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고려

제5대 경종(景宗,975~981 재위6년)

오늘의 쉼터 2009. 7. 30. 10:51

태조

혜종

정종

광종

경종

성종

목종

현종

덕종

정종

문종

순종

선종

헌종

숙종

예종

인종

의종

명종

신종

희종

강종

고종

원종

충열

충선

충숙

충혜

충목

충정

공민

우왕

창왕


 

 

제5대 경종(景宗,975~981 재위6년)

 

휘(諱) 유(周). 자 장민(長民). 광종의 장남. 어머니는 대목왕후(大穆王后) 황보씨(皇甫氏). 비(妃)는 대종(戴宗) 욱(旭)의 딸 헌애왕후(獻哀王后)와 헌정왕후(獻貞王后) 두 자매이다.

955년에 태자에 책봉되고, 즉위하여 전시과(田柴科)를 제정하였다. 뒤에 정치를 등한히 하고 음탕한 생활에 빠져 소인(小人)과 사귀기를 좋아하고, 군자(君子)를 멀리하였다.
                                                                
 <서문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경종 지인성목명혜헌화대왕의 휘는 주요 자는 장민이니 광종의 장자요 모는 대목왕후 황보씨로 광종 6년 을묘 9월 정사에 탄생하였다 16년 태자로 책립되고 26년 5월 갑오에 광종이 붕어하매 왕이 즉위하였다 대사하여 귀양간 사람들을 돌려 보내고 수인을 방면하며 연루자(흔루)를 씻어 주고 불우의 현재를 발탁하며 관작을 동복시키고 흠채를 면제하며 조조를 감하고 가옥을 파훼으며 참소한 문서를 불살라버렸다. 동 10월 갑자에 정승 김부를 가책하여 상부를 삼고 제(제왕의 재단)하기를「희주가 계성한 처음에 여망을 봉하였고 유한이 흥왕한 시초에 먼저 소하를 책하였다 이로부터 크게 환우(천하)를 정하고널리 기업을 열어 20대나 용도를 세우고 400연이나 인지를 밟으매 일월이 중명하고 건곤이 교태하였다 비록 스스로 무위한 임금이라 할지라도, 또한 치리에 관련된 신하로다 관광순화 위국공신 상주국 낙랑왕 정승 식읍 8,000호 김부는 대대로 계림에 처하여 벼슬은 왕작을 나누었다 영렬은 능운의 기를 떨치고 문장은 척지의 재에 날렸으며 부는 춘추를 누렸고 귀는 모토에 거하였다 육도와 삼략을 흉금에 간직하고 칠종과 오신을 손바닥 가리키듯 하였다 우리 태조께서는 처음에 인국과 친목하는 호의를 닦아서 일찌기 그 유풍을 알아주었으며 이어서 부마로 허혼하시니 안에 있어 대절로 보답하였다. 가국은 이미 일통에 귀하였고 군신은 완연히 삼한에서 합하였다. 영명(미명)을 크게 드날리고 의범을 빛나게 숭상하였다 상부 도성령이라 가호하고 인하여 추충순의숭덕수절공신의 호를 사하며 훈봉은 종전대로 하되 식읍은 이전 것을 통산하여 10,000호로 한다」고 하였다.

이 달에 육대의 고비에게 존호를 가상하였다.

병자 원년 하 6월 경신에 황주원의 두 낭군에게 아울러 원복을 가하고 원호를 고쳐 명복궁이라 하였다. 동 12월에 송이 좌사어부솔 우연초와 사농사승 서소문을 보내어 왕을 책봉하여 광록대부 검교대부 사지절현토주제군사 현토주도독 대순군사 식읍 3,000호로 삼았다. 사신을 송에 보내어 즉위를 하하였다. 집정 왕선을 외방에 추방하였다 왕이 일찌기 선조 때 참소를 당한 사람의 자손에게 복수하는 것을 허락하매 드디어 서로 함부로 죽여 다시 원호를 초래하게 되었다 이에 이르러 왕선이 복수를 핑게 삼아 태조의 아들 천안부원랑군을 교살하매 이에 왕선을 귀양보내고 잉하여 함부로 죽이고 복수하는 것을 금하였다. 순질 신질로 좌우집정을 삼아 다 내사령을 겸하게 하고 원보 수여로 근신을 삼아 어 주사를 맡아 보게 하였다. 비로소 각품 전시과를 정하였다. 이 해에 김행성을 송에 보내어 국자감에 입학시켰다.

