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고려

제10대 정종(靖宗,1034~1046 재위12년)

오늘의 쉼터 2009. 7. 30.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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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대 정종(靖宗,1034~1046 재위12년)

 

자 신조(申照). 휘(諱) 형(亨). 시호 용혜(容惠). 현종(顯宗)의 둘째 아들. 덕종(德宗)의 동생. 어머니는 원성왕후(元成王后) 김씨(金氏). 비(妃)는 용신왕후(容信王后) 한씨(韓氏), 용의왕후(容懿王后) 한씨, 용목왕후(容穆王后) 이씨(李氏). 1022년(현종 13) 내사령(內史令)에 올라 평양군(平壤君)에 봉해졌으며, 1027년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겸 내사령이 되었다.

1034년(덕종 3) 덕종이 죽자 즉위하여 명주성(溟州城)을 수축, 이듬해 북계(北界) 송령(松嶺) 동쪽에 장성을 수축하고, 또 창주(昌州:平北 昌城)에도 성을 쌓았다. 1036년 각 도의 양전(量田)을 다시 실시하고 여러 위(衛)의 군인 중 경전이 부족한 자에게는 공전(公田)을 더 주었다. 1037년 거란(契丹)의 침입을 받고 다음해부터 그 연호를 사용하였다. 이후 북방민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1044년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완성시켰다. 또 예성강(禮成江)의 병선(兵船) 180척으로 군수물자를 운반하여 서북계 주진(州鎭)의 창고에 보관하게 하는 등 국방정책에 힘을 기울였다. 이듬해 비서성(書省)으로 하여금 《예기정의(禮記正義)》 《모시정의(毛詩正義)》 등을 간행하게 하였고, 1046년 장자상속과 적서(嫡庶)의 구별을 법으로 정하였다. 능은 개성(開城)의 주릉(周陵)이다.
                                                  
  <서문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정종 홍효안의강헌용혜대왕의 휘는 형이요 자는 신조이니 덕종의 모제로 현종 9년 7월 무인 탄생하였다 숙성하고 명민하여 5세에 내사령 평양군에 봉케 되었으며 덕종 3년 9월 계묘에 고명을 받아 중광전에서 즉위하였다 동 10월 정사 삭에 대묘에 삭을 고하였다. 경오에 덕종을 숙릉에 장하였다. 보신을 보내어 서경에 팔관회를 베풀고 2일간 크게 잔치하였다. 12월 경인에 신봉루에 거동하여 크게 사하고 중외군신들의 하례를 받았다. 송의 상객과 동서번과 탐라국이 각기 방물을 바쳤다. 경자에 팔관회를 설하고 신봉루에 거동하여 백관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저녁에는 법왕사에 행차하였다가 익일의 대회에 또한 잔치를 베풀고 관락하니 동서 2경 동북양로의 병마사 4도호 8목이 각기 표를 올려 진하하였으며 송의 상객과 동서번과 탐라국도 또한 방물을 바치매 좌석을 사하여 관례하게 하니 이후로는 상례로 삼았다. 10월 기사에 왕제 서로 수태사겸 내사령을 삼고 기(왕제)로 수태보를 삼고 황주량으로 예부상서 참지정사를 삼고 최제안으로 이부상서를 삼고 유지성으로 공부상서를 삼고 이진으로 호부상서를 삼고 곽신으로 전중감을 삼고 금령기로 어사중승을 삼고 김충찬과 이작충으로 좌우산기상시를 삼았다.

을해 원년 춘 정월 병술 삭에 조하를 쉬었다. 임인에 최충으로 중추사형부상서를 삼았다. 동여진 회화장군 모이라 등 57인이 내조하니 물을 사하되 차등있게 하였다. 정미에 유창으로 전중승을 삼고 유운으로 기거랑을 삼고 김연준으로 전중시어사를 삼고 정배걸과 김현으로 좌우습유지제고를 삼고 풍순지로 감찰어사를 삼았다. 신해에 왕자가 연흥궁에서 탄생하니 이름을 동이라고 사하였다. 2월 기유에 서여진 추장 가아고 등 12인이 내조 하였다. 신사에 동여진의 봉국장군 고지문 등 35인이 내조 하였다. 3월 을유에 이단으로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를 삼고 황보유의로 내사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를 삼았다. 병술에 김무체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계묘에 연흥궁주 한씨를 책봉하여 혜비로 삼고 익일에 도죄 이하를 사하였다. 하 4월 갑인에 국로로서 80세 이상 남녀를 구정에서 친히 향연하였다. 정사에 예부가 주하기를 [경성의 명산에는 초채를 금하고 두루 수목을 심게 하소서]하니 이를 청종하였다. 5월 갑진에 천상에 비개이기를 빌었다. 거란의 내원성사 검교우산기상시 안서가 흥화진에 통첩하기를 [사사로이 생각컨대 당군은 가장 귀국에 가까우므로 조금이라도 편의한 일이 있으면 곧 알려 드렸던 것입니다 생각컨대 귀국은 원래 부용국이라 선제께서 매양 우대함을 베풀었으므로 적년간에 조공함을 게을리 하지 않더니 지난번 벌죄한 해를 계기로하여 내정의 예가 막혀졌습니다. 이미 흉역이 제거되었으니 마땅히 공수를 계속하여야 할 것인데 어찌하여 수년이 넘도록 구호를 계속하지 않고 석성을 쌓아 대로를 차단하려 하고 목채를 세워 기병을 방해하고자 합니까 촉나라 가운데 따로이 석우의 길이 있음을 알지 못하시는지 이렇고야 금후 깊이 질책을 당하리다. 이제 황상께서 열성의 기업을 계승하여 8방의 국계를 통합하매 남하의 제왕이 길이 의를 사모하여 교환을 통하고 서토의 제왕들이 길이 풍화를 향모하여 성의를 바치는데 오직 홀로 동명의 지역만이 북극의 존전에 내빈하지 않으니 혹시 뇌정같은 격노에 부딪치게 되면 어찌 백성들을 안녕하게 하리오. 바라건대 이 뜻을 어기느냐 또는 쫓느냐 하는 것은 스스로 변통이 있을 것입니다.]고 하였다. 6월 병진에 경성에 지진하였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계해에 치사한 형연기로 검교상서 우복사를 삼고 이징좌로 상서병부시랑을 삼으니 노인을 우대함을 보인 것이다. 신미에 동여진 오어고 등 27인이 내조하였다. 이 달에 영덕진이 거란 내원성에 회첩하기를 [사사로히 생각컨대 공문이 이에 이르니 친절하심을 잘 알겠나이다마는 책유가 매우 많으므로 모름지기 상세히 해명하여야 할 것이오나 생략하여 요지만을 말하고 다변에 이르지 않도록 하겠나이다. 그 내시에 이르기를 과반 벌죄한 해를 계기로 내정의 예가 막혀졌다하고 이미 흉역이 제거되었으니 마땅히 공수를 계속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사사로히 생각컨대 우리 나라로 보면 연림이 난을 일으키던 초기에는 즉 대국이 흥병할 무렵이라 도로가 어렵고 막혀서 사신이 정지되었다가 그 뒤 내사사인 김가경이 동도에 통사를 다시 하였고 호부시랑 이수화가 계속하여 나아가 그 방물을 바쳤으며 선대왕께서 별세하시매 합문사 채충현이 왕명을 받들고 종명을 고하였으며 선황제께서 승하하시매 상서좌승 유교가 빨리 가서 회장하였고 금황제께서 황통을 계승하시매 급사중 김행공이 전마를 타고 가서 조하하였습니다. 그런즉 흥요를 평정한 이래로 사행(취일)이 계속하였는데 어찌 내정의 예가 막혀졌다고 하오리까 또 말하기를 석성을 쌓아 대로를 차단하려하고 목채를 세워 기병을 방해하려 한다고 하였지마는 희효에도 험요에 설비함은 국토를 보유하는 상규라 하였고 노국이 관소를 철폐함은 통인의 깊은 경계가 되었나이다. 그러므로 이 성채를 나열하여 우리의 영지를 방비함은 대개 변민의 안도를 도모함이요 황화를 배반하랴는 것은 아닙니다. 또 말하기를 오직 홀로 동명의 지역만이 북극의 존전에 내빈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전자에 입공한 여섯 사신이 상국중에 늑유당해 잇고 선 정 양성을 우리 제봉(강토)내에 들어와 쌓아 놓고 아직 돌려 보내지도 않으므로 지금 간절히(돌려주시기를)빌고 있는 터이외다. 다행히 황제폐하께서 유신의 운을 열어 백성으로 더불어 갱신하는 때를 만나니 황제(천상)의 혜택이 사방에 흡족하며 일변의 장주를 거듭 올려서 행인(입공육사)을 석방함과 동시에 앗아간 땅을 돌려 달라고 빌(걸)고 싶으나 청할 길이 없어 오늘에 이르었습니다. 혹시 이 간곡한 성의 가 용납된다면 감히 낙수의 예를 게을리 하겠습니까? 다만 은명이 있을 따름이니 어찌 책언을 번거로이 할 것이야 있겠습니까 또 말하기를 혹 뇌정같은 격노에 부딪치게 되면 어찌 백성을 안녕하게 하리오라고 하였는데 엎드려 생가컨대 금황제께서는 소국을 애휼하시는 정이 깊고 비자의 말을 들으시는 길이 넓으시니 이에 인빈의 지역을 돌아보시사 반드시 추치의 은을 더하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죄과가 없거늘 무엇을 빙자하여 노여워 하시리오 내회를 자세히 살피건대 희언인 듯 하나이다.]고 하였다. 추 7월 정해에 김충찬으로 병부상서를 삼고 이회로 삼사사를 삼고 이유도로 전중시어사를 삼고 김현과 조패로 좌우습유를 삼고 이공현과 은백으로 모두 감찰어사를 삼았다. 계묘에 상서이부가 주하기를 [전상서좌복사 이공이 일찍이 오욕의 죄를 범하였지마는 누차 사유를 거쳤사오니 청컨대 그 직을 회복하소서] 하거늘 이를 청종하였다가 어사대가 탄핵하므로 미구에 파면하였다. 갑오에 황보영으로 중추사겸 어사대부를 삼았다. 왕의 생일로 장령절을 삼았다. 경술에 제하기를 [선왕의 우복을 마치지 못하였으니 참죄를 범한 자는 무인도에 장배하고 교죄를 범한 자는 유인도에 장배하라]고 하였다. 8월 경신에 이자연으로 급사중을 삼고 김령기로 내사사인을 삼았다. 계해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신미에 경성에 지진하니 소리가 우뢰와 같았다. 갑술에 서여진 대장군 이간불 등 44인이 내조하였다. 경진에 동여진 대완 개다한 등 52인이 내조하였다. 9월 무자에 동번 귀덕장군 오다 등 23인이 내조하였다. 계묘에 경주 등처 19주에 지진하였다. 이 달에 서북로 송령 이동에 걸쳐 장성을 쌓아 변구의 요충을 공제하였다. 동 10월 신유에 동여진 수령 어불로 등 6인이 내조하였다. 임술에 임종한으로 감찰어사]를 삼았다. 병인에 식목도감이 주하기를 [황주 등 10주 군의 승관인을 거두도록 하소서]라고 하였다. 11월 계미에 동여진 추장 아노간 등 65인이 내조하였다. 12월 임자에 동번 대완 고도화 등 30인이 내조하였다.

