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신라

● 풍월주 一世 魏花郞 ~八世 문노(文弩)

오늘의 쉼터 2008. 11. 2. 19:25

(一世)魏花郞者 剡臣公子也 母曰碧我夫人 以母寵爲毗處王摩腹子

世所謂摩腹七星也 阿時公 父曰善牟 母曰宝兮 守知公 父曰伊欣 母曰俊明 伊登公 父曰叔欣 母曰洪壽 苔宗公 父曰阿珍宗 母曰宝玉公主 比梁公 父曰比知 母曰妙陽 肜吹公 父曰德知 母曰加耶國肜肜公主 或曰 法興大王居七星之首 魏花郞則以母微不參云 而七星錄及宝兮記 皆無伊登公載魏花公則 未詳孰是也

公面如白玉 唇若赤脂 明眸皓齒 談下生風 碧我夫人在捺已生一女 乃毗處后碧花夫人也 碧花夫人入宮而 公以私弟出入有寵

法興大王時 以副君之子位在國公而 寵不及焉 阿時公乃勸大王下拜于公 公告于剡臣公 剡臣公曰 國公下拜于汝者 欲以汝爲臣也 今王老 國公有大望 汝其事之 公乃詣爲臣 事多稱旨 法興曰 吾鄧通也 未幾毗處果崩 智證大王卽位 以法興爲太子

公勸碧花后事太子 生女 是曰 三葉宮主也 時太子妃保道夫人 乃毗處女而無寵 保道之弟吾道者 妙心私通善兮后而生者 故甚美 有寵於太子 媚于三葉而深結于公 潛相通焉 乃生玉珍宮主 太子知之 以吾道賜阿時公 以碧花賜比梁公 乃寵正妃保道夫人 黜公踈之 雖然保道德之 請于智證大王 封于天柱而主祀 延帝太后亦幸之 及玉珍入幸 乃復如初寵之 遂居伊湌之位 玉珍專寵法興使保道爲尼 以公爲臣 以故只召太后當國而置花郞 以公爲其首 號曰風月主 只召者保道女也 爲立宗公夫人 生眞興大王而 法興大王愛玉珍宮主無立意 只召憂之 公乃曉大義于玉珍而立之 時人莫不義之 以此思道太后亦無事 公之德大矣

公之子孫甚繁 長女玉珍宮主 次女金珍夫人 乃吾道夫人生也 玉珍初嫁英失公 未幾受幸于法興大王 生比臺公 大王欲立爲太子 公諫之曰 臣女無骨品 而且與英失混處 恐未可也 法興崩 只召太后 降比臺公王子位 以奉公祀 比臺公女開元宮主 事銅輪太子有子 公子二花郞乃俊室夫人生也 俊室者守知公妹也 慈悲王外孫也 有美色善文章 初爲法興大王後宮 無子 歸于公而生 亦貌美而善文章 只召太后寵愛之 常侍左右 太后女叔明宮主悅之 逃出生子 是爲圓光祖師 我東方大聖人也 圓光之弟曰 菩利沙門 卽予曾祖也


花郞之祖 沙門之? 靑我之孫 碧我之子 在地則仙 在天則佛 圓滿常住 功德無缺



(1세)풍월주 위화랑(魏花郞)섬신공6)(剡臣公)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벽아부인(碧我夫人)이다.

 어머니가 총애를 받아  비처왕(毗處王)7)의 마복자(摩腹子)8)가 되었다.

세간에서 말하는바 마복칠성(摩腹七星)이다.

아시공(阿時公)의 아버지는 선모(善牟)이고 어머니는 보혜(宝兮)이다.  

수지공(守知公)의 아버지는 이흔(伊欣)9)이고 어머니는 준명(俊明)이다.  

이등공(伊登公)의 아버지는 숙흔(叔欣)이고 어머니는  홍수(洪壽)이다.  

태종공(苔宗公)의 아버지는 아진종(阿珍宗)이고 어머니는 보옥공주(宝玉公主)이다.  

비량공(比梁公)의 아버지는 비지(比知)이고 어머니는 묘양(妙陽)이다.

융취공(肜吹公)의 아버지는 덕지(德知)이고 어머니는 가야국10)의 융융공주(肜肜公主)이다.

 혹은 말하기를

 “법흥대왕은 칠성(七星)의 우두머리이며, 위화랑은 어머니의 신분이 낮아 포함되지 않았다.” 한다.

그런데 『칠성록(七星錄)』및『보혜기(宝兮記)』에는 모두 이등공(伊登公)이 없고 위화랑을 기재하고 있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잘 알 수 없다.

  공의 얼굴은 백옥과 같고, 입술은 마치 붉은 연지와 같고, 맑은 눈동자와 하얀 이를 가졌고,

말이 떨어지면 바람이 일었다.

벽아부인(碧我夫人)이 날이(捺已)에 있을 때 한 딸을 낳았는데,

곧 비처후(毗處后)인 벽화부인(碧花夫人)11)이다.  

벽화부인이 입궁하자, 공은 사제(私弟)로서 출입하여 총애를 받았다.

  법흥대왕12)은 그 때 부군(副君)13)의 아들로 국공(國公)14)의 자리에 있었는데,

법흥대왕의 총애가 (위화랑)공에게 미치지 못하였다.  

