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고구려

26. 영양왕(영陽王)

오늘의 쉼터 2008. 10. 28. 00:59

 

26. 영양왕(영陽王)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영양왕(영陽王)


■ ?∼618(영류왕 1)
■ 고구려 제26대왕
■ 재위 590∼618



※ 본문설명

▶ 가계

일명 평양왕(平陽王)이라 하며, 이름은 원(元) 또는 대원(大元)이다. 평원왕의 맏아들이다.

풍채가 준수하고 제세안민(濟世安民)의 뜻을 가졌다고 한다.

565년(평원왕 7)에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평원왕이 죽은 뒤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의 정치가 어떠하였는지를 전하는 자료는 거의 없다.

그러나 600년(영양왕 11)에 태학박사 이문진(李文眞)을 시켜 종래의 《유기 留記》 100권을 정리하여

《신집 新集》 5권이라는 역사서를 낸 것이 주목된다.

백제와 신라의 경우에도 역사서를 편찬한 왕들은 왕조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군주들임을 생각할 때, 영양왕대의 역사서 편찬은 부왕인 평원왕 이래의 국가의 안정을 위한 모든 노력의 결실을 계승, 발전시킨 국력의 바탕에서 가능하였던 것이라 생각된다.


▶ 대외관계

대외관계에 있어서 영양왕의 위치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다원적인 축에 의해서 유지되어온 6세기 무렵의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589년 수나라의 중국통일로 재편성되어가는 와중에서 고구려와 수나라의 충돌은 불가피하였기 때문이다.

왕은 즉위와 더불어 수나라 문제(文帝)로부터 상개부의동삼사 (上開府儀同三司)의 지위를 인정받았고,

또한 부왕이 가지고 있던 요동군공(遼東郡公)이라는 작위를 계승하는 한편, 조공을 통하여 수나라와의

외교적 관계 모색을 시도하였다. 반면에 국경수비를 강화하고 말갈족·거란족들을 조종하여 자기편에 넣고 돌궐족과의 제휴도 모색하였다.

이와같이, 화전양면에 대비하면서 노력하는 가운데에, 왕은 598년에 말갈의 군사를 이끌고 요서(遼西)를 선제공격하였다.

이에 수나라는 국력을 총집결하여 4차례에 걸쳐 고구려를 침공해왔다.


▶ 수나라의 침입

제1차 침입은 598년에 고구려군의 요서공격에 대한 반발로 수나라의 30만 군사가 쳐들어왔으나 기근·질병·장마 등으로 저절로 퇴각하였다.

제2차 침입은 612년에 양제(煬帝)가 국력을 경주하여 130만 대군으로 수륙 양면의 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요동성(遼東城)에서 지구전을 펴 수군의 침략예봉을 꺾고, 또 대동강에서는 침략군의

해군을 대파하였다.

이에 수나라는 별동대를 구성하여 평양성 가까이 진격하였으나 군량의 부족으로 후퇴하던 도중 명장

을지문덕(乙支文德)에 의하여 살수(薩水)에서 참패를 당하여 총퇴각하였다.

제3차 침입도 613년에 있었으나 요동성·신성(新城) 등에서 고구려군이 선전하였고, 또한 수에서

양현감(楊玄感)의 반란이 일어나 철수하게 되었다.

제4차 침입은 614년에 있었는데, 수나라 내부의 혼란과 고구려의 평화교섭의 때가 일치하여 철군하였다.

이 전쟁에서 결정적으로 피해를 입은 수나라는 곧 멸망하였으나, 고구려도 커다란 타격을 받았다.

그리고 신라와는 빼앗긴 한강유역 탈환을 위하여 온달(溫達)이 아단성(阿旦城)을 공격하였고,

 603년과 608년에는 북한산성을 공격하였다.

이때에 백제와 고구려로부터 압박을 받던 신라는 적극적으로 수나라와의 교섭에 나서게 되었다.

또, 백제에 대해서도 백제가 수나라와 접근책을 쓰므로 598년과 607년에 이를 공격하였으나,

수나라와의 대결을 위하여 한편으로는 관계 개선에도 노력하였다.

한편, 일본과의 교류도 활발하여 595년에는 일본 쇼토쿠태자(聖德太子)의 스승이 된 혜자(惠慈)가

도일하였고, 610년에는 담징(曇徵)·법정(法定) 등을 파견, 일본에 많은 문화적 영향을 주었다.

--------------------------------------------------------------------------------

▶ 참고문헌

三國史記
隋書
日本書紀
高句麗·百濟·新羅 사이의 力關係變化에 대한 一考察(盧重國, 東方學志 28, 1981)
5, 6世紀 東아시아의 國際情勢와 高句麗의 對外關係(盧泰敦, 東方學志 44, 1984)
隋唐二朝高句麗遠征の地理(松井等, 滿洲歷史地理 1, 1913)
高句麗攻守の形勢(末松保和, 靑丘史草 1, 1965)


※ 전문설명

 

영양왕의 살수대첩ad590(홍무)~ad618

 

영양왕(瓔陽王)<또는 평양(平陽)이라고도 하였다.>은 이름이 원(元)<또는 대원(大元)이라고도 하였다.>이고 평원왕의 맏아들이다. 풍채가 뛰어났다. 세상을 잘 다스려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자신의 일로 여겼다. 평원왕이 재위 7년에 태자로 삼았고, 32년에 왕이 죽자 태자가 즉위하였다. 수나라 문제가 사신을 보내 왕을 상개부 의동삼사(上開府儀 同三司)로 삼고, 요동군공의 작위를 이어받게 하였으며, 의복 한 벌을 주었다.
연호가 홍무弘武였다.

 

2년(591) 봄 정월에 사신을 수나라에 보내 표(表)를 올려 사은하고 왕을 봉해 주기를 청하니,

황제가 이것을 허락하였다.

3월에 수나라 황제가 고구려왕으로 책봉하고 수레와 의복을 주었다.

여름 5월에 사신을 [수나라에] 보내 사은하였다.

3년(592) 봄 정월에 사신을 수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8년(597) 여름 5월에 사신을 수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9년(598) 봄 2월에 왕은 말갈의 무리 만여 명을 거느리고 요서를 침략하였는데,

영주(營州) 총관(摠管) 위충(韋沖)이 이를 격퇴시켰다.
수나라 문제가 이 소식을 듣고 매우 노하여 한왕(漢王) 양(諒)과 왕세적(王世積)을 모두 원수(元帥)로

삼아서, 수군과 육군 30만을 거느리고 와서 고구려를 쳤다.

여름 6월에 황제가 조서를 내려 왕의 관작을 빼앗았다.
한왕 양의 군사가 임유관(臨楡關)으로 나와서 홍수를 만나 군량의 운반이 이어지지 못하자,

군사들은 식량이 떨어지고 또 전염병에 걸렸다.

