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고려

제2대 혜종(惠宗,943~945 재위2년)

오늘의 쉼터 2009. 7. 30. 10:37

 

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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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왕


 

 

 

제2대 혜종(惠宗,943~945 재위2년)

 

자 승건(承乾). 휘(諱) 무(武). 시호 의공(義恭). 태조의 큰아들. 어머니는 장화왕후(莊和王后) 오씨(吳氏). 비는 대광(大匡) 임희(林曦)의 딸 의화왕후(義和王后). 호장(豪壯)한 기질로, 태조를 따라 후백제를 쳐서 공을 세웠다. 즉위한 다음해인 944년 대광(大匡) 왕규(王規)가 광주원군(廣州院君)을 후사로 세우려고 왕제(王弟)인 요(堯:定宗)와 소(昭:光宗)를 무고하여 왕의 형제간을 이간하고, 여러 차례 왕을 시해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를 처치하지 못하고 항상 신변보호에 힘쓰다가 병으로 죽었다. 능은 개성(開城)의 순릉(順陵)이다.
                                                      
<서문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혜종 인덕명효선현의공대왕의 휘는 무요 자는 승건이니 태조의 장자이며 모는 장화왕후 오씨로서 후량 건화 2년 임신에 탄생하였다. 태조 4년에 정윤(태자)으로 책립되고 종군하여 백제(후백제)를 토벌할 때에 분투용전하여 앞장을 섰으므로 공이 제일 갔던 것이다. 26년 5월 병오에 태조가 붕어하매 유명을 받들어 즉위하였다. 6월 임신에 태조를 현릉에 장사지냈다.

신진 원년에 광평시랑 한현규와 예빈경 김렴을 진(후진)에 보내어 왕위를 계승하였음을 아뢰고 드디어 계단을 파하였음을 축하하였다. 동 12월에 한림원령 평장사 최언휘가 졸하였다.