아시공이 이에 (법흥)대왕에게 권하여 (위화랑)공에게 하배(下拜)를 하게 하였다.

공이 그 것을 섬신공에게 말하였다.  

섬신공이 말하기를 “국공이 너에게 하배를 하는 것은 너를 신(臣)15)으로 삼기 위한 것이다.

 지금의 왕이 늙었고, 국공이 대망을 가지고 있다.

너는 그를 섬겨야 한다” 하였다. 공은 이에 찾아가 신하가 되어 섬기니, 많은 것이 (국공의) 뜻에 맞았다.  

법흥이 말하기를 ‘나의 등통(鄧通)이다’라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처(毗處)가 과연 죽었다16).

지증대왕이 즉위하고 법흥태자로 삼았다.

(위화랑)공은 벽화후(碧花后)에게 권하여 태자를 섬기도록 하여 딸을 낳았으니,

바로 삼엽궁주(三葉宮主)이다.

그 때 태자비인 보도부인(保道夫人)은 곧 비처왕(소지왕)의 딸인데 총애를 받지 못하였다.

보도(保道)의 아우인 오도(吾道)는 묘심(妙心)이 선혜후(善兮后)와 사통(私通)하여 낳았다.

그러므로 매우 아름다워 (법흥) 태자에게 총애를 받았다.

(오도는) 삼엽(三葉)에게 아양을 떨어 (위화랑)공과 깊이 사귀어 몰래 서로 정을 통하였다.

그리하여 옥진궁주(玉珍宮主)를 낳았다.  

태자가 알고 오도를 아시공(阿時公)에게 주고, 벽화(碧花)를 비량공(比梁公)에게 주었다.

이에 정비(正妃)보도부인을 총애하고, 공을 물리치고 멀리 하였다.

  그러나 보도(保道)는 (위화랑)공에게 덕이 있다고 여기고 지증대왕(智證大王)에게 청하여  

천주(天柱)에 봉하고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다.

연제태후(延帝太后) 또한 공을 사랑(幸) 하였다.

옥진이 들어가 (법흥)왕에게 사랑(幸)을 받자, 곧 다시 처음과 같이 공을 총애하게 되었다.

마침내 공은 이찬(伊湌)의 위(位)에 있게 되었다.

옥진이  법흥의 총애를 한 몸에 받게 되자, 보도(保道)로 하여금 비구니가 되게 하고

(위화랑)공을 신하로 삼았다.

그러므로 지소태후17)가 국정을 맡자 화랑을 설치하게 되었는데, 공을 그 우두머리(首)로 삼아 이름 하여

풍월주(風月主)18)라 하였다.

지소(只召)는 보도(왕후)의 딸인데 입종공(立宗公)19)의 부인이 되어 진흥대왕(眞興大王)을 낳았다.

그러나 법흥대왕이 옥진궁주를 사랑하여 진흥대왕으로 하여금 뒤를 잇게 할 뜻이 없었기에,

지소는 걱정이 되었다.

 (위화랑)공이 이에 대의로서 옥진을 깨닫게 하여, (진흥을 왕으로) 삼게 하였다.

그 때 사람들이 의롭게 여기지 않음이 없었다.

이로써 사도태후(思道太后) 또한 무사하였다. 공의 덕이 컸다.

  (위화랑)공의 자손은 매우 많았다.

장녀인 옥진궁주차녀인 금진부인(金珍夫人)은 곧 오도부인이 낳았다.

옥진은 처음에 영실공에게 시집을 갔으나, 얼마 안 있어 법흥대왕의 사랑(幸)을 받아 비대공(比臺公)을 낳았다.

 대왕이 (비대공을)  태자로 삼고자 하자, 공이 그 것을 말리며 말하기를

“신의 딸은 골품이 없고20) 또 영실과 더불어 함께 살았으니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법흥이 죽자(崩) 지소태후가 비대공의 왕자의 지위를 낮추어 공사(公祀)21)를 받들게 하였다.

비대공의 딸인 개원궁주(開元宮主)는 동륜태자(銅輪太子)를 섬겨 아들을 두었다.

공의 아들인 이화랑(二花郞)은 곧 준실부인(俊室夫人)이 낳았다.  

준실수지공(守知公)의 누이이고 자비왕(慈悲王)의 외손인데, 아름다움이 있었고 문장을 잘하였다.

처음에 법흥대왕의 후궁(後宮)이 되었으나, 아들이 없었다.

(위화랑)공에게 시집을 가서 (이화랑을) 낳았는데, 또한 모습이 아름답고 문장을 잘하였다.  

지소태후가 총애를 하여 늘 좌우에서 모시게 하였다.

태후의 딸인 숙명궁주(叔明宮主)가 좋아하여 도망 나가 아들을 낳았으니,

바로 원광조사(圓光祖師)22)로 우리 동방의 대성인이다.  

원광의 동생인 보리(菩利) 사문(沙門)은 곧 나23)의 증조이다.


화랑의 시조이고 사문의 아비이다.  

청아(靑我)의 손자이고 벽아(碧我)의 아들이다.

생시에는 선(仙)이고 죽은 후에는 부처이다.

원만하게 늘 존재하니 공덕이 모자람이 없도다.



6) 염신공으로 읽을 수도 있다.

