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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왕건(太祖王建, 918~943 재위25년)
본관 개성(開城). 자 약천(若天). 성 왕(王). 휘 건(建). 시호 신성(神聖). 금성태수(金城太守) 융(隆)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위숙왕후(威肅王后:追尊) 한씨(韓氏)이다. 895년(진성여왕 9) 아버지를 따라 궁예(弓裔)의 휘하에 들어가 898년(효공왕 2) 정기대감(精騎大監)이 되고, 900년 광주(廣州)·충주(忠州) 등을 공취, 그 공으로 아찬(阿粲)의 위계를 받았다. 903년에는 수군을 이끌고 전라도 지방을 공략, 궁예의 영토를 확장하여 알찬(閼粲)에 승진되고 계속하여 전라도·경상도 지방에서 견훤(甄萱)의 군사를 격파하는 한편 정벌한 지방의 구휼(救恤)에도 힘써 백성의 신망을 얻었으며, 913년 시중(侍中)이 되었다. 918년 세력이 강대해짐에 따라 난폭한 행동을 자행하는 궁예가 민심을 잃자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 등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어 즉위, 국호를 ‘고려’라 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라 정하였다. 이듬해 수도를 송악(松嶽)으로 옮기고 융화정책·북진정책·숭불정책을 건국이념으로 삼아 정책을 펴나갔다. 즉, 지방 호족들을 회유·무마하는 한편, 서경(西京)을 개척하고 여진을 공략했으며 불교를 호국신앙으로 삼아 각처에 절을 세웠다. 935년 투항해 온 신라 경순왕을 맞아 평화적으로 합병하고 이듬해에는 앞서 항복해 온 견훤과 함께 신검(神儉)의 후백제를 공격, 이를 멸망시켜 마침내 후삼국(後三國)을 통일하였다. 이 해 《정계(政誡)》 《계백료서(誡百寮書)》를 저술하여 정치의 귀감으로 삼게 하고 943년 후세의 왕들이 치국의 귀감으로 삼도록 〈훈요십조(訓要十條)〉를 유훈으로 남겼다. 서예에 뛰어났으며, 능은 현릉(顯陵:개성)이다. <서문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태조 응운원명광열대정예덕장효멸목신성대왕의 성은 왕씨요 휘는 건이며 자는 약천이다.
송악군인으로서 세조의 장자며 모는 위숙왕후 한씨이다. 당 건부 사년 정유 정월 병술에 송악의 남제에서 탄생하니 신기한 빛과 자색의 기운이 방안에 비치고 뜰에 가득하여 종일토록 서리어 있는 것이 마치 교룡과 같았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용안일각에 방이(턱)광상(이마)으로 기우와 경량이 크고 깊으며 말 소리가 우렁차고 커서 제세의 기량이 있었다. 그 때 신라의 정치가 쇠퇴하여 떼도둑이 다투어 일어나니 견훤은 반역하여 남주에 웅거하고 후백제라 칭하였으며 궁예는 고구려 땅에 웅거하여 철원(철원)에 도읍하고 국호를 태봉이라 하였다.
세조는 그때에 송악군의 사찬 으로 있었는데 건영삼년 병진에 군을 들어 궁예에게 귀복하니 궁예가 크게 기뻐하여 금성(금화) 태수를 삼았다.
세조가 달래(설)기를 [대왕께서 만약 조선 숙신 변한의 땅에 왕이 되시고자 하면 먼저 송악에 성을 쌓고 나의 장자를 성주로 삼는 것이 가장 좋을 것입니다]고 하니 궁예가 그말을 따라 태조로 하여금 발어참성을 쌓게 하고 인하여 성주를 삼으니 이 때 태조의 나이 이십세였다. 광화 원년 무오에 궁예가 도읍을 송악으로 옮겼는데 태조가 와서 뵈니 정기대감을 제수하였다.
삼년 경신에 궁예가 태조에게 명하여 광(광주) 충(충주) 청(청주)의 삼주와 당성 괴회 등의 군현을 치게 하니 이를 다 평정하였으므로 공으로써 아찬을 제수하였다.
천복 삼년계해 삼월에 수군을 거느리고 서해로부터 광주계에 이르러 금성군을 쳐서 이를 빼고 십여군현을 쳐서 뺏으니 인하여 금성을 고쳐서 신라라 하고 군사를 나누어서 이를 지키게 하고 돌아왔다.
이 해에 양주(경남 양산)의 거사 김인훈이 위급함을 고해 왔는지라 궁예가 태조로 하여금 가서 구원하게 하였다.
돌아오니 궁예가 변경의 일을 묻거늘 태조가 변방을 안정시키고 변계를 개척할 계책을 말하니 좌우가 다 주시하였으며 궁예도 또한 기특하게 여겨서 벼슬을 올려 알찬으로 삼았다.
천우 이년 을축에 궁예는 다시 철원(철원)에 도읍하였다. 삼년 병인에 궁예가 태조에게 명하여 정기장군 검식 등을 인솔하고 군사 삼천을 거느려 상주 사화진을 치게 하였으므로 견훤과 여러 번 싸워 이기니 궁예는 토지가 더욱 넓어지고 병마가 점점 강하여지매 신라를 병탄할 생각을 일으켜서 멸도라 부르고 신라로부터 내부한 사람을 다 죽였다.
양 개평 삼년 기사에 태조는 궁예가 날로 교만하고 잔학하여감을 보고 다시 곤(문지방)외에 뜻을 두게 되었는데 마침 궁예가 나주의 일을 근심하다가 드디어 태조로 하여금 가서 이를 진압하도록 하고 벼슬을 올려 한찬 해군대장군을 삼았다.
태조가 정성을 다하여 군사를 위무하고 위엄과 은혜를 아울러 베푸니 사졸들이 존경하고 애모하여 그용맹을 드날릴 생각을 하게 되어 적의 땅에서도 두려워하였다. 수군을 거느리고 광주 염해현에 이르러 견훤이 오월에 보내는 배를 나포하여 돌아오니 궁예가 매우 기뻐하여 흐뭇하게 포장하고 다시 태조로 하여금 전함을 정주(경기도풍덕)에서 정비하게 하고 알찬인 종희와 김신 등으로 부장을 삼으매 군사 이천오백을 거느리고 나아가 광주 진도군을 쳐서 이를 빼앗고 전진하여 고이도에 이르렀다.
성중 사람들이 군대의 위용이 엄정함을 바라보고 싸우지 않고 강복하였다. 나주의 포구에 이르자 견훤이 친히 군사를 인솔하고 전함을 배열하니 목포로부터 덕진포에 이르기까지 전후가 서로 잇대어서 수륙양면에 종횡하여 병세가 자못 성한지라 제장이 이를 근심하거늘 태조가 말하기를 [근심할 것 없다. 싸움에 이기는 것은 화합하는데 있는 것이요 수가 많은데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에 진군하여 급히 공격하니 적선이 얼마간 퇴거하거늘 바람을 타서 불을 지르니 불에 타고 물에 빠져 죽는 자가 태반이었다. 오백여급을 참호하니 견훤이 조그마한 배를 타고 도망쳐 가버렸다. 처음에 나주 관내의 여러 고을이 우리 편과 서로 막혀 있고 적병이 차단하였으므로 서로 응원할 수가 없어 자못 우의심을 품더니 이에 이르러 견훤의 정예한 군졸을 꺽으니 여러 사람의 마음이 다 안정되었다. 이에 삼한의 땅을 궁예가 태반이나 차지하게 되었다. 태조가 다시 전함을 수리하고 군량을 준비하여 나주에 머물러 지키고자 하니 김신 등은 공이 많은데 상이 없음으로써 자못 해체하였다.
태조가 말하기를 [삼가하여 게으르게 하지 말고 오직 힘을 다하여 두 마음을 가지지 않으면 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주상이 방자하고 잔학하여 무고한 사람을 많이 죽이고 참소하고 아첨하는 무리가 뜻을 얻게 되어 서로가 참소(침윤)하고 있다. 이러므로 내직에 있는 사람들은 제 각기 스스로 보전하지 못할 것이니 밖에서 정벌에 종사하며 힘을 다하여 왕사에 힘써서 일신을 보전하는 것만 같지 못할 것이다.]고 하니 제장이 이 말을 옳게 여겼다. 드디어 광주 서남계 심남현 포구에 이르러 첩자를 적경에 놓았더니, 그 때에 압해현의 적사 능창이 해도의 출신으로 수전을 잘하여 이름을 수달이라고 하였는데 도망친 자들을 불러 모으고 드디어 갈초도의 소적들과 결탁하여 태조가 이르기를 기다려 그를 맞아 해하고자 하였다.
태조가 제장에게 말하기를 [능창이 이미 내가 올 것을 알고 반드시 도적과 함께 변란을 꾀할 것이니 적도가 비록 소수라고 하드라도 만약에 힘을 어우르고 세력을 합하여서 앞을 막고 뒤를 끊으면 승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니 헤엄을 잘 치는 자 십여인으로 하여금 갑옷을 입고 창을 가지고 작은 배로 밤중에 갈초도 나뭇가에 나아가 주래하며 일을 꾸미는 자를 사로잡아서 그 꾀하는 일을 막아야 될 것이다.]고 하니 제장이 다 이말을 따랐다. 과연 조그마한 배 한 채를 잡아보니 바로 능창인지라 궁예에게 잡아 보내었더니 궁예가 크게 기뻐하여 능창의 얼굴에 침을 뱉고 말하기를 [해적들은 모두가 너를 추대하여 괴수라고 하였으나 이제 포로가 되었으니 어찌 나의 신묘한 계책이 아니겠는냐]하며 이에 여러 사람앞에서 목 베었다.
건화 삼년 계유에 태조가 자주 변공을 세우니 벼슬을 더욱 올려 파진찬 겸시중으로 삼아 불러들이고 수군의 임무는 다 부장 김신 등에게 위임하되 정토의 일은 반드시 태조에게 품의하여서 이를 행하게 하였다. 이에 태조의 지위가 백관중에서 가장 높게 되었다. 그러나 본래의 뜻이 아니었고 또 참소를 두려워 하여 그 지위에 있기를 즐거워 하지 않았다. 매양 공문에 출입하여 국사를 평장함에 오로지 어진 이를 좋아하고 악한 이를 미워 하며 매양 사람이 참소를 당하는 것을 보면 곧 모두 해명하여서 구하여 주었다. 청주(淸州)인 아지태는 본래 아첨하고 간사하더니 궁예가 참소함을 좋아하는 것을 보고 고을 사람 입전 관서등을 참소하매 유사는 이를 추국하여 수년동안 판결하지 못한 채 있더니 태조가 곧 진위를 가려 내어 지태가 죄에 복하거늘 여러 사람들이 마음에 속 시원하게 여겼다. 이로 말미암아 원문장교 종실훈현 지계유아의 무리가 바람에 쓸리고 그림자 처럼 따르지 아니함이 없었다.
태조가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 하여 다시 외방일 맡기를 구하였다. 사년 갑술에 궁예가 또 말하기를 [수군 장사가 미천하여 능히 적을 위압할 수 없다]하고 태조의 시중직을 해임하여 다시 수군을 거느리게 하니 정주포구(풍덕)에 나아가서 전함 칠십여척을 정비하여 병사 이천인을 싣고 나주에 이르니 백제(후백제)와 해상의 좀도둑들이 태조가 다시 온 것을 알고 모두가 두려워 하여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태조가 돌아와서 주즙의 유리함과 응변의 편선을 말하니 궁예가 기뻐하여 좌우에게 말하기를 [나의 제장 중에 누가 감히 겨눌만한 이가 있는가]라고 하였다. 이 때에 궁예가 반역죄를 터무니 없이 꾸며서 날마다 많은 사람들을 죽이니 장상이 해를 당하는 자가 십중팔구나 되었다 항상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미륵관심법을 체득하여 능히 부인의 음사함을 알아 낼수 가 있으니 만약에 나의 관심법을 범하는 자가 있으면 곧 준엄한 법을 행하리라]하고 드디어 석자나 되는 쇠 방망이를 만들어 죽이고 싶은 사람이 있을 때 곧 이것을 불에 달구어서 그 음부를 쑤시면 연기를 입과 코로 뿜으며 죽어 갔다. 이로 말미암아 사녀들이 무서워 떨며 원한과 분노가 날로 더하여 갔다.