을사 2년 진이 범광정과 장계응를 보내와 왕을 책하고 칙하기를 「아뢴 바를 살펴보니 선신의 유명과 관리의 추청으로 국사를 권지하였다는 일을 자세히 알았노라 제후(규모)로서 경사를 쌓아 충효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니 일찍부터 간고의 명망을 들어내고 상현의 성예를 나타내었다 아치를 마땅히 사습하여야 할 것이며 깊이 물정에 계합하도록 하라 선신은 아들 알아보는 밝음을 보였고 후사는 집 다스리는 미덕을 이루었다 멀리 장주를 올리니 더욱 순일한 정성을 시험하게 되어 흔위의 마음이 자나 깨나 마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 조하기를 「경은 재략이 특이하고 규모가 세상에서 뛰어나 순식의 충정을 스스로 허하고 옹귀의 문무를 겸전하였다. 응린악입의 모습은 만리를 절충하고 하옥 춘대의 혜택은 혜화가 일방에 흡족하도다 또 존장의 정성이 깊고 공륜의 예가 갖추어졌도다. 이제 강일에 명은을 내려 마땅히 명세의 영걸을 표상하며, 진왕의 품질을 높게 할 것이다 이에 양절을 표창하고 인하여 숭계에 올려 지절현토주도독상주국 충대의군사를 삼고 그대로 고려국왕에 봉하노라 지금 정사 광록경 범정과 부사 태자 세마 장계응 등을 명하여 그 곳에 가서 관고 칙첩을 선사하고 국신물 등을 별록과 같이 갖추어 고려국왕에게 죽책 법물 등을 칙사하노라 죽책1부팔십간 자사조연홍금장배책갑일구 흑칠은함릉금동쇄약이부 반환홍금탁리친책문양폭 황릉협말(#;2-74)일조 개책갑삼폭 황릉협일조 개책갑삼폭 황견유협말(#;2-74)일조 거책갑숙자판사이조 낙책상숙자사유화담(#;2-74)상일장 은과각각간두금백목책안일면 자릉안욕일령 협군선전행사자릉안욕일부 친책상자릉석욕일부 또 고려국왕에게 칙하기를 「아뢴 바를 살펴보니 사은으로 진봉한 것이 홍지금은오색선직성일월용봉오단이매 홍지금은오색선직성용상욕이면 금성피갑이부 계금은성피갑이부 계금련철두무사부 계금홍지금은오색선직성화조계금한과사요 각궁사장 홍지금은오색선직성용어계궁대재사구 죽간전이백척 일백척첩금 일백척첩은 목간전이백척 홍지금은오색선직성운용전차재사구 금은장파(#;2-76)초 세루운천옥검일십구내 이구 금은장계금초 금은장계금초세루운천장도일십구 금은과창일십근 금은장계금초비수일십구 금은장초비수일십구 세저포일백필 백전포이백필 세중마포삼백필임을 자세하게 알았노라 경은 대대로 충정이 돈독하고 가문은 훈벌을 전하였다 이에 승습하는 처음에 있어서 멀리 공봉의 의를 바쳤도다 패금으로 문채를 이루니 동화가 무색할 정도며 광비(공물을 담는 광우리)를 모두 진개하니 다 진기한 것이로다 또 병기는 병렬되어 있고 융의는 선려하여 정묘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성근을 기울였음을 증험할 수 있도다 깊이 가 함을 재삼 하여 마지 않노라」고 하였다. 또 고려국왕에게 칙하기를 「아뢴 바를 살펴보니 금은장소자육근 계금초금은장검육구 금은장계금초장도일십구 홍지금은오색선직성화조계금한과이요 홍지금은오색선직성화조계금의배이면 홍지금은오색선직성화조계금군요육요 홍지금은오색선직성계금초금은장비수일십구 도금응령이십과 은쇄선자오색조은미동전도금요자령이십과 은쇄미동전세백전포일백필 세중마포일백필 인삼오십근 두발이십근 금은지철문전도일십매 금은세루전도이십매 금은세루전자전도일십매 은화세루전도이십매 금은중구대양도자삼십병 금은중구대양도자사십병 금은중구중양도자오십병 은중구중양도자오십병 금은중구소도자오십병 은중구소도자일백병 금은세루별화겸이십매 금은세루겸자이십매 향유오십근 송자오백근을 올렸다는일을 자세히 알았노라 경은 땅이 동명(동해)에 공림하고 있으나 마음은 북궐(제거)을 향해 달리고 있다 구구를 받들어 공물을 드리고 만리를 지나서 내조하였다 융기는 견강하고 직문은 미려(미려)하며 저마는 눈 같이 희고 지묘한 약은 신기를 통하였다. 수식완구의 진기함과 향택과실의 종류에는 명품이 이미 많고 나열함도 매우 많은 바 살펴 보았을 때 칭찬할 마음 참으로 간절하였다」고 하였다 또 고려국왕에게 칙하기를 「올린 바 표문을 살펴보니 거년 3월 1일에 친히 단주에 행차하여 계단을 살패함을 하례한 일도 자세히 알았노라. 짐은 계단이 신의를 크게 어기고 침릉을 마음대로 하므로 친히 융차를 거느리고 가서 걸로를 평정하였다 영기를 한번 들매 광구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경이 멀리서 승리의 소식을 듣고 자못 분기를 발하여 장표를 보내어 궐정에 와서 경하하니 그대의 충성을 가상하여 마음에 잊지 않겠노라」고 하였다. 대광 왕규가 왕제 요와 소를 참소하거늘 왕이 그 무언임을 알고 은총과 대우를 더욱 두텁게 하였다 왕규가 또 그 도당을 시켜 벽에 구멍을 뚫고, 왕의 침소 내에 침입하게 하여 난을 일으킬 것을 모의하므로 왕이 거소를 옮겨 이를 피하고 문책(왕규의 반란죄를)하지 않았다. 추 9월에 왕의 병환이 위독한데도 군신들은 들어가 뵈옵지를 못하고 아첨하는 소인의 무리가 항상 왕의 곁에 모시고 있었다 무신에 중광전에서 붕어하니 재위는 2년이며 수는 34세이었다. 왕은 기우와 도량이 넓고 지용이 절륜하였으나 왕규가 모역한 뒤로는 의심하고 꺼려하는 바가 많아 항상 갑사로써 자신을 호위하게 하며 희노가 무상하고 뭇 소인배가 진출하였으며 장사를 상사함이 절도가 없었으므로 내외가 차원하였다 시호를 의공이라 하고 묘호를 혜종이라 하였으며 송악의 동쪽 기슭에 장사지내고 능을 순릉이라 하였다 목종 5년 명효를 가시하고 현종 5년 선현을 가하고 18년 고평을 가하고 고종 40년 경헌을 가하였다.

  이제현의 찬에 「우부가 환공을 시살하기를 청하고 장차 태재를 구하려 하거늘 은공이 듣지 않고 또 그를 토멸하지도 않더니 마침내 위씨의 화를 초치하였다 왕규가 양 왕제를 참소함도 우부와 같은 뜻이었다 혜종이 그를 죄주지 않고 도리어 좌우에 있게 하였으니 그 칼을 끼고 벽을 뚫는 자의 모해를 면하게 된 것이 다행한 일이라 하겠다 때는 태조가 세상을 떠난지 얼마 안되었는데 왕규가 불의로서 중인의 마음을 산(득)것이 이미 능히 한위의 조씨나 사마씨와 같다고 할까 그런데 그를 귀양보내고 죽이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아아 소인을 멀리하기 어려움이 이와 같으니 경계하지 않을소냐」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