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고려

제4대 광종(光宗,949~975 재위26년)

오늘의 쉼터 2009. 7. 30.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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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대 광종(光宗,949~975 재위26년)

 

자 일화(日華). 휘 소(昭). 시호 대성(大成). 태조 왕건(王建)의 셋째 아들이고 제3대 왕 정종(定宗)의 친동생이다. 비(妃)는 태조의 딸 대목황태후(大穆皇太后) 황보씨(皇甫氏)이다. 정종의 선위(禪位)를 받아 즉위한 뒤에 그 영명(英明)한 바탕으로 많은 치적을 쌓았다. 먼저 권호강족(權豪强族)의 세력을 억제하기 위하여 훈신(勳臣) ·장상(將相), 심지어 골육지친(骨肉之親)에 이르기까지 무자비한 숙청을 단행하였으며,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을 만들어 노주(奴主) ·노비 간의 분쟁을 재판하여 많은 노비를 풀어주었다. 958년에는 중국에서 고려로 귀화한 쌍기(雙冀)의 건의를 받아들여 고려에서는 처음으로 과거제도를 실시하여 인재를 등용하였다. 또한 백관의 복제(服制)를 제정했으며, 수도 개경(開京)을 황도(皇都)로 개칭하고 서경(西京), 즉 평양을 서도(西都)라고 하였다. 한편 불교를 독신(篤信)하였으며, 국방에 유의하여 동북계(東北界) ·서북계(西北界)에 많은 성을 쌓았다. 서북계에는 장청(長靑) ·위화(威化) ·무주(撫州) ·안삭(安朔) ·습홀(濕忽) ·송성(松城) ·낙릉(樂陵) ·운주(雲州) ·신도(信都) ·안융(安戎) 등 주로 평남 ·북지방에 축성(築城)하였고, 동북계에는 장평(長平) ·박평(博平) ·고주(高州) ·화주(和州) 등, 주로 지금의 함남 지방에 축성하였다. 만년(晩年)에는 참소를 혹신(惑信)하여 죄 없는 사람을 많이 죽였다. 능호(陵號)는 헌릉(憲陵)이다.
                                                                
 <서문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광종 홍도선열평세대성대왕의 휘는 소요 자는 일화이며 정종의 모제(동복아우)로 태조 8년 을유에 탄생하였다. 정종 4년 3월에 병신에 내선을 받아 즉위하였다. 가을8월에 대광 박수경 등에게 명하여 국초의 공역자를 고정하여 사역자에게는 쌀 25석을 삼역자에게는 20석 이역자에게는 15석 일역자에게는 12석을 사하고 이것을 정례의 식록으로 삼았다.

경술 원년 봄정월에 대풍이 불어 나무를 뽑으매 왕이 재앙을 양제하는 방법을 물으매 사천이 아뢰기를 「덕을 닦음만 같지 못하나니다」고 하니 이로부터 항상 정관정요를 읽었다. 광덕이라 건원하였다.

신해 2년 대봉은사를 성남에 창건하여 태조의 원당을 삼고 또 불일사를 동교에 창건하여 선비 유씨의 원당을 삼았다. 동 12월에 비로소 후주의 연호를 행하였다.

임자 3년 광평시랑 서봉을 주에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계축 4년 주가 위위경 왕연과 장작소감 여계빈을 보내와 왕을 책하여 특진검교대보 사지절현토주도독 충대의군사겸 어사대부 고려국왕을 삼았다.

갑인 5년 춘에 숭덕사를 창건하고 선비를 추복하였다.

을묘 6년에 대상 왕융을 주(후주)에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광평시랑 순질을 주(후주)에 보내어 즉위함을 축하였다.

병신 7년 주가 장작감 설문우를 보내와 왕을 가책하여 개부의동삼사 검교대사를 삼고, 인하여 백관의 의관을 중국제도에 따르게 하였다. 전대리평사 쌍기가 문우를 따라왔다.

정사 8년 봄정월에 왕이 구정에서 활쏘는 것을 관람하였다.

무오 9년 여름 5월에 비로소

1.明法業 以下를 雜科라고 한다.

2.製述業의 科目中 詩 賦 頌 策 論 의 五科目은 다 보는 것이 아니라 때에 따라 詩 賦 頌 또는 詩 賦 策을 보았다.

  과거를 설치하고 한림학사 쌍기에게 명하여 진사를 뽑아 병신에 위봉루에 거동하여 방을 붙이고 최섬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이 해에 주가 상서수부원외랑 한언경과 상련봉어 김언영을 보내어 비단(백) 수 천필을 가지고 와 동과 교역하였다.

기미 10년 봄에 좌승 왕긍과 좌윤 황보위광을 주(후주)에 보내어 명마와 직성 의오와 궁검을 바쳤다.

가을에 사신을 주(후주)에 보내어 별서효경 1권 월왕효경신의 8권 황령효경 1권 효경자웅도 3권을 바쳤다.

주(후주)가 좌효위대장군 대교를 보내 왔다.

겨울에 사신을 주(후주)에 보내어 동 50,000근과 자백수정 각 2,000과를 바쳤다. 주(후주)의 시어 쌍철이 오매 제배하여 좌승을 삼았다.

