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고려

제8대 현종(顯宗,1009~1031 재위22년)

오늘의 쉼터 2009. 7. 30.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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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대 현종(顯宗,1009~1031 재위22년)

 

자 안세(安世). 휘(諱) 순(詢). 시호 원문(元文). 태조의 여덟째 아들 안종(安宗) 욱(郁)의 아들. 어머니는 경종의 둘째 비(妃)인 헌정왕후(獻貞王后:孝肅太后). 비는 성종의 두 딸 원정왕후(元貞王后)와 원화왕후(元和王后), 시중(侍中) 김은부(金殷傅)의 딸 원성왕후(元成王后), 대종(戴宗:追尊王)의 손녀 원용왕후(元容王后)이다. 처음에 대량원군(大良院君)에 봉해졌으나, 12세 때 천추태후(千秋太后:경종비 헌애왕후)의 강요로 숭경사(崇敬寺)에 들어갔다.

1006년(목종 9) 삼각산 신혈사(神穴寺)로 옮겨졌으며, 1009년 서북면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 강조(康兆)의 옹립으로 왕위에 올랐다. 그해 강조가 목종을 살해한 데 대하여 문책한다는 구실로 거란의 성종(聖宗)이 군사 40만을 거느리고 쳐들어오자, 강조로 하여금 이를 방어하게 하였으나 참패하고, 다음해 개경(開京)이 함락되어 남으로 피난하였다. 이어 왕이 친조(親朝)할 것을 조건으로 화의가 성립되어 거란군은 물러갔으나 끝내 친조를 하지 않았고, 또 6성(城)을 요구해 온 것도 거절하였다. 1018년 거란의 장군 소배압(蕭排押)이 6성을 빼앗고자 침입하였으나, 상원수(上元帥) 강감찬(姜邯贊)의 뛰어난 전술로 구주(龜州)에서 섬멸하여 물리쳤다(龜州大捷).

다음해부터 거란과 국교를 열어 평화정책으로 일관하여 우호관계를 회복하고, 모든 사치와 호화로운 의식 ·제도를 폐지하고 승려의 횡포를 엄금하는 한편, 기민(飢民)의 구제에 만전을 기하였다. 불교와 유교의 발전을 도모하여 폐지된 연등회(燃燈會) ·팔관회(八關會)를 부활시키고, 선유(先儒)를 존숭하는 뜻에서 설총(薛聰) ·최치원(崔致遠) 등을 추봉(追封)하고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여, 한국 최초로 문묘종사의 선례를 만들었다. 또한, 거란군의 침략을 불력(佛力)으로 물리치기 위하여 대장경(大藏經)의 제작에 착수, 6천 권의 대부분을 완성하게 하였다. 지방 관제를 합리적으로 조절하기 위하여 12주의 절도사(節度使)를 폐하고, 5도호부(都護府) 75도(道)에 안무사(按撫使)를 두었다가, 다시 이를 폐하여 4도호부 ·8목(牧) ·56지주(知州) ·56군사(郡事) ·18진장(鎭將) ·20현령(縣令)을 두었으며, 사심관(事審官)의 선출을 엄격히 하였다. 능은 경기 개풍군의 선릉(宣陵)이다.
                                                         
 <서문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현종 원문대왕의 휘는 순이며 자는 안세니 안종(추존)의 아들이요 모는 효숙왕후 황보씨이다. 성종 11년 임진 7월 임진에 탄생하여 조금 자람에 대량원군으로 봉했다.

나이 12에 천추태후가 꺼려하고 핍박하여 축발(머리를 깍고 중이 되는 것)케 하니 처음에 숭교사에 우거(寓居 남의 집에서 임시로 몸을 부쳐 사는 것)하였다. 한 중이 꿈을 꾸니 큰 별이 절 뜰에 떨어져서는 변하여 용이 되었다가 또 변하여 사람이 되니 곧 왕이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여러사람이 퍽 기이하게 생각하였다. 목종 9년 삼각산 신혈사에 이우하였던 바 태후가 자주 사람을 보내어 모해하고자 하였으나 절에 노승이 있어 방밑에 구멍을 파 숨겨두고 그 위에 와탑을 두어 불측의 변을 막았다. 하루는 왕이 우연히 계수를 두고 시를 지어 「한가닥 유수가 백운봉으로부터 흘러나니 만리창명으로 갈 길이 통했도다 졸졸 흘러 바위 밑에만 있다고 말하지 말라 얼마 지나지 않아 용궁에 이를 것이다」고 하고 소사를 두고 읊어 「작고 작은 배암이 약란에 감도니 온 몸에 붉은 비단이 저절로 아롱지도다 길이 꽃숲풀 밑에만 있으리라고 말하지 말라 하루 아침에 용되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로다」고 하였다. 또 꿈에 닭 소리와 다듬이 소리를 들고 술사에게 물으니 방언으로써 해석하여 말하기를 「닭 소리는 고귀위(고귀위)하고 다듬이 소리는 어근당(어근당)이니 이것은 즉위할 징조라」고 하였다. 12년 2월 기축에 봉앙되어 연총전에서 즉위하였다. 경인에 강조로 중대사를 삼고 이현운으로 중대부사를 삼고 채충순으로 직중대를 삼고 윤여로 상서우승겸 직중대를 삼았다. 이 달에 사농경 왕일경을 거란에 보내어 애를 고하고 사위하였음을 알렸다. 교방을 파하고 궁녀 백여명을 놓아 주었으며 낭원정을 헐고 진기한 새와 짐승이며 거북 고기 유를 산과 못에 풀어 놓아 주었다. 3월에 유윤부로 문하시중을 삼고 유방헌으로 문하시랑 평장사를 삼고 강조로 이부상서참지정사를 삼고 진적로 형부상서참지정사를 삼고 유진과 왕동영으로 상서 좌우복사를 삼고 최항과 김심언으로 좌우산기상시를 삼고 채충순으로 이부시랑 좌간의대부를 삼고 김려로 병부상서를 삼고 문인위로 공부상서를 삼았다. 이 달에 개경의 나성(외성)을 쌓기를 논의하였다. 4월 병술 삭에 차공부시랑 이유항을 거란에 보내어 태후의 생진을 축하하였다. 갑오에 고비(부모)의 시호를 추상하였다. 무술에 사하고 늙고 병든 이를 양호하며 조조를 못바친 자를 놓아주고 요역을 가볍게 하며 공신을 상주고 현사를 표창하며 훈구를 녹용하고 여악을 제거하며 군량을 마련하고 군망과 신기에게 훈호를 가하며 문무의 관작을 더하였다. 5월 무진에 영화관을 고쳐서 회동관이라고 하였다. 을해에 연흥궁주의 딸 김씨를 납하여 비로 삼았다. 무인에 도죄 이하를 사하고 문무의 관계를 1급씩 올리고 만기된 자는 질을 더하며 경군에게는 포를 사하되 차등있게 하고 남도의 민호로서 동북변진을 메꾸었던 자는 전리로 돌려보냈다. 이 달에 안창영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6월에 동북계에 황해가 있었다. 7월 계유에 교하되 「문관으로 상참 이상은 각기 봉사를 올려서 시정의 득실을 극언하라」고 하였다. 신사에 구정에 나아가 민인 남녀 년 80이상과 독질자 635인을 모으고 주식 포백 다약을 차등 있게 사하였다. 한림학사 최항을 사부로 삼았다. 8월 갑오에 문하시랑 평장사 유방헌이 졸하였다. 10월 임오에 위수여로 문하시랑 평장사를 삼고 진적로 내사시랑 평장사를 삼았다. 12월 병신에 교하기를 「짐이 욕되게 조업을 물려 받고 삼가히 비기를 이어 현토 봉강을 거느리게 되고 황천의 권명을 받들었도다 백성을 사랑하여 기르메 감히 편한 겨를을 가지지 못하였다. 한가지 덕이라도 신실치 못할까 혹은 이윤이 패하여질까 염려하여 매양 몸소 정사를 청단함에 부지런하고 태평으로 순치하고자 바랐는데 요사이에 바야흐로 가을철에 미쳐 요무가 거두어지지 않고 음양이 교착하여 기후가 어긋나도다. 이에 탕여(수성)의 정성을 더하고 책궁의 계를 간절히 하여 정전을 피하고 상선을 감하며 늦게 먹고 일찍 일어나 마음과 입으로 빌었더니 과연 감통을 입어 문득 청화함을 이루었도다. 능히 공경하면 재가 없어지고 화를 돌려서 복이 된다고 이름(위)직 하도다. 진실로 더욱 외경함을 생각하여서 우러러 하늘(고명)에 부응하고 다시 나라에 근휼하여 더욱 정사에 힘을 다하고자 한다. 그러나 만기의 일을 혼자 다스리기는 어려운 것이니 진실로 신하의 공을 힘입어 다같이 건곤의 도에 맞도록 할 것이다. 바야흐로 경구을 인하여 이에 잠언을 이노라. 형축의 직사는 실로 이것이 백성들의 첨앙는 자리인지라 마땅히 궐루 *윤하고 모명을 헌납하며 교화의 근원을 짐작하여 왕업을 도울 것이며 전재의 직과 선사의 권은 초택을 찾아서 어진 이가 버려짐이 없도록 할 것이며 공평함을 힘써서 아부하는 무리를 쫓지 말 것이며 혹은 과를 괘시하고 법을 설하여 옥을 단정하고 형을 심리하매 마땅히 애긍을 다할 것이며 가혹하게 행하지 아니하면 족히 화기를 부를 것이니 침원이 없도록 할 것이다. 모든 집사에 이르러서는 정성것 관년 처하고 삼가 직무를 지켜 맑음을 들추어내고 탁함을 제척함으로써 본보기로 하고 공을 등지고 사에 향하는가를 살필지어다. 목수의 관에 미쳐서는 각기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품고 물건을 사랑하는 뜻을 잊지 말 것이며 진변장수에 이르러서는 수려를 훈련정제하고 효웅을 길러 힘써 불처오에 대비하고 무도함을 경계할 것이다. 아아 너희들 중외의 경사는 마땅히 숙야로 게을리하지 말고 종시 변하지 말지어다 희라 하늘의 조람하심이 멀지 않아 이미 경계함을 나렸으며 내 마음이 게으르지 아니하여 이미 감통함을 이루었도다. 다시 석상의 성을 더하여 일신의 경을 힘입을까 하나니 그러므로 함께 다스림을 구하여 장래를 보전하고자 하노라」고 하였다.

경무 원년 춘 정월 을축에 상원도장을 폐하였다. 윤 2월 갑오에 연등회를 복구하였다. 하 4월 계축에 친히 대묘에 사하였다. 기미에 서숭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5월 갑신에 상서좌사랑중 하공진과 화주방어랑중 유종을 원도에 유배하였다. 공진이 일찍이 동여진을 치다가 패하매 종이 한을 품었더니 때마침 여진인 95명이 내조하려고 화주관에 이르거늘 종이 이들을 모두 죽여버린 때문에 같이 유배되었다. 여진이 계란에게 호소하니 계란주가 군신에게 말하기를 「고려 강조는 임금을 죽였으니 대역인지라 마땅히 군사를 일으켜서 죄를 물을 것이다.」고 하였다. 추 7월 무인 삭에 계란이 급사중 양병과 대장군 나율윤을 보내와 전왕의 연고를 물었다. 8월 정미 삭에 내사시랑 평장사 진적과 직중대상서우승 윤여를 계란에 보냈다. 9월 좌사원외랑 김연보를 계란에 보내어 추계문후를 하고 좌사랑중 왕좌섬과 장작승 백일승을 계란 동경에 보내어 수호하였다. 동 10월 병오 삭에 참지정사 강조로 행영도통사를 삼고 검교상서 우복사 상장군 안소광으로 행영도병마사를 삼고 소부감 최현민으로 좌군병마사를 삼고 형부시랑 이방으로 우군병마사를 삼고 예빈경 박충숙으로 중군병마사를 삼고 형부상서 최사위로 통군사를 삼아 군사 30만을 거느리고 통주에 진처 계란에 대비하였다. 계축에 계란이 급사중 고정과 합문인진사 한기를 보내와 군사를 일으켰다고 알렸다. 참지정사 이예균과 우복사 왕동영을 계란에 보내어 화를 청하였다. 11월 병자 삭에 기거랑 강주재를 계란에 보내어 동지를 하하였다. 계란주가 장군 소웅을 보내와 친정한다는 것을 고하였다. 경인 팔관회를 복구하고 왕이 위봉루에 거동하여 관악하였다. 신묘에 계란주가 스스로 보기 40만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서 흥화진을 포위하였으나 양규 이수화 등이 굳게 지켜 항복하지 않았다. 기해에 강조가 계란과 통주에서 싸워 패전하여 사로잡혔다. 경술에 계란병이 곽주를 함락하였다. 임자에 계란병이 청수강(청천강)에 이르니 안북도호부사 공부시랑 박섬은 성을 버리고 도망치고 주민이 모두 흩어졌다. 계축에 계란병이 서경에 이르러 중흥사탑을 불태웠다. 갑인에 숙주를 함락하였다. 경신에 큰 유성이 곽주에 떨어졌다. 신유에 계란주가 서경을 쳐 빼지 못하매 포위를 풀고 동으로 향하였다. 계해에 서경신사에 선풍이 홀연히 일어나 계란의 군마가 모두 쓸어졌다. 하공진과 유종을 소환하여 그 작을 복구시켰다. 임신 야에 왕과 후비가 계란병을 피하여 남쪽으로 행차하였다. 갑술에 양주에 도착하여 하공진과 호부원외랑 고영기를 보내어 표를 받들고 계란영에 가서 화를 청케 하였다.