병자 2년 춘 정월 경진 삭에 조하를 쉬었다. 을유에 동번 회화장군 사라 등 83삼인이 내조하였다. 갑오에 공도로서 사장 이하를 범한 것과 및 모든 징속자는 다 면사하게 하였다. 2월 경술 삭에 방택에 유사하였다. 임자에 정전에 거동하여 시조하고 백관에게 녹패를 사하였다. 유소로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를 삼고 최제안으로 상서좌복사 중추사를 삼고 이작충으로 이부상서 한림학사 승지를 삼았다. 제하기를 [대위 상서좌복사 이응보가 연만퇴직하였으나 공이 사직에 있는지라 내 감히 잊지 못하나니 그 자손으로 관직이 없는 자에게는 초직을 양수하라]고 하였다. 갑인에 동번 수령 대신 등이 와서 낙타를 바쳤다. 기미에 동번 영새장군 아골 등 135인이 내조하였다. 기사에 동번 장군 개로 등 71인이 와서 준마를 바쳤다. 경오에 이주좌로 우산기상시를 삼고 진현석으로 위위경 좌간의대부를 삼고 원태진으로 기거랑을 삼고 한연조로 시어사를 삼았다. 신미에 동번 적선이 삼척현 동진술에 입구하여 인민을 노략하거늘 수장이 풀 숲에 복병하여 적의 돌아옴을 기다려 북을 울리고 고함을 지르며 엄격하여 40여급을 부참하였다. 임신에 문사명을 어사중승으로 삼았다. 3월 계미에 황보유의를 문하시랑 동내사문하 평장사로 삼고 유징필을 참지정사 겸서경유수사로 삼았다. 무자에 삼각산에 행차하시였다가 계사에 환궁하였다. 무신에 동번 추장 귀정 등 92인이 와서 준마를 바쳤다. 하 4월 임자에 입하절임으로 얼음을 진상하거늘 제하기를 [금년은 일찍 덥지 않으니 5월을 기다려 얼음을 진상하라]고 하였다. 유사가 주하기를 [해가 북륙에 있을 때 얼음을 저장하고 서륙에 있을 때 내는 것이온데 낼 때는 새끼 염소를 바쳐 제사하고 문을 여는 것입니다. 얼음 저장을 주밀히 하고 씀을 고르게 하면 건복강고의 재앙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얼음을 사용하는 법은 춘분에서부터 입추까지에 마치게 되는 것이오니 만약 5월에 비로소 진상하게 되면 고법에 어김이 있어 음양을 순조롭게 하는 바가 아니옵니다. 청컨대 입하절로 써 진상케 하옵소서] 하거늘 이를 청종하였다. 계축에 우박이 내렸다. 경신에 동여진 추장 오부하 등 86인이 내조하였다. 신유에 서리가 내렸다. 을축에 동북여진의 수령 태사 아도한 등 58인이 내조하니 유사가 말하기를 [태사는 거란의 직명인 바 아도한이 이제 이미 귀화하였으니 청컨대 태사를 고쳐 정보를 제수하소서]한대 이를 청종하였다. 문하시랑 평장사로서 치사한 채충순이 졸하였다. 계묘에 기우제를 지냈다. 정축에 제하기를 [전상서좌복사 이공이 비록 두 번째 탄주를 당하였으나 선조의 재상으로 오랫동안 문한의 임에 있었으니 그 관작을 회복하고 인하여 치사(은퇴)케 함이 가하다]고 하였다. 정월 기묘에 내외의 명산에 초채(수목벌채)함을 금하였다. 신묘에 제하기를 [무릇 사자를 둔 사람은 일자의 출가를 허하노니 영통 숭법 보원 동화 등 사의 거란에서 소업의 경률을 시험토록 하라]고 하였다. 유사가 주하기를 [봄부터 비가 적으니 청컨대 고전에 의하여 원옥을 심리하고 궁핍을 진휼혈하고 들어난 해골을 덮어주고 썩은 살을 묻어주며 먼저 북교에서 악진(산악신) 해독(해신)과 모든 산천의 운우를 일으킬만한 것에 빌고 다음에는 종묘에 빌되 매 7일 일차식 빌어도 비가 오지 않으면 다시 악진 해독으로부터 처음과 같이 할 것이며 가뭄이 심하거던 우제를 행하고 시장을 옮기며 산선을 꺾고 도살을 금하며 관마에 곡식을 먹이지 말게 하옵소서] 하거늘 왕이 이를 청종하고 정전을 피하며 상선을 감하였다. 기해에 우박이 내렸다. 계묘에 도장을 문덕전에 설하고 5일간 기우하였다. 6월 을묘에 도장을 문덕전에 설하고 기우하였다. 을축에 친히 초제하니 이에 비가 내렸다. 병인에 보신이 상언하기를 [옛날 성제 명왕이 다 재변을 면치 못하였으되 오직 능히 덕을 닦고 정치를 잘 행하였기 때문에 재가 변하여 복이되었습니다. 이제 봄으로부터 가뭄이 더욱 심해져서 성상께서는 전을 피하고 선을 감하며 주야 걱정하시고 노력하시며 몸을 꾸짖고 스스로 반성하시매 시우가 응기하여 넓게 전야를 적시어 풍년을 기약하게 되었사오니 청컨대 정전에 나아가시고 상선을 회복하시고 전과 같이 일을 보시옵소서]라고 하니 제하기를 [과인이 부덕하여 이같은 한재가 생겼으니 이제 비록 비를 얻었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후일의 염려가 있다. 그러나 대신의 청도 어기지 못할 것이라]고 하고 이를 청종하였다. 무진에 경성 및 동경 상 광 2주 안변부 등 관내 주 현에 지진하여 가옥을 많이 무너뜨렸는데 동경은 3일만에 그치었다. 임신에 유사가 주하기를 [문하시중으로 치사한 유방 등 17인에게는 청컨대 입추절까지 한하여 매 10일에 1회씩 사빙하소서]라고 하니 이를 청종하였다. 추 7월 무인에 중추원이 주하기를[제지에 인삼 300근을 올리라 하였사오나 근일에 올린 1,000근만 하여도 족히 어용에 공할 것입니다. 국부의 공물은 다 인민의 고혈이오니 함부로 감출함이 불가하나이다 청컨대 다시 올리지 말게 하옵서서]라고 하니 왕이 좋아하지 않는지라 문하성이 반박하여 주하기를 [옛 제왕이 기욕을 절제하여 사치를 버리며 자기를 공손히하여 몸을 닦으며 마음을 비워 간언을 용납함은 민서를 기르고 태평을 이룩하는 소이었습니다. 이제 재변이 자주 일어나니 마땅히 마음을 정제하고 몸을 꾸짖으셔야 할 것이어늘 어찌 가히 무익한데 낭비하여 백성의 고혈을 손모하오리까 바라건대 중추원의 상주한 바를 쫓으소서]라고 하니 이를 청종하였다. 신사에 송상 진량 등 67인이 토물을 바쳤다. 임오에 제하기를 [근자에 천지가 괴이함을 나타내어 부덕함을 경계하니 날마다 근신하여 감히 편안할 겨를이 없다. 군공과 서요들도 휴가와 철조를 제한 외에는 시무에 게으름이 없게하여 써 재변을 막도록 하라]고 하였다. 경인에 지중추사 병부상서 김충찬이 졸하니 시호를 공정이라 하였다. 임진에 제하기를 [을묘년에 거란이 변경을 침범하였을 때 대사승 강승영이 선봉이 되어 전사하였으니 그 공이 가상하도다. 군기소감을 추증하고 그 아들 화에게는 초직을 제수하라]고 하였다. 일본국이 우리의 표류인 겸준 등 11인을 돌려보냈다. 경자에 혜비 한씨가 훙하였다. 이 달에 진봉겸 고주사 상서우승 김원충이 송에 가다가 옹진에 이르러 파선되어 돌아왔다. 8월 임술에 황보영으로 병부상서를 삼고 이작충으로 중추원사를 삼고 곽신으로 어사대부를 삼았다. 계해에 승 만명을 구정에서 공양하였다. 병인에 제하기를 [전일에 형부가 주한 바 참 교 이죄를 범한 것을 보았다. 짐이 바야흐로 복중에 있으며 누차 변괴를 이르게 하였다. 호생의 덕을 베풀어 서 휼민하는 마음을 표시하고자 하나니 그 참 교 이죄를 범한 자는 형을 감제하여 무인도에 유배하고 비록 참 교 이죄를 범하였다 할지라도 정장에 가긍한 점이 있는 자는 유인도에 유배하라]고 하니 이에 사형을 면한 자가 116인이었다. 무진에 진현석으로 직문하성을 삼고 김령기와 임유간으로 좌우간의를 삼고 박양명으로 시어사를 삼고 서유걸으로 상서좌사랑중우승선을 삼았다. 동경관내 주 현 및 김주 밀성에 지진하였는데 소리가 우뢰와 같았다. 9월 정축에 동여진 장군 아골 등 135인이 와서 준마를 바쳤다. 동 10월 정묘에 동여진 봉국장군 요야 등 74인이 내조하였다. 11월 기축에 팔관회를 설하였는데 송상 및 동여진 탐라가 각기 방물을 바쳤다. 정유에 동여진 장군 오을나 등 78인이 내조하였다. 12월 무신에 동여진 봉국대장군 요을도 등 74인이 내조하였다. 신유에 덕종을 대묘에 부제하였다.

