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고려

제9대 덕종 (德宗,1031~1034)

오늘의 쉼터 2009. 7. 30.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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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대 덕종 (德宗,1031~1034)

 

자 원량(元良). 시호 경강(敬康). 이름 흠(欽). 현종(顯宗)의 장남으로 모후는 원성태후(元成太后) 김씨(金氏)이다. 1022년(현종 13) 태자로 책봉되고, 1031년에 즉위하였다. 그후 거란(契丹)에 사신을 보내어 거란이 압록강에 가설한 부교(浮橋) 및 보성(保城)을 파괴할 것과 고려인의 송환을 요구하였으나 거부되자 하정사(賀正使)의 파견을 중지하였다. 또,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삭주(朔州) ·영인진(寧仁鎭) ·파천(派川)에 축성하였다.

이듬해 8월 평장사(平章事) 유소(柳韶)에게 명하여 압록강구로부터 영원(永遠) 등 14성을 거쳐 동해안의 도련포(都連浦)까지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축성하게 하자 동여진인(東汝眞人)과 거란인들의 투항이 속출하였다. 처음으로 국자감시(國子監試)를 실시하고, 왕가도를 감수국사(監修國史)로, 황주량을 수국사(修國史)로 삼아 현종 때 시작한 국사편찬사업을 완성하였다. 능은 숙릉(肅陵)으로 개성(開城)에 있다.
                                                       
<서문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덕종 경강대왕의 휘는 흠요 자는 원량이니 현종의 장자로 모는 원성태후 김씨이다. 현종 7년 병진 5월 을사에 탄생하여 21년 연경군에 피봉되고 13년 태자가 되었으며 명년에 거란이 고려국공으로 책봉하고 22년 5월 신미에 현종이 붕어하니 중광전에서 즉위하여 익실(翼室 본채의 좌우 양편에 달린 방)에 기거하면서 조석으로 애임하다가 갑술에 군신을 거느리고 성복(成服 초상이 났을 때 처음으로 상복을 입는 일)하였다.

6월 정축 삭에 서눌로 검교태사를 삼았다. 기묘에 강감찬으로 검교태사시중을 삼았다. 을유에 서여진 영새대장군 아지대 등 27인이 와서 양마를 바쳤다. 을미에 동여진장군 대완 사이라 등 58인이 와서 양마를 바쳤다. 철리국주 무나사가 약오자 등을 보내와 초서피를 바쳤다. 송의 태주 상객 진유지 등 64인이 왔다. 병신에 현종을 선릉에 장사지냈다. 무술에 왕이 상복을 벗었다. 경자에 경령전에 알현하고 즉위함을 고하였다. 계묘에 신봉루에 거동하여 계간을 구정에 걸고 사를 베풀었다. 추 7월 무신에 보신에게 제도의 진상마를 사하였다. 기유에 유소로 중군병마원사를 삼았다. 경술에 장극맹으로 병부상서를 삼고 홍빈으로 형부상서를 삼고 이유섬으로 공부상서를 삼고 김종현으로 우간의대부를 삼고 황보영으로 어사잡단을 삼고 문사명으로 전중시어사를 삼고 손위로 전중승을 삼고 박의부로 감찰어사를 삼았다. 기미에 거란 보애사 공부랑중 남승안이 와서 성종의 죽음을 보고하거늘 조를 현종의 반혼당에서 선포하였다. 신유에 왕이 거란의 보애사를 인접하여 내전에서 거애하였다. 병인에 정유원으로 시어사를 삼았다. 정유에 발해의 감문군대도 행랑 등 14인이 내투하였다. 기사에 발해제군판관 고진상 공목 왕광록이 거란으로부터 첩문을 가지고 내투하였다. 거란의 하선왕생진사 야율온덕 조상현이 오매 임신에 반혼당에 전명하였다. 8월 정축에 동여진장군 고어부 등 30인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갑신에 제하기를 여진장군 아두한 등 340호가 내투하매 가 철 2주의 땅에 늑유하였으나 아두한은 본래 동번자 항사의 족속이니 마땅히 동번에 견치할지어다]라고 하였다. 임진에 왕가도가 비를 맞이할 것을 청하였다. 계사에 이단으로 좌복사 참지정사를 삼았다. 을미에 시중으로 치사한 강감찬이 졸하였다. 신축에 검교태보 박눌암과 좌복사 주덕명이 졸하매 하룻동안 철조하였다.

