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조선

◐ 왜란, 양요, 정변

오늘의 쉼터 2009. 1. 30. 16:17

 

 

◐ 왜란, 양요, 정변

 


 

삼포 왜란(三浦倭亂)

1510년(조선 중종 5년)에 삼포에 살던 일본인들이 일으킨 폭동.

삼포를 연 뒤 일본인들의 무역과 거주가 허가되자 삼포의 일본인 수가 점점 늘어갔고,

교만해진 일본인들은 조정의 명령을 어기고 관리와 충돌하는 등 그 폐단이 심해졌다.
그리하여 중종은 그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한편, 쓰시마섬의 도주에게 그들의

철수를 요구하였다.

그것에 불만을 품은 일본인들은 쓰시마 도주의 군사 지원을 받아 폭동을 일으켰고,

한때는 제포, 부산포를 함락시킬 계제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관군의 토벌로 그들은 크게 패하여 물러간 이후 일본인과의 교역을 금하였는데,
그 뒤 일본의 애원으로 다시 임신약조를 맺고 제포 항구만 열어 교역을 허락하였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을묘왜변(乙卯倭變)

조선 명종 10년인 1555년에 왜구가 전라 남도 연안 지방에 침입한 사건.

1510년 삼포 왜란 이후 조선 정부가 왜인들의 왕래와 상품 거래를 엄격히 제한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왜구들이 일으킨 난이다.

왜구들은 전라 남도의 달량성, 어란포, 장흥, 강진, 진도에 침입하여 갖은 만행을 다하였다.
왜구들이 조선군에게 쫓기어 돌아간 후 쓰시마 도주는 을묘왜변에 가담한 왜구들의 목을 베어

보내 사죄하였다.

 


 

정묘호란(丁卯胡亂)

1627년(조선 인조 5년)에 후금의 침입으로 일어난 싸움.

광해군을 몰아 내고 즉위한 인조가 친명 배금 정책을 쓰고, 명나라 장군 모문룡이 철산의

가도에 진을 치고 요동 회복을 꾀하자,

중국 대륙으로의 진출을 꾀하던 후금이 그들의 배후를 위협하는 조선을 먼저 침입했다.

후금의 태종은 광해군의 폐위를 구실로 군사를 일으켜 의주, 정주, 곽산을 거쳐 황해도

평산에까지 이르렀다.

그 사이에 정봉수와 이입 등이 의병을 조직하여 용골 산성과 의주 지방에서 적과 싸웠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인조는 강화로 피하게 되었다.
그러나 후금은 본래 중국 대륙을 차지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조선과 쉽게 화약이

이루어져 형제의 맹약을 맺고 군대를 철수하였다.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년(인조 14년)에 일어났던 우리 나라와 청과의 싸움.

정묘호란 후 내몽고의 지배에 성공한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으로 고치고, 조선에 대해 군신의

예를 요구해 왔다.

이에 인조는 전국에 선전의 교서를 내리고 결전의 뜻을 밝혔는데, 이를 안 청나라 태종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왔다.
임경업 장군이 의주에서 이를 막아 싸웠으나, 청나라군은 이를 피해 곧바로 서울을 점령했으므로 인조는 남한 산성으로 피해 저항하였다.

그러나 식량 부족과 추위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45일 만에 주화파의 주장에 따라 청나라와

화의를 맺기로 하여 인조가 몸소 삼전도에 나가 강화하였다.
이로써 조선은 청나라와 군신의 관계를 맺고 명나라와의 관계를 끊게 되었으며, 청나라는

효종과 소현세자를 볼모로 잡음.

 


 

병인양요(丙寅洋擾 )

1866년(고종 3년)에 프랑스의 함대가 강화도에 침입한 사건.