정축 3년 춘 정월 갑술 삭에 조하를 쉬었다. 2월 병진에 문하시랑 평장사로 치사한 박충숙이 졸하니 시호를 정신이라 하였다. 기미에 서북로병마사가 동여진으로 거란과 교통하는 자 사이라 등 55인을 잡아 서경에 보냈다. 계축에 혜성이 다섯이나 나타나니 길이가 각각 5∼6척이 되었다. 3월 기해에 노연패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하 4월 정묘에 친히 대묘에 체제하고 사하였다. 서번(서여진) 추장 사온 등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윤월 임진에 동여진 정보 아도한 등 53인이 내조하였다. 5월 계축에 동여진 귀덕장군 이구두 등 57인에게 직 일급씩 사하였다. 을축에 왕이 현화등에 행차하였다. 6월 기유에 친히 국로를 구정에서 향연하였다. 추 7월 임술에 모후의 휘진이므로 백관이 표를 올려 진위하였다. 을축에 건덕전에 거동하고 선마하여 유징필로 내사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서경유수사를 삼고 황주량으로 내사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를 삼고 최제안선으로 상서좌복사 참지정사 중추사를 삼고 최충으로 참지정사 수국사를 삼았다. 8월 을해에 제 약랑군 서를 수태사겸 내사령으로 책봉하고 임오에 제 개성국공 기를 수태보로 책봉하였다. 을유에 송의 상인 주여옥 등 20인이 내조하였다. 정해에 송의 상인 임윤 등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9월 기유에 귀 삭 박 태 등 주와 위원진에 지진하였다. 병인에 왕이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이 달에 거란 내원성이 황제의 선지를 받들고 영덕진]에 첩하기를 [고려가 일찍이 조공에 힘쓰더니 근년에 와서 점차 체궐한다고 들린다. 곧 직공을 닦으려면 마땅히 먼저 표문을 올릴 것이다. 진실로 성실함이 보이면 별도로 유명을 내릴 것이다]고 하였으므로 문하시중 서눌 등 14인이 협의하여 주하기를 [마땅히 사자를 보내어 고주하옵소서]라고 하였다. 동 10월 경오에 동여진 장군 아유대 등 59인이 내조하였다. 병자에 서북로병마사가 주하기를 [거란이 선병으로 압록강을 침략하나이다]고 하였다. 11월 계축에 공장죄 이하를 유면하였다. 12월 정해에 전중소감 최연하를 거란에 보내어 주하기를 [본국이 엎드려 생각건대 전황태후 성제께서 책명을 내려서 선지를 반포하고 토봉을 나누어 직분을 정함으로부터 다만 이 동역은 북진(거란황제)을 앙대하여 해마다 근왕함을 끊지 않고 대대로 전해서 술직하여 왔나이다. 근자에 선신 망형(덕종)이 조업을 찬승하여 황조에 귀부할새 일덕(순일의 덕)의 군주가 임위하여 새로이 경사로운 은택을 반포하심을 듣고 양조의 공사를 가지고 오로지 신총에 상주하였던 바 아직 윤허하시는 은혜를 내리시지 않으니 도리어 지의한 생각이 쌓여집니다. 그 해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비록 해가 자주 바뀌어 왔으나 아직 그대로 조공이 정지되어 있습니다. 근자에 예지를 받자오니 자못 저의 소회에 부합한지라 삼가 마땅히 태후의 유언을 준수하여 굳게 번병이 되며 소방의 폐속을 존무하여 삼가 궐정(황조)을 받들고자 하나이다. 다시 문궤에 따라 정성을 바치어 길이 제항에 힘써 예를 펴겠나이다]고 하였다. 을미에 현덕궁주 김씨에게 만령궁을 사하였다.

