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조선

[태종 이방원] 왕자의 난

오늘의 쉼터 2009. 1. 30. 02:25
 
 
[태종 이방원] 왕자의 난

 
"기사일. 기사일. 기사일."

날치는 숨이 턱에 닿도록 달리면서도 '기사일'을 잊어먹지 않기 위하여 '기사일'이라는

말을 되풀이 하며 뛰었다.

운종가를 휘돌아 도당 뒷길을 지나고 인달방 입구에 이르니 개천이 나왔다.

백운동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청계천 원류와 사직골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합류하는 지점이다.


이곳에는 고려시대부터 광통교라는 다리가 있었다. 훗날 태종이 신덕왕후의 신장석을 뜯어다

건립한 청계천의 광통교보다 오래된 다리이지만, 일제강점기에 사라져 버렸다.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으면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로 알려져 있는 창덕궁 금천교보다 더

오래된 다리로 기억될 것이다.


평소에는 가마와 우마차가 지나다니고 사람들도 이용했지만 개천의 수량이 줄어드는

갈수기에는 남정네와 아이들이 아래쪽에 있는 징검다리를 많이 이용했다.

현재 청계천에 자동차가 다니는 다리와 복원된 하천에 인공적으로 만들어 놓은 징검다리와

너무나 흡사하다.


징검다리 건너다 날짜를 잊어먹은 '날치'

날치는 급한 마음에 징검다리를 촐삭거리고 뛰어넘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 물에 빠지고 말았다.

바지가 물에 젖은 것은 말리면 됐지만 그만 '기사일'을 잊어먹고 말았다.

숨을 헐떡거리며 방원의 집에 도착한 날치는 민무질의 수하 두치에게 '제사일'만 되풀이 했다.

부인 민씨의 두 동생 민무구외 민무질은 아예 방원의 집에 기거하고 있었다.


"제사일 입니다요. 제삿날."
"제삿날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제사일이라고 했습니다요."

날치는 뒷머리를 극적이며 커다란 눈망울만 굴리고 있었다.

"기사일을 네가 잘못 들은 것 아니냐? 갑자 을축 병인 정묘 하는 기사 말이다."
"네, 맞습니다. 기사일이라고 했습니다."

그제서야 날치는 환하게 웃었다. 징검다리 건너면서 까먹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

무슨 놈의 날짜가 이렇게 어려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날짜를 헤아리려면 하루, 이틀, 열이레 하면 됐지 무슨 놈의 날짜를 갑자, 을축 하는지

양반네들이 원망스러웠다.


아라비아 숫자가 도입되기 전, 그 당시에는 요즘처럼 몇 월 며칠이 아니라 갑자일,

을축일 무진일, 기사일, 등으로 날짜를 기록했다.

이것도 먹물 먹은 서생들이나 이렇게 사용했지 일반 백성들은 달이 휘영청 떠있는

날이면 보름날,실눈썹 같으면 초사흘 등으로 날짜를 헤아렸으며 초하루, 열엿세,

스무이틀 등으로 불렀다.


"그 소리를 누가 하더냐?"
"병판대감이 했습니다요."
"틀림 없으렸다."
"네, 이 두 귀로 똑똑히 들었습니다요."
"알았다. 들어가서 쉬도록 하여라."

"위기를 기다렸다. 기회로 활용하자"

민무질을 통하여 날치의 첩보를 접수한 방원은 긴급대책회의를 열었다.

수하들이 굳은 얼굴로 모여들었다.

정도전 진영의 움직임이 있을 것이라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정면 맞대응이냐? 피해 가느냐? 그것이 문제였다.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방원이 민무구를 불렀다.


"지금 진천으로 달려가 충청관찰사에게 화급한 일이 생겼으니 즉시 내게로 오라고 일러라,
안산의 이숙번에게도 이 소식을 알려라."

충청관찰사는 하륜을 이르는 말이다. 하륜이 충청도 진천으로 떠나던 날. 저들이 세상을

전복하려 하고 있으니

그러한 낌새가 있으면 군사를 이끌고 즉시 달려오겠다고 다짐하고 떠났다.

이숙번은 신덕왕후 산역을 위하여 이미 역군을 이끌고 도성에 들어와 있었다.


1398년 8월 26일. 대궐에서 연락이 왔다. 태조 이성계의 환우가 위독하니 왕자들은

대궐에 들라는 전갈이었다.