병인양요가 일어나기 전에 대원군이 카톨릭 교도들을 박해한 일이 있었는데,

그 때 9명의 프랑스 신부가 죽임을 당하였다.
프랑스는 이를 구실로 우리 나라의 문호를 열고자 로스(Ross)가 이끄는 함대를 파견하여

강화도를 점령하고,일부는 서울로 쳐들어왔으나 문수산성과 정족산성에서 한성근, 양헌수

부대에 패하여 한 달 만에 물러갔다.
그 결과 프랑스의 위신은 크게 떨어지고, 이에 자신을 얻은 대원군은 더욱 쇄국 정책을

강화하게 되었다.

 


 

신미양요(辛未洋擾 )

1871년(고종 8년)에 미국 군함이 우리 나라 강화도 일대에 쳐들어온 사건.

1866년(고종 3년)에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무역을 하자고 대동강으로 와 소란을 피우자

평양 군민이 배를 불태워 버린 사건이 있었다.
그 사건에 대하여 미국은 우리 나라를 책망하고 통상 조약을 맺으려고 베이징에 있던 미국

공사에게 아시아 함대를 출동, 강화도 일대를 공격하게 하였다. 미국의 군함은 강화도의 초지진,

덕진진, 광성진 등을 공격하였다.
그 때 조선은 무장 어재연(魚在淵) 등이 나서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양쪽 군사 수십 명의

사상자를 내고 미군은 물러갔다.
그 결과 흥선 대원군은 의기 양양하여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워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고

쇄국 정책을 더욱 굳게 폈다.

 


 

임오군란( 壬午軍亂)

1882년(조선 고종 19년) 6월에 일본식 군제(軍制)와 민씨 정권에 반항하여 일어난 우리 구식

군대의 병란. 신식 군대의 양성과 군제 개혁에 불만을 품던 차에 급료가 13개월이나 밀린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그 결과 청나라 군대와 일본 군대가 와서 난을 간섭하게 되고, 일본과 강제로 제물포 조약을

맺기에 이르렀다.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년(고종 21년)에 김옥균, 박영효 등 급진 개화파가 일으킨 정변.

일본 세력을 이용하여 청나라의 간섭을 물리치고,

근대적인 혁신 정부를 세우려는 목적으로 급진적인 개혁을 꾀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임오군란 후 청나라의 도움으로 정권을 다시 잡은 민씨 세력은 친청 사대 경향을 띠게 되고,

 청나라는 이 때부터 조선의 내정에 깊이 간섭하였다.
이에 불만을 가진 사람이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재필 등 젊은 개화파들이었다.

이들은 청나라의 간섭을 물리치고 근대 문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빨리 근대 국가를 이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민씨 세력은 청나라에 의존하여 서양 문물을 서서히 받아들이자는 온건 개화파와 손을

잡고 이들의 주장에 반대하였다.

이에 급진 개화파는 빨리 근대화를 이룩하여 열강과 대등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비상 수단을

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때마침 청나라가 청·프 전쟁에서 패배하여 정국이 어수선하게 되자,

급진 개화파는 이 틈을 이용하기로 하고, 일본과 모의하여 정변을 일으켜 혁신 정부를 세우려

하였다.

1884년 10월에 새로 설치된 우정국 개설 축하연을 계기로 급진 개화파는 정변을 일으켜 반대

세력을 몰아내고, 고종을 경우궁으로 모신 뒤 새 내각을 조직하였다. 문벌 타파, 사민 평등,

재정의 일원화, 지조법(地租法)의 개정, 경찰제 실시,

행정 기구 개편 등 14개조로 된 개혁안을 선포하였으나 청나라의 간섭으로 사흘 만에 실패하고,

그 중심 인물들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결과 이 정변은 오히려 조선 국내에 청나라의 세력만 강화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그리고 조선과 일본 간에는 정변의 뒤처리를 위한 한성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청나라와 일본

간에는 톈진 조약이 체결되어 다시 조선은 청나라와 일본의 세력 다툼장이 되었다.