7) 『삼국사기』에는 소지(炤知) 또는 비처 마립간이라고 나온다.

8) 마복자(摩腹子): 비처왕과 마복자들 사이의 관계는 일종의 사회적·정치적 의제가족관계를 맺었던 것을

   보여준다. 비처왕은 마복자로 구성된 정치적 추종자들을 갖게 되었고 마복자는 비처왕이라는 정치적

   후원자를 갖게 된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마복자의 존재는 단순히 성적 문란의 증거일 수 없다.

   (이종욱, 「『화랑세기』의 신빙성과 그 저술에 대한 고찰」, 『한국사연구』 97, 1997, pp. 9-10 참조)

9) 10세 풍월주 미생랑 조에는 수지공의 아버지는 등흔으로 나온다.

10) 당시 가야국과의 관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빈번하였다.

11) 벽화부인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 3, 신라본기 3, 照知麻立干 22년조에도 나오고 있다.

     그에 따르면 벽화부인은 捺已郡의 郡人인 波路의 딸로 되어 있다.

12) 毗處王(炤知王) 때 지증의 아들이었던 법흥은 그 이름이 原宗이었다.

     (『삼국사기』 4, 신라본기 4, 법흥왕 즉위조)

13) 8세 풍월주 문노 조에 법흥왕 건복 2년(537) 영실공을 부군으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려 한 것으로 보아

     지증 역시 부군으로서 비처왕(소지왕)을 이어 왕위계승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14) 『화랑세기』 서문에 나오는 국공에 대한 해석에 따라 그 역할을 달리 해석할 수 있다.

15) 당시 왕에게만 신(臣)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신의 용례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달랐다.

16) 『화랑세기』에서는 왕과 왕비의 죽음을 붕(崩)으로 그렇지 않은 사람의 죽음을 훙(薨) 등으로 구분하여

      표현하고 있다.

17) 지소태후는 법흥왕과 보도 사이에 출생하였는데 그의 작은 아버지인 입종에게 시집을 가서 진흥을 낳았다.

     진흥의 왕위에 오를 때 나이가 7살(『삼국사기』 4, 진흥왕 즉위조) 또는 15살(『삼국유사』 1, 기이

     2, 진흥왕조)로 나와 있다. 대체로 『삼국사기』의 기록과 같이 7살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 까닭에 지소태후가 섭정을 하게 되었다.

18) 신라시대에 일정한 시점에 여러 명의 화랑들이 있었는데 그 중 대표가 되는 화랑을 풍월주라고 하였다.

19) 입종공은 진흥왕의 아우이며 지소의 작은아버지가 된다. 이는 당시 왕궁에 거주하던 성골집단 안에서

     근친혼이 이루어진 것을 의미한다. (이종욱, 『신라상대왕위계승연구』, 1980, p. 261 참조)

20) 법흥왕대(514-540)에 이미 골품제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종욱, 「신라 중고시대의 골품제」,

    『역사학보』 99·100합집, 1983, pp. 25-38 참조)


21) 공사(公祀)는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공(公)의 제사라고 할 수 있다.

22) 원광의 성에 대한 이설들이 있다.

    『삼국유사』 4, 의해 5에는 『당속고승전』의 기록에 원광의 속성이 박씨였다고 나오고 있다.

     실제로 『속고승전』 13에는 원광의 속성이 박이었던 것으로 나오고 있다. 『해동고승전』 2에는

     원광의 속성은 설씨 혹은 박씨였던 것으로 나오고 있다.

     그런데 원광은 김대문의 증조인 보리(菩利) 사문의 형이 된다.

     따라서 『화랑세기』를 통하여 보면 원광의 성은 김씨였던 것을 알 수 있다.

23) 『화랑세기』의 저자인 김대문을 가리킨다.

二世)未珍夫公者 阿時公子也 母曰三葉宮主 乃法興大王女也 夢見白鶴而生 公貌美而多才 法興大王愛之 與比臺公等長于宮中 時玉珍宮主寵隆 只召太后以正統難立 三葉與阿時護之 以此太后愛三葉及公 及太后聽政 以公爲嬖臣 時公年十六能稱旨

先是三山公女俊貞爲源花 多置郎徒 至是法興大王女南毛公主者 乃百濟宝果公主生也 亦以絶色與公篤好 太后愛公 而右南毛欲立爲源花 先是法興大王以玉珍宮私夫英失公爲龍陽君 寵居上位 命破源花 故俊貞事之勤 沮破南毛 太后雖以遺命以英失爲繼夫 而實不悅 乃命公破之 太后又慮郎徒不足 使屬魏花公郎徒倍之 俊貞妬之 乃誘以酒 害之水上 毛徒發之

太后乃廢源花 以仙花爲花郞 號其衆曰風月 號其頭曰風月主 魏花公主之 公副之 未幾公主之

公自失南毛以後無以爲配 公以外孫嘗侍法興大王於宮中 與後宮妙道夫人有私而不敢言 太后知之 許之 公乃娶妙道 生美室娘主及美生郞 美室才色絶人 事眞興眞平受特寵 美生郞亦入花郞 公事只召太后盡其忠 寵衰 願以身殉國 率郎徒赴戰 累建大功 及美室得寵 進爵角干 夫人妙道亦至宮主 以續大元神統 於戱盛矣

以色事之 極盡其忠 以勇奉公 又盡其效 夫人妙道 魏公之孫 配生美花 天道攸長


 

 

(2세) 풍월주 미진부공(未珍夫公)아시공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삼엽궁주(三葉宮主)이니, 곧  법흥대왕의 딸이다.

