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장왕(寶藏王)
■ 생몰: ?∼682
■ 고구려 제28대 왕
■ 재위 642∼668
※ 본문설명
▶ 가계
고구려의 마지막 왕으로, 이름은 장(臧, 藏) 또는 보장(寶臧, 寶藏)이라 하였다.
고구려의 왕명은 대부분 시호이나 이 왕은 나라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시호가 없다.
영류왕의 동생인 태양왕(太陽王)의 아들이다.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을 죽이고 권력을 장악한 연개소문(淵蓋蘇文)에 의하여 왕으로 옹립되었기 때문에
비록 왕위에 있었지만 연개소문의 그늘에 가려 왕으로서의 실권을 가지지는 못했다.
▶ 도교진흥책
재위기간 중 국내적으로는 천재지변이 잦았고, 643년(보장왕 2)에는 연개소문의 주장에 따라 당나라에
요청하여 도사(道士)를 초빙하는 등 도교 진흥책을 썼다. 이에 대하여 고구려 종교계에서 기득권을 가진
불교세력의 반발이 심하였고 보덕(寶德)과 같은 승려는 650년 백제로 망명하기까지 하였다.
당시의 도교진흥책에 대해서는 도교를 숭신하는 당나라와의 관계를 원활히 하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이
있는가 하면, 연개소문의 독재권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사상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 대외관계
한편, 재위기간중의 국제관계는 즉위초에는 당나라와 표면상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하여 사절을 교환하고 당나라로부터 책봉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당 태종의 팽창정책으로 말미암아 양국간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또 신라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적대관계를 계속하여 자주 신라를 공격했고, 나아가서 백제와의 관계를 긴밀히 하고 바다 건너 왜(倭)와의 관계를 재개하여 신라를 더욱 궁지로 몰아넣었다.
이에 신라는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욱 당나라와 밀착했고, 당나라는 신라를 두둔하면서 고구려에 대해 신라침공을 중지할 것을 여러 차례 요구했다.
그러나 고구려가 이를 단호히 거절함으로써 마침내 당나라와의 관계도 파국에 이르렀다.
그래서 당 태종은 치밀한 사전준비 끝에 연개소문의 영류왕 시해를 성토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645년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수륙양면으로 고구려를 침공했고, 자신이 진두지휘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당나라는 안시성 싸움에서 참패하고 말았고, 이후 작전을 바꾸어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정면대결을 벌이는 대신 소규모 군대로 고구려 각지를 수시로 침공하여 고구려를 피폐하게 하기도 하고, 647년과 648년에도 고구려를 침략해왔다.
고구려 침공에 앞장섰던 당 태종이 649년에 죽음으로써 당나라와의 관계는 일시 소강상태를 맞이했지만, 당 태종의 뒤를 이은 고종도 고구려 정복 야욕을 버리지 않았고, 고구려는 고구려대로 654년에는 거란족을 공격하는가 하면 655년에는 백제와 더불어 신라를 공격하는 등, 당나라와 우호관계에 있던 세력들을 공격하여 당나라 군사를 자극했다.
이 때문에 655년부터 당나라와의 싸움이 다시 시작되었고, 660년에는 백제를 멸망시킨 여세를 몰아 다시 대규모로 군대를 동원하여 평양성에까지 침입해온 당군을 물리친 적도 있었다.
▶ 내분과 멸망
백제멸망 이후 백제유민의 부흥운동이 전개되자 신라와 당나라는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총력을 기울였고, 이로 인하여 당나라와의 직접 충돌은 일시 중단되기도 했다.
그러나 663년 백제부흥운동을 이끌어가던 부여풍(扶餘豊: 豊璋이라고도 함.)이 고구려로 망명함으로써 이 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데다가, 665년 연개소문이 죽자 이듬해인 666년 연개소문의 아들들인 남생(南生)
형제간의 내분이 일어나 남생이 당나라로 투항했고 연개소문의 동생인 연정토(淵淨土)는 신라로 망명하는 등 고구려 지배층내의 분열과 동요가 일어나자,
당나라는 신라와 연합하여 다시 수륙양면으로 고구려를 침략해왔다.
당나라와 신라의 군대를 맞아 고구려는 각지에서 분전했지만 패배를 거듭했고 마침내 668년 9월에는 평양성마저 함락당함으로써 멸망하고 말았다.
▶ 고구려 부흥운동
고구려 멸망 후 보장왕은 당나라로 잡혀갔고, 정치의 책임이 왕에게 있지 않다고 하여 당나라로부터
‘사평대상백원외동정 (司平大常伯員外同正)’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당나라가 고구려 유민과 신라의 치열한 반당운동으로 말미암아 안동도호부 (安東都護府)를 신성(新城)으로 옮기고 사실상 한반도 지배를 포기한 이듬해인 677년에는 요동지방 전체를 지배하는 요동도독 조선군왕(遼東都督朝鮮郡王)에 임명되어 당나라에 잡혀간 많은 고구려인들을 데리고 요동으로 돌아왔다.
이것은 당나라가 한반도 포기에 따른 요동지역의 동요를 막기 위해 취한 조처였으나, 요동으로 돌아온 보장왕은 오히려 고구려유민을 규합하고 말갈과 내통하여 고구려부흥을 도모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이 발각되어 681년 공주(州:四川省 峽)로 유배되고 말았으며, 682년경 사망하였다.
죽은 뒤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으로 운구되어, 돌궐 가한(可汗)으로 당나라에 투항한 힐리(利)의 무덤 옆에 장사하고 비를 세웠으며, 위위경(衛尉卿)으로 추증되었다.
아들로는 남복(男福, 또는 福男)· 임무(任武)· 덕무(德武)· 안승(安勝) 등이 기록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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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三國史記
舊唐書
新唐書
資治通鑑
日本書紀
淵蓋蘇文의 執權과 道敎(李乃沃, 歷史學報 99·100합집, 1983)
高句麗國遺民反唐分子の處置(日野開三郎, 日野開三郎東洋史學論集 8, 1984)
전문설명
보장왕대당전시대ad642(개화)~ad650
보장왕(寶臧王)은 이름이 장(臧)<혹은 보장(寶臧)이라고도 하였다.>이고, 나라를 잃었으므로 시호가 없다.
건무왕의 아우 대양왕(大陽王)의 아들이다. 건무왕이 재위 25년에 연개소문이 왕을 죽이고 장(臧)을 세워 왕위를 잇게 하였다.
신라가 백제를 정벌할 것을 꾀하여 김춘추(金春秋)를 보내 군사를 요청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보장왕의 연호는 개화(開化)였다.
2년(643) 봄 정월에 아버지를 왕으로 봉하였다.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3월에 연개소문이 왕에게 고하였다.
"삼교(三敎)는 비유하면 솥의 발과 같아서 하나라도 없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지금 유교와 불교는 모두 흥하는데 도교는 아직 성하지 않으니, 이른바 천하의 도술(道術)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엎드려 청하건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도교를 구하여 와서 나라 사람들을 가르치십시오.”
대왕(大王)은 매우 지당하다고 여겨서 당나라에 글을 올려서 청하니,
태종(太宗)이 도사(道士) 숙달(叔達) 등 여덟 명을 보내고, 겸하여 노자 도덕경(老子道德經)을 보내 주었다. 왕은 기뻐하고 절을 빼앗아 이들을 머물게 하였다.
윤 6월에 당나라 태종이 말하였다.
“연개소문이 그 임금을 죽이고 국정(國政)을 제멋대로 하니 진실로 참을 수 없다. 지금의 병력으로도 고구려를 빼앗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다만 백성들을 수고롭게 하지 않으려고, 나는 거란과 말갈을 시켜 그들의 버릇을 길들이려고 하는데, 어떤가?”
장손무기(長孫無忌)가 아뢰었다.
“연개소문은 스스로 죄가 큰 것을 알고 대국이 토벌할 것을 두려워하여 수비를 엄하게 하였습니다.
폐하께서 아직 그 계획을 나타내지 않고 참고 계시면, 저들은 스스로 편안하게 여기고 반드시 다시
교만하고 게을러져서 그 악을 더욱 멋대로 행할 것이므로, 그후에 토벌하여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황제가 좋다고 하였다. 황제가 부절을 가진 사신을 보내 예를 갖추어 책봉하고 조서를 내렸다.
“먼 나라를 위로하는 것은 전대 제왕의 아름다운 법이요, 대를 잇는 의리는 여러 왕대의 옛 규례이다.
고구려 국왕 장(臧)은 재능과 생각이 아름답고 민첩하고, 식견과 도량이 치밀하고 바르며, 일찍이 예교(禮敎)를 익혀 덕망과 의로움이 알려졌다. 처음 번방(藩邦)의 왕업을 계승하여 정성을 먼저 드러냈으므로, 마땅히 작위를 더하여 예전의 사실을 인정하여 상주국 요동군왕 고구려왕을 준다.”
가을 9월에 신라가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백제가 우리 나라의 40여 성을 공격하여 빼앗고 다시 고구려와 군사를 연합하여 입조(入朝)하는 길을 끊으려 합니다." 라고 말하고, 군사를 보내 구원해 주기를 청하였다.
15일에 밤에 밝았으나 달이 보이지 않았다. 많은 별들이 서쪽으로 흘러갔다.
3년(644) 봄 정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당나라 황제가 사농승(司農丞) 상리현장(相里玄奬)에게 명하여 조서를 가지고 와서 왕에게 내렸다.
“신라는 우리 왕조에 충성을 다짐하여 조공을 그치지 않으니, 너희와 백제는 마땅히 군사를 거두어야 한다. 만약 다시 신라를 공격하면 명년에 군사를 내어 너희 나라를 칠 것이다.”
상리현장이 국경에 들어왔을 때 연개소문은 이미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쳐서 두 성을 깨뜨렸는데,
왕은 사람을 시켜 불러들여서 연개소문이 돌아왔다.
상리현장이 신라를 침략하지 말라고 타일렀다. 연개소문은 상리현장에게 말하였다.
“우리는 신라와 원한으로 틈이 벌어진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
이전에 수나라 사람이 쳐들어 왔을 때 신라가 틈을 타서 우리 땅 500리를 빼앗고, 그 성읍을 모두 차지하였다. 신라가 스스로 우리의 빼앗긴 땅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아마 전쟁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상리현장이 말하였다.
“기왕의 일을 어찌 추구하여 논의하겠느냐? 지금 요동의 여러 성은 본래 모두 중국의 군현이었지만,
중국은 오히려 이것을 말하지 않는데, 고구려만 어찌 옛땅을 반드시 찾을 수 있겠느냐?”
막리지는 마침내 듣지 않았다. 상리현장이 돌아가 그 실상을 갖추어 말하니, 태종이 말하였다.
“연개소문이 그 임금을 죽이고 대신들을 해치고 백성들을 잔인하게 학대하고, 지금은 또 나의 명령을
어기니 토벌하지 않을 수 없다.”
가을 7월에 황제가 장차 군사를 출동시키려고 홍주(洪州)·요주(饒州)·강주(江州) 3주에 명령을 내려 배 400척을 만들어 군량을 싣게 하고, 영주도독 장검(張儉) 등을 보내 유주(幽州)·영주(營州) 2주 도독의 병사와 거란·해(奚)·말갈을 거느리고 먼저 요동을 쳐서 그 형세를 보게 하였다.
또 대리경(大理卿) 위정(韋挺)을 궤수사로 삼았는데, 하북에서부터 여러 주가 모두 위정의 지휘를 받게 하여, 위정이 편의에 따라 일을 처리할 수 있게 하였다.
또 소경(少卿) 소예(蕭銳)에게 명하여 하남의 여러 주의 양식을 싣고 바다로 가게 하였다.
9월에 막리지는 백금을 당나라에 바쳤다.