경신 11년 봄3월 갑인에 최광범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백관의 공복을 정하였다. 개경을 고쳐 황도라 하고 서경을 서도라 하였다. 평농서사 권신이 대상 준홍과 좌승 왕동 등이 모역하였다고 참소하매 이를 귀양보냈다. 이로부터 참소하고 아첨하는 무리가 뜻을 얻어 충량한 사람을 무함하니 종이 그 상전을 고소하고 자식이 그 아비를 참소하매 영어가 항상 차 있었으므로 따로 가옥을 설치하게 되었으며 죄 없이 죽음을 당하는 자가 뒤를 이었다 시기가 날로 심하여 종족이 많이 생명을 보전하지 못하였으며 비록 외아들 주라 할지라도 스스로 의심하고 멀리 하여 친근하지 못하게 하니 사람마다 두려워 하여 감히 서로 마주보고 말도 하지 못하였다.

신유 12년 궁궐을 수리하매 정광 왕육의 제댁으로 이어하였다. 왕거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임술 13년 겨울에 광평시랑 이흥유 등을 송에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계해 14년 여름6월에 궁으로 돌아와서 조하기를 「짐이 요즘 대내(궁궐)를 중수하기를 위하여 오랫동안 이궁에 있었으므로 경비에 마음을 쓰게 되고 일이 보통 때와 달랐었다. 백관의 아뢰는 일을 많이는 친청하지 못하였으므로 중심이 혹은 의심을 낼까 마음에 염려되어 침식 간에도 잊기 어려웠다. 이제 수영의 공을 마쳤으매 정사를 들을 곳이 있게 되었으니 무릇 너희 백료들은 각각 너희들의 일을 삼가히 보고 종전대로 진주하여 지체하지 말라 어와 같이 동락하여 군신이 서로 격조함이 없기를 바라노라」고 하였다. 가을7월에 귀법사를 창건하였다. 겨울12월에 송의 연호를 행하였다. 송이 책명사 시찬을 보내왔는데 해상에서 풍파를 만나 익사한 자가 90인이나 되었고 시찬만이 홀로 면하였으므로 왕이 특히 그를 후하게 위로하였다.

갑자 15년 봄3월에 김책 등에게 급제를 사하고 천덕전에 거동하여 군신에게 향연할새 김책에게 명하여 연회에 나오게 하였다. 가을8월 임자에 대광 박수경이 졸하였다.

을축 16년 봄2월에 왕자 주에게 원복을 가하고 책립하여 왕태자 내사제군사 내의령 정윤(태자)을 삼고 군신을 장생전에서 향연하였다. 대승내봉령 왕로를 송에 보내어 방물을 바치니 제가 왕로에게 상서좌복사 식실봉 300호를 제수하고 아울러 관고를 사하였다. 가을7월 병오에 내의령 서필이 졸하였다.

병인 17년 최거업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정묘 18년

무신 19년 홍화 유암 삼귀등 사를 창건하였다. 승 혜거로 국사를 삼고, 문으로 왕사를 삼았다.

왕이 참소를 믿고 사람을 많이 죽였으므로 마음 속에 스스로 의심을 품고 죄악을 소멸하고자 널리 재회를 베풀었더니 무뢰배들이 중이라 사칭하여 배부르기를 구하고 구걸하는 자가 모여들었으며 혹은 병이 미두 시탄을 경외도로에 시여함이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방생소를 열치하고 부근 사원에 나아가 불경을 연습하며 도살을 금하니 내선도 또한 시 에서 사다가 올렸다.

기사 20년 겨울11월에 왕제 욱이 졸하였다.

경오 21년 귀법사에 행차하였다.

신미 22년 겨울12월 임인에 지진이 있었다.

임신 23년 봄2월에 지진이 있었다. 가을8월에 사하였다. 이 해에 양연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내의시랑 서희 등을 송에 보내어 방물을 바치니 제가 명하여 왕의 식읍을 가하고 추성순화수절보의공신의 호를 사하였으며 서희에게는 검교병부상서를 부사내봉경 최업에게는 검교사농경겸 어사대부를 판관광평시랑 강례에게는 검교소부소감을 녹사광평원외랑 유은에게는 검교상서금부랑중을 제수하고 아울러 관고를 사하였다.

계유 24년 봄2월에 백사유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갑술 25년 봄3월에 한 경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이 해에 서경거사 연가가 모반하다가 복주되었다(伏誅 형벌을 받아 죽음을 당하는 것 ). 승 혜거가 죽으매 탄문으로 국사를 삼았다.

을해 26년 여름5월에 왕이 불예하여 갑오에 정침(正寢) 에서 붕어하니 재위 26년이요 수는 51세였다.

 왕이 즉위 시초에는 신하를 예대하고 청단을 공명하게 하며 빈약자를 진휼하고 유아를 존중하며 주야로 힘써 치평을 바라더니 중세 이후로는 참소를 믿고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였으며 불법을 혹신하고 사치하여 절제함이 없었다. 시호를 대성이라 하고 묘호를 광종이라 하였다. 송악의 북쪽 기슭에 장사지내고, 능을 헌릉이라 하였다 목종 5년 선열을 가시하고 현종 5년 평세를 가하고 18년 숙헌을 가하고 문종 10년 의효를 가하고 고종 40년 강혜를 가하였다.

이제현의 찬에 「광종이 쌍기를 등용함은 현인을 씀에 유를 가리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쌍기가 과연 현인이었다면 어찌 임금을 능히 착한 길로 이끌지 못하고 참소를 믿고 형벌을 함부로 하지 않게 못하였을까 그 과거를 설하여 선비를 취한 것 같은 것은 광종의 풍아로서 문으로써 풍속을 교화하려던 뜻이 있었음을 볼 수 있으며 쌍기가 또한 그 뜻을 따라 그 미거를 성취하게 하였으니 보탬(보)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으되, 오직 부화의 문을 주창하여 후세에 큰 폐단을 남겼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