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고려

제3대 정종(定宗, 945~949 재위4년)

오늘의 쉼터 2009. 7. 30. 10:39

태조

혜종

정종

광종

경종

성종

목종

현종

덕종

정종

문종

순종

선종

헌종

숙종

예종

인종

의종

명종

신종

희종

강종

고종

원종

충열

충선

충숙

충혜

충목

충정

공민

우왕

창왕


 

 

제3대 정종(定宗, 945~949 재위4년)

자 의천(義天). 휘(諱) 요(堯). 시호 문명(文明). 태조의 둘째 아들. 어머니는 유긍달(劉兢達)의 딸 신명왕후(神明王后). 비(妃)는 문공왕후(文恭王后) 박씨(朴氏)와 문성왕후(文成王后) 박씨. 이복형 혜종(惠宗)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즉위 초에 외척으로 세도를 부린 왕규(王規)의 난을 평정하였고, 불교를 장려할 목적으로 946년 양곡 7만 석을 내어 여러 사원(寺院)에 불명경보(佛名經寶)·광학보(廣學寶)를 설치하였다. 947년 서경성(西京城:평양성)을 쌓게 하고 도참설(圖讖說)에 따라 그곳으로 천도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능은 개성의 안릉(安陵)이다.
                                                              
 <서문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정종 지덕장경정숙문명대왕의 휘는 요요, 자는 천의니, 태조의 제2자이며 모는 신명순성왕태후 유씨로 태조 6년 계미에 탄생하였다. 혜종 2년 9월 무신에 군신이 왕을 받들어 즉위하게 하였다. 기유에 왕규가 모역하다가 복주하였다.

병오 원년 봄정월에 왕이 장차 현릉에 배알하고자 재계를 하는 저녁에 어전 동산의 소나무 사이에서 왕의 이름을 부르면서 「요야 세민을 존휼하는 것이 인군의 요무이니라」고 함을 들었다. 이 해에 천고가 울리므로 사하였다. 왕이 의장을 갖추어 불사리를 모시고 도보로 10리쯤 되는 개국사에 가서 이를 봉안하고 또 곡 70,000석을 여러 큰 절에 바치고 각각 불명경보와 광학보를 두어 불법을 배우는 자를 근장 하였다.

정미 2년 봄에 서경에 왕성을 쌓았다.

무신 3년 가을9월에 동여진의 대광 소무개 등이 와 마 700필과 방물을 바치거늘 왕이 천덕전에 거동하여 마를 검열하여 3등으로 나누고 그 값을 평정하였는데 1등마는 은주자 하나와 면견 각 1필 2등마는 은발 하나와 면견 각 1필 3등마는 면견 각 1필로 하더니 갑자기 뇌우가 내려 물건다루는 사람을 벼락치고 또 어전의 서쪽 모퉁이를 벼락치매 왕이 크게 놀라거늘 근신들이 부축하여 중광전에 들게 하였는데 드디어 병환이 나니 사하였다. 비로소 후한(오대)의 연호를 행하였다.

기유 4년 봄정월 신해에 대광 왕식렴이 졸하였다. 3월 병신에 왕의 병환이 중하매 모제 소를 불러 내선하고 제석원에 이어하였다가 붕어하니 재위는 4년이요 수는 27세이었다. 왕은 성품이 불교를 좋아하고 두려움이 많았다 처음에 도참으로써 도읍을 서경에 옮길 것을 결의하고 정부를 징발하여 시중 권직으로 하여금 나아가 궁궐을 경영하게 하매 노역이 쉴 사이 없었으며 또 개경의 민호를 뽑아 이곳을 채우매(실) 군정이 옳게 여기지 않고 원망과 비방이 일어나더니 왕의 붕어소식에 역부들이 듣고 기뻐 날뛰었다. 시호를 문명이라 하고 묘호를 정종이라 하였다 성의 남쪽에 장사하니 능을 안릉이라고 하였다 목종 5년 장경을 가시하고 현종 5년 정숙을 가하였으며 18년 영인을 가하고 문종 10년 간경을 가하였으며 고종 40년 장원을 가하였다.

이제현의 찬에 「정종은 임금의 존귀한 몸으로써 도보로 10리나 되는 절에까지 가서 설리(사리)를 갈만 두고 또 70,000석의 곡식을 하루 동안에 제승에게 나누어 주고도 한번 하늘의 견책을 만나매 상심하여 병환이 났으니 이른바 군자는 복을 구하되 선조의 도를 어기지 않는다는 설을 또한 일찌기 들은 바 있었던가 병환이 이미 위중하여짐에 능히 종사(종묘와 사직)로써 친제에게 부탁하여 왕규같은 자로 하여금 그 간극을 넘겨다 보지 못하게 하였음은 갸륵하다고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