하루는 급히 태조를 부르므로 관내에 들어가 보니 궁예가 바야흐로 주살한 사람들에게서 몰수한 금은보기와 상장의 기구를 검점하고 있다가 눈을 부릅뜨고 태조를 노려 보며 말하기를 [경은 어제 밤 여러 사람을 모아 놓고 반역을 모의함은 무엇 때문이냐]고 하니 태조는 안색이 자약하여 태연하게 웃으며 말하기를 [어찌 그런 일이 있었겠읍니까]고 하였다.
궁예가 말하기를 [경은 나를 속이지 말라. 나는 관심법으로써 아는 터이니 내가 장차 입정하여 관심하고 그 일을 다 말하리라]고 하며 이에 눈을 감고 뒷짐을 지고는 얼마 동안 하늘을 우러러 보고 있었다. 그 때에 장진 최응이 곁에 있다가 일부러 붓을 떨어뜨리며 뜰에 내려와서 이것을 주어 태조의 곁을 지나면서 귓속말로 말하기를 [불복하면 위태롭습니다.]고 하므로 태조가 이에 깨닫고 말하기를 [신이 진실로 반역을 꾀하였사오니 그 죄는 죽어 마땅하나이다.]라고 하니 궁예가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경은 가히 정직하다 하겠다]고 하면서 금은으로 장식한 안장과 고삐를 장하고 말하기를 [경은 다시는 나를 속이지 말라]고 하며 드디어 보장 강선힐 흑상 김재원 등으로 태조의 부장을 삼아 배 백여척을 더 만들게 하니 큰 배 십수척은 사방이 각 십육보이며 위에 망루를 만들고 병마가 달릴 수 있도록 하였다.
군사 삼천여인을 거느리고 군양을 싣고 나주로 갔다. 이 해에 남방에서는 기근이 들어 좀도둑이 봉기하며 술졸이 모두가 반숙을 먹고 있더니 태조가 마음껏 구휼하매 모두 이에 힘 입어 완전히 살게 되었다. 처음 태조의 나이 삼십에 꿈을 꾸었는데 구층금탑이 바다 가운데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스스로 그 위에 올라 갔었다.
정명 사년 삼월에 당 나라 상객 왕창근이 문득 시중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니 용모가 괴위하고 수염과 머리가 휜(호백)데 머리에는 낡은 관을 쓰고 거사의 옷차림을 하고 왼 손에는 바리(발) 세개를 가졌으며 오른 손에는 사방 한 자나 되는 고경 하나를 들고 있었는데 창근에게 말하기를 [내 거울을 사겠느냐]고 하므로 창근이 쌀 두 말로 거울을 샀다. 거울 주인은 그 쌀을 가지고 길가에 걸식하는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사라져 감이 회오리 바람처럼 빨랐다. 창근은 그 거울을 담벼락에 걸어 놓으니 햇빛이 가로 비쳐서 은은히 읽을 수 있는 가는 글자가 박혀 있었다. 그 글에 이르기를 [삼수중 사유 (나의 파자로 신라를 가리킨 것인듯)하에 상제가 아들을 진(한) 마(한)에 하강시켜서 먼저 계(계림 즉 신라)를 잡고 뒤에 압(압록강)을 칠 것이니 이것은 운이 차(만) 삼갑(삼한의 뜻인듯)을 하나(통일)로 함을 이른 것이다.
가만히 하늘에 올라가 밝게 땅을 다스릴 것이니 자년을 만나 대사를 일으킬 것이다. 종적을 흐리고 성명을 드러내지 아니하니 혼돈하여 누가 진(원문의 신은 진의 오각인듯)과 성을 알수 있으랴 법뢰를 떨치고 신전을 휘두를 것이다. 사년 중에 두 용이 나타나 한 용은 몸을 청목 중에 감추고 한 용은 흑금 동에 나타낼 것이다. 지혜있는 자는 볼 것이고 어리석은 자는 보지 못할 것이다. 구름을 일으키고 비를 내리게 하며 사람으로 더불어 갈(정)것이니 혹은 성함을 보이고 혹은 쇠함을 보여서 성쇠는 악한 진재를 멸하는 것이다. 이 한 용의 아들은 삼 사인데 대를 교체하여 육갑자를 상승할 것이다. 이 사유는 정녕코 축년에 멸할 것이며 바다를 건너 와서 항복함은 모름지기 유년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이 글이 만약 명왕에게 발견되면 국태인안하고 제업이 영창할 것이다.
나의 적은 것(기)은 무릇 일백사십칠자이다.]라고 하였다. 창근이 처음에는 글자가 있는 줄을 알지 못하였다가 이를 보고는 예사로운 것이 아니라 하고 궁예에게 바쳤다. 궁예가 창근으로 하여금 그 사람을 물색하여 찾아 보도록 하였는데 그 달이 지나도록 끝내 찾지 못하고 오직 동주 발삽사의 치성광여래상 앞에 있는 전성고상이 그 모양과 아뢰었더니 궁예가 크게 놀라면서 문인 송함홍 백탁 허원 등으로 하여금 이를 해독하게 하였다. 함홍 등이 말하기를 [삼수중 사유하에 상제가 아들을 진마에 나리셨다.]고함은 진한과 마한이오.
사년 중에 두 용이 나타나 한 용은 청목 중에 몸을 감추고 한 용은 흑김 동에 몸을 나타낸다 함은 청목은 송이라 이는 송악군인으로 용자 이름을 가진 사람의 자손이 임금이 될 것이라는 것이니 왕시중은 왕후의 상을 지닌지라 아마도 이 분을 두고 일은 것인가 보다. 흑김은 철인바 지금 도읍한 철원(철원)을 이름이니 지금의 임금이 처음에는 이곳에서 성하였다가 아마 다음에는 이곳에서 멸할 것인가 보다.
먼저 계를 잡고 뒤에는 압을 친다 함은 왕시중이 나라를 얻은 뒤에 먼저 계림(신라)을 얻고 뒤에 압록강을 수복한다는 뜻이라]하며 세 사람이 서로 말하기를 [왕이 시기하여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니 만약에 사실대로 아뢰면 왕시중이 반드시 해를 당하게 될 것이며 우리들도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하고 이에 거짓말로 아뢰었다.
육월 을묘에 이르러 기장 홍유 배현경 복지겸 등이 몰래 모의하고 야반에 태조의 집에 가서 다 같이 추대할 뜻을 말하니 태조가 굳게 거절하여 허락하지 않는지라 부인 유씨가 손수 갑옷을 들어 태조에게 입히고 제장이 부축하여 밖으로 나와서 사람을 시켜 달려가며 소리쳐 [왕공이 이미 의기를 들었다.]라고 하니 이에 분주히 달려오는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며 먼저 궁문에 이르러 복을 치며 떠들석하게 기다리는 자가 또한 만여명이나 되었다. 궁예가 이를 듣고 놀래어 말하기를 [왕공이 차지하였으니 나의 일은 이미 끝났구나 하며 이에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미복으로 북문을 빠져나가 도망가니 내인이 궁을 청소하고 신왕을 맞이하였다. 궁예는 암곡으로 도망하여 이틀 밤을 머물렀(신숙)는데 허기가 심하여 보리 이삭을 몰래 끊어 먹다가 뒤이어 부양(강원도 평강)민의 살해한 바가 되었다.
인술 원년 하 육월 병진에 포정전에서 즉위하여 국호를 고려라 하고 개원하여 천수라고 하였다. 정사에 조하기를 [전 임금은 사군이 흙무너지듯이 붕괴할 때 구적을 제거하고 점차로 봉강(경계)을 개척하더니 해내(국내)를 통합하기도 전에 갑자기 혹독한 폭정으로 민중을 통어하며 간회(간사)로써 지도를 삼고 위협과 모욕으로 요술을 삼아 요역이 번거롭고 적세가 과중하여 인호는 손모되고 국토는 황폐하여졌는데 오히려 궁실만은 굉장하게 지으며 제도를 존수하지 않고 노역은 끊일 사이가 없으니 원망과 비난이 드디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에 사사로이 존호를 칭하며 처를 죽이고 자식을 죽이니 천지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요. 신과 인이 함께 원망하게 되어 왕업의 터전을 떨어뜨렸으니 경계하지 않을소냐. 짐은 제공들의 추대하는 마음에 자뢰하여 왕위에 올랐으니 풍속을 고쳐서 다 같이 새롭게 할 것이다. 마땅히 개철의 규를 준하고 깊이 벌가의 칙을 거울 삼아 군신은 어수의 기쁨을 같이 하고 나라 안은 안청의 경사로 화합할 것이니 내외의 모든 사람들은 모두 짐의 뜻을 잘 알아둘 지어다.]라고 하니 군신이 배사하고 말하기를 [신등이 전 임금의 세상을 만나 어질고 착한 사람은 독해되고 죄 없는 사람은 요학됨에 늙은이나 어린이나 할 것 없이 울부짖어 원망을 품지 아니함이 없더니 이제 다행이 목숨을 보전하여 성스럽고 밝으신 임금을 만나게 되었으니 감히 힘을 다하여 보답하기를 도모하지 않으리까]라고 하였다.
무오에 왕이 한찬 총일에게 말하기를 [전 임금이 참소를 믿어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여 경의 고향 청주는 땅이 기름지고 사람들은 호걸이 많음으로 변란을 일으킬 수가 두려워하여 장차 그들을 다 죽여 버리려 하고 이에 군인 윤전 애견 등 팔십여인을 불러다가 모두 죄 없이 칼을 씌워 끌려 가는 도중에 있으니 경은 빨리 가서 전리에 놓아 보내도록 하라]고 하였다. 경신에 마군장군 환선길이 모역하다가 복주하였다. 신유에 조하기를 [관을 설하고 직을 분함에는 유능한 사람을 임명하는 길이 있고 풍속을 이롭게 하고 백성을 평안하게 하는데는 현명한 사람을 고르는 일이 급한 것이다.
진실로 관직에 소홀함이 없으면 어찌 정사가 거칠어 짐이 있으랴. 짐이 외람되이 경명을 받아 비도를 밝게 운용함에 있어 위에 임함이 마음 편하기 어려움을 돌이켜 보고 용렬하고 부실한 벼슬아치가 두려움직한 것임이 생각켜진다 오직 사람을 알아봄이 밝지 못하고 관을 살핌이 살수가 많아 아진 사람을 빠뜨렸다는 탄식을 일어나게 하고 깊이 선비 얻는 사리에 어긋날가 염려하여 자나 깨나 걱정되는 것은 오직 이것 뿐이다.
내외의 관원들이 모두가 그 직책에 충실하면 다만 이 때만의 다스림을 이룩할 뿐 아니라 족히 후대의 칭찬을 남길 수 있을 것이다. 마땅히 열벽(제후)을 등용(등용)하고 군공을 역시하여 정선에 힘써서 모두 고루게 할 것이니 중외가 다 짐의 뜻을 알지어다]라 하고 드디어 한찬 김행도로 광평시중을 삼고 한찬 검강으로 내봉영을 삼고 한찬 임명필로 순군부령을 삼고 파진찬 임의로 병부령을 삼고 소판 진원으로 창부령을 삼고 한찬 염장으로 의형대령을 삼고 한찬 귀평으로 도항사령을 삼고 소판 한찬 손형으로 물장성령을 삼고 소판 진경으로 내천부령을 삼고 파진찬 진정으로 진각성령을 삼으니 이러한 사람들은 모두가 품성이 단정하고 일을 처리함이 공평하고 성실하여 창업의 시초부터 천명 받은 임금을 보좌하는 공훈을 다한 사람들이였다.
