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음택지

박정희 전 대통령과 금오탁시(金烏啄屍)의 발복.

오늘의 쉼터 2009. 3. 14. 17:07

 

박정희 전 대통령과 금오탁시(金烏啄屍)의 발복.

 

박정희(1917~!979)의 아버지는 성빈(成彬)이요 어머니는 백남의(白南儀)이다.

어머니가 폐경이 다 된 45세가 넘어 낳았는데 5남 2녀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 성빈은 성주에서 빈농으로 살다가 처가인 수원백씨 재실이 있는 조그만 오막에서 살았다.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가 그곳이다.(지금은 구미시 상모동)이다.

병진년 동지달 하순(양력으로 1917년 1월 초순경) 대한이 소한 앞에 와서 얼어 죽는다던

소한 무렵에 성빈의 부친이 돌아갔다.

그해는 추위가 유난히 심했다.살을 에이는 강추위가 뼛속까지 파고 들고 게다가 눈까지

며칠째 앞이 안 보이도록 쏘다지니 장례치르는 일이 막막하였다.

가난하게 살면서 효도 한번 제대로 못한 것이 늘상 마음에 걸였는데 하필이면 이런 추위에 세상을 뜨시다니,

땅이라곤 한볌도 없는 처지인지라 묘 쓸자리란 상상도 할 수없는 일이였다.

성빈은 자신의 신세가 너무나 가련하고 원망스러울뿐이었다.

피눈물을 쏘다도 금방 얼어 붙을 것  같은 맹추위 속에서 성빈은 눈이라도 그처주길 기다리며 하는 수 없이

 5일장으로 치르기로 한것이다.

한이틀 뜸하던 눈이 닷새가 지난 아침에 또다시 펄펄내리는것이 아닌가 그러나 어쩌랴,

이날을 넘길 수는 없어다.

마을 청년들의 도움을 받아 당가(요지음말로는 들것)에다 시신을 싣고 집뒤의 산으로 갔다.

임시변통으로 매장하고자 한 것이다.

눈을 걷어치우고 한자 네치(약42cm) 정도 파네려갔는데 삽날에 돌이 걸였다.

주의를 더 파보아도 온통 돌이니 산전체가 커달안 바위인너래바위(너럭바위) 였던게다.

어떻게 할도리가 없었다.

너레바위는 정으로 쪼아서 될 일도 아니요 다이나마이트를 써도 안되는것이니 성빈은 기가 막혔다.

어쩌면 이렇게도 되는 일이 없단 말인가.

날은 춥고  눈은 펄펄 나리는데 손가락이 자꾸만 오고라드는 자신의 처지가 더없이 처량하기만 하였다.

돌아가신 아버님은 아버님대로 얼마나 애통하시겠는가.

신후지지(身後之地)도 없이 깡추위 속에서 떠돌아다녀야 하는 아버님의 체백(體魄)을 부여잡고

성빈은 대성통곡을 하는데 ,보는 사람마다 같이 따라서 우니 아아, 하늘은 정녕 무심하단 말인가.

체백을 들거적에 싣고 마을로 다시 내려오는 성빈은 억장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눈위에 서리가 나린다드니 기가 막힌 사태가 또 벌어졌다. 마을노인들이 길을 가로막는 것이다.

한번나간 송장은 다시 마을로 돌아오지 못한다며 마을이 망하는 꼴을 보고 싶으지 않으면 다른데로

가라고 했다. 진퇴양난이었다.

날은 슬금슬금 어두어오고 깡추위속에 눈을 펄펄 날리는데 마을로는 다시 갈수도 없고 그렇다고

길가에 시신을 놓아 둘수 없지 않은가 말이다.

여우나 늑대가 파먹어 버리면 이또한 천하의 불효 막심한 일이 아닌가? 성빈은 하는 수가 없었다.

임시변통중의 변통으로 시신을 마을 옆의 산전으로 모셨다.

산전과 산전사이에 푸석하고 메마른 넝쿨가지가 많히 얽혀 있는 곳에 땅을 팠다.

다행스럽게도 그곳은 흙이 푹신푹신하고 색깔도 좋은 곳이 었다. 아버님 죄송합니다.

사정이 다급하여 지금은 비록  터 아닌곳에 잠드시게 하지만 ,후일 날이 풀리면 좋은 터를 잡아서

모실 것이니 불초 소자를 용서해 주십시요.

성빈은 애끓는 호소로써 예를 올리고 땅바닥을 두두리며 혼절하여 쓰러지니

사람들이 모두 그효심에 감복하여 울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누가아랴.

전설로만 전해져 내려오는 금오산(金烏山)2대명혈  중의 하나가 바로 그자리 였던 것을 이름하

금오탁시형이니 장차 제왕이 날 대명당터 였던 것이다.

시신을 묻고온 그날밤 박성빈은 피로에 지쳐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그는 꿈을 꾸었다.

자기가 사는 오막살이 단칸밤의 문을 여는데 서편애 있는 금오산 위로 찬란한 빛이 뻐치는 것을 보았다.

그러더니 잠시 뒤에 엄청나게 큰 태양이 서서히 떠오르는데 온천지에 그 광망이 내리 뻐쳐 빛의 천국을

이루고 있었다.