저수량이 말하였다. “막리지가 그 임금을 죽였으므로 구이(九夷)가 용납할 수 없어 이제 그를 치려고 하는데, 그가 금을 바치니 이것은 곡정(郜鼎)과 같은 것입니다. 신은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황제가 그 말에 따랐다. 사신이 또 말하였다. 막리지는 관인 50명을 들여 보내 숙위하게 할 것입니다.
황제가 노하여 사신에게 말하였다.
너희 무리는 모두 고무(高武)를 섬겨 관작을 얻었는데, 막리지가 왕을 죽였는데도 너희들은 복수를 하지 않고 이제 다시 그를 위하여 유세하며 대국을 속이니, 죄가 이보다 큰 것이 있겠느냐?
황제는 그들을 모두 처벌하게 하였다. 겨울 10월에 평양에 내린 눈 빛이 붉은색이었다.
황제가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려고, 장안(長安)의 노인들을 불러 위로하며 말하였다.
"요동은 예전에 중국 땅이었고 막리지가 그 임금을 죽였으므로, 짐이 몸소 가서 다스리려고 한다. 그래서 여러 어른들과 약속하니 아들이나 손자로서 나를 따라가는 자는 내가 잘 위무할 터이니 근심할 것 없다."
황제는 곧 포백과 곡식을 후하게 내려 주었다. 군신들이 모두 황제에게 가지 말 것을 권하였으나 황제가 대답하였다. “나는 알고 있다.
근본을 버리고 말단으로 달리는 일, 높은 것을 버리고 낮은 것을 취하는 일, 가까운 것을 두고 먼 것을 택하는 일, 이 세 가지는 상서롭지 못한 것이니, 고구려를 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연개소문이 임금을 죽이고 또 대신들을 살륙하고는 만족해 하므로, 온 나라의 사람들이 목을 늘이고 구원해 주기를 고대하고 있는데, 의논하는 사람들이 살피지 못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북쪽으로 영주(營州)로 곡식을 나르고, 동쪽으로 고대인성(古大人城)에 곡식을 저장하였다.
11월에 황제가 낙양에 이르렀다. 전 의주(宜州)자사 정천숙(鄭天璹)이 이미 벼슬을 그만 두었으나, 황제는 그가 일찍이 수나라 양제를 따라 고구려를 정벌하였으므로 행재소로 불러서 물으니,
“그가 요동도는 멀어서 군량을 옮기는 것이 어렵고, 동이(東夷)는 성을 잘 지키므로 갑자기 함락시킬 수 없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황제는 “지금은 수나라 때에 비할 것이 아니다. 공은 다만 따르기만 하라.”고 말하였다.
형부상서 장량(張亮)을 평양도 행군대총관(行軍大摠管)으로 삼아서, 강회(江淮)와 영협의 군사 4만 명과
장안과 낙양에서 모집한 군사 3천 명과 전함 500척을 거느리고 내주(萊州)로부터 바다를 건너 평양으로
오게 하였다.
또 태자 첨사좌위솔(詹事左衛率) 이세적(李世勣)을 요동도 행군대총관으로 삼아, 보병과 기병 6만 명과 난주(蘭州)·하주(河州) 2주의 항복한 오랑캐들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가게 하여, 양군이 합세하여 유주(幽州)에서 다 모이게 하였다.
행군총관(行軍摠管) 강행본(姜行本)과 소감(少監) 구행엄(丘行淹)을 보내 먼저 중공(衆工)을 독려하여 안라산(安羅山= 唐山市)에서 사다리와 충차(衝車)를 만들게 하였다. 이때 응모한 원근의 용사들과 성을 공격하는 기계를 바친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므로, 황제가 모든 것을 친히 가감하여 편이한 것을 취하였다. 또 친필 조서로써 천하에 알렸다.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임금을 죽이고 백성을 학대하니 그 실정을 어떻게 참을 수 있겠느냐? 이제 유주와 계주(州)를 순행하고 요동과 갈석으로 가서 그 죄를 물으려고 하니, 지나는 곳의 군영과 숙사에서 노력과 경비가 들지 않도록 하라.”
황제가 또 말하였다. “예전에 수나라 양제는 부하들에게 잔인하고 포악하였는데, 고구려 왕은 그 백성들을 인자하게 사랑하였다. 반란을 생각하는 군사로써, 편안하고 화목한 백성들을 쳤기 때문에 성공할 수 없었다. 지금 대략 말해서, 필승의 길은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큰 것으로써 작은 것을 치는 것이고, 둘째는 순리로써 반역을 치는 것이고, 셋째는 다스려진 형세로써 어지러운 틈을 타는 것이고, 넷째는 편안함으로써 피로한 것에 대적하는 것이고, 다섯째는 기쁨으로 원망에 맞서는 것이다. 어찌 이기지 못할 것을 두려워 할 것이냐? 백성들에게 포고하니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이로써 무릇 숙사, 공급, 설비의 기구를 줄인 것이 태반이었다. 여러 군대와 신라, 백제, 해(奚), 거란에 명령하여 길을 나누어 치게 하였다.
4년(645) 봄 정월에 이세적의 군대가 유주(幽州)에 이르렀다. 3월에 당나라 황제가 정주(定州)에 이르러 시중하는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요동은 본래 중국의 땅인데 수나라가 네 번이나 출병하였으나 얻을 수 없었다. 짐이 지금 동쪽으로 정벌하는 것은, 중국을 위해서는 자제(子弟)들의 원수를 갚으려고 하는 것이고, 고구려를 위해서는 임금의 치욕을 씻어주려고 하는 것뿐이다. 또 사방이 대체로 평정되었는데 오직 이곳만 평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아직 늙지 않았을 때 사대부들의 남은 힘으로써 이것을 빼앗으려고 하는 것이다.”
황제가 정주를 출발할 때 친히 활과 화살을 차고, 자기 손으로 안장 뒤에 비옷을 매었다.
이세적의 군대가 유성(柳城)을 출발하여 형세를 과시하며 마치 회원진(懷遠鎭)에서 나오는 것처럼 하고는, 군사를 몰래 용도성으로 나왔다.
용도성은 태조5년에 만들었다. 대략 금주시 북쪽 부근으로 추정된다.
여름 4월에 이세적이 통정(通定)으로부터 요수를 건너 현도에 이르렀다.
우리 성읍들은 크게 놀라 모두 성문을 닫고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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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릉하에서 시작된 고당전
고구려 국경성도
부대총관(副大摠管) 강하왕(江夏王) 도종(道宗)이 병사 수천 명을 거느리고 신성에 이르자,
절충도위(折衝都尉) 조삼량(曹三良)이 기병 10여 명을 이끌고 곧바로 성문으로 압박해 오니,
성 안에서는 놀라 소란해져서 감히 나가는 자가 없었다.
영주도독 장검(張儉)이 호병(胡兵)을 거느리고 선봉이 되어 나아와, 요수를 건너 건안성(建安城)으로
달려가서, 우리 군사를 깨뜨리고 수천 명을 죽였다.
건안성(建安城)은 <신당서>에서 안동도호부 서쪽 3백리면서 한 평(중)곽현이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 안동도호부는 요양으로 해석된다.
故漢襄平城。東南至平壤城八百里;西南至都裡海口六百里;西至建安城三百里,故中郭縣也
대략 안시성 동남방이면서 주요 고성을 찾으면 고승진(高升鎭) 고성이 건안성으로 유력하다.
서남에 평안보성도 있는데 이 평안보성이 고대 평곽성이었을 수도 있다.
이세적과 강하왕 도종이 개모성(盖牟城)을 쳐서 함락시켜, 1만 명을 사로잡고 양곡 10만 석을 빼앗았으며, 그 땅을 개주(盖州)로 삼았다.
고구려 서북부전선의 핵은 신성이었다.
[한원]에서 신성은 남소의 70리 남쪽이라 하였는데 남소수는 본래 교래하(敎來河)였다. 선비족 침입 때에 동남쪽으로 남소성이 후퇴된 것으로 보인다.
[거란국지契丹國志]에서 1118년 1월, 금나라 아골타가 칭제한 그 해에, 요국장수 연왕 순이 요나라토벌군을 이끌고 휘주徽州(=부신시阜新市 구묘향舊廟鄕) 동쪽에서 금나라 군대를 만났는데, 미처 진을 치기도 전에 궤멸되었다. 연왕은 휘하 오백기로 장백, 어무로 물러났고 이는 의무려산 아래다.
이때 금나라군대는 신주(新州)로 쳐들어갔는데 절도사 왕종보가 성문을 열고 항복했다. 금나라 여진족은 신주를 약탈하고 돌아서서 성주成州(=부신시 홍모자향紅帽子鄕), 의주懿州(=탑영자고성塔影子古城), 호주豪州(=서남와고성西南窪古城), 위주衛州 등 항복한 4주를 약탈했다.
따라서 신주는 구묘향 서쪽이 되는데 고구려 신성과 같은 위치이다.
이는 지금 내몽고의 나만기(奈漫旗)에 있는 신진(新鎭)이 된다.
신진에 있는 신성 역시 험준한 성이다. 성의 남북 길이가 6km다.
개모성의 개물은 한자어로 구하(狗河)로 바뀔 수 있다.
신성의 전투 소리가 항복한 개모성에서 들을 수 있었으므로 개모성은 신성에서 매우 가깝다.
신성과 개모성
신성 남쪽에 훌륭한 고성이 있다.
개모성은 본래 정읍병열(井邑倂列)이라하였으니 쌍읍인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지명은 서애(西涯), 동애(東涯)이다. 두 성의 동서 길이를 합치면 5km를 넘는다.
개모성 사람들은 당나라에 끌려가서 요녕성 금서시 동북에 개주를 만들기도 했다.
발해는 본래 개모성을 진주(辰州)라고 고쳤는데 요나라가 이를 요동반도로 옮겼다.
발해 진주 개모성
장량(張亮)이 수군을 거느리고 동래(東萊)로부터 바다를 건너 비사성(卑沙城)을 습격하였는데,
성은 4면이 깎은 듯하고 다만 서문만이 오를 수 있었다. 정명진(程名振)이 군사를 이끌고 밤에 도착하였다.
부총관 왕대도(王大度)가 먼저 성으로 올라갔다. 5월에 성이 함락되어 남녀 8천 명이 죽었다.
요양시 사령 비사성
이세적이 요동성 밑에 이르고, 황제가 요택(遼澤)에 이르렀으나, 진흙이 200여 리나 되어 사람과 말이
통과할 수 없었다.
장작대장(將作大匠) 염입덕(閻立德)이 흙을 덮어 다리를 만들었으므로, 군대가 머무르지 않고 요택의
동쪽으로 건너왔다.
왕은 신성과 국내성의 보병과 기병 4만 명을 내어 요동을 구원하였다.
강하왕 도종이 기병 4천 명을 거느리고 맞이했는데, 군중에서는 모두 군사의 수가 많고 적은 것이
현저하게 다르므로, 도랑을 깊이 파고 성루를 높이 쌓아 황제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낫다고 하였다. 도종이 말하였다.
“적이 수가 많은 것을 믿고 우리를 깔보는 마음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멀리 와서 피곤할 터이니
그들을 치면 반드시 이길 것이다.
마땅히 길을 깨끗이 치우고 황제를 맞이할 일인데 적을 임금께 남겨두려고 하느냐?
도위(都尉) 마문거(馬文擧)가 강한 적을 만나지 않고 어떻게 장사임을 나타낼 수 있겠느냐?”하고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와 치니 향하는 곳마다 다 쓰러졌으므로, 여러 군사들의 마음이 조금 안정되었다.
맞붙어 싸우게 되자 행군총관 장군예(張君乂)가 후퇴하여 도망하였으므로 당나라 군대가 패하였다.
