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조선

조선 시대 궁녀 어떻게 살았을까?

오늘의 쉼터 2009. 1. 30. 01:35


조선 시대 궁녀 어떻게 살았을까?


한 세대 평균 600명 궁녀 존재


그렇다면 조선 시대 궁녀는 어떻게 선출됐고, 어떤 삶을 살았을까.

방송 프로듀서나 작가가 사극을 찍기 위해 기본적으로 숙지해야 하는 자료는 [조선왕조실록]과

지난 4월 작고한 김용숙 전 숙명여대 명예교수가 집필한 [조선조 궁중풍속연구]이다.

여기에 작품 소재에 따라 [한중록] [계축일기] [인현왕후전] [운영전] 등이 참고가 되고,

그 시대를 알 수 있는 논문 숙독도 필수다. [조선왕조 500년] [암행어사] [허준] [상도]에 이어 [대장금]을 연출 중인 이병훈 PD는 "〈허준〉을 연출할 땐 조선 의학사와 의녀사를, 〈상도〉를

만들 땐 조선 후기 상업사와 관련한 서적과 논문을 두루 섭렵했다"고 말했다.

조선조 궁녀제도가 정착한 것은 태종 5년인 것으로 실록은 전하고 있다. 그러나 궁녀의 존재는

그 이전부터 있었다. 태종 원년 3월에 '여궁에게 월봉(급)을 지급했다'는 기록도 있다.

궁녀는 궁중 여자 관리의 별칭으로 상궁 이하의 궁인직을 말한다.

조선 시대에는 한 세대에 평균 600명의 궁녀가 존재했다.

이같은 숫자는 영조 때 실학자 이익의 [성호사설]에 나와 있다.

궁녀는 왕이 있는 대전 외에도 왕대비, 또는 대왕대비, 동궁, 그 밖의 왕자와 공주궁,

그리고 후궁과 각 별궁에 소속된 여인까지 포함된다.

또 왕의 사친(私親)의 사당을 지키는 여인도 궁녀라 한다.

외부인은 궁녀를 통틀어 흔히 나인이라고 하지만 그들 자신은 반드시 상궁과 나인을 구별해 썼다. 하지만 물긷기-불때기 등 궁궐의 잡일을 아침-저녁 통근으로 수행하는 무수리나, 붙박이로 각 처소 혹은 상궁의 살림집에 소속된 하녀인 비자(婢子), 약방(병원)기생으로 불린 의녀(醫女)는 나인에 포함되지 않는다.

태종 6년 부녀자 진맥을 위해 양성한 의녀는 비빈들의 출산 때 조산원 역할도 하고, 궁녀들에게 침도 놓아주었으며 여순경 역할도 했다. 또 궁중 안의 크고 작은 잔치 때는 원당에 화관을 쓰고 춤을 추는 무희로 변신했다. 이로 인한 부작용이 커 중인계급에서는 의녀 되기를 기피했고, 평민이나 천민계급에서 선출됐는데, 특히 기생의 딸이 의녀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넓은 의미에서 내명부에 총괄되는 조선조 궁녀의 계층은 정5품부터 종9품까지였다. 이는 성종 때 정해진 것이다. 정5품 상궁직을 최고로 하여 최하 4, 5세의 어린 견습나인(아기나인)까지 있다. [조선조 궁중풍속연구]에 따르면 이들은 각기 소속된 처소에 따라, 그리고 직분과 신분에 따라 서로 다른 명칭을 사용했다. 같은 궁녀라도 귀천(貴賤)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소속되어 있는 곳은 왕 내외가 머무는 곳을 첫째로 하여 궁궐의 의식주에 관련되는 부서다. 지밀(至密)-침방(針房)-수방(繡房)-세수간(洗手間)-생것방(生果房)-소주방(燒廚房)-세답방(洗踏房)으로 구분된다.

 이 중 가장 격이 높은 곳은 지밀이다.

지밀은 왕과 왕비의 신변보호와 기거-잠자리-음식-의복에 이르기까지의 일체의 시중과 내전의

물품 관리, 내시부-내의원-전선사(典膳司)들과의 중요한 교섭을 담당한다.