신해 2년 춘 정월 을해 삭에 계란주가 경성에 들어와 대묘와 궁궐과 민옥를 불태워서 남김이 없었다. 이 날에 왕은 광주에 이르렀다. 정축에 시종한 제신들이 하공진 등이 붙잡혔음을 듣고 모두 놀라고 두려워하여 흩어져 달아나고 오직 시랑 충숙과 장연우 채충순 주저 유종 김응인이 떠나가지 않았다. 무인에 왕이 광주를 출발하여 비노역에 이르렀다. 임오에 장곡역에 이르렀다. 을유에 계란병이 물러갔다. 병술에 왕이 인의현을 지나 수다역에 이르렀다. 정해에 노령을 넘어서 나주에 들어갔다. 을미에 왕이 회하하여 복룡역에 이르렀으며 무술에 고부군에 이르고 기해에 금구현에 이르렀다가 경자에 전주에 이르러 7일동안 머물었다. 임인에 양규와 김숙흥이 계란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계묘에 계란주가 압록강을 건너 퇴거하였다. 채충순을 비서감으로 삼고 박섬을 사재경으로 삼고 주저를 예부시랑 중추원직학사로 삼고 한창필을 합문통사사인으로 삼았다. 박섬이 안북으로부터 도망하여 서울에 돌아와 가족을 데리고 그 고향인 무안현으로 가다가 도중에서 차가(임금이 탄 수레)를 만나 따라서 나주에 이르렀다가 이내 사귀하더니 계란병이 물러갔다 함을 듣고는 와서 알견함으로 이에 이러한 임명이 있었는데 그때 여론은 이것을 비방하였다. 2월 정미에 전주를 출발하여 여양현(여산)에 이르고 무신에 공주에 이르러 6일동안 머물으며 김은부의 장녀를 맞이하여 비로 삼았다. 경술에 김계부를 병부시랑으로 삼고 이단을 이부원외랑으로 삼았다. 정사에 청주에 이르렀다. 기미에 연등회를 행궁에 설하니 이 뒤로 의례히 2월 망일(15일)에 행하게 되었다. 경신에 청주를 출발하여 정묘에 서울로 돌아와 수창궁에 들었다. 기사에 형부가 주하기를 유언경은 대대로 국은을 받고도 보답할 것을 생각하지 않고 앞서서 적에 강복하였으니 청컨대 처자를 유배하소서 한데 이를 청종하였다. 3월 무자에 탁사정을 어사중승으로 삼았다. 신축에 유진으로 내사시랑 평장사를 삼고 조지린 최사위로 참지정사를 삼았다. 하 4월 정미에 탁사정으로 우간의대부를 삼았다. 오래 가물므로 종묘에 비를 빌고 시사를 옮기고 도살을 금하고 산선을 끊고 원옥을 다스리고 궁핍한 자를 구휼하였다. 기유에 황보유의와 최창으로 모두 시어사를 삼고 유소로 전중시어사를 삼았으며 김종현과 박종검으로 모두 감찰어사를 삼았다. 임자에 전몰한 중승 노정에게 예빈경을 증하였다. 병진에 전몰한 대장군 채온겸 신영한과 낭장 원태 별장 최원 습유 승리인 태사승 유인택의 집에 미포를 차등있게 사하였다. 정사에 유사에게 명하여 중외의 전사자의 해골을 거두어 묻고 제사 지내게 하였다. 재상에서 교하기를 「논어에 위태함에도 붙잡아 주지 않고 엎어짐에도 붙들어 주지 않는다면 장차 그러한 재상을 어데다 쓸 것이냐고 하였고 경서에 오직 나무는 먹줄을 따르면 바르게 되고 임근은 간언을 따르면 슬기롭게 된다고 하였으니 군신의 의에 어찌 마음을 다하여 광구하지 않을까 보냐. 짐이 외람되게 왕위를 이른 뒤로부터 어렵고 위태함을 두루 겪고 숙야로 조심하고 부끄러워하여 그 허물을 면할 것을 생각하나니 경등은 힘써 부족함을 보필하고 또 면종함이 없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정 최보성으로 상서좌우승을 삼았다. 신유에 송옥에서 기우하니 큰 비가 왔다. 을축에 공부랑중 왕첨을 계란에 보내어 회군함을 사하였다. 이보다 앞서 왕이 계란에 사신을 보내려해서 태사에게 명하여 점(서)쳤더니 건괘의 고을 얻고 아뢰기를 「건은 군이 되고 부가 되나니 건이 건하면 통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구오효사에 비룡이 하늘에 있으니 대인을 이견할 것이다고 하였고 고의 괘된 것이 존자는 위에 있고 비자는 아래에 있는 것이니 이것도 또한 아래 사람이 윗 사람을 섬기는 괘상이니 길하다」고 하였다. 정묘에 영빈 회선 2관을 두어 제국사신을 접대케 하였다. 5월 을해에 동북여진 추장 조을두가 그 족속 70인을 거느리고 와 방물을 올림으로 각기 의복과 은명을 사하였다. 무인에 유방으로 병부상서겸상장군을 삼고 최현민으로 공부상서를 삼았으며 김심언으로 예부상서를 삼고 최충으로 우습유를 삼았다. 정해에 평양의 목멱 교연 도지암 동명왕 등 신에게 훈호를 가증하였다. 정유에 박승으로 전중시어사를 삼았다. 6월 계묘 삭에 강감찬으로 한림학사 승지를 삼았다. 정묘에 이정으로 전중감을 삼고 손몽주로 상서좌승을 삼았다. 추 7월 계유에 최사위로 서북면 행영도통사를 삼고 장연우 채충순으로 모두 중추사를 삼았다. 갑신에 형부가 주하기를 낭중 백행린은 남으로 행차하실 때 서울에 머물러 있어 자칭 어사중승이라 하고 이인례 거정 등으로 더불어 도노들을 소모하여 군사를 삼아 적을 보고는 싸우지 않고 무너졌으니 청컨대 제명하소서.」한데 이를 청종하였다. 임진에 교하기를 「거년에 계란이 서경을 포위하였을 때 사문 법언은 의를 보고 용기를 드날려 삶을 잊고 나라에 죽었으니 가히 수좌를 증직하라」고 하였다. 8월 계묘에 형부가 주하기를 「조용겸 유승건 이재 최집 최성의 임탁은 남으로 행차하실 때 행궁을 경동하였사오니 청컨대 제명하고 유배하도록 하소서」한데 이를 청종하였다. 갑진에 양진으로 어사중승를 삼았다. 을사에 문인위로 우복사를 삼고 박충숙으로 서경부유수를 삼았다. 경술에 장연우로 판어사태사를 삼았다. 병진에 강조당을 논죄하여 탁사정 박승 최창 위종정 강은을 해도에 유배하였다. 정사에 황보유의로 이부랑중을 삼고 유소로 시어사를 삼고 조자기 이택성으로 모두 전중시어사를 삼고 이인택으로 감찰어사를 삼았다. 을축에 호부시랑 최원신을 계란에 보냈다. 병인에 관인전문에 거동하여 망노 고독 독질자를 향응하고 물을 사하되 차등있게 하였다. 기사에 참지정사 최사위로 서경유수를 삼았다. 이 달에 송옥성을 증수하였다. 서경에 황성을 쌓았다. 동여진이 100여소의 배로 경주에 침구하였다. 9월 병자에 좌복사 참지정사 조지린이 졸하였다. 최사위로 이부상서를 삼고 박섬으로 장작감을 삼고 강의로 상서우승을 삼고 박종검으로 시어사를 삼았다. 을유에 탐라가 주 군의 예에 의하여 주기를 사할 것을 간청하거늘 이를 허락하였다. 임진에 이방으로 서경부유수를 삼았다. 동 10월 경자 삭에 병부상서 유방으로 참지정사 서경유수겸 서북면행영도병마사를 삼았다. 을축에 도관랑중 김숭의를 계란에 보내어 동지를 하하였다. 상서 장연제에게 명하여 궁궐을 수영하였다. 11월 임오에 형부시랑 김은부를 계란에 보내어 생진을 하하였다. 12월 기유에 문인위로 참지정사를 삼았다. 이 달에 계란이 하공진을 죽였다.

임자 3년 춘 2월 갑진에 여진추장 마시저가 30성 부락의 자제를 거느리고 와서 토마를 바쳤다. 30성이란 아간돈 이홀 이방고 문질노 불차리 거질아 점한일 이질아 야라다 요게라 요열일 울언 오림대 몽골예 훈저헌 도태 야을일 나을신 나을안 동골일 지도일 어슬은 마을일 도몰니 운돌리 곤한이 노일이 배문이 불서일 만윤이이다. 을묘에 교하기를 「논어에 백성이 부족한데 임금이 누구와 더불어 족할 것이냐라고 하였는데 요사이 전쟁으로 인하여 백성이 농사를 잃고 길에 굶주려 죽은 자가 서로 잇대었다. 백성들의 이와 같음을 생각할 때 어찌 군부가 홀로 편하리오. 상식대관으로 하여금 상선을 감성케 하라」고 하였다. 무오에 위수여로 시중을 삼고 유진으로 문하시랑을 삼고 최사위로 내사시랑 평장사를 삼고 최항으로 이부상서 참지정사를 삼고 박충숙으로 상서좌복사를 삼고 채충순으로 예부상서를 삼았다. 3월 경오에 경주에 지진하였다. 임신에 송인 왕복 전화 양태 섭청 왕노 이태 임석이 내투하였다. 하 4월 계해에 문하시중 위수여가 졸하였다. 이 달에 서리가 왔다. 계란이 왕에게 조하여 친조하라 하였다. 5월 기사에 동여진이 청하 영일 장기현에 침구하니 도부서의 문연 강민첨 이인택 조자기를 보내어 주군병을 독려하여 격주시켰다. 경주의 조유궁을 철수하여 그 재목으로 황룡사탑을 수리하였다. 을유에 원릉에 배알하였다. 병술에 승을 내전에 모으고 인왕반야경을 강하였다. 6월 갑진에 시어의 궁정이 옹색(추애)함으로 상참관으로 하여금 5월에 한 번씩 입견케 하였다. 을사에 이수화를 좌습유로 삼았다. 경술에 송인 섭거전 임덕 왕호가 내투하였다. 계축에 예관이 청하기를 「중외로 하여금 생진을 진하하도록 하소서」하니 교하기를 「모인이 일찍 민흉을 당하여 길이 공양을 저버렸다. 매양 구로하신 날을 당하면 추모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거늘 어찌 슬픔을 참고 도리어 경하를 받으리요. 지금부터는 양경과 제도의 진하를 일절 금지하고 다만 축수도장만 두도록 하되 이것을 길이 항식으로 삼으라」고 하였다. 감찰어사 이인택과 동북면 행영병마사 강감찬이 서로 틈이 생겨 논소하기를 말지 않거늘 인택을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가뭄으로 써 유사에게 명하여 원옥을 다스리고 경죄는 방면하고 산천에 도사케 하였다. 갑자에 형부시랑 전공지를 계란에 보내어 하계문후를 하고 또 왕이 병으로 친조할 수 없다고 고하니 난주가 노하여 조하기를 「흥화 통주 용주 철주 곽주 구주 등 6성을 취한다」고 하였다. 추 7월 무인에 교하기를 「짐이 사수(사천)에 있을 적에 언효와 효질 두 사람이 좌우에 시종(부지)하여 일찍이 근로를 나타내었으니 양전을 주어 그 수고를 포상하라」고 하였다. 8월 병신 삭에 일식하였다. 무술에 일본국의 반다 등 35인이 내투하였다. 임인에 탐라인이 와 대선 2소를 바쳤다. 동북주진에 풍년이 들었다. 9월 기사에 서두공봉관 문유령을 계란의 내원성에 보냈다. 동 10월 병오에 남초인 육세령 등이 와 방물을 바쳤다. 윤월에 여진의 모일라와 조을두가 부락의 30성을 거느리고 화주에 와 맹약하기를 간청하거늘 이를 허락하였다. 경오에 공부상서 참지정사 장영과 예부시랑 유징필을 계란에 보냈다. 계미에 계란의 사신 대위 한빈이 왔다. 12월 정축에 경주에 지진하였다. 교하기를 「옛날 진조에서는 대실이 화재를 당하매 두예와 사곤 등이 가덕문을 수리하여 임시로 신주를 모시고 제예를 행할 것을 아뢰었다. 이제 과인의 부덕으로 청묘에까지 재화를 미치게하여 슬픈 마음이 비록 깊으나 일으켜 지을 겨를이 없으니 이에 먼저 신주를 만들어 재방에 모시고자 하노니 예관으로 하여금 의의하여 주문케 하라」고 하였다. 경인에 장영이 계란의 인진사 이연홍과 같이 왔다. 이 달에 서경 목멱사 신상을 만들었다. 중광사를 창건하였다.