성빈은 그황홀 장엄한 광경을 보며 환호하였는데 환호하던 자신의 몸이 갑작기 어제 저녘에 쓴

아버지의 묘 바로 앞에 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성빈은 꿈속에서도 이상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금오산은 여기서 서쪽이고 해는 늘 반대쪽에서 뜨는데 어덯게 금오산에서 해가 뜰수 있단 말인가?

그러는 중에 이번에는 반대편 넓은 들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낙동강 이 자주 범남하여 아무것도 할수 없는 아주 쓸모 없는 불용지 였다.

그런데 불용지 그넓은 터에는 옛날 군인들이 창칼을 들고 만세를 부르고 있질 않은가.

(후일 박정희는 아버지 성빈이 꿈꾼 이터에 대규모 공업단지를 세우니 바로 구미공단이 그것이다) 

꿈을 깬 성빈은 괴이하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였다.

그는 이 길몽을 묘터의 발복을 암시해주는 징조로 받아 들였다.

그래서 장차 날이 풀이면 옮기려했던 선친의 묘를 그자리에 그대로 두게 된것이다.

이름하여 금오탁시(金烏啄屍) !

 

하늘이 정하여준 제왕지지는 이렇게 하여 가난한 빈농 박선빈의 선친 채백이 들어가니

그발복으로 자손중에 대통령이 난것이다.

 

박정희의 잉태

그후 백남의는 태기가 있어 양력으로 같은해 9월 30일에 아이를 출산하니 이아이가 바로 박정희였다.

후일 박정희의 주치의에 의하면 ,아버지 성빈이 꿈꾼 그날이바로 박정희를 잉태한 날이라 한다.

태중의 박정희는 불가사이하게 잉태되였고 또한 시련도 많히 겪었다.

그는 어머니 배속에서부터 끊임없이 살기(殺氣)와 싸웠다.

어머니 백남의는 당시 50이넘어 이미 폐경한 지 오래였는데 태기가 있으니

 기이하기도 하고 망신스럽기도 하였다.

게다가 그간 낳아 놓은 자식들도 제대로 걷어먹이기 어려운 형편이라 몇번이나 잉태한 아이를

지우려고 노력하였다.

유산을 하려고 바위위에서 뛰어내려 다리가 부러지기도 하고 오래묵은 지랑물을 몇그릇씩이나

들이키곤 이틀씩이나 깨어나자 못한적도 있었다. 그러나 하늘이 정해준아이를 어쩌겠는가.

금오산 대명당 정기를 받은 아이의 운명을 그 어미가 어찌 운명을 지울 수 있겠는가.

태중의 아기는 모진 시련과 수모를 격으면서도 무럭무럭 자라 어느덧 출산의 그날을 맞이하였다.

1917년 9월 30일. 정사(丁巳)생 박정희는 금오산 동편 자락의 한촌마을에서 우렁찬 울움소리를 내며

 이렇게 태여났든 것이다.갓난아기의 몸은 이상하게도 새까맣기만 하였다.

마치 까마귀의 날개 빛깔처럼 흑색이었으니 여기에 비하면 얼굴은 오히려 뽀오얀 편이었다.

어머니 백씨는 지랑물을 많이 마셔서 그러려니생각하였고, 이후 사람들에게 우수갯소리로

그런 이야기를 하곤  하였다. 그러나 어찌꿈엔들 알았겠는가?

금오탁시의 제왕지지!즉 금오의 정기를 받아서 유달리 몸이 까말 수벆에 없었든 박정희의 비밀을.

 

그러나 여기에는 재미있는 비화가 있다.

원래 이터는 장택상씨 가문의 소유지였다.

창랑(滄浪)장택상(張澤相 : 1893~1969)과 박정희의 관계에 있는 비화는 또다른 제목으로 적어내려갈가 하니

연속하여 끝까지 읽어 보시면 재미날 것이며 생활 철학으로 받아들여도 손색이 없을 것입니다.

                                                               

                               육관도사의 풍수명당이야기 손석우지음 "터"에서 발췌 적은것임.

 

 

금오탁시(金烏啄屍)에 대한 에피소드.

 

위에서 말한대로 금오탁시의 터는 장택상씨 가문의 것이었다.

장택상씨는 우리나라 초대 외무부장관(1948)과 국무총리(1952)를 역임했던 정치인으로서 구한말

경상관찰사를 지낸 장승원의 아들이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장승원은 풍수를 몹시 신봉하는 인물이었다.

초년에 몹시 가난하게 지내다가 할아버지의 묘를 명당(직지사입구에 있음)을 쓰고 당대에 거부가 된 당사자다.

그는 예로부터 전해오는 전설과 풍수 비기를 믿었다.

그것은 금오산에 왕이 나는 2대명당터가 있다는 것이었다.

장승원은 금오산 일대의 땅 수십만평을 사두었다.

지사(地師)들이 도대체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땅이라도 사 놓으면 나중에라도 훌륭한 지사를 모셔와 그자리를 찾을 심산이었던 것이다.

