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순왕(敬順王)
◐ 생존기간 : (?~978)
◐ 재위기간 : (927~935)
◐ 본문설명
신라 56대 왕으로서 성은 김(金)이며 이름은 부(傅)이다. 문성왕(재위 839-857년)의 6대손으로서
아버지는 신흥대왕(神興大王)으로 추봉된 이찬(;2등급) 효종(孝宗)이며,
어머니는 헌강왕(憲康王;재위 875-886년)의 딸 계아태후(桂娥太后)이다. 아들이 둘 있었다.
큰아들은 마의태자(麻衣太子)이고 막내아들은 범공(梵空)이다.
고려에 항복한 뒤에 왕건(王建)의 큰딸 낙랑공주와 다시 결혼하였다.
927년 후백제 견훤(甄萱)의 침공으로 경애왕(景哀王)이 죽은 뒤 이종6촌 동생으로 왕위에 올랐다.
견훤에 의하여 추대되어 즉위하게 되었는데, 앞 왕의 시신을 들어서 서당(西堂)에 모셔두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통곡하고 시호를 올려 경애(景哀)라 하였으며 남산(南山) 해목령(蟹目嶺)에 장사지냈다.
태조가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지냈다. 11월에 죽은 아버지를 신흥대왕(神興大王)으로 추존하고
어머니를 왕태후로 삼았다.
12월에 견훤이 대목군(大木郡)에 칩입하여 들판에 쌓아놓은 곡식을 모두 불태웠다.
928년 정월에 고려의 장군 김상(金相)이 초팔성(草八城) 도적 흥종(興宗)과 싸우다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5월에 강주(康州) 장군 유문(有文)이 견훤에게 항복하였다. 6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8월에 견훤이 장군 관흔(官昕)에게 명하여 양산(陽山)에 성을 쌓게 하였다.
태조가 명지성(命旨城) 장군왕충(王忠)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공격하여 달아나게 하였다.
견훤이 대야성(大耶城) 아래에 나아가 진을 치고 머무르며 군사를 나누어 보내 대목군의 벼를 베어갔다.
10월에 견훤이 무곡성(武谷城)을 쳐서 함락시켰다.
929년 6월에 천축국(天竺國) 승려 마후라(摩羅)가 고려에 이르렀다.
7월에 견훤이 의성부(義城府)의 성(城)을 공격하였으므로 고려 장군 홍술(洪述)이 나아가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순주(順州) 장군 원봉이 견훤에게 항복하였다.
태조가 그것을 듣고 노하였으나 원봉은 일찍이 공로가 있었으므로 그를 용서해 주고 단지 순주를
고쳐 현(縣)으로 삼았다.
10월에 견훤이 가은현(加恩縣)을 에워쌌으나 이기지 못하고 되돌아갔다.
재위 때는 각처에서 군웅(群雄)이 할거하여 국력이 쇠퇴하고,
특히 여러 차례에 걸친 후백제의 침공과 약탈로 국가의 기능이 마비되었다.
930년 정월에 재암성(載巖城) 장군 선필(善弼)이 고려에 항복하니,
태조가 두터운 예로서 대우하고 상부(尙父)로 칭하였다.
일찍이 태조가 장차 신라와 우호를 통하려 할 때 선필이 그것을 인도해 주었는데 이때 이르러 항복하였다.
그는 공로가 있었고 또한 나이가 많은 것을 염두에 둔 까닭에 그를 총애하여 포상한 것이다.
태조가 견훤과 고창군(古昌郡) 병산(甁山) 아래에서 싸워 크게 이겼는데, 죽이고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영안(永安), 하곡(河曲), 직명(直明), 송생(松生) 등 30여 군현이 차례로 이어서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2월에 태조가 사신을 보내 승리를 알리니 왕이 답례(答禮)로 사람을 보내 방문하고 아울러 서로 만나기를 청하였다.
가을 9월에 나라 동쪽의 바닷가 주군(州郡)의 마을들이 모두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931년 2월에 태조가 50여 명의 기병을 이끌고 경기(京畿)에 이르러 뵙기를 청하였다.
왕은 백관과 함께 교외에서 맞이하여 궁궐에 들어와 서로 대면하고 정성과 예의를 곡진하게 하였다.
임해전에서 잔치를 베풀었는데, 술이 얼근하게 취하자 왕이 말하였다.
“나는 하늘의 도움을 받지 못하여 화란(禍亂)이 점점 닥치고, 견훤이 의롭지 못한 짓을
마음대로 행하여 우리나라를 망하게 하니 그 어떤 원통함이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우니, 좌우의 신하들이 목메어 울지 않음이 없었다.
태조 역시 눈물을 흘리며 위로하고, 수십 일을 머무르다가 수레를 돌렸다.
왕이 혈성(穴城)까지 전송하고 사촌 동생[堂弟] 유렴(裕廉)을 볼모로 삼아 [태조의] 수레를 따라가게
하였다.
태조 휘하의 군사는 정숙하고 공정하여 조금도 나쁜 짓을 저지르지 않았으므로,
도읍 사람들이 서로 경하해 하며 말하였다.
“옛날 견씨(甄氏)가 왔을 때에는 마치 승냥이나 범을 만난 것 같았는데 지금 왕공(王公)이
이르러서는 마치 부모를 보는 듯하구나.”