도종(道宗)이 흩어진 군사를 수습하여 높은 곳에 올라가 바라보니,
우리 군진이 어지러우므로, 날랜 기병 수천 명과 함께 돌격하고, 이세적도 군사를 이끌고 그를 도왔으므로,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여 죽은 자가 천여 명이었다.
황제가 요수를 건너자 다리를 걷어치워 사졸들의 마음을 굳게 하고, 마수산(馬首山)에 진을 쳤다.
그리고] 강하왕(江夏王) 도종에게 위로하여 선물을 내리고, 마문거는 승진시켜 중랑장을 삼았으며,
장군예는 목을 베었다. 황제가 몸소 수백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요동성 아래에 이르러, 사졸들이
흙을 져서 해자를 메우는 것을 보고 가장 무거운 짐을 나누어 말 위에 얹으니,
시종관들이 다투어 흙을 져다 성 밑에 놓았다.
이세적이 요동성을 공격하기를 밤낮으로 쉬지 않고 12일 동안이나 계속하였다.
황제가 정예군을 이끌고 와서 합세하여 그 성을 수백 겹으로 포위하니 북소리와 고함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성 안에는 주몽의 사당[朱蒙祠]이 있고 사당에는 쇠사슬로 만든 갑옷과 날카로운 창이 있었는데,
망령되게 말하기를 전연(前燕) 시대에 하늘이 내려준 것이라고 하였다.
바야흐로 포위가 급해지자 미녀를 치장하여 여신으로 만들어 놓고, 무당이 말하기를 주몽이 기뻐하니
성은 꼭 안전할 것이다.고 하였다.
이세적이 포차를 벌려놓고 큰 돌을 날리니 300보 넘게 날아가 맞는 것마다 이내 부서졌다.
우리는 나무를 쌓아 다락을 만들고 밧줄로 만든 그물을 쳤으나 막을 수 없었다.
당나라 군사가 충차(衝車)로 성가퀴를 쳐서 부수었다. 이때 백제가 검붉게 칠한 쇠갑옷을 바치고,
또 검은 쇠로 만든 무늬있는 갑옷을 만들어 바치니, 당나라 군사들이 이것을 입고 따랐다.
황제가 이세적과 만나니 갑옷 빛이 햇빛에 빛났다.
남풍이 세게 불자, 황제가 날랜 군사를 보내 충차의 장대 끝에 올라가 성의 서남쪽 다락에 불을 지르게
하고, 불이 성 안으로 번지자 장병들을 지휘하여 성으로 올라갔다. 우리 군사들은 힘껏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죽은 자는 만여 명이었고, 포로된 자는 군사가 만여 명, 남녀가 4만 명이었으며, 양곡은 50만
섬을 빼앗겼다. 황제가 그 성을 요주(遼州)로 삼았다.
요동성과 마수산
이세적이 백암성(白巖城) 서남방으로 진공하고 황제가 그 서북쪽에 이르니,
성주(城主) 손대음(孫代音)이 몰래 심복을 보내 항복을 청하였다.
[그 사신은] 성에 이르러 칼과 도끼를 내던지는 것을 신표로 삼고 “저는 항복하기를 원하지만
성 안에 따르지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고 말하였다.
황제가 당나라 깃발을 사자에게 주면서 “정녕 항복하려고 한다면 이것을 성 위에 세워라.”고 말하였다.
손대음이 깃발을 세우니, 성 안의 사람들은 당나라 군사가 이미 성으로 올라온 것으로 여기고 모두
그를 따랐다.
황제가 요동성에서 이겼을 때에, 백암성이 항복을 청했다가 얼마 후에 후회하였으므로, 황제는 그들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 것에 노하여 군중(軍中)에 명령을 내려 “성을 빼앗으면 반드시 그 사람과 물건들을 전부 전사들에게 상으로 줄 것이다.”라고 말했었다.
이세적은 황제가 그들의 항복을 받아들이려는 것을 보고 갑옷 입은 군사 수십 명을 거느리고 가서 청하였다. “사졸들이 다투어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죽음을 돌아보지 않는 것은 노획물을 탐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성이 거의 함락되었는데 어찌 다시 그 항복을 받아들여서 전사들의 마음을 저버리려 하십니까?”
황제가 말에서 내려 사과하며 말하였다. “장군의 말이 옳다. 그러나 군사를 놓아 사람을 죽이고 그 처자를 사로잡는 것은, 짐이 참을 수 없는 것이다. 장군 휘하의 공이 있는 자에게는 짐이 창고의 물건으로 상을 줄 터이니, 장군은 이 한 성과 바꾸기 바란다.”
이세적이 그제야 물러났다.
황제가 성 안의 남녀 만여 명을 붙잡아, 물가에 장막을 치고 그들의 항복을 받고 그들에게 음식을 내렸으며, 80세 이상된 자에게는 비단을 차등있게 내렸다. 다른 성의 군사로서 백암성에 있던 자는 모두 위로하여 타이르고 양식과 병장기를 주어 그들이 가는 대로 맡겨 두었다.
요동성에서부터 당태종이 공격나갔다가 항복을 받고 돌아온 백암성은 산에 의지하고 물이 험한 곳인데 <요사지리지>에서 암주 설명은 발해 백암성을 요나라 태종이 뽑아다가 심양에 옮겼다고 하였고, 따라서 현재의 요동에 있던 것이 아니다.
요나라가 옮기기 이전의 백암성은 1117년 요나라 연왕순의 여진족 토벌군과 여진족 전투중에 그 기록이 출현하는데,
휘주(徽州;부신시 서북 사가자 고성)에서 요나라군이 대패하고 후퇴하여 다시 전열을 정비한 팔영(八營) 중의 하나로 암주영이 있었다.
1117年. 初, 怨軍有八營, 共二萬八千餘人, 自宜州募者謂之前宜營, 再募者謂後宜營, 前錦、後錦者亦然, 有乾營、顯營, 又有乾顯大營、岩州營.
해석하면 대릉하의 의주시 앞뒤로 2개, 소릉하의 금주시 앞뒤로 두개, 안시성이 있던 북진시 앞뒤로 3개, 그리고 암주성이었다. 즉 안시성의 방어 위치이면서, 또한 당태종의 요동성-백암성-요동성-안시성의 행로를 보면 요동성과 안시성의 협곡 길에서 살짝 비켜있다.
백암성 암주성의 모습
백암성을 서쪽에서 바라본 모습
이에 앞서 요동성의 장사(長史)가 부하에게 죽임을 당하자,
그 성사(省事)가 그의 처자를 받들고 백암성으로 도망하였다.
황제는 그가 의리가 있는 것을 어여삐 여겨 비단 5필을 내리고, 장사를 위하여 상여를 만들어 주고
평양으로 돌려 보냈다. [황제는] 백암성을 암주(巖州)라 하고 손대음을 자사로 삼았다.
이전에 막리지는 가시성(加尸城) 사람 700명을 보내 개모성을 지키게 하였는데, 이세적이
그들을 모두 사로잡았다. 그 사람들은 종군하여 스스로 공을 세우기를 청하니, 황제가 말하였다.
“너희 집이 모두 가시성에 있는데, 너희가 나를 위하여 싸우면 막리지가 필시 너희 처자를 죽일 것이다.
한 사람의 힘을 얻고서 한 집안을 멸망시키는 일을 나는 차마 할 수 없다.”
황제는 모두에게 양식을 주어 보내고 개모성을 개주라고 하였다.
황제가 안시성(安市城)에 이르러 군사를 보내 공격하니,
북부(北部) 욕살(薩) 고연수(高延壽)와 남부 욕살 고혜진(高惠眞)은 우리 군사와 말갈 군사 15만 명을
거느리고 안시성을 구원하였다. 황제가 근신들에게 말하였다.
“지금 고연수에게는 책략이 세 가지 있을 것이다. 군사를 이끌고 곧바로 나아와 안시성을 연결하여 보루로 삼고, 높은 산의 험한 지세를 의지하여 성 안의 곡식을 먹으며 말갈 군사를 풀어 우리의 소와 말을 빼앗으면, 우리가 공격해도 갑자기 함락시키지 못할 것이요, 돌아가려 하면 진흙으로 막혀, 앉아서 우리 군사를 피곤하게 할 것이니 이것이 상책이다.
성 안의 군사를 뽑아 함께 밤에 도망치는 것은 중책이다.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헤아리지 않고 나와서 우리와 싸우는 것은 하책이다.
그대들은 보아라. 그들은 필시 하책으로 나올 것이니, 그들을 사로잡는 것은 내 눈 앞에 있다.”
그때 대로(對盧) 고정의(高正義)는 연로하여 일을 익히 잘 알았는데 고연수에게 말하였다.
“진왕(秦王)이 안으로 여러 영웅을 제거하고, 밖으로 오랑캐를 복속시켜 독립하여 황제가 되었으니, 이 사람은 일세에 뛰어난 인재이다. 지금 그가 천하의 무리를 데리고 왔으니 대적할 수 없다. 나의 계책으로는, 군사를 정돈하여 싸우지 않고 시간을 보내며, 오랫동안 버티면서 기습병을 나누어 보내, 그 군량길을 끊는 것이 낫다. 양식이 떨어지면 싸우려 해도 할 수 없고, 돌아가려 해도 길이 없으니, 그제야 우리가 이길 수 있다.”
고연수는 듣지 않고 군사를 이끌고 곧바로 나아가 안시성에서 40리 떨어진 곳까지 갔다.
황제는 그가 머뭇거리면서 오지 않을까 염려해서 대장군 아사나사이에게 명령하여, 돌궐 기병 1천 명을 거느리고 가서 유인하고 첫교전에 거짓으로 달아났다.
고연수는 “상대하기 쉽구나.” 하고 다투어 나아가 그들을 이기고, 안시성 동남쪽 8리 되는 곳에 이르러
산에 기대어 진을 쳤다. 황제가 여러 장수를 모두 모아 계책을 물으니, 장손무기가 대답하였다.
“신은 듣건대 ‘적과 대하여 싸우려 할 때는 반드시 먼저 사졸들의 마음을 살펴야 한다.’고 합니다.
신은 마침 여러 군영을 지나가다가, 사졸들이 고구려군사가 왔다는 것을 듣고 모두 칼을 뽑고 깃발을 매어 달면서 얼굴에 즐거운 빛을 나타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들은 반드시 이길 군사들입니다. 폐하께서는 스무 살 이전에 친히 군진에 나가 기습병을 내어 이겼으니, 그것은 모두 위로 황제의 계획을 받고 여러 장수들이 계책을 받들어 이루었을 뿐입니다.
오늘의 일은 폐하께서 지휘하십시오.”
황제가 웃으며 여러분이 이와 같이 사양하니 짐은 마땅히 여러분을 위하여 헤아려 생각하겠다.고
말하고 장손무기 등 따르는 기병 수백 명과 함께 높은 곳에 올라가 바라보며, 산천형세가 군사를 숨길 만한 곳과 드나들 수 있는 곳을 살펴보았다.
우리 군대는 말갈과 군사를 합해 진을 쳤는데, 길이가 40리나 되었으므로 황제가 그것을 바라보고 근심하는 빛이 있었다. 강하왕 도종이 말하였다.
“고구려가 온 나라의 힘을 기울여 천자의 군대를 막고 있으므로 평양의 수비는 필시 약할 것입니다.
원컨대 신에게 정예 군사 5천 명을 주십시요.
그 근본을 엎으면 수십만의 군대를 싸우지 않고 항복시킬 수 있습니다.”
황제가 듣지 않고 사신을 고연수에게 보내 말하였다. “나는 너희 나라의 권력 있는 신하가 임금을 죽였으므로 죄를 묻기 위하여 왔는데, 교전하기까지에 이른 것은 나의 본심이 아니다. 너희 국경에 들어오니 꼴과 양식이 부족하여서 몇 개의 성을 빼앗은 것이다. 너희 나라가 신하의 예를 갖추면 잃은 것을 반드시 돌려줄 것이다.”
