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안장왕(安臧王)
안장왕(安臧王)
■ ?∼531(안장왕 13)
■ 고구려 제22대왕
■ 재위 519∼531
※ 본문설명
이름은 흥안(興安)이다. 문자왕의 장자로 태어나 498년(문자왕 7)에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왕의 사후에 왕위를 계승하였다. 중국 양(梁)나라로부터 영동장군 도독 영평이주제군사 고구려왕 (寧東將軍都督 營平二州諸軍事 高句麗王)의 지위를 인정받았고, 북위(北魏)로부터도 안동장군 영호 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 (安東將軍 領護 東夷校尉 遼東郡開國公 高句麗王)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이와같이, 중국의 남북조국과 양면에서 지위를 인정받는 한편, 양측과 조공무역관계를 유지하여 전대에 이미 확립된 대중국 양면외교정책을 따라 행하였다. 이러한 양면외교정책은 남북조의 분열을 이용하여 대중국방면의 안정을 추구하던 고구려의 전통적 외교정책이었던 것이다.
523년(안장왕 5)과 529년에는 백제를 침략하였다. 이것은 전통적인 남진정책을 계속 추진해나갔음을 보여준다. 내치에 있어서는 자료의 인멸로 자세한 것을 알 수 없다. 다만, 왕의 재위기간에 고구려의 장기간의 안정이 점차 동요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지배체제의 동요 가운데 왕도 피살된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중국 미녀와의 연애사건이 있었던 모양이나 그 자세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왕이 죽은 해에 대하여, 《양서》에는 526년으로 되어 있으나 일반적으로 《삼국사기》의 기록을 따라 531년으로 보고 있다.
※ 보충설명
고양시가 개백현(皆伯縣)으로 불리던 백제시대, 이 지역에 한(韓 : 삼국사기에는 漢으로 표기)씨 성을 가진 부호가 살고 있었다. 그 한씨에게는 한주라는 어여쁜 딸이 있었다. 어느날 한주가 살던 마을에 젊은 사내가 나타난다. 그리고 한주와 젊은 사내는 사랑에 빠진다.
얼마후 그 젊은 사내는 홀연히 길을 떠나면서 한주에게 자신의 정체를 고백하게 된다. “나는 고구려 왕자인데 옛 고구려 땅인 이곳을 탈환하기 위해 신분을 감추고 잠입했다가 그대를 만난 것”이라고 자신의 정체를 밝힌 고구려 왕자는 “돌아가서 군사를 일으켜 꼭 돌아와 그대를 아내로 맞이하겠다. 그때까지 나를 기다려 달라”고 말한다.
고구려로 돌아간 사랑에 빠진 왕자는 문자명왕의 뒤를 이어 519년에 제 22대 고구려왕이 되니 그가 전설의 주인공 안장왕이며 장수왕의 증손자가 된다.
그 후 백제 무녕왕 시절. 한주가 살던 개백현 태수가 한주에게 반해 혼인을 청한다. 고구려 왕자와의 언약을 못잊는 한주는 태수의 청혼을 거절하고, 화가 난 태수는 한주를 감옥에 가두어 버린다.
어느날 이 사연을 듣게 된 안장왕은 신하들과 방책을 찾는다. 이때 왕의 여동생인 안학공주를 사모하던 을밀(乙密:평양 을밀대의 주인공으로 추정)이란 장수가 나서며 자신이 개백현 땅을 되찾고 한주를 구해올테니 안학공주와 혼인하게 해달라고 말한다. 기뻐하는 안장왕.
그리고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한강유역 침공. 고구려 장수 을밀은 광대패로 변장한 병사 수십명을 개백현으로 잠입시켜 기습작전에 나선다.
한편 옥에 갇힌 한씨 딸 한주의 결심은 흔들림이 없다. 태수는 자신의 생일날 옥에서 한주를 끌어내어 거듭된 청혼을 한다. 이때 장수 을밀의 병사는 광대패로 변장, 하객으로 행사에 참석했다가 백제군을 기습한다. 그리고 아수라장.
이 틈을 타 관아를 탈출한 한주는 고봉산에 올라 봉화를 올린다. 이 봉화를 본 안장왕은 개백현을 공격하여 잃었던 고토를 순식간에 탈환하게 된다. 그리하여 안장왕은 사랑하는 한씨녀와 재회하고 장수 을밀도 안학공주와 혼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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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문헌
三國史記
魏書
梁書
日本書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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