주라후(周羅[])가 동래(東萊)로부터 배를 타고 평양성으로 쳐들어 오다가,

역시 바람을 만나 배가 많이 표류하고 가라앉았다.
가을 9월에 수나라의 군대가 돌아갔으나 죽은 자가 열 명 중 여덟 아홉이었다.

왕도 역시 두려워하여서 사신을 보내 사죄하고 표를 올려 ‘요동 더러운 땅의 신하 모(某)’라고

스스로 칭하였다.

황제가 이리하여 군진을 풀고 고구려를 처음과 같이 대하였다.

 

이에 대하여 신채호(申采浩)가 쓴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기록은 아래와 같다.
기원 597년은 곧 고구려 영양왕 8년이요,

수의 문제(文帝)가 진(陳) 을 병합하여 지나를 통일한 지 17년되는 해이다 수는 이즈음에 자주 풍년이 들고 군사가 넉넉하자 고구려에 대해 자웅을 다투고자 무망 (誣罔)이 심하고 패만(悖慢)하기 이를 데 없는 모욕적인 글을 보내왔는데, 그 대강은 이러하였다.
“짐이 천명을 받아 온 천하를 애육(愛育)하여 왕에게 바다 한 귀퉁이를 맡기는 것은 교화(敎化)를 드날려서 원로방지(圓로方趾)로 각기 그 천성 (天性)을 다하게 함이라, 왕이 매양 사절을 보내 해 마다 조공 (朝貢)하니, (다른 나라가 사신 보내는 것을 조공이라고 함은 지나 춘추시대 이래의 상례로 그들의 역사책에나그렇게 썼을뿐 대등한나라에 보내는 국서에는 쓰지 못했는데, 이제 고구려의 노여움을 격발시켜 한 번 싸우고자 고의로 쓴 것임) 비록 번부(藩附)라 일컫기는 하지마는 정성이 미흡하다. 왕이 이미 짐의 신하이니 짐의 덕을 본받음이 옳은데, 왕은 말갈(靺鞨)을 구축하고 글안을 가두어 왕의 신첩 (臣妾)을 만듣고 짐에게 내조(來朝)하는 것을 막아 착한 사람이 의를 사모함을 밉게 여기니 어찌 이같이 해독이 심하냐? 짐의 태부(太府)에 공인 (工人)이 적지 아니하니 왕이 쓰고자 할진대 아뢰면 얼마든지 보낼 것인데, (부강함을 과장한 말) 왕이 지난번에 가만히 재물을 써서 소인을 이용하여 군사를 기르고 병기를 수리하니 이것이 무엇을 하려 함이 냐.-----고구려가 비록 땅이 좁고 백성이 적지마는 이제 왕을 내쫓고 반드시 다른 관리를 보낼 것이로되, 왕이 만일 마음을 씻고 행실을 바 꾸면 곧 짐의 좋은 신하이니 어찌 반드시 달리 관리를 두랴. 왕은 잘 생각하라. 요수(遼水)가 넓다 한들 장강(長江 : 揚子江)과 어찌 비하 며, 고구려 군사가 많다 한들 진국(陳國)과 비하랴. 짐이 만일 기를 생각을 두지 않고 왕의 허물을 책할진대, 한 장군을 보내면 족하리니 무슨 큰 힘이 들랴마는 그래도 순순히 타일러서 왕이 스스로 새로워지기를 바란다.”삼국사기에는 수의 문제가 이 글을 평원왕(平原王) 32년(기원 590 년)에 보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수서(隋書)에는 문제의 개황(開皇) 17년에 보낸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평원왕 32년은 문제 개황 17년 이 아니니‘ 삼국사기에는 연조를 잘못 기록하였고, 개황 17년은 평원왕이 돌아간 지 7년 뒤이니, 수서에는 왕의 대를 잘못 기록한 것이다. 이웃나라 제왕의 별세는 매양 그 사실을 보고해온 해에 기록하고, 따라서 그 사실이 발생한 연조를 틀리게 고쳐 쓰는 것은 지나의 춘추시대 이래의 습관이므로 수서에 그러한 잘못된 기록이 생기게 된 것인데, 삼국사기는 평원(平原) · 영양(慶陽) 두 본기의 연대는 고기(古記) 를 좇고 서로 관계된 사실은 오로지 수서에서 뽑아 기록하여 수서에 이 글이 평원왕에게 보낸 것이라고 하였으므로 사기에 그 글을 평원왕 32년에 옮겨 기재하여 연대를 그르치는 동시에 사실에 관계된 인물까지 잘못 기록한 것이다.

영양왕이 이 모욕적인 글을 받고 크게 노하여 여러 신하들을 모아 회답의 글을 보낼 것을 의논하니,
강이식(姜以式)이 “이같이 오만무례한 글은 붓으로 회답할 것이 아니요 칼로 회답할 것입니다.” 하고 곧 개전(開戰)하기를 주장하니 왕이 그의 말을 좇아 강이식으로 병마원수(兵馬元帥)를 삼아서 정병 5만을 거느리고 임유관(臨愉關)으로 향하게 하고, 먼저 예 (濊 : 隋書의 靺鞨) 군사 1만으로 요서 (遼西)에 침입하여 수의 군사를 유인하게 하고 글안 군사 수천 명으로 바다를 건너가 지금의 산동(山東)을 치게 하니 이에 두 나라의 첫 번째 전쟁이 시작되었다. 삼국사기에는 강이식의 이름이 보이지 아니하니 그것은 수서만을 뽑아 기록하였기 때문이거니와, 대동운해(大東韻海)에는 강이식을 살수전쟁(薩水戰爭) 때의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라 하였고, 서곽잡록(西郭雜錄)에는 강이식을 임유관 전쟁의 병마원수라고 하여 두 책의 기록이 같지 아니하다. 그러나 살수전쟁에는 왕의 아우 건무(建武)가 해안을 맡고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육지를 맡았으니 어찌 병마도원수 강이식이 있었으랴? 그러므로 서곽잡록의 기록을 쫓는다.


이듬해 고구려의 군사가 요서에 침입하여 요서총관(遼西總管) 위충 (韋沖)과 접전을 벌이다가 거짓 패하여 임유관에서 나오니, 수의 문제 가 30만 대군을 들어 한왕(漢王) 양양(楊諒)으로 행군대총관(行軍大總管)을 삼아 임유관으로 나오고, 주나후(周羅喉)로 수군총관(水軍總 管)을 삼아서 바다로 나아가게 하였다. 주나후는 평양으로 향한다는 말을 퍼뜨렸으나 실은 양식 실은 배를 인솔하여 요해(遼海)로 들어와 양양의 군량을 대주려 함이었다. 강이식이 수군을 거느리고 바다 가운데 들어가 이를 맞아 쳐서 배를 격파하고, 군중에 영을 내려 성책을 지키고 나가 싸우지 말라하니, 수의 군사는양식이 없는데다가 또한 6월의 장마를 만나 굶주림과 전염병에 숱한 사람이 낭자하게 죽어가 퇴군하기 시작하였다. 강이식이 이를 추격하여 전군을 거의 섬멸하고 무수한 군기를 얻어 개선하였다.