고연수는 이 말을 믿고 다시 방비를 하지 않았다. 황제가 밤에 문무관을 불러 일을 계획하고, 이세적에게 명령하여 보병과 기병 1만 5천 명을 거느리고 서쪽 고개에서 진을 치게 하고, 장손무기와 우진달(牛進達)이 정예군 1만 1천 명을 거느려 기습병으로 삼아 산의 북쪽으로부터 협곡으로 나와 그 뒤를 공격하게 하였다.
황제는 스스로 보병과 기병 4천 명을 거느려 북과 피리를 가지고 깃발을 눕혀서 산으로 올라갔다. 황제는 여러 군대에게 명령하여 북과 피리 소리를 들으면 일제히 나와 힘을 내어 공격하게 하고, 또 담당 관리에게 명하여 조당(朝堂) 옆에 항복을 받을 장막을 설치하였다. 이날 밤 별똥별[流星]이 고연수의 진영에 떨어졌다. 이튿날 고연수 등만은 이세적의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군대를 통솔하여 싸우려고 하였다. 황제가 장손무기의 군대가 먼지를 일으키는 것을 보고,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며 깃발을 들 것을 명령하니, 여러 군대들이 북치고 소리지르며 일제히 나아왔다.
고연수 등은 두려워 군사를 나누어 막으려고 하였으나 그 군진이 이미 어지러워졌다. 마침 천둥과 번개가 쳤는데 용문 사람 설인귀(薛仁貴)가 기이한 옷을 입고 크게 소리치며 군진을 함락시키니, 그가 향하는 곳에 대적할 자가 없었고, 우리 군사들은 쓰러졌다. 대군이 들이치니 우리 군사들은 크게 무너져, 죽은 자가 3만 여 명이었다. 황제가 설인귀를 바라보고 유격장군(遊擊將軍)으로 임명하였다.
고연수 등은 남은 무리를 거느리고 산에 의지하여 스스로 지켰으나, 황제가 여러 군대에 명하여 포위하고, 장손무기가 교량을 모두 철거하여 귀로를 끊었다. 고연수와 고혜진은 무리 3만 6천8백 명을 거느리고 항복을 청하고, 군문에 들어가 절하고 엎드려 목숨을 빌었다. 황제가 욕살 이하 장관 3천5백 명을 가려 내지로 옮기고, 나머지는 모두 놓아주어 평양으로 돌아가게 하였으며, 말갈인 3천3백 명을 잡아서 모두 파묻고, 말 5만 필과 소 5만 두와 명광개(明光鎧) 1만 벌을 노획하였다. 다른 기계들도 이만큼 되었다. 황제가 갔던 산 이름을 고쳐 주필산이라 하였다. 고연수를 홍려경으로, 고혜진을 사농경으로 삼았다. 황제가 백암성에서 이기자 이세적에게 말하였다.
“내가 듣기로는, 안시성은 험하고 군사가 날래며, 그 성주는 재능과 용기가 있어 막리지의 난 때에도 성을 지켜 굴복하지 않았고, 막리지가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킬 수 없어서 그에게 주었다고 한다. 건안성은 군사가 약하고 양식이 적으므로 불시에 나가 그들을 치면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것이다. 공은 먼저 건안성을 치라. 건안성이 함락되면 안시성은 내 배 안에 있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병법에서 말하는 성에는 치지 않을 곳이 있다.고 한 것이다.”
이세적이 대답하였다. “건안성(建安城)은 남쪽에 있고 안시성(安市城)은 북쪽에 있으며, 우리 군량은 모두 요동에 있는데 지금 안시성을 지나쳐 건안성을 쳤다가, 만약 고구려 사람들이 우리 군량길을 끊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먼저 안시성을 공격하여 안시성이 떨어지면, 북 치며 나아가 건안성을 빼앗는 것이 낫겠습니다.”
황제가 “공을 장수로 삼았으니 어찌 공의 책략을 쓰지 않겠느냐? 내 일을 그르치지는 말라.”고 말하였다. 이세적이 드디어 안시성을 공격하였는데 안시성 사람들은 황제의 깃발과 일산을 보고 즉시 성에 올라 북치며 소리질렀다. 황제가 노하자 이세적은 성을 빼앗는 날에 남자를 모두 구덩이에 묻어버릴 것을 청하였다. 안시성 사람들은 이 소식을 듣고 더욱 굳게 지키니 오랫동안 공격하여도 함락되지 않았다. 고연수·고혜진이 황제에게 청하여 말하였다.
“저희가 이미 대국에 몸을 맡기었으니 감히 정성을 바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천자께서 큰 공을 빨리 이루어 저희가 처자와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안시성 사람들은 그들의 집안을 돌보고 아껴서 사람마다 자진해서 싸우므로 쉽게 갑자기 함락시킬 수 없습니다. 지금 저희는 고구려의 10여 만 명의 군사를 가지고도 황제의 깃발을 보고는 사기가 꺾이고 허물어졌으니, 우리나라 사람들의 간담이 터질 것입니다. 오골성(烏骨城)의 욕살이 늙어서 성을 굳게 지킬 수 없으므로 군사를 옮겨 그곳으로 가면 아침에 다다라서 저녁에는 이길 것이며, 그 나머지 길을 막는 작은 성들은 반드시 위엄을 보고는 달아나고 무너져버릴 것입니다. 그런 후에 물자와 양식을 거두어서 북치고 나아가면 평양도 결코 지키지 못할 것입니다.”
군신들도 역시 말하였다. “장량의 군사가 사성(沙城)에 있으므로 그를 부르면 이틀 후면 올 수 있을 것이니, 고구려가 두려워하는 틈을 타서 힘을 모아 오골성을 함락시키고, 압록수를 건너 곧바로 평양을 빼앗는 것이 이번 싸움에 달렸습니다.”
황제가 그 말에 따르려 하는데 장손무기만이 홀로 이렇게 말하였다. “천자가 친히 정벌하는 것은 여러 장수와는 달라서 위험한 형세를 타고 요행을 바랄 수 없습니다. 지금 건안성과 신성의 적의 무리가 10만 명이나 되는데, 만약 오골성으로 향한다면 그들이 우리의 뒤를 밟을 것입니다. 먼저 안시성을 깨뜨리고 건안성을 빼앗은 후에 군사를 멀리 몰고 나아가는 것이 나으니, 이것이 만전의 계책입니다.”
황제가 이에 멈추었다. 여러 장수가 급히 안시성을 공격하였다. 황제가 성 안에서 닭과 돼지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이세적에게 말하였다. “성을 포위한 지 오래되어 성 안에서 나는 연기가 날로 작아지더니 이제 닭과 돼지가 매우 시끄럽게 우니, 이것은 필시 군사들을 먹이고 밤에 나와서 우리를 습격하려고 하는 것이다. 마땅히 군사들을 엄하게 하여 대비해야 한다.”
이날 밤에 우리 군사 수백 명은 성에서 줄을 타고 내려갔다. 황제가 이 소식을 듣고 스스로 성 밑에 이르러 군사를 불러 급히 공격하니, 우리 군사의 죽은 자가 수십 명이었고 나머지 군사는 물러나서 달아났다. 강하왕 도종이 무리를 독려하여 성의 동남쪽 모퉁이에 흙으로 산을 쌓고 성을 핍박하니, 성 안에서도 역시 성을 더욱 높혀서 이것을 막았다. 사졸들은 번(番)을 나누어 싸웠는데 하루에 예닐곱 차례 맞붙었다. 충차와 포석으로 그 누첩을 무너뜨리면, 성 안에서도 따라서 목책을 세워 그 무너진 곳을 막았다.
도종이 발을 상하자 황제가 친히 침을 놓아 주었다. 산을 쌓기를 밤낮으로 쉬지 않아 60일 동안 인력을 들인 것이 50만 명이었다. 산 꼭대기는 성에서 몇 길 떨어졌으므로 밑으로 성 안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도종이 과의(果毅) 부복애(傅伏愛)를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산꼭대기에 둔을 치고 적에 대비하도록 하였는데, 산이 무너지면서 성을 눌러 성이 무너졌다. 마침 부복애가 사사로이 부대를 떠나 있었는데, 우리 군사 수백 명은 성이 무너진 곳으로 나가 싸워서 마침내 흙산을 빼앗아 해자를 파고 지켰다. 황제가 노하여 부복애를 목베어 두루 돌리고,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공격하게 하였으나 3일이 지나도 이기지 못하였다. 도종이 맨발로 깃발 아래에 나아가 죄를 청하니 황제가 말하였다. “너의 죄는 마땅히 죽을 만하나, 다만 짐은 한(漢)나라 무제가 왕회(王恢)를 죽인 것은, 진(秦)나라 목공(穆公)이 맹명(孟明)을 쓴 것만 같지 못하다고 여기며, 또 개모성과 요동성을 깨뜨린 공이 있으므로 특별히 너를 용서할 뿐이다.”
고구려 안시성은 당태종의 30만 대군을 물리친 고구려 대성이며 성주는 양만춘이었다.
안시성을 찾기 위해 [신당서]를 보면 대요수와 소요수, 그리고 또 압록강이 서남으로 흘러 바다로 나가는 곳이 역시 안시성이다.
<新唐書> 高麗...水有 大遼、少遼:大遼出靺鞨西南山,南歷安市城...有馬訾水出靺鞨之白山
色若鴨頭,號鴨淥水...又西南 至安市.
대요수는 대릉하와 합쳐서 바다로 나가므로 안시성의 위치는 지금의 랴오허강(遼河) 서안이 된다.
이보다 확실한 최초의 기록은 서기 500년대에 기록된 [수경주]에 인용된 [위토지기]기록이다.
[위토지기]는 백랑수 동쪽에 안시현이 있다고 하였다.
[신당서]는 이 위토지기 기록과 부합한다.
《魏土地記》曰:白狼水下人遼也。又東過安市縣西,南入于海
위성으로 찾은 안시성은 의무려산 동쪽의 북진시(北鎭市) 동북방에 있었다.
안시성위치도
북진시는 발해 후기 현덕부 현주(顯州)였다.
<연행일기(燕行日記) 제9권>에 의하면 북진시 성 서쪽 이도구(二到溝)에 가면 성에서 10리쯤 떨어진 곳에 고려왕의 무덤이 있는데, 달자(韃子; 몽고인)들이 무덤을 부수고 수 길이나 깊이 파 놓았기 때문에 관틀[棺材]은 물에 잠겨 버리고, 곽(槨)만이 드러나 있는데, 벽돌로 쌓아 내부[室]를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들어가 보니까 비석이 있는데 고려왕 무덤이라고 써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전설이 있게 되었습니다.”하였다.
고려왕 무덤은 이름으로 보아서 안장왕(安臧王)으로 고려된다.
북진시 서남에도 고구려 성터가 아직 남아 있다. 오늘날 북진시 서쪽 의무려산 홍보사이트 중에서
영산풍경구(醫巫閭山靈山風景區) 안내를 보면 구백년전 고구려성 유적지와 당대 우물이 있다고 하였다.
<요사지리지>에 의하면 발해 영봉현(靈峰縣)이 있었다가 요나라 때 영산현이 되었다.
북진시 북쪽 십리에는 고성산(古城山)이 있다고, 명나라 때 지은 <요동지(遼東志)> 등에 전해 온다. 위성으로 찾은 그 고성산 안쪽의 양가점(楊家店)이 바로 안시성주 양만춘(楊萬春)의 후예가 살아온 안시성이며 발해 후기 현덕부 성이다.