9월 병오 삭에 외제역원에 행차하였다. 기유에 황보영으로 어사중승을 삼고 김영기로 시어사를 삼고 이자연으로 우보궐을 삼아 비어를 사하고 문재선으로 전중시어사를 삼고 이경응으로 감찰어사를 삼아 금어를 사하였다. 경술에 노전으로 호부상서를 삼고 민가거로 공부상서를 삼고 허원으로 내사사인을 삼았다. 병진에 진현석으로 어사잡단을 삼았다. 동여진 회화장군 오어나 개로 등 67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병인에 밀직학사 비서소감 박유인으로 권지좌승선을 삼았다. 기사에 비를 추존하여 왕태후로 삼았다. 신미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동 10월 을해 삭에 서눌로 문하시중을 삼고 왕가도 유소로 모두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를 삼았다. 정축에 거란의 왕수남 등 19인이 내투하거늘 남지에 살게 하였다. 무인에 재보가 상선회복을 표청하거늘 허락하였다. 경진에 국노를 구정에서 향연할제 악기는 달기만하고 주악은 하지 않았다. 신사에 왕가도의 여를 맞이하여 비를 삼았다. 공부랑중 유교를 거란에 보내어 회장하게 하고 낭중 김행공은 즉위를 하하게 하고 압록강의 성교를 헐고 피유된 우리 사신들을 돌려 보내도록 표청하였다. 을유에 동여진 원보 개로 등 46인이 내조하거늘 작을 더하고 물을 사하였다. 헌대가 주하기를 [상서좌복사판동경유수사 이공이 재물을 횡감하고 또 가노로 하여금 역마를 차승하였으니 법대로 논단하소서]하거늘 이를 청종하였다. 정유에 구정에 행차하여 승 3만을 공양하였다. 계묘에 좌복사 이응보에게 수사도를 가하고 우복사 김여탁에게 수사공을 가하였다. 윤월 기유에 비로소 국간감시를 설하였다. 기미에 외제역원에 행차하였다. 임술에 용흥사에 행차하였다. 갑자에 왕씨를 봉하여 현비로 삼았다. 11월 을해에 동경유수사 호부상서 이작인이 졸하였다. 경인에 유사에게 명하여 제국 내투인에게 의복과 면서를 사하였다. 임인에 동여진장군 모이라가 와서 마를 바치고 또 말하기를 [번지가 벽원하여 회장에 불내하였으니 원컨대 능침을 배알케하여 주소서]하거늘 허락하였다. 계사에 동여진 오두내 등 40여인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신축에 김행공이 회보하기를 [거란이 우리의 주한 바를 쫓지 아니하나이다]고 하거늘 드디어 하정사를 정지하고 성종의 태평년호를 그대로 썼다.