수서에는 “양양의 군사는 장마에 전염병을 만나고, 주나후의 군사는 풍랑을 만나 퇴각하였는데 , 죽은 자가 열에 아흡이었다. ”고 하여 불가항력(不可抗力)의 자연의 힘에 패한 것이고, 고구려에게 패한 것이 아니라고 기록하였으나 이는 중국의 체면을 위해 치욕을 숨기는 저 들의 이른바 춘추필법(春秋筆法)에 의한 것이니, 임유관 싸움은 물론이고 다음 장에서 말할 살수(薩水) 싸움의 기록에도 그러한 투의 기록 이 많다. 아무튼 임유관 싸움 이후에 수의 문제가 고구려를 두려워하여 다시 군사를 일으키지 못하고, 피차 휴전 조약을 맺고 상품의 무역 을 다시 시작하여 두 나라 사이에 10여 년 동안이나 아무 일이 없 었다.


병마도원수 강이식장군의 묘는 옛 고구려 땅 심양현(瀋陽縣) 원수림(元帥林)에 있다.
현재 심양시 동쪽 무순시撫順市 살수수薩爾滸水 부근에 고구려 병마도원수 강이식姜以式 장군의 묘인

원수림元帥林이 남아있다.


  강이식 병마도원수 원수림에 남아있던 고구려 석물

 

백제왕 창(昌)이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표를 올려서 군대의 길잡이가 되겠다고 청하였다.

황제는 조서를 내려 『고구려가 죄를 자복하여 짐이 이미 용서하였으므로 벌할 수 없다.』고 하고,

그 사신을 후하게 대접하여 보냈다. 왕은 그 사실을 알고 백제의 변경을 침략하였다.

 

11년(600) 봄 정월에 사신을 수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대학박사(大學博士) 이문진(李文眞)에게 명하여 옛 역사책을 요약하여 신집(新集) 5권을 만들었다.

국초에 처음으로 문자를 사용할 때 어떤 사람이 사실을 100권으로 기록하여 이름을 유기(留記)라고

하였는데, 이 때에 와서 깎고 고친 것이다.

 

14년(603) 가을 8월에 왕은 장군 고승(高勝)을 보내 신라의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쳤다.
신라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한수(漢水)를 건너오니, 성안에서는 북치고 소리지르며 서로 호응하였다.

고승은 저들이 수가 많고 우리는 적으므로, 이기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물러났다.

 

18년(607). 이전에 양제(煬帝)가 계민(啓民)의 장막에 행차하였을 때 우리 사신이 계민의 처소에 있었는데, 계민이 감히 숨기지 못하고 함께 황제를 알현하였다. 황문시랑(黃門侍郞) 배구(裵矩)가 황제에게 말하였다. “고구려는 본래 기자(箕子)에게 봉해진 땅으로, 한(漢)나라와 진(晉)나라가 모두 군현으로 삼았습니다. 지금 신하노릇을 하지 않고 따로 이역(異域)이 되었으므로 선제께서 정벌하려고 한 지 오래됩니다. 다만 양량(楊諒)이 불초하여 군대가 출동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폐하의 때를 당하여 어찌 취하지 않음으로써 예의가 바른 지경을 오랑캐의 고을로 만들겠습니까?

지금 그 사신은 계민이 온 나라를 들어 복종하는 것을 직접 보았습니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을 이용해서 위협하여 입조하게 하십시오.” 황제가 그 말에 따라 우홍(牛弘)에게 명하여 칙명을 내리게 하였다.
『짐은 계민이 성심껏 나라를 받들기 때문에 친히 그 장막으로 왔다. 내년에는 마땅히 탁군(琢郡)으로 갈 것이다. 네가 돌아가는 날, 너의 왕에게, 마땅히 빨리 와서 조회하고 스스로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아뢰어라. 위문하고 양육하는 예는 마땅히 계민의 경우와 같이 할 것이다. 만약 조회하지 않으면 장차 계민을 거느리고 너희 땅으로 순행할 것이다.』 왕은 번신(藩臣)의 예를 갖추지 못하였으므로 황제가 쳐들어 올 것을 두려워하였다.

계민은 돌궐의 극한(可汗)이다. 여름 5월에 군대를 보내 백제 송산성(松山城)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석두성(石頭城)으로 옮겨 습격하여 남녀 3천 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19년(608) 봄 2월에 장수에게 명하여 신라의 북쪽 변경을 습격하여 8천 명을 사로잡았다.

여름 4월에 신라 우명산성(牛鳴山城)을 함락시켰다.

22년(611) 봄 2월에 양제가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토벌하게 하였다.

여름 4월에 황제의 행차가 탁군의 임삭궁(臨朔宮)에 이르니, 사방의 군사들이 모두 탁군으로 모였다.

 

23년(612) 봄 정월 임오(壬午)에 황제가 조서를 내렸다.

『고구려의 보잘 것 없는 무리들이 미욱스럽고 공손하지 못하여, 발해(渤海)와 갈석(喝石) 사이에 모이고, 요수(遼水)와 예수(濊水)의 경계를 거듭 잠식하였다.

비록 한(漢)나라와 위(魏)나라가 거듭 주륙하여 소굴이 잠시 위태로왔으나, 난리로 막힘이 많자 부족이 다시 모여, 지난 시대에 냇물과 수풀처럼 모여, 지금까지 번창하였다.

돌아보건대 저 중국의 땅이 잘리어 오랑캐의 부류가 되었다. 세월이 오래되어 악이 쌓여 가득차니,

하늘의 도가 음란한 자에게 재앙을 내리고, 망할 징조가 이미 나타났다.