안시성 동남쪽으로 서대(誓臺)라는 곳이 있었다. 당태종이 맹세하던 곳이라는데 양만춘의 화살에 눈을 맞은 당태종은 안시성을 함락하면 안시성의 모든 남자를 죽이겠다고 맹세한 바가 있다.
역시 동남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고려판성(高麗板城)의 고구려 성터는 본래 당태종이 머물렀던 당루(唐樓)라고 했는데, 그 위에서 행관영루(行觀營樓)하였다고 전해진다. 당태종이 올라서 진영을 살펴보던 곳이라는 뜻이다. <자치통감>에서는 당태종이 높은 곳에 올라 산천형세를 살펴보았다고 하였다.
<자치통감> 乃與無忌等從數百騎乘高望之,觀山川形勢,可以伏兵及出入之所
당태종이 철군한 뒤에 그 자리에 고구려가 성을 지어 고려판성이라고 이름이 전해오는 것이다.
안시성 전투에서 당태종은 고구려 장수 고혜진 등과 전투하여 초반에는 고구려군에게 밀리다가 후반에 주필산에서 설인귀의 맹활약으로 이겼다. 이후 고구려 군대를 포위하여 고혜진 등의 항복을 받았다. 당시 당태종이 주필산 전투를 각석기공(刻石紀功)한 주필산은 정안보진(正安堡鎭) 서쪽 기둔(紀屯)으로 고려된다. 정남보진 북쪽 건둔(蹇屯)은 주필산에서 패한 고구려군이 도주했다가 항복한 곳으로 고려된다.
이후 당태종은 안시성 동남에 3개월간 진을 치고 토산을 쌓다가 물러났다.
양만춘의 후예는 발해 때에 설치한 북주성의 주인이었던지 오늘날 북진성을 관통하는 물이름도
양랑하(楊朗河)라고 하였고, 성내 서북산은 만취산이라고 하였다.
북진시 동북 안시성도
북쪽에서 본 안시성
황제는 요동이 일찍 추워져서 풀이 마르고 물이 얼어 군사와 말이 오래 머물기 어렵고, 또 양식이 다 떨어져가므로 군사를 돌릴 것을 명령하였다. 먼저 요주·개주 2주의 호구를 뽑아 요수를 건너게 하고 안시성 밑에서 군대의 위엄을 보이고 돌아갔다. 성 안에서는 모두 자취를 감추고 나오지 않았으나 성주가 성에 올라 절하며 작별 인사를 하였다. 황제는 그가 굳게 지킨 것을 가상하게 여겨 비단 100필을 주면서 임금 섬기는 것을 격려하였다. 이세적과 도종에게 명하여 보병과 기병 4만 명을 거느리고 후군(後軍)이 되게 하였다.
요동에 이르러 요수를 건너는데 요택(遼澤)이 진창이 되어 수레와 말이 지나갈 수 없으므로, 장손무기에게 명하여 1만 명을 거느리고 풀을 베어 길을 메우게 하고, 물이 깊은 곳에 수레로 다리를 만들게 하였다.
황제는 스스로 말채찍 끈으로 섶을 묶어 일을 도왔다.
겨울 10월에 황제가 포구(蒲溝)에 이르러 말을 멈추고 길을 메우는 일을 독려하였다. 여러 군대가 발착수(渤錯水)를 건너니 폭풍이 불고 눈이 내려서 사졸들이 습기에 젖어 죽는 자가 많았으므로, 명령을 내려 길에 불을 피워 맞이하게 하였다. 무릇 고구려 정벌에서 현도·횡산(橫山)·개모·마미(磨米)·요동·백암·비사·협곡(夾谷)·은산(銀山)·후황(後黃) 10성을 함락시키고, 요주·개주·암주 3주의 호구를 옮겨 중국으로 들어간 자가 7만 명이었다.
고연수는 항복한 뒤부터 항상 분개하고 한탄하다가 얼마 후에 근심으로 죽었고, 고혜진은 결국 장안에 이르렀다. 신성·건안·주필의 세 대전에서 우리 군사와 당나라의 병마가 죽은 것이 매우 많았다. 황제는 성공하지 못한 것을 깊이 후회하여 탄식하기를 “위징(魏徵)이 있었다면 내가 이번 걸음을 하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고 하였다.
사론(史論): 당나라 태종은 뛰어나고 총명하여 세상에 드문 임금이다. 난을 다스린 것은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에 견줄 만하고, 다스림을 이룬 것은 성왕(成王)·강왕(康王)과 비슷하다. 군사를 쓰는 데 이르러서는 기이한 책략을 내는 것에 끝이 없고 향하는 곳에 적수가 없었는데, 동방을 정벌하는 일에 안시성에서 패하였으니 그 성주는 호걸이요 비상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사기에서 그 성명을 전하지 않으니, 양자(楊子)가 말한 바 제나라와 노나라의 대신이 사기에 그 이름을 전하지 않는다고 한 것과 다름없다. 매우 애석한 일이다.
5년(646) 봄 2월에 당나라 태종이 수도로 돌아가 이정(李靖)에게 일러 “내가 천하의 많은 무리를 가지고 작은 오랑캐에게 곤란을 당한 것은 무엇 때문이냐?”고 물었다. 이정이 말하기를 “이것은 도종(道宗)이 알 것입니다.”고 하였다. 황제가 도종을 돌아다 보며 물으니, 도종은 주필산에 있을 때, 빈 틈을 타서 평양을 빼앗자고 한 말을 소상히 아뢰었다. “황제가 원망하며 당시의 일은 매우 바빴으므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여름 5월에 왕과 막리지 개금(蓋金)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고 아울러 미녀 두 명을 바쳤다. 황제가 이들을 돌려보내며 사신에게 말하였다. “여색은 사람들이 소중히 여기는 것이나 그들이 친척을 떠나 마음 상하는 것이 딱해 나는 취하지 않는다.”
동명왕 어머니의 소상(塑像)이 사흘 동안 피눈물을 흘렸다.
이전에 황제가 돌아가려 할 때 활집을 연개소문에게 주었는데, 그는 이것을 받고도 사례하지 않았으며, 더욱 교만하고 방자하여져서, 비록 사신을 보내 표를 올리지만 그 말은 모두 괴이하고 황당하였다. 또 당나라의 사신을 접대하는 것에도 거만하였고, 항상 변경의 틈을 엿보았으며, 누차 칙령을 내려 신라를 치지 말라고 하여도, 침략하고 업신여기기를 그치지 않았다. 태종이 그 조공을 받지 말라고 명령하고 다시 토벌할 것을 의논하였다.
6년(647) 봄 2월에 당나라 태종이 다시 군대를 보내려 하니 조정의 의논이 이러하였다. “고구려는 산에 의지하여 성을 쌓아서 갑자기 함락시킬 수 없습니다. 전에 황제께서 친히 정벌하였을 때 그 나라 사람들이 농사를 지을 수 없었으며, 우리가 이긴 성에서도 실로 그 곡식을 거두어 들였으나 가뭄이 계속되었으므로 백성들의 태반이 식량이 부족하였습니다. 이제 만약 적은 군대를 자주 보내 번갈아서 그 강토를 어지럽혀, 그들을 명령에 따라 분주히 움직이게 해서 피곤하게 하면, 그들은 쟁기를 놓고 보(堡)로 들어갈 것이며, 수 년 동안 천리가 쓸쓸하게 되어 인심이 저절로 떠날 것이니, 압록수 북쪽은 싸우지 않고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황제가 이 말에 따라 좌무위대장군 우진달(牛進達)을 청구도(靑丘道) 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우무위장군 이해안(李海岸)을 부총관으로 삼아, 군사 만여 명을 파견하여 누선(樓船)을 타고 내주(萊州)로부터 바다를 건너 들어오게 하였다. 또 태자 첨사(詹事) 이세적을 요동도 행군대총관으로 삼고, 우무위장군 손이랑(孫貳朗) 등을 부총관으로 삼아,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영주도독부의 군사를 앞세우고 신성도로부터 들어오게 했는데, 두 군대는 모두 물에 익어서 잘 싸우는 자들을 골라 배치하였다.
청구도는 적봉시를 통과했을 것이다. 환웅시대 청구성이 적봉시에 있다.
여름 5월에 이세적의 군사가 이미 요수를 건너 남소 등 몇 성을 지나가자 우리 군대는 모두 성을 등지고 막아 싸웠으나, 이세적이 이를 격파하고 그 나성(羅城)을 불지르고 돌아갔다.
가을 7월에 우진달과 이해안이 우리 국경에 들어와 무릇 백여 차례나 싸워 석성(石城)을 쳐서 함락시키고 나아와 적리성(積利城) 밑에 이르렀다. 우리 군사 만여 명이 나가 싸웠으나 이해안이 이를 쳐서 이기니, 우리 군사의 죽은 자가 3천 명이었다. 8월에 태종이 송주(宋州) 자사 왕파리(王波利) 등에게 명령하여 강남 12주의 공인(工人)들을 징발하여 큰 배 수백 척을 만들게 하고 우리를 치려 하였다.
겨울 12월에 왕은 둘째아들 막리지 임무(任武)를 당에 들어가 사죄하게 하니, 황제가 이것을 허락하였다.
7년(648) 봄 정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당나라 황제가 조서를 내려 우무위대장군 설만철(薛萬徹)을 청구도 행군대총관으로, 우위장군(右衛將軍) 배행방(裴行方)을 부총관으로 삼아, 군사 3만여 명과 누선 전함을 이끌고 내주(萊州)로부터 바다를 건너와서 공격하였다. 여름 4월에 오호진(烏胡鎭= 오호도, 대련과 산동의 사이) 장수 고신감(古神感)이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침공해 와서 우리 보병과 기병 5천 명을 만나 역산(易山)에서 싸워 이들을 깨뜨렸다. 그날 밤에 우리 군사 만여 명은 고신감의 배를 습격하였으나 고신감의 복병이 나와 우리가 패하였다.
6월에 황제는 우리가 곤궁하고 피폐할 것으로 여기고 명년에 30만 군사를 발동하여 단번에 멸망시킬 것을 의논하니,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대군이 동쪽으로 정벌하려면 반드시 한 해를 지낼 군량을 갖추어야 하는데, 짐승과 수레로 실어 나를 수 없으므로 마땅히 배를 갖추어 물로 운반해야 할 것입니다. 수나라 말기에 검남(劍南) 지방만이 도적의 피해를 입지 않았고, 근자에 요동 싸움에도 검남은 또 참여하지 않아서 그 백성들이 많고 부유하므로 그들에게 배를 만들게 해야 합니다.” 황제가 그 말에 따랐다.
가을 7월에 서울에 사는 여자가 아들을 낳았는데 몸 하나에 머리가 둘이었다. 태종이 좌령좌우부(左領左右府) 장사(長史) 강위(强偉)를 검남도(劍南道)로 보내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게 하였는데, 큰 것은 혹은 길이가 100자나 되고 넓이는 그 반이나 되었다. 따로 사신을 보내 수로로 가서 무협(巫峽)으로부터 강주(江州)·양주(楊州)에 이르러 내주로 가게 하였다. 9월에 노루 떼가 강을 건너 서쪽으로 달아나고 이리 떼가 서쪽으로 갔는데, 3일 동안 끊이지 않았다.
태종이 장군 설만철 등을 보내 와서 침공하게 하였는데, 그들은 바다를 건너 압록강으로 들어와 박작성(泊灼城) 남쪽 40리 되는 곳에 이르러 군영을 쳤다. 박작성주 소부손(所夫孫)은 보병과 기병 1만여 명을 거느리고 막았으나, 설만철이 우위장군 배행방을 보내 보병과 여러 군대를 거느리고 쳐서 이기니, 우리 군사들이 무너졌다. 배행방 등이 군사를 내보내어 포위하였으나, 박작성은 산에 의지하여 요해처를 세우고 압록수로 굳게 막혔으므로,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우리 장수 고문(高文)은 오골(烏骨), 안지(安地) 등 여러 성의 군사 3만여 명을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였는데, 두 진으로 나누어 설치하였다. 설만철이 군사를 나누어 이에 대응하니, 우리 군사는 패하여 무너졌다. 황제가 또 내주자사 이도유(李道裕)에게 명령하여 군량과 기계를 옮겨 오호도(烏胡島)에 두게 하고 장차 크게 군사를 일으키려고 하였다.