무인 4년 춘 정월 무술 삭에 거란이 마보업을 보내왔다. 신유에 동여진 귀덕장군 고지문이 내조하거늘 회화장군으로 개수하고 수종원들에게도 다 직을 제수하였다. 2월 계미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여 태조의 진영을 알현하고 연등하는 밤에는 반드시 친히 진전(영전)에 행향함을 상례로 삼았다. 3월 신해에 최연하가 거란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조에 이르기를 [주상한 바를 살펴보니 조공 바침을 원한다는 일을 상세히 알겠다. 소국으로서 대국을 섬김은 열국의 통규요 낡은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도모함은 제후의 격훈이다. 경은 본래 대대로 성삭을 받고 해마다 조공을 받들어 왔다. 선국공이 바야흐로 번국을 계승할 때 드디어 임토(책봉의 의)함이 지체되었다. 시후는 회관이 여러번 바뀌어도 천조는 아직 사정을 잘 알지 못하였더니 근일에 상주한 글을 보고 성의가 간절함을 자세히 알았노라. 동이의 풍속을 따라 거듭 고요를 바치던 의식(욕솔대궁지속 천진고요지의)을 베풀겠다 하니 그 정성기우림 생각하매 진실로 애대하는 바가 되었도다. (조공을) 윤허 함은 물론 가탄할 바 실로 많도다 힘써 영도를 생각하여 술직함을 공결치 말지어다]고 하였다. 경신에 동여진의 귀덕장군 구지라 등 32인이 그 소속 회팔 등 30인을 유도하여 내조하였다. 하 4월 정묘 삭에 궁인 한씨를 책봉하여 여비를 삼았다. 무진에 평장사 유소가 졸하였다. 이 달에 상서좌승 김원충을 거란에 보내어 문안 사은하고 인하여 연호를 청하였다. 6월 을유에 시중 유방이 졸하였다. 추 7월 신축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무신에 상서형부가 주하기를 [경외의 참 교 이죄인이 103인이로소이다]고 하니 제하기를 [참죄는 내려(강) 무인도에 장배하고 교죄는 유인도에 장배하라]고 하였다. 갑인에 김원충이 거란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조하기를 [올린 표문을 살피고 하계문안한 일을 자세히 알았노라 경은 방략에 뛰어나 세봉을 잘 진무하여 동한에서 애대함을 받고 북궐에 정성기우림을 다하였도다. 증염의 절후에 글월을 보내어 문안하니 가찬한 마음 매양 더욱 간절하도다]고 하였다. 또 조하기를 [상표한 바를 살피고 조공케한 것을 사은함과 아울러 김흡병 은약병 복두 사정포 공평포뇌원다 대지 세묵 용수등석 등을 진정한 일도 자세히 알았노라 경은 국토를 권사하여 조정(황조)을 흠봉하고 이번에는 사신을 보내어 멀리 충성을 베풀어 누대로 공납을 바쳐온 절의를 존 준수하고 근년의 격조된 이유를 주달하며 거듭 조공에 힘 쓸 것을 빌어 길이 심병될 것을 원하였도다 그 공순함을 보아 이어 윤종함을 표시하였더니 번거로이 감사의 글월을 보내고 인하여 공물의 상자를 베풀었도다. 이것을 고열할 제 괴탄함이 진실로 깊도다]고 하였다. 또 조하기를 [주한 바를 살펴보고 이미 중희 연호를 사용하고 있다는 일을 자세히 알았다. 경이 지난번 조공바침을 빌거늘 곧 받아들어 시행함을 허락하였더니 사자가 돌아옴에 우리 연호을 서문상에 사용하였음을 알고 그 사대하는 지성을 보았도다 성람한 나머지 가탄하여 마음에 잊혀지지 못하겠도다]고 하였다. 8월 을축 삭에 비로소 거란의 중희 연호을 사용하였다. 장마비가 화곡을 손상하므로 제도에 추역군의 징발을 정지하였다. 병인에 동번 회화장군 아두 등 49인이 내조하였다. 정묘에 지예사합문기후 김화언을 거란의 동경에 보냈다. 정축에 사북번 귀덕장군 야반 등 26인이 내조하였다. 무자에 송의 명주상인 진량과 태주상인 진유속 등 147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동 10월 신묘에 거란이 마보업을 보내 와서 조하기를 [경은 인정에 맞추어 국무를 분장하도다. 전일에 표문를 보내어 멀리 궐정에 주달하여 조절한 녹유를 진술하고 공수하려는 간독한 정성을 나타내었기에 비록 이미 고주한대로 청종하였으나 마땅히 수존함을 특시하나니 생각함이 깊은 것을 마음에 잊지 못하겠노라 이제 동상합문사 좌천우위대장군 마보업을 그곳에 보내어 안무케 하노라]고 하였다. 11월 갑인에 황주량으로 문하시랑 평장사를 삼고 이작충으로 참지정사 주국을 삼았다. 을묘에 거란 동경회예사 의용군 도지휘 강덕영이 왔다. 기미에 최충공을 거란에 보내어 영수절을 하하고 인하여 하정하였다. 12월 갑술에 동여진 귀덕장군 고지문 등 50인이 내조하였다. 계미에 내사문하성이 말하기를 [동지의 백학 아압 산양유에 날마다 벼와 기장을 먹여 소비됨이 많습니다. 전전에 말하기를 개와 말은 그 토성이 아니면 기르지 않고 진금과 기수는 나라에서 기르지 않는다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조수 곤충은 각기 그 본성대로 살게 할 것이라 하였으니 대개 완호의 목적으로 써 물성을 상해하지 말라는 것이니 빌건대 해도에 놓아 주도록 하소서]한데 이를 청종하였다.

기묘 5년 춘 오월 신축에 우사(우신)를 제하였다. 병오에 공부상서 원영으로 춘하번서북로병마사를 삼고 대부소경 양대춘으로 부사를 삼고 우산기상시 진현석으로 동로병마사를 삼고 전중시어사 임종한과 왕이보로 부사를 삼았다. 2월 임술 삭에 전중감 이성공을 거란에 보내어 방물을 바치고 정묘에 호부랑중 유선을 보내어 안무함을 사례하고 인하여 압록강 동편에 성보를 가축하는 것을 파하도록 청하였다. 을해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고 병자에 중광전에 거동하여 관락하였다. 임오에 노인성을 남교에서 제하였다. 신묘에 황항지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3월 신축에 동북로병마사가 주하기를 [여진 제번의 자제 등 60인이 예물을 가지고 입조함을 청한다]고 하거늘 이를 허락하였다. 하 4월 신유 삭에 유선이 거란에서 돌아왔는데 조하기를 [고주한 바를 살펴보고 압록강 동편의 성벽이 경작과 착정에 방해된다는 일을 자세히 알았노라 이제 돌이켜 보건대 연성은 선묘 때에 쌓은 것이라 대개 변방의 상비이니 강토에 있어서 무엇이 손상되리오 짐은 성규를 지키기에 힘쓰노니 때를 따라 고치기가 어렵도다. 선신 흠(덕종)은 일찍이 고주함을 번잡하게 생각하여 조공함을 끊었는데 경이 습작한 처음에 공장이 겨우 이르렀다 바라는 바는 마땅히 종전대로 준수할 것이요 정성은 다시 공근함을 힘쓸 것이다. 이것이 영구한 계책인 것이며 겸하여 나의 지극한 뜻에 부합함이니 그대로 개간 증식을 하도록 하고 경소함이 생길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였다. 거란이 대리경 한보형을 보내 와 왕을 책봉하고 조하기를 [땅은 동성을 걸치고 별은 북진을 둘렀도다. 더욱 봉상하는 마음을 견고하 하니 책훈의 전례를 거행함이 마땅하도다 멀리 사신을 달려 보내어 왕의 봉역을 계행케 하노라. 이것을 은영이라 하는 것이니 마땅히 공손히 받들지어다. 이제 대리경 한보형을 보내어 그곳에 가서 경에게 관고 일통과 내첩 일도를 사하노니 도착하거던 공손히 받을지어다]고 하고 관고에 말하기를 [짐은 하늘을 법받아 널리 덮고 고래의 통규를 참작하여 안으로는 황가의 회원하는 성의를 미루어 밖으로 왕국의 전정하는 권병(전정지병)을 부여하노니 선잔에 경솔하게 들어오지 말 것이며 차서는 망녕되히 동일하게 하지 말 것(차서불가이망동)이니 바라건대 군웅과 더불어 길이 대의를 보전하라. 헌원이 호시를 익히고(헌습호시) 하우가 간척(간과)을 베푸는 것보다 주가 번병을 분치하고(주분번병) 한이 산하에 맹서함(한서산하)만 같은 것이 있으리요 그대는 공업이 환문보다 무겁고 덕망이 진 변(진한변한)에 높았도다. 선조의 국토를 계승한 시초에 선왕(덕종)의 불공함을 고쳐서 강토를 바치어 나의 영토를 넓게 하고 옥폐를 바침이 여러나라에 앞섰도다 안화를 돌이킴에 힘쓰고 충숙함으로 용의를 삼았으니 마땅히 이장을 들어 특히 총수를 베푸리라 권지고려국왕은 기특한 자태가 옥과 같이 맑고 위대한 도량이 못과 같이 깊도다. 오구는 바다에 다리 놓는 웅자로 솟아서 널리 수발한 기를 모았고 용숙은 하늘에 빛나는 광채를 드날려 아래로 정영을 내렸도다. 스스로 명구를 지키고 크게 패부를 열었도다. 동정은 먼저 전칙에 따르고 매흥은 능히 교긍을 제하였도다. 천리의 전기에 먼저 당서함을 이룩하였고 일방의 민속이 다 은영을 입었도다. 누대의 영명을 이루고 전방의 이략을 얻었도다. 이러므로 오로지 비비(사신의 의)를 달려서 멀리 용륜(조칙)을 내리나니 현토의 전봉에 은영이 일자(왕)에 가하였(영가어일자)으며 따뜻한 초■와 높은 질품은 삼사를 겸시하였도다. 귀는 숭계에 올랐고 공은 의호로 포창하였다. 널리 정부를 나누어서 크게 충적을 포장하노라 아아 성진이 공북의 궤도에 있어야(성진재공북지전) 곧 도수에 합하고 강한이 조종의 길을 얻어(강한득조종지로)야 이에 순류하나니 힘써 이말에 따라서 상훈을 번란케 하지 말라 개부의동삼사 수대보겸 시중 상주국 고려국왕 식읍 7,000호 식실봉 1,000호를 제수하고 인하여 수충보의봉국육자공신을 사하노라]고 하였다. 5월 경자에 일본민 남녀 26인이 내투하였다. 추 7월에 거란이 소부감 진매를 보내와서 생진을 하하였다. 우산기상시 임유간을 거란에 보내어 책봉을 사하였다. 8월 경신 삭에 송상 유적 등 50인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동 11월 신축에 팔관회를 설하고 신봉루에 거동하여 포를 사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12월 정사 삭에 호부시랑 송융을 거란에 보내어 영수절을 하하고 겸하여 하정하였다. 제하기를 [절후가 대한이 되어 풍운이 엄응하도다 빈궁한 사람을 생각하매 반드시 얼고 굶주릴 것이니 그 외국 투화인 및 번인에게 잡혀 갔다가 도망해온 사람들 남녀 합 80여인에게 유사는 그 노유를 헤아리어 각기 면포를 사하라]고 하였다. 윤월 정해 삭에 거란 동경회예사 대견제 등 9인이 왔다.

