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지리/음택지

金克忸의 묘소(1436~1496),

오늘의 쉼터 2008. 6. 14. 18:27

위치 : 순창군 인계면 마흘리
金克忸의 묘소(1436~1496), 乾坐, 沙溪 金長生의 高祖父

현재 시중에 나와 있는 거의 모든 풍수서적은 이곳을 거론하며 “조선의 8대 명당”
“말명당” “龍馬騰空” “天馬嘶風”
등 하나같이 천하명당이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말에 관한 명칭은 묘 뒤의 산이 龍馬山이기 때문인데,

마을이름 또한 馬屹里 또는 小馬마을·大馬마을로 불리고 있다
이 묘의 高孫인 사계 김장생과 그의 아들 愼獨齊 김집이 나란히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특히 김장생의 후손들 중에서 7명의 대제학을 배출함으로서 명문가를 이루는데 시발점이 된다는 것이다



과연 주산이하 국세가 웅장하고 호쾌한 형상이다
앞에서 구불구불 들어오는 물의 모습도 좋을 뿐 아니라,

묘소가 있는 당처는 마치 옥좌에 앉은 듯 늠름하고 당당한 자태이다

古云 : 全氣之地 若踞而侯也 (全氣의 땅은 마치 제후가 걸터앉은 듯 하다)




그러나 본인은 아직 풍수의 物理가 트이지 않은 까닭인지

이해할 수 없는 몇 가지 의문점이 있기에 고민을 토로해 본다. 


1, 주산

묘소에서 바라보이는 주산은 머리를 약간 오른쪽으로 향하고 있다
썩 친절한 모습이 아니며, 더욱이 뒷산은 겹산이(窺峯) 되어 살짝 넘겨다보고 있다.




2, 용세

 급하게 떨어지던 펑퍼짐한 맥은 묘소 뒤에서 짧은 과협을 만들면서 비로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곳과 같은 短峽일 경우에는 좁게 묶어 주어서 기맥이 흩어지지 않게 단속해야 하는데,

현재의 상태는 긴장감도 없고 의욕도 없는 모습이다
쏟아질 듯 급하게 떨어지는 억센 기운을 수용하자면 한 번쯤 걸러주고 속도를 조절하는 여유가

필요했으나 그러한 노력이 부족한 것이다. 

만약 좁게 묶어 주었다면 유연하게 솟구치는 형상이 되었을 것이다.
혹자는 隱龍·潛龍이라 말하지만, 혈을 맺고자 한다면 최소한 입수 한 마디 만큼은 성의를 보여야 한다.
본인은 이러한 용세에 대해 게으른 용이라는 표현을 쓴다.

古云 : 峽者龍之眞情發現處也 (과협은 용의 참다움이 나타나는 곳이다) 


3, 당판
과협처가 모호하다보니 당판 또한 고구마처럼 길쭉하게 형성되었을 뿐,

기맥을 강하게 농축시킨 형태가 아니다
만약 기맥이 농축되었다면 이석형 묘소, 또는 김성우 장군 묘처럼 좌우로 불거져서 통통했을 것이다.
특히 주산이하 전체적인 흐름이 우선룡이 되었으므로 당판의 우측이 튼실해야 에도 그러한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김성우 장군 묘소 


4, 청룡
주산에서 한줄기가 뻗어 나갔으나 중간부분이 깊게 陷하였다
大馬마을의 입장에서는 그 능선을 의지하며 촌락이 형성 되었는데,

함몰한 지점이 꺼림칙 하였는지 당산나무를 심어 裨補를 하였다
그리고 다시 솟구친 청룡의 능선은 마을과 묘소를 등지며 완연히 밖으로 휘어지고 있다 (그림A)
묘의 입장에서도 이러한 점이 불편 하였는지 묘소의 좌측에 소나무 숲을 조성하여 청룡의 飛走가

보이지 않게끔 하였다
김극뉵의 宗孫에서 養子를 들인 것이 이것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5, 백호

주산과 백호의 사이 또한 깊이 함몰 하였다.

바로 그 계곡풍을 피해 당처가 살짝 돌아 앉아우선룡이 되었지만,

결국은 山水同去의 불안정한 형태가 되고 말았다





6, 안산

이 부분에서 많은 사람들의 해석이 분분하다
즉 어떤 사람은 공손하게 다가와  절을 하는 형태라  하고, 또 다른 사람은 그 부분에 있는
 암석이 묘소를 향해 찌르는 모습이라  한다.
그러나 그 능선은 위 그림에서 보듯이 큰 줄기가 小馬마을을 향하여 감싸주고 있다
그렇다면 김극뉵의 묘를 향하는 B는 안산이 등지면서 형성된 가지로 보아야 한다.


그림 B, 안산의 모습  

본인은 결코 완전무결한 땅을 찾고자 함이 아니다
물론 그러한 땅도 있을 수가 없다
한편 지나치게 트집을 잡는 것이 아니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난 수 백 년의 풍수를 보았을 때 잘못된 명당이란 믿음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
받고 좌절하였는가를 생각한다면, 혈과 풍수에 대한 판단은 아무리 인색해도 지나침이 없다

결론적으로 이곳은 수려한 朝山과 水勢, 그리고 처음에 언급하였듯이 당처의 당당함과 기품있는
자태는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김극뉵의 묘가 위에서 열거한 주산, 과협, 당판, 龍虎, 안산 등의 문제점을 극복하고 혈을
맺은 것이라 볼 수는 없다.
실제로 아래의 족보를 보면 이 묘의 가장 큰 영향을 받는 손자, 증손 대에서는 여느양반집 가문과
특별히 다르지 않다
오히려 종가집의 손이 끊기는 일이 발생하는데, 당시 종손의 위상을 생각한다면 심각한 우환이
아닐 수 없다
평상시에는 窺峰의 흉함, 청룡·백호의 함몰과 비주를 신랄하게 탓하면서 어째서 이곳에서는
그토록 관대한지 모르겠다. ·····

광산 김문의 영광을 오직 풍수적으로 접근 해석한다는 것은 분명 한계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석형 선생 묘에서 보았듯 혈의 소응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이곳이 사계선생을 잉태하고, 200년 후 7명의 대제학을 배출하게 되는 천하
대명당이라는 말에는 동의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