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조선

난(亂)

오늘의 쉼터 2009. 1. 30. 16:36

 

 

이괄의 난

조선 인조 2년인 1624년에 일어난 난.

이괄(李适)은 인조 반정에 공이 컸음에도 불구하고 2등 공신에 봉해지고,

그 뒤 평안도 병마 절도사로 좌천되어 불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거기다 반역을 꾀한다는

모함을 받아 아들이 잡혀 가자 부하인 기익헌 등과 함께 난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한때 서울을 점령하고, 인조는 공주로 피난했으나 서울 점령 하루 만에 정부군에

패하여 이괄은 부하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그러나 그 잔당들이 후금으로 달아나 선동함으로써 정묘호란이 일어나는 계기를 만들었다.

 


 

홍경래의 난

조선 순조 11년(1811년)에 평안도 용강 출신인 홍경래(洪景來. 1780∼1812)가

일으킨 반란. 홍경래는 지혜가 있고 문재에 뛰어나 과거에 응시하였지만 지방 차별의

폐습으로 낙방하고 말았다.

그러자 부패한 국정에 불만을 품고, 순조 11년(1811년)에 평안북도 가산의 우군칙 등과

더불어 서북 지방에 대한 정부의 차별을 구실로 난을 일으켜 스스로 평서 대원수라 일컬었다.

4개월 동안 계속된 홍경래의 난으로 한때 청천강 이북의 땅이 그의 손에 들어가기도 했으나,

그 이듬해 4월 정주에서 관군에게 패하여 죽었다.

이 난은 하층 양반과 중소 상인 및 유랑 농민이 합세하여 부패한 조정에 항거한 사건으로,

그 뒤 여러 곳에서 일어난 민란에 영향을 끼쳤다. 홍경래의 난은 비록 실패했지만,

19세기 초에 우리 나라 서북 지방을 뒤흔들어 놓은 대규모의 농민 항거 운동이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정묘호란, 병자호란의 대강

 

호시탐탐 내침의 기회를 노리던 후금이 3년 뒤인 1627년, 3만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해 정묘호란을 일으키자 후금군의 기세에 위험을 느낀 인조와 조정 대신들은 강화도로 피난하였다. 그 때 후금은 조선측에 서신을 보내어 자신들의 침략 이유 일곱 가지를 밝히며 조선의 만주 영토를 후금에 내 놓을 것, 명나라 장수 모문룡을 잡아 보낼 것, 명나라 토벌에 3만 군사를 지원할 것 등 세 가지 요구 사항을 내걸었다. 이에 최명길 등이 강화 회담에 나서 명나라에 적대하지 않으면 후금과 형제 관계를 맺겠다는 등의 다섯 가지 사항을 앞세워 약조를 성립시키자 후금은 철군하였다. 이 후 1636년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꾼 다음 정묘약조에서 설정한 형제 관계를 폐지하고 새로 군신 관계를 맺어 공물과 군사 3만을 지원하라고 했다.

하지만 조선이 이 제의를 거부하자 그들은 다시 12만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여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대군에 밀린 조선군은 남한산성에 1만 3천의 군사로 진을 쳤지만 세력의 열세로 45일 만에 항복하고, 인조는 삼전도에서 무릎을 꿇고 청과 군신의 의를 맺는 한 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청에 볼모로 보내야 했다. 이 때 척화론을 펼치던 홍익한, 오달제, 윤집 등도 함께 청으로 끌려갔다. 병자호란으로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다소 수습되었던 국가 기강과 경제 상태가 악화되어 민생은 피폐해지고 백성들은 굶주림으로 원성이 높았다. 이 모든 일련의 사건의 가장 핵심적인 원인은 이괄의 난 때 이괄이 북방 주력부대를 이끌고 난을 일으켰기에 변방의 수비에 많은 허점이 생겼던 까닭 일 것이다.


 

진주민란(晋州民亂)

1862년(철종 13년)에 진주에서 일어난 민란. 삼정의 문란으로 고통을 겪던 농민들은

새로 부임한 진주 병사(兵使) 백낙신이 가혹한 탄압과 착취를 일삼자, 양반 출신의 농민인

유계춘을 중심으로 난을 일으켜 관아를 습격하고 환곡을 불태우는 등 과격한 행동을 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박규수를 보내어 사태 수습에 나섰다.

그러나 이 난을 계기로 이후 전국 곳곳에서 민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임오군란(壬午軍亂)

1882년(조선 고종 19년) 6월에 일본식 군제(軍制)와 민씨 정권에 반항하여 일어난

우리 구식 군대의 병란. 신식 군대의 양성과 군제 개혁에 불만을 품던 차에 급료가

13개월이나 밀린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그 결과 청나라 군대와 일본 군대가 와서 난을 간섭하게 되고, 일본과 강제로

제물포 조약을 맺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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