8년(649)에 당나라 태종이 죽었다. 조서를 남겨 요동 전쟁을 그만두게 하였다.
사론(史論): 처음에 태종이 요동에서 사변을 일으킬 때 간하는 사람이 하나가 아니었다. 또 안시[성]에서 군대를 돌이킨 후에는 스스로 성공하지 못한 것을 깊이 후회하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위징(魏徵)이 있었다면 내가 이번 걸음을 하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고 하였다. 그가 다시 정벌하려 할 때에 사공(司空) 방현령(房玄齡)이 병중에서 상소하여 간하였다.
“노자(老子)는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을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폐하는 위명과 공덕은 이미 만족하다고 할 수 있으며, 토지를 개척하고 강토를 넓혔으니 역시 그칠 만합니다. 또 폐하께서 매양 한 명의 중죄인을 판결할 때에도 반드시 세 번 되풀이하고 다섯 번 아뢰게 하며, 간소한 반찬을 올리게 하고 음악을 그치게 한 것은 인명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제 죄없는 사졸들을 몰아 칼날 밑에 맡겨두어서 비참하게 죽게 하니, 그들만은 불쌍히 여길 만하지 않다는 것입니까? 예전에 고구려가 신하의 절개를 어겼다면 죽이는 것이 마땅하고, 백성을 억압하고 못살게 했다면 멸망시키는 것이 옳으며, 후일 중국의 걱정거리가 될 것이라면 없애버리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지금 이 세 가지 죄목이 없는데, 앉아서 중국을 번거롭게 하여, 안으로 앞 시대의 부끄러움을 씻고 밖으로 신라를 위해 복수한다고 하니, 어찌 보존되는 것은 작고 잃는 것은 큰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라건대 폐하는 고구려가 스스로 잘못을 고치고 착하게 되도록 허락하시고, 파도 가운데의 배를 불사르고 모집에 응한 군사를 돌려보내면, 자연히 화이(華夷)가 기뻐하여 의지할 것이며 먼 곳에서는 삼가하고 가까운 곳에서는 편안하게 될 것입니다.”
양공(梁公)이 죽을 때 한 말이 간곡하기가 이와 같았으나, 황제가 따르지 않고 동쪽 지역을 폐허로 만들어 스스로 통쾌하게 여기려 하다가 죽은 후에야 그만 두었다. 사론에서 『과장하기를 좋아하고 공 세우기를 즐겨하여 먼 곳에서 싸우기에 힘썼다.』는 것이 이것을 말함이 아닐까?
유공권(柳公權)의 소설에 이런 말이 있다.
『주필산의 전쟁에서 고구려가 말갈과 군사를 합하여 사방 40리에 뻗치니 태종이 그것을 보고 두려운 빛이 있었다.』 또 이런 말이 있다.『6군이 고구려에 제압되어 거의 위세를 떨치지 못하게 되었을 때, 척후병이 고하기를 ‘영공(英公)의 대장기가 검은 깃발이 포위되었다.’고 하자 황제가 크게 두려워하였다.』
비록 결국에는 스스로 빠져나갔지만 두려워함이 그러하였는데 신·구당서와 사마광의 자치통감에서 이것을 말하지 않은 것은 자기 나라를 위하여 숨긴 것이 아니겠는가?
보장왕 한성평양 시대ad650~ad668
9년(650) 여름 6월에 반룡사(盤龍寺)의 보덕화상(普德和尙)이, 나라에서 도교를 받들고 불교를 믿지 않았으므로, 남쪽으로 옮겨 완산(完山) 고대산(孤大山)으로 갔다. 가을 7월에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을 해쳐 백성들이 굶주렸다.
11년(652) 봄 정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650년에 고구려가 대동강 평양의 반룡사를 뺏은 것으로 고려되므로 대동강 한성(평양)으로 천도하였다고 추론된다.
먼저 한성의 역사를 보면 당시에는 한수라고 부르던 대동강에 백제 온조왕이 먼저 들어왔었다.
온조왕은 처음에 미추성에 상륙했는데 지금의 평원군 미두산성이다.
뒤에는 비류백제 후손이 들어와 살았다.
온조왕은 부아악(자모산성)에 올라보고 정도하였는데 부아악은 자모산성이다.
온조왕은 마한 동북 100리에 도래하여 터를 잡았다.
지금 성천이다. 성천 상리가 온조왕의 첫 도읍지다.
백제 근초고왕은 북포산으로 천도하였다. 이는 <삼국유사> 기록이다.
개루왕 4년 서기 131년에 북한산성을 쌓았는데 바로 대성산성이다.
고구려 대성산성 안에 백제 토산성이 있다.
근초고왕은 북포에 안학궁을 짓고 천도한 것이다.
근초고왕의 북한산성은 대성산성의 안학궁에 해당한다.
[삼국사기],[삼국유사]에서 남평양이라고도 하였다.
[삼국사기/지리지]13세 근초고왕에 이르러 (371년에) 고구려의 남평양(南平壤)을 빼앗아 한성(漢城)에
도읍하고 105년을 지냈다. 고 하였다.
그러나 백제가 빼앗은 것이 아니라 남평양은 본래 백제 것이고 광개토왕 때에 처음 고구려에 빼앗긴 것이다.
고구려는 한성을 쌓았다. 지금의 평양성이다.
평양성의 중성은 고구려인이 쌓았다.
이는 4개의 성벽 축조 기록에서 고구려 관직 이름으로 증명된다.
당시 고구려인은 한성이라 불렀고, 훗날 연개소문의 아들 연남산의 묘지명에서도
한성을 지키지 못해 잡혀왔다는 기록으로 남아있다.
평양 외성은 당나라 장안성을 본따서 만들어졌다고 한다.
양원왕이나 평원왕 때 만들어진 것이 당나라 장안성을 모방할 수는 없다.
즉, 후고구려나 발해 때에 만들어진 것이다.
고구려 한성인 평양성
[일본서기]에서 성명대왕聖明大王이 550년경에 평양平壤=南平壤과 한성漢城=平山 漢城을 되찾았으나 한성은 신라에게 내주었다고 하였다. 평양은 고구려에게 내주었을 것이다. [삼국사기] 거칠부전에도 같은 내용이 있다.
이 때 전투 기록에 보면 고구려왕은 동성산으로 도망갔다고하였다. 대성산성을 의미한다.
백제 무령왕의 2왕자인 일본의 흠명천황 기록을 보면 성명왕의 아들 여창(위덕왕)이 550년에 고려를 쳤다. 백합야에서 쉬다가 고구려 습격을 받았으나 다음날 고구려장수가 누구냐고 물으니 백제 한솔 29세라고 했다. 고구려장수를 죽이고 동성산의 고려왕을 추격하였다.
冬十月,庚寅朔己酉,百濟王子余昌,明王子,威德王也.悉發國中兵,向高麗國,築百合野塞,眠食軍士.是夕觀覽,鉅野墳腴,平原瀰迤,人跡罕見,犬聲蔑聞.俄而儵忽之際,聞鼓吹之聲.余昌乃大驚,打鼓相應,通夜固守.凌晨起見,曠野之中,覆如青山,旌旗充滿.
會明,有著頸鎧者一騎,插鐃者二騎,鐃字未詳.珥豹尾者二騎,并五騎,連轡到來問曰:「少兒等言:『於吾野中,客人有在.』何得不迎禮也.今欲早知與吾可以禮問答者姓名年位.」余昌對曰:「姓是同姓,位是杆率,年二十九矣.」百濟反問.亦如前法而對答焉.遂乃立標而合戰.
於是,百濟以鉾,刺嶞高麗勇士於馬,斬首.仍刺拳頭於鉾末,還入示眾.高麗軍將,憤怒益甚.是時百濟歡叫之聲,可裂天地.復其偏將,打鼓疾鬥,追卻高麗王於東聖山之上.
이해 백제가 한성과 평양을 버렸다.
是歲,百濟棄漢城與平壤.
신라인이 한성에 들어갔는데 지금 신라의 우두방, 니미방이다.
新羅因此入居漢城, 今新羅之牛頭方、尼彌方也.地名,未詳.
13년(654) 여름 4월에 사람들이 혹 말하였다.
“마령(馬嶺) 위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너희 임금과 신하들이 사치함이 한도가 없으니
패망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하였다.”
겨울 10월에 왕은 장수 안고(安固)를 보내 고구려 군대와 말갈 군사를 출동시켜 함께 거란을 쳤는데,
송막도독(松漠都督) 이굴가(李窟哥)가 막아서 신성에서 우리 군사를 크게 패퇴시켰다.
14년(655) 봄 정월. 이에 앞서 우리가 백제·말갈과 함께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33성을 빼앗았으므로, 신라 왕 김춘추(金春秋)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원조를 구하였다.
2월에 고종(高宗)이 영주도독 정명진(程名振)과 좌위중랑장 소정방(蘇定方)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공격하였다.
여름 5월에 정명진 등이 요수를 건너니,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 군사가 적은 것을 보고 문을 열고 귀단수(貴端水)를 건너 마주 싸웠다.
정명진 등이 분발하여 우리 군사를 공격해서 크게 이기고 천여 명을 죽이고 사로잡았으며, 그 외곽과 촌락을 불지르고 돌아갔다.
15년(656) 여름 5월에 서울에 비가 쇠처럼 떨어졌다. 겨울 12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황태자의 책봉을 축하하였다.
17년(658) 여름 6월에 당나라 영주도독 겸 동이도호(東夷都護) 정명진과 우령군 중랑장 설인귀(薛仁貴)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공격하였으나 우리에게 이기지 못하였다.
[통감]658 夏,五月,癸未,徙安西都護府於龜茲,以舊安西夏為西州都督府,鎮高昌故地。 六月,營州都督兼東夷都護程名振、右領軍中郎將薛仁貴將兵攻高麗之赤烽鎮,拔之,斬首四百餘級,捕虜百餘人。高麗遣其大將豆方婁帥眾三萬拒之,名振以契丹逆擊,大破之,斬首二千五百級。
18년(659) 가을 9월에 아홉 마리의 호랑이가 한꺼번에 성으로 들어와 사람을 잡아먹었는데, 붙잡으려 하였으나 잡지 못하였다. 겨울 11월에 당나라 우령군 중랑장 설인귀 등이 우리 장수 온사문(溫沙門)과 횡산(橫山)에서 싸워서 이를 깨뜨렸다.
백제, 고구려의 횡산현으로 고려된다.
횡산현과 석성
19년(660) 가을 7월에 평양의 강물이 무릇 3일 동안이나 핏빛이었다.
겨울 11월에 당나라가 좌효위대장군 글필하력(契苾何力)을 패강도(浿江道) 행군대총관으로, 좌무위대장군 소정방을 요동도 행군대총관으로, 좌효위장군 유백영(劉伯英)을 평양도 행군대총관으로, 포주자사(蒲州刺史) 정명진을 누방도(鏤方道) 총관으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길을 나누어 와서 공격하였다.
역사에 이제 처음 등장하는 패강(浿江)이 바로 대동강이다. 고구려가 대동강 한성으로 수도를 옮겨간 것을 알았던 것이다.