계축 4년 춘 정월 정유에 예빈소경장박를 계란에 보냈다. 경술에 송의 민인 대익이 내투하니 유림랑수궁령을 제수하고 의물과 전장을 사하였다. 신유에 김작빈으로 어사중승을 삼고 한창필로 우보궐을 삼고 황주량으로 시어사를 삼았다. 임오에 경주에 지진하였다. 계미에 교하기를 「짐이 미약한 몸으로 외람되게 원수가 되어서 허물과 잘못이 쌓이게 되어 변이가 서로 잇대었다. 재앙은 헛되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매 이것을 근심하고 두려워하노라. 유사로 하여금 재앙을 가시는 길을 강구하여 써 아뢰도록 하라」고 하였다. 경인에 중추원사 채충순을 계란에 보냈다. 3월 신축에 금주에 지진하였다. 무신에 계란사신 좌감문위대장군 야율행평이 와 흥화 등 6성을 토삭하였다. 하 4월 을축에 우상시 전보인이 글을 올려 치사(해임)하기를 빌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병자에 서리가 내려 풀이 말랐다. 계미에 공부상서 참지정사 장영으로 서경유수를 삼았다. 5월 정묘에 계란이 와 통화(연호)를 개태로 고쳤다고 고하였다. 임인에 여진이 계란병을 인도하고 장차 압록강을 건느려 하거늘 대장군 김승위 등이 쳐 물리쳤다. 계묘에 경장태자의 딸을 맞이하여 비로 삼았다. 6월 정묘에 차상서우승 김작빈을 계란에 보내어 개원함을 하하였다. 계유에 송옥이 무너졌다. 추 7월 무신에 계란사신 야율행평이 다시 와 6성을 토색(토색)하였다. 8월 을해에 의릉에 배알하고 사하였다. 9월 병오에 과인전에 거동하여 복시하고 임유간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경술에 교하기를 「보국대장군 송능 표기대장군 유손은 태조에게 체사하여 종군에 공로가 있었고 지금도 아직 무양하여 이미 기(90세) 신(100세)에 이르렀으니 각기 대광을 가자하라」고 하였다. 병진에 이부상서 참지정사 최항으로 감수국사를 삼고 예부상서 김심언으로 수국사를 삼고 예부시랑 주저와 내사사인 윤징고와 시어사 황주량과 우습유 최충으로 모두 수찬관을 삼았다. 동 10월에 공신당을 수리하였다. 11월 정미에 금주에 지진하였다. 12월 무오 삭에 일식하였다. 병술에 금 경 2주에 지진하였다.

갑인 5년 춘 정월 갑오에 궁궐이 낙성되었다. 임자에 혜성이 오차(방위)에 나타났다. 2월 경신에 혜성이 대릉(방위)에 들어갔다. 갑자에 신궐에 입어하였다. 철리국주 나사가 여진의 만두를 보내어 와 마 및 초서 청서피를 바쳤다. 병자에 교하기를 「백성의 나이 70 이상으로서 관작이 없는 자에게는 모두 정위급을 가하라」고 하였다. 갑신에 광휴 양일 거정을 모두 낭장으로 삼아 써 전공을 상주었다. 3월 경인에 백홍이 관일하였다. 신축에 백기가 관일하였다. 임자에 교하기를 「조고를 추존하여 공훈을 밝힘은 인자의 뜻이다. 짐이 내월에는 비궁에 향사하고자 하나니 소사에게 위촉하여 의정하라」하니 예관이 선왕 선후의 존시호를 가상할 것을 아뢰었다. 하 4월 갑술에 치사한 문하시중 유윤부에게 내사령을 가하였다. 병자에 친히 재방에 체하였는데 처음으로 목종을 부제하고 유형 이하를 사하였다. 유진으로 검교태사 수문하시중을 삼고 최사위로 문하시랑 평장사를 삼고 김심언으로 내사시랑 평장사를 삼았다. 정축에 우현부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5월 신묘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병오에 중추원부사 전공지가 졸하였다. 6월 경신에 교하기를 「방수군으로 도중에서 죽은 자는 관에서 감구를 주어 그 유골을 담아 본가에 역송하고 상여로 죽어 성명과 본관을 알 수 없는 자는 소재의 관사가 임시로 매장하고 그 노장 형모를 기록하여 의오가 없도록 함을 영식으로 하라」고 하였다. 이 달에 진적과 이예균을 가관하여 문하시랑 평장사를 삼고 왕동영은 내사시랑 평장사를 삼고 윤여는 사재경을 삼고 왕좌섬은 장작소감을 삼으니 이것은 계란에 봉사하였다가 붙들려서 돌아오지 못한 때문이다. 추 7월 경인에 사직단을 수리하였다. 8월 갑자에 내사사인 윤징고를 송에 보내어 금선직성 용봉안복과 수용봉안복 각 두벌과 양마 22필을 진상하고 인하여 옛날과 같이 귀부하기를 청하니 송제는 등주에 조하여 「해안(해차)에 관사를 고 대접하라」고 하였다. 기사에 명복궁으로 이어하였다. 병자에 경주에 지진하였다. 기묘에 내사시랑 평장사 김심언으로 서경유수를 삼고 노전으로 어사중승을 삼았다. 계미에 양진으로 이부시랑 중추부사를 삼았다. 9월 을유에 손몽주로 한림학사승지를 삼고 이공으로 한림학사를 삼았다. 병신에 계란이 장군 이송무를 보내어 또 6성을 토색하였다. 동 10월 기미에 계란이 국구상온 소적열을 보내와 통주에 침입하거늘 흥화진장군 정신용과 별장 주연이 쳐 패북시켜 700여급을 참하니 강에 빠져 죽는 자도 심히 많았다. 11월 계미 삭에 상장군 김훈과 최질 등이 여러 위군을 거느리고 난을 일으키니 중추원사 장연우와 일직 황보유의를 유배시켰다. 을유에 김훈 등이 청하기를 「무관으로 상참 이상은 모두 문관을 겸하도록 하소서」한데 이를 청종하였다. 경인에 와언이 돌아 북산제사의 중이 군사를 이끌고 온다 하니 서울이 크게 놀라매 계엄하였다. 12월 정사에 유죄 이하를 사하고 모든 사죄을 감하여 장류하고 황보유의와 장연우 및 상사불면자를 제외한 모든 유배인은 모두 양이를 베풀었다. 그리고 해독과 산천의 신기에 각기 훈호를 가하였다. 경중인호에 곡을 사하되 차등있게 하고 효자 순손 의부 절부에게도 차등있게 분물을 주고 문관 7품이상으로 입사한지 20년 되는 자에게는 복장을 갈게 하고 도관은 차제의 직을 가하였다.

을묘 6년 춘 정월에 계란이 압록강에 다리를 놓고 다리를 끼고서 동서로 성을 쌓거늘 장수를 보내어 공파하고자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계묘에 계란병이 흥화진을 포위하거늘 장군 고적여와 조익 등이 쳐 물리쳤으나 갑진에 또 통주에 침구하였다. 3월 계미에 서경에 행차하였다. 갑오에 군신을 장락궁에서 향연하고 김훈과 최질 등 19인을 베었다. 기해에 계란이 용주에 침구하였다. 여진이 배 20소로 구두포에 침구하므로 진명도도부서가 이를 격패하였다. 하 4월 경신에 계란사신 장군 야율행평이 와 또 6성을 토색하매 포류하고 보내지 않았다. 이 달에 왕이 서경으로부터 돌아왔다. 5월 신축에 큰 유성이 서남에 떨어졌다. 계묘에 김은부로 지중추사를 삼았다. 6월 기유 삭에 일식하였다. 윤월 갑진에 이주헌으로 형부상서를 삼고 장연우로 호부상서를 삼았다. 송의 천주인 구양징이 내투하였다. 추 7월 경신에 무관이 청건하였던 관호를 혁파하였다. 도병마사가 주하기를 「장군 정신용과 임영함 및 군사 1만5천5백인은 다 변공이 있으니 청컨대 급을 더하여 써 상주소서」한데 이를 청종하였다. 8월 을미에 내사령 유윤부가 졸하니 3일간 철조하고 시호를 경안이라 하였다. 9월 갑인에 계란사신 감문장군 이송무가 와 6성을 토색하였다. 기미에 계란이 통주를 내공하였다. 계해에 흥화진대장군 정신용과 별장 주연 산원 임억 교위 양춘 대의승 손간 태사승 강승영 등이 군사를 이끌고 계란군의 뒤로 나가서 700여명을 쳐 죽였으나 신용 등 6인이 전사하였다. 정묘에 계란이 영주성을 공격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물러갔다. 경오에 대장군 고적여와 장군 소충현 고연적 산원 김극 별장 광참 등이 추격하다가 전사하였으며 단병이 병마판관 왕좌와 녹사 노현좌를 사로잡아 갔다. 11월 기사에 호부상서 장연우가 졸하였다. 갑술에 경주에 지진하였다. 이 해에 계란이 선화 정원 12진을 취하여 성을 쌓았다. 민관시랑 곽원을 송에 보내어 방물을 바치고 인하여 계란이 해마다 내침함을 고하였는데 그 표에 「성위를 빌리시고 예략을 보이셔서 혹 위태할 때에 이르면 미리 구급의 은을 베푸소서」라고 하였다.

