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화 - 조선시대에 정치적으로 반대파에게 몰리어 신하 및 선비들이 참혹하게 재화를 입은 사건
계유사화, 병자사화(癸酉, 丙子士禍)
1453년(조선 단종 1년)부터 1456년(세조 2년)에 걸쳐 수양대군(首陽大君=세조)이 단종을 축출하고, 왕위에 오르면서 절개있는 신하들에게 화를 입힌 사건이다. 12세의 어린나이로 단종이 즉위 하였지만, 숙부인 수양대군은 왕위찬탈의 야심을 품고 김종서(金宗瑞), 황보인(皇甫仁) 등의 중신들을 살해하는 한편, 친동생인 안평대군(安平大君) 마저 사약을 내려 죽이고 전권을 장악하여 재위 2년만에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양위하게 되었다. 이에 분게를 느끼고 '하나의 태양 아래서 두명의 왕을 섬길수 없다'는 절의파인 집현전 학자들에 의해 단종복위운동이 일어 났다. 세조는 이를 사전에 알고 성삼문(成三問) 등 사육신을 참형하고 단종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시켜 강원도 강원도 영월로 귀양을 보낸 후 뒤에 사약을내려 죽게 하였다. 단종은 200년후인 숙종때 왕위를 다시 찾아 단종이라 하였다.
무오사화(戊午士禍)
1498년(연산군 4년)에 김일손(金馹孫) 등 신진사류가 유자광(柳子光)을 중심으로한 훈구파에 의하여 화를 입은 사건이다. 당시 성종실록의 편찬이 시작되자 사관(史官)이었던 김일손이 훈구파의 비행과 스승인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에 올렸는데, 이전부터 갈등을 느껴오던 훈구파의 유자광과 이극돈(李克墩) 등이 이것을 문제삼아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방한 것이라고 연산군에게 고해 바쳤다. 이로 말미암아 김종직문하의 수많은 사림파(士林派) 선비들이 화를 당하게 되었다.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년(연산군 10년)에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성종의 비)의 복위 문제로 연산군이 일으킨 사건이다. 연산군의 어머니인 윤씨는 평소에 질투가 많아 폐비(廢妃) 되었다가 사약을 받고 죽었는데, 여기에 많은 선비들이 관련되어 있다. 이에 야심많았던 임사홍(任士洪)은 훈구파와 사림파의 잔존세력을 제거할 목적으로 이 사건을 연산군에게 고해바쳤다. 연산군은 평소 어머니인 윤씨 사건에 대해서 의혹이 많았던 차에 이를 알고선, 그 사건에 관련하여 많은 선비들을 처형하는 한편, 폐비사건 당시의 대신들이었던 한명회(韓明澮), 정여창(鄭汝昌), 남호온(南孝溫) 등 죽은 사랍들도 부관참시(剖棺斬屍) 하였다.
병인사화(丙仁士禍)
1506년(연산군 12년)에 일어난 무오, 갑자사화의 연장된 사화로서 그때 화를 입지않고 빠진사람들에게 죄를 가하기 위하여 일어난 사건이다.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년(중종 14년)에 남곤(南袞), 심정(沈貞), 홍경주(洪景舟) 등 훈구파의 재상들이 당시 새로운 혁신을 감행한 젊은 선비들에게 화를 입힌 사건이다. 연산군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중종은 정치를 개혁하고, 패기에 넘치는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사류를 등용하여 성리학(性理學=주자학)을 크게 장려 하였다. 이에 조광조 등은 중종의 신임을 받아 왕도정치를 실행하고 자격이 없는 공신들의 공신호(功臣號)를 박탈하는 등 과격한 혁신정책을 썼다. 여기에 불안을 느낀 심정, 남곤, 홍경주 등이 갖은 모략과 음모로 조광조 일파가 민중의 지지를 받아 반역을 꾀한다고 주장하여, 30대 젊은 선비들이 죽임을 당하고 이를 옹호한 대신들이 파면되거나 죽음을 당하였다.