 (궁주는) 꿈에 백학을 보고 (공을) 낳았다.

공의 모습이 아름답고 재주가 많아, 법흥대왕이 사랑하였다.

비대공(比臺公) 등과 더불어 궁중에서 자랐다.

그 때 법흥대왕의 옥진궁주에 대한 사랑이 극진하여 (비대공을 태자로 세우려 하였으나,) 지소태후가 정통24)이 즉위하기 어렵다고 하였는데, 삼엽과 더불어 아시공이 태후를 지지하였다.

이로써 태후가 삼엽(三葉)과 (미진부)공을 사랑하였다.

태후가 정치를 맡아 하게 되자 공을 폐신(嬖臣)25)으로 삼았는데,

그 때 공의 나이가 16살로 능히 태후의 뜻에 부합할 수 있었다.

 이에 앞서 삼산공(三山公)의 딸인 준정(俊貞)이 원화(源花)가 되었는데 많은 낭도를 두었다. 그 때 법흥대왕의 딸인 남모공주(南毛公主)는, 곧 백제 보과공주(宝果公主)26)의 소생으로 또한 뛰어난 미인이었으며, 공과 더불어 도탑게 사랑하였다.

태후가 공을 사랑하여 남모를 도와 원화로 삼고자 하였다.

  이에 앞서 법흥대왕이 옥진궁주의 사부(私夫)인 영실공을 용양27)군(龍陽君)으로 삼아 총애를 하며 높은 위에 있게 하고, (준화에게) 원화를 물러나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준정(俊貞)이 (영실공을) 부지런히 섬겨, 남모가 원화가 되는 것을 막으려 하였다. 태후는 비록 유명으로 영실을 계부(繼夫)28)로 삼았으나 실제로는 좋아하지 않았다. 이에 공에게 명하여 (준정이) 물러나게 하였다.

태후는 또 (남모에게) 낭도가 부족한 것을 염려하여, 위화공의 낭도를 소속하게 하여 더하여 주었다. 준정(俊貞)이 투기를 하였다.

이에 술로 유혹하여 물에서 죽였는데, 남모의 낭도들이 그 것을 폭로하였다.

  태후가 이에 원화를 폐지하고 선화(仙花)를 화랑으로 삼았다.29)

그 무리를 일러 풍월(風月)이라 하였고, 그 우두머리를 일러 풍월주(風月主)30)라

하였다.

위화공(魏花公)이 풍월주가 되고, 공이 부제(副弟)31)가 되었다.

얼마 안 있어 공이 풍월주가 되었다.

  공은 남모를 잃은 이후부터 아내를 맞지 않았다.

공은 외손으로 일찍이 법흥대왕을 모셨는데, 궁중에서 후궁(後宮)인 묘도부인(妙道夫人)과 사통을 하였으나,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태후가 알고 허락하였다.

공은 이에 묘도를 아내로 맞이하여 미실낭주(美室娘主)와 미생랑(美生郞)을 낳았다. 미실은 재색이 뛰어났는데 진흥왕진평왕을 섬겨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

미생랑 또한 화랑에 들어갔다. 공은 지소태후를 섬겨 충성을 다하였는데,

총애가 줄어들자 몸을 나라에 바치기를 원하여 낭도들을 거느리고 전쟁에 나아가

과연 큰 공을 세웠다.

미실이 총애를 얻게 되자, 작(爵)각간(角干)으로 오르게 되었다.

부인인 묘도(妙道) 또한 궁주(宮主)32)에 이르러 대원신통(大元神統)33)을 잇게

되었으니, 아! 성대하다.

색으로 섬기어 충성을 모두 다 하였다.

용맹스러움으로 나라를 받들고 또한 그 공을 다하였다.

부인인 묘도위화랑공의 손녀인데 배필로 삼아 미화를 낳으니 천도(天道)는 아득하고 오래도다.

24) 여기서 말하는 정통은 진골정통을 의미하는지, 성골의 정통을 의미하는지 생각

     할 문제다.

25) 폐신(嬖臣): 윗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신하 또는 아첨하여 임금의 신임을

     받는 신하.

26) 보과공주는 3세 풍월주인 모랑의 어머니이다.

   법흥왕이 국공으로 있을 때 백제에 들어가 사통을 하였는데 후에 신라로 도망하여

   와서 입궁하여 남모와 모랑을 낳았다. 그의 아버지는 모랑공에 대한 찬에 나오는

   백제 동성왕(東城王)(479-501)이라 생각된다.

27) 용양(龍陽): 중국 전국시대 위왕의 총신. 남색으로 왕의 사랑을 받음.

      영실공은 남색으로 법흥왕의 총애를 받았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28) 법흥의 유명인지 입종의 유명인지 알 수 없으나 지소태후가 영실을 계부로

      맞은 것은 당시 남편이 한 명이었던 것을 보여준다.

