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고구려

21. 문자명왕(文咨明王)

오늘의 쉼터 2008. 10. 28. 00:09
 
21. 문자명왕(文咨明王)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이지도에서 현도성이 고구려시대 평양이고 평양아래가 백제위례성이다

또한 국내성은 경계부위에 고구려시대 압록강 주변에 국내성이다
이지도는 잘못 그려진 지도이니 참고하여 보아주세요....

문자명왕(文咨明王)


■ ?∼519(안장왕 1)
■ 고구려 제21대왕
■ 재위 492∼519



※ 본문설명

일명 명치호왕(明治好王)이라고도 하며 이름은 나운(羅雲)이다. 장수왕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고추대가(古鄒大加) 조다(助多)이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에 의하여 양육되다가 장수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자료의 인멸로 그의 내치(內治)가 어떠하였던가는 잘 알 수 없으나, 498년 금강사(金剛寺)를 창건한 사실을 보면 불교를 장려함으로써 고대국가의 정신적 기반확립에도 노력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대외관계를 살펴보면, 그는 전대(前代)의 외교정책을 따라서 남북조의 분열을 잘 이용하여 국제질서 속에서 안정된 위치를 유지하였다. 즉, 즉위와 더불어 북위(北魏)로부터 ‘사지절도독요해제군사정동장군영호동이중낭장요동군개국공고구려왕 (使持節都督遼海諸軍事征東將軍領護東夷中郎將遼東郡開國公高句麗王)’ 이라는 지위를 인정받았고, 북위와 이른바 조공을 통한 외교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였다.

동시에 494년 제(齊), 508년 양(梁) 등 남조의 국가로부터 각각 ‘사지절산기상시도독영평이주정동대장군낙랑공 (使持節散騎常侍都督營平二州征東大將軍樂浪公)’과 ‘무동대장군개부의동삼사(撫東大將軍開府儀同三司)’의 지위를 인정받는 한편, 조공을 통한 외교관계도 가졌다.

또한 494년 물길족(勿吉族)에 의하여 멸망당한 부여의 왕과 일족의 투항을 받아들이기도 하였으며, 백제와 신라에 대한 침공을 통하여 497년 신라의 우산성(牛山城), 512년 백제의 가불성(加弗城) 및 원산성(圓山城)을 점령하기도 하였으나, 나제군사동맹을 통한 백제와 신라의 연합작전으로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양상을 보였다. 전체적으로 볼 때, 문자명왕은 광개토왕 및 장수왕의 위업을 이어받아 고구려의 전성기를 지속시킨 인물이다.

--------------------------------------------------------------------------------


▶ 참고문헌

三國史記
魏書
南齊書
梁書
5·6世紀東아시아의 國際情勢와 高句麗의 對外關係(盧泰敦, 東方學志 44, 1984)
平壤淸巖里廢寺址の調査(小泉顯夫, 昭和13年度古蹟調査報告, 1975 復刊)


'뿌리와 역사 > 고구려' 카테고리의 다른 글

23. 안원왕(安原王)  (0) 2008.10.28
22. 안장왕(安臧王)  (0) 2008.10.28
20. 장수왕(長壽王)  (0) 2008.10.28
19.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0) 2008.10.28
18. 고국양왕(故國壤王)  (0) 2008.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