병진 7년 춘 정월 경술에 계란의 야율세량과 소굴열이 곽주를 침공하니 아군이 싸워서 죽은 자가 수만명이 되었으며 치중을 노획하여 돌아갔다. 갑인에 계란사 10인이 압록강에 이르거늘 받아들이지 않았다. 을묘에 수창궁으로 이어하였다. 정신용에게 상서우복사 상주국을 주년게 장군을 임억에게 중랑장을 양춘에게 낭장을 손간에게 상약봉어를 강승영에게 태사령을 증직하고 신용의 아들 균백으로 낭장겸 상승봉어를 제수하였다. 무오에 강민첨으로 내사사인을 삼았다. 임술에 병부가 주하기를 「낭장 진명 유고가 강효 등 74인에게 청컨대 작 1급씩 더하여 변공을 상하소서」하니 이를 청종하였다. 병인에 고장군 고연적이 국사에 죽었으므로 그 집에 쌀 50석과 보리 30석과 포 100필을 부사하였다. 정묘에 김은부로 호부상서를 삼고 이수화 최충으로 좌우보궐을 삼고 이작충 구양징으로 좌우습유를 삼았다. 무진에 윤징고로 중추원부사를 삼았다. 기사에 장영으로 좌산기상시를 삼고 채충순으로 다시 예부상서를 삼았다. 임신에 태조재궁을 받들어 다시 현릉에 반장하였는데 경술년 난 때 재궁을 부아산(삼각산) 향림사에 옮겼다가 이에 이르러 환장한 것이다. 곽원이 송으로부터 돌아왔다. 송제가 조하기를 「짐은 사목하는 자리에 있어 뜻을 안민에 두노라. 비록 지역은 나누어져서 각기 다름이 있으나 오직 정성을 밀어(추) 간연(간연)함이 없다. 경의 본도(본국)를 생각할 때 진실로 마음에 깊이 걱정되는 바이나 저 이웃나라(계란)를 돌아보건대 또한 맹호를 쫓은지 오랜지라 바라는 바는 서로 화목하여 써 백성들을 평안하게 함에 있다」고 하였다. 2월 기묘에 김노현으로 상서우복사를 삼았다. 경진에 병부가 주하기를 「중랑장 채굉과 이강 등 119인은 다 전공이 있사오니 청컨대 작 1급씩을 올리소서」하니 이를 청종하였다. 임오에 계란의 왕미 연상 등 7인이 내분하였다. 갑신에 김훈 등의 부모 처 자매 조손 숙백으로 녹좌된 자는 모두 방면하고 아들과 동복형제는 본관에 돌려 보내어 상사에는 유죄치 않도록 하였다. 기축에 수창궁에 괴이가 자주 나타나므로 명복궁으로 이어하였다. 신축에 태백(성)이 경천하였다. 병부가 주하기를 「장군 황호맹 등 36인은 모두 전공이 있사오니 청컨대 직 1급을 가하소서」하니 이를 청종]하였다. 갑진에 계란의 조은 고홀 등 6인이 내투하였다. 하 4월 갑신에 이응보로 섭사헌대부를 삼고 서눌로 중승을 삼고 유소로 잡단을 삼고 조자기로 시어사헌을 삼고 김우보 이원공으로 전중시어사헌을 삼고 안재균 이원수 유현좌 이회 곽신 이주좌로 감찰을 삼았다. 사헌대 뜰의 백자 나무가 말라 죽은지 몇 년 만에 이에 이르러 다시 살아났다. 5월 을사에 궁인 김씨가 왕자를 낳으니 이름을 흠이라고 사하고 인하여 연경원에 금은기 필은 전장 노비 염분 어량을 사하였다. 신해에 계란의 마아 보량 왕보 가신 등 13호가 내투하였다. 을축에 상서성이 주하기를 「구주군의 귤선과 영몽이 모반하였으므로 참하였나이다」고 하였다. 계란의 요두 등 3인이 내투하였다. 6월 병자에 김은부로 중추사상호군을 삼고 곽원으로 형부시랑 우간의대부를 삼고 황보유의로 급사중을 삼고 김맹으로 중추직학사를 삼았다. 무인에 계란의 지보 등 3인이 내투하였다. 경진에 왕자가 항춘전에서 탄생하니 이름을 수라고 사하였다. 을유에 계란의 장렬 공현 신두 유아 왕충 등 30호가 내투하였다. 추 7월 갑진에 도병마사가 주하기를 「장군 고적여와 중랑장 서긍과 낭장 수암 등 3108인은 일찍이 통주의 싸움에서 살호이 심히 많았으니 청컨대 생존 사몰에 상관없이 직 1급을 더하소서」한데 이를 청종하였다. 신해에 명복전에 거동하여 복시하고 김현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경술에 이주헌으로 상서우복사를 삼았다. 정사에 계란의 유도 고종 등 9인이 내투하였다. 경신에 교하기를 「요사이 듣건대 추곡이 장차 익어가는데 비황이 해를 끼친다하니 아마도 형정이 혹은 잘못되어 재앙을 그처럼 함인가 하노니 내외의 인도로서 유죄 이하는 보증을 받고 출옥시키고 소리할 것은 빨리 판결하라」고 하였다. 8월에 계란의 주간 종도 등 8인이 내투하였다. 9월 기유에 교하기를 「남계의 주 현에 황해와 한해가 중첩 였다 하나 기민을 생각할 때 어찌 나를 책함이 없으리요. 마땅히 정전을 피하고 상선을 감할 것이며 모든 관원에서는 술마시고 풍악 잡힘을 금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계란의 나간 등 5인이 내투하였다. 갑인에 이주헌으로 서경유수를 삼았다. 병인에 손몽주로 예부상서를 삼았다. 신해에 계란의 봉대 고리 등 19인이 내투하였다. 동 11월 신축 삭에 정신용 집에 양전 20결을 사하였다. 계축에 최항으로 내사시랑 평장사를 삼고 유방으로 형부상서 참지정사를 삼았다. 병진 군망에 눈오기를 빌었다. 계란의 광예아 등 10인이 내투하였다. 12월 신사에 원우를 공부상서로 삼고 지채문으로 우상시를 삼으니 모두 무직으로써 겸임하였다. 을미에 계란의 슬불달 등 6인이 내투하였다. 이 해에 다시 송의 대중상부연호를 행하였다.

정사 8년 춘 정월 정미에 검교대위 좌산기상시 참지정사 장영이 상표하여 퇴직하기를 빌었다. 3월 갑진에 정배걸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병오에 백기가 관일하였다. 정사에 이단으로 사헌중승을 삼았다. 하 4월에 문하평장사 최항과 중추부사 윤징고를 사주에 보내어 안종의 재궁을 봉천하였는데 왕은 법가를 갖추어 동교에서 맞이하였다. 5월 무신에 이공으로 지중추사를 삼았다. 임자에 중추사 호부상서 김은부가 졸하였다. 을축에 고비의 존익을 가상하였다. 6월에 명이 있었다. 추 7월 무술에 계란의 광정 등 7호가 내투하였다. 경자에 병부가 주하기를 「정보 이용봉과 정조 임술광 등 30인은 모두 변공이 있사오니 청컨대 향직 1급을 가하소서」한데 이를 청종하였다. 신축에 송의 천주인 임인복 등 40인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기유에 여진의 말갈목사가 부락을 이끌고 내조하매 작과 의물을 사하였다. 계란의 매슬 다을 정신 등 14인이 내투하였다. 형부시랑 서눌을 송에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무오에 상장군 상서우복사 안소광이 졸하였다. 8월 계유에 계란의 과허이 등 3호가 내투하였다. 을해에 건릉에 배알하였다. 을해에 동여진의 개다불 등 4인이 내투하여 변공에 힘 쓸 것을 청하거늘 허락하고 우예하여 물을 사하였다. 임진에 서여진의 개신이 계란의 동경 숭성사 승 도준을 사로잡아 왔다. 계사에 계란의 소합탁이 흥화진을 포위하여 공격하기 9일에 이기지 못하였다. 장군 견일 홍광 고의가 나아가 싸워 크게 패북시켜 참획이 심히 많았다. 갑오에 흑수말갈 아리불 등 6인이 내투하였으므로 나누어 강남의 주 현에 살게 하였다. 9월 갑진에 계란의 군기곤기와 여진의 고저 등 10호가 내투하였다. 기유에 병부상서 김징우가 상표하여 치사하였다. 임자에 계란의 오두 등 8인이 내투하였다. 무오에 선정전에 거동하여 열병하였다. 이 달에 가물고 황이 있어 왕은 정전을 피하고 상선을 감하였다. 동 10월 임신에 현릉을 수보하였다. 11월 병신에 이원으로 용호군상장군겸 호부상서를 삼았다. 기해에 태백(성)이 경천하였다. 12월 병인에 채충순으로 좌산기상시 중추사를 삼았다. 을해에 현릉에 배알하고 사하였다. 이 달에 교하기를 「고구려 신라 백제왕의 능묘는 다 소재의 주 현으로 하여금 수치케 하고 초채를 금하며 지나는 자는 하마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무오 9년 춘 정월 을미 삭에 사신을 서경에 보내어 성용전에서 태조를 제하였는데 초상을 중신한 까닭이었다. 병신에 서여진의 미알달 등 7인이 와 갑주와 마를 바쳤다. 정안국인 골수가 내분(분)하였다. 경자에 재신이 백관을 거느리고 상표하여 정전에 돌아오고 상선을 회복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임자에 동여진의 서율불과 서여진의 아주 등 40여인이 와 마와 갑주 기치며 초서 청서피를 바쳤다. 무오에 군신이 여러번 상선을 회복하기를 청하거늘 허락하였다. 2월 무진에 해 노 2군의 교위 선두 이하에게 다포를 사하되 차등있게 하였다. 기사에 서여진의 능거 거이 등이 와 피물 철갑 및 마를 바쳤다. 을해에 교하기를 「예기에 계춘의 달에는 영어(옥)을 살피고 질곡을 풀라고 하였으니 내외의 법사는 월령을 쫓아 양화를 유도함으로써 항식을 삼으라」고 하였다. 노전으로 중추부사 상호군을 삼았다. 기묘에 동여진의 노어가 부락을 거느리고 와서 마 및 초피를 바치므로 의대와 화물을 사하였다. 갑신에 문하성이 주하기를 「용천교위 박명금이 변공으로 받은 바 계직을 그 아비에게 대수하여 주시기를 원한다」하니 이를 청종하였다. 을유에 국내 산천의 신기에 훈호를 가하였다. 서여진의 마문 마알달 등이 와서 토마를 바치매 화물을 사하였다. 병술에 계란의 장정 등 4인이 내투하였다. 3월 갑오 삭에 계란의 송광공 이개 등 10여인이 내투하였다. 계묘에 교외에서 굶주려 죽은 사람의 해골을 거두어 묻어 주었다. 갑진에 정충절 김승위로 모두 병부상서를 삼았다. 동여진의 아리고와 서여진의 능거 등 100여인이 와서 방물을 바치므로 모두 작을 사하고 또 필단을 사하였다. 경신에 백기가 관일하였다. 하 4월 무진에 왕후 김씨가 현덕궁에서 훙하였다. 경오에 황무가 사방에 자욱한지 무릇 4일에 서울에는 장역을 앓는 이가 많았으므로 왕이 의원을 나누어 보내어 치료하게 하였다. 신사에 동여진의 구타라와 서여진의 거일 등 20여인이 와서 토마와 기장을 바치므로 의대와 화물을 사하였다. 서여진의 목사 목개 등 2백호가 내투하였다. 윤월 무술에 동여진의 추장 아로대 등이 와서 토마와 초서피를 바치므로 의물을 사하였다. 계묘에 송의 강남인 왕숙자 등 24인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이 달에 개국사탑을 수리하여 사리를 봉안하고 거란을 설하여 3200여 승을 득도(도승)시쳤다. 5월 을축에 계란의 사부가 내투하였다. 무인에 10만의 승을 공양(반승)하였다. 동여진의 우나특 오이불 등 3000여인이 와서 토마와 병기를 바치므로 모두 작과 의물을 사하였다. 기묘에 강감찬으로 서경유수 내사시랑 평장사를 삼고 양진으로 예부상서겸 중추사를 삼고 이공으로 한림학사승지를 삼고 서눌로 좌간의대부를 삼았다. 경진에 좌윤 강윤봉 등 19인에게 전공으로 직 1급을 더하였다. 서북계에 명이 있었다. 임오에 교하기를 「을묘년에 계란이 입구할 때 여러 주 진의 장졸로서 공적이 있는 자는 증급하고 죽은 자는 부증을 우가하라」고 하였다. 계미에 황정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갑신에 서여진의 타억 실불 등 10인이 와서 마 및 갑주를 바치므로 모두 증직하고 물을 사하였다. 6월 을미에 채충순으로 이부상서 참지정사를 삼았다. 무술에 서북여진의 가을불 등 30인이 와서 마 및 병장을 바쳤다. 기해에 이공과 주저로 좌우상시를 삼았다. 무신에 처음으로 대자은현화사를 창건하여 써 고비의 명복에 이바지하였다. 경술에 혜성이 나타나니 길이가 4장여나 되었다. 계축에 동여진의 이골이 와 서여진의 제모 등이 내조하였다. 경신에 병부가 주하기를 「장군 양악과 중랑장 함진 등 449인은 모두 변공이 있사오니 직 1급을 더하여 주옵소서」하니 이를 청종하였다. 추 7월 을해에 구정에서 대초를 지내었다. 정축에 왕자가 연경원에서 탄생하니 이름을 형이라 사하고 원을 고쳐서 궁이라하고 인하여 예물을 사하였다. 이 달에 제위원을 수리하였다. 동여진의 오두주 등 30여인이 와서 토마와 병장을 바치므로 의물을 사하였다. 8월 임진에 진함조로 호부상서를 삼았다. 9월 무인에 주덕명으로 공부상서를 삼았다. 정해에 내사시랑 평장사 김심언이 졸하였다. 동여진의 이우불이 내조하매 향직을 증수하였다. 윤징고로 중추사를 삼았다. 교하기를 「사죄을 범한 자는 사죄을 면하여 먼 곳에 장류하고 유죄 이하는 사하라」고 하였다. 동 12월 병오에 우복사 김노현이 졸하였다. (노현은) 일에 근간함으로써 알려져 매양 영조가 있을 때에는 반드시 감독하게 하였다. 정미에 구주의 여진 목사 등 34인에게 견 주 포 50여필을 사하여 포적한 공을 상주었다. 무신에 내사시랑 평장사 강감찬으로 서북면 행영도통사를 삼았다. 신해에 수창궁으로 이어하였다. 동서여진의 추장 염지거이나 서을나 등 50인이 와서 마 및 갑주 병장을 바치매 모두 의물을 사하였다. 이 달에 예빈소경 원영을 계란에 보내어 청화하였다. 송의 천희년호를 행하였다. 11월 계해에 보신이 혜성이 이미 멸하였으므로 상표하여 정전에 나아가고 상선을 복구하도록 청하니 이를 청종하였다. 병인에 전인보로 상서좌복사를 삼고 한빈경으로 시강학사를 삼았다. 우산국이 동북여진의 침구를 입어 농업을 폐하므로 이원구를 보내어 농기를 사하였다. 12월 신묘에 동북여진의 아차오 을불 소손녕이 군사 10만으로 내침하매 왕은 평장사 강감찬으로 상원수를 삼고 대장군 강민첨으로 부원수를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흥화진에 이르러 크게 패북시키니 손녕이 군사를 이끌고 바로 서울로 나아가려 하거늘 민첨이 자주에 추급하여 또 크게 패북시켰다. 신해에 태조의 재궁을 받들어 부아산의 향림사에 옮겨 모셨다. 갑인에 서울을 계엄하였다. 병진에 유죄 이하를 사하였다. 정사에 혜성이 나타났다.

