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고구려

24. 양원왕(陽原王)

오늘의 쉼터 2008. 10. 28. 00:45

 

24. 양원왕(陽原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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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도는 잘못된 지도다.

양원왕(陽原王)


■ ?∼559(양원왕 15)
■ 고구려 제24대왕
■ 재위 545∼559



※ 본문설명

양강상호왕(陽崗上好王) 또는 양강왕(陽崗王)이라 하였으며 이름은 평성(平成)이다. 안원왕의 맏아들로 533년(안원왕 3)에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부왕의 사후에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러나 그 즉위과정은 순탄하지 못하였다. 즉, 안원왕이 죽은 뒤 두 왕비가 각각 자기소생의 왕자를 왕으로 세우려 하여 두 왕자를 지지하는 세력들 사이에 군사적 충돌이 발생하였다. 이 충돌을 통하여 양원왕을 밀던 추군(群)이 다른 왕자를 지지하던 세군(細群)에게 승리함으로써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뒤에도 왕의 전제적 권한은 크게 도전을 받아 왕권이 점차 약화되어갔다. 즉, 《삼국사기》 거칠부(渠柒夫) 열전에 551(양원왕 7)에 거칠부를 만난 고구려의 고승 혜량(惠亮)이 나라에 정란이 있어 멸망이 멀지 않다고 한 것을 보면, 지배세력간의 분쟁이 계속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557년에 환도성(丸都城)의 간주리(干朱理)가 모반한 것도 고구려 내부의 동요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왕권의 동요와 더불어 국제관계도 불안한 상황으로 북아시아의 신흥유목기마민족인 돌궐이 551년에 고구려의 신성(新城)과 백암성(白巖城)을 공격하였다.

이에 고구려에서는 장군 고흘령(高紇領)이 군사 1만을 거느리고 나아가 그들을 크게 격파하였으나, 돌궐과의 대치는 고구려로 하여금 매우 큰 국력소모를 가져왔다. 이러한 돌궐과의 대치상태 속에서 551년 신라와 백제의 연합군에 의하여 한강유역을 상실하는 큰 손실도 입었다.

중국과의 외교관계에 있어서도 동위(東魏) 및 동위를 계승한 북제(北齊)와의 교류를 계속하고, 550년에는 북제로부터 ‘사지절시중 표기대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 (使持節侍中驃騎大將軍 領護東夷校尉 遼東郡開國公 高句麗王)’의 지위를 인정받았으나, 552년 북제의 사신 최유(崔柳)가 보인 무례한 행위와 553년에 북제의 문선제(文宣帝)가 고구려의 세력이 미치고 있던 거란족에 대하여 친정을 함으로써 양국간의 긴장이 고조되기도 하였다.

《양서 梁書》에 따르면 양원왕의 즉위년은 548년이 되나, 일반적으로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545년이 타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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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三國史記
魏書
北齊書
北史
梁書
日本書紀
高句麗의 遼西進出企圖와 突厥(李龍範, 史學硏究 4, 1959)
高句麗의 漢江流域喪失의 原因에 대하여(盧泰敦, 韓國史硏究 13, 1976)
5∼6世紀 東아시아의 國際情勢와 高句麗의 對外關係(盧泰敦, 東方學志 44,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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