알찬 임적여로 광평시랑을 삼고 전 수순군부경 능준과 창부경 권식으로 함께 내봉경을 삼고 알찬 김인과 영준으로 함께 병부경을 삼고 알찬 최문과 견술로 함께 창부경을 삼고 일길찬 박인원과 김신규와 함께 백서성경을 삼고 임상원으로 도항사경을 삼고 요인휘와 향남으로 함께 물장경을 삼고 능혜와 의필로 함께 내군경을 삼으니 이들은 다 일찍부터 사무에 숙달하고 청렴근신하며 가히 봉공에 태만함이 없고 결단을 민첩하게 하여 진실로 여러 사람의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고 일컫을 수가 있었다. 전 광평랑중 강윤형으로 내봉감을 삼고 전 순군부랑중 한찬 신일 임식으로 함께 광평랑중을 삼고 전 광평사 국현으로 원외랑을 삼고 전 광평사 예언으로 내봉이결을 삼고 내봉사 곡긍회로 평찰을 삼고 전 내봉사 유길권으로 순군랑중을 삼았으며 그 밖의 사성에는 각각 낭사를 두어 관원의 수를 갖추어서 하나도 빠진 데가 없게 하였는데 대개 개국의 시초에 현량한 인재를 잘 골라 뽑아서 모든 일을 고루게 하였던 것이다. 임술에 한찬 박질영으로 시중을 삼았다. 소판 종품은 젊어서 중이 되어 힘써 간사한 짓을 행하였고 내군장군 견부(도끼)는 어려서 머리를 깍이우고 목에 칼을 쓰고 있던 죄인이었는데 말을 교묘하게 하고 아첨하여 용납됨을 얻어 모두 궁예에게 총행을 받게 되매 즐겨 참소를 행하여 어질고 착한 이들을 많이 무함하였으므로 이를 주살하였다. 계해에 은사 박유가 와서 왕을 뵈업거늘 관대를 장하였다. 을축에 조하기를 [나라를 다스림에는 마땅히 절약하고 검소함을 힘써야 할 것이니 백성이 부하고 창고가 차 있으면 비록 수재나 한재나 기근이 있더라도 능히 근심이 되지 않을 것이다. 모든 내장과 동궁의 식읍에 축적되어 있는 양곡은 세월이 오래 되었어므로 반드시 많이 썩어 손상되었을 것이니 내봉랑중 능범으로 심곡사를 삼노라]고 하였다. 내봉원외랑 윤형으로 내봉랑중을 삼고 내봉사 이긍으로 내봉원외를 삼았다. 무진에 백서성공목 직성으로 백서랑중을 삼고 순군랑중 민강으로 내군장군을 삼았다.
조하기를 [짐이 듣건대 기회를 타서 제도를 고침에는 그릇된 것을 바로잡음에 상밀하여야 하며 풍속을 인도하고 백성을 가르침에는 호령을 반드시 삼가하여야 한다고 하였거늘 전 임금이 신라의 품계관직과 군읍의 이름을 모두 비루하다고 하여 신제로 고쳐서 이를 시행한지 누년이 되어도 백성들이 익혀 알지 못하여서 혹란하게 되었으니 이제 모두 신라의 제도를 따를 것이로되 그 명의를 알기 쉬운 것만은 신제를 따르도록 하라]고 하였다. 기사에 마군대장군 이흔암이 모반하므로 엽시하였다.
추 칠월 임신에 광평랑 능식으로 순군랑중을 삼았다. 계사에 광평시랑 순필은 병으로 인하여 면직하고 병부경 열평으로 이를 대신하였다. 병신에 청주영군장군 견김이 와서 알견하였다. 전 병부경 직예로 태평시랑을 삼았다.
팔월 기유에 군신에게 논시하여 말하기를 [짐은 제도의 도둑들이 짐의 처음 즉위함을 듣고 혹시 변환을 기도할가 염려하여 단사를 나누어 보내어 폐백을 후하게 하고 언사를 낮추어 써 혜화의 뜻을 보였더니 귀부하는 자가 과연 많았으나 홀로 견훤만은 교빙하려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경술에 삭방의 골암성사 윤선이 내귀하였다. 신해에 조하기를 [전 임금이 백성 보기를 초개와 같이 하고 오직 사욕만을 쫓던 바 이에 참서(여언록)를 믿어 갑자기 송악을 버리고 부양에 환거하여 궁실을 영입하니 백성은 농공(상공)에 피곤하고 삼시(춘하추)는 농업에 때를 놓쳤으며 더욱이 기근이 연달아 이르고 질역(유행병)이 뒤 이어 일어남으로써 집을 버리고 이산하여 노상에서 굶어 죽는 자가 서로 잇닿았으며 한 필의 세포가 쌀 오승 값이라. 이리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몸을 팔고 자식을 팔아 남의 노비가 되게 하였으니 짐이 매우 민망하게 생각하는 터이다 그 소재관원으로 하여금 자세하게 조사하여서 아뢰도록 하라]고 하니 이에 일천여구를 얻으매 내고의 포백으로써 보상하여 돌려 보냈다. 또 조하기를 [인신으로서 천시를 도우는 기략을 운용하고 세상을 뒤덮는 공훈을 세운 자에게는 모토를 나누어 주고 또한 질록과 높은 관급으로써 포상함은 이것이 백대의 상전이오 천대의 굉규인 것이다. 짐은 미천한 데서 태어나서 재조와 식견이 범용하고 하열하나 진실로 군망(중망)에 힘 입어서 왕위(홍기)에 올랐으니 그 포악한 임금을 폐하던 때에 당하여 충신의 절개를 다한 자에게는 마땅히 포상을 시행하여서 훈노를 권장할 것이다. 홍유 배현경 신숭겸 복지겸으로 제일등을 삼아 김은기와 금수기피욕 능나 포백을 차등 있게 주고 견권 능식 권신 염상 김락 연주 마난을 제이등으로 하여 김은기와 금수기피욕 능나 포백을 차등있게 주며 제삼등인 이천여인에게는 각각 능백과 곡미를 차등있게 주라. 짐이 공들과 함께 생민을 구하고자 하였으나 능히 끝내 신절을 지키지 못하고 이것으로 공을 삼게 되니 어찌 덕을 부끄러워 함이 없겠는가. 그러나 공이 있는데 포상하지 않으면 장래를 권장할 수 없는지라 이러므로 오늘의 행실이 있게 된 것이니 공들은 분명히 짐의 뜻을 알지어다]고 하였다. 견훤이 일길찬 민합을 보내와서 즉위를 하하거늘 광평시랑 한신일 등에게 명하여 감미현(경기도안성군동십리?)에서 영접하게 하고 민합이 도착하매 예를 후하게 하여 그를 보냈다. 갑인에 병부경 훤식으로 내봉경을 삼았다. 계해에 웅주(공주) 운주(홍성) 등의 십여 주현이 배반하여 백제에 귀부하였으므로 전 시중 김행도로 동남도초토사지아주제군사를 삼았다. 병인에 창부랑중 유문율로 광평랑중을 삼았다.
구월 을유에 순군이 임춘길 등이 모반하다가 복주하였다. 경인에 순군랑중 현율로 병부랑중을 삼았다. 계사에 전 시중 구진으로 나주도대행대시중을 삼았는데 구진이 전 임금 때 오랫동안 노고하였으므로 써 가기를 즐거하지 않으니 왕이 불쾌하게 여겨 유권설에게 말하기를 예전에 내가 모든 험난한 일을 겪으면서도 일찌기 수고로왔다는 말을 아니 하였던 것은 참으로 준엄한 왕위를 두려워 함이러니 지금 구진이 굳이 사양하여 가지 않으니 옳다고 하겠는가라고 하니까 권설이 대답하기를 [상으로써 선을 권장하고 벌로써 악을 징계하는 것이오니 마땅히 엄한 형벌을 가하여서 여러 신하를 경계하소서]라고 하니 왕이 이를 옳게 여기시는지라 구진이 두려워 하여 죄를 사하고 드디어 떠나갔다. 갑오에 상주의 적사 아자개가 사인을 보내서 내부하거늘 왕이 의식을 갖추어 맞이하도록 명하니 구정에서 의식을 연습하고자 문무관이 다 반열에 나아갔는데 광평랑중 유문율이 직성관 주선할(길+역)과 반열을 다투는지라 왕이 말씀하시기를 [겸양은 예의 으뜸이요 공경은 덕의 근본이라. 지금 손님을 예로써 맞이하여 장차 그 순성함을 보려는 것인데 문율과 선할이 반열을 다투고 있으니 어찌 공경하고 근신한 자라 하겠는가 마땅히 함께 변경에 귀양보내어서 그 죄상을 드러낼 것이다.]하고 하여 순군랑중 경훈으로 문율을 대신하여 광평랑중을 삼았다. 을미에 전 내봉감 김록영과 능혜로 써 함께 내군경을 삼았다. 병신에 군신에게 논시하기를 [평양고도가 황폐한지 비록 오래 되었으나 터는 아직도 남아 있어 가시밭이 우거져 축인들이 그 사이에서 유렵을 하다가 인하여 변읍을 침략하니 해됨이 큰지라 마땅히 백성을 옮겨 이 곳에 채워 심병을 굳게 하여 백세의 이가 되게 할 것이다.]라 하고 드디어 대도호로 삼아 당제 식렴과 광평시랑 열평을 보내어 이를 지키게 하였다. 정유에 진각성경 유척량이 혁명의 때를 당하여 여러 관료가 창졸히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치는데 홀로 본성을 이탈하지 아니 하여 맡아 보던 창고에 잃어진 것이 없었으므로 특히 광평시랑을 제수하였다.
동 십월 경신에 수의형대경 능율로 광평시랑을 삼고 광평시랑 직예로 내시서기를 삼았다. 신유에 청주의 장사 파진찬 진선이 그의 아우 선장과 함께 모반하다가 복주하였다.
십일월에 비로소 팔관회를 설하고 의봉루에 나아가서 관람하였는데 해마다 이렇게 하는 것을 상례로 삼았다.
묘기 이년춘정월에 송악의 남쪽에 도읍을 정하여 궁궐을 짓고 삼성 육상서를 두고 구사를 설관하고 시전을 세우고 방리를 갈라 오부를 나누고 육위를 두었다.
삼월에 법왕사와 왕륜사 등 십사를 도성안에 창건하고 양경(왕경과 서경)의 탑묘와 초상의 폐결한 것을 아울러 수리하게 하였다. 신사에 삼대를 추익하여 증조고를 시조 원덕대왕이라 하고 비를 정화왕후라고 하였으며 조고를 의조 경강대왕이라 하고 비를 원창왕후라고 하였으며 고를 세조 위무대왕이라 하고 비를 위숙왕후라고 하였다.
추 팔월 계묘에 청주가 순역을 분명히 하지 못하고 와언이 자주 일어나므로 친히 행차하여 위무하고 드디어 명하여 이곳에 성을 쌓게 하였다.
구월 계말에 오월국의 문사 추언규가 내투하였다.
동 십월에 평양에 성을 쌓았다.
진경 삼년 춘 정월에 신라가 비로소 사신을 보내어 내빙하였다. 강주(진주)장군 윤웅이 그의 아들 일강을 보내어 인질을 삼으매 일강에게 아찬을 제수하고 경 행훈의 누이동생을 아내로 삼아주었으며 낭중 춘양을 강주에 보내어 귀부함을 위론하였다.
추 구월 신축에 견훤이 아찬 공달을 보내어 공작선과 지이산의 죽전을 바쳤다.
동 십월에 견훤이 신라를 침공하여 대량(섬천) 구사(초계)의 이군을 빼았고 진예군에 이르니 신라가 아찬 김율을 보내와 구원을 청하므로 왕이 군사를 보내어 구원하니 견훤이 이것을 듣고 물러 갔는데 이 때부터 우리와 틈이 생겼다.
사신 사년 춘 이월 갑자에 흑수추장 고자라가 백칠십인을 거느리고 내투하였다. 임신에 달고견 백칠십일인이 신라를 침범하였는데 길이 등주를 경유하여 가게 되었으므로 장군 견권이 격격하여 그들을 크게 패북시켜 한 필의 말도 되돌아간 것이 없었으므로 명하여 공적 있는 사람에게 곡식 오십석씩을 사하게 하였는데 신라왕이 이를 듣고 기뻐하여 사신을 보내와 사례하였다.
하 사월 을유에 흑수의 아어한이 이백인을 거느리고 내투하였다.
추 구월 기해에 낭중 찬행을 보내어 변군을 순시하고 백성을 존무하게 하였다.
동 십월 정묘에 대흥사를 오관산에 창건하고 승 이언을 맞이하여 두고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임신에 서경에 행차하였다.
십이월 신유에 아들 무를 책봉하여 정윤을 삼았는데 정윤은 곧 태자이다. 백제인 궁창과 명권 등이 내투하거늘 전택을 장하였다.
오임 오년 춘 이월에 계단에서 낙타 및 전(모직물)을 보내 왔다.
하 사월에 일월사를 궁성 서북쪽에 창건하였다. 육월 정사에 하지현(경북안동 군풍산면)의 장군 원봉이 내투하였다.
추 칠월 무술에 명주(강릉)장군 순식이 아들을 보내와 항부하였다.
동 십일월 신사에 진보(경북청송 군진보면) 성주 홍술이 사신을 보내와 강복을 청하므로 원윤 왕유와 경 함필 등을 옮겨 써 서경을 채웠(실)다. 서경에 행차하여 새로이 궁부 원이를 두고 비로소 재성(내성)을 쌓았다. 친히 아선성(평남함종 <강서>)의 백성 살곳(민거)을 정하였다.