장택상씨 집안의 땅을 안 밟으면 서울로 오갈 수도 없다는 당시의 유행어에는 이런 속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그집안에서 무슨 부동산 투기를 했겠는가?

오로지 명당의 욕심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해방이 되기 불과 넉달 전 장택상씨 집안에서는 마침내 중국의 명지사를 모셔온다.

금오산 일때를 답사한결과 그 중국 지사는 마침내 금오탁시를 찾는다.

대길지의 모습에 놀나움을 감추지 못한 그는 이미 임자가 있는 묘의 후손에서 벌써 아이가 나왔을

것이라고 말을 덧 붙이 였다.

장씨댁에서는 난리가 난것은 불을보듯 뻔한 일이다.

박성빈은 노구를 이끌고 장씨댁으로 불려가 호되게 혼이 난다.

남의 소유지에 묘를 썼으니 그로서도 할말이 없다.

통사정도 소용이 없는 노롯이었다.

그리하여 하는 수없이 잘못을 빌고 가을(9월)에 이장하기로 서약서를 썼다.

장택상씨 집에서는 쾌재를 부르며 이장 비용까지 미리 넉넉히 주었다.

그런데 천지에 광명의 해방이 온것이다. 이장을 바로 코앞에 두고 해방이 되여

장택상 집안은 풍지 박산이 나고 말았다.

오태동(吳太洞)에 있는 대궐 같은 집은 공산당 청년회의 집합소로 변해버렸고

(박정희 형 박상희도 그당시 거기에 나갔다)가솔들은 모두 몸을 피신해야만했다.

그러니 묘를 거들먹거릴 정황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장택상은 광복을 맞아 수도경찰청장,제1관구경찰청장을 지내면서 치안유지에 공을 세우더니

1948년 정부수립과 함께 초대 외무부장관에 취임하게 된다.

이어 1950년 고향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고 곧바로 민의원 부의장이 된다.

이무렵 이장 문제가 또 거론되였다.

돈도 듬뿍 주고 이번에는 서약서 대신 각서를 받았다.

가을에 꼭 이장하겠노라는 말은 양해해 주었다.

그런데 천지에 날리가 또 난 것이다.

6.25가 터지니 이장을 거론할 겨를이 피차간에 없을 수밖에 없었다.

명당에는 임자가 따로 있다더니 아무리 자기 소유지면 뭐하나,

장택상씨 집안에서는 금오탁시를 알고서도 쓸 수가 없었든 것이다.

1958년 경에 이문제는 다시 한번 거론된다.

이번에는 육군소장 박정희가 직접온다.

굽실굽실하던 박씨 집안의 태도가 돌변 한다.

태어나지도 못했을 막내 아들 박정희는 체구는 작지만 그 눈에 불이 철철 넘치는데,

책상을 탕탕 치면서 오히려 호통이다.

 "묘를 쓴지가 벌써 수십년인데, 이제와서 무슨 수작이냐?

민법에도 20년이 지나면 소유권을 인정해주는 판인데 자꾸만 이럴것이냐?" 하면서

기상이 당당하니 장택상은 울화가 치밀 수밖에 없었다.

여기저기 상관들을 통해 압력도 넣어 보았지만 박정희는 꿈쩍도 않었다.

혁명을 꿈꾸는 기린아(麒麟兒.a Prodigy )가 그 정도로 마음이 움지기였겠는가?

5.16 이 일어나고 박정희가 전권을 잡자 장택상은 가문과 일신의 안위를 오히려 걱정하여야 할 시기였다.

박정희의 한마디면 만사가  끝이던 시절이 아니었던가.

 

세월은 흘어1968년이 되였다.

박정희는 엄청난 외자를 도입하여 그해 2월1일에 경부고속도로 기공식을 갖는다.

총연장 428km로서 국토의 대동맥을 이루는 엄청난 공사계획이 발표되자

전국이 떠들석 했던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경부고속도로의 노선 설계와 관련하여 재미 있는 사건이 이무렵 박정희와 장택상 사이에 일어난다.

애초에 도면설계에 따르면 ,구미에서 낙동강을 건너 왜관(석적)으로 가는 구간은 장택상의 본가가 있는

오태마을을 관통하게 되여 있었다.

게다가 더욱 가관인것은 장택상의 본가를 바로 뚫고 지나가게 되니,

장씨로서는 조상의 터전이 송두리채 날아가게 되는 급박한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박정희가 일부러 시킨것도 아니요, 지형상으로 최적 최단의 거리를 계산하여 나온 자연스런 설계였다.

장택상은 똥끝이 타들어 갔다.

금오탁시 일때를 정확하게 측량,등기까지 마쳐서 박정희 앞으로 해놓고 그 문서를 가지고

대통령을 찾아가 애원을 하였다.

"각하 제발 오태마을 만큼은 살여주십시요"

대통령은 고향의 칠순 노인 앞에서 깍듯이 예우하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지금으로 생각하면 어이 없는결정을 한다.

 

 

 

 

오태동과 경부고속도로 설계변동된 그림.      

 

                                            ●박정희대통령 생가 (상모동)

 

 

 

주소 : 경북 구미시 상모동 171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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