정축 2년 춘 3월에 동지의 용선에 거동하여 친히 진사를 시험하고 고응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이 해에 왕자를 송에 보내어 양마와 갑병을 바쳤다.

무인 3년 하 4월에 정승 김부가 졸하니 시호를 경순이라 하였다. 송이 태자 중윤 장계를 보내어 내빙하였다.

기묘 4년 하 3월에 원징연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하 6월에 송이 공봉관 합문기후 왕선을 보내와 왕을 책봉하여 시중을 삼고 식읍 1,000호를 가하였다. 이 해에 발해인 수만이 내투하였다.

경신 5년 최지몽으로 내의영을 삼았다. 왕승 등이 모반하다가 복주되었다.

신사 6년 하 6월에 왕이 불예하였다. 추 7월에 왕의 병환이 위독하였다 갑신에 당제 개영군치를 불러 내선하고 유조하기를 「한번 나고 한번 죽는 것은 현철한 이도 피하기 어렵고 수명이 짧고 김은 고금이 다 이러하니라 과인이 사조의 여열을 계승하려 삼한의 패도를 받아 산천 토지를 보전하고 종묘 사직을 평안하게 하기에 힘써 나날이 근신하여 온지 전후 7년이라 이 근로로 인하여 드디어 병이 생기게 되었으니 중책을 놓으므로 신기를 화하게 하기를 바라고 장차 어진 이에게 전위함으로서 근심을 풀까 하노라 정윤(태자)개령군 치는 나라의 친현이요 나의 우애하는 바로 반드시 능히 조종의 대업을 받들고 국가의 창기를 보전할 수 있으리라 아아 너희들 공경 재신은 공경히 나의 개제(대제)를 보호하여 길이 우리 대방을 평안하게 하라 과인이 매양 예경을 볼 때마다 「남자는 부인의 손에 죽지 않는다」라고 한 곳에 이르러서는 일찌기 글에 임하여 탄앙하지 않을 적이 없었다 오늘에 이르러 좌우의 궁녀들을 이미 물러 가게 하였다. 설혹 연명하지 못하고 홀연히 죽음에 이르더라도 다시 무엇을 한탄할 바가 있으리요 복기의 경중은 마땅히 한제에 의거하여 날로써 달을 바꾸어 13일로서 주상(소상)으로 하고 27일로서 대상으로 할 것이며 원릉의 제도는 힘써 검약을 따르도록 하라 서경 안동 안남 등주 등 의 제도에서 진수의 임무를 맡고 군여의 권을 가진 자는 맡은 임무가 가볍지 않거늘 어찌 마땅히 잠시라도 임소를 비을 수 있겠는가 임지를 떠나 궁궐에 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니 각각 임지에서 거애하여 3일만에 상복을 벗도록 하라 그 이외의 일은다 사군의 처분에 맡기노라」고 하였다 병오에 정전에서 붕어하니 재위는 6년이요 수는 26세였다 왕은 온량하고 인혜하여 유희를 좋아하지 않더니 말년에는 만기에 싫증을 내어 날로 오락을 일삼고 성색에 빠졌으며 또 위기를 좋아하며 소인을 친근하고 군자를 멀리하니 이러므로 정교가 쇠체하였다 시호를 헌화라 하고 묘호를 경종이라 하였다 기내 남쪽의 산 기슭에 장사지내고 능을 영릉이라 하였다 목종 5년 성목을 가시하고 현종 5년 명혜를 가하고 18년 순희를 가하고 문종 10년 정효를 가하고 고종 40년 공의를 가하였다.

