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애왕(景哀王)
◐생존기간 : (?~927)
◐재위기간 : (924~927)
◐ 본문설명
신라 55대 왕으로서 이름은 위응(魏膺)이며 아버지는 신덕왕(재위 912-917년)이고, 어머니는 헌강왕(憲康王;재위 875-886년)의 딸인 의성왕후(義城王后)이다. 그리고 경명왕(景明王;재위 917-924년)의 아우이다.
917년(경명왕 1) 이찬(;2등급)으로서 상대등(上大等)이 된 뒤, 신라 말의 혼란기에 형인 경명왕의 뒤를 이어 924년 즉위하였다.
9월에 태조에게 사신을 보내 예방(禮訪)하였다. 10월에 몸소 신궁에 제사지내고 크게 사면하였다.
925년 10월에 고울부(高鬱府) 장군 능문(能文)이 태조에게 투항하니 위로하고 타일러 돌려 보냈는데, 그 성이 신라의 서울[王都]에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11월에 후백제 임금 견훤(甄萱)이 조카 진호(眞虎)를 고려에 볼모잡혔다. 왕이 그것을 듣고 사신을 보내 태조에게 이르기를 “견훤은 이랬다 저랬다 하고 거짓이 많으니 친하게 지내서는 안됩니다.”라고 하니 태조가 그렇게 여겼다.
926년 4월에 진호가 갑자기 죽었다. 견훤(甄萱)이 말하기를 “고려 사람이 일부러 죽였다.” 하고는 노하여 군사를 일으켜 웅진(熊津)에 진군하였다. 태조가 여러 성에 명하여 성벽을 굳게 하고 나오지 말도록 하였다. 왕이 사신을 보내 말하였다. “견훤이 맹약을 어기고 군사를 일으켰으니 하늘은 반드시 돕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대왕께서 한번 북을 쳐서 위세를 떨친다면 견훤은 반드시 스스로 파멸하고 말 것입니다.” 태조가 사신에게 일렀다. “내가 견훤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고 악(惡)이 가득 차서 스스로 쓰러지기를 기다릴 뿐이다.”
927년 정월에 태조가 몸소 백제를 정벌했는데 왕이 군사를 내어 도왔다.
2월에 병부시랑 장분(張芬) 등을 후당에 보내 조공하였다. 후당은 장분에게 검교공부상서(檢校工部尙書)의 관작을 주었고, 부사(副使) 병부랑중(兵部郞中) 박술홍(朴術洪)에게는 어사중승(御史中丞)의 관작을 겸하게 하였으며, 판관(判官) 창부원외랑(倉部員外郞) 이충식(李忠式)에게는 시어사(侍御史)의 관작을 겸하게 하였다.
3월에 황룡사 탑이 흔들려 북쪽으로 기울어졌다. 태조가 몸소 근암성(近巖城)을 깨뜨렸다. 후당의 명종(明宗)이 권지강주사(權知康州事) 왕봉규를 회화대장군(懷化大將軍)으로 삼았다.
4월에 지강주사(知康州事) 왕봉규가 사신 임언(林彦)을 후당에 보내 조공하니, 명종이 중흥전(中興殿)에 불러 접견하고 물품을 내려 주었다. 강주 관할의 돌산향(突山鄕) 등 4개 향(鄕)이 태조에게 귀순하였다.
9월에 견훤이 고울부(高鬱府)에서 우리 군사를 공격하였으므로 왕이 태조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태조가] 장군에게 명하여 굳센 군사 1만 명을 내어가서 구원하게 했는데, 견훤은 구원병이 미처 이르기 전인 겨울 11월에 갑자기 서울에 쳐들어갔다. 왕은 왕비와 궁녀 및 왕실의 친척들과 함께 포석정(鮑石亭)에서 잔치를 베풀며 즐겁게 놀고 있어, 적의 군사가 닥치는 것을 깨닫지 못하여 허둥지둥하며 어찌해야 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왕은 왕비와 함께 후궁(後宮)으로 달아나 들어가고 왕실의 친척과 공경대부(公卿大夫)와 사녀(士女)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하여 숨었다. 적병에게 사로잡힌 사람은 귀한 사람이나 천한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놀라 식은 땀을 흘리며 엉금엉금 기면서 종이 되기를 빌었으나 화(禍)를 면하지 못하였다. 견훤은 또 군사들을 풀어 놓아 공·사(公私)의 재물을 거의 모두 약탈하고, 궁궐에 들어가 거처하면서 좌우의 사람들에게 명하여 왕을 찾도록 하였다. 왕은 왕비와 첩 몇 사람과 함께 후궁에 있다가 붙잡혀 군대의 진영에 이끌려 왔다. [견훤은] 왕을 핍박하여 자살하도록 하고 왕비를 강제로 욕보였으며, 그 부하들을 풀어놓아 궁녀들을 욕보였다. 이에 왕의 족제(族弟)를 세워 임시로 나라 일을 맡아 다스리도록 하니, 이가 경순왕(敬順王)이다.
한편, 재위 기간 중에 황룡사에서 300여 명의 선승(禪僧)이 참여한 모임인 백좌통설선교(百座通說禪敎)를 개최한 적이 있는데, 이것이 대규모 선승모임의 시초이다. 임금을 남산 해목령(蟹目嶺)에 장사 지냈다. 그 뒤를 이어 문성왕의 6대손인 김부가 경순왕이 되었다.
※ 본문참고 : 두산대백과사전
※ 본문출처 : 차석찬의 역사창고
※ 이미지출처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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