임신 원년 춘 정월 신사에 어사대가 탄핵하기를 [대부경 왕희걸 우사랑중 유백인 예부랑중 최복규 원외랑 이응년이 서경에 분사하여 전지를 구하고 재화를 증식하니 청컨대 출면하소서]하거늘 이를 청종하였다. 갑신에 임유간으로 우승선이부랑중을 삼고 김자를 사하였다. 을유에 거란의 유류사가 내원성에 오거늘 받아들이지 않고 드디어 삭주 영인진 파천 등 현에 성을 쌓아 이에 대비하였다. 정해에 외제역원에 행차하였다. 기축에 왕의 생일인 인수절을 고쳐 응천절이라고 하였다. 정유에 서여진 자곤 등 8인이 내투하였다. 무술에 제하기를 [좌복사 이응보에게 사도를 가하고 우복사 김여탁에게 사공을 가하니 그 반열이 참지정사의 하요 중추사의 상에 있는지라 아울러 봉록을 가하라]고 하였다. 발해의 사지 명동 등 28인이 내투하였다. 2월 임인 삭에 통주의 진위부위 호장 김거와 별장 수견은 경술(연) 거란병의 내침에 당하여 견벽고수하였고 또 그 대부 마수를 사로잡았으므로 김거에게는 낭장을 가하고 수견에게는 낭장을 증하였다. 정미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무신에 발해의 사통 등 18인이 내투하였다. 철리국이 사신을 보내와 수호하였다. 임자에 황보유의로 참지정사를 삼고 황주량으로 중추사를 삼았다. 을묘에 연등으로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3월 임신 삭에 백가이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계유에 거란의 전직 고선오와 전전 고진성 등 15인과 좌상도지휘사 대광 보주회화군사판관 최운부 향공진사 이운형 등이 내분하였다. 을해에 박유인으로 한림학사를 삼고 임유간으로 어사잡단을 삼았다. 계사에 왕가도로 감수국사를 삼고 이단으로 내사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를 삼고 황주량으로 수국사를 삼고 유징필로 상서좌복사를 삼고 나민으로 예부상서를 삼았다. 갑오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무술에 경술년 이래 전사자의 공을 논하여 반희악에게 소부감을 김연경에게 군기감을 전인영에게 예빈소경을 유백부에게 위위소경을 김양좌에게 소부소감을 양백에게 전중승을 증하였다. 경자에 한재로 말미암아 봉은 중광 양사의 역부들을 놓아 보냈다. 하 4월 임인 삭에 정전을 피하고 상선을 멸하고 도살을 금하고 경계죄인을 역방하였다. 정미에 동여진의 원윤 고두로 등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무신에 거란 해가의 내을고 등 28인이 내투하였다. 신유에 친히 구정에서 초제를 행하고 비를 빌었다. 5월 임신에 양음으로 응천절 축하를 정지하였다. 정축에 발해의 살오덕 등 15인이 내투하였다. 계미에 상선을 회복하고 정전에 거동하여 조회를 보았다. 정유에 왕이 황고의 휘진도장으로 현화사에 행차하였다. 6월 신축에 왕이 태조의 휘진도장으로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병오에 경복이므로 써 경죄를 역방하였다. 기유에 서여진 회화장군 이동 등 8인이 내조하거늘 작1급을 더하였다. 신해에 발해의 우음약기 등 12인이 내투하였다. 임자에 동여진 귀덕장군 야어포 등 8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갑인에 왕이 보살계를 응건전에서 받았다. 을묘에 발해의 소을사 등 17인이 내투하였다. 추 7월 임신에 이예균 등 8인이 거란에 사행하였다가 피유되어 돌아오지 못하였으므로 그 처자에게 물을 사하되 차등있게 하였다. 을해에 서여진 대상

) 야반 등 25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정축에 동여진 정조 가이로 회화장군 야반 귀덕장군 개로 원보 고도화 등 91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경인에 왕이 황비의 휘진이므로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병신에 발해의 고성 등 20인이 내투하였다. 무술에 김종현으로 우산기상시를 삼았다. 8월 임인에 대상 주오가 어미를 구타하였으므로 기시(시장에서 죽이는 것)하였다. 경술에 유종으로 좌산기상시를 삼고 황보영으로 상서우승 지어사대사를 삼고 진현석으로 어사중승을 삼았다. 계축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을묘에 동여진 정보 두어보 등 20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정사에 이단으로 평장사를 삼고 황보유의로 이부상서 참지정사를 삼았다. 무오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여 승 법경으로 국사를 삼았다. 경신에 동여진의 보윤 대유 등 3인이 내조하였다. 9월 계유에 동여진 대상 야을한 등 30인이 내조하였다. 병자에 내외죄인를 심사하여 도죄(노역의 형) 이하를 역방하였다. 경인에 동여진 봉국대장군 요을내 등 50인이 내조하였다. 을미에 외제역원에 행차하였다. 동 10월 병오에 발해 압사관 이남송 등 10인이 내분하였다. 신해에 상주계 10여현에 지진하였다. 임자에 거란 주부 유신사 등 5인이 내분하였다. 병인에 거란의 제을남 등 10인이 내분하였다. 11월 병자에 우릉(울능)성주가 그 아들 부어잉다랑을 보내와 토물을 바쳤다. 서여진 정조 대포 고지문 등 14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12월 신축에 이작충으로 좌간의대부를 삼고 노우 박양명으로 감찰어사를 삼았다. 갑진에 거란의 나골 등 10인이 내투하였다.