신사사화(辛巳士禍)
1521년(중종 16년)에 안처겸(安處謙) 일파들이 심정, 남곤 등에 의하여 화를 입은 사건이다. 기묘사화로 인하여 세력을 잃은 안당(安塘)의 아들 안처겸은 남곤, 심정이 사림(士林)을 해치고 왕의 총명을 흐리게 한다하여 이들을 제거 할것을 모의 하였다. 때마침 안처견의 모친상을 당했는데 남곤의 부하 송사련(宋祀蓮)은 여기에 방문하 사람들의 명단을 적어, 이들이 대신을 해치려 한다고 무고하여 관계된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는 큰 옥사(獄死)가 일어났다.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년(명종 원년)에 왕실의 외척인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의 반목으로 일어난 사건이다. 세자(인종)의 외숙인 윤임(尹任) 일파의 대윤과 경원대군(慶原大君=명종)의 외숙인 윤원형(尹元衡) 일파의 소윤 사이에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암투가 벌어 졌는데 1544년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즉위하자 대윤이 득세했다.
정미사화(丁未士禍)
1547년(명종2년)에 을사사화의 여파로 일어난 사건이며, 일명 벽서의 옥(壁書獄)이라 한다. 전라도 양재역 벽에 '여왕이 집정하고 간신 이기등이 권세를 농하여 나라가 망하려 하니 이를 보고만 있을것인가' 라는 낙서가 발견되어 정권을 잡고있던 이기, 정명순(鄭明順) 등이 을사사화 때 제거하지 못한 반대세력들을 고발하여 수백명의 연루자가 화를 입은 사건이다.
을유사화(乙酉士禍)
1549년(명종 4년)에 이홍남(李洪男), 이홍윤(李洪胤) 형제의 난언(亂言)을 상주(上奏)하여, 이홍남이 역모죄로 몰려 아우 이홍윤 등이 능지처참 되는 한편, 이에 연루된 많은 사람들이 화를 입은 사건이다.
계축사화(癸丑士禍)
1613년(광해군 5년)에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몰아내기 위하여 대북파(大北派)인 정인홍(鄭仁弘), 이이첨(李爾瞻) 등이 일으킨 사건이다. 경상도 문경새재(聞慶鳥嶺)에서 강도사건이 일어났는데, 당시 권세를 잡고 있던 이이첨 등은 이 사건이 김제남(金悌男. 영창대군의 외숙부) 등과 관계가 있다고 고발해, 영창대군이 서민으로 폐봉되어 강화도에서 죽음을 당하였으며, 김제남은 사약을 받고 죽었다.
기사사화(己巳士禍)
1689년(숙종 15년)에 서인(西人)과 남인(南人)들 사이에서 정치적 야욕으로 일어난 사건이다. 당시 정권을 잡고 있던 서인의 송시열(宋時烈) 등은, 장희빈의 아들(후에 경종)을 원자로 책봉하는 것은 시기가 빠르다고 반대했는데, 이를 계기로 실각 중이던 남인들이 왕을 충동하여 서인들이 축출당하는 큰 옥사가 일어났다.
신임사화(辛任士禍)
1721년(경종 1년)에서 1722년(경종 2년) 사이에 일어난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의 대립으로 신축, 임인년 2년에 걸쳐 일어났다고 해서 신임사화라고 하며 임인옥(任寅獄)이라고도 한다. 심신이 허약한 경종이 즉위하자, 노론파 김칭집(金昌集) 등의 건의로 왕세제(王世弟) 연잉군(후에 영조)으로 하여금 대리청정(왕대신 정사를 돌봄)을 실시하게 된다. 이에 불만을 품고 있던 소론파의 김일경(金一鏡) 등은 노론측이 왕의 신병을 조작하여 발설하였다하여 노론 4대신인 김창집, 이건명(李健命), 이이명, 조태채(趙泰采)를 탄핵하고 유배를 보내는 등 옥사를 일으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