기미 10년 춘 정월 신유에 소손녕이 신은현에 이르니 서울을 상거하기 백리라 왕이 명하여 성외의 민호를 거두어 성내로 들어오게 하고 들을 비워(청야)서 기다리게 하니 손녕이 야율호덕을 보내어 서장을 가지고 통덕문에 이르러 회군한다고 고하고 가만히 척후병 200여기를 보내어 금교역에 이르거늘 우리 측에서는 군사 100명을 보내어 밤을 타 엄살하였다. 병자에 동여진의 추장 우나 등이 내조하였다. 2월 기축 삭에 난병이 구주를 통과할 새 감찬 등이 맞어 싸워 크게 패북시키니 생환자가 겨우 수천인이었다. 임진에 우복사 전보인이 졸하였다. (보인은) 명경출신으로 여러번 학관에 제수되니 시인이 숙유라고 칭하였으나 성품이 경조하였다. 갑오에 강감찬이 개선하니 왕이 친히 영파역에서 맞이하였다. 임자에 장수를 명복전에서 향연하고 아울러 3군을 위로하였다. 3월 무오 삭에 일식하였다. 신유에 상서좌복사 문인위가 졸하였다. 계해에 통주도부서 유백부 등 173인이 역전하다가 전사하였으므로 관을 추증하고 그 집에 미맥을 사하되 차등있게 하라고 명하였다. 갑자에 이응보로 우복사를 삼고 강민첨으로 응양상장군주국을 삼고 유참으로 예빈경을 삼고 김종현으로 예부원외랑을 삼았다. 무진에 철리국주 나사의 사인 아로태가 와서 토마를 바쳤다. 갑신에 여수하고 경죄(경계)는 소결(소통정리)하였다. 하 4월 계묘에 신사에 비를 빌었다. 병진에 진명선병도부서 장위남 등이 해적 8소를 잡아 적이 약취한 일본 생구 남녀 259인은 공역령 정자량을 보내어 그 나라에 압송토록 하였다. 5월 병인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무진에 계란 동경의 문적원소감 오장공이 와서 알견하였다. 신사에 가뭄으로 여수하였다. 임오에 사신을 철리국에 보내어 보빙하였다. 6월 병술 삭에 동여진의 추장 나사불 등이 무리를 거느리고 내조하였다. 무자에 나민으로 상서예부시랑겸 우간의대부를 삼았다. 추 7월 신유에 이응보 이원으로 좌우복사를 삼았다. 기사에 송 천주의 진문궤 등 100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경오에 서여진의 추장 아라불이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마를 바쳤다. 임신에 송 복주의 우선 등 100여인이 와서 향약을 바쳤다. 기묘에 우산국 민호로서 일찍이 여진에게 노략이 되어 내분한 자를 모두 돌아가게 하였다. 8월 기축에 예빈경 최원신과 이수화를 송에 보내어 하정하였다. 신묘에 계란의 동경사 공부소경 고응수가 왔다. 을미에 고공원외랑 이인택을 계란의 동경에 보냈다. 을사에 문하시중 유진이 졸하였다. 임자에 동여진의 모일라가 무리를 거느리고 내조하니 계직을 더 주었다. 9월 갑인 삭에 태사가 일식을 주하였으나 음운으로 보이지 않았다. 을묘에 수창궁으로 이어하였다. 임술에 중양절(9월9일)이므로 송 및 탐라 흑수 제국인에게 저관에서 사연하였다. 동 10월 갑신 삭에 유소로 사헌중승을 삼았다. 갑오에 양절(중국의 절동 절서)의 망난 등 60인이 왔다 11월 계축 삭에 강감찬으로 문하시랑 동내사 문하평장사를 삼았다. 경신에 강남 주 현의 정호를 옮겨 써 상산 이천 수안 신은 협계 우봉 등 현을 채웠다. 신사에 태조 재궁을 받들어 다시 현릉에 장사하였다. 12월 계미 삭에 왕자가 안복궁에서 나매 이름을 서라 사하고 궁호를 고쳐 연덕이라 하였으며 인하여 예물을 사하였다. 경인에 동흑수국 추장 구돌라가 와서 토마와 병장을 바쳤다. 임진에 대한이므로 옥수을 소결하였다. 정유에 최사위로 청하현 개국남을 삼았다. 무술에강민첨으로 우산기상시를 삼았다. 갑진에 유방으로 천승현 개국남을 삼고 채충순으로 제양현 개국남을 삼았다. 병오에 현릉에 배알하였다. 신해에 혜성이 나타났다.

경신 11년 춘 정월 계해에 진함조로 우복사겸 도정사를 삼고 최원으로 호부상서를 삼고 이가도로 상서우승을 삼고 이수화로 기거랑을 삼고 최충으로 기거사인을 삼고 이작충으로 우보궐을 삼았다. 병인에 흑수말갈 알시경 고지문 등 24인이 와서 토물(방물)을 바쳤다. 신미에 박유인 김가로 좌우습유를 삼았다. 서여진의 추장 고두화가 와서 방물을 바쳤다. 2월 무자에 수안현의 대정 혁연과 군사 이증과 군사 시음달이 전사하였으므로 처자에게 화물을 우사하였다. 기축에 전고부령인 사유한과 그 아들이 번인에게 납치되었다가 도망쳐 돌아왔으므로 왕이 그 노고를 생각하여 특히 관직을 가하고 의량을 사하였다. 임인에 동여진의 검불라 등 7인이 와서 계란관인 1과와 토마를 바쳤다. 갑진에 문하시랑 진적 이예균과 내사시랑 왕동영과 사재경 윤여와 장작소감 왕좌섬과 소부승 김덕화와 장작주부 김징호와 인의감 김득굉이 계란에 억류되었으므로 그들의 처에게 각기 미곡을 사하되 차등있게 하고 좌섬의 처는 개성군군을 봉하고 아들 이보에게는 예부주사를 제수하였다. 기유에 송의 천주인 회지 등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이 달에 이작인을 보내어 표를 받들고 계란에 가 번을 칭하고 공바치기를 종전대로 할 것을 청하게 하고 또 구금한 사람 지자리를 돌려보내었는데 지자리는 억류된지 무릇 6연이 되었다. 3월 계축에 계란사신 야율행평을 돌려보내었다. 기미에 계란사신 검교사도 한소옹이 왔다. 신유에 강민첨으로 병부상서를 삼았다. 갑자에 여진의 귀덕장군 불나가 무리를 거느리고 내조하였다. 정묘에 장군 팽홍패 등 10인은 변공이 있음으로 모두 1급을 더하였다. 특히 고장군 정신용 집에 곡 300석을 사하였다. 하 4월 경자에 왕이 임간하여 문하시랑 최사위와 지중추사 강민첨을 보내어 아들 흠을 책하여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수사도겸 내사령 상주국 숭인광효보운공신을 삼고 연경군으로 봉하였다. 계묘에 문무상참 이상관을 명복전에서 향연하고 물을 사하되 차등있게 하였다. 정미에 예부상서 양진과 형부시랑 한거화를 계란에 보내어 왕자 책봉함을 고하고자 할 새 재신 유방 등이 간지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기유에 동여진의 추장 달노가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번미 300석을 바쳤다. 5월 신해 삭에 사자좌 100을 내정에 설하고 인왕경을 3일동안 강하였다. 정사에 윤징고로 우산기상시를 삼았다. 을해에 명복전에 복시하고 이원현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흑수말갈의 오두나 등 70여인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경진에 최원신 이수화가 봉사에 오욕이 있으므로 모두 귀양보냈다. 안홍점으로 사헌잡단을 삼았다. 6월에 서북계에 황이 있었다. 계사에 지서사 차사재소경 노집중을 계란의 동경에 보냈다. 기해에 불나국 추장 사가문이 여진의 노울달을 보내어 토물을 바쳤다. 추 7월 을축에 오래 가물음으로 여수하니 계유에 큰 비가 왔다. 8월 병술에 왕이 안서도 둔전 1240결을 현화사에 시납하매 양성이 재삼 논박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해에 신라 집사성시랑 최치원을 내사령으로 추증하여 선성의 묘정에 종사하게 하였다. 경자에 대내를 중수하므로 수창궁에 이어하였다. 9월 정사에 군신을 관인전에서 향연하였다. 기미에 왕이 현화사에 가서 친히 새로 만든 종을 치고 또 군료들로 하여금 치게 하고 각기 의물과 필단을 희사하게 하였다. 동 10월 기축에 현화사 승 법경으로 왕사를 삼았다. 윤 12월 경술에 이현재로 전중시어사헌을 삼았다. 계해에 연주에 지진하였다. 이 해에 최제안을 계란에 보내어 천령절을 하하고 김맹을 송에 보냈다.

