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고구려

27. 영류왕(榮留王)

오늘의 쉼터 2008. 10. 28. 01:00

 

27. 영류왕(榮留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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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류왕(榮留王)




■ 생몰 : ?∼642(보장왕1)


■ 고구려 제27대왕


■ 재위 618∼642



 

※ 본문설명

이름은 건무(建武) 또는 성(成)이라 하였으며, 영양왕의 이복동생으로 영양왕이 죽은 뒤에 왕위를 계승하였다.

왕의 개인적 성품이나 행적 등에 대한 자료는 남아 있지 않으며, 단지 《삼국사기》를 통하여 그의 대외관계를 중심으로 한 정치적 자취만을 엿볼 수 있다.

왕의 즉위년(618)에 중국에서는 수(隋)나라를 이어 당(唐)나라가 건국되었다.

고구려로서는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입은 피해를 복구함과 아울러, 새로 등장하는 당나라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당나라도 국내의 완전한 통일작업과 민심의 수습, 그리고 돌궐의 위협에서 벗어나기까지는 고구려와 평화적 관계를 유지하여야 하였다.

이에 양국은 외교사절을 자주 교환하고,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시 사로잡힌 포로들을 622년(영류왕 5)에 교환하는 등 현실적인 우호관계를 유지해 나갔다.

이러한 우호적 관계 속에서 624년 당나라로부터 공식적 외교관계를 통하여 도교(道敎)가 들어왔고, 다음해에는 사람을 당나라에 보내어 불교와 도교를 배워오게 하였다.

그러나 당나라가 국내의 혼란을 수습하고, 나아가서 630년 동돌궐을 격파하고, 640년 고창국(高昌國)을 복속시키면서 양국간에는 점차 긴장이 고조되어갔다.

640년에는 태자인 환권(桓權)을 당나라에 파견하고, 당나라의 국학(國學)에 고구려인의 입학을 요청하는 등 겉으로는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척하였지만, 당나라는 사절을 파견하여 고구려가 수군(隋軍)격퇴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경관(京觀)을 파괴한다든지(631), 고구려의 내정과 지리를 정탐하기까지 하여(641), 양국의 긴장관계는 점차 고조되어 나갔던 것이다.

또한, 고구려도 당나라와의 대결이 불가피함을 인식하고, 631년부터 천리장성을 수축하기 시작하여 그뒤 16년간에 걸쳐 완성을 보게 되었다. 당나라와 이같이 형식적 우호관계를 맺고 있던 고구려는 남으로 잃었던 고토를 회복하기 위하여 신라와 사투를 계속하였다.

629년 낭비성(娘臂城)을 빼앗기는가 하면, 638년 신라의 칠중성(七重城)을 공격하는 등 긴장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같이 대외관계가 긴장된 가운데, 왕은 당시 천리장성의 수축을 감독하고 있던 연개소문(淵蓋蘇文)을 제거하려다가, 642년 오히려 그에 의하여 몸이 토막나는 비참한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왕과 연개소문간의 알력의 원인이 어떠한 것인지는 잘 알 수 없지만, 왕권을 강화하려던 왕의 의도에 연개소문이 장애가 되었던 듯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특히 대당(對唐) 외교정책 등의 이견도 있지 않았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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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三國史記
舊唐書
新唐書
淵蓋蘇文에 대한 若干의 存疑(李弘植, 李丙燾博士華甲紀念論叢, 1956)



 

전문설명

 

영류왕의 천리장성ad618(영강)~ad642

 

영류왕(榮留王)은 이름이 건무(建武)<또는 성(成)이라고도 하였다.>이며,

영양왕의 배다른 동생이다.

영양왕이 재위 29년에 죽었으므로, 즉위하였다.
고무高武라고도 했다. 연호는 영강
永康과 함화咸和로 추정된다.

영강명 금동불상(永康銘 金銅佛像)은 평양시 평천리에서 출토된 금동불상이며 영강(永康)이라는

연호가 표시되어 있다.


영강7년 세차 갑 위망모 조 미륵존상    
永康七年 歲次 甲 爲亡母 造 彌勒尊像 
복원령망자신승각 자씨 삼회지초         
福願令 亡者神 昇覺 玆氏三會之初
오무생념구경필과 제약유죄우원시소멸  
悟无生念 究竟必果 堤若有罪 右願時 消滅
수희자 등동 차원                              
隨喜者 等同 此願


중국의 영강(永康) 연호는 서기 300년 단 일년뿐이었다.