떳떳한 도를 어지럽히고 덕을 무너뜨림이 이루 헤아릴 수 없으며, 악을 가리고 간사함을 품은 것은 헤아리기에 날이 오히려 부족할 정도이다. 조서를 보내 엄격히 알린 것도 일찍이 면대(面對)하여 받지 않았으며, 조정에 알현하는 예도 몸소 하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도망간 반도(叛徒)들을 꾀어냄이 끝닿는 데 모르고, 변방에 가득하여 봉후(烽候)를 괴롭히니, 문빗장과 딱다기가 이로써 조용하지 못하고, 백성이 그로 말미암아 생업을 폐하게 되었다. 옛날에 정벌할 때 하늘의 그물에서 빠졌으며, 이전에 사로잡아 죽일 것도 늦추어주고, 뒷날 복종하여 목베임도 당하지 않게 해주었는데, 일찍이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악을 쌓아, 거란의 무리를 합쳐서 바다의 수자리 군사들을 죽이고, 말갈의 습관을 익혀 요서를 침범하였다. 또 청구(靑丘)의 바깥에서 모두 직공(職貢)을 닦고, 벽해(碧海)의 가장자리에서 함께 정삭을 받드는데, 드디어 다시 보물을 빼앗고 왕래하는 길을 막아, 죄없는 사람들에게 잔학함이 미쳤으니, 정성을 바치고도 화를 당하게 되었다. 수레를 탄 사신이 해동에 미치고, 정절(旌節)이 도달하려면, 번국의 경계를 지나야 하는데, 도로를 막고 왕의 사신을 거절하여, 임금을 섬길 마음이 없으니, 어떻게 신하의 예라고 할 수 있느냐? 이래도 참는다면 무엇을 용납하지 못할 것이냐? 또 법령이 가혹하고 부세가 번거롭고 무거우며, 힘센 신하와 호족이 모두 국정의 기틀을 쥐고, 붕당끼리 결탁하는 것으로 풍속을 이루고, 뇌물을 주고 받음이 물건을 사고 파는 것과 같아서, 억울함이 풀어지지 않는다. 해마다 거듭된 재앙과 흉년으로 집집마다 기근이 닥치고, 전쟁이 쉬지 않아 요역이 기한이 없으니, 군량 운반으로 힘이 다하고 [죽은] 몸뚱아리가 도랑과 구덩이를 메웠다. 백성들이 근심하고 고통스러우니 누구를 따를 것이냐? 경내(境內)가 슬프고 두려워 그 폐해를 견디지 못하였다. 머리를 돌려 안으로 보고 제각기 생명을 도모할 생각을 품고, 노인과 어린이들도 모두 혹독하다는 탄식을 일으킨다. 풍속을 살피고 유주, 삭주(朔州)에 이르러 사람들을 위로하고 죄를 묻는 일이 두번 걸음하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이리하여 친히 6사(六師)를 거느리고 9벌(九伐)을 펴서, 위태함을 구제하여 하늘의 뜻에 따르며 이 달아난 무리를 멸하여 능히 선대의 교훈을 이으려 한다. 지금 마땅히 군율을 내려 출발하고 지휘를 나누어서 길에 이르러, 발해를 덮쳐 천둥같이 떨치고, 부여를 지나 번개같이 쓸어 버리리라. 방패를 가지런히 하고 갑옷을 살피고, 군사들에게 경계하여 일러둔 후에 출행하며, 거듭 알리고 타일러서 필승을 기한 후에 싸우라. 왼쪽 12군(軍)은 누방(鏤方) ·장잠(長岑) ·명해(溟海) ·개마(蓋馬) ·건안(建安) ·남소(南蘇) ·요동(遼東) ·현도 ·부여 ·조선 ·옥저 ·낙랑 등 길로 나아가고, 오른쪽 12군은 염제(蟬) ·함자(含資) ·혼미(渾彌) ·임둔(臨屯) ·후성(候城) ·제해(堤奚) ·답돈(踏頓) ·숙신 ·갈석 ·동이(東) ·대방(帶方) ·양평(襄平) 등 길로 나아가서, 연락이 끊어지지 않게 길을 이어 가서 평양에 모두 집결하라.』 모두 1,133,800명이었는데 200만이라 일컬었으며, 군량을 나르는 자는 그 배가 되었다. 남쪽의 상건수(桑乾水) 가에서 사제(社祭)를 지내고, 임삭궁(臨朔宮) 남쪽에서 상제(上帝)에 제사지내고, 계성(城) 북쪽에서 마조성(馬祖星)에 제사지냈다. 황제가 친히 조절하여 군대마다 상장(上將)과 아장(亞將)을 각각 1명씩 두고, 기병은 40대(隊)로 하고, 각 대는 100명, 10대가 1단(團)이 되게 하였으며, 보병은 80대로 하고 나누어 4단으로 하였으며, 단마다 각각 편장(偏將) 1명을 두었다. 그 갑옷, 투구, 갓끈, 인장끈, 깃발은 단마다 색깔을 다르게 하였다. 매일 1군씩을 보내 서로 40리 떨어지게 하고 진영을 연이어 점차로 나아가니, 40일만에야 발진이 다 끝났다.

앞과 뒤가 서로 이어지고 북과 나팔소리가 서로 들리고 깃발이 960리에 뻗쳤다. 어영(御營) 안에 12위(衛)·3대(臺)·5성(省)·9시(寺)를 합쳐서 나누어 소속시키고, 내외 전후 좌우(內外前後左右) 6군을 뒤에 출발시켜 또 80리나 뻗쳤으니, 근고에 군대 출동의 성대함이 이와 같은 것이 없었다.

2월에 황제가 군대를 지휘하여 요수(遼水)에 이르니 여러 군대가 모두 모여 물가에 다다라 큰 진을 이루었으나, 우리 군사가 강을 막고 지켰으므로 수나라 군사가 건너오지 못하였다. 황제가 공부상서(工部尙書) 우문개(宇文愷)에게 명하여 요수 서쪽 언덕에서 세 개의 부교(浮橋)를 만들게 하였는데, 완성되자 끌어다 동쪽 언덕으로 갔으나 짧아서 한 길 남짓하게 언덕에 미치지 못하였다. 이때 우리 군사들이 크게 닥치자 수나라 군사로서 날래고 용감한 자들은 다투어 물가로 나아와 접전하였다. 우리 군사들이 높은 곳에 올라 공격하니, 수나라 군사들은 언덕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맥철장(麥鐵杖)이 언덕으로 뛰어 올라갔으나 전사웅(錢士雄) ·맹차(孟叉) 등과 함께 모두 전사하니, 이에 군사를 거두어 다리를 끌고 서쪽 언덕으로 돌아갔다. 다시 소부감(少府監) 하조(何稠)에게 명하여 다리를 잇게 하여 이틀만에 완성하였으므로, 여러 군대가 차례로 이어서 나아가 동쪽 언덕에서 크게 싸웠는데, 우리 군사들은 크게 패하여 죽은 자가 만 명을 헤아렸다. 여러 군대가 승세를 타고 나아와서 요동성을 포위하니 [이 성은] 곧 한나라의 양평성(襄平城)이었다. 황제가 요하에 이르자 조서를 내려 천하에 사면을 베풀고, 형부상서(刑部尙書) 위문승(衛文昇) 등에게 명하여 요하 동쪽의 백성들을 위무하게 하고, 10년 동안 조세를 면제해주고 군현을 두어 서로 통섭하게 하였다.