신유 12년 춘 정월 경진에 백기가 관일하였다. 기축에 계란 동경사 좌상시 왕도충이 와서 그 임금이 장차 책례를 받는다고 고하였다. 을사에 자신전을 고쳐 경덕전이라 하고 토양궁을 정양궁이라 하고 좌우조천문을 조종이라 하고 유원문을 숭복이라고 하였다. 이 달에 흑수말갈 추장 아두타불 등이 와서 마 및 궁시를 바쳤다. 2월 정미에 계란의 검교사공 어사대부 요거신이 내빙하였다. 신해에 오관산이 무너졌다. 계유에 동여진의 회화장군 마저개가 무리를 거느리고 내조하였다. 갑술에 서울의 남녀 90세 이상된 자에게 주식 다약 포백을 사하되 차등있게 하였다. 3월 임오에 유방으로 내사시랑 평장사를 삼고 주덕명으로 상서좌복사를 삼고 김현섭으로 형부상서를 삼고 박눌암으로 공부상서를 삼고 서눌로 국자제주 지리부사를 삼았다. 을유에 서여진의 모일라 나홀라 등이 와서 토마와 초서피를 바쳤다. 계사에 철리국이 사신을 보내어 전과 같이 귀부할 것을 표청하였다. 을미에 계란 동경사 검교산기상시 장징악이 내빙하였다. 병신에 현화사 북산이 무너져 옥박이 출토되었다. 문공전을 고쳐 문덕전이라고 하였다. 하 4월 기사에 인왕경을 구정에서 3일간 강하였다. 경오에 비를 빌었다. 5월 경진에 토룡을 남성 뜰에 만들고 무격을 모아 비를 빌었다. 병술에 여수하였다. 무자에 상서좌승 이가도에게 명하여 경주에 가서 고선사 금라가사와 불정골과 창림사의 불아를 가져오게하여 모두 내전에 두었다. 무인에 비가 왔다. 6월 정묘에 장영으로 상서좌복사 동내사문하 평장사를 삼고 인하여 치사하게 하고 주저로 한림학사승지를 삼았다. 한조를 송에 보내어 사은하였다. 추 7월 갑술 삭에 일식하였다. 병자에 탐라가 방물을 바쳤다. 계사에 동여진의 흑수 추장 거울마두개가 왔다. 계묘에 명경전을 고쳐 선정이라 하고 영은전을 명경이라 하고 경덕전을 연영이라고 하였다. 8월 신해에 김인위로 상서우복사를 삼고 인하여 치사하게 하였다. 기미에 왕이 현화사에 나아가서 친히 비액을 전하였는데 일찍이 한림학사 주저에게 비문을 짓게 하고 참지정사 채충순에게 비음을 짓게 하고 아울러 글씨를 쓰게 하였던 것이다. 무진에 왕자가 연덕궁에서 탄생하니 이름을 기라고 사하였다. 신미에 왕자 흠에게 호국공신호를 가사하고 최사위로 검교태사 수문하시중을 삼고 최항으로 검교태부 수문하시랑 동내사문하 평장사를 삼고 유방으로 검교태보를 삼고 채충순 윤징고로 모두 검교태위를 삼았다. 임신에 관인전에 거동하여 복시하고 조패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이 달에 동여진의 실빈 아리고가 내조하였다. 9월 계유 삭에 이공으로 중추사 검교사공을 삼았다. 을미에 흑수말갈의 소물개 고지문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중추사 이공과 병부시랑 유종을 계란에 보내어 수책을 하하였다. 동 10월 기유에 이주헌으로 상서좌복사 참지정사를 삼았다. 을묘에 동서여진의 추장 아로대와 아개 등이 내조하였다. 11월 계미에 지중추사 병부상서 강민첨이 졸하였다. 12월 을사에 중추사 우산기상시 윤징고가 졸하였다. 무오에 최사위로 판상서이부사를 삼고 김맹으로 이부시랑을 삼았다.

임술 13년 춘 정월 정축에 곽원으로 우산기상시를 삼고 이작인으로 동지중추사를 삼고 김맹으로 권지중추사를 삼았다. 정해에 흑수 추장 사일라와 만투불 등이 내조하였다. 갑오에 신라 한림 설청을 홍유후로 추증하고 선성묘정에 종사하게 하였다. 정유에 유징필로 한림학사비서감을 삼았다. 2월 신축 삭에 서여진의 저라가 와 인구(생구)와 방물을 바쳤다. 임인에 이공으로 형부상서를 삼았다. 기유에 탐라가 방물을 바쳤다. 군기소감 김인유를 계란에 보내어 춘계간후를 하였다. 임자에 계란의 맹유 연거 등 4인이 내분하였다. 병진에 궁성동북랑 150여간이 불탔다. 정묘에 참지정사 박충숙과 국자 사업 이경을 계란에 보냈다. 3월 계유에 이가도로 동지중추사를 삼았다. 을해에 상서우복사 이주헌이 졸하였다. 하 4월에 계란이 어사대부 상장군 소회례 등을 보내 와 왕을 책하여 개부의동삼사 수상서령 상주국 고려국왕 식읍 1만호 식실봉 1천호로 하고 인하여 차복 의물을 사하니 이로부터 다시 계란의 연호를 행하였다. 정묘에 채충순으로 내사시랑 평장사겸 서경유수를 삼았다. 5월 경오에 군망에 비를 빌었다. 을해에 명주에서 상언하기를 은광이 정선현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병자에 한조가 송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송제가 성혜방 음양2택서 건흥력 석전1장을 사하였다. 계사에 아들 연경군 흠을 책하여 왕태자로 삼았다. 흑수말갈의 소의 등 30여인이 내조하였다. 6월 경자에 아들 형을 책하여 평양군을 삼았다. 계묘에 아들 서를 책하여 악랑군을 삼았다. 을사에 유방으로 문하시랑 평장사를 삼았다. 임자에 동궁 관속을 두었다. 무진에 연덕궁주 김씨가 졸하였다. 추 7월 병자에 도병마사가 주하기를 「우산국민으로 여진의 노략을 입어 도망하여온 자는 예주에 두고 관에서 자량을 급여하여 아주 편호를 삼으소서」하니 이를 청종하였다. 동서여진 아라대 등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8월 경자에 계란 동경의 지례사 이극방이 와서 말하기를 「지금으로부터 춘하계문후사를 한 번씩만 보내되 천령절하례사와 정단사와 동행하도록 하고 추동계문후사도 한 번씩 보내되 태후생진하례사와 동행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갑인에 송의 복주인 진상중 등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철리국의 수령 나사가 흑수의 아부한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신유에 광남인 진문수 등이 와서 향약을 바쳤다. 갑자에 국자제주 서눌의 딸을 맞이하여 숙비를 삼았다. 9월 기사에 서울에 남녀의 나이 80 이상된 자와 독 폐질자에게 주식과 다포를 사하되 차등있게 하였다. 병자에 계란 동경사 왕수영이 왔다. 계미에 도관랑중 윤종원을 계란에 보내어 태후생진을 하하였다. 정해에 좌산기상시 곽원과 상서우승 왕서를 계란에 보냈다. 무자에 계란의 수우매 오어을 등 19인이 내투하였다. 동 10월 경술에 여수하였다. 을묘에 연경궁주 김씨를 책하여 왕비를 삼았다. 임우가 그치지 않으므로 군망에 비 개이기를 빌었다. 기미에 서눌로 중추사 우산기상시를 삼고 이가도로 중추사 국자제주를 삼고 한조와 유소로 좌우간의대부를 삼았다. 신유에 주저로 예부상서를 삼고 이작인으로 사헌대부를 삼고 김맹으로 중추부사를 삼았다. 11월 을유에 계란의 동경사 고장윤이 왔다. 12월 신축에 계란의 불대 등 11인이 내투하였다. 계축에 서여진의 어니저가 와 고하기를 「고모가 일찍 투화인 매나를 따라 와서 대국의 서울에 산지 이미 수년이 지났으나 고향(본번)을 생각하고 있사오니 토마로써 속바지 하고자 하나니다」고 하거늘 곧 돌려 보내도록 명하고 그 말(마)도 돌려 주었다. 기미에 동여진의 수령 사빈이 와서 마 및 궁시를 바쳤다.

계해 14년 춘 정월 임신에 재추(재상 추상)를 내전에서 향연하였다. 을해에 채충순으로 태자소사를 삼고 서눌로 참지정사를 삼고 곽원으로 중추사를 삼았다. 정축에 유방으로 서북면 행영도통사를 삼았다. 무인에 계란인 초복 등 11호가 내투하였다. 임오에 진함조와 주덕명으로 상서좌우복사를 삼았다. 이 달에 흑수말갈의 오사불 등 80인이 와서 마와 방물을 바치거늘 각각 포백을 사하였다. 2월 무술에 이공으로 서경유수를 삼았다. 병오에 최치원을 추봉하여 문창후라 하였다. 동여진 추장 아로불과 서여진의 나알개가 내투하였다. 3월 정묘에 비서감 유징필을 계란에 보냈다. 하 4월 경자에 계란이 좌산기상시 무백 야율극공 등을 보내와 태자 흠을 책봉하여 보국대장군 검교태사 수태보겸 시중 고려국공으로 삼았다. 이 달에 여진 말갈 군두 등 70여인이 와서 토마를 바쳤다. 5월 병인에 계란의 동경지서사 노지상이 왔다. 을해에 금주에 지진하였는데 처음으로 지진이 일어난 곳에 해괴제를 거행하게 하였다. 정축에 계란 마허저 등 13호가 내투하였다. 무자에 문무참내의 군료들을 천복전에서 향연하고 사람마다 말 한 필씩 사하였다. 임진에 계란의 대세노 제화나 등 8인이 내투하였다. 여진의 이우불이 내투하였다. 6월 무술에 한재로 말미암아 여수하였다. 을사에 천덕전에 거동하여 복시하고 장교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추 7월 계해 삭에 계란이 태보 황신을 보내와 생진을 하하였다. 기묘에 이부가 주하기를 [전대상재랑 전언이 모상을 추복하여 효로써 알려졌으니 청컨대 차제직을 가하여 장래를 권장하소서]하니 이를 청종하였다. 8월 임자에 본궁으로 돌아왔다. 9월 기사에 말갈수령 아령주가 내조하였다. 계유에 구정에서 크게 초제하였다. 병자에 최보성으로 병부상서를 삼았다. 기축에 노전으로 삼사사를 삼았다. 윤월 경자에 계란사신 율수상이 내조하였다. 임인에 계란의 동경사 고인수가 왔다. 동 10월 신미에 이주좌로 시어사를 삼고 황보영으로 전중시어사를 삼고 허원으로 좌습유를 삼았다. 11월 병신에 흑수 추장 야힐라 등이 내조하였다. 송의 천주인 진억이 내투하였다. 12월 정축에 입춘절이므로 재추와 상장군을 건덕전에서 향연하였다. 기묘에 유방으로 태자태보를 삼고 이공으로 내사시랑 평장사 감수국사를 삼고 이원으로 검교태자태보를 삼았다.

갑자 15년 춘 정월 갑인 삭에 곽원으로 형부상서를 삼고 유징필로 예부상서를 삼았다. 계란의 마사도 등 3인이 내투하였다. 무술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정사에 경흥원주 김씨를 책하여 덕비라 하였다. 3월 신묘에 이자연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갑오에 서여진의 고두노와 동여진의 슬불달 등 90인이 내투하였다. 신축에 왕희걸로 서경부유수를 삼았다. 하 4월 기묘에 군묘에 비를 빌었다. 임오에 흑수말갈의 고도매 등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5월 정해에 태사국이 주하기를 [마땅히 일식할 것인데 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계사에 비가 왔다. 봄부터 가뭄이 심하매 백성들이 모여 하늘에 부르짖어 기도하더니 이날 새벽에 왕께서 일어나 그 소리를 듣고 곧 식사를 거두고 목욕재계하고 분향하며 전정에 서서 하늘을 우러러 빌기를 [과인에게 허물이 있거든 청컨대 곧 벌을 나리시고 백성에게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과인이 또한 당하겠사오니 바라건대 은택을 나리사 백성을 구하여 주시옵소서]하더니 크게 비가 내렸다. 경자에 동여진의 회화장군 아알나가 내조하였다. 경술에 예부상서 주저가 졸하였다. 6월 신유에 문하시랑 평장사 최항이 졸하였다. 추 7월 병술 삭에 계란이 검교사도 고수를 보내와 생진을 하하였다. 임진에 서여진 추장 도라와 동여진의 노을견 등이 와서 말을 바쳤다. 을사에 서눌로 서북면 행영도통을 삼고 곽원으로 그 부(부도통)를 삼았다. 임자에 탐라 추장 주물과 아들 고몰로 모두 운휘대장군 호군을 삼았다. 9월 을미에 김인위로 상서좌복사 참지정사를 삼고 인하여 치사하게 하였다. 갑인에 흑수말갈의 아리고가 왔다. 이 달에 대식국(아라비아제국)의 열라자 등 100인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대식국은 서역에 있음) 동 10월 병진에 계란이 검교좌복사 이정윤을 보내왔다. 11월 을유 삭에 태사국이 주하기를 [마땅히 일식할 것인데 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경인에 이공으로 상서좌복사 동내사문하 평장사를 삼았다. 병오에 이가도로 호부상서를 삼았다. 기유에 상주에 지진하였다. 12월 임신에 황주량으로 어사중승을 삼고 최충으로 중추직학사를 삼고 이인택으로 시어사를 삼고 최상여로 전중시어사를 삼았다.