경진 6년 춘 정월 병진 삭에 일식하였다. 최연하로 서경부유사를 삼았다. 신유에 동여진 봉국대장군 요어 등 50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임신에 우산기상시 진현석을 거란에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병자에 안산군대군 김씨가 그 아들 이공협이 불효하다고 고발하거늘 기시하였다. 경진에 동여진 수원장군 파걸 등 40인이 와서 준마를 바쳤다. 갑신에 서북여진 귀덕장군 고두 등 46인이 와서 마와 토물을 바쳤다. 2월 경인에 승평문랑옥 수백간이 불타고 어사대가 연소하였다. 정유에 이부원외랑 김연준으로 권지승선을 삼았다. 무신에 동여진 회화장군 요두 등 48인이 와서 준마를 바쳤다. 임자에 유사에게 명하여 권형(저울)을 일정하게 하고 두량을 균평케 하였다. 갑인에 여비 한씨를 책하여 왕후를 삼고 익일에 대묘에 고하니 백관이 하례하였다. 3월 신유에 동여진 봉국장군 아골등 33인이 와서 마 15필을 바쳤다. 임술에 서북여진 영새장군 잉보 등 25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갑술에 서북여진의 추거 고사문 등 26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임오에 제하기를 [내사시랑 평장사 유징필이 세족으로 여경을 이어 문한으로 써 누대의 조연을 보좌하여 그 공이 가히 기록할만하니 그 아들 작에게 공부서령사를 제수하라]고 하였다. 하 4월 병술에 거란 동경민 무의로 오지걸 등 20여인이 내투하거늘 물품 및 전택을 사하여 영남에 거주케 하였다. 신축에 거란 횡선사 진주방어사 마세장 등이 왔다. 정미에 임해원에서 비를 빌었다. 임자에 동여진 추거 오타로 도령장군을 삼았다. 갑인에 서북여진 봉국장군 아이화 등 27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5월 을묘 삭에 북악에 비를 빌었다. 신유에 회경전에서 초제를 지내어 비를 빌었다. 임술에 큰 비가 와 한달동안 계속하였다. 이령간으로 사관수찬을 삼고 이상선으로 감찰어사를 삼았다. 6월 을사에 상서우승 유백인을 거란에 보내어 사은하였다. 동여진 영새장군 모이라 등 50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계축에 새북 해가 적을구 등이 내투하였다. 추 7월 을축에 의춘루에 벼락쳤다. 숭화궁 왕비가 졸하였다. 거란이 하주 관찰사 조안인을 보내 와 생진을 하하였다. 무진에 상서좌복사로서 치사한 양전진이 졸하였다. 8월 을유에 형부상서 판어사대사 이주좌가 졸하였다. 공부시랑 유창을 거란에 보내어 황태후의 생진을 하하였다. 계사에 동여진 고도달 등 53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9월 을묘에 이회로 상서우복사를 삼고 원영으로 공부상서를 삼았다. 서북여진 장군 야반 등이 와서 준마를 30필을 바쳤다. 정사에 이자연으로 지중추원사를 삼고 왕총지로 중추원지주사를 삼았다. 경신에 거란 동경회예사 도지휘사 고유한이왔다. 임신에 북여진 장군 이우화 골보가 내투하거늘 전택을 사하여 기내에 살게 하였다. 동 10월 갑신에 서북여진 잉화로 등 13인이 내투하거늘 명하여 과호에 채워 넣었다(충위). 을유에 서북여진 정조 부거 등 100여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경인에 지중추원사 김원충의 딸을 맞이하여 비를 삼았다. 계묘에 동녀진 장군 사이라와 서북여진 장군 동화노가 각 200여인의 민중을 거느리고 와서 토물을 바쳤다. 이 달에 유창이 거란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조하기를 [근자에 여러 사람들이 의론하여 휘호를 올리려고 하는 것을 비록 여러번 받자 하지 아니하였으나 궐문에 부루짖음(규혼)을 물리칠 수 없도다. 그 간곡함을 가긍히 여기고 묵과키 어려워 윤허하였다. 번국과 동경할 것을 권념하니 조함을 총석(사)함직 하도다. 이제 이미 12월 상순에 예책을 대행키로 정하였기에 이에 조시하노라]고 하였다. 11월 병인에 대식국 객상 보나합 등이 와서 수은 용치 고성향 몰락 대소목 등물을 바치거늘 유사에게 명하여 후하게 관대하고 돌아갈 때에 금백을 후사하였다. 신미에 공부시랑 이인정을 거란에 보내어 영수절을 하하고 겸하여 하정하였다. 12월 정유에 동여진 원윤 아두간 등 50인이 와서 마 35필을 바쳤다. 거란의 동경민 2,000여호가 내투하였다.