여름 5월. 이전에 여러 장수가 동쪽으로 내려올 때 황제가 경계하여 말하였다. “모든 군사 일의 나아가고 멈춤을 반드시 나에게 아뢰어 회답을 기다릴 것이며 제멋대로 하지 말아라.” 요동에서 우리 군사는 자주 나가 싸우다가 불리하면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황제가 여러 군대에게 명하여 공격하게 하고, 또 여러 장수에게 “고구려가 만약 항복하면 마땅히 어루만져서 받아들일 것이며 군사를 풀지 말라.”고 명하였다. 요동성이 함락되려 하자 성 안의 사람들은 문득 항복을 청한다고 하였다. 여러 장수가 황제의 명을 받았으므로 감히 때에 맞추어 바로 가지 못하고, 먼저 사람을 시켜 급히 아뢰었는데, 회답이 올 때는 성 안의 방어도 역시 갖추어져 적절히 나가 항거하여 싸웠다. 이렇게 하기를 두세 번 거듭하였으나 황제가 끝내 깨닫지 못하였으며, 그후 성은 오랫동안 함락되지 않았다. 6월 기미(己未)[11일]에, 황제가 요동성 남쪽으로 행차하여 성과 못의 형세를 살펴보고 여러 장수를 불러 힐책하였다. “그대들은 스스로 관직이 높기 때문에 또 가문을 믿고 나를 어리석고 나약한 사람으로 대접하려 하느냐? 수도에 있을 때 그대들은 모두 내가 오는 것을 원치 않았으니 그것은 낭패를 볼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이곳에 온 것은 바로 그대들의 소행을 보고 그대들의 목을 베려는 것이다. 그대들이 지금 죽음을 두려워하여 힘을 다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내가 그대들을 죽이지 못할 것으로 여겨서이냐?” 여러 장수들이 모두 두려워 떨며 얼굴빛을 잃었다. 황제가 이에 요동성의 서쪽 수 리 떨어진 곳에 머물러 육합성(六合城)에 거하였는데, 우리의 여러 성들은 굳게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다. 좌익위대장군(左翊衛大將軍) 내호아(來護兒)가 강회(江淮)의 수군을 거느리고 배를 수백 리에 뻗쳐서 바다를 건너 먼저 패수(浿水)로부터 들어와서, 평양에서 60리 떨어진 곳에서 우리 군사와 서로 맞닥뜨리자 진격하여 이를 크게 깨뜨렸다. 내호아가 승세를 타고 성으로 달려오려고 하였으나, 부총관(副摠管) 주법상(周法尙)이 말리며, 여러 군대가 오기를 기다려 함께 나아갈 것을 청하였다. 내호아가 듣지 않고 정병 수만 명을 뽑아 곧바로 성 밑에 이르렀다. 우리 장수는 나성 안의 빈 절 속에 군사를 숨겨 두었다가, 군사를 내어 내호아와 싸우다가 거짓으로 패하였다. 내호아가 쫓아 성으로 들어와서 군사를 놓아 약탈하느라고 다시 대오를 갖추지 못하였다. 이때 숨은 군사들이 나가니 내호아가 크게 패하고 겨우 죽음을 면하였으며, 병졸이 돌아간 자가 불과 수천 명이었다. 우리 군대는 뒤쫓아 배 있는 곳까지 이르렀으나, 주법상이 진영을 정비하고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우리 군대는 이에 후퇴하였다. 내호아가 군사를 이끌고 바닷가 포구로 돌아가 주둔하였으나, 다시는 감히, 머무르면서 여러 군대에 호응하지 못하였다. 좌익위대장군 우문술(宇文述)은 부여도(扶餘道)로 나오고, 우익위대장군(右翊衛大將軍) 우중문(于仲文)은 낙랑도로 나오고,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 형원항(荊元恒)은 요동도로 나오고, 우익위대장군 설세웅(薛世雄)은 옥저도로 나오고, 우둔위장군(右屯衛將軍) 신세웅(辛世雄)은 현도도로 나오고, 우어위장군(右禦衛將軍) 장근(張瑾)은 양평도(襄平道)로 나오고, 우무후장군(右武候將軍) 조효재(趙孝才)는 갈석도로 나오고, 탁군태수 검교좌무위장군(檢校左武衛將軍) 최홍승(崔弘昇)은 수성도(遂城道)로 나오고, 검교우어위호분랑장(檢校右禦衛虎賁郎將) 위문승(衛文昇)은 증지도(增地道)로 나와서 모두 압록수 서쪽에 모였다. 우문술 등의 군사는 노하(瀘河)·회원(懷遠) 두 진에서부터 사람과 말에게 모두 100일 동안의 군량을 주고, 또 방패, 갑옷, 창과 옷감, 무기, 화막(火幕)을 나누어 주니, 사람마다 3섬 이상이 되어 무거워 능히 운반할 수 없었다. 군중에 명령을 내려 “군량을 버리는 자는 목을 베겠다.”고 하였으므로, 사졸들이 모두 군막 밑에 구덩이를 파고 묻었다. 행군이 겨우 중도에 미쳤을 때 군량이 이미 떨어지려 하였다. 왕은 대신(大臣) 을지문덕(乙支文德)을 보내 그 진영에 가서 거짓으로 항복하였는데, 실은 그 허실을 보려 한 것이었다. 우중문이 앞서 “만약 왕이나 을지문덕이 오면 반드시 사로잡으라.”는 황제의 비밀 명령을 받았다. 우중문이 그를 잡으려고 하였으나, 상서우승(尙書右丞) 유사룡(劉士龍)이 위무사(慰撫使)로서 굳이 말리므로, 우중문이 마침내 그 말에 따라 을지문덕을 돌아가게 하였다. 얼마 후에 그것을 후회하고 사람을 보내 을지문덕을 속여 “다시 이야기하고 싶으니 다시 오시요.”라고 하였으나, 을지문덕은 돌아보지도 않고 압록수를 건너 가버렸다. 우중문과 우문술 등은 을지문덕을 놓치고 속으로 불안하였다. 우문술은 군량이 떨어졌으므로 돌아가려고 하였으나, 우중문이 정예군으로 을지문덕을 쫓으면 공을 세울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우문술이 이것을 굳이 말리니 우중문이 성내며 말하였다. “장군은 10만 군사에 의지하고도 작은 도적을 깨뜨리지 못하였으니 무슨 낯으로 황제를 뵈올 것이요? 또한 나 우중문은 이번 걸음에 본래 공로가 없을 것을 알고 있었소. 왜냐하면 예전의 훌륭한 장수가 능히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군중의 일을 결정하는 것이 한 사람에게 있었는데, 지금 사람마다 각각 다른 마음을 가졌으니, 어떻게 적을 이길 수 있겠소?” 이때 황제는 우중문이 계획이 있을 것으로 여겨, 여러 군대로 하여금 그에게 지휘를 묻고 품의하게 하였으므로, 이 말을 한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우문술 등이 부득이 그의 말에 따라, 여러 장수와 함께 물을 건너 을지문덕을 쫓았다. 을지문덕은 우문술의 군사들에게 굶주린 기색이 있는 것을 보고, 짐짓 그들을 피곤하게 만들려고 매번 싸울 때마다 도망가니, 우문술이 하루 동안에 일곱 번 싸워 모두 이겼다. 우문술이 이미 여러번 승리한 것을 믿고 또 여러 사람의 의논에 강제되어, 이리하여 마침내 동쪽으로 나아가 살수(薩水)를 건너 평양성에서 30리 떨어진 곳에서 산을 의지하여 진을 쳤다. 을지문덕은 다시 사자를 보내 거짓 항복하며 우문술에게 청하였다. “만약 군대를 돌리시면 왕을 모시고 황제의 행재소로 알현하겠습니다.” 우문술은 사졸들이 피로하고 쇠약해져 다시 싸울 수 없는 것을 보고, 또 평양성이 험하고 튼튼하여서 갑자기 함락시키기 어려운 것을 헤아리고, 마침내 그 속임수에 따라 되돌아갔다. 우문술 등이 방형의 진을 이루고 행군하였는데, 우리 군대가 사방에서 습격하니 우문술 등이 한편 싸우며 한편 행군하였다. 가을 7월에 수나라 군대가 살수에 이르러 군대의 반이 건넜을 때 우리 군사가 뒤에서 후군을 쳤으므로, 우둔위장군 신세웅(辛世雄)이 전사하였다. 이리하여 여러 군대가 모두 무너져서 걷잡을 수 없게 되어 장수와 사졸들이 달아나 돌아가는데, 하루낮 하룻밤 사이에 압록수에 이르러 450리를 행군하였다. 장군인 천수(天水) 사람 왕인공(王仁恭)이 후군이 되어 우리 군대를 쳐서 물리쳤다. 내호아는 우문술 등이 패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역시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으며, 오직 위문승의 1군만이 홀로 온전하였다. 처음 9군이 요하를 건넜을 때는 무릇 30만 5천 명이었는데, 요동성으로 돌아가 다달았을 때는 겨우 2천7백 명이었으며, 쌓아둔 기계가 억만을 헤아렸으나 모두 잃어버려 없어졌다. 황제가 크게 노하여 우문술 등을 쇠사슬로 묶고 계묘일[25일]에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 이전에 백제 왕 장(璋)[=무왕]이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칠 것을 청하니, 황제가 백제를 시켜 우리 나라의 동정을 엿보게 하였으나, 장은 안으로 우리나라와 몰래 통하였다. 수나라 군대가 장차 출동하려 하자, 장은 그 신하 국지모(國智牟)를 수나라에 들여보내 출병할 시기를 알려줄 것을 청하니, 황제가 크게 기뻐하며 후하게 상을 주고, 상서기부랑(尙書起部郞) 석률(席律)을 백제에 보내 모일 시기를 알렸다. 수나라 군대가 요하를 건너자, 백제도 역시 국경에 군사를 엄히 배치하고 말로는 수나라를 돕는다고 하면서, 실은 양다리를 걸치었다. 이 정벌에서 수나라는 다만 요수 서쪽에서 우리 무려라(武邏)를 함락시키고, 요동군과 통정진(通定鎭)을 두었을 뿐이다.