을축 16년 춘 정월 경인에 여진회화장군 야고가와 귀덕장군 아골타로 등이 내조하매 각각 작위와 의류를 사하였다. 을미에 유방으로 판상서 병부사를 삼고 채충순으로 판상서 예부사를 삼았다. 정유에 피위종 등 6인을 사하여 복작하게 하였다. 처음에 위종이 병부랑중으로 있었을 때 요외에 순행하다가 계란장군 야율살할의 사냥함을 보고 예빈주부 정민의 등 5인과 더불어 달려가 죽이고 돌아와서 그것으로써 공상을 받을려고 하매 소사가 병사를 함부로 움직여 새에 나갔다는 이유로 원방에 유배하였던 것인데 이에 이르러 방환된 것이다. 신해에 여진 추장 모일라가 내조하매 변경에 공로가 있으므로 대광을 가수고 의물을 우사하였다. 2월 무진에 곽원으로 추성문리공신 상주국을 삼고 이가도로 치성공신을 삼고 김맹으로 선춘현 개국남을 삼고 나민으로 치군문덕공신을 삼고 유소로 동지중추사를 삼았다. 임오에 한식으로써 문무상참 이상관을 내전에서 향연하였다. 3월 기축에 백기가 관일하였다. 경인에 모든 영작을 정지하고 농민들을 방환하였다. 갑인에 연경궁주 김씨가 졸하였다. 하 4월 갑자에 교하기를 [농사가 바야흐로 한참인 때에 가물음이 심하여 백성의 식량이 핍절될까 하노니 나의 소우의 걱정이로다. 마땅히 정전을 피하고 상선을 감하며 도재를 금하고 악현을 거두며 원옥을 심사하고 군망에 기도할 것이다. 이는 오직 과인만이 깊이 책궁해야 할 일이 아니라 모든 백관들도 또한 마땅히 스스로 힘 쓸 지어다]라고 하였다. 신미에 영남도의 광평 하빈 등 10현에 지진하였고 임신 을해에 또 지진하였다. 6월 갑인에 궁인 유씨로 귀비를 삼았다. 기미에 교하기를 [하늘에 본받고 때에 순응한 연후에 가히 재앙을 막고 화평을 이룩할 것이어늘 이제 내사문하성 및 제관사들의 주행하는 바가 시정에 어그러짐이 많으니 음양의 조화를 바람이 어찌 그릇됨이 아닐까. 마땅히 각자가 마음을 다하여 힘써 월령을 지켜 써 나의 듯에 맞도록 하라]고 하였다. 추 7월 신사 삭에 계란이 감문위대장군 한순을 보내와 생진을 하하였다. 을유에 한수량으로 시어사를 삼고 김충찬 유백인으로 모두 전중시어사를 삼고 김석지 한연조 최연가 김영기로 모두 감찰어사를 삼았다. 정해에 경상 청주 안동 밀성에 지진하였다. 정미에 유소로 태자빈객을 삼았다. 9월 신사에 대식만의 하선 나자 등 100인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동 11월 기묘 삭에 태사가 주하기를 [마땅히 일식할 것인데 하지 않았다]고 하니 군신이 표하하였다. 12월 무오에 최충으로 한림학사 내사사인 지제선를 삼았다. 교하기를 [무릇 범죄로 직전을 압수 당한 자에게 사를 입게 하되 진도 및 공사문서를 위조한 자 재물을 받고 법을 굽힌 자 감임하면서 자신이 도둑질한 자 첨곡간아한 자의 범죄를 제한 외에는 다 직전의 환급을 허하라]고 하였다.

병인 17년 춘 정월 정해에 이단으로 어사대부를 삼았다. 임진에 동여진 귀덕장군 거려울 등이 내조하였다. 2월 계해에 계란이 태빙 이지순을 보내어 내빙하였다. 을축에 백기가 관일하였다. 3월 경인에 최황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하 4월 경오에 지채문으로 우복사를 삼았다. 윤 5월 임자에 동서여진 추장이 각각 부락자제들을 거느리고 와서 토마와 궁노를 바쳤다. 갑자에 계란이 어원판관 야율골타를 보내와 길을 빌려 장차 동북여진으로 가기를 청하거늘 허낙하지 아니하였다. 6월 무인에 이단으로 우상시지중추사를 삼고 황보유의로 어사대부를 삼았다. 추 7월 갑인 삭에 계란이 감문위대장군 왕문간을 보내와 생진을 하하였다. 정미에 큰 비가 4일간 내리니 경성민가의 표훼된 자가 심히 많았다. 8월 임오에 송 광남인 이문통 등 3인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9월 갑자에 해주 신광사에 행차하였다. 동 10월 계유 삭에 일식하였다. 임오에 해주로부터 돌아왔다. 11월에 황주량으로 태자소첨사를 삼고 최제안으로 태자우서자를 삼고 최충으로 태자중윤을 삼았다.

정묘 18년 춘 정월 신해에 최사위로 태자태사를 삼고 채충순 이공으로 모두 문하시랑을 삼고 서눌로 내사시랑을 삼고 곽원 이가도로 모두 참지정사를 삼고 이단 김맹으로 모두 중추사를 삼고 양진으로 좌복사를 삼고 최충으로 급사중을 삼았다. 임자에 동여진 추장 창부 등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병인에 문하시랑 유방이 표를 올려 걸해하거늘 허락하고 특진문하시중을 가하였다. 무진에 계란이 이정윤을 보내왔다. 2월 무자에 대묘를 수리하고 다시 신주를 봉안하였다. 갑오에 흑수말갈 귀덕대장군 아골아가가 와서 토마와 기장을 바쳤다. 3월 을묘에 여진 수령 슬불달 등 100인이 내조하였다. 하 4월 갑술에 서리가 내렸다. 임오에 대묘에 배알하고 선왕선후에게 존호를 가상하고 배현경 홍유 복지겸 신숭겸 유검필 최응을 태조에 배향하고 박술희 김견술을 혜종에 배향하고 왕식렴을 정종에 배향하고 유신성 서필을 광종에 배향하고 최지몽 박량유를 경종에 배향하고 최승로 최량 이지백 서희 이몽유를 성종에 배향하고 한언공 김승조 최숙을 목종에 배향하고 유죄 이하를 사하였다. 5월 경자 삭에 군망에 비를 빌었다. 갑인에 한재로 정전을 피하고 상선을 감하고 옥수를 소결하였다. 을묘에 두 번째 우제(기우제)를 지냈다. 정사에 공주에 서리가 내려 묘를 살하였다. 경신에 왕자 형을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겸 내사령으로 삼고 서를 개부의동삼사 검교태부겸 상서령으로 삼았다. 병인에 비가 내렸다. 6월 기묘에 황주량으로 형부시랑을 삼고 이주좌로 기거사인을 삼고 허원으로 시어사를 삼고 이유량으로 전중시어사를 삼고 진현석으로 우보궐을 삼고 이응년으로 감찰어사를 삼았다. 계미에 양주가 주하기를 [장의 삼천 청연 등의 사승들이 금을 범하여 양주한 쌀이 합계 360여석이오니 청컨대 의율 단죄하소서]하거늘 이를 청종하였다. 갑신에 교하기를 [전 공부시랑 유품렴 등 143인이 비록 첨곡간사의 죄를 범하였으나 이미 누차의 사를 거쳤으니 모두 죄명을 삭제하고 서용할 것이다]고 하였다. 탐라(제주)가 방물을 바쳤다. 신묘에 동여진 추장 모일라 등 20여인이 내조하였다. 추 7월 기해 삭에 계란이 태부 이광일 야율호도곤을 보내와 생진을 하하였다. 경자에 영광군에서 산호수를 바치니 높이는 8척이요 가지는 81이었다. 계해에 송악이 무너졌다. 8월 무진에 계란의 동경사 고연이 왔다. 정해에 송의 강남인 이문통 등이 와서 서책을 바치니 무릇 597권이었다. 9월 무술 삭에 혜일중광사를 창건할 것을 명하고 인부와 공장을 징발하게 하니 보신 간관들이 모두 주하기를 [백성들이 노폐하니 공사를 이르킴이 적선치 못하오이다]고 하였으나 좌승선 이괴가 홀로 주하기를 [부처님을 위하여 절을 지으면 공덕이 무량한 것이오니 백성들을 수고롭게 한들 무엇이 해로우리까]라고 하였다. 임술에 곽숭원 이능봉이 연고자임으로 모두 장군을 삼았다. 동 10월 임오에 인왕경을 구정에서 강하였다.

무진 19년 춘 정월 무술에 임유간으로 우습유제고겸 동궁시독학사를 삼았다. 이 달에 여진의 귀덕장군 고두 등 70여인이 내조하고 또 골부가 부락 500호를 거느리고 내부하였다. 2월 신미에 검교우복사 김경렴이 졸하였다. 경렴은 큰 글씨 잘 쓰기로 당대에 유명하였다. 갑술에 예부원외랑 김가를 계란의 동경에 보냈다. 정해에 경계(경죄의 옥수)를 방면하였다. 계사에 대부경 김작빈을 계란에 보냈다. 3월 기해에 경계를 방면하였다. 기미에 문덕전에 거동하여 복시하고 정재원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신유에 계란이 장군 야율소와 방주방어사 양연미 등을 보내어 내빙하였다. 이 달에 동여진 귀덕장군 아골이 왔다. 하 4월 신미에 우박이 내렸다. 5월 신축에 여진이 평해군을 침공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는데 적선 4척을 추포하여 모두 죽였다. 6월 기사에 비가 심하므로 군묘에 비 개이기를 빌었다. 윤월 갑인에 북번 추장 아홀 등 57인이 내부하였다. 추 7월 을미에 계란이 심주자사 소경과 박주자사 부용원을 보내와 생진을 하하였다. 정유에 동여진 쾌발부락 300여호가 내부하였다. 을묘에 왕비 김씨가 훙하였다. 이 달에 동서여진 추장 이오불 두로개 등 200여인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8월에 서북계에 황해가 있었다. 9월 병신에 송의 천주인 이선 등 30여인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무신에 좌사랑중 임복을 계란에 보내어 황후의 생진을 하하였다. 동 10월 계유에 상서우승 정장을 계란에 보내어 사은하였다. 정해에 동여진 적선 15척이 고성에 입구하고 기축에 용진진을 침공하여 중랑장 박흥언 등 70여인이 사로잡혔다. 11월 계묘에 대복경 왕희걸 전중시어사 이유량을 계란에 보내어 생진을 하하였다. 12월 임진에 동여진 사일라 등이 와서 마를 바쳤다.