29) 원화를 폐지하고 화랑을 설치한 내용은『삼국사기』 4, 신라본기 4 진흥왕 37년

     조에 나오고 있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원화를 폐지한 시기가 진흥왕(540-576) 초년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삼국사기』의 원화폐지 시기에 문제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30)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풍월주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러나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와 『동국통감(東國通鑑)』는 진흥왕

      원년에 풍월주를 임명하여 낭도를 거느리게 한 사실이 나오고 있다.

     (李鍾旭, 「『花郞世紀』硏究 序說」

      -사서로서의 신빙성 확인을 중심으로-, 『歷史學報』 146, 1995, p. 326)

31) 부제(副弟)는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고 있던 존재이며 화랑도 조직이 생각보다

      잘 짜여져 있던 것을 보여준다. 대부분의 부제들은 풍월주의 지위를 계승한

      것을 볼 수 있다.

32) 신라의 왕궁은 대궁, 양궁, 사량궁의 3궁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왕들은 대궁이

     있던 현재의 월성에 살았다.

     월성 안에는 여러 궁들이 있었고 묘도가 그러한 궁의 하나를 차지하여 궁주가

     되어 왕궁 안에서의 지위를 확보한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궁주가 되는 것이

     대원신통이나 진공정통의 인통(姻統)을 이어나가는 중요한 기준이 된 것을 알

     수 있다.

33) 대원신통과 진골정통은 왕의 혼인대상이 되는 여자를 공급하는 계통을 의미

     한다. (李鍾旭, 『花郞世紀』에 나타난 眞骨正統과 大元神統,

    『韓國上古史學報』 18, 1995, pp. 279-301 참조)

(三世)毛郞者 南毛之弟也 先是法興大王 以國公入百濟 與宝果公主有私 後宝果逃敀入宮 生南毛毛郞

皆有美色 未珍夫爲花郞 以毛郞爲副 有寵於太后 眞興大王九年 太后命爲三世風月主 以慰南毛之靈

魏公妻以女俊花 卽二花郞之女兄也 生一女俊毛而早卒 遂以二花郞繼之

東城之美 魏花之婿 大王之子 太后之好



(3세)풍월주 모랑(毛郞)은 남모의 아우이다.

이에 앞서 법흥대왕이 국공(國公)으로 백제에 들어가 보공주(宝果公主)와 더불어 사통을 하였다.

후에 보과가 도망을 하여 입궁하여 남모와 모을 낳았다. 모두 미모를 가지고 있었다.  

미진부(未珍夫)가 화랑이 되자 모랑을 부제로 삼았다.

태후에게 총애를 받았다.

진흥대왕 9년(548)에 태후가 명하여 3세 풍월주로 삼아 남모(南毛)의 혼백을 위로하였다.  

위화랑공이 그의 딸 준화(俊花)를 처로 삼게 하였으니, 곧 이화랑(二花郞)의 누나(女兄)이었다.

 (모랑은) 딸인 준모(俊毛) 한 명을 낳고 일찍 죽었다. 마침내 이화랑이 뒤를 이었다.

동성34)(왕)의 아름다움이며 위화랑(魏花郞)의 사위이다.

대왕의 아들이고 태후의 사랑이다.

34) 백제 동성왕(479~501)을 뜻한다

 

 

 

(四世)二花郞者 魏公之子也 膚如玉膏 眼如笑花 善音律文章 以十二歲能副毛郞公 太后極愛之 時黃華·叔明·松花等公主 皆從公學 公以此得通叔明宮主 時太后欲專上寵 皆以公主奉之 上以爲其胞妹不甚愛 公主亦然 公主之父乃苔宗公也 時以上相爲國柱石 上以此不敢忽公主 公主恃寵自蕩 及生太子 封爲皇后 益無忌憚 上素愛思道皇后 欲以其子銅輪公爲太子而不得

至是叔明后與公相通益甚 累爲上見 上欲廢之 太后泣諫之 不得 上不幸叔明而 叔明自有娠 乃與公逃出 群臣疑太子非上子 乃以銅輪公爲太子 公雖有罪而有寵於太后 且還爲銅輪公一幸 故思道皇后勸上力保以安太后之心 遂許叔明爲夫婦 乃生圓光菩利 亦非天意乎

開國五年 毛郞公遊比斯伐 得疾途卒 郎徒乃願奉公 時公以太后寵常居宮中欲辭之 郎徒曰 魏公之子不居而誰可居乎 太后乃命居之 以爲四世風月主 使巡郡縣 時太后方娠萬呼娘主 故待其産而行也

玉珍宮主之妹曰金珍 亦魏公女也 事法興大王無子 大王崩 退居蚊上 南毛初害 郎徒欲奉之 太后不許 仇利知公潛通之 生ꟙ含公 極精妙 早屬郎籍 至是奉爲副之 太后召見宮中曰 此兒不下比梁叔公 美過碧母 可賀得人 公亦酷愛ꟙ含公 起居必同 金珍娘主感而壽之

ꟙ含公有弟斯多含公 大有妙梁之風 郎徒多歸之 時有武官郞者 亦有人望多畜私徒 聞斯多含公年少好義 求與相見 大悅曰 公子誠古之信陵孟嘗也 願事之 斯曰 我何敢有乎 乃歸于公

公乃奏太后曰 ꟙ含之弟斯多含 年未免艾而自有郎徒 殆所謂國仙者乎 太后乃召宮中賜食 問其懷人之道 斯曰 愛人如己而已 善其善而已 太后奇之 言於大王 以爲貴幢(裨將)6) 以掌宮門 其徒千人莫不盡忠