계유 2년 춘 정월 신미에 동여진장군 개다한 등 25인이 내조하였다. 철리국이 사자를 보내와 양마 초서피를 바치거늘 왕이 갸륵하다하여 회사함을 심히 후하게 하였다. 을해에 송의 유수금 등 14인이 내분하였다. 기묘에 황주량으로 판어사대사를 삼고 최충으로 우산기상시를 삼고 민가거로 예부상서를 삼고 유종으로 공부상서를 삼고 이주좌로 우간의대부를 삼았다. 신사에 동여진장군 보기 아어내 등 113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정해에 예부상서 나민이 표를 올려 퇴관을 빌었다. 을미에 거란의 구내 등 18인이 내분하였다. 좌우위맹교위 오행 이황 신선입 등이 거란의 병사 7인을 초략하였으므로 직1급씩을 사하였다. 2월 임인에 서여진의 지인 고음파 및 거란의 대사 고성환 등 11인이 와서 토물과 병장을 바쳤다. 기유에 동여진 회화장군 거어울 등 49인이 내조하였다. 을묘에 김충찬으로 예빈경지중추원사를 삼았다. 3월 신미에 서여진 장군 이우불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해적이 간성현 백석포에 침구하매 50인을 사로잡아 바쳐왔다. 최희목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거란 해가의 고요 등 11인이 내투하거늘 강남에 살게 하였다. 하 4월 무술에 발해 수을분 등 18인이 내투하였다. 기해에 동여진 귀덕장군 고어부 등 26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무오에 발해 가수 등 3인이 내투하였다. 임술에 해적이 삼척현에 침구하거늘 40여인을 사로잡았다. 5월 무자에 서여진 정위사어하 등 3인이 내조하였다. 계사에 발해 감문대정 기질화 등 19인이 내투하였다. 6월 신축에 발해 선송 등 7인이 내투하였다. 임인에 안동부 합주에 지진하였다. 갑진에 서여진 회화대장군 거이라 등 24인이 내조하였다. 송의 신유 등 12인이 내분하였다. 병진에 동여진 대상 고

지문 등 41인이 내조하였다. 임술에 서여진 중윤 고사 등 6인이 내투하고 고모한 등 25인은 와서 방물을 바쳤다. 추 7월 임진에 동여진 좌윤 아포 등 43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8월 갑오 삭에 송의 천주상 도강 임애 등 55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무오에 현종을 대묘에 부제하였다. 평장사 유소에 명하여 북경에 관성을 창치하게 하였다. 9월 계해 삭에 날빛이 혜성과 같았다. 유종으로 병부상서를 삼고 한빈경으로 공부상서를 삼고 임유간으로 어사중승을 삼고 이자연으로 이부랑중 어사잡단 우승선을 삼고 염현으로 우보궐을 삼고 이유도로 감찰어사를 삼았다. 동 10월 계사에 동여진 귀덕장군 요빈과 유원장군 고지문 등 37인이 내조하였다. 기해에 서여진 대사(여진 추장의 직) 아각팔 등 14인과 동여진 원보 오두나 등 63인이 내조하였다. 황주량으로 호부상서를 삼고 민가거로 형부상서를 삼았다. 갑진에 선대의 공신 최응에게 사도를 유신성에게 태부를 최승노에게 대광을 최량에게 3중대광을 서희에게 태사를 이지백에게 대광을 이몽유에게 사공을 한언공에게 태부를 김승조에게 사공을 최숙에게 태사를 강감찬에게 대승을 최항에게 정광을 증가하였다. 정미에 거란이 정주(평북의주)를 침범하였다. 기유에 교하기를 [짐이 망녕되게 선조의 업을 이어 받아 3한을 통어하매 뜻은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평안하게 함에 돈독하고 마음은 선조를 받들고 효도를 생각함에 간절하다. 이제 협향(선조의 합동향*)의 해를 당하여 잘 친행의 예를 갖추었다 수은을 널리 베풀어서 내외가 즐거움을 같이 하고자 하노니 국내에 대사하되 불충 불효 수회 간도는 제외하고 유죄 이하는 다 사하고 참죄 교죄는 유인도에 유배하고 일찍 유죄에 처해 있는 자는 재량하여 옮기고 수속자는 면방하라]하였다. 11월 계해 삭에 원영으로 서경부유수 지분사호부사를 삼았다. 신묘에 서여진 우화 등 156인이 관성을 개척할 때에 모두 공노가 있었으므로 작1급씩 가하였다. 12월 신축에 서여진 보윤 보실 등 39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갑진에 문사명 문재선으로 시어사를 삼고 이신으로 전중시어사를 삼고 임사행으로 감찰어사를 삼았다. 계축에 발해 기질화 등 11인이 내투하거늘 남지에 살게 하였다.