그 목적은 근대적이었으나, 민중의 지지를 바탕으로 하지 않은 위로부터의 개혁이었다는

점과 외국 세력에 기대어 자기들의 정치적 목적을 이루려 한 점이 전근대적이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일어난 자발적인 근대화 운동이었다는 점에 그 뜻이 있다.

 


 

동학 운동(東學運動)

1894년에 전라도 고부군에서 동학 교도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민중 운동. 갑오농민전쟁

또는 동학혁명이라고도 한다.

우리 역사상 외국의 세력에 대한 항쟁과 내정 개혁을 주장하면서 편 가장 큰 민중 운동이다.

동학 운동의 핵심은 악정(惡政)에 대한 항거, 내정 개혁 요구, 외국 세력의 배척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동학 운동의 역사적 배경은 1862년에 벌어진 진주 민란을 시초로 하여 삼남 지방의 농민들이

벌인 삼정 문란에 대한 반항에서 이미 싹터 있었다.

동학은 원래 외국 세력의 배척과 사회 개혁을 바라는 성격을 띠고 있었으므로, 농촌 사회에

그 교세가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계기 동학이 외세 배척과 내정 개혁을 요구하며 그 교세가 날로 커져 가자,

조정에서는 교조인 최제우를 잡아 처형하고 말았다.

이에 교도들은 교조의 죽음이 억울하다 하여 그 죄명을 벗겨 줄 것을 요구하는

‘교조 신원 운동’을 펴게 되었다.

여러 고장에서 큰 모임을 열어 교조 신원과 내정 개혁을 요구하였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럴 무렵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이 부정과 나쁜 짓을 일삼자, 농민들이 그 시정을 요구하고

나섰다(1894년).

이에 조정에서는 관리의 잘못을 다스리지 않고, 오히려 동학 교도와 농민들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전라도 전 지역의 농민들이 들고 일어나 정부에 맞서게 된 것이다.

농민들과 합세한 동학군은 관군을 무찌르고 전주를 점령하였다.

그러자 청·일 양국의 군대까지 출병하게 되고, 동학군은 그들을 물러가게 하기 위하여 동학군

쪽의 요구를 받아들이겠다는 정부와 화해를 하고 흩어졌다.

그러나 정부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일본군의 침략 행동이 강화되기만 하자,

동학군은 다시 일어나 일본군과 싸우게 되었다.

공주 우금치의 싸움에서 동학군이 패전하고, 전봉준 등 지도자들이 체포되면서 동학 운동은

끝나고 말았다.

영향 동학 운동은 비록 불리한 국제 정세로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이후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대내적으로는 갑오개혁으로 정치, 경제, 사회 여러 분야에 걸쳐 일대 혁신을 가져왔다.

대외적으로는 청·일 전쟁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일본의 우리 나라에 대한 침략의 기세가

더욱 거세게 되었다.

동학 운동의 의의는 부패한 지배 계급에게 정치 개혁을 주장하고 나섬으로써 민중의 자각을

크게 높인 데 있다.

그리고 외국 세력에 저항함으로써 민족의 자주 독립 정신을 굳건히 심어 놓은 데 있다.

 


 

을미사변(乙未事變)

1895년(고종 32년)에 일제가 명성 황후를 살해하고 일본 세력의 강화를 꾀했던 정변.

삼국 간섭후 조선에서의 정치적 세력이 크게 줄어든 일본은 갖은 방법으로 그것을 만회하려

했으나, 명성 황후 등 민씨 세력이 친러 정책을 고집하자 최후의 수단을 쓰기로 작정하였다.

그리하여 일본 공사 미우라는 일본인 자객들을 앞세우고 경복궁에 침입하여 명성 황후 등

친러 세력을 죽인 다음, 친일파 인물들로 내각을 꾸며 갑오개혁 후 중단되었던 개혁을 다시

단행하였다.

을미사변으로 잔인 무도한 일본의 행동은 국제적으로 여론을 크게 불러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들의 배일 감정을 극도로 자극하여 의병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그러한 배일 감정을 틈타 친러 세력을 더욱 키우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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