을 지어 스스로 전서체의 비문을 쓰고 비석을 세웠다. 그러자 그 이후부터 무서운 해일이 삼척 부근을 때리지 않았다고 한다. 조수를 물리치는 신비한 힘을 지닌 비석이라 하여 일명 「退潮碑(퇴조비)」라고 한다. 토정이 포천현감 시절 임진강의 범람을 미리 예고하여 재앙을 막은 것과 결과는 비슷하나 방법은 판이하다.
 
  許穆의 본관은 양천, 字는 文甫(문보) 또는 和甫(화보)이고 호는 眉?(미수)였다. 許積(허적)과 함께 南人(남인)을 이끌고 西人(서인)의 영수인 宋時烈(송시열)과 禮論(예론)에 대해 첨예한 논쟁을 주도한 인물이다. 풍모가 손오공을 연상케 할 정도로 특이했고, 천문지리와 복서에 밝았다.
 
  비석 하나가 해일을 막을 수 있는가?
 
  대답은 『그렇다』이다. 위로 천문에 통하고 아래로 온전히 땅을 안다면 바다라고 해서 통하지 못할 법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허목이 삼척부사 시절에 쓴 척주동해비.

 
  독립기념관 터에 묏자리 잡았던 박문수
 
박문수

  탐관오리들을 징치하고 정의를 세워 일반 백성들의 속을 시원하게 해줬던 전설적인 암행어사 朴文秀(박문수·1691~1756)도 風水의 대가였다. 충남 천안시 북면 은지리, 은석산 정상 부근에 있는 박문수의 묘소에는 그의 생전 행적 못지않게 얽힌 이야기가 많다.
 
  묘터를 잡은 내력은 이러하다. 박문수가 은퇴 후 낙향하여 國風(국풍)과 함께 身後地를 물색할 때 흑성산 아래 터를 정하고 봉분을 만들려고 하니 한 노인이 나타나 『대감 저는 김일수올시다. 30년 전 은혜를 갚고자 왔습니다. 이곳은 200년 후 나라에서 사용할 자립니다. 대감의 만년신후지는 은석산의 장군대좌형입니다』 하고 사라졌다.
 
  이렇게 하여 박문수는 은석산의 장군대좌형에 묻히게 되었다. 그가 원래 터를 잡았던 흑성산 자락은 노인의 말 그대로 200년이 지난 후 독립기념관이 들어섰다. 독립기념관은 명당이다. 박문수가 이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은석산 정상 부근으로 밀려난 것 또한 天理(천리)가 아니겠는가.
 
  은석산의 장군대좌형은 장군만 앉아 있을 뿐 병졸은 없는 자리였다. 박문수는 생전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묘터 아래 마을에 시장(3·1운동 때 유관순이 만세를 불렀던 아우내 장터)을 만들었다. 시장에 사람들이 와글거리면 그것이 곧 병졸과 같은 역할을 할 것이라고 생각해서였다. 이 시장은 日帝 때 없어졌는데 고령朴氏 문중에서는 시장의 병졸들이 박문수의 시야에서 사라지면 집안이 번성하지 못할 것이라 하여 시장 철폐를 반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은석산 박문수의 묘소는 시장이 있고 없는 게 문제가 아니라 형국부터 명당의 요건을 갖추지 못했고, 무덤 또한 진혈에 들지 못했다. 토정 선생과 마찬가지로 어사 박문수는 자신의 무덤을 명당에 앉히는 데 실패한 것이다.
 
  광해군 때 국풍 李懿信(이의신)이 있었다. 해남 맹진 태생으로 孤山 尹善道(고산 윤선도)의 당고숙이었다. 交河(교하)로 천도할 것을 주장한 사람이다. 이의신이 자신의 부친을 장사 지낼 때 해남의 海蝦弄珠形(해하농주형) 大地를 잡아 광을 팔 때 일하는 인부의 실수로 반석을 뚫는 바람에 氣를 잃고 破穴(파혈)하여 명당의 꿈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선조 때 국풍이던 朴相宜(박상의)도 장성의 명당에 묻히고자 하였으나 태교혈이 아니어서 와우형 小穴에 들고 말았다.
 
충남 천안시에 있는 박문수의 묘.

 
  陸英修 여사 묏자리를 둘러싼 논란
 
  國風(국풍), 즉 나라 안에 제일가는 風水들이 이러니 나머지 이름 없는 風水들이야 오죽하겠는가. 복덕방 영감들이 좋은 집에 사는 것이 아닌 것처럼 風水들이 명당을 다 차지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나쁜 자리에 누운 경우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참으로 오묘한 이치가 아닐 수 없다.
 
  광복 후 池昌龍(지창룡)·張龍得(장용득)씨 등 수많은 風水의 대가들이 명멸해 갔으나 여기서는 일일이 거론하기가 번거로우므로 삼가고, 다만 최근까지 명성이 자자했던 현대판 風水의 전설 六觀道師 孫錫佑(육관도사 손석우)에 대해 필자가 직접 보고 들은 것을 토대로 몇 가지 일화를 소개하기로 한다.
 
  육관은 風水지리학에 대한 현대인의 관심을 불러일으킨 인물이다. 그는 金日成(김일성) 사망 예언, 외국 원수들 묘터를 「직접」 점지했다는 자기광고, 대통령 후보의 先塋(선영) 移葬(이장), 자미원이라는 「지상 최고 명당」의 암시 등으로 세간의 관심을 끌어들였다. 덕분에 그는 대중적 인기를 얻었지만, 이 대중적 인기는 곧장 부메랑이 되어 風水의 진지함을 沮喪(저상)케 하고 상업화하는 폐단을 낳았다.
 