20년(661) 봄 정월에 당나라가 하남·하북·회남의 67주의 군사를 모집하여 4만 4천여 명을 얻어서 평양·누방 군영으로 나아가고, 또 홍려경 소사업(蕭嗣業)을 부여도 행군총관으로 삼아 회흘(回紇) 등 여러 부의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여름 4월에 임아상(任雅相)을 패강도 행군총관으로, 글필하력을 요동도 행군총관으로, 소정방을 평양도 행군총관으로 삼아, 소사업 및 여러 오랑캐 군사와 함께 무릇 35군이 수륙으로 길을 나누어 일제히 전진하게 하였다. 황제가 스스로 대군을 거느리려 하였으나 울주(蔚州) 자사 이군구(李君球)가 건의하였다. “고구려는 작은 나라인데 어찌 중국의 모든 힘을 기울일 일이 있겠습니까? 만약 고구려가 망한다면 반드시 군사를 내어 지켜야 할 터인데, 적게 내면 위엄이 떨쳐지지 않고, 많이 내면 사람들이 불안해 할 터이니, 이것은 천하 백성들이 옮겨다니며 수자리 사는 일로 피로하게 하는 것입니다. 신이 생각하건대 정벌하는 것이 정벌하지 않는 것만 같지 못하고, 멸망시키는 것이 멸망시키지 않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또한 마침 무후(武后)도 간하였으므로 황제는 그제야 그만두었다.
661년 4월에 당나라는 35만 군대로 출병하였다. 이중 임아상은 패강도(대동강)로 가고 글필하력은 요동도로 가고 소정방은 (백제로부터) 평양도로 가고 소사업은 부여도로 가고 정명진은 루방도로 가고, 방효태는 옥저도로 고구려에 들어갔다.
그 결과 백제로부터 먼저 대동강 평양에 도착한 소정방이 8월에 패퇴하였다.
그리고 나중에 다음해 2월에 패강도로 진격하던 임아상이 죽고,
사수에 도착한 옥저도총관 방효태가 전멸하였는데 이 사수는 장수왕의 구도 평양 사산성으로 고려된다. 그곳이 고주몽 때에 옥저라고도 하던 곳이다.
四月庚辰,任雅相為浿江道行軍總管,契苾何力為遼東道行軍總管,蘇定方為平壤道行軍總管,蕭嗣業為扶餘道行軍總管,右驍위將軍程名振為鏤方道行軍總管,左驍위將軍
八月甲戌,蘇定方及高麗戰于浿江,敗之
二年二月甲子,大易官名.甲戌,任雅相薨.戊寅,龐孝泰及高麗戰于蛇水,死之
8월에 대동강 평양에서 패퇴한 소정방은 패강도총관 임아상을 따라서 다시 평양으로 향한 것으로 보인다. 병부상서 임아상은 이듬해 군중에서 죽었는데, 소정방이 군대를 지휘하여 다시 대동강 평양성을 포위했다가 물러간 것이다.
여름 5월에 왕은 장군 뇌음신(惱音信)을 보내 말갈의 무리를 이끌고 신라의 북한산성을 포위하여 열흘이
되도록 풀어주지 않았으므로, 신라는 식량길이 끊겨 성 안 사람들이 두려워하였다. 갑자기 큰 별이 우리
진영에 떨어지고 또 비가 오고 천둥이 쳤으므로, 뇌음신 등은 의심하고 놀라서 군사를 이끌고 후퇴하였다.
가을 8월에 소정방이 우리 군사를 패강에서 깨뜨려 마읍산(馬邑山)을 빼앗고 마침내 평양성을 포위하였다. 9월에 연개소문은 그 아들 남생(男生)을 보내 정예군 수만 명으로써 압록수를 지키게 하였으므로 여러 군대가 건너 올 수 없었다.
압록수는 압록강이 아니다. 국내성으로부터 내려오는 지금의 유하(柳河)를 의미하는 것이다.
글필하력이 이르렀을 때 얼음이 크게 얼었으므로, 글필하력이 무리를 이끌고 얼음을 타고 물을 건너 북을 치고 소리 지르며 진격하니, 우리 군사가 무너져 달아났다. 글필하력이 수십 리를 뒤쫓아 우리 군사 3만 명을 죽였으며 나머지 무리는 모두 항복하고 남생은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마침 군사를 돌리라는 조서가 내려져 이리하여 그들은 돌아갔다.
21년(662) 봄 정월에 좌효위장군 백주(白州) 자사 옥저도총관 방효태(龐孝泰)가 사수(蛇水) 가에서 연개소문과 싸웠는데, 전군이 몰락하고 그 아들 13명과 함께 모두 전사하였다.
소정방이 평양을 포위하였으나 마침 큰 눈이 와서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연개소문이 구도성에서 방효태군을 무찌르고 군대를 돌려서 대동강으로 남하하고 있으므로 구원군이 없어진 소정방은 포위를 풀고 물러난 것이다.
무릇 전후에 걸친 행군에서 모두 큰 성과 없이 물러갔다.
25년(666) 왕은 태자 복남(福男)<신당서에는 남복(男福)이라고 하였다.>을 보내 당나라에 들어가 태산(泰山) 제사에 참가하게 하였다.
연개소문이 죽자 장자인 남생이 대신 막리지가 되어 처음 국정을 맡으면서 여러 성으로 순행하면서, 그 아우인 남건(男建)과 남산(男産)에게 남아서 뒷일을 맡게 하였다. 어떤 사람이 두 아우에게 말하기를 “남생이 두 아우가 핍박하는 것을 싫어하여 제거하려고 마음먹고 있으니 먼저 계략을 세우는 것이 낫겠습니다.”고 하였다. 두 아우는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또 어떤 사람이 남생에게 고하기를 “두 아우는 형이 그 권력을 도로 빼앗을까 두려워, 형에게 거역하여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 합니다.”고 하였다.
남생은 친한 사람을 몰래 평양으로 보내 그들을 살피게 하였는데, 두 아우가 그를 덮쳐 붙잡았다.
이리하여 왕명으로 남생을 불러들였으나, 남생은 감히 돌아오지 못하였다. 남건이 스스로 막리지가 되어 군사를 내어 그를 토벌하니, 남생은 달아나 국내성에 웅거하면서 그 아들 헌성(獻誠)을 시켜 당나라에 가서 애걸하였다.
당나라 기록에는 국내고도성이라고 하였다.
또한 천남생을 현도군개국공으로 봉하였으니 국내성과 현도성은 가까운 것이다.
국내 위나암성
6월에 당나라 고종이 좌효위대장군 글필하력에게 명령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그에 응하여 맞이하게 하니, 남생이 몸을 빼어 당나라로 달아났다.
가을 8월에 왕은 남건을 막리지로 삼아 서울과 지방의 군사의 일을 겸하여 맡게 하였다.
9월에 황제가 남생에게 조서를 내려 특진(特進) 요동도독 겸 평양도 안무대사를 주고 현도군공으로 봉하였다.
겨울 12월에 고종이 이적(李勣)을 요동도 행군대총관 겸 안무대사로 삼고, 사열(司列) 소상백(少常伯) 안륙(安陸)의 학처준(處俊)을 그 부장으로 삼았으며, 방동선(龐同善)과 글필하력을 함께 요동도 행군부대총관 겸 안무대사로 삼고, 수륙제군총관(水陸諸軍摠管) 병 전량사(轉糧使) 두의적(竇義積)·독고경운(獨孤卿雲)·곽대봉(郭待封) 등은 모두 이적의 지휘를 받게 하였다.
또 하북 여러 주의 조부(租賦)를 모두 요동으로 보내 군용으로 공급하게 하였다.
26년(667) 가을 9월에 이적이 신성을 함락시키고 글필하력을 시켜 그곳을 지키게 하였다.
이적이 처음 요하를 건널 때 여러 장수들에게 말하였다.
“신성은 고구려의 서쪽 변방의 요해지이니 먼저 그곳을 빼앗지 않고는 나머지 성들도 쉽게 빼앗을 수 없다.”
마침내 공격하니 성 사람 사부구(師夫仇) 등이 성주를 묶고 문을 열어 항복하였던 것이다.
이적이 군사를 이끌고 진격하니 16성이 모두 함락되었다.
방동선과 고간이 아직 신성에 있었는데 연남건(淵男建)이 군사를 보내 그 진영을 습격하니,
좌무위장군 설인귀가 이를 공격하여 깨뜨렸다.
고간이 나와 금산(金山)에 이르러 우리 군사와 싸우다가 패하자,
우리 군사는 이긴 기세를 타고 적을 추격하여 패주시켰으나, 설인귀가 군사를 이끌고 측면에서 공격하여 우리 군사 5만 여 명을 죽이고, 남소성·목저성·창암성의 세 성을 함락시키고 연남생 군사와 합하였다.
곽대봉이 수군을 데리고 다른 길로부터 평양으로 달려왔다.
이적이 별장(別將) 풍사본(馮師本)을 보내 군량과 병장기를 싣고 가 공급하게 하였는데, 풍사본의 배가 부서져서 시기를 놓쳐 곽대봉의 군사들이 굶주리고 군핍하였다.
곽대봉이 글을 지어서 이적에게 주려고 하였으나, 적이 빼앗아 보고 그 허실을 알게 될까 두려워하여,
이합시(離合詩)를 지어 이적에게 주었다.
이적이 노하여 “군의 사정이 급한데 무슨 시냐? 꼭 목을 베겠다.”고 말하였다.
행군관기통사사인(行軍管記通事舍人) 원만경(元萬頃)이 그 뜻을 풀어주니 이적이 그제야 다시 군량과 병장기를 보내 주었다.
원만경이 격문을 지어 “압록강의 험한 곳을 지킬 줄 모른다.”고 하니,
연남건이 회보하기를 “삼가 명을 받들겠다.”고 하고는 곧 군사를 옮겨 압록강 나루에서 웅거하니,
당나라 군사들이 건널 수 없었다. 고종이 듣고 원만경을 영남(嶺南)으로 귀양보냈다.
학처준이 안시성 밑에 있으면서 미처 대열을 이루지 못하였는데, 우리 군사 3만이 갑자기 닥치니
군중(軍中)이 크게 놀랐다. 학처준이 호상(胡床) 위에 걸터 앉아서 막 마른 밥을 먹다가 정예 군사를 뽑아
우리 군사를 공격하여 패퇴시켰다.
27년(668) 봄 정월에 당나라가 우상(右相) 유인궤(劉仁軌)를 요동도 부대총관으로 삼고 학처준·김인문
(金仁問)을 그 부장으로 삼았다.
2월에 이적 등이 우리 부여성을 함락시켰다.
설인귀가 이미 금산에서 우리 군사를 깨뜨리고 이긴 기세를 타서 3천 명을 거느리고 장차 부여성을 공격하려 하니 여러 장수들이 군사가 적은 것을 이유로 말렸다.
설인귀가 “군사는 꼭 많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 있다.”고 하고,
마침내 선봉이 되어 나아와 우리 군사와 싸워 이겨서 우리 군사들을 죽이고 사로잡았다.
마침내 부여성을 함락시키니 부여주(扶餘州) 안의 40여 성이 모두 항복을 청하였다.
시어사(侍御史) 가언충(賈言忠)이 사신으로 왔다가 요동으로부터 돌아가니
황제가 “군대 안은 어떠한가?” 하고 물으므로 그가 대답하였다.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예전에 선제께서 죄를 물을 때에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은 적이 아직 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속담에 ‘군대에 중매가 없으면 중도에 돌아온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남생의 형제가 다투어 우리의 길잡이가 되었으므로 적의 진실과 허위를 우리가 모두 알고,
장수는 충성되며 군사는 힘을 다하기 때문에, 신이 ‘반드시 이긴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또 고구려비기(高句麗秘記)에 900년이 되기 전에 마땅히 팔십(八十) 대장이 멸망시킬 것이다.고 하였는데,
고씨(高氏)가 한나라 때부터 나라를 세워 지금 900년이 되었고, 이적의 나이가 80입니다.