時比助公子文弩 亦豪傑善擊劒 公使斯多含學劒于文弩 〃曰劒是一人敵 何用高貴知 公曰 不敵一人則 安能敵萬人乎 此兒好俠 雖曰多衆 不無其敵 汝其保之 文弩乃以其徒五百隨之 其威盛於ꟙ含

時銅輪公漸長 大王憂輔導之無人 使ꟙ含輔之 ꟙ含曰 是吾職也 乃以花郞之位辭其弟 公乃以斯多含爲副 愛之如ꟙ含 時人賀公得人 未幾加耶反 斯多含請從軍 得勝

公乃以主位讓之 乃與ꟙ含公專務宮中輔養太子 於戱盛矣 公之淸德榮名萬世不絶 公與叔明公主 出居永興寺 專心佛道 太后亦爲之歸依 肅太子亦落彩受戒

公子圓光法師 叔明公主所生也 受娠時公主慕公 不能自抑 恐有禍而欲自殺 忽有金佛來告曰 我乃藥師佛也 欲借公主之腹而居之 公主乃跪其前而合掌拜禮 佛乃抱公主而仆 况若入之 時公亦慕公主不禁 乃犯宮中 見公主仰臥若失抱 而問故 乃喜曰 是乃佛力也 交歡生之 果大聖如來也 〈叔明又生公二女曰 花明玉明 皆入眞平大王後宮 圓光之弟菩利 娶肅太子女萬龍 生禮元角干卽予祖也 公又娶 含公妹 生庶子七人 皆貴〉〈이하 筆寫本 『花郞世記』〉

…足以證當時美男子無過于公者也 建福十七年圓光還朝

公讓其主位 與叔明塞達率諸孫 遍遊國內勝地 (五入瑟羅) 八回金鰲 一日從容謂公主曰 臣(與主侍側)四十年 魚水之樂(極○ 故從太后大王于)玉京如何 (主曰 郞君所向 妾宜隨之 遂聯)枕而(薨 塞達亦從之 時建福二十年三月也 葬于哀公寺以(北)只召太后之陵( )遺命也 於戱盛矣

公之一言○○○胡)百世師表 公少(言語淨行○(節) 鴻濟宋多)道太后多畜花(郞 累幸○○○○○○曰) 姊多欲郞(未免○ 公泰○○○○○○ 后)杲以酒(留之 將欲○○○○○○○○○) 太后又○○○○○○○○○○○○○○保 今良○○○○○○○○○○○○臣當發願神宮 ○○○○○○○○○○ 然則誓不得也 ○○○○○○○○○○宮 凡十七○(而)○○○○○○○○○○○(詔)于神監○○○○○○○○○○○○○○左右公○○○○○○○○○○○○○○○?居至嚴○○○○○○○○○○○○○上○○(公)○族○○○○○○○○○○徒欲復立公 〃知宮中意 竟○○○○○應 公之忠直如此也

公之正(妻叔明公主) 生公二子 曰圓光菩利 又生公二女花明玉明 皆入眞平大王後宮 生子女 圓光之弟菩利 娶貞肅太子女萬龍 生禮元角干 卽予祖也 公又娶ꟙ含公妹塞達 (生庶)子七人 皆貴



二花風流 鷄林淸談 華?宝眷 聘王公主 金佛來依 藥師如來 花郞之門 法師之親 振〃公族 萬世無窮

父曰魏花郞 (母曰俊室)○○○○? 父曰○○○○○○○○○○○○○○孫也 ○○○○○○○○○○○○○ 俊明之○○○○○○○○○○○○? 母曰紫我 乃○○○○○○○○○○文章 公得其(?)…


(4세) 풍월주 이화랑(二花郞)은 위공(魏公)의 아들이다.

 피부가 옥과 같이 부드럽고, 눈은 미소 짓는 꽃과 같고, 음률과 문장을 잘하였다.

12살에 능히 모랑공의 부제가 되었다. 태후가 매우 사랑하였다.

  그 때 황화(黃華)·숙명(叔明)·송화(松花) 공주가 모두 공을 따라 배웠다.

공은 이에 숙명궁주(叔明宮主)와 정을 통(通)할 수 있었다.

그 때 태후가 왕의 총애를 홀로 받게 하고자 모든 일을 공주에게 받들게 하였는데,

왕은 한배의 누이라고 하여 사랑을 많이 하지는 않았다.

공주 또한 그러하였다.

공주의 아버지는 곧 태종공(苔宗公)35)인데 그 때 상상(上相)36)으로 나라를 위한 가장 중요한 신하였다.

(진흥)왕은 그래서 공주를 소홀히 할 수 없었다. 공주는 총애를 믿고 스스로 방탕하였다.  

태자를 낳고 황후로 봉하여지자,37) 더욱 꺼림이 없었다.

(진흥)왕은 평소에 사도(思道) 황후를 사랑하여 그 아들 동륜(銅輪)을 태자로 삼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이르러 숙명후는 (이화랑)공과 더불어 서로 정을 통함이 더욱 심하여졌고, 여러 번 왕에게 들켰다.