계미 육년 춘 삼월 갑신에 하지현 장군 원봉으로 원윤을 삼았다. 신해에 명지성 장군 성달이 그의 아우 이달 단림과 함께 내부하였다.
하 육월 계미에 복부경 윤질이 양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 오백 나한의 화상을 바치매 명하여 해주 숭산사에 모셔 두게 하였다. 계사에 오월국의 문왕 박암이 내투하였다.
추 팔월 임신에 벽진군 장군 양문이 그의 생 규환을 보내와 항복하니 규환을 원윤에 제수하였다.
동 십일월 무신에 진보성주 홍술이 그의 아들 왕립을 보내어 갑옷 서른 벌을 바치니 왕립을 원윤에 제수하였다.
갑신 칠년에 견훤이 아들 수미강과 양검 등을 보내어 조물군을 공격하거늘 장군 애선과 왕충에게 명하여 이를 구원하게 하였는데 애선은 전사하였으나 군인이 굳게 지키니 수미강 등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팔월에 견훤이 사자를 보내와 절영도(부산시 영도구)의 총(옥색)마 한 필을 바쳤다.
구월에 신라왕 승영이 훙하고 그 아우 위응이 즉위하여 상을 내고하니 왕이 거애하고 재를 설하여 명복을 빌고 사신을 보내어 조문하였다. 이 해에 외제석원과 구요당과 신중원을 창건하였다.
을유 팔년 춘 삼월에 서경에 행차하였다.
추 구월 병신에 발해장군 신덕 등 오백인이 내투하였다. 경자에 발해의 예부경 대화조 균노와 사정 대원균 공부경 대복모 좌우위장군 대심리 등이 민일백호를 거느리고 내부하였다.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속말부)인 바 당 무후 때에 고구려인 대조영이 달아나 요동을 보유하니 예종이 발해군왕으로 봉하였으므로 스스로 발해국이라 칭하고 부여 숙신 등 십여국을 아울러 다 차지하였다. 문자 예악 과 관부제도가 있었는데 오경 십오부 육십이주에 지방이 오천여리요 인중이 수십만이다. 아국의 경계와 인접하여 있고 계란과는 대대로 원수였다. 이에 이르러 계란주가 좌우의 군신들에게 이르기를 [대대의 원수를 갚지 못하였으니 어찌 평안히 살수 있으랴]라 하고 이에 대거하여 발해의 대인선을 공벌하여 홀한성(길림성 돈화현 부근 발해도성 중경현덕부)을 포위하였다. 대인선이 싸움에 패하여 항복을 청하니 드디어 발해를 멸하였다. 이에 그 나라 사람들이 망명하여 오는 자가 잇달아 있었다. 갑인에 매조성 장군 능현이 사인을 보내어 항복을 청하였다.
동 십월 기사에 고울부(경상북도 영천) 장군 능문이 사졸을 거느리고 내투하였는데 그 성이 신라왕도에 근접하고 있으므로 노고로 위로하여 돌려 보내고 다만 휘하의 시랑 배근과 대감 명재 상술 궁식 등만을 머물러 두었다. 정서대장군 유검필을 보내어 백제를 공격하였다. 을해에 왕이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견훤과 조물군에서 싸왔는데 검필이 군사를 이끌고 와서 회합하니 견훤이 두려워 하여 화를 청하고 생 진호를 인질로 삼으니 왕도 또한 당제 원윤 왕신으로써 인질로 교환하고 견훤이 십년의 연장자이므로 상부라 칭하였다. 신라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내어 말하기를 [견훤은 속임수가 많으니 화친하여서는 안 될것이다.]라고 하니 왕이 이를 옳게 여겼다.
십일월 기축에 탐라에서 방물을 바쳤다.
십이월 무자에 발해의 좌수위소장 모두간과 검교 개국남 박어 등이 민 십천호를 거느리고 내부하였다.
병술 구년 하 사월 경진에 견훤의 질자 진호가 병사하매 시랑 익선을 보내어 그 상을 호송하였더니 견훤은 [우리가 그를 죽였다.]고 하면서 왕신을 죽이고 웅진에 진군하였다. 왕이 제성에 명하여 [성벽을 굳게 지키고 나와 싸우지 말라]고 하였다. 신라왕이 사신을 보내어 말하기를 [견훤이 맹약을 어기고 거병하였으니 하늘이 반드시 도우지 않을 것이요 만약에 대왕께서 한 번 전고를 울리는 위세를 떨치기만 하면 견훤은 반드시 절로 패북할 것입니다.]라고 하니 왕이 사자에게 이르기를 [내가 견훤을 두려워 하는 것이 아니요 악이 차서 스스로 쓰러질 것을 기다릴 뿐이라]고 하였다. 견훤은 참서에 [절영도의 명마가 이르면 백제가 망하리라]고 하였다는 말을 듣고 이에 이르러 후회하고 사람을 시켜 그 말을 돌려 줄 것을 청하니 왕이 웃으며 이를 허락하였다.
동 십이월 계미에 서경에 행차하여 친히 재제를 지내고 주진를 순력하였다. 이 해에 장빈을 당(후당)에 보냈다.
정해 십년 춘 정월 을묘에 친히 백제의 용주를 쳐서 항복시켰다. 이 때에 견훤이 맹약을 어기고 자주 거병하여 변경을 침략하였으나 왕이 오랫동안 꾹 참아 오더니 견훤의 악함이 더욱 쌓여서 자못 강하게 병탄하려 하므로 왕이 그를 공벌하매 신라왕이 출병하여 원조하였다. 을축에 견훤이 왕신의 상을 보내 오매 왕신의 아우 육을 보내어 이를 맞아오게 하였다.
삼월 갑인에 발해의 공부경 오흥 등 오십인과 승 재웅 등 육십인이 내투하였다. 신유에 왕이 운주에 들어가 그 성주 긍준을 성하에서 패북시키고 갑자에 근품성(경북 문경군 산북면근품리)을 쳐 함락시켰다.
하 사월 임술에 해군장군 영창과 능식 등을 보내어 주사를 이끌고 나아가 강주를 치게 하니 전이산 노포 평서산 돌산 등 사향(다 남해군에 있음)을 항복시키고 인물을 노획하여 돌아왔다. 을축에 왕이 웅주를 치다가 이기지 못하였다.
추 칠월 무오에 원보 재충 김락 등을 보내어 대량성(합천)을 공파하고 장군 추허조 등 삼십여인을 포로로 하였다.
팔월 병술에 왕이 강주 고사갈이성을 순행하매 성주 흥달이 귀순하니 이에 백제의 여러 성주가 모두 항부하였다.
구월에 견훤이 근품성을 공격하여 불사르고 나아가 신라의 고울부를 습격하여 교외에 까지 핍박하니 신라왕이 연식을 보내어 급함을 고하는지라 왕이 시중 공훤과 대상 손행과 정조 연주 등에게 말하기를 [신라는 우리와 더불어 동호한지 이미 오래인데 지금 급박하니 구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고 공훤은 갑자기 신라도성에 들어갔다. 때에 신라왕은 비빈 종숙과 더불어 포석정에 출유하여 주연을 베풀고 오락하다가 갑자기 적병이 왔다는 말을 듣고 창졸간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왕과 부인은 달아나 성남의 이궁에 숨고 종신 영관 궁녀들은 모두 잡혔다. 견훤은 군사를 풀어 놓아 크게 약탈하고 왕궁에 들어가 거처하면서 좌우로 하여금 왕을 찾아내게 하여 군중에 두고 핍박하여 자진토록 하고 강제로 왕비를 능욕하였으며 그 부하를 풀어놓아 빈첩들을 난행하게 하고 왕의 표제인 김부를 세워 왕으로 삼았다. 왕제 효렴과 재신 영경 등을 포로로 하고 자녀들과 백공과 병장과 진보를 모조리 약취하여 돌아갔다. 왕이 이 말을 듣고 대노하여 사신을 보내어 조제하고 친히 정예 오천을 거느리고 견훤을 공산동수(대구북방,달성군 공산면)에 맞이하여 크게 싸왔으나 불리하여 견훤의 군사가 왕을 포위함이 필히 급한지라 대장 신숭겸과 김락이 역전하다가 전사하고 제군이 패북하니 왕은 겨우 단신으로 모면하였다. 견훤은 승승하여 대목군(경북약목군)을 공취하고 전야에 노적한 곡식을 다 불살아 버렸다.
동 십월에 견훤이 장수를 보내어 벽진군을 침략하고 대목 소목 이군의 농작물을 베어버렸다.
십이월에 벽진군의 도곡을 불살으니 정조 색상이 싸우다가 죽었다.
십이월에 견훤이 왕에게 글월을 보내어 이르기를 [전 번에 신라국상 김웅렴 등이 장차 족하를 불러 서울에 오게 하여 서로 호응하는(구응@성)응세를 취하고자 하니 이것은 메추리가 새매의 날개를 헤치려 함(시욕안(메추리)피준익)이라 반드시 생영으로 하여금 도탄에 빠지게 하고 사직을 구허가 되게 할 것이니 이러므로 먼저 손을 써서(선저조편) 홀로 무력을 휘둘러(독휘한월) 백료에게 맹서하기를 밝은 날과 같이 하였으며 육부에게 효론하기를 의풍으로써 하였거늘 뜻밖에 간신들이 도망가고 임금이 흉변을 당하였으므로 드디어 경명왕의 표제요 헌강왕의 외손을 받들어 권해서 왕위에 나아가게 하여 이에서 위태로운 나라를 다시 일으키고 없어진 임금을 다시 있게 하였는데 족하는 충고함을 자세히 살피지 않고 한갖 유언만을 귀담아 들어 갖은 수단으로 넘겨다 보고 여러모로 침요하여 왔으나 아직도 나의 말 머리를 보지 못하였고 나의 소 털 하나 뽑아보지 못하였도다. 첫 겨울에는 도두 색상이 성산의 진하에서 손을 묶였고 월내에는 좌상 김락이 미리사 앞에서 해골을 걷우지 못하였다. 이리하여 살획이 많고 추금도 적지 아니하니 강약이 이와 같을진대 승부는 가히 알수 있는 일이다. 기약하는 바는 평양의 누상에 활을 걸고 패강(대동강)물을 말에게 마시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전월 칠월에 오월국사 반상서가 와서 왕의 조지를 전하기를 [경과 고려는 오랫동안 사이좋게 지내어 함께 연맹을 맺고 오다가 요사이 양편 질자가 다 죽음으로 해서 드디어 화친의 구호를 잃고 서로가 국경을 침범하여 간과를 쉬지 않음을 알았노라. 지금 전사를 보내어 경의 본국에 가게 하노니 또 고려에도 이첩하여 마땅히 서로 친화하여 길이 평화를 누리도록 하라.]고 하였으므로 나는 의에 존왕을 돈독하게 하고 정에 사대를 깊이 하는 터이라 조론을 들음에 이르러 곧 삼가 받들고자 하나 다만 족하가 태병하고자 하여도 능히 하지 못하고 곤궁하면서도 그래도 싸울까 염려하여서 지금 조서를 등록하여 보내니 청컨대 유심하여 자세히 알아 둘지어다. 토과 노가 서로 피곤하여지면(토로질비) 마침내 반드시 비방을 남길 것이오 방과 휼이 서로 맞 버티면 또한 웃음거리가 될 것이니 마땅히 돌이키는데 어두우면 흉하다는 것을(미복 흉) 경계하여서 후회함을 스스로 남김이 없도록 할지어다]라고 하였다. 이 해에 임언을 당(후당)에 보냈다.