이제현의 찬에 「등문공이 정지를 맹자에게 물으니 맹자가 말하기를 인정은 반드시 경계로부터 시작하나니 경계가 바르지 않으면 정지가 고르지 못하고 곡록이 공평하지 못하게 된다 이러므로 폭군과 오리는 반드시 그 경계를 등한히 하는 것이다 경계가 이미 바르면 전지를 구분하고 질록을 제정하는 것은 가만히 앉아서 정할 수 있는 것이다고 하였으니 삼한의 땅은 사방에서 주차가 모여드는 데가 아니므로 물산의 요부와 화식의 이가 없고 백성의 바라는 바는 다만 토지의 생산력에 있을 뿐이다 그런데 압록강 이남은 대체로 다 산이므로 땅이 기름져서 해마다 심을 수 있는 전지가 거의 없다 경계를 바로 잡음을 만약 등한이 한다면 그 이해는 중국에 비하여 훨씬 더 한 것이다 태조는 신라의 쇠란과 태봉의 사폭한 뒤를 이어 만사가 초창기인지라 날로 넉넉한 겨를이 없어서 다만 구분의 법만을 행하였다 4대를 거쳐 경종이 전시의 과를 마련하니 비록 소략한 한 데가 있다고는 하더라도 또한 옛적 세록의 뜻인 것이다 구일로서 조하고 십일로서 부하는 것과 다못 군자와 소인을 우대하는 여부에 이르러서는 논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후세에 여러번 이를 개선하고자 하였으나 끝내 구차스럽게 되고 말았다 대개 그 시초에 경계로서 긴급한 일을 삼지 아니 하였으니 그 근원을 어지럽게 하고 수류의 맑음을 구한 들 어찌 될 수 있으리요 애석하다 당시의 군신이 맹자의 말로써 법제를 강구하고 계적(교도)하여 그것을 힘써 행하지 못하였도다」라고 하였다.

고려사 세가 46권중 제2권은 태조(신묘 14년)혜종,정종,광종,경종에 까지 기술하고 있다. 신라와 후백제를 통일한 태조가 훈요10조에서 특히 8조에서 「차현(차령산맥)이남과 공주강외는 산형과 지세가 함께 배경으로 달리니 인심도 또한 그러한지라 저 아래 고을 사람이 조정에 참여하여 왕후 국척과 혼인하여 국정을 잡게 되면 혹은 국가를 변란케 하거나 혹은 통합된 원한을 품고 거동하는 길을 범하여 난을 일으킬 것이며 또 일찌기 관청의 노비와 진역의 잡척에 속하던 무리가 혹은 권세에 붙어 이면하고 혹은 왕후궁원에 붙어 언어를 간교하게 하여 권세를 농하고 정사를 어지럽힘으로써 재변을 일으키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니 비록 양민이라 할지라도 마땅히 벼슬자리에 두어 일을 보게 하지 말지어다」라는 것에서 그 시대의 지역차별대우를 볼 수 있는 데 오늘날까지도 그런 영향이 남아 있는 것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고려초기 왕권의 미확립을 혜종조의 왕규의 반란에서 볼 수 있었으며 광종조의 과거제 시행은 국가체제가 어느 정도 자리 잡혀져 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1000년 역사의 신라가 스스로 신하라 칭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는 것을 보니 비운감이 느껴진다. 특히 견훤이 아들간의 왕위쟁탈분쟁으로 멸망하는 것을 보니 고구려의 멸망이 생각났으며 한 왕조의 멸망이 외부적 요인도 있겠지만 왕조자체의 내부적 갈등, 권력분쟁도 중요한 원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어느 곳에서나 나타나 있는 사대주의식 사고는 우리 지식인들의 한계성을 드러내 주는 것 같고 또한 그럴 수밖에 없었던 우리나라의 현실적 상황이 이해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