북한에서는 영강을 고구려 연호로서 평원왕 7년으로 주장하나 [한단고기]에서

평원왕의 즉위연호는 태덕(太德)이다.

고구려왕 즉위 7년이 갑해인 경우는 영류왕이다.

황해도 신천군에서 출토된 함화(咸和) 10년의 명전(銘磚)이 있다.
함화 10년 태세 을미 손씨조 咸和 十年 大歲乙未 孫氏造

중국 동진(東晋)의 성제 연호 함화 10년은 335년으로서 역시 을미년이다.

그러나 백제 땅에서는 칠지도나 근구수왕의 함령을 보면 379년까지도 태세를 기록하지 않았다.
395년은 아신왕(阿莘王) 5년이라 불가하고, 455년 개로왕 2년이라서 불가하다.

백제 무령왕이나 창왕 등은 연호가 없었던 사실이 무령왕묘와 사리불탑으로 증명된다.

따라서 함화는 고구려 연호로 추정되는데 515년은 백제 무령왕이 평안도까지 장악하여

고구려 연호 발굴이 불가능하다.

575년은 고구려 평원왕의 태덕(大德) 연호(559년 이후)를 이은 평원왕 후반부 연호로서 가능하지만 559년에 등극한 평원왕이 7년만인 566년에 별 이유없이 개원하는 것이 마땅치 않다.

반면에 635년 을미년은 영류왕이 당나라 역서를 수입하여 고구려에 적용한 해가

626년이 되므로서, 역법으로 바꾸는 것을 계기로 다시 개원하였을 수 있다.

따라서 함화는 영류왕의 즉위 연호 영강에 이어지는 후기 연호(626-642)로 추정한다.

 

2년(619) 봄 2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여름 4월에 왕은 졸본에 행차하여 시조묘에 제사지냈다.

5월에 왕은 졸본으로부터 돌아왔다.

 

4년(621) 가을 7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5년(622)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당나라 고조(高祖)가 수나라 말기에 전사들이

우리 나라에서 많이 사로잡힌 것을 유감으로 여기고 왕에게 조서를 내려 말했다.

『짐은 삼가 하늘의 명을 받들어 온 땅에 군림하여, 3령에 공손히 순종하고 모든 나라를 불러

쓰다듬으며, 넓은 하늘 아래를 골고루 어루만지고 사랑하여, 해와 달이 비치는 곳을 모두

평안케하였다.

왕은 요동을 다스리며 세세토록 번복(藩服)에 머물면서, 정삭(正朔)을 받들고, 멀리서도 조공을

바치려고 사신을 보내 산천을 넘어 정성을 나타내었으니, 짐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이제 천지 사방이 평안하고 사해(四海)가 잘 다스려져서, 옥백(玉帛)이 통하고 도로가 막힘이

없으니, 바야흐로 화목함을 펴서 오랫동안 교분(交分)과 우의(友誼)를 두텁게 하고 각기 강토를

유지하면, 어찌 훌륭하고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다만 수나라 말년에 전쟁이 계속되고 난이 일어나, 싸우는 곳에서 각각 그 백성을 잃어,

마침내 골육이 헤어지고 가족이 나뉘고, 여러해 지나도록 홀어미와 홀아비의 원한을 풀어주지

못하였다.

지금 두 나라가 화통하여 의리에 막힘이 없게 되었으므로 이곳에 있는 고구려 사람들을 모아서

곧 보내려고 한다.

왕은 그곳에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도 놓아주어 편안히 기르는 방도를 힘써 다하고, 어질고

딱하게 여기는 도리를 함께 넓혀야 할 것이다.』

이리하여 중국사람을 모아서 보냈는데 수가 만여 명에 이르렀다.

고조가 크게 기뻐하였다.

 

6년(623) 겨울 12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7년(624) 봄 2월에 왕은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책력을 반포해 줄 것을 청하였다.

황제가 형부상서 심숙안(沈叔安)을 보내 왕을 상주국(上柱國) 요동군공 고구려국왕으로 책봉하고, 도사(道士)에게 명하여 천존상(天尊像) 및 도법(道法)을 가지고 와서 노자(老子)를 강의하게 하였다. 왕과 나라 사람들이 그것을 들었다.

겨울 12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8년(625)에 왕은 사람을 당나라에 보내 불교와 도교의 교법을 배워오기를 구하니 황제가 허락하였다.

 

9년(626)에 신라와 백제가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고구려가 길을 막아 입조하지 못하게 하고

또 거듭 침략합니다.”라고 말하였다.

황제가 산기시랑 주자사(朱子奢)를 보내 절부를 가지고 화친을 권하게 하였다.