왕이 (황후를) 폐하려 하자, 태후가 울면서 간하여, 이룰 수 없었다.

왕이 숙명을 사랑하지 않았는데, 숙명은 스스로 임신을 하였다. 이에 공과 더불어 도망하여 나갔다.

군신(群臣)들이 태자가 왕의 아들이 아니라고 의심을 하였다.

이에 동륜공을 태자로 삼았다.

공은 비록 죄가 있으나 태후에게 사랑을 받았고, 또한 도리어 동륜공에게 하나의 행운이 되었다.

그러므로 사도황후가 왕에게 권하여 힘써 보호하여 태후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였다.

드디어 숙명에게 허락하여 부부가 되게 하였다.

이에 원광(圓光)과 보리(菩利)를 낳았으니 또한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개국(開國)38) 5년(555) 모랑공이 비사벌(比斯伐)39)에 여행하다가 병을 얻어 길에서 죽었다.

낭도들이 공을 받들기를 원하였다.

그 때 공은 태후의 총애로 늘 궁중에 머물렀기에 사양하고자 하였다.

낭도들이 말하기를 “위공(魏公)의 아들이 앉지 않으면 누가 앉겠습니까?” 하였다.

태후가 이에 명하여 오르게 하여 4세 풍월주로 삼고 군현(郡縣)을 순행하도록 하였다.

그 때 태후가 바야흐로 만호랑주(萬呼娘主)를 임신하였다.

그러므로 그 출산을 기다려 떠났다.

  옥진궁주(玉珍宮主)의 누이는 금진(金珍)인데 또한 위공(魏公)의 딸이다.

법흥대왕을 섬겼으나 아들이 없었다.

대왕이 죽자(崩) 문상(蚊上)에 물러나 살았다.

남모가 처음 해를 당하였을 때, 낭도들이 (원화로) 받들고자 하였으나, (지소)태후가 허락하지 않았다.

구리지공(仇利知公)과 몰래 정을 통하여 토함공(ꟙ含公)을 낳았는데, 극히 섬세하고 아름다웠다.

일찍 낭적(郎籍)40)에 소속되었는데, 이 때 부제로 삼았다.

 태후가 궁중에 불러 보고 말하기를

 “이 아이는 비량숙공(比梁叔公)보다 못하지 않고 아름다움은 벽모(碧母)보다 나으니,

인재를 얻었다고 축하할 만 하다” 하였다.

공 또한 토함공을 심히 사랑(愛)하여 기거를 반드시 함께 하였다.

금진낭주(金珍娘主)가 고맙게 여겨 공을 축복하였다. 

토함공에게는 동생인 사다함공(斯多含公)이 있었는데, 묘량(妙梁)의 풍모를 크게 가지고 있어,

낭도들이 많이 따랐다.

그 때 무관랑(武官郞)이 있었는데, 또한 인망이 있어 사도(私徒)를 많이 거느렸다.  

사다함공이 나이는 적으나 의(義)를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청하여 더불어 서로 보고 크게 기뻐 말하기를

공자(公子)41)는 실로 옛날의 신릉(信陵)과 맹상(孟嘗)입니다. 섬기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사다함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감히 거느리겠습니까?” 하였다.

그래서 (무관랑은) 공에게 귀의하였다.

공은 이에 태후에게 아뢰어 말하기를

“토함의 아우인 사다함은 나이가 아직 장년에 이르지 않았는데 스스로 낭도를 거느렸으니,

자못 국선(國仙)42)이라고 이를 만 합니다” 하였다.

태후가 이에 궁중에 불러 음식을 내리며 사람을 거느리는 방법을 물으니,

사다함이 말하기를

 “사람을 사랑하기를 제 몸과 같이할 뿐입니다. 그 사람의 좋은 것을 좋다고 하는 것 뿐입니다” 하였다.

태후가 뛰어나다고 생각하고 왕에게 말하여, 귀당비장(貴幢裨將)을 삼아 궁문을 관장하게 하였다.

그 낭도 천명도 충성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다.

  그때 비조공(比助公)의 아들 문노(文弩) 또한 호걸로 격검(擊劍)을 잘하였다.

공은 사다함으로 하여금 문노에게 검을 배우게 하였다.

문노가 말하기를

“검은 곧 한 사람을 대적하는 것인데, 어찌 고귀한 사람이 알 필요가 있습니까?” 하자,

공이 말하기를

“한 사람을 대적하지 않으면 곧 어찌 능히 만인을 대적할 수 있겠는가?

 이 아이는 호협(豪俠)을 좋아하니 비록 무리가 많다고는 하지만 그 적이 없다고 할 수 없으니

네가 그를 보호하라” 하였다.

문노가 이에 낭도 오 백으로 따르니, 그 위세가 토함보다 컸다.

  그 때 동륜공이 점차 장성하였는데, 대왕이 보익하는 사람이 없음을 염려하여, 토함으로 하여

보익하도록 하였다.

토함이 말하기를

 “이것이 나의 임무이다” 하였다.

이에 화랑의 지위를 그 아우에게 넘겨주었다.

공은 이에 사다함을 부제로 삼았는데, 그를 사랑함이 토함과 같았다.

그 때 사람들이 공이 인재를 얻었음을 축하하였다.