궁녀 중 엘리트라 할 수 있는 지밀은 왕을 제일 가까이에서 모시기 때문에 후일 왕의 후궁이 될

가능성이 가장 많다. 때문에 겨우 대-소변을 가릴 정도의 4, 5세의 나이에 궁으로 데려와 7, 8세

무렵부터 〈동몽선습〉 〈소학〉 〈내훈〉 〈열녀전서〉는 물론 궁체연습까지 공부한다.

왕 시중드는 지밀이 최고 엘리트


침방은 왕과 왕비의 옷을 비롯해 왕궁에서 소요되는 각종 의복을 제조하고, 수방은 궁중에서

사용하는 복식이나 장식물에 쓰이는 수를 놓는 부서이다.

지밀 다음으로 침방과 수방의 격이 높다.

세수간은 아침-저녁으로 왕실의 세숫물과 목욕물을 대령하는 일을 한다.

요강의 시중과 수건-그릇 세척도 담당하고, 왕비가 궁내 나들이를 할 때는 가마를 메는 일과

그 앞뒤에 서는 일을 수행한다. 생것방에서는 왕이 아침-저녁 식사 외에 드시는 음료와 과자를

만들고, 소주방에서는 아침-저녁 식사와 잔치음식을 관장한다.

드라마 [대장금]의 배경인 수라간은 바로 이 소주방 중 외소주방이다. 소주방은 내소주방과

외소주방이 있다. 내소주방은 평상시 아침-저녁 수라를 관장하는 곳으로 주식에 따른 각종

반찬을 만드는 곳이며 외소주방은 궐 안의 다례와 크고 작은 잔치의 음식을 담당한다.

세답방 나인은 빨래와 다듬이질-다리미질-염색까지 맡는다.

궁녀 중 가장 우두머리는 '제조상궁'(提調尙宮)이다. 때문에 그 권세나 권위가 대단해 역사상

정치의 이면에서 주역을 맡는 경우도 허다했다. 제조상궁은 한 사람뿐이며 궁녀 중 가장 고참에

속하는 것은 물론 학식과 영도력, 외모 가 뛰어나야 한다. 제조상궁은 대전 어명을 받들고,

내전의 크고 작은 일을 주관한다. 재상도 이들을 함부로 하지 못했고 어려운 청원이 있으면 먼저

이 제조상궁에게 부탁하는 일이 많았다고 한다. 심지어 재상과 제조상궁이 의남매를 맺는 경우도 있었다. 

제조상궁 바로 밑엔 부제조상궁이 있다. 부제조상궁은 왕의 사유재산 목록에 드는 귀중품이

들어 있는 내전 곳간을 관장해 일명 '아랫고'라 부르기도 했다.

왕의 곁을 잠시도 떠나지 않고 항상 어명을 받을 자세로 대기하고 있는 '특명상궁'(지밀상궁)과

왕자녀의 양육을 맡은 나인의 총책임자인 '보모상궁', 서적 등을 관장하고 글을 낭독하는 일 등을 수행하는 '시녀상궁', 궁녀들의 근태나 소행 등을 감시해 평가하는 임무를 맡는 '감찰상궁'도 있다. 아무 직함도 붙지 않은 채 그 아래 나인을 총괄하고 그 처소 소관의 모든 업무를 책임지는 일반상궁도 각 처소마다 7~8명씩 있었다.

상궁 중에는 '승은상궁'이라 불리는 이도 있다. 일명 '특별상궁'이라고도 한다. 승은(承恩)은 왕의 손이 닿은 것을 일컫는다. 자녀를 낳지 못한 경우 승은상궁 또는 특별상궁의 지위에 머문다.

이들은 일정한 직책 없이 다른 후궁과 같이 왕의 곁에서 왕을 모신다. 고종의 후궁 중 자녀를 낳은 의친왕 생모 장씨, 완왕 생모 영보당 이씨, 왕자군 육(堉)의 생모 이씨와 우(瑀)의 생모 정씨 등도

승은 직후 상궁이 됐다가 '귀인'으로 올라갔다.

외로운 처지에 동성애 나누기도


그러나 수백 궁녀 중 승은을 입는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을 뚫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고 김용숙 교수는 [조선조 궁중풍속연구] 제1장에서 "그들이야말로 왕권의 그늘에 소리도 없이

피고 지고 간 희생의 꽃들임에 틀림없다"고 했고, 이는 조선 중기의 한문소설로 궁녀의 몸인 운영과 소년 선비 김 진사의 비극적 사랑 이야기를 그린 [운영전]에도 잘 나타나 있다.