  1991년 3월5일, 風水 H씨는 여성잡지 Y지의 발행인 K씨와 前 청와대 비서관 L씨 등과 함께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박지만이 히로뽕으로 구속되고, 근혜와 근영이 자매가 불화하는 소리가 세상에 알려질 정도로 朴正熙(박정희) 대통령 가문의 비극이 끝나지 않는 것은 陸英修(육영수) 여사의 묏자리 때문이 아닌가 한다. 陸여사의 묏자리가 물구덩이라는 것은 風水界의 공공연한 비밀인데 이 자리에 점지해 준 風水가 육관과 지창룡이다. 이들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 것 아닌가』
 
  여성지 발행인 K씨는 그 자리에서 즉각 『유능한 기자들을 붙여 취재해 보겠다』고 약속했고, 그 약속은 지체 없이 이행되었다.
 
  그해 4월호 Y지에는 당시 한국역학지리학회 회장인 지창룡과, 한국족보학회 회장 등 무려 30여 개 단체의 「회장」 직함을 지니고 있던 육관을 인터뷰한 기사가 실렸다. 陸여사 묘소와 관련된 중요한 대목을 추리면 다음과 같다.
 
  <지창룡 『전날 청와대로부터 연락을 받았는데, (당일) 좀 늦게 국립묘지에 도착했어요. 그랬더니 이미 당시 지관으로 이름이 나 있던 남노인과 손노인이 먼저 와서 보고 있었어요. 金鍾泌(김종필)씨와 陸寅修(육인수)씨도 같이 있었는데, 벌써 자리를 정해 놨더라고요』
 
  손석우 『지창룡씨와 함께 묏자리를 잡으려고 다니다가 李박사 묘 아래쪽과 위쪽을 점찍었으나 지씨가 계속 우겨서 나는 손을 털고 빠져나왔어요』>
 
  이 우스운 책임공방은 법정 고소사건으로 비화됐는데, 사실 여부를 떠나 이런 모습이 風水에 대한 世人들의 믿음을 크게 손상시켰다.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 있는 朴正熙 前 대통령과 陸英修 여사의 묘.

 
  金日成 사망을 예언한 육관도사 손석우
 
  육관이 유명해진 데는 몇 가지 대한민국 현대사의 중요한 사건과 연관지어 언론이 「만들어 낸」 측면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金大中(김대중) 前 대통령 선친 묘소 이장과 관련된 부분이다.
 
  金大中 前 대통령이 아직 야당 지도자로 있을 때 그 부모와 전처 車씨 묘소를 용인으로 이장하는 일을 육관이 맡았다. 세간에는 이로 인하여 金大中씨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는 소문이 돌았고, 그 소문은 아직도 진실인 것처럼 떠돌고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필자가 보기에 金大中 前 대통령 선친 묘소와 車씨 묘소는 모두 失穴(실혈)하여 명당이 아닌 평범한 「무덤」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런 무덤의 자손이 어떻게 대통령이 될 운을 타고났다는 말인가? 필자가 더 자세하게 확인할 길이 없으나 金大中씨 부모 묘소 말고 그 이전 선영을 샅샅이 살펴보면 아마 틀림없이 대단한 명당(군왕지)이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육관을 결정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사건은 「金日成 사망」이었다. 이 「사건」을 예고한 대한민국의 무속인·風水 등이 육관 말고 몇 사람 더 있었으나 언론을 타고 독보적으로 유명세를 탄 것은 육관이었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TV 화면에 등장한 육관은 『나는 땅속이 훤히 보인다』고 장담했고, 이에 자극받은 모 방송사의 PD가 『그렇다면 시험해 보자』고 미리 땅속에 뭔가를 묻어 놓고 육관의 예지력을 시험해 보기로 했으나 그 자리에 육관은 나타나지 않았다.
 
  육관은 또 「자미원」이라는 이름의 「지상 최고의 吉地」가 충청남도 어딘가에 존재하며 전 세계 인구가 78억이 될 때 대한민국에서 세계를 이끌 지도자가 등장하는데 자미원에 묘를 쓴 사람의 가문에서 나온다고 예언했다.
 
  육관이 他界(타계)했을 때 사람들은 자미원과 관련하여 육관이 자신의 身後地를 어디에 잡아 두었는지 지켜보았다. 과연 육관은 충청도 가야산 국립공원 내에 身後地를 잡았으나 필자가 보기에 이곳은 지상 최고의 길지와 거리가 멀었다.
 
  張龍得(장용득)도 훌륭한 風水였다. 장용득에 대해서는 본고 2회분(2007년 月刊朝鮮 2월호)에서 朴正熙와 金載圭(김재규)의 엇갈린 운명을 얘기할 때 김재규 선친의 무덤 조성과 관련하여 한 번 등장시킨 일이 있었다.
 
 
  창생구제하는 風水의 등장 기대
 
  그때 김재규 선친의 무덤 자리를 봐주며 『이곳은 君王地(군왕지)』라고 말한 사람이 육관이었다. 군왕이 될 운명을 타고났다고 자기 암시의 덫에 걸린 김재규가 朴正熙를 시해한 후 장용득은 엉뚱한 오해를 받아 수사기관에 쫓기는 신세가 됐다. 風水의 한마디 말이 이처럼 엉뚱한 일을 촉발하는 단서가 되기도 하므로 조심할 일이다.
 
  오늘날 風水지리학은 전환점에 섰다. 신비주의의 옷을 걸치고 전설 같은 이야기로 대중의 관심을 모으며 대중매체의 부추김을 받아 상업주의 시대에 영합할 것인가? 현대과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인간의 삶과 역사 발전의 원리를 천착하여 창생을 구제하는 데 보탬이 될 것인가. 개인의 발복이 아니라 창생의 편안한 삶에 도움을 주는 위대한 風水가 나오기를, 이 시대는 갈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