방원은 황망한 마음에 대궐에 나아갔다. 근정전 서쪽 행랑에 도착하니

이미 익안군(益安君) 이방의, 회안군(懷安君) 이방간, 청원군(淸原君) 심종,

상당군(上黨君) 이백경, 의안군(義安君) 이화와 이제 등이 먼저 와 있었다.

임금의 병환이 위중하다니 하나같이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방원이 대궐로 떠난 후, 부인 민씨는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불안한 마음에 안절부절 못하던 부인이 동생 민무질을 불렀다.


"너희 매부가 아무래도 위험할 것 같다.
궁에 들어가 있는 매부를 불러내왔으면 좋겠는데 무슨 좋은 방도가 없느냐?"
"집에 급한 일이 생겼다고 전갈을 넣도록 하지요."

민부인이 종(從) 소근을 불렀다.

"네가 빨리 대궐에 나아가서 공(公)을 오시라고 하여라."
"여러 나리들이 모두 한 곳에 모여 있는데 제가 무슨 말로써 아뢰겠습니까?"
"내가 배가 아파서 아뢴다고 하면 공(公)께서 마땅히 빨리 오실 것이다."

 

 


경복궁 영추문

 

소근이 부인의 전갈을 받들고 경복궁 영추문에 닿으니 경비가 삼엄했다.

진무군사들이 이중삼중으로 쫙 깔려있었다.

정안공댁 종 소근이라 말하고 겨우 영추문을 통과했다.


서쪽 행랑에 나아가니 임금의 환우를 걱정하는 왕실지친들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방원을 찾아 마님이 몹시 아프다고 아뢰니 옆에서 이 소리를 듣고 있던 의안군이

청심환과 소합환(蘇合丸) 등의 약을 주면서 말했다.


"빨리 가서 병을 치료하십시오."

방원이 대궐을 나와 황급히 집으로 돌아왔다.

대궐의 서쪽 출입문 영추문에서 방원의 집까지는 직선거리로 1500자(500m) 정도의

가까운 거리이다.

집에 도착하니 몸져 누워있다는 부인은 멀쩡했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던 방원이

소근을 노려보았다.

공연한 불똥이 소근에게 떨어질 판이다.


"군사를 일으켜 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보살펴야 할 것이오"

"나무라지 마십시오, 제가 오시라고 시켰습니다. 아무래도 불길한 예감이 드니 궁에
나아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버님의 환우가 경각에 달려있는데 무슨 쓸데없는 말씀을 하시는 거요?"
"아닙니다. 전하의 병환은 핑계인 것 같고 다른 음모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들었습니다. 오늘밤에 큰 사단이 날거라고 저자거리에 소문이 자자합니다."

민무질이 거들었다.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여 대궐에 나아가지 않겠소? 더구나 여러 형들이 모두 대궐 안에 있으니

돌아가지 않을 수 없소.

만약 변고가 있으면 내가 나와 군사를 일으켜 나라 사람들의 마음을 보살펴야 할 것이오."


대궐의 낌새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직감한 방원은 민무질에게 이숙번으로 하여금

무장을 갖추고 자신의 사저 앞에 있는 신극례(辛克禮)의 집에 유숙하면서 대기하도록 명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명이 위태로울 듯싶습니다."

부인이 방원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부인의 눈망울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방원은 부인의 손을 뿌리치고 대문 밖으로 나왔다.

말에 오른 방원은 경복궁을 향하여 질풍처럼 내달렸다.


"조심하고 조심하세요."

사라져 가는 방원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부인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눈망울에 고여 있던 눈물이 안고 있던 한 살배기 아기의 얼굴에 떨어졌다.

뜨거운 눈물이 아기의 얼굴에 떨어지자 아기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엄마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이 아기가 훗날 성군으로 추앙받고 있는 세종대왕이다.

 

 

제 1 차 왕자의 난

태조 이성계는 정비인 신의왕후 한씨 사이에

여섯명의 아들 방우 , 방과 , 방의, 방간 , 방원 , 방연을 두엇습니다.

그리고 계비 신덕왕후 강씨 사이에

두아들인 방번 , 방석을 두어 모두 여덟명의 아들을 두었습니다.

 

조선을 건국하여 왕위에 오른 태조이성계는 첫째부인 한씨 소생 왕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당시 총애하던 계비 강씨의 소생 방석을 세자로 책봉했습니다.