무자 십일년 춘 정월 임신에 명주(강릉)장군 순식이 내조하였다. 을해에 원윤 김상과 정조 직량등이 장차 가서 강주(진주)를 구하고자 초팔성(경남합천 군초계면)을 지나다가 성주 흥종에게 패하여 김상은 전사하였다. 이 달에 왕이 견훤에게 답서하기를 [엎드려 오월국을 통화사 반상서의 전한 조서 일통과 아울러 족하가 보여준 긴 글월의 사연을 받았노라. 엎드려 생각컨대 중국사신(화초부사)이 제서를 보내오고 편지(척소)의 좋은 소식에 겸하여 가르침을 입었도다. 지검(귀함의 서서)을 받으니 비록 감격은 더하나 소회 부언하리라. 나는 위로 하늘의 뜻을 받들고 아래로 사람들의 추대에 못 이겨 과분하게도 장수의 권을 욕(구+도)되게 하고 경륜의 기회에 나아감을
얻게 되었도다 앞서 삼한이 위기에 놓이고 구토가 흉황하여서 백성(검려)들이 많이 유적(황건)으로 몰려가 전야가 황폐하지 않음이 없는지라 풍진의 경을 그치게 하고 나라의 재앙을 구할 것을 바랐던 것이다. 이에 이웃 나라와 잘 사귀어서 어느덧 화친을 맺었더니 과연 수 천리에 농상을 즐겨 일삼고 칠 팔년간에 사졸이 한가히 쉴 수 있더니 유(을유)년 십월에 이르러 갑자기 사단을 일으켜서 싸움하기에 이른 것이다. 족하가 처음 적을 가볍게 생각하고 바로 전진하여 오매 그것은 당랑이 수레바퀴의 앞을 막는 것과 같더니 마침내 그 어려움을 알고 용감하게 물러감이 마치 모기 새끼가 산을 진것 같았도다(교자지부산) 공손히 두 손을 모아 진사하고 하늘을 가리켜서 맹세하기를 [오늘부터는 길이 친화하겠으니 만약 이 맹약을 어기면 신벌을 받을 것이라]고 하기에 나도 또한 싸우게 하고 질자마저 사양하지 않았던 것은 다만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자 함이니 이것은 내가 남쪽 사람들에게 큰 덕을 베푼 것이라 하겠거늘 어찌하여 맹세한 피(삽혈)가 마르기도 전에 흉위를 다시 지어(작) 봉채같은 독으로 생영을 침해하고 호랑같은 광폭로 기전(왕기)을 가로 막고 김성(경주)을 군박하여 황실을 놀라게 한단 말인가 의에 의하여 주실을 존상함이 누구가 환문의 패업과 같으며 틈을 타서 한을 도모함이 오직 왕망과 동탁의 간계를 나타낼 따름이다. 지존하신 임금으로 하여금 족하에게 굽혀 아들이라 칭하게 하니 존비가 차례를 잃고 상하가 함께 근심하도다 생각컨대 원보의 충순함이 아니면 어찌 다시 사직을 편안하게 할 수 있으리오 나는 마음에 악한 것을 숨겨 둠이 없고 뜻은 존왕에 간절하므로 장차 조정을 도와서 나라의 위태함을 붙들고자 하노라 족하는 털끝만한 소리만 보고 천지의 후은을 잊어 군왕을 죽이고 궁궐을 불태우며 경사 살륙(저해,저해)하고 사민을 죽였으며 미녀(희강)들을 빼앗아 수레를 같이 하고 진보는 약탈하여 가득히 싣고 갔으니 그 흉악함은 걸주보다 더하고 그 불인함은 경효보다 심하도다. 나의 원한은 임금 돌아가심에 극하고 충성은 햇빛을 우러러 보기에 깊도다. 바라는 바는 매(응)와 새매(전)의 사냥을 본받아 견마의 충근을 펴 볼까 하여 다시 간과를 잡은지 이년의 세월이 흘러 갔는데 육전에서는 우뢰 같이 달리고 번개처럼 쳤으며 수전에서는 범같이 치고 용처럼 날쳐 움직이면 반드시 공을 이루고 일으키면 헛되이 발함이 없어 윤빈을 해안에서 쫓으니 병갑이 산처럼 쌓이고 추조를 변성에서 사로잡으니 전사자의 시체가 들을 덮었으면 연산군(연기군)계에서 길환을 군전에서 베이고 마리성변(경남거창군 마리면?)에서 수오를 @하에서 죽였으며 임존성(대흥성)을 뺏던 날에 형적 등 수 백인이 전사하였고 청주를 공파할 때 직심 등 사오인이 목을 바쳤으며 동수에서는 기치만 바라보고도 흩어져 달아났다. 경산은 구슬 먹음고(항복의 예식)항복하여 오고 강주는 남으로부터 내귀하였으며 나주는 서쪽으로부터 이속하여 오니 침공함이 이와 같을진대 수복함이 어찌 멀 것이오 반드시 저수영중에 장이 천선의 한을 풀고 오강정상에 한왕의 일첩의 공을 이루어 마침내는 풍파를 가라앉히고 길이 사해(환해)를 맑힐 터이니 하늘이 도우시는데 천명이 장차 어디로 돌아가리오. 하물며 오월국전하는 덕이 흡족하여 황예(변방의 외족)를 포용하고 인이 깊어 소국을 사랑하여 특히 단금에서 윤지(조칙)를 내려서 청구에 싸움 멈추기를 타이른지라 이미 가르침을 받았으니 감히 존봉하지 않으리요. 만약 족하가 공손히 예지를 받들어 흉기를 다 걷운다면 오직 상국의 인은에 부응할 뿐 아니라 또한 동해의 끊어진 왕통을 이어나가게 하는 것이다. 만약에 허물을 능히 고치지 않는다면 후회하여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삼월 무신에 발해인 김신 등이 육십호가 내투하였다.
하 사월 경자에 탕정군에 행차하였다.
오월 경신에 원보 진경 등이 양곡을 고자군(고성군)으로 운송하는데 견훤이 가만히 군사를 보내어 강주를 습격하니 진경 등이 돌아와 싸왔으나 패하여 죽은 자가 삼백 여인이나 되고 장군 유문은 견훤에게 항복하였다.
육월 갑술에 벽진군에 지진하였다. 계사에 이찬 진경이 졸하니 대광을 증직하였다.
추 칠월 신해에 발해인 대유범이 백성을 거느리고 내투하였다. 병진에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삼년산성(충북보은)을 쳐서 이기지 못하고 드디어 청주로 행차하였다.
팔월에 충주로 행차하였다. 견훤이 장군 관흔을 시켜 양산에 성을 쌓으므로 왕이 명지성 원보 왕충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쳐 붽게 하였더니 관흔이 물러가 대량성(합천)을 지키면서 군사를 풀어 대목군의 곡식을 베어들이고 드디어 오어곡에 분둔하니 죽령 길이 막히므로 왕충 등에게 명하여 가서 조물성을 정탐하게 하였다. 신라 승 홍경이 당나라 민부로부터 대장경 일부를 배에 싣고 예성강에 이르렀으므로 왕이 친히 맞이하여 제석원에 두게 하였다.
구월 정축에 대상 권신이 졸하매 일찌기 황산군(연산군)을 쳐서 이긴 공으로써 중아찬을 증수하였다. 정유에 발해인 은계종 등이 내투하여 천덕전에서 알견할제 세번 절을 하니 사람들은 실례라고 하였으나 대상 함홍은 말하기를 [나라 잃은 사람은 세번 절함이 옛날의 예법이라]고 하였다. 동 육인이 나와 항복하였다. 왕은 제군을 구정에 모으게 하여 육인의 처자를 제군앞에 조리돌리고 기시하였다. 이 해에 북계에 순행하였다.
기축 십이년 하 사월 을사에 서경에 행차하여 주진을 두루 순시하였다.
육월 임인에 원보 장필로 대상을 삼았다. 계축에 천축국(인도) 삼장법사 마후나가 오니 왕은 의장을 갖추어 맞이하였는데 다음 해에 구산사에서 죽었다. 경신에 발해인 홍견 등이 배 이십척으로 인물을 싣고 내부하였다.
추 칠월 기묘에 기주에 행차하여 두루 주진을 순시하였다. 신사에 견훤이 갑졸 오천으로 의성부를 치니 성주 장군 홍술이 전사하였다. 왕이 통곡하여 말하기를 [나는 좌우수를 잃었도다.]하고 하였다. 또 순주(경북안동 풍산면)를 치매 장군 원봉이 도망하였다.
구월 을해에 강주(경북영주)에 행차하였다. 병자에 발해의 정근 등 삼백 여인이 내투하였다.
동 십월 병신에 백제의 일길간 염흔이 내투하였다. 견훤이 가은현(경북문경군 가은면)을 포위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십이월에 견훤이 고창군(경북안동)을 포위하므로 왕이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하였다.
경인 십삼년 춘 정월 정묘에 재암성(경북청송군 진보) 장군 선필이 내투하였다. 병술에 왕이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고창군 병산에 진을 치고 견훤은 석산에 진을 치니 상거하기 오백보가량이었다. 드디어 싸와 저녁에 이르러서 견훤이 패주하니 시랑 김악을 사로잡고 죽은 자가 팔천 여인이었다. 이 날에 고창군이 진하기를 [견훤이 장수를 보내어 순주를 공함하고 인호를 약탈하여 갔읍니다.]고 하니 왕이 곧 순주에 행차하여 그 성을 수축하고 장군 원봉을 죄하였다. 경인에 고창군 성주 김선평으로 대광을 삼고 권행과 장길로 대상을 삼았다. 이에 영안(영천), 하곡(하양), 직명(경북안동), 송(경북청송군) 등 삼십 여 군현이 차례로 내항하였다.
이월 을미에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고창의 승첩을 고하니 나왕 이동의 연해주군 부락이 다 와서 항복하니 명주로부터 흥례부(안동)에 이르기까지 모두 백십 여 성이 되었다. 경자에 이어진(영일군 신광면)에 행차하였다. 북미질부(영일군 의창면) 성주 훤달이 남미질부 성주와 같이 내항하였다.
삼월 무진에 백서성 낭중 행순 영식으로 모두 내의사인을 삼았다.
하 오월 임진에 서경에 행차하였다.
육월 경자에 서경으로부터 돌아왔다.
추 팔월에 안화선원을 창건하여서 대광 왕신의 원당을 삼았다. 기해에 대목군에 행차하여 대승 제궁으로 천안도독사를 삼고 원보 엄식으로 부사를 삼았다. 계묘에 청주에 행차하였다. 병오에 우(울)능도가 백길 토두를 보내어 방물을 바치거늘 백길을 정위로 토두를 정조로 삼았다.
구월 정묘에 개지변이 최돌을 보내어 항복을 청하였다.
동 십이월 경인에 서경에 행차하여 학교를 창건하였다.
신묘 14년 춘 2월 정유에 신라왕이 태수 겸용을 보내어 다시 만나 보기를 청하였다. 신해에 왕이 신라에 행차할 제 50여기를 거느리고 기내에 이르러 먼저 장군 선필을 보내어 기거를 문안드리니 나왕이 백관에게 명하여 교외에서 맞이하게 하고 당제인 상국 김유렴 등은 성문밖에서 맞이하게 하였으며 나왕은 응문 밖에 나와서 영배하니 왕이 이에 답배하고 나왕은 왼편으로 왕은 바른편으로 읍양하면서 전상에 올라 호종의 제신에게 명하여 나왕에게 절하게 하니 정례가 다 극진하였다. 임해전에서 잔치를 하였는데 술이 한참 돌 무렵에 나왕이 말하기를 「소국이 하늘의 버림을 받아 견훤의 유린한 바 되니 통분하기 끝이 없나이다」고 하며 현연히 눈물지으니 좌우의 신하들도 목메어 울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며 왕도 눈물을 흘리며 그를 위자하였다. 하 5월 정축에 왕이 나왕과 태후 죽방부인과 상국 김유겸과 갑간 예문과 파진찬 책궁 윤유와 한찬 책직 흔직 의경 양여 관봉 함의 희길 등에게 물품을 차등 있게 선사하였다. 계미에 왕이 돌아오매 나왕이 혈성(대성군)까지 배송하고 김유겸을 인질로 삼아 딸려 보냈다 도성 사람과 사녀를은 감격하여 울며 서로 치하하여 말하기를「 옛적에 견씨가 왔을 적에는 늑대나 호랑이를 만난 것 같더니 지금 왕공이 오고 보니 부모를 뵌 것 같다」고 하였다. 추 8월 계축에 보윤 선규 등을 보내어 나왕에게 안마 능라 채면을 선사하고 아울러 백관에게는 채면을 군민에게는 다와 복두를 승니에게는 다향을 각기 차등 있게 사하였다. 동 11월 신해에 서경에 행차하여 친히 재제를 행하고 주진을 역순하였다. 이 해에 유사에게 조하기를「북방 오랑캐들은 얼굴은 사람이나 마음은 짐승 같아서 굶주리면 오고 배부르면 가 버리며 이를 보면 부끄러움을 잊으니 이제 비록 복종하여 섬기고 있기는 하나 향배함이 무상하니 마땅히 지나가는 주진에는 관사를 성 밖에 지어서 그들을 접대하라」고 하였다.