적은 거듭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빼앗아 팔고, 지진이 나서 땅이 갈라지고, 이리와 여우가 성으로
들어가며, 두더지가 문에 구멍을 뚫고, 인심이 위태하여 놀라니,
이번 걸음으로 다시 거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연남건이 다시 군사 5만 명을 보내 부여성을 구하려고, 이적 등과 설하수(薛賀水)에서 만나 어울려서
싸우다가 패하니 죽은 자가 3만여 명이나 되었다.
이적이 대행성(大行城)으로 진격하였다.
여기서 부여성은 천산의 부여성을 의미한다. 설하수는 서요하, 즉 시라무렌강의 이름이 된다.
여름 4월에 살별[彗星]이 필성(畢星)과 묘성(卯星) 사이에 나타났다.
당나라 허경종(許敬宗)이 “살별이 동북방에서 나타나는 것은 고구려가 망할 징조이다.”라고 말하였다.
가을 9월에 이적이 평양을 함락시켰다.
이적이 이미 대행성에서 이기자, 다른 길로 나왔던 여러 군대가 모두 이적과 합쳐 진격하여 압록책(鴨록柵)에 다달았다.
우리 군사가 맞서 싸웠으나 이적 등이 이를 패배시키고, 200여 리를 쫓아와서 욕이성(辱夷城)을 함락
시키니, 여러 성에서 도망하고 항복하는 자들이 이어졌다.
글필하력이 먼저 군사를 이끌고 평양성 밑에 이르니, 이적의 군대가 뒤를 이어 와서 한 달이 넘도록
평양을 포위하였다.
보장왕은 연남산을 보내 수령 98명을 거느리고 흰 기를 들고 이적에게 나아가 항복하니,
이적이 예로써 접대하였다.
연남건은 오히려 문을 닫고 항거하여 지키면서, 자주 군사를 내보내 싸웠으나 모두 패하였다.
연남건은 군사의 일을 중 신성(信誠)에게 맡겼는데, 신성은 소장(小將) 오사(烏沙)와 요묘(饒苗) 등과
함께 몰래 이적에게 사람을 보내 내응하기를 청하였다.
5일이 지난 후 신성이 성문을 여니, 이적이 군사를 놓아 성에 올라가 북치고 소리지르며 성을 불질렀다.
연남건은 스스로 찔렀으나 죽지 않았다. 당나라 군사가 왕과 연남건 등을 사로잡았다.
겨울 10월에 이적이 돌아가려 할 때, 고종이 명령하여 왕 등을 먼저 소릉(昭陵)에 바치고,
다시 군대의 위용을 갖추고 개선가를 연주하면서 수도로 들어가 대묘(大廟)에 바치게 하였다.
12월에 황제가 함원전(含元殿)에서 포로를 받았는데, 왕의 정사가 자신이 행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용서하고, 왕을 사평태상백(司平太常伯) 원외동정(員外同正)으로 삼고, 연남산을 사재소경(司宰少卿)
으로 삼고, 중 신성을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로 삼고, 연남생을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으로
삼았으며, 이적 이하의 사람들에게 차등 있게 관직과 상을 내리고, 연남건은 검주(黔州)로 귀양보냈다.
고구려의 5부, 176성, 69만여 호를 나누어 9도독부, 42주, 100현으로 하고, 평양에 안동도호부
(安東都護府)를 두어 통치하였으며, 우리 장수 중에 공이 있는 자들을 뽑아 도독·자사·현령으로 삼아
중국 사람들과 함께 정치에 참여하게 하였고, 우위위대장군(右威衛大將軍) 설인귀를 검교(檢校)
안동도호로 삼아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진무하게 하였다.
이 때가 고종 총장(總章) 원년 무진년(668)이었다.
[총장] 2년 기사년(669) 2월에 왕의 서자(庶子) 안승(安勝)이 4천여 호를 거느리고 신라에 투항하였다.
안승의 한성이 바로 황해도 재녕의 장수산성이다.
여름 4월에 고종이 3만 8천3백 호를 강회(江淮)의 남쪽과 산남(山南)·경서(京西) 여러 주의 빈 땅으로
옮겼다.
함형(咸亨) 원년 경오년(670) 여름 4월에 이르러 검모잠(劍牟岑)이 나라를 부흥하려고 당나라에 배반하여, 왕의 외손 안순(安舜)<[순(舜)을] 신라기(新羅紀)에는 승(勝)이라고 썼다.>을 세워 임금으로 삼았다.
당나라 고종이 대장군 고간을 보내 그를 동주도(東州道) 행군총관으로 삼아 군사를 내어 그들을 토벌하니, 안순은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달아났다.
2년 신미년(671) 가을 7월에 고간이 안시성에서 남은 무리를 깨뜨렸다.
3년 임신년(672) 12월에 고간이 우리의 남은 무리와 백수산(白水山)에서 싸워 그들을 깨뜨렸다.
신라가 군사를 보내 우리를 구원하였으나, 고간이 쳐서 이기고 2천 명을 사로잡았다.
4년 계유년(673) 여름 윤5월에 연산도(燕山道) 총관 대장군 이근행(李謹行)이 호로하(瓠濾河)에서
우리나라 군사들을 깨뜨리고 수천 명을 사로잡으니 나머지 무리들은 모두 신라로 달아났다.
호로하는 홀골산성이 있는 성천군으로 고려된다.
676년 나당전쟁에서 신라가 승리하였다. 대동강 평양의 안동도호부는 궤멸되어서 요동
고성으로 후퇴한다.
이는 요양시 평원왕의 장안성이다.
의봉(儀鳳) 2년 정축년(677) 봄 2월에 황제가 항복한 왕을 요동주도독으로 삼고 조선왕으로 봉하여
요동으로 돌려보내어 나머지 무리들을 안무하게 하였는데, 동쪽나라 사람으로서 먼저 여러 주에
와 있던 자들도 모두 왕과 함께 돌아가게 하고 안동도호부를 신성으로 옮겨 통치하게 하였다.
고덕무 후고구려 시대ad699~ad819
보장왕은 요동에 이르러 배반할 것을 꾀하여 몰래 말갈과 통했으므로, 황제가 개요(開耀)
원년(681)에 공주(州)로 소환하였다.
보장왕이 영순(永淳) 초년(682)에 죽으니 황제는 왕에게 위위경(衛尉卿)을 추증하고, 명령을 내려
당나라 수도로 옮겨 힐리(돌궐왕)의 무덤 왼쪽에 장사지내고 무덤 앞에 비를 세웠다.
그 백성들은 하남(河南)·농우의 여러 주로 흩어서 나누어 옮기고, 가난한 사람들은 안동성(安東城) 옆의
옛 성에 남겨 두었는데, 간혹 신라로 도망하는 자들이 있었다. 나머지 무리들은 흩어져 말갈과 돌궐로
들어가 고씨 임금은 마침내 끊어졌다.
수공(垂拱) 2년(686)에 황제가 항복한 왕의 손자 보원(寶元)을 조선군왕(朝鮮郡王)으로 삼고,
성력(聖曆) 초년(698)에 이르러 좌응양위(左鷹揚衛) 대장군으로 올렸다가 다시 충성국왕(忠誠國王)으로
봉하고, 안동의 옛 부를 통치하게 하였으나 그는 가지 않았다.
이듬해에 항복한 왕의 아들 덕무(德武)를 안동도독으로 삼았는데, 후에 점차 나라를 이루었다.
옮겨갔다.
이는 발해 초기 영역에 태자하 남쪽에서부터 대동강까지 영역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덕무의 후고구려는 요동성총벽화(고덕무 고분으로 추정, 그리하여 그가 처음 안동도호부
도독이 되었던 요동 신성의 모습을 그의 고분에 남긴 것이다.)가 있는 곳에 후고구려의 도읍을
세운 것으로 고려된다.
백제 구천성이 있던 곳이다.
그러다가 후고구려가 확장하여 황해도 재녕의 장수산성을 차지하여 역시 한성이라 부르고,
다시 본래 평양성으로 내려와 평양성을 확장하게 된다.
단동의 봉황산성도 이 후고구려 시대에 지어진 것이다.
716년 당나라 사자가 발해에 갈 때에 대련을 거쳐갔는데, 대련 역시 후고구려 영역이었다.
원화(元和) 13년(818)에 이르러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악공(樂工)을 바쳤다.
고덕무의 후고구려는 발해 속국으로서 699년부터 819년까지 120년간 존속하였다.
그러나 중국과의 교역 사실은 발해에게 위협이 되었고, 발해 대인수왕이 후고구려를 병탄하였다.
그후 발해는 이 후고구려 땅에는 주현(州縣) 대신에 군현(郡縣)을 두어서 다스렸다.
사론(史論): 현도와 낙랑은 본래 조선의 땅인데 기자가 봉해졌던 곳이다.
기자가 그 백성들에게 예의와 농사, 누에치기, 옷감짜기를 가르치고 법금(法禁) 8조를 두었다.
이리하여 그 백성들이 서로 도둑질하지 않고 문을 닫지 않았으며, 부인이 정조와 신의를 지켜 음란하지
않고, 먹고 마시는 데 변두를 사용하였으니, 이것은 어진 이의 교화 덕택이다.
또 천성이 유순하여 3방(三方)과 달랐으므로, 공자(孔子)가 도가 행해지지 않는 것을 슬퍼하고 바다에
배를 띄워 건너와서 이곳에 살려고 하였던 것도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경(易經)의 효사(爻辭)에 『2는 칭찬이 많고, 4는 두려움이 많다. 가깝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고구려는 진한시대 이후 중국의 동북 모퉁이에 끼어 있었다.
그 북쪽 이웃은 모두 천자의 관리로서, 난세에는 영웅으로 빼어나서 이름과 자리를 함부로 도둑질하였으니, 가히 두려움이 많은 땅에 거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겸손한 뜻이 없고 중국의 봉토(封土)를 침략하여 원수를 만들고, 그 군현에 들어가 살았다.
이 때문에 전쟁이 이어지고 화가 맺어져 거의 편안할 때가 없었다.
고구려는 동쪽으로 도읍을 옮기고 수나라와 당나라가 통일한 때를 만나고도, 오히려 천자의 명에 거역하여 순종하지 않고, 천자의 사신을 토굴에 가두었다.
그 완고하고 두려워하지 않음이 이와 같았으므로 여러번 죄를 묻는 군사를 불러들였다.
비록 혹시 기이한 계책을 세워 대군을 이긴 적도 있었으나, 마침내 왕이 항복하고 나라가 멸망한 후에야
그치게 되었다.
그러나 처음과 끝을 보면, 위아래가 화합하고 많은 무리들이 화목할 때는 비록 대국이라도 빼앗을 수 없었는데, 나라에 대해서 불의하고 백성에게 어질지 못하여, 무리의 원망을 일으키는 데에 이르면 무너져 스스로 떨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맹자(孟子)는 이렇게 말하였다.
『하늘의 때와 땅의 이로움이 사람의 화목만 같지 못하다.』
좌씨(左氏)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라가 흥하는 것은 복으로 말미암는 것이고, 망하는 것은 화로 말미암는 것이다.
나라가 흥할 때에는 백성을 대하기를 자기가 상처를 입은 것같이 하니 이것이 그 복이요,
나라가 망할 때에는 백성을 흙이나 풀과 같이 보니 이것이 그 화이다.』
이 말들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릇 나라를 가진 자로서, 포악한 관리가 윽박지르고 권세가가 함부로 거두어 들이도록
내버려 두어 인심을 잃는다면, 비록 잘 다스려 어지럽지 않게 하고, 보존하여 망하지 않게 하려 해도,
이것이 어찌 억지로 술을 먹고 취하기를 싫어하는 것과 다르겠는가?
고구려 역사를 마침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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