 

24년(613) 봄 정월에 황제가 조서를 내려 천하의 군사를 징발하여 탁군에 모으고, 백성들을 모집하여 효과(驍果)로 삼고, 요동 옛성을 수리하여 군량을 저장하였다. 2월에 황제가 가까이 모시는 신하에게 “고구려 같은 보잘 것 없는 오랑캐가 상국을 업신여긴다.

지금 바다를 뽑고 산을 옮길 일이라도 할 수 있기를 바라는데 하물며 이 오랑캐쯤이야?”라고 말하고,

다시 정벌할 것을 의론하였다.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 곽영(郭榮)이 간하였다.

“오랑캐가 예의에 벗어나는 것은 신하가 알아서 할 일입니다. 천균(千鈞)의 쇠뇌는 새앙쥐를 잡기 위해서 쏘지 않는 법인데, 어찌 몸소 천자의 지위를 욕되게 하면서 작은 도적을 상대하려 하십니까?”

황제가 듣지 않았다.

여름 4월에 황제가 요하를 건너서, 우문술과 양의신(楊義臣)을 보내 평양으로 향하게 하였다. 왕인공이 부여도로 나와서 진군하여 신성(新城)에 이르자, 우리 군사 수만 명은 막아 싸웠다. 왕인공이 굳센 기병 1천 명을 거느리고 이를 쳐서 깨뜨렸으므로, 우리 군사는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황제가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요동을 공격하였는데 편의에 따라 일을 처리하게 하였으므로, 비루(飛樓)·동차(車)·운제(雲梯)·지도(地道)로 사면에서 함께 진격하여 밤낮으로 쉬지 않았다. 우리는 임기응변으로 막았으므로 20여일 동안 함락되지 않고, 적과 아군에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충제(衝梯)의 장대의 길이가 15길이었는데, 효과 심광(沈光)이 그 꼭대기에 올라가 성을 내려다 보면서 우리 군사와 싸우는데 칼을 가지고 맞붙어 십수 명을 죽였다.

우리 군사는 다투어 그를 공격하여 그가 떨어지게 되었는데, 미처 땅에 떨어지기 전에 마침 장대에 줄이 늘어져 있어, 심광이 거기에 매달려 다시 올라갔다.

황제가 그것을 보고 장하게 여겨 즉시 조산대부(朝散大夫)에 임명하였다.

요동성이 오랫동안 함락되지 않자, 황제가 베 주머니 백여만 개를 만들어 보내 그 속에 흙을 가득 넣어 쌓아서 어량대도(魚梁大道)를 만들었는데, 넓이가 30보나 되고 높이가 성과 가지런하게 하여 전사들이 올라가 공격하게 하였다. 또 바퀴 여덟 달린 누거(樓車)를 만들었는데, 성보다 높게 하여 어량도를 끼고 성 안을 내려다 보고 쏘면서 기일을 정해 장차 공격하려고 하였으므로, 성 안은 매우 위급하였다. 마침 양현감(楊玄感)이 반역하였다는 글이 오니 황제가 크게 두려워하였으며, 또 고관의 자손들이 모두 양현감이 거처하는 곳에 있다는 것을 듣고 더욱 염려하였다. 병부시랑(兵部侍郞) 곡사정(斛斯政)이 본래 양현감과 친하였으므로 속으로 불안하여 우리에게 도망하여 왔다. 황제가 밤에 여러 장수를 몰래 불러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군수품과 기계와 공격용 도구가 산처럼 쌓였고, 보루와 장막이 그대로여서 움직이지 않았으나, 무리의 마음이 떨며 두려워져 다시 부서를 나눌 새도 없이 여러 길로 흩어졌다. 우리 군사는 즉시 이것을 깨달았으나 감히 나가지 못하고 다만 성안에서 북치고 고함을 지를 뿐이었다. 다음날 오시(午時)가 되어 그제야 점차 밖으로 나갔으나, 수나라 군사가 속이는 것이 아닐까 하고 의심하였다. 이틀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수천 명의 군사를 내어 뒤를 밟아 쫓았으나, 수나라 군사가 많은 것을 두려워하여 감히 압박하지 못하고, 항상 8, 90리의 거리를 두었다. 요수에 거의 이르러서 황제의 병영이 다 건넌 것을 알고는 그제야 감히 후군을 압박하였다. 이때 후군도 수만 명이나 되었는데 우리 군사는 좇아가 습격하여 수천 명을 죽였다.