임신 15년 하 5월 갑신에 군신에게 논시하기를 「근자에 서경을 완전히 수보하고 민호를 옮겨 이곳을 채운 것은 지방에 의지하여 삼한을 평정하고 장차 여기에 도읍하기를 바랐던 바인데 요즈음 민가의 암탉이 숫탉으로 화하고 대풍이 불어 관사가 무너지니 도대체 어찌하여 재변이 이렇게까지 일어난단 말인가. 옛적에 진에 간사한 신하가 있어 가만히 이모를 품고 있던 바 그집의 암탉이 숫탉으로 화하였으므로 점을 쳐 보니 말하기를 「사람이 분수 아닌 생각을 품기 때문에 하늘이 경계를 드리워 보인 것이니 그 악을 고치지 않으면 마침내 주멸을 당하게 되리라」고 하였으며 오왕 유비 때에 대풍이 불어 문이 무너지고 나무가 뽑이니 그 점이 또한 같았다. 유비는 경계할 줄을 알지 못하고 또한 복망되기에 이르렀다. 또 서상지에 이르기를 「부역이 공평하지 못하고 공부가 번거롭고 과중하여 하민이 윗사람을 원망하면 이러한 변응이 있는 것이라」하였으니 옛일로써 지금의 일을 증험하여 보면 어찌 재앙을 부른 바가 없으리오. 지금 사방에서 노역이 쉴 새 없고 공비가 이미 많은 데도 공부를 덜어 주지 않으니 이로 말미암아 하늘의 견책을 초치하지나 않았는가 적이 두려워 하여 숙야로 근심스럽고 두려워서 감히 마음편할 겨를이 없다. 군국의 공부는 면제하기 어려우나 오히려 군신이 공도를 행하지 아니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원망하고 한탄하게 하며 혹은 분수 아닌 생각을 품음으로써 이런 재변과 이조를 초치하게 된 것인가 염려되는 바이니 각자가 마땅히 마음을 고쳐서 화가 미치지 않게 할 지어다」고 하였다. 6월 병인에 백제(후백제)장군 공직이 내강하였다. 추 7월 신묘에 일모산성(청주)을 친히 정벌하고 정윤(태자) 무를 보내어 북변을 순시하게 하였다. 9월에 견훤이 일길찬 상귀를 보내어 수군을 거느리고 예성강에 침입하여 염(연안) 백(백천) 정(풍덕) 삼주의 선박 100척을 불사르고 저산도의 목마 300필을 빼앗아 가지고 돌아갔다. 동 10월에 견훤의 해군장 상애 등이 대우도를 공략하므로 대광 만세 등에게 명하여 이를 구하게 하였으나 이롭지 못하였다. 11월 기축에 전 내봉경 최응이 졸하였다. 이 해에 대상 왕중유를 당(후당)에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다시 일모산성을 공격하여 이를 파하였다.
계사 16년 춘 3월신사에 당(후당)이 왕경과 양소업을 보내와 왕을 책하고 조하기를 「왕자는 하늘을 법하여 창생을 기르고 땅을 휴하여 팔굉을 편안하게 하나니 진실로 대중의 도를 잡아 안팎 없이 밝히는 것이다. 북극성이 정위하므로 뭇 별이 다 향하게 되고 대해가 넓으므로 모든 물길의 밑둥이 된다. 그러므로 인간 세상에 처하여 천하에 미치고자 하면 도를넓히고 덕을 닦으며 몸을 공손히 하고 마음을 비워 귀부하는 자는 돌보아 백성을 삼고 향화하는 자는 풍교를 입혀준다 이러므로 봉숭하는 명을 내리고 정상의 문을 주노니 조상으로부터 물려 받은 것을 감히 떨어뜨림이 없도록 하라 그 땅은 평양이라 칭하고 영도자는 재간을 겸하여 오족의 강종을 통솔하고 삼한의 깊숙한 땅을 통어하여 임무는 진정함을 겸섭하고 뜻은 성명을 받들도다. 이에 이장에 맞추어 총수를 가하노라 아아 그대 권지고려국왕사 건이여 몸은 웅용한 기질을 타고 났고 지혜는 기략에 통달하였도다 변성에 으뜸하여 뛰어났으며 장도를 품고 틈을 타서 나타났다 산하를 누리(수)니 기지가 극히 풍어하도다. 주몽의 개국한 상서를 이어 그 군장이 되고 기자가 번국을 이룩한 자취를 밟아서 이에 혜지를 편다. 풍속은 순후하여 서를 아는 고로 제봉이 이에서 편안하고 생민이 이로써 완집되었다 다시 행위는 순치와 같은 사이에 미치고 피모의 분한을 돈독히 하여 간사한 오랑캐의 재앙 일으킴을 분노하고 이웃 나라를 구휼하여 환란을 구하였다 더구나 진심으로 순종하고 절의를 지켜 충성을 바쳤으며 인의를 사모하여 시절을 편안하게 하고 문사를 알아서 시운을 누렸도다. 심해를 항행하고 험로를 넘어 국신(선물)을 보내고 진보를 바쳐 술직의 의를 이어 베푸니 근왕의 업이 크게 나타났다. 대저 지성을 미루어서 풍성한 보답을 받음은 도의 떳떳함이요 진봉(실봉의 뜻.)을 정하여서 열국의 현양함은 예의 큼이로다 공로가 지극한 바 있으니 짐은 아낄 것이 없도다. 이제 정사 태복경 왕경과 부사 대부소경겸 통사사인 양소업 등을 보내어 부절을 가지고 예를 갖추어 그대를 책명하여 고려국왕을 삼노라 아아 선을 행하면 하늘이 상서를 내릴 것이요 정도를 지키면 신이 복을 줄 것이다 간과는 위태한 일에 삼가할 것이요 문궤는 원대한 모유에 이바지할 것이다 길이 당(후당)나라 신하가 되어서 세세로 왕작을 향유할 것이다 가서 그 위를 밟게 하노니 그대는 오직 공경히 할지어다」고 하고 또 조하기를「경은 주수가 빛을 나누고 금구가 조짐에 맞아 동방(일변)의 분야를 영유하고 해외의 영웅에 으뜸이로다 사졸의 마음은 무순함에 동감하였고 민의는 모두 혜양함을 구가하였다 그리고 또한 정성은 사대에 굳건하고 뜻은 이웃을 구휼함에 있었다 말을 먹이고 군기를 날카롭게 하여 견훤의 무리를 꺾었고 옷을 나누고 밥을 덜어서 홀한인을 구제하였다 항해를 잇대(계)여 장주를 올리고 매양 만정의 공물을 바쳤다 금석과 같은 성명은 해를 뚫었고 풍운과 같은 기상은 허공을 능가하였다 명성은 한 시대에 전파되었고 미칭은 사극에 유포되었다 충규가 이와 같으니 상전을 어찌 잊으랴 특히 봉토가 가름(소)을 논의하여 인하여 준질에 올리고 동규를 깎아서 책명을 주노니 눈은 봉산에 극하였고 도야를 돌아보아 생각을 기울이니 마음은 제수를 달았도다 힘써 이례를 삼가 받아 길이 숭훈을 보전하도록 하라 이제 경에게 특진검교태보 사지절토 주도독 상주국 충대의군사를 제수하고 인하여 고려국왕을 봉하노라 이제 정사태복경 왕경과 부사 대부소경 양소업을 보내어 그 곳에 가 예를 갖추어 책명하게 하고 겸하여 국신물로 은기 필단등을 별록과 같이 갖추어 사하노니 이르거든 영납하라」고하였고 또 조하기를 「경은 장회의 무족(거족)이며 창해의 웅번이라. 문무의 재로써 토우를 보유하고 충효의 절로써 와서 화풍을 받으니 정규는 이미 기상에 새겨지고 총수는 이에 간책에 올랐도다 윤발로써 이미 호혈의 영을 이루었고 화목한 실가는 족히 작소의 미를 나타내었다. 탕목지를 나누게 하여 써 사라를 경축하노니 길이
보좌의 공을 빛내어 융숭한 은명에 부합하도록 하라 생각컨대 경은 진실로 본래부터 나의 악은(우악한 은혜)을 알 것이다 경의 처 유씨를 이제 하동군부인으로 봉하노라」고 하고 또 삼군 장리에게 조서를 사하기를 「짐이 생각컨대 왕건은 성운의 수기를 받고 금석의 정성을 바쳐서 신의는 인국과 화목함에 들어났고 충효는 사대에 나타났다 삼한의 악토를 영유하여 매양 주의 정삭을 받들고 만리의 홍파를 넘어 항상 우공을 바쳤다 훈명은 이미 들어났는데 작질이 아직 높지 못하니 마땅히 총석하기를 동규로써 하여 도야에 진봉하게 하고 이제 고려국왕을 봉수하여 사신을 그곳에 보내어 예를 갖추어 책명하고 위론하도록 하였으니 잘 알 줄로 생각한다고 하였다. 또한 역일을 사하니 이로부터 천수 연호을 제거하고 후당 연호를 쓰게 되었다.
갑오 17년 춘 정월 갑신에 서경에 행차하여 북진을 역순하였다. 하 5월에 을사에 예산진에 행차하여 조하기를 「지난 날에 신라의 정사가 쇠하여지니 뭇 도둑이 다투어 일어나 백성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황야에 해골을 드러내게 되었다. 전주가 분쟁하는 무리를 굴복시켜서 방국의 터전을 열더니 말년에 이르러 해독을 하민에 끼치고 사직을 경복한지라 짐이 그 위태로운 뒤를 이어받아 이 새 나라를 이룩하였나니 상처받은 백성을 노역하게 함이 어찌 짐의 본뜻이리오 다만 나라를 창건(초매)한 때인지라 할 수 없는 일이로다 풍우를 무릅쓰며(즐풍목우)주진을 순찰하고 성책을 완수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연림의 난을 면하게 하고자 함이로다. 이러므로 남자는 다 싸움에 종사하고 부녀도 오히려 공역에 나아가게 되니 노고를 참지 못하여 혹은 산림에 도망쳐 숨고 혹은 관부에 호소하는 자가 얼마나 되는지를 알 수 없도다. 왕의 친족이나 권세가들이 어찌 방자하고 횡포하여 약한 자를 억눌러서 나의 편맹을 괴롭게 함이 없다 할 수 있으랴 내 한 몸으로 어찌 능히 집집마다 가서 눈으로 볼 수 있겠는가. 소민들은 이러므로 호소할 방도가 없었으니 저 창천에 울부짓는 것이다. 마땅히 너희들 공경장상으로 국록을 먹는 사람들은 내가 백성을 사랑하기를 아들 같이 여기고 있는 뜻을 잘 알아서 너희들 녹읍의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야 할 것이다 . 만약에 가신의 무지한 무리를 녹읍에 보내면 오직 취렴만을 힘쓰고 마음대로 빼앗아간들 너희들이 또 어찌 능히 이를 알 수 있겠는가 비록 혹은 이를 안다하더라도 금제하지 않고 백성중에 논소하는 자가 있는데도 관리가 사정에 끌려 숨기고 두호함으로써 원망과 비방하는 소리가 일어남이 주로 이에 말미암는 것이다. 내가 일찌기 타이른 것은 이런 줄을 알고 있는 자에게는 더욱 힘쓰게 하고 알지 못하는 자에게는 잘 경계하도록 하고자 한 것이다 그 영을 어긴 자는 따로이 염권을 행할 것이로되 오히려 타인의 허물을 숨기는 것을 현명한 짓으로 생각하여 일찌기 들어 아뢰지 않으면 선악의 사실을 어찌 듣고 알 수 있으리오 이와 같을진댄 어찌 절개를 지키고 허물을 고칠 자가 있겠는가 너희들은 나의 훈계하는 말을 준수하고 나의 상벌을 청종하도록 하라 죄 있는 자는 귀천을 막론하고 벌이 자손에게까지 미칠 것이며 공이 많고 죄가 적으면 상벌을 요량하여 행하고 만약에 잘못을 고치지 않으면 그 녹봉을 추탈하고 혹은 1년 2 3년 5 6연으로부터 종신토록 반열에 참례하지 못하게 할 것이며 만약에 뜻이 봉공에 간절하고 종시 허물이 없으면 살아서는 영록을 누리고 사후에는 명가라 일컬으게 될 것이며 자손에 이르기까지 우대하여 정상을 가할 것이다. 이는 다만 오늘뿐만 아니라 만세에 전케하여 써 규범을 삼게 하리라 백성을 위하여 진소하는 자가 있는데 소환하여도 오지 않으면 반드시 재차 소환하여 먼저 장 열대를 쳐서 영을 어긴 죄를 다스리고 나서 바야흐로 범한 바 죄를 논하도록 하라 만약에 관리가 일부러 천연하거든 일자를 계산하여 벌책할 것이며 또 위세를 믿고 권력을 믿어 그들을 접촉 못하게 하는 자가 있거든 그이름을 아뢰도록 하라」고 하였다. 추 7월에 발해국의 세자 대광현이 무리 수만인을 거느리고 내투하거늘 성명을 왕계라고 사하고 종적에 부적하여 특히 원보를 제수하고 백주(백천)를 지키게 하여 그 제사를 받들게 하고 요좌에게는 작을 사하고 군사에게는 전택을 사하되 차등 있게 하였다. 9월 정사에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운주를 정벌하여 견훤과 싸와서 그를 크게 패배 시키니 웅진(공주) 이북의 30여성이 위풍을 듣고 스스로 강복하였다.