신사 7년 춘 정월 경술 삭에 조하를 쉬었다. 병진에 서여진 대승 고지지 등 15인이 와서 마를 바쳤다. 2월 경진 삭에 상서공부가 주하기를 [송악산의 동서산록에 식송하여 써 궁궐을 장엄하게 하소서]하거늘 이를 청종하였다. 을축에 유창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임인에 서여진 봉국장군 이우대 등 18인이 와서 명마를 바쳤다. 3월 경술 삭에 동여진 중윤 야사로 등이 내조하였다. 하 4월 기묘에 동여진 추장 대상 이개 등이 내조하였다. 계사에 장경도장을 회경전에 설하였다. 춘추 이계절에는 정예적으로 이 회를 설하는데 봄에는 6일간 가을에는 7일간이었다. 5월 을묘에 현릉에 배알하고 병진에는 선릉에 배알하였다. 제하기를 [성조께서 삼한을 통일할 때에 호종하던 신료의 자손으로 노복이나 서민에 전락되어 입사의 자격을 가지지 못한 자는 유사가 불러 문무재예를 시험하여 다 등사함을 허하라]고 하고 인하여 상호군 홍빈 윤수기 대장군 위정 김탁마 석충 양포질 하흥휴 지맹 오금보 한소보 부창 감찰어사 김경에게 마를 각각 1필씩 사하였다. 경오에 금강명경도장을 문덕전에 설하고 기우하였다. 을해에 비가 내렸다. 6월 을유에 동여진 정보 오부 등 26인이 내조하였다. 추 7월 기미에 서여진 귀덕장군 소지라 들이 내조하엿다. 신유에 거란이 위위소경 경치군을 보내 와 생진을 하하였다. 8월 을미에 동여진 유원장군 파을달 등 50인이 내조하였다. 이 달에 혜성이 동방에 나타나니 길이가 30척 가량이며 20여일만에 소멸하였다. 9월 정미 삭에 상서병부가 주하기를 [선군별감의 문무반 7품 이상원의 자제를 선취하여 글을 익혀 과거를 보는 자를 제하고는 모두 군오에 충당하게 하니 이는 비록 평안할 때에도 위태로움을 잊지 아니한다는 생각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다 누대 훈구의 자손인 고로 조종 이래로 병역에 참여하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물며 갑자년과 병자년간에 있어 이미 금제가 있었으니 (이제와서 이와 같이 한다는 것은) 다만 그 선대의 공을 잊어버리는 것이 될뿐만 아니라 또한 구제에도 어긋나는 것이니 청컨대 대오에 충당치 마옵소서]하거늘 이를 청종하였다. 동 10월에 호경(서경)에 행차하였다. 길이가 30척 가량되는 혜성이 동방에서 10여일간 나타났다. 신사에 어가가 대동강에 이르니 유수사 참지정사 황보영이 강두에서 봉영하는지라 왕이 용선에 나아가 보신들에게 연을 사하고 장군 승개 등에게 명하여 활을 쏘게 하니 우습유 금상빈이 나와 간하거늘 이에 그치고 선은관에 들어갔다. 을축에 팔관회를 설하고 영봉문에 거동하여 백관의 하례을 받고 주연을 사하고 흥국사에 행차하여 행향하고 장락궁으로 이어하였다. 기해에 최충으로 내사시랑 평장사를 삼고 황보영으로 수사공좌복사를 삼았다. 11월 병오 삭에 호경으로부터 돌아왔다. 서눌 홍빈 유섬 안보 고열 등에게 중대광을 가하였다. 기미에 송상 왕락 등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동여진 유원장군 사이라 영새장군 야어개 등 62인이 와서 마를 바쳤다. 12월 신사에 동지 귀령각에서 활쏘는 것을 사열하였다. 임오에 동여진 봉국장군 아가주 등 55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이 해에 한림학사 승지 박유인과 우승 이유형을 거란에 보내어 책례(6년 12월 대행예정이던 책례)를 하하고 판위위사 유삼은 방물울 바쳤다.

임오 8년 춘 정월 병오 삭에 조하를 쉬었다. 기유에 동여진 수령 곤두 등이 와서 준마를 바쳤다. 갑인에 김오위상장군 형부상서 안보가 표문를 올려 연로치사를 청하거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경신에 서북로병마사가 압록강 이동의 청새진에 이르는 관하의 입석촌에 있는 번호를 입적시켰다고 아?다. 기사에 동여진 귀덕장군 아두간 등 49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2월 무인에 동여진 유원장군 고지문 등 36인이 와서 토물을 바치거늘 직을 제배하되 차등 있게 하였다. 무자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병신에 서여진 추장 고지지 등 12인이 와서 토물을 바치매 예빈성이 주하기를 [고지지 등은 왕년 평로와 영원 양성을 개탁할 때에 자못 공노가 있었으니 예물을 우사하소서]하거늘 이를 청종하였다. 기해에 동경부유수 최호 판관 나지설 사록 윤렴 장서기 정공간 등이 제령을 받들어 양한서(전한서 후한서)와 당서를 신간하여 진상하거늘 모두 작을 사하였다. 3월 을사에 내사문하가 주청하기를 [정전에 거동하여 시조하는 날에는 백관으로 하여금 각각 스스로 주대케하소서]하거늘 이를 청종하였다. 병진에 서북여진 영새장군 야어개 등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갑자에 장군 이우불 등 47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하 4월 병술에 서리가 내렸다. 임인에 동여진 대상 오어달이 경우를 청하거늘 이에 동로둔전사의 소 10두를 사하였다. 5월 기사에 왕이 현화사에 행차하였다. 6월 을해에 왕이 태조의 휘진도장으로 개국사에 행차하였다. 정축에 제하기를 [농사가 바야흐로 성할 때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니 무릇 구한할 수 있는 것을 유사는 상세히 주문하라]고 하였다. 경진에 종묘와 산천에 비를 빌었다. 갑신에 내사령 서눌이 졸하였다. 병술에 도병마사가 주하기를 [동로 열산현 영파술 대정 간홍이 적과 싸울제 중과불적으로 화살이 떨어지(진)고 힘이 다하여 죽었사오니 청컨대 직상을 추가하소서]하거늘 이를 청종하였다. 동여진 귀덕장군 야이불 등 25인이 내조하였다. 을미에 내사시랑 평장사 유징필이 졸하였다. 추 7월 을사에 연창궁비가 졸하였다. 을묘에 거란이 이부랑중 풍립을 보내 와 생진을 하하였다. 8월 무인에 이자연으로 중추부사를 삼았다. 경진에 동여진 유원장군 사이라 등 68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갑신에 선정전에 거동하여 형부의 주상하는 옥발미(죄옥의 평의)를 청단하였다. 9월 정유 정사에 동여진 귀덕장군 아개 등 58인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을축에 서북여진 유원장군 고두로 등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동 11월 신묘에 거란이 검교예부상서겸 어사 왕영언을 보내 와 조하기를 [짐이 관남십현은 아국의 구기임으로 장차 군사를 일으켜 강토를 회복하려 논의하였더니 송조가 누차 전사를 보내어 거듭 간곡한 말로 약정하기를 구공인 은 30만양 견 30만필 이외에 매년 금과 회의 진물을 별도로 바쳐서 부여의 물품에 대하겠다기에 재차 맹약을 논의하여 영구히 화호함을 복정하였다. 그 제도의 병마 등은 급여를 후히 하고 부조를 면제하는 동시에 이미 본부에 방환기켰으니 그 어찌 내 미세한 몸으로 이러한 성사를 이룩할 수 있었던가 이제 문무백관과 내외제관들이 누차 봉서를 올리고 전고를 상고하여 내가 원공 대략을 지녔다 하고 나에게 아름다운 칭호와 큰 이름을 가상하고자 하므로 굳이 사양하지 못하여 힘써 군청에 따르기로 하였노라 이미 11월 3일을 선정하여 양궁이 함께 대례를 거행하게 되었으니 경은 번병을 일컫고 상국을 섬기며 궁궐을 향하여 충성을 바쳤으니 멀리 생각건대 이런 사실을 알게 되면 반드시 경열함을 더할 것이다. 이제 예부상서 왕영언을 보내어 조서를 가지고 그곳에 가서 논시케 하노라]고 하였다. 정유에 동여진 영새장군 동불 등이 와서 마를 바쳤다. 12월 계묘에 치사한 문하시랑 평장사 황보유의가 졸하였다. 갑인에 이령간으로 비서소감겸 한림시강학사를 삼았다.

