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관】 고성(固城) 이(李) 인근시상주봉서(因近侍上奏封書)
한단고기 감수자/ 이기(李沂 1848∼1909 )
【자·호】 백증(伯曾), 해학(海鶴), 질재(質齋), 재곡(梓谷)
【저서·작품】 해학유서(海鶴遺書), 전제망언(田制妄言), 논일인소구진황지소(論日人所求陳荒地疏),
【성 격】 애국계몽운동가
1848(헌종 14)∼1909(융희 3).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백증(伯曾), 호는 해학(海鶴)· 질재(質齋)· 재곡(梓谷)이다. 조선 후기의 사상가이며 애국계몽운동가로서 전라북도 김제(金堤)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문재(文才)가 비범하여 거의 독학으로 학문을 성취하였다. 초기에는 이정직(李定稷) · 최보열(崔輔烈) · 황현(黃玹) 등 주로 도내의 명사들과 문교(文交)를 맺었고, 중앙으로 진출한 후에는 남궁억(南宮檍) · 이건창(李建昌) · 김택영(金澤榮) 등과 교유하여 시문과 도의(道義)를 강마하였다.
그는 국운이 쇠퇴하여 가는 시기에 적극적인 경세구국(經世救國)의 뜻을 세웠는데, 고종 31년(1894)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전봉준(全琫準)에게 ‘군중을 이끌고 서울로 쳐들어가 국왕 주변의 간사한 무리들을 제거하고 왕을 받들어 국헌을 새롭게 하자’고 제의하였다. 이에 전봉준이 찬동하여 남원의 김개남(金開南)에게도 동의를 얻도록 종용하였으나 김개남이 면담조차 거절하고 도리어 그를 해하려 하자 구례로 돌아왔다.
그는 동학농민전쟁을 목격, 체험한 뒤 농민생활의 안정과 국권을 회복하는 데에는 토지개혁이 최급선무라고 생각하였다. 1895년 중앙에 진출하게 되자 극도로 문란해진 전제(田制)의 이정(釐整)을 주장하고 〈전제망언(田制妄言)〉을 지어 탁지부 대신 어윤중(魚允中)에게 건의하였다. 1896년에는 경상좌도 관찰사 이남규(李南珪)의 막료로 초빙되어 모병과 조련 등 지방의 치안유지에 노력, 큰 성과를 거두었다. 1898년 양지아문(量地衙門)이 설치되자 양지위원에 임명되어 우선 아산지방에 관계시안을 실시, 지적(地籍)과 세정(稅政)을 바로잡기에 힘썼다. 1900년 구국에 대한 방책을 중추원에 건의하는 한편, 국민들에게는 자강책을 제창, 분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1902년에는 한반도를 둘러싼 러·일의 각축으로 국운이 더욱 위태롭게 되어가는 상황 속에서 안일하고 한가하게 산림에서 독서·시담(詩談)이나 하는 황현(黃玹)에게 ‘자신은 비록 처사가 될지라도 부모처자가 부로(瀾虜)됨을 막는 데에는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면서 우리가 취해야 하는 민족적 대의를 중국 고대의 사례를 들어 천명하였다. 1904년 고종에게 상소하여 시국에 관한 소신을 개진하고, 특히 4차에 걸친 〈논일인소구진황지소(論日人所求陳荒地疏)〉를 통하여 일제의 이른바 황무지 개척권 강요에 대하여 그 부당성과 그에 대한 대책을 진언하고 홍필주(洪弼周)·이범창(李範昌) 등 수백인의 연소(聯疏)로써 일제에 동조한 이하영(李夏榮)·현영운(玄映運) 등의 매국인을 벨 것을 주장하였다. 같은 해에 올린<인근시상주봉서(因近侍上奏封書)> 를 통해 러일전쟁의 종결 전에 우리의 구강인 서북간도를 회복할 것을 말하였다. 그리고 각 부의 당론자들인 어윤중·신기선(申箕善)·조병직(趙秉稷)·김가진(金嘉鎭) 등에게 글을 보내어 제도개혁과 특히 일제의 침략에 대한 방략을 말하기도 하였다.
그는 1905년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미국에서 강화회의가 열리게 되자 이 강화회의에서 틀림없이 한국에 대한 모종의 결정이 내려지리라 확신하고 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할 것을 외부대신 이하영에게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직접 미국에 건너가 그 회의에 참관하고자 하였으나 일본공사 임권조(林權助)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차선책으로 일본에서 활동하기로 하고 그 해 9월 나인영(羅寅永)·오기호(吳基鎬) 등과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그들은 일본천황과 일본정계 요인들에게 서신을 보내어 세계와 동양의 형세에 대하여 논하고 일본은 마땅히 구약(舊約)을 지켜 한국의 독립을 존중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항상 병탄의 침략책만을 논한다고 힐책하였다. 특히 한국 침략의 원흉 이등박문(伊藤博文)에게 2차에 걸쳐 일본의 배약행위와 러일전쟁 중에 체결된 한일의정서를 들어 통박하였다.
같은 해 12월 귀국한 후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귀향하였다가 위급한 시기에 거상(居喪)으로 향리에 칩거만 할 수 없어 훼탈쇠마(毁脫衰麻)라는 비난을 무릅쓰고 상경하였다. 그는 한성사범학교 교관으로 후진양성에 진력하는 한편, 언론을 통하여 국권수호와 제도개혁에 관한 필진을 전개하였다. 1906년경에는 장지연(張志淵)·윤효정(尹孝定) 등과 함께 대한자강회를 조직하고 그 회보와 《호남학보(湖南學報)》 및 《조양보(朝陽報)》·《야뢰보(夜雷報)》 등에 서문과 논설 발표를 통하여 국민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나인영(羅寅永)·오기호(吳基鎬) 등과 을사오적(乙巳五賊)을 주살할 것을 모의하고 동지를 규합하여 자신회(自信會)를 조직한 뒤 그 취지서를 통해 거사의 대의와 단결의 필요성을 천명하는 한편, 성사 후의 자현장(自現狀)까지 작성하였다. 1907년 거사에 착수하여 권중현(權重顯)을 저격하였으나 실패하고 박제순(朴齊純) 등에 대한 살해계획도 실패하자 자수하여 진도에 유배되었다가 그 해 겨울에 풀려났다. 이후 사망할 때까지 계속 항일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그의 학문적 경향은 조선 후기 실학에 사상적 연원을 두고 있다. 또한 그는 비록 한학을 배웠으나 이제까지 종사해온 학문이 현시세에 부합할 수 없는 무용의 학문이라고 자신을 반성하면서 재래 유가의 상고천금(尙古賤今)의 누습(陋習)에서 탈피하여 시무(時務)와 진취(進取)에 사상적 초점을 두었다. 그의 열렬한 애국정신과 그에 따른 제도개혁안, 그리고 그가 제시한 구체적이고 진취적인 신교육방법에 관한 학견 등은 모두 이러한 사상적 경향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정체(政體)에 있어서는 민권주의와 법치사상을 강조하고, 공화제를 찬양하였으며 국내에서 인민평등을 불허하면 국제사회에서도 우리를 평등하게 대우하지 않을 것이라고 평등론을 내세우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교육목표를 국권회복에 두고 교육을 가정교육 · 학교교육·사회교육의 3종으로 구분하였으며, 이 가운데 신지식·신사조와 내외소식을 소개하는 계몽기관으로서 신문 · 잡지가 주가 되는 사회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저서로는 《해학유서(海鶴遺書)》가 있다.
【참고문헌】 大韓季年史, 梅泉野錄, 滄江稿, 韓國痛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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