[운영전]에서 은섬이란 이름의 궁녀는 "남녀의 정욕은 음양의 이치에서 받은 것이므로 귀천을 막론하고 사람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습니다. 한 번 심궁에 갇히자 외로운 몸이 되어 꽃을 봐도 눈물이 눈을 가리고 달을 대하여도 넋을 잃어, 매화나무에 앉은 꾀꼬리로 하여금 짝을 지어 날지 못하게 합니다"라며 외간남자와 정을 통한 운영을 그의 상전 안평대군 앞에서 변호한다. 효종 5년 9월엔 한 궁녀가 우물에 투신자살한 일도 있었다.
나인은 관례를 치르고 성인이 된 궁녀를 말한다. 관례는 소녀견습여관으로 들어와 15년이 경과해야 할 수 있다.

이들 일반 나인을 소녀나인이나 아래 하녀(무수리-비자 등)는 '항아님'이라고 높여 불렀다. "김씨 항아님", "최씨 항아님" 식이다. 또 상궁은 나인을 부를 때 이름 석 자 사이에 '가'를 넣었다. "박가 복례", "서가 영실" 하는 식이다. 나인 등 아랫사람이 상궁을 부를 때는 '마마님'이라고 하는데, 예를 들어 "침방 김씨 마마님" 식이다. 나인간 엔 서로 "최씨 형님" "김씨 항아님" 식으로 부른다. [대장금]에서는 이에 따르지 않고 이영애 등 나인이 양미경과 견미리에게 각각 "한 상궁 마마님" "최 상궁 마마님"이라 부르고, 나인끼리 서로 "장금아"라고 하는 것은 순전히 시청자의 식별을 돕기 위해서라는 게 이병훈 PD의 설명이다.

궁녀 중에는 '생각시'라고 불리는 소녀나인이 있었다. 머리를 생머리로 빗는다 하여 생각시라 하는데 4, 5세에 입궁하는 지밀과 6, 7세에 입궁하는 침방, 수방의 소녀나인만 생을 맬 수 있었다. 기타 처소의 나인은 12, 13세에 들어와 그로부터 15년 후에야 관례를 하고 정식 나인 행세를 할 수 있다. 하녀들은 이 생각시를 부를 때 "생항아님" 혹은 "애기항아님"이라고 높여 불렀다. 특히 지밀의 생각시들에게는 왕이 부리는 생각시라 하여 어른 상궁도 '해라'를 사용하지 못하고 '이러우, 저러우' 투로 말했다.

조선 초에는 고관의 딸도 궁인으로 들어간 경우가 있었으나 효종 5년 9월, 자식이 궁녀가 되는 것을 피하려고 10세 이상 딸을 가진 집은 앞다투어 혼인시키느라 혼란을 겪었다는 내용이 있다. 궁녀의 삶이 얼마나 고달픈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궁녀는 역적의 후손이어서도 안 되고 유전학적으로나 우생물학적으로 하자가 없어야 선출된다. 재미있는 것은 처녀성 감별법인데, 궁녀 후보자 중 13세 이상 소녀는 의녀가 앵무새의 피를 팔목에 묻혀보고 처녀인지 아닌지 판단했다. 앵무새 피가 묻으면 처녀이고, 묻지 않으면 처녀가 아니라는 것이다.

10세 미만의 애기나인은 한 방에 한 명씩 선배 상궁에게 맡겨져 양육되다가 7, 8세 무렵부터 교양을 쌓았다.

궁녀의 근무는 낮과 밤의 상하번제(지밀의 경우)나 격일제로 이를 '번살이'라고 한다. 근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은 관례 후 정식 나인이 되고부터다. 궁녀의 관례는 성년식과 더불어 사실상 신랑 없는 결혼식도 겸하는 것으로, 본가(친정)에서 버선-누비바지-속치마-장롱 등과 잔치음식까지 장만해 들여온다.

관례를 한 후엔 방을 꾸며 마음맞는 친구와 둘이서 한 가정을 갖는다. 서로 외로운 처지여서 개중엔 동성애를 나누는 경우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외에도 실록에는 궁녀와 얽힌 성범죄도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대상은 왕자군부터 내시-승려 등 다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