동 12월에 발해의 진림 등 160인이 내부하였다. 이 해에 서경에 한재와 충재가 있었다.
을미 18년 춘 3월에 견훤의 아들 신검이 그 아비를 금산(김제)불우에 가두고 그 아우 금강을 죽였다. 처음에 견훤에게는 첩이 많아 아들이 10여인이나 있었는데 넷째 아들 금강이 몸이 장대하고 지혜도 많으므로 견훤이 특히 그를 사랑하여 그 위를 전하려 함에 그 형 신검과 양검과 용검 등이 이를 알고 근심스러워 고민하고 있었다. 그 때에 양검과 용검은 나가서 외방을 진수하고 있었고 신검만이 홀로 곁에 있었는데 이찬 능환이 사람을 시켜 양검 용검과 함께 음모하여 신검에게 난을 일으킬 것을 권하였다. 하 6월에 견훤이 끝 아들 능예와 딸 애복과 애첩 고비 등과 함께 나주로 달아났다가 입조하기를 청하므로 장군 유검필 대광 만세 원보 향예 오담 능선 충질 등을 보내어 군선 40여소를 거느리고 해로로 그를 맞이하게 하였다 이르(지)매 다시 견훤을 일컬어 상부라 하고 남궁을 관사로 주고 위를 백관의 위에 차지하게 하며 양주를 사하여 식읍을 삼게 하고 겸하여 금백과 노비 각 40구와 구마 10필을 사하였으며 앞서 강복해온 사람 신강으로 아관을 삼았다. 추 9월 갑오에 서경에 행차하여 황 해주를 역순하였다. 동 10월 임술에 신라왕 김부가 시랑 김봉휴를 보내어 입조하기를 청하므로 왕이 섭시중 왕철과 시랑 한헌옹 등을 보내어 가서 회보하게 하였다. 11월 갑오에 나왕이 백료(백관)를 거느리고 왕도를 떠남에 사인 서민들이 다 뒤를 따르는지라 향차 보마가 연달아 30여리에 뻗치고 도로가 꽉 메어서 구경하는 사람들이 담을 둘러 싼 것 같았다 연로의 주 현의 공대가 매우 성대하였는데 왕은 사람을 보내어 위문하였다. 계묘에 나왕이 왕철 등과 함께 개경에 들어오니 왕은 의장을 갖추고 교외에 나와 맞아 위로하고 동궁과 여러 재신에게 명하여 호위하고 들어와 유화궁에 들어가 머무르게 하였다. 계축에 나왕이 글을 올려 말하기를 「본국이 오랫동안 위란을 겪으매 나라의 운수가 이미 다하여 다시 기업을 보존할 가망이 없는지라 원컨대 신하의 예로서 뵈옵고자 하나이다」라고하매 왕이 충허하지 않았다. 12월 신유에 군신이 아뢰기를 「하늘에 두 해가 없고 땅에 두 임금이 없다 하옵거늘 한 나라에 두 임금을 백성이 어떻게 감당하겠나이까 원하옵건대 나왕의 청을 들어 주옵소서」라고 하였다. 임신에 천덕전에 나아가서 백관을 모으고 말하기를 「짐이 신라와 함께 삽혈하고 동맹하여 양국이 호의를 길이 맺어 각각 사직을 보전할까 하였더니 이제 신라왕이 굳이 칭신하기를 청하고 경등도 또한 이렇게 하는 것을 옳게 여기니 짐이 마음으로는 비록 부끄럽게 여기나 여러 사람의 뜻을 어기기가 어렵도다」라 하고 나왕의 정하에서 알현하는 예를 받으니 군신들의 칭하하는 소리가 궁궐에 진동하였다. 이에 김부를 제배하여 정승을 삼고 태자의 상위에 두어 세록 1,000석을 급여하고 신란궁을 세워 그에게 사하였다 그의 시종자들도 아울러 수록하여 전록을 넉넉히 사하고 신라국을 삭제하여 경주라 하고 이어 식읍으로 삼아 주었다. 이 해에 예빈경 형순 등을 당(후당)에 보냈다.
병신 19년 춘 2월에 견훤의 사위 장군 박영규가 내부하기를 청하였다. 하 6월에 견훤이 청하기를 「노신이 멀리 창파를 건너와 성화에 내투하였사오니 원컨대 왕의 위령에 의지하여 적자를 주벌하여지이다.」고 하니 왕이 처음에는 때를 기다려서 출동하려 하였으나 그가 굳이 간청함을 애처롭게 여겨 이를 청종하고먼저 정윤(태자)무와 장군 술희를 보내어 보기 10,000을 거느리고 천안부에 나아가게 하였다. 추 9월에 왕이 삼군을 거느리고 천안부에 이르러 군사를 회합하고 일선군(경북 선산) 으로 나아가니 신검이 군사를 이끌고 이에 항거하였다. 갑오에 일리천(성주가리현)을 격하여 진을 쳤다. 왕이 견훤과 함께 관병을 하고 견훤과 대상 견권 술희 황보금산 원윤 강유영 등으로 마차 10,000을 거느리게 하고 지천군 대장군 원윤 능달 기언 한순명 흔악과 정조 영직 광세 등으로 보군 10,000을 거느리게 하여 좌강을 삼고 대상 김철 홍유 박수경과 원보 연주와 원윤이 훤량 등으로 마군 10,000을 거느리게 하고 보천대장군 원윤 삼순 준량과 정조 영유 길강충 흔계 등으로 보군 10,000을 거느리게 하여 우강을 삼고 명주대광 왕순식과 대상 긍준 왕렴 왕예와 원보 인일 등으로 마군 20,000을 거느리게 하고 대상 유검필과 원윤 관무 관헌 등으로 흑수 달고철륵 제번의 날쌘 기병 9,500을 거느리게 하고 우천군대장군 원윤 정순과 정조 애진 등으로 보군 1,000을 거느리게 하고 천무군대장군 원윤 종희와 정조 견훤 등으로 보군 1,000을 거느리게 하며 간천군대장군 김극종과 원보 조간 등으로 보군 1,000을 거느리게 하여 중군을 삼고 또 대장군 대상 공훤과 원윤 능필과 장군 왕함윤 등으로 기병 300과 제성의 군사 14,700을 거느리게 하여 삼군의 원병을 삼아 전고를 울리며 앞으로 나아가는데 문득 칼과 창 같은 형상을 한 백운이 우리 군사의 두상에서 일어나더니 적진을 향하여 날아갔다 백제 좌장군 효봉 덕술 애술 명길 등 4인이 병세가 크게 성함을 보고 갑옷을 벗고 창을 던지며 견훤의 마전에 강복하여 오는지라 이에 적병은 사기를 잃고 감히 움직이지 못하거늘 왕이 효봉 등을 위로하고 신검의 소재를 물으니 효봉 등이 말하기를 「중군에 있사오니 좌우로 협격하면 반드시 그를 격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한다 왕이 대장군 공훤에게 명하여 바로 중군을 두들기게 하고 삼군이 일제히 전진하여 분격하니 적병이 크게 무너졌다 장군 흔강 견달 은술 금식 우봉 등 3,200인을 사로잡고 5,700여급을 참살하매 적병이 창을 거꾸로 돌려 저희들끼리 서로 치는 지라 우리 군사는 추격하여 황산군(연산)에 이르러 탄령을 넘어 마성에 진주하였다. 신검이 그의 아우 청주(진주)성주 양검과 광주 성주 용검 및 문무의 관료와 함께 나와 강복하거늘 왕이 크게 기뻐하여 그들을 위로하고 유사에게 명하여 사로잡은 백제의 장사 3,200인을 모두 본토에 돌려 보냈으나 다만 흔강 부달 우봉 견달 등 40인만은 그 처자와 아울러 서울에 보내고 능환을 면책하여 말하기를 「처음에 양검 등과 함께 모의하여 군부를 가두고 그의 아들을 세운 자는 너였다 신하된 도리로서 마땅히 이럴 수가 있겠는가」고하니 능환이 머리를 수그리고 말을 못하는 지라 드디어 명하여 그를 베어 죽이고 양검과 용검을 진주에 귀양보냈다가 뒤 이어 그들을 죽였다 신검이 왕위를 찬탈한 것은 타인에게 협박을 당하여 한 짓이므로 죄가 두 아우보다 가벼우며 또 귀순하였으므로 특히 죽음을 면제하여 관작을 사하였다 이에 견훤은 근심 번민하다가 등창이 나서 수일만에 황산(연산)의 절에서 졸하였다 왕이 백제 도성에 들어가 영을 내려 「거괴가 이미 항복하여 왔으니 나의 적자(백성)를 범하지 말라」고 하고 장사들을 존문하며 재능을 헤아려 임용하고 군령을 엄명히 하여 추호도 범함이 없으니 주 현이 안도하여 늙은이나 어린이가 다 만세를 부르며 서로 기뻐하여 말하기를 「임금이 오시니 다시 살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달에 왕이 백제로부터 돌아와 위봉루에 나아가 문무백관과 백성들의 조하를 받았다 왕이 이미 삼한을 정하고 신자된 자들로 하여금 예절을 밝게 하고자 하여 드디어 손수 정계 1권과 계백요서 8편을 제술하여 이를 중외에 반포하였다. 동 12월 정유에 대광 배현경이 졸하였다. 이 해에 광흥 현성 미륵 내천왕 등의 사찰을 창건하고 또 개태사를 연산에 창건하였다.
정유 20년 하 5월 계축에 김부가 전금안옥배방요대를 바쳤는데 길이가 열 뼘이요 육십이과로 되어 있었다 신라가 보물로 비장하여 오기를 거의 400연이나 되었으며, 세상에서 성제대라 전칭하던 것이다 왕이 이를 받아 원윤 과훤에게 명하여 물장에 보장하게 하였다. 처음에 신라의 사신 김율이 왔을 때 왕이 묻기를 「들으니 신라에 삼대 보물이 있다는데 장육금상과 구층탑과 성제대라고 하더라 삼보가 없어지지 않으면 나라도 망하지 않는다 하니 탑상은 아직 남아있거니와 알지 못커라 성제가 지금도 아직 있느냐」하니 김율이 대답하기를 「신은 일찌기 성대를 들어 본 적이 없사옵니다」고 하였다 왕이 웃으며 말하기를 「경은 귀신이어늘 어찌하여 나라의 대보를 모른단 말인가」고 하니 율이 부끄러이 여기고 돌아와 그의 왕에게 아뢰었다 왕이 군신에게 하문하였으나 능히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 때 황룡사에 나이 90이 넘은 중이 있어 말하기를 「내가 듣자오니 성대는 진평대왕께서 착용하시던 것이라 하오며 역대로 이를 전하여 남고에 보장하여 두었다 하옵니다」고 하거늘 왕이 드디어 남고를 열어보매 풍우가 갑자기 일어나고 대낮이 어두컴컴하여 볼 수가 없는지라 이에 날을 택하여 재제를 지낸 후에야 이를 볼 수 있었다 국인은 진평왕이 성골의 왕이므로 일컬어 성제대라 하였다. 왕규 형순을 진(후진)에 보내어 등극을 하하였다.
무술 21년 춘 3월에 서천축(인도)의 승 홍범대사 질리부일라가 내조하였는데 본래 마갈타국(Magadha)대법륜보제사의 사문이었다 왕이 크게 양 가에 위의 법가를 갖추어 그를 맞이하였다. 추 7월 임자에 벽진군(경북 성주)장군 이총언이 졸하였다. 이 달에 비로소 후진의 연호를 행하였다. 서경에 나성을 쌓았다. 동 12월에 탐라국의 태자 말로가 내조하매 성주 왕자의 작을 사하였다. 이 해에 발해인 박승이 3,000여호를 거느리고 내투하였다.