가을 8월에 태조가 사신을 보내 왕에게 채색 비단과 안장 갖춘 말을 보내주고 아울러
여러 관료와 장수, 군사들에게 베와 비단을 차등있게 주었다.
932년 정월에 지진이 일어났다.
여름 4월에 사신 집사시랑(執事侍郞) 김불(金)과 부사 사빈경(司賓卿) 이유(李儒)를
당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933년 당나라의 명종(明宗)이 사신을 고려에 보내 책명(冊命)을 내려 주었다.
934년 9월에 노인성(老人星)이 나타났다. 운주(運州) 땅의 30여 군현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935년 10월에 왕은 사방의 토지가 모두 다른 사람의 차지가 되었고 나라는 약하고 형세는
외롭게 되어 스스로 힘으로 안정시킬 수 없다고 여겨, 여러 신하들과 더불어 도모하여 땅을 들어
태조에게 항복하려고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의논하기를 어떤 사람은 그렇게 하는 것이 좋다 하고
어떤 이는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왕자가 말하였다.
“나라가 존속하고 망함에는 반드시 하늘의 명(命)이 있습니다.
단지 충성스러운 신하와 의로운 선비들과 더불어 합심하여 백성의 마음을 한데 모아
스스로 지키다가 힘이 다 한 이후에 그만둘 일이지,
어찌 1천 년 사직을 하루 아침에 가볍게 남에게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왕이 말하였다.
“외롭고 위태로움이 이와 같으니 형세를 보전할 수가 없다.
이미 강해질 수도 없고 더 약해질 것도 없으니 죄없는 백성으로 하여금 간(肝)과
뇌(腦)를 땅에 바르도록 하는 것은 내가 차마 할 수 없는 바이다.”
이에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로 하여금 서신을 가지고 가서 태조에게 항복을 청하게 하였다.
왕자는 울면서 왕에게 하직하고 떠나 곧바로 개골산(皆骨山)에 들어가 바위에 의지하여 집을 삼고
삼베옷을 입고 풀을 먹으며 살다가 일생을 마쳤다.
11월에 태조가 왕의 글을 받고 대상(大相) 왕철(王鐵) 등을 보내 그를 맞이하게 하였다.
왕은 백관을 이끌고 서울에서 출발하여 태조에게 귀순하였다.
아름다운 수레와 보배로 장식한 말들이 30여 리에 이어져 뻗쳐 길을 꽉 메웠으며 구경하는
사람들은 담을 두른 듯하였다.
태조가 교외에 나가 맞이하여 위로하고 궁궐 동쪽의 가장 좋은 집 한 채를 내려 주었으며
맏딸 낙랑공주(樂浪公主)를 아내로 삼게 하였다.
12월에 [경순왕을] 정승공(正丞公)으로 봉하고 지위를 태자(太子)보다 위에 있게 했으며,
봉록(俸祿) 1천 섬을 주었다. 시종(侍從)한 관원과 장수들도 모두 등용해 썼고 신라(新羅)를
경주(慶州)로 고쳐 공의 식읍(食邑)으로 삼았다.
처음에 신라가 항복하자 태조가 매우 기뻐하여 두터운 예로써 대우하고 사람을 시켜 고하였다.
“지금 왕께서 나라를 나에게 주었으니 이는 큰 것을 주신 것입니다. 바라건대 [왕의] 종실과
혼인을 맺어 장인과 사위의 우호를 영원히 누렸으면 합니다.”
[경순왕이] 대답하였다.
“나의 큰아버지 잡간(干) 억렴(億廉)은 지대야군사(知大耶郡事)인데,
그 딸자식은 덕과 용모 모두 뛰어났으니 이 사람이 아니면 집안 살림을 갖출 수가 없을 것입니다.”
태조가 마침내 그를 아내로 삼아 아들을 낳으니 이가 현종(顯宗)의 아버지로, [후에] 안종(安宗)으로
추봉되었다. 경종(景宗) 헌화대왕(獻和大王) 때 이르러 정승공의 딸을 맞아들여 왕비로 삼고
정승공을 상부령(尙父令)으로 봉하였다.
공은 송(宋)나라 흥국(興國) 4년 무인에 이르러 죽었는데, 시호를 경순(敬順)<또는 효애(孝哀)라고도
하였다.>이라 하였다. 나라 사람들은 시조로부터 이 때까지를 삼대(三代)로 나누었는데, 처음부터
진덕왕(眞德王)까지 28명의 왕을 상대(上代)라 하고 무열왕(武烈王)부터 혜공왕(惠恭王)까지 8명의 왕을 중대(中代)라 하였으며 선덕왕(宣德王)부터 경순왕(敬順王)까지 20명의 왕을 하대(下代)라 일컬었다.
그리고 경순왕은 태조로부터 유화궁(柳花宮)을 하사받았으며, 낙랑공주(樂浪公主)를 아내로 맞고
정승공(政承公)에 봉해졌으며, 경주(慶州)를 식읍(食邑)으로 받았다. 한편, 경주의 사심관(事審官)에
임명됨으로써 고려시대 사심관제도의 시초가 되었다. 능은 경기 연천군 장남면(長南面)에 있다.
※ 본문참고 : 두산대백과사전
※ 본문출처 : 차석찬의 역사창고
※ 이미지출처 : http://jotha.iwebschool.net/stu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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