기사 20년 춘 정월 계사에 천추태후 황보씨가 숭덕궁에서 훙하였다. 2월 경진에 궁인 한씨의 부빈경으로 태자빈객 동지중추사 주국을 겸하게 하였다. 정해에 왕의 이름(순)과 상근한 음을 피휘하여 순성을 고쳐 손으로 하였다. 윤월 기해에 여진의 적선 30여척이 동비에 내침하거늘 선병도부서판관 조윤정이 쳐서 쫓아버렸다. 이 달에 동서여진 아홀사 일라골개 등 100여인이 와서 토마와 병기를 바치거늘 작 1급씩을 더하였다. 3월 경오에 오관산이 무너졌다. 경진에 동여진 적선 10소가 명주에 입구하거늘 병마판관 김후가 쳐서 물리쳤다. 하 4월 무술에 왕자 형에게 곡2000석 전 300결 장획(노비) 30구를 사하였다. 경자에 장경도장을 회경전에 설하고 승10000을 구정에서 공양하였다. 경술에 계란이 대장군 야율연 영해북주자사 장령의를 보내어 내빙하였다. 계란인 조기이 가족을 거느리고 내분하여 왔다. 을묘에 왕이 대묘의 변두를 증설할 것을 의논할새 예부가 왕제의 [풍년에 사치하지 않고 흉년에 검약하지 않는다.]는 뜻에 의거하여 굳이 불가하다 하므로 이를 중지하였다. 5월 을축에 동여진 400여인이 동산현에 침구하였다. 6월 계축에 탐라세자 고오노가 내조하거늘 유격장군을 제수하고 포 1습을 사하였다. 광주 산수에 도적이 일어났으므로 을묘에 용호군 장교를 보내어 잡게 하였다. 병진에 유처승을 징발하여 중광사 역도에 충당하였다. 추 7월 무오 삭에 계란이 장군 야율관녕과 숭록소경 이가봉을 보내와 생진을 하하였다. 탐라가 방물을 바쳤다. 문희현에서 수정과 옥박 40000여매가 나왔다. 을유에 탐라인 정일 등이 일본으로부터 돌아왔다. 처음 정일 등 21인이 항해중 바람에 밀리어 동남 극원도에 표착하니 도인들은 장대하고 전신에 털이 나고 언어가 다른데 7개월동안 억류를 당하였다. 정일 등 7인이 가만히 소선을 타고 동북으로 일본 나사부(장기)에 이르렀다가 이에 생환하게 된 것이다. 8월 정해 삭에 일식하였다. 을미에 동여진 대상 쾌발이 그 족속 300여호를 거느리고 내투하거늘 발해의 고성지를 주어 살게 하였다. 기해에 송 광남인 장문보 등 80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계묘에 왕이 서으로 순행할새 경술에 평주에 이르고 갑인에 백주에 이르렀다. 이 달에 개경 나성이 이룩되니 무릇 21연만에 준공하였다. 9월 무오에 계란의 동경장군 대연림이 대부승 고길덕을 보내와 건국을 고하고 겸하여 구원을 청하였다. 연림은 발해 시조 대조영의 7대손으로서 계란에 배반하여 국호를 흥료라 하고 건원하여 천흥이라고 하였다. 갑자에 염주로 옮겨 행차할새 노상에서 중양영국시 1수를 지어 한림학사 이하에게 선시하고 곧 화진토록 하였다. 정묘에 드디어 해주에 행차할새 지나는 바 주 현의 기노(60이상의 노인)와 독질자에게 주식 포화를 사하되 차등있게 하고 장리에게는 직 1급을 가하였다. 을해에 교하기를 [근간 들으매 궁원 소속의 장호에 요역이 번중하여 백성들이 살아갈 수 없다 하니 전중성은 조사하여 구휼하라]하였다. 정축에 호종문무상참관 이상에게 향연하고 물을 사하되 차등있게 하였다. 동 10월 갑오에 왕이 해주로부터 돌아왔다. 11월 경신에 박종검을 예빈경좌간의대부로 삼았다. 병인에 개경라성 및 중광사조성도감원리에게 직 1급을 사하였다. 평장사 서눌로 판서경유수사를 삼고 상서좌복사 이단으로 서경유수사를 삼고 황주량으로 국자제주 한림학사를 삼고 최충으로 우간의대부를 삼고 이작충으로 급사중을 삼았다. 정묘에 이가도로 검교대위행이부상서겸 태자소사 참지정사를 삼았다. 무진에 형부상서 참지정사 곽원이 졸하였다. 경오에 광종의 궁인 김씨에게 현비를 증하였다. 갑신에 동여진의 구두 등 30여인이 내조하였다. 12월 경인에 뇌진하였다. 흥료국 대사 대연정이 동북여진을 끌고 계란과 서로 싸울새 사자를 보내 구수을 빌거늘 왕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더니 이로부터 길이 막혀 계란과 통하지 못하게 되었다. 임진에 서북면 판병마사 유소를 명하여 진에 나아가 써 흥료에 대비하게 하였다.

경오 21년 춘 정월 정사에 동여진 오을나 등 50인이 와서 마를 바쳤다. 병인에 흥료국이 또 수부원외랑 고길덕을 보내어 상표하고 군사를 청하였다. 2월 병술에 채충순으로 판서경유수사를 삼고 이작인으로 참지정사를 삼고 유소로 중추사를 삼았다. 갑오에 교주 익령동산현에 지진하였다. 을미에 동여진의 모일라가 와서 토마를 바쳤다. 신축에 적경궁주가 졸하거늘 익을 효혜라 하고 평릉에 장하였다. 3월 계유에 곽신으로 우승선을 삼고 최연수로 고공랑중겸 어사잡단을 삼고 유운으로 시어사를 삼았다. 하 4월 을유에 교하기를 [상년 12월이 송력에는 대진(30일)이 되어 있는데 아국태사의 올린 역에는 소진(29일)이 되어 있고 또 금년 정월 15일에는 주하기를 일식하리라고 하였는데 마침내 하지 않았다. 이는 반드시 술가가 미정한 소치이니 어사대는 추국하여 아뢰도록 하라]고 하였다. 무자에 동여진의 만투 등 60여인이 와서 과선 4소와 고시 117600개를 바쳤다. 갑오에 문덕전에 거동하여 복시하고 최유선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기해에 철리국주 나사가 여진 계타한 등을 보내와 초서피를 바치고 역일을 청하거늘 이를 허락하였다. 5월 갑인에 김맹으로 태자소부를 삼고 유징필로 태자빈객을 삼고 황주량으로 태자우서자를 삼고 최충으로 태자우론덕을 삼았다. 을묘에 동여진 봉국대장군 소물개 등이 와서 마 9필 과선 3소 고시 58600개와 기장을 바쳤다. 을축에 계란의 수군지휘사 호기위 대도 이경 등 6인이 내투하니 이로부터 계란 발해인의 내투함이 심히 많아졌다. 신미에 강감찬에게 문하시중을 가하였다. 6월 신묘에 수사 2죄를 특사하여 먼 곳에 유배하고 그 나머지는 다 면죄하게 하였다. 나성을 쌓고 중광사를 경영한 원리 승속공장에게는 모두 관계 직위를 가하고 부역자에게는 금년의 조포를 감하고 모든 주 군 현의 포흠된 세금은 무진년에 한해서 면제하게 하고 인주 위원 정융진에 성을 쌓은 자 및 서순에 호종하여 공로가 있는 자에게는 차제직을 가하고 백신 에게는 물을 사하되 차등있게 하였다. 추 7월 갑자에 적경공주가 졸하였다. 을축에 흥료국 행영도부서 유충정이 영주자사 대경한을 보내어 표문을 가지고 와 수조를 빌었다. 기사에 송의 천주인 노준 등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무인에 내사시랑 진함조가 졸하였다. 함조는 술수를 닦아 매양 국가 유사시에는 문득 도참으로써 질정하여 드디어 대용에 이르렀으므로 시론이 이를 경히 여겼다. 8월 무신에 왕가도로 내사시랑 판삼사사를 삼고 이주좌로 어사중승을 삼았다. 9월 신해 삭에 탐라가 방물을 바쳤다. 병진에 흥료국 영주자사 이광록이 와서 급함을 고하였는데 이윽고 나라가 멸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드디어 머물러 돌아가지 아니하였다. 갑술에 김가를 계란에 보내어 동경의 수복을 하하였다. 을해에 계란이 천우장군 나한노를 보내오니 조에 말하기를 [요사이 사인들이 왕래하지 않음은 응당 길이 막힌 까닭이리라. 이제는 발해의 투주(위주)가 다 위폐를 당하여 이미 귀강하였으니 마땅히 배신을 보내어 속히 부국케 하면 반드시 염려는 없으리라]고 하였다. 동 10월 신사 삭에 한조를 지서경유수사로 삼았다. 이 달에 계란의 해가와 발해인 500인이 내투하거늘 강남주군에 살게 하였다. 11월 을축에 서여진의 만투 등 27호가 내부하거늘 동계에 살게 하였다. 계유에 어사잡단 최연수가 탄주하기를 [참지정사 이작인이 태조공신의 후예라고 사칭하고 그 아들에게 음직을 내리게 하였으니 관직을 파면시키소서]라고 하였다. 12월 신묘에 서눌로 문하시랑 동평장사 판상서 이부사를 삼았다. 정유에 중추사 김맹이 졸하였다. 계묘에 최제안으로 중추사를 삼고 황주량으로 중추부사를 삼았다. 이 달에 동여진 영새장군 목사아골 유원장군 알나 귀덕장군 아개주가 와서 마 및 철갑 호시를 바쳤다. 경성에 역질이 돌아 사람이 많이 죽었다.

신미 22년 춘 정월 신유에 동여진의 이우불이 와서 마 및 기장을 바쳤다. 을해에 적전을 친경하고 유죄 이하를 사하고 원구와 방택에 승단집례하는 이원 및 효자 순손 의부 절부 기노 독질자에게 물을 사하되 차등있게 하였다. 병자에 좌복사 양진으로 동경유수사를 삼았다. 2월 기묘에 문무상참관 이상을 문덕전에서 향연하였다. 기축에 왕자 기를 수태위겸 상서령 개성국공으로 책봉하였다. 이 달에 동서여진 80여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3월 갑인에 궁인 한씨로 상궁을 삼고 김씨로 상침을 함고 한씨로 상식을 삼고 서씨로 상침을 삼았다. 이 달에 여진의 사일라 등 40여인이 와서 토마를 바쳤다. 계란 발해민 40여인이 내투하였다. 하 4월 정해에 서리가 내렸다. 무자에 군망에 비를 빌었다. 을사에 왕이 불예하였다. 좌복사 이단으로 참지정사를 삼았다. 5월 임자에 유소로 이부상서 참지정사를 삼고 황보유의로 중추사를 삼았다. 정사에 최사위로 내사령을 삼아 인하여 치사하게 하고 이공으로 사공좌복사 판동경유수사를 삼았다. 무오에 공죄로서의 도형 이하를 사하였다. 정묘에 왕림으로 검교우복사 나주목사를 삼았다. 신미에 왕의 병환이 위독하매 태자 흠을 불러 후사를 부탁하고 이윽고 중광전에서 붕어하니 수가 40이요 재위 22년이었다. 왕이 어려서 총오 인혜하더니 장성함에 미쳐 학문에 민첩하고 서도에 정묘하고 사한을 좋아하여 무릇 한 번 듣고 본 것은 다시 잊지 않았다. 시호를 원문이라 하고 묘호를 현종이라 하고 송옥의 서록에 장하여 능을 선릉이라 하였다. 문종 10년 시호를 대효라 가하고 인종 18년 덕위를 가하고 고종 40년 달사를 가하였다.

사신 최충이 찬하기를 [전에 일컫기를 하늘이 장차 일어나게 함에 뉘 능히 이것을 폐하리요라 하였거니와 천추태후가 제마음대로 음황하여 가만이 경탈을 도모하매 목종께서 백성의 촉망을 알아차려 천추의 악당을 배제하고 멀리 사명을 달려 써 신기를 전수하여 근본과 기엽을 굳게 하였으니 이른바 하늘이 장차 일어나게 함에 뉘 능히 이것을 폐하리요 라는 말을 어찌 믿지 아니하랴. 그러나 고모의 끼친 화근으로 말미암아 융신(강조)이 반역을 꾸미고 강린이 틈을 타게 되매 경궐이 다 재가 되고 승여가 파천하여 간난비운이 극도에 달하였도다. 반정한 후에 융장과 화호하여 병혁을 쉬고 문덕을 닦으며 부세를 엷게 하고 요역을 가볍게 하며 준량한 인재를 등용하고 정사를 수행함이 공평하여 백성을 안도하게 하니 내외가 안정되고 농상이 자주 등풍하여 주의 성왕 강왕과 한의 문제 경제에 비하여도 또한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제현이 말하기를 [최충의 말은 세상에서 이른바 천명이라 하는 것이다. 구천 은 상담하여 회계의 치욕을 씻었고 소백은 거의 고난을 잊었기 때문에 화를 제인에게 남기었다. 인군이 천명 만 믿고 욕심을 함부로 하고 법도를 어기면 비록 얻었을지라도 반드시 잃는 것이니 이러므로 군자는 치세에도 난을 생각하고 평안할 때에도 위태함을 생각하며 끝을 조심함을 처음과 같이하여 써 천휴를 기다리는 것이니 현종과 같은 이는 이른바 나는 간연함이 없다하리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