 

살수대첩의 고구려 지명을 밝힌다.
수나라가 설치한 고구려와 전쟁 후에 설치한 요동군과 통정진을 먼저 찾는다.

[문관사림文館詞林]에서 수나라 군역軍役 기간의 차등 순서가 전방까지의 거리별로 단계적 차등을 두고 있는데

-탁군涿郡 2년

-임유관臨楡關 3년

-유성군柳城郡 4년

-노하瀘河, 회원진懷遠鎭 5년

-통정진通定鎭 7년

-도요서진渡遼西鎭 10년 이런 순서로 기록되었다.

따라서 노하, 회원 통정진 등은 모두 요서진遼西鎭 보다 서쪽이다.

도요서진渡遼西鎭은 마땅히 대릉하 지역이다.

[책부원구冊府元龜]에서는 

탁군 2년 - 임유관 3년 - 유성 5년- 통정진 7년- 도요진渡遼鎭 10년 이다.

노하瀘河, 회원진懷遠鎭이 따로 없다. 이는 노하, 회원진이 유성과 가깝다는 반증이다.

 

 

수나라때 수양제와 백만병사가 요동성까지 진군한 행로를 표시하면 위와 같다.
윗 그림에서 파란색은 중국의 주장이며 틀린 것이다. 붉은색이 제대로 된 것이다. 


수나라 유성군은 푸른색의 유성(당나라 영주 유성현)이 아니라

붉은색의 유성(수나라 유성군, 당나라 평로군 영주 평로성)이 맞다.

 

노하瀘河는 금주시錦州市 소릉하小凌河다.

지금의 소릉하를 노하로 보는 것은 중국학계의 일치된 견해다.

중국은 노하현을 오늘날의 금주錦州로 보는데 그보다 훨씬 상류, 즉 서쪽일 것으로 고려된다.

수나라 때에 노하현瀘河縣, 노하진瀘河鎭도 있었다.

회원진懷遠鎭은 금주 서북 50리의 당왕채산唐王寨山으로 고려된다.

수나라 양제가 살수대첩 후에 다시 또 쳐들어왔다가

양현감의 반란으로 군대를 되돌린 곳이라서 회원回遠진이고

당왕채산이 수왕채산隋王寨山의 와전訛傳이라면 당왕채가 곧 회원진이 된다.

그 남쪽 고당산褲襠山은 당태종이 군량을 비축한 고량산庫粱山이 된다.

 

중국학자들은 항상 갑자기 비약하는데 문제가 있다.

노하, 회원진에서 노하는 소릉하라고, 하면서 회원진을 갑자기 물 건너 산 넘어

또 물 건너 심양시 요중현遼中縣이라고 주장한다.

대릉하大凌河 건너 의무려산醫巫閭山 넘어 요하遼河 건너...큰 두 물과 큰 산을 갑자기 넘는다.

그리하여 중국인들은 비약에 비약을 거듭하여서 금주 서쪽 노하瀘河, 회원진懷遠鎭에서부터

다음 통정진으로 신민시新民市 북쪽 요빈탑遼濱塔으로 주장한다.

요나라 요주遼州의 요빈현遼濱縣이 있던 곳인데 그곳이 요수遼水를 건너는 곳이니 통정진은

응당 거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요빈탑에서 동쪽으로 건너는 강은 당시 대요수가 아니라 압록강이다.

[한서漢書]에 기록된 당시의 대요수는 길이가 고작 1250리, 즉 300km 남짓한 짧은 물이었고,

현재의 요하가 절대 아니었던 것이다.

반면에 한서漢書의 마자수압록강은 2100리라고 했는데 지금 요하의 일부에 해당한다.

게다가 중국 역사학자들은 당시 요수가 대릉하였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다.

유성에서 노하, 회원진이 150리 정도 되지만, 금주에서 요빈탑은 500리가 된다.

중국의 주장은 그 500리 중간에 도대체가 아무 것도 없다.

그것이 왜곡된 역사의 전형적인 구멍이다.

역사의 블랙홀인데 역사 왜곡을 위해 생략한 거대 공간이었다.

통정진보다 동쪽의 도요서진渡遼西鎭, 혹은 도요진渡遼鎭이 최고 관건이다. 

참고로 역사상 가장 동쪽의 요서주遼西州 위치가 대릉하 지역이다.

 

 

참고로 금나라 때 만들어진 거란지리도로 보면 요동성의 이름을 바꾼 요주 위치가 대략적으로 나온다.


 

한편, [요사/지리지]에서 금주시는 한나라 요동군遼東郡 무려현無慮縣으로 기록되었다.

이는 후한後漢 시대 무려현이다. 수나라가 고구려 무려라武勵邏를 빼앗아 만든 요동군은

금주시錦州市였으니, 통정진通定鎭은 의현義縣 서남쪽 45리에 비정된다.

 

수양제는 100만대군을 이끌고 고구려 땅에 쳐들어왔는데, 요동성에 진을 치고서,

그중 30만 대군이 압록강 넘어 평양성까지 갔다가 평양성밖 30리에서 회군하여서 을지문덕장군에게

살수대첩薩水大捷을 당하는데 다시 압록강을 건너 살아서 돌아온 병력은 2700명이라고 했다.

이후 수양제는 철군하면서 고구려 요동성은 그냥 두고, 요수 건너 편의 고구려 무려라를 빼앗아서

수나라의 요동군隋-遼東郡과 통정진通定鎭을 설치했다. 수나라 요동군은 고구려 무려라武勵邏였으니,

금주시錦州市 대무보大茂堡 위치고, 통정진은 의현義縣 서남 40리 대정보大定堡로 고려되는 것이다.

통정진은 그 이름부터가 당시 안정현安定縣이었던 고구려 요동성遼東城으로 가는 길목(通-安定)이라

통정通定진이다.

그런데 요나라 때 요주遼州 안정현安定縣은 의현義縣 동쪽 대유수보진大楡樹堡鎭이었던 것이

[양원부인장씨묘비梁援夫人張氏墓碑]로 증명되었다.

 

 

[책부원구冊府元龜 券117]에서 당태종이 말하였다.