한씨 소생 왕자들은 이를 못마땅해 했는데 특히 조선건국의 제 1 공로자로서 고려조의 마지막

수호자 정몽주를 연석에 불러 그의 마음을 떠보기위해 지었다는(하여가)로 유명하며 조선 건국의 반대 세력을 제거할때 큰 역할을 한 다섯째 방원은 이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방원은 친복형제들과 1398년 사병을 동원하여

세자 방석을 지지하던 개국 공신 정도전 , 남 은 등을 제거하고 

이어 세자 방석과 바로 위 방번을 죽이는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이 사건이 바로 제 1 차 왕자의 난 입니다.

 

태조는 둘째 부인 강씨를 총애했다. 강씨는 젊고 총명했으며 친정이 권문세가였기에

태조에게 힘이 되어주기도 했다.
그 때문에 태조는 많은 부분을 그녀에게 의존했으며, 그녀 또한 태조의 집권 거사에

직접 참여하여 막후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1392년 7월, 태조가 조선을 개국하고 한 달 뒤에 소년 방석을 세자로 책봉했을

장남 방우의 나이는 이미 불혹 을 바라보는 39세였고,

방석의 세자 책봉에 대해 가장 불만이 많았던 정안군 방원의 나이는 26세였다.

태조와 강비 그리고 정도전의 방원에 대한 지나친 경계와 냉대, 이것이 화근이 되어 조선왕조는

개국 초장부터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을 감내해야 했다.

 

1398년 무인년 8월 25일, 방원을 비롯한 신의왕후 한씨 소생 왕자들이 사병을 동원하여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 반대파 세력을 불의에 습격하여 살해하고, 세자 방석과  방번을 죽인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을 '제1 차 왕자의 난' '방원의 난' 또는 '무인정사' '정도전의 난'이라고 한다.

그간 꾸준히 병권 집중운동을 벌여오던 정도전 일파는 1398년 이른바 진법 훈련 강화를

내세우며 왕족 들이 거느리고 있던 사병을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상황이 여기에까지 이르자 방원은 극약처방을 내렸다.

방원은 방의와 방간 등 형제들과 함께 정도전 일파를 살해하기로 결정하고

정도전 일파의 밀모설을 만든다.

즉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이 밀모하여 태조의 병세가 위독하다고 속이고 왕자들을

궁중으로 불러들인 후 일거에 한씨 소생의 왕자들을 살육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방원은 이것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사병을 동원 정도전 일파를 습격해 살해하고

세자 방석은 폐위하여 귀양보냈다가 방석의 동복형 방번과 함께 죽여버렸다.


방원은 정도전에게 병권이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를 제거했지만 자신이 권력을 잡자

세력 강화를 위해서 왕족 들의 사병을 혁파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훗날 이것이

 '제2차 왕자의 난'을 유발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제 2 차 왕자의 난

1 차 왕자의 난을 성공하자 방원의 휘하 이 저 , 이거이 , 하륜 , 이숙번 등이

그를 세자로 옹립하려 했으나 정치적 입장과 위의 형들이 있기에, 

방원의 뜻으로  둘째 방과가 세자가 되었습니다.

 

  이가 바로  조선 제 2 대왕 정종입니다. 그런데 후에 정종에게 소생이 없자, 

 세자의 자리를 놓고 내째 방간과 다섯째 방원은 미묘한 갈등을 하던중,

공신록에 불만을 품은 박 포란 자가  방간에게 붙어 세자 자리를 충동질하여

1400년 방간은 방원과 무력 충돌을 했는대 그때 충복들과 사병수가 많은 방원의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바로 이 사건이 제 2 차 왕자의 난 입니다.

그 후에 방원은 세자에 오르고 같은해 11월에 정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 받으니

이가 곧 조선의 제 3 대왕 태종입니다.

 

태조 이성계가 진정 나라와 억조창생을 위해 나라를 세우고자 했다면 태조는

아들들의 권력 탐욕을 가차없이 처단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빗나간 아들들의 욕심을 꺾어야 했다면 목숨을 거두고라도 건국의 뜻을 지켜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태종 이방원이 늦게나마 자신이 제거한 삼봉의 정책들을 수용하여 왕권을

강화한 후로 여러 정책을 실시 하였지만많은 피를 보이며 정권을 잡았기에

아버지에 조선 건국의 위대함이 조금 빛바랬다고 생각합니다.

 

 

 

 왕자의 난과 방원의 세자 책봉   

1400년 정월, 방원의 바로 윗형인 넷째 방간이 박포와 함께 사병을 동원하여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다. 하지만 방원과 그의 사병들이 이들을 조기에 진압하였고,

이 일로 방원은 세자의 자리를 확보한다.