왕은 표를 올려 사죄하고 두 나라와 화평할 것을 청하였다.


11년(628) 가을 9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태종(太宗)이 돌궐의 힐리극한(
利可汗)을 사로잡은 것을 축하하고, 겸하여 봉역도(封域圖)를 바쳤다.

 

12년(629) 가을 8월에 신라 장군 김유신이 동쪽 변경으로 쳐들어 와서 낭비성(娘臂城)을 깨뜨렸다. 9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14년(631)에 당나라가 광주사마(廣州司馬) 장손사(長孫師)를 보내 수나라 전사들의 해골을 묻은

데에 와서 제사지내고, 당시 세운 경관(京觀)을 허물었다.

<전요지全遼志>에서 경관(京觀)은 요양시 수산首山 남 7리에 있다고 하였다.

이는 수양제 침공 때에 평양 외라성에 들어왔던 수나라 전사자들의 해골탑이었고 당나라 사자가

허물고 돌아갔다.

중국은 요양시 경관을 진제 사마선이 요동국 정벌 후에 세운 것이라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허문 

기록도 없고 요양시 경관은 분명히 당나라인들이 허문 것이다.

 

봄 2월에 왕은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장성(長城)을 쌓았는데, 동북쪽으로 부여성으로부터

동남쪽으로 바다에까지 이르러 천여 리나 되었다. 무릇 16년만에 공사를 마쳤다.

東北自扶餘城 東南至海 千有餘里

장성(長城)은 부여성에서 동남쪽 바다까지라고 하였다.

서쪽 부여에서 동남쪽 바다까지로 고려하면 북부여의 천산에서 안시성까지일 것이다.

적봉시 북부에 장성이 있다.

 

.
천리장성도

 

21년(638) 겨울 10월에 신라의 북쪽 변경의 칠중성(七重城)을 침략하였다.

신라의 장군 알천(閼川)이 막으므로 칠중성 밖에서 싸웠는데 우리 군사가 졌다.

 

23년(640) 봄 2월에 세자 환권(桓權)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태종이 위로하고 선물을 특별히 후하게 주었다.

왕은 자제를 당나라에 보내 국학(國學)에 입학할 것을 청하였다.

가을 9월에 해가 빛이 없다가 3일이 지난 뒤 다시 밝아졌다.

 

24년(641)에 황제는 우리 태자가 입조하였으므로, 직방낭중(職方郎中) 진대덕(陳大德)을 보내

노고에 보답하였다.

진대덕이 국경으로 들어와서 이르는 성읍마다 관리들에게 비단을 후하게 주면서

“내가 산수를 좋아하는데 이곳에 경치가 뛰어난 곳이 있으면 보고 싶다.”고 말하였다.

관리들은 기꺼이 그를 인도하여 놀러 돌아다니며 가지 않는 곳이 없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그 세세한 곳을 다 알게 되었다.

중국사람으로 수나라 말년에 군대에 나갔다가 숨어서 남게 된 사람들을 보면, 친척들의 생사를

말해주어 사람들마다 눈물을 흘렸다.

그리하여 가는 곳마다 남녀가 좌우에서 그를 보았으며 왕은 군대의 호위를 성대하게 하여

사신을 맞이하였다.

진대덕이 사신으로 온 것을 기회로 나라의 허실을 엿보았으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알지 못하였다.

진대덕이 돌아가 아뢰니 황제가 기뻐하였다. 진대덕이 황제에게 “그 나라가 고창(高昌)이 망한

것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객사에서 접대하는 것이 평상시보다 더 은근합니다.”고 말하였다.

황제가 말하였다.

“고구려는 본래 사군(四郡)의 땅이다. 내가 군사 수만 명을 내어 요동을 공격하면 저들은 필시

나라의 모든 힘을 들여 구하려고 할 것이다. 따로 수군을 보내 동래(東萊)에서 출병하여 바닷길로 평양으로 가서 수군과 육군이 합세하면, 그 나라를 빼앗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다만 산동의 주현

(州縣)이 피폐하여 회복되지 않았으므로 나는 그들을 괴롭히지 않으려 할 뿐이다.”

 

25년(642) 봄 정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왕은 서부대인 연개소문(淵蓋蘇文)에게 명령하여 장성을 쌓는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겨울 10월에 연개소문이 왕을 죽였다.

 

11월에 태종은 왕이 죽은 것을 듣고, 동산에서 애도의 의식을 거행하고 명령을 내려

물건 300단(段)을 주고, 사신을 보내 절부를 가지고 조위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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