“짐은 백랑수白浪水( = 대릉하大凌河) 남쪽을 따라서 고구려 현도의 성에 갈 것이다.”

朕 然後 徑塗 白浪之右 親巡 玄菟之城

고구려 현도, 신성 등은 요수 건너에 있었는데,

당태종의 말처럼 백랑수를 건너가면 마주치게 되는 것이었다.

즉 백랑수가 당시의 요수遼水다.

[수경水經]에 의하면 본래 백랑수와 대요수는 지금의 고릉하枯凌河를 통해서

방현房縣에서 만나 안시를 통해 바다로 나갔다.

大遼水注, 大遼水 自遼隊來 東南過 房縣西 又會白浪水 下入安市

 

[금주부지錦州府志]와 [광녕현지廣寧縣志]에서 본래 한나라 요서군치소遼西郡治所로서

요나라 요서진遼西鎭이 되었다고 비정된 곳은 의주義州 서西 40리다.

이는 의주 서남 40리에 위치한 대정보大定堡 정도로 추정된다.

그러나 후한시대 공손탁의 요동국에서 본래 전한시대 요동군을 다시 나누어서 만든

요서군치소 요서진으로 고려되며 기왕의 전한시대 요서군은 아니다.

한편 [요동지], [전요지]에서는 요서진이 의주 동東 40리라고 [금주부지]와 동서를 반대로 말했다.
그리하여 현재 대릉하 동쪽 왕민둔王民屯으로 추정하였다.

이는 요나라가 설치한 요서주遼西州 부성군阜城軍 위치다.

요서주는 본래 한-요서군지漢辽西郡地로서 요나라 장녕궁과 현주에 속했다.
遼西州,阜城軍,中,刺史, 本漢遼西郡地,世宗置州,

이 요서주는 본래 고구려 요동성遼東城 위치다. 고구려 요동성이던

첫 번째 요주遼州 안정현安定縣이 폐지되어, 신민시 북쪽

두 번째 요주遼州 요빈현遼濱縣으로 옮겨간 뒤에,

바로 그 첫 번째 요주 자리 아래에 생겨난 것이 요나라 요서주遼西州 부성군阜城軍인 것이다.

한편 유성군柳城郡- 노하瀘河, 회원진懷遠鎭 - 통정진通定鎭 - 도요서진渡遼西鎭 순서로 보아서

도요서진의 위치는 금주시 동쪽 대릉하성大凌河城으로 고려된다. 지금 금현錦縣 위치다.

[책부원구冊府元龜]에서 당태종이 요수를 건넌 곳은 요돈遼頓이라 했다.

현재 대릉하성大凌河城의 설치 연원을 알 수 없다고 하는데, 바로 이 수나라 도요진渡遼鎭이고,

당태종의 요돈遼頓이었다.

의주義州(현재 의현義縣) 서쪽 40리거나 의주 동쪽 40리거나, 요서진遼西鎭은 대릉하大凌河에 있었다.

그런데 대릉하 요서진보다 훨씬 후방 내지인 통정진만이 느닷없이, 500리 바깥 신민시新民市 북쪽

요빈현遼濱縣이 될 수 없다.

회원진도 산넘어 물건너 요중현遼中縣까지 가지 말고 유성 부근의 노하瀘河. 현재 소릉하小凌河

주변에 바로 있어야만 한다. 그게 사실史實이다.

 

고구려 요동성은 지금 하석주구(下石柱溝)라는 곳이다. 아래 마가구가 당태종이 공략한 마수산이다.

 


수나라 양제는 실패하고 당나라 태종이 공략에 성공한 고구려 요동성

 

위에 대릉하 지역에는 여러 주요성들이 있다.

먼저 요동 신성은 676년에 설인귀가 새로 만든 요동성으로서,

고구려 보장왕이 안동도호부 도독으로 임명되던 때에 만들어졌다. 

후에 보장왕의 손자 고덕무가 698년에 안동도호부 도독이 되어

요동 신성에 부임해 갔다가 고구려 대동강으로 옮겨가서 

자립하였고 요동성총 벽화를 남겼다. 

이 요동성총 벽화의 요동성이 바로 요동신성인 것이다.

 

요동성총 벽화 요동성도

 

그런데 이는 고구려 요동성의 서편에 위치한 청하문시 성과 일치한다.

뒤에 후기 발해 탕주성으로 이용되었다.

 

한편 대릉하의 요동군에는 험독성이 있었는데 위만의 왕험성이었다고 했다. 목엽산 옆에 있다.

 

해북주가 역시 대릉하변에 있었다.

발해 대인수왕 때에 조선, 해북이 모두 발해 영토가 되었다고도 기록되었다.

살수대첩 후에 수나라 설세웅이 추격해오는 고구려군을 막은 곳이 횡산이었다.

이 횡산은 비류수 홀본성 앞의 봉황산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수양제의 고구려 침공도를 구성하면 아래와 같다.

 


수양제 백만대군과 래호아 수군 전쟁도

 

25년(614) 봄 2월에 황제가 모든 신하들에게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정벌할 일을 의론하게 하였는데,

여러 날 동안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조서를 내려 천하의 군사를 다시 징발하여 여러 길로 함께 진군하게 하였다.

가을 7월에 황제의 수레가 회원진(懷遠鎭)에 행차하였다.

이때 천하가 이미 어지러워져서 징발된 군사들이 기일을 어기고 도달하지 못한 자가 많았으며,

우리 나라도 역시 지쳐 있었다.
내호아가 비사성(卑奢城)에 이르자 우리 군사가 맞아 싸웠으나, 내호아가 쳐서 이기고 평양으로

향하려고 하였다.

왕은 두려워 사신을 보내 항복을 청하고, 그에 따라 곡사정을 돌려 보내니,

황제가 크게 기뻐하고 절부를 가진 사신을 보내 내호아를 소환하였다.
8월에 황제가 회원진으로부터 군대를 돌이켰다.

겨울 10월에 황제가 서경(西京)으로 돌아가서 우리 사신과 곡사정을 데리고 대묘(大廟)에 고하고,

이내 왕을 불러 입조하게 하였으나, 왕은 끝내 따르지 않았다.

황제가 장수에게 명하여 무장을 엄하게 하고 다시 후일의 거사를 꾀하였으나 마침내 실행하지 못하였다.

 

29년(618) 가을 9월에 왕이 죽었다.

왕호를 영양왕이라고 하였다.

 

 

 

'뿌리와 역사 > 고구려' 카테고리의 다른 글

28. 보장왕(寶藏王)  (0) 2008.10.28
27. 영류왕(榮留王)  (0) 2008.10.28
25. 평원왕(平原王)  (0) 2008.10.28
24. 양원왕(陽原王)  (0) 2008.10.28
23. 안원왕(安原王)  (0) 2008.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