'제2차 왕자의 난'은 일명 '박포의 난' 또는 '방간의 난'이라고도 한다.


왕위 계승과 권력다툼에서 비롯된 '제1차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조선의 세력 구조는

방원 일파에게 유리하게 변화되어 이들이 실권을 장악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아직 방원의 동복형제들은 여전히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이 세력이 방원에게는

만만치 않은 위협 요소였다.

특히 넷째 형 방간은 왕위 계승에 대한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에 방원은

이들 형제들에 대한 경계를 풀지 않았다.

방원은 정도전이 추진하던 병권집중 운동을 이어받아 다른 왕자들의 사병을 혁파할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있었다.

방원이 정략적으로 왕자들의 사병을 혁파할 조짐을 보이고 또한 왕위 계승에 대한 조정의

중론이 방원 쪽으로 흐르자 방간의 시기심과 불만이 쌓이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박포가 방원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밀고하자

그 말의 진위도 가려보지 않은 채 사병을 동원해 난을 일으켰다.

박포는 '제1차 완자의 난' 당시 정도전이 방원을 제거하려 한다고 밀고한 장본이으로서

많은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하지만 논공행상 과정에서 1등공신에 피봉되지 못했음을 불평하다가 도리어 죽주에서

귀양살이를 하는 처지에 있었다.

그러던 중 방간이 방원에게 불만을 품고 있음을 알고 평소 방원에 대해 품고 있던 원망을

이 기회에 풀어보고자 방원이 방간을 죽이려 한다고 거짓밀고를 한 것이다.

방간은 박포의 말을 확인하지도 않고 분기탱천하여 사병을 동원해 방원을 제거하려고

시도한다.

하지만 방간은 방원을 당해낼 수 없었다. 더군다나 다른 형제들 역시 냉담한 반응을 보이며

방원을 지원하고 있었다.

개성 한복판에서 형제간에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지만 결과는 방원의 승리였다.

싸움에서 패배한 방간은 체포되어 유배당하고, 박포는 붙잡혀 사형당하는 것으로

방간의 난은 막을 내렸다.

'제2차 완자의 난'으로 방원에 대한 반대 세력은 거의 소멸되었고 방원의 정치적 입지는

더욱 견고해졌다.

결과적으로 방간의 난은 방원의 왕위 계승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난이 평정된 두 조정 내의 방원 세력은 방원의 왕위 계승권 확보를 위해 전력을 쏟았다.

이제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방원의 심복 하륜의 주청으로 정종은 상왕 태조의 허락을 얻어 1400년 2월에 방원을

세자로 책봉하고 이어 11월에 왕위를 물려주었다.

이와 같이 '제2차 왕자의 난'은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왕자들 간의 싸움이었기 때문에

정치적 세력 판도는 물론 사회적인 영향력도 없었다.

오히려 모든 권력이 방원에게 집중되면서 왕권 강화에 큰 도움이 되었다.

방간의 난이 수포로 돌아간 후, 조정의 대신들은 수차례에 걸쳐 방간을 죽여야 한다고

간언했으나 방원은 왕위에 오른 뒤에도 끝까지 그를 죽이지 않고 유배시키는데 그쳤다.

방원은 오히려 방간이 병을 당하면 의원을 보내 그를 치료하게끔 도와주기도 했다.

또한 방원이 상왕으로 있던 세종 치세 때도 방간에 대한 치죄가 논의되었지만 방원과

세종은 이를 거부했다.

적어도 같은 배에서 나온 형제를 죽이고 싶지 않다는 방원의 강한 형제애의 발로였을 것이다.

방간은 방원의 배려에 따라 천명을 누리다가 1421년 홍주에서 죽었다

(방원이 정종의 동생임에도 세제가 아닌 세자에 책봉된 것은 정종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측면에서 나온 발상이다.

형식적으론 방원이 정종의 세자로서 왕위를 이었지만, 실제론 태조의 세자로 왕위를 잇고자

했던 것이다.

이를 증명하듯 정종은 죽은 뒤에도 묘호를 받지 못했는데, 이는 정상적인 왕으로 대접받지

못했다는 뜻이다.

정종이 묘호를 받은 것은 수백 년이 흐른 뒤인 숙종 대였다.

그때까지 정종은 묘호도 없이 그저 공정왕으로 불렸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