갑술 3년 춘 정월 정묘에 왕의 자씨를 책하여 연경궁장공주를 삼았다. 신미에 교하기를 [검약절용함은 민생을 풍족하게 하는 길인즉 상의국에게 어의를 염색하는 홍지초를 1연간 지용할 것만을 계정하고 그 외에는 더 많이 취하지 말라]고 하였다. 병술에 동여진 정조 다노한 등 58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정해에 황주량으로 정당문학 판한림원사를 삼았다. 무자에 황보영으로 중추부사를 삼고 임유간으로 한림시강학사를 삼았다. 2월 임진 삭에 동여진 유원대장군 주달 등 36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기해에 경흥원 장녀 김씨를 맞이하여 후를 삼았다. 동여진 좌윤 아도한 등 42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3월 정축에 김정으로 공부상서를 삼고 장극맹으로 상서우복야를 삼고 이유섬으로 병부상서를 삼고 이작충으로 어사대부지한림원사를 삼고 이주좌로 국자제주 좌간의대부를 삼고 진현석으로 중추직학사 지제고를 삼고 노우로 전중시어사를 삼고 김원정 김경화 박정고로 모두 감찰어사를 삼았다. 무인에 동여진 봉국장군 아도한 등 32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경진에 교하기를 [농상은 의식의 근본이니 제도 주 현의 관리들은 힘써 조지(정부의 *지)에 따라 3시(춘하추)를 빼앗는 일이 없도록 하어 써 만성을 편안하게 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정해에 군신을 문덕전에서 향연하였다. 하 4월 병신에 동여진 회화장군 이라 등 25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기유에 이단에게 추충좌리공신 상주국을 사하였다. 5월 경신 삭에 동여진 귀덕장군 골보 등 27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정축에 문하시랑 평장사 왕가도가 졸하였다. 갑신에 한림학사 박유인으로 평양군문학을 삼고 중추원직학사 진현석으로 낙랑군문학을 삼았다. 병술에 최보성으로 상서좌복사를 삼았다. 6월 기축 삭에 황성 주작문랑옥에 벼락쳤다. 임진에 동여진 영새장군 이구도 등 30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추 7월 경인에 서여진 원윤 모오 등 22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병신에 이단으로 문하시랑 평장사를 삼고 민가거와 유징필로 상서좌우복사를 삼고 김정으로 병부상서를 삼고 장윤함과 임간으로 모두 공부상서를 삼았다. 신해에 황보유의로 내사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를 삼고 황주량으로 이부상서를 삼고 최제안으로 호부상서를 삼고 유지성 으로 예부상서를 삼았다. 임자에 원태진으로 시어사를 삼았다. 계축에 최충으로 형부상서 중추사를 삼고 김충찬으로 우산기상시를 삼았다. 9월 계묘에 왕의 병이 중하매 고명하기를 [짐의 병이 낫지 않고 이미 위경에 이르렀으니 마땅히 애제 평양군 형으로 보위를 계승토록 하라]고 하고 드디어 연영전에서 붕어하니 선덕전에 빈소를 모셨다. 재위 3년이요 수는 19이었다. 왕은 나서부터 숙성하여 집성이 강직과단하였고 이미 장성하매 벽돌을 밟으면 문득 깨어지니 사람들이 덕이 무거운 까닭이라고 하였다. 시호를 경강이라 하고 묘호를 덕종이라 하며 북교에 장하니 능을 숙릉이라 하였다. 문종 10년 시호를 선효라 가하고 인종 18년 강명을 가하고 고종 40년 광장을 가하였다.

이제현이 찬하기를 [경릉(충열왕 능호)조에 두타산인 이승휴가 선진한 제왕운기에 덕이 어찌 4년만 그쳤는지 봉오도 와서 상서를 나타냈도다고 한 것이 보인다. 그러나 실록을 상고하건대 그런 기사는 보이지 않고 다만 속담에 서로 전해 말하기를 봉오가 위봉문에 와서 용의를 보이매 군오가 따라 지저귀니 봉이 날아간지라 국인이 가마귀를 미워하여 소년과 장년들이 활을 가지고 쏘았던 바 덕종 1대에는 경성에 가마귀가 없어졌다고 한다. 대저 봉이란 우족의 장이어늘 군오에게 쫓긴바 되었으니 어찌 봉이라 하리오. 대개 운기의 말은 근거없는 것이다. 덕종이 상에 거하매 능히 아들된 효성을 극진히 하였고 정치를 하매 부도를 고치지 아니하여 구신 서눌 왕가도 최충 황주량과 같은 이를 임용하니 조정에는 기만은폐함이 없고 백성은 그 생을 편안하게 하였도다. 비록 봉오가 아니라 하더라도 존호를 덕이라 함이 또한 마땅하지 아니한가]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