기해 22년 춘 3월 무진에 좌승 공직이 졸하였다. 이 해에 진이 국자박사 사반을 보내와 왕을 책하여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를 삼고 여타는 종전대로 하였다.
경자 23년 춘 3월에 주·부·군·현의 명호를 고쳤다. 추 7월에 왕사 충담이 죽으매 원주 영봉산 흥법사에 탑을 세우고 친히 비문을 지었다. 동 12월에 개태사가 이룩됨에 낙성화엄법회를 설하고 친히 소문을 지었다. 이 해에 신흥사를 중수하고 공신당을 설치하여 삼한의 공신들을 동서 벽에 그려두고 일주야 동안 무차대회를 설하였는데 해마다 이렇게 하는 것을 상례로 삼았다. 진(후진)이 우리나라의 질자 왕인적을 돌려 보냈다.
신축 24년 하 4월 을미에 대광 검필이 졸하였다. 이 해에 대상 왕신일을 진(후진)에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임인 25년 동 10월에 계단이 사신을 보내와 탁타(낙타) 50필을 선사하매 왕은 「계단이 일찌기 발해와 화목하게 지내오다가 별안간 의심을 내어 맹약을 어기고 멸망을 시켰으니 심히 무도한지라 멀리 화친을 맺어 이웃을 삼을 것이 되지 못한다」하여 드디어 교빙을 거절하며 그 사자 30인을 해도에 유배하고 탁타를 만부교하에 매어놓아 다 굶어 죽게 하였다.
계묘 26년 하 4월에 내전에 거동하여 대광 박술희를 불러 친히 훈요를 주어 말하되 「짐이 듣건대 대순은 역산에서 농경을 하다가 마침내 요의 선양을 받았고 한 고조는 패택에서 일어나 드디어 한나라 제업을 일으켰다고 한다. 짐도 또한 미천(단평)한 가문에서 일어나 그릇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여름에는 더위를 두려워 하지 않고 겨울에는 추위를 피하지 않았으며 신심을 괴롭힌지 19년 삼한을 통일하였고 외람되이 대보(왕위)에 있은지 25년이 되어 몸은 이미 늙었노라. 다만 후사가 정욕을 함부로 부려 강기를 패란하게 할까 크게 근심하는 바이다 이에 훈요를 술하여 이를 뒷세상에 전하느니 바라건대 조석으로 펴보아 길이 거울을 삼을지어다」고 하였다. 그 일조에 「우리 나라의 대업은 반드시 제불의 호위하는 힘을 입는 것이다 이러므로 선교(선종과 교종)사원을 창건하고 주지를 차견하여 범수하게 하고 각각 그 업을 다스리도록 하였다. 후세에 간신이 정권을 잡아 중의 청알을 따르게 되면 각업의 사사가 서로 다투어 바꾸고 빼앗고 할 것이니 꼭 이를 금할지어다」그 이조에 「모든 사원은 다 도선이 산수의 순역을 추점하여 개창한 것이다 도선이 말하기를 「내가 점정한 외에 함부로 더 창건하면 지덕을 손박하게 하여 조업(왕업)이 길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짐은 후세의 국왕 공후 후비 조신들이 각각 원당이라 칭하고 혹 더 창건한다면 크게 우환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신라말에 사탑을 다투어 짓더니 지덕을 쇠손하게 하여 망하기에 이르렀으니 경계하지 않을소냐」그 삼조에「적자에게 나라를 전하는 것이 비록 상례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단주가 불초하매 요가 순에게 선양한 것은 참으로 공심이었던 것이다. 만약에 원자가 불초하거든 그 차자에게 전하여 줄 것이며 차자도 불초하거든 형제 중에서 여러 사람의 추대를 받는 자에게 전하여 주어 대통을 계승하게 하라」그 사조에 「우리 동방은 예로부터 당의 풍속을 본받아 문물 예악이 다 그 제도를 준수하여 왔으나 수방이토에 인성이 각기 다르니 반드시 구차하게 같게 하려 하지 말라 계단은 금수와 같은 나라인지라 풍속이 같지 않고 언어도 다르니 의관제도를 삼가 본받지 말지어다」그 오조에 「짐이 삼한 산천의 음우를 힘입어 써 대업을 성취하였다. 서경은 수덕이 순조로와서 우리 나라 지맥의 근본이 되며 대업을 만대에 전할 땅인지라 마땅히 사중월에는 순주하여 백일이 지나도록 머물러 안녕을 이루도록 하라」그 육조에 「짐이 지극히 원하는 바는 연등과 팔관에 있노니 연등은 불을 섬기는 바이오 팔관은 천령 및 오악 명산 대천과 용신을 섬기는 바이다 후세에 간신이 가감을 건백하는 자가 있거든 꼭 그것을 금지하라 나도 당초부터 마음에 맹서하여 회일에는 국기를 범하지 않고 군신이 동낙하였으니 마땅히 삼가 이에 의하여 행하라」그 칠조에「임금이 백성의 마음을 얻는다는 것은 심히 어려운지라 그 마음을 얻고자 할진댄 요는 간언을 따르고 참소를 멀리 하는데에 있을 뿐이니라 간언을 따르면 성군이요 참언이 꿀같으나 믿지 않으면 참언이 스스로 그치리라 또 백성을 부리되 때로써 하고 요역을 경하게하고 세부를 박하게 하여 가색의 어려움을 알면 스스로 민심을 얻게 되어 나라는 부하여지고 백성은 평안여지리라 고인이 말하기를 「좋은 미끼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고기가 걸려 옴이 있고 상을 후하게 주는 곳에는 반드시 양장이 있으며 활을 당기는 곁에는 반드시 피조가 있고 인을 베푸는 아래에는 반드시 양민이 있다」고 하였으니 상벌이 올바르면 음양이 순조로우리라 그 팔조에 차현(차령산맥)이남과 공주강외는 산형과 지세가 함께 배역으로 달리니 인심도 또한 그러한지라 저 아래 고을(주군)사람이 조정에 참여하여 왕후 국척과 혼인하여 국정을 잡게 되면 혹은 국가를 변란케 하거나 혹은 통합된 원한을 품고 거동하는 길을 범하여 난을 일으킬 것이며 또 일찌기 관사(관청)의 노비와 진역의 잡척에 속하던 무리가 혹은 권세에 붙어 이면하고 혹은 왕후궁원에 붙어 언어를 간교하게 하여 권세를 농하고 정사를 어지럽힘으로써 재변을 일으키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이니 비록 양민이라 할지라도 마땅히 벼슬 자리에 두어 일을 보게 하지 말지어다」 그 구조에 「백벽(제후)과 군료의 녹은 나라의 대소를 보아 제도를 정할 것이요 함부로 증감하지 말지어다」 또 고전에 말하기를「공적으로써 녹을 제정할 것이요 관작을 사정으로 다루지 말라」고 하였으니 만약에 공없는 사람이나 친척이나 사사로이 친한 사람들로 헛되이 천록(국록)을 받게 하면 다만 하민이 원망하고 비방할 뿐만 아니라 그 본인들도 역시 복록을 길이 누리지 못할 것이니 절실히 경계할지어다 또 강악한 나라 (계단을 가리킴)로 이웃하였으므로 평안한 때에 위태함을 잊지 말 것이며 병졸에게는 마땅히 보호와 구휼을 가하고 요역을 양제할 것이면 매년 추에 용예가 출중한 자를 사열하여 편의한 대로 가수하라」그 십조에「국가를 누린 자는 근심이 없는 때에 경계하고 널리 경사를 보아 옛일을 거울삼아 오늘을 경계하여야 하느니라 주공같은 대성도 무일 일편을 성왕에게 바쳐 경계하였으니 마땅히 이것을 도게하여 출입할 적에 보고 살펴라」하고 십훈의 끝은 다 「중심장지」의 사자로 맺어져 있었는데 사왕은 상전하여 보감으로 삼았다. 5월에 왕이 불예하시므로 청단을 중지하였다. 정유에 재신 염상과 왕규와 박수문 등이 곁에 모시고 앉아 있었는데 왕이 말하기를 한 문제의 유조에 이르기를 「천하 만물의 생이 있는 자는 죽지 않는 것이 없으니 죽음은 천지의 이치요 만물의 자연이라 병든지 이미 이순이 지났으며 죽음을 돌아감과 같이 보거늘 무슨 근심이 있겠는가 한 문제의 말은 즉 나의 뜻이니라. 내외의 기무를 오랫동안 결정짓지 못하고 있는 것은 경등이 다 같이 태자 무와 함께 재결한 후에 아뢰라」고 하였다 병오에 병이 더욱 중하여지므로 신덕전에 거동하여 학사 김악에게 명하여 유조를 초하게 하였다 조문이 작성되매 왕이 다시 말이 없는 지라 좌우의 신하들이 소리를 내어 크게 통곡하니 왕이 「무슨 소리냐」고 묻거늘 대답하기를 「성상께서 백성의 부모로 계시다가 오늘날 군신을 버리시려 하시니 신등이 슬픔을 스스로 이기지 못할 뿐입니다」라고 하니 왕이 웃으며 말하기를 「부생이 예로부터 그러하니라」고 하며 말을 마치고 조금 있다가 붕어하니 재위는 26년이요 수는 67이었다. 유명으로 「내외의 모든 관료는 다 동궁의 처분을 따를 것이며 상장 원릉의 제도는 한 위 이문제의 고사에 의거하여 다 검약을 좇도록 하라」고 하였다 왕은 규모가 굉원하여 조정을 바로잡아 상벌을 밝히고 절검을 숭상하며 현량을 등용하고 유도를 존중하였다 익호를 신성이라 하고 묘호를 태조라 하였으며 송악의 서쪽 기슭에 장사지내고 능을 현릉이라 하였다 목종 5년 원명이라 가익하고 현종 5년 광렬을 가하였으며 18년 대정을 가하고 문종 10년 장효를 가하였으며 인종 18년 인용을 가하고 고종 40년 용렬을 가하였다.
이제현이 찬하여 가로되「충선왕이 일찌기 말하기를 "우리 태조의 규모와 덕량은 중국에 태어났더라면 마땅히 송 태조에게 떨어지지 않았으리라 송 태조는 주 세종을 섬겼는데 세종은 현명한 군주였다. 송 태조를 대우함이 매우 후하였고 송 태조도 또한 그를 위하여 힘을 다하여 오다가 공제가 유충(연소)하여 정사가 태후에게서 나오게 되매 군정에 촉박되어 주선을 받았으니 대개 마지 못한데서 나온 것이었다 우리 태조께서는 궁예같은 시폭한 임금을 섬겨 삼한의 땅을 궁예가 그 삼분지이를 차지하게 된 것은 태조의 공이었다. 불세출의 공으로 반드시 의심을 받는 위치에 있었으니 위태로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도 나라 사람들이 귀심하고 장사가 추대하였으나 오히려 굳이 사양하고 연릉의 절을 따르고자 하였다. 조민벌죄의 일도 어찌 그만 둘 수가 있었으랴 그 살리는 것을 좋아하고 죽이는 것을 싫어하며 공이 있으면 상 주고 죄가 있으면 반드시 죄 주었으며 성심껏 공신을 대접하되 권세를 빌려 주지 아니한 것과 왕업을 창건하여 왕통을 드리움은 진실로 법도를 같이 하였다 하겠다 송 태조 같은 이는 강남이씨를 와양에 코를 골고 잠 자는 자에 비하였으며 석진이 뇌물로 계단에게 준 산후의 16주를 대개 주머니 속의 물건처럼 보았으니 이미 북한의 회수하고 장차 멀리 적을 쫓아 진한의 강계를 정하려 하였던 것이다. 우리 태조께서는 즉위한 후에 아직 김부가 복종하지 않고 견훤이 포로가 되기 전인데도 자주 서도에 행차하여 친히 북방의 변지를 순수하였다. 그 뜻이 또한 동명의 옛 땅을 내 집에서 쓰던 청전같이 생각하고 반드시 석권하여 이를 차지하려 하였으니 어찌 다만 계림을 취하고 압강을 칠 뿐이었으리오 이로써 보면 비록 대 소의 세력은 같지 않으나 이조의 규모와 덕량은 이른바 그 입장을 바꾸어 보면 다 마찬가지인 것이다”하였다. 충선은 총명하여 옛것을 좋아하였으며 중원의 박아한 선비로서 왕구 염복 요수 소석 조맹 우집같은 이들이 다 그 문에 놀았으므로 대개 일찌기 그들과 함께 상론하였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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