계미 9년 춘 정월 경오 삭에 조하를 쉬었다. 경진에 황주량으로 수태보겸 문하시중판상서이부사상주국을 삼았다. 갑신에 서여진 귀덕장군 골개 등 36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2월 임인에 최제안으로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상주국을 삼고 이작충으로 내사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판상서례부사를 삼고 김정준과 고숙성으로 좌우승선을 삼았다. 임자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3월 병자에 서여진 추장 고두로 등 40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기축에 백좌도장을 회경전에 설하고 승려 1만을 공양하였다. 임진에 동여진 장군 개로 등 40인이 와서 마를 바쳤다. 하 4월 무술에 동북로병마사가 주하기를「여진 유원장군 사이라가 수륙의 적수 나불 등 494인을 유치하여 화주관에 와서 입조하기를 청하나이다」라고 하매 유사가 의주하기를「이 무리들은 인면 수심이니 마땅히 병마사로 하여금 인수를 멸하고 차례로 나누어 입조하게 하소서」하니 이를 청종하였다. 임인에 제하기를「비가 시기를 어기니 농사가 염려된다 어찌 형벌이 공정치 못하여 민원이 있음인가 유사는 유죄 이하를 심사하여 모두 석방하게 하라」고 하였다. 계묘에 동여진 장군 이다불 등이 내조하였다. 5월 정유 삭에 일식하였다. 제하기를 「과인이 부덕함으로 이러한 한건을 이루고 누차 재변이 있으니 마땅히 상식국으로 하여금 응요군을 놓아 보내고 또 ■호로써 고기 잡는 것을 금하라」고 하였다. 갑술에 사사하였다. 무인에 정전을 피하였다. 기유에 비가 내렸다. 을미에 비가 내리거늘 백관들이 건덕전에 나가 표하하였다. 6월 병오에 김령기로 병부상서를 삼았다. 정사에 동여진 추장 유불달 등 25인이 내조하였다. 동북로 병마사가 주하기를「연해분도판관 황보경이 홀로 전함을 거느리고 대양에 멀리 들어가 수적을 분격하여 사로잡고 벤 것이 심히 많사오니 청컨데 포상을 행하옵소서」하거늘 이를 청종하였다. 추 7월 정묘에 거란이 시어사 요거선을 보내 와 생진을 하하였다. 정축에 동여진 추장 아두간 등 66인이 내조 하였다. 8월 기미에 내외의 사형을 결정하고 정전을 피하며 소선하고 악을 철하였다. 9월 임신에 친히 구정에서 초제하였다. 정축에 유사가 주하기를「중광사의 성조도감사인 정장이 사서인 승적으로 더불어 감림의 물건을 도적질 하였으니 법에 준하여 장배하기를 청합니다」고 하거늘 제하여 경전에 따르라 하였는데 어사대가 형률대로 처단하기를 논청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경진에 동여진 영새장군 동불로와 유원장군 사이라 등이 화외여진 80인을 거느리고 내조하여 주하기를「화외인이 난폭한 마음을 망녕되게 품고 일직 변경을 요란케 하였으나 관대히 길러 주심을 입음에 미쳐 완전히 전죄를 고쳤습니다. 이제 수륙번장을 인솔하여 궐문에 나와 맹세를 들이고 변민되기를 원하오며 금후 항시 인구의 동정을 살펴서 보고하리다」고 하거늘 왕이 이를 가상히 여겨 특히 김백을 사하고 관등을 가하였다. 동 십월 임인에 동여진 영새장군 야사개 등 80인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11월 무인에 동경회례사 검교좌복사 장창령이 왔다. 신사에 거란이 책봉사 소신미 부사 한소문 도부서 이천관내 관찰유후 유일행과 압책사 전중감 마지유와 독책 장작소감 서화흡과 선전 검교좌산기상시 한이손 등 130인을 보내왔다. 정해에 왕이 단을 설하고 책명을 받으니 조에 이르기를「짐이 외람되게 부덕한 몸으로 제업을 이어 받으니 6성의 드리우신 경사를 힘 입어서 팔방이 두루 태평함을 이루었도다 요즈음 여러 사람의 간청에 따라 삼가 큰 이름을 받게 되니 무릇 조림 있어 경상을 두루 균등하게 할 것이다. 경은 대대로 성삭을 흠수하였고 강역은 토모를 이어 받았다. 심해를 항행하여 술직의 의를 극진히 하였고 대국을 섬겨서 신하된 절개를 다하였도다 마침 대례를 베풀게 되매 곧 이장을 들어 특히 질록을 올리는 은혜를 추급하고 아울러 공적에 보답하는 예(수)를 성하게 하노라 이제 사신 좌감문위상장군 소신미와 부사 상서예부시랑 한소문을 보내어 절을 가지고 예를 갖추어 책명하며 아울러 차복 관검 인수 및 국신물(양국교환의 선물) 등을 별록과 같이 갖추어 보내니 도착하거든 삼가 받을지어다」고 하였고 책문에는「짐이 하늘의 기탁을 받아 조종의 기업을 소승하니 4방이 인덕에 귀화하므로 영기를 쉬어 패업을 정하고 백관들이 예문을 상고하여 보책에 새겨 써 존호를 가하였다. 멀리 제신(경)을 권고컨데 국사를 천개하여 항해(조공)의 성을 게을리 하지 않고 대하의 맹서를 더욱 굳게 하였다. 바야흐로 경사를 널리 베풀 때이니 마땅히 은혜를 펴서 원방에까지 미치게 할 것이다. 휘전에 따라 특히 총장을 보내노라 아아 그대 수충보의 봉국공신 개부의동삼사 수태보겸 시중 상주국 고려국왕 식읍 7,000호 식실봉 1,000호 왕형은 영철함이 당대에 드물며 인자하여 나라를 계승하였도다 강토를 확장하매 일역(동방)에 걸쳐서 경역을 나누고 천조를 존숭하매 황궁을 우러러 정성을 바쳤도다 순임금을 받들어 필성의 업을 세우고(대순 수필성지업) 주나라를 바로 잡아 협보의 훈을 도모하도록 하라(광주 규협보지훈) 덕화는 천애에까지 미치고 성교는 청견(동방)에 펴졌도다 짐이 지난 번에 엄가를 갖추러 경기를 순무할 제 방백(방윤)에게는 알현의 예의를 펴게하고 도인들에게는 내소(임금이 오니 백성들이 소생하다는 의)의 희망에 계합하도록 하였다. 간과를 쓰지 않고 재판(옥시)을 공평하게 하니 여러 지방이 의를 사모하고 풍화에 향하여 옥백을 서로 보내오고 인국은 위엄을 두려워하고 덕을 회앙하여 금겸을 증납하였도다 이에 태평이 상승된 시기에 이르러 마침 허명의 보책을 받았도다 이에 은택을 베풀음에 있어 먼저 왕번(고려)에 미치게 하노라 절석의 숭자에 나아가게 하고 전차의 준질을 바르게 하니 원전으로 부세를 더하고 미호로 공을 포하노라 이에 사신 소신미와 부사 한소문을 보내어 절을 가지고 예를 갖추어 그대를 책명하여 수태전겸 중서령을 삼고 식읍 3,000호 식실봉 300호를 가하여 인하여 동덕치리의 사자공신(호)을 사하고 산관훈작은 본래대로 하노라 아아 군자국을 지켜 제후왕에 으뜸이로다 도를 논하여 주의 태사가 될지며 공훈을 드날려 한의 승상에 오를지어다 신절을 굳건히하여 황가에 보답할 것이며 창성할 때에 부귀를 향수하고 공명을 길이 세상에 전하여 청사(죽소)에 그 빛이 흐齪 것이니 길이 공경할 지어다] 고 하였다. 병인에 동번적이 선 팔소로 서곡현에 입구하여 40여인을 사로잡아 가거늘 방비에 불근한 소치로 그 장졸들을 죄주었다. 12월 경신에 탁(탐)나국 성주 유격장군 가리가 주하기를 [왕자 두라가 요새 졸하였는데 일일이라도 후사자가 없어서는 아니될 것이오니 청컨대 호잉으로써 왕자를 삼으소서]하고 인하여 방물을 바쳤다.

갑신 10년 하 4월 경술에 동여진 1,045인이 예물을 바치고 맹약을 청하거늘 각각 의복과 은기를 사하였다. 금원현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5월 정묘에 동여진 장군 구라 등 25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6월 을사에 왕이 보살계를 건덕전에서 받았다. 추 7월 계묘에 거란이 검교태보 유종정을 보내와 생진을 하하였다. 우복사 이괴와 상사봉어 최희정을 거란에 보내어 책봉을 사하였다. 8월 계묘에 동여진 장군 아도한 등 46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9월 신유에 동여진 장군 사이라 등 66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계해에 동여진 장군 포기 등 59인과 서여진 대장군 고두로 등 27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정묘에 동여진 장군 구니도 등 26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동 11월 을해에 병마사 김령기가 주하기를 [이제 장 정 이주 및 원흥진에 성을 쌓아 불일내에 필역케 되었사오니 노고가 심히 많았습니다 그 독역한 주 진의 관리에게 1과의 7품 이상에게는 정직 1급을 초배하여 부모에게도 봉작하고 8품 이하에게는 정직 1급을 초배하여 차제계직을 가하고 2과에게는 정직 1급과 아울러 계직을 가하소서 또 이 3성의 지대는 원시 적의 소굴이라 침요될까 염려되오니 병마군사를 요해의 곳에 나누어 주둔시켜 수륙으로 막아 적으로 하여금 접근함을 얻지 못하게 하고 그 군사로서 1과의 별장 이상에게는 정직 1급을 초배하여 부모에게도 봉작하고 대정 이상에게는 정직 1급과 아울러 향직을 초배하고 군인에게는 향직 1급을 초배하도록 하옵고 2과의 대정 이상 및 선두에게는 정 향직 1급을 가하고 군인 및 초공(사공) 수수(수부)에게는 향직을 가하고 또 물을 사하되 차등있게 하시고 축성시를 당해서 출전하여 공이 있는 1과의 섭병부상서 고열 등 10인과 차 1과의 소부감 유교 등 5인과 2과의 대락승 정패 등 5인에게 또한 포상을 가하여 써 장래를 권장하소서]라고 하니 제하여 가타 하였다. 계미에 동녀진 장군 오을달 등 남녀 144인이 와서 준마를 바치고 주하기를 [우리들이 귀국과 접경하여 살며 왕화를 모앙하여 신복한지 오래오나 항상 추로가 내침할까 염려되어 정주함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 3성을 쌓아 써 적의 통로를 막게 되었기 때문에 내조하여 사은하나이다]고 하거늘 왕이 상을 넉넉하게 주어 돌려 보냈다.

을유 11년 춘 정월 무오 삭에 조하를 쉬었다. 정축에 동북교에서 풍사(풍신)를 제하였다. 동여진 귀덕장군 아두주 등 50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2월 무자 삭에 임진강의 과교원에 호를 사하여 자제사라고 하였다. 앞서 이 나루터에 선교가 없어 행인이 다투러 건느다가 물어 빠지게 되는 일이 많더니 유사에게 명하여 부교를 반든 이후로는 인마가 평지와 같이 밟게 되었다. 갑오에 동여진 유원장군 파을달 등 6105인이 와서 준마를 바쳤다. 3월 기사에 동여진 회원장군 염한 등 75인이 내조하였다. 경오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병자에 곡우절인데 서리가 내리었으므로 녹수하였다. 하 4월 정해 삭에 태사가 주하기를[마땅히 일식하여야 할 것인데 음운으로 보이지 않나이다]고 하니 군신들이 표하하였다. 무술에 동여진 수령 사어두 등 35인이 와서 준마를 바쳤다. 기해에 동여진 장군 요어나 등 70인이 와서 양마를 바쳤다. 경자에 영새장군 고도화 등 70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병오에 서북로 병마판관감찰어사 이춘이 주하기를[번적 100여인이 영원진 장평술에 침입하여 군사 30여인을 노략하여 갔으니 청컨대 장교가 능히 수어하지 못한 죄를 다스리옵소서]하거늘 이를 청종하였다. 무신에 뇌사(뇌신)를 서남교에서 제하였다. 기유에 비서성이 신간한 예기정의 70본과 모시정의 40본을 올리거늘 명하여 1본은 어서각에 장치하고 여분은 문신들에게 사하였다. 5월 경신에 제하기를 [소서가 장차 닥쳐오니 중한 죄수는 정하고(죄수을 뽑아내어 관대하게 다루는 것) 경죄는 석방하라]고 하였다. 병인에 대송 천주 상인 임희 등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동로군사로써 번적과 싸워 전승한 자에게 각각 내구의 마를 사하였다. 윤월 신축에 오랜 비로 말미암아 여수하고 경죄를 석방하였다 6월 기묘에 거란 횡선사 검교태부 판3반원사 야율선이 왔다. 경진에 영성(가색을 맡은 별의 이름)을 제하였다. 추 칠월 정유에 거란이 검교상서우복사 고유기를 보내 와 생진을 하하였다. 9월 경인에 동여진 장군 고지문 등 45인이 내조하였다. 동 12월 경인에 혹한이므로 경한 죄수를 석방하고 급하지 않는 역사를 정지하였다. 동여진 고차 등 36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12월 임자에 여수하였다.

병술 12년 춘 2월 병인에 연등으로 포를 사하였다. 임신에 마조를 제하였다. 3월 신사 삭에 일식하거늘 왕이 정전을 피하고 소란을 입고 구일(구식)하였다. 신묘에 이인정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신축에 시중 최제안에게 명하여 구정에 나아가 행향하고 가구의 경행을 배송케 하였는데 경성가구를 나누어 3도로 하고 (길마다) 채루자로써 선약경을 메고 앞서 가게 하고 승도들이 법복을 갖추어 걸어가면서 경을 독송하고 감압관도 또한 공복을 입고 도보로 따라가면서 가구를 순행하며 백성을 위하여 복을 비는 것이니 이름하여 경행이라 하였다. 이로부터 해마다 상례를 삼았다. 하 4월 신해에 중농을 제하였다. 정묘에 왕이 병환으로 산호전에 이어하였다가 정축에 대내법운사로 이어하였다. 병술에 백관들이 불사에 기도하였다. 5월 을미에 이부가 주하기를 [위위경 지대(태)사국사 서웅이 질환으로 청고(사가를 청함)한지 이미 180여일이 경과하였습니다. 국제에 무릇 현재관으로 걸가하여 만백일이 된 자는 파직하게 되어 있사오니 청컨대 서웅의 직을 해직하소서]하거늘 제하기를 [서웅이 그 업에 정려하여 일관의 장이 되었으니 특별히 200일을 사고하라]고 하였다. 정유에 왕의 병환이 더하였으므로 왕제 낙랑군 휘를 불러 병석에 들어오게 하고 명하여 국사를 권총하게 하며 조하기를 [짐이 선왕의 말명(임종시의 유명)을 받고 열성의 비도를 계승한지 12년 동안에 하늘의 휴징을 힘입어 국내가 평안하더니 춘하 이래로 우노가 화기를 잃게 하매 약석이 무효하여 드디어 위독함에 이르렀으니 신기를 유덕자에게 돌리고자 하노라 내사령 낙랑군 휘는 짐의 애제라 인효 공검함이 인국에까지 들렸으니 마땅히 대보를 전하여 써 경광을 나타내게 하리라]하고 이날 훙거하니 수는 33이요 재위 12연이라 빈전을 선덕전에 옮기었다 왕은 관인 효우하고 식견과 도량이 홍원하며 영무 과단하여 소절에 구애되지 아니하였다. 익하여 용혜라 하고 묘호를 정종이라 하고 북교에 장하여 능을 주릉이라 하였다. 유사가 유명을 받들어 산릉제도를 다 검약하게 하였다. 문종 10년 익을 홍효라 가하고 인종 18년 영렬을 가하고 고종 40년 문경을 가하였다.

이제현이 찬하기를 [거란이 탐모하여 족히 신을 보전할 수 없으므로 태조가 깊이 경계하였다 그러나 그 일재(대연림의 난)를 다행으로 삼아 구호를 버리는 것도 또한 좋은 계책은 아니었다 현종은 어려운 때에 반정하매 미쳐 여가를 가지지 못하였고 덕종은 방강한 나이에 미달하였으니 더욱 쟁투함을 경계하여야 하였으므로 왕가도의 화친을 끊자는 의론은 황보유의의 화호를 이어서 백성을 쉬게 하자는 의론만 같지 못하였다. 정종은 사위한지 3연만에 우리의 대부 최연하가 거란에 갔고 4년 거란의 사신 마보업이 오니 이로부터 다시 환맹을 잇게 되었다. 감동시킴이 지성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면 이것은 반드시 기책이 있었을 것이다. 이러므로 군자는 [선계선술함으로써 그 나라를 보전할 것이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