 얼마 안 있어 가야가 반란을 일으키자, 사다함이 종군을 청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이화랑)공은 이에 풍월주의 지위를 넘겨주고, 토함공과 더불어 오로지 궁중에서 태자를 보양하는데 힘썼다.

아! 성대하다.

공의 맑은 덕과 영화로운 이름은 만세에 끊이지 않을 것이다.
공은 숙명공주와 더불어 영흥사(永興寺)에 나가 살며 불도(佛道)에 전심하였다.

태후 또한 뒤따라 귀의하였고, 숙 태자(肅太子) 또한 머리를 깎고 계를 받았다.

  공의 아들인 원광법사(圓光法師)는 숙명공주 소생이다.

임신을 할 때 공주는 공을 사모하는 마음을 스스로 억제할 수 없어,

화가 공에게 미칠까 염려하여 자살을 하려 하였다.

갑자기 금불이 와서 고하기를

 “나는 곧 약사불(藥師佛)이다. 공주의 배를 빌려 머물고자 한다” 하였다.

 공주는 이에 그 앞에 무릎을 꿇고 합장하여 배례하였다.

이에 부처가 공주를 안고 엎드러져 마치 들어오는 것 같았다.

그 때 공 또한 공주를 사모하는 마음을 금하지 못하고 궁중으로 침범하였는데,

공주가 바로 누워 마치 품고 있는 것을 잃은 것 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까닭을 묻고는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는 곧 부처의 원력이다” 하였다.

몸을 섞고 (원광을) 낳으니, 과연 대성여래(大聖如來)이다.

(이하 필사본 『화랑세기』를 중심으로 번역하였다. 탈락된 부분은 발췌본으로 보충하였다.)

  … 당시 공보다 더한 미남자가 없었음을 충분히 입증할 수 있다.

건복(建福)43) 17년(600) 원광이 신라로 돌아 오자 (이화랑)공은 풍월주 지위를 넘겨주고,

숙명, 새달과 더불어 제손(諸孫)을 거느리고 국내의 승지(勝地)를 두루 돌아 다녔는데,

다섯 번 슬라에 들어가고 여덟 번 금오를 돌았다.

 … 하루는 조용히 공주에게 말하기를

 “신은 공주와 더불어 시측한 지 40년이고 어수(魚水)의 낙이 지극한 … 까닭에 태후와 대왕을 따라

옥경(玉京)44)으로 가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였다.

공주가 말하기를

 “낭군이 향하는 바를 첩(妾)은 마땅히 따라야 합니다” 하였다.

마침내 나란히 누워서 죽었다.  

새달 역시 따랐다.

때는 건복(建福) 20년(603) 3월이었다.

애공사(哀公寺) 북쪽 지소태후 능의 (곁)에 장사지냈으니, 유명(遺命)이었다.

 아! 성대하다.

  공의 한마디 말은 … 백세의 사표(師表)이다.

공은 말이 적었고 … 정행(淨行)을 하였다.

…節鴻濟 송(宋)의 다도태후(多道太后)가 화랑을 많이 거느리고 여러 번 사랑(幸)하여 ….

…가 말하기를 누이가 욕심이 많아 낭(郎)이 (면치 못하였다. …공은 크게 …. 후에) 과연

술로서 (머물게 하여, 장차…하려 하였다. …) 태후는 또 …. … 지켰다. 지금 양… 신은 마땅히  

신궁(神宮)에서 발원하여 …. 그런즉 맹세하여 얻지 못하였다.

…궁은 무릇 17…. …신(神)에게 고하여 …. … (좌우) …. 공…. 지엄하게 거하여 …. … 위에 ….

 …공의 …족 …. … 무리가 공을 다시 세우려 하였다.

 공은 궁중의 뜻을 알고 마침내 …. … 응하였다. 공의 충직함이 이와 같았다.

  공의 정(처(正妻)인 숙명공주는) 공의 두 아들 원광과 보리를 낳았고,

또한 공의 두 딸 화명(花明)과 옥명(玉明)을 낳았는데, 모두 진평대왕의 후궁으로 들어가 자녀를 낳았다.

원광의 아우인 보리는 정숙태자(貞肅太子)의 딸인 만룡(萬龍)을 아내로 맞아 예원(禮元) 각간을 낳았으니,

곧 나45)의 할아버지이다.

공은 또 토함공의 누이(妹46)) 새달(塞達)을 아내로 맞아 서자 7인을 낳았는데 모두 귀하게 되었다.


이화(二花)의 풍류(화랑도)는 신라의 청담47)이라,

 영화로운 자손이 공주에게 장가들고, 금불이 와서 의지하니 약사여래라.

화랑의 소속이고 법사의 아버지이니, 위엄을 떨치는 공족(公族)48)이여, 만세에 무궁하리라.


아버지는 위화랑이고 (어머니는 준실이다) …아버지는 … 손(孫)이다.

준명(俊明)의… 어머니는 자아(紫我)이니 곧 …. 문장을 …. 공은 그 맥을 얻었다. …



35) 『삼국사기』 44, 열전 4에 나오는 이사부(異斯夫)전에 그를 태종(苔宗)이라고도 부른 것으로 나오고 있어 이사부를 가리키는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이사부는 지증왕 6년에 실직주의 군주가 되었고, 진흥왕 2년에 병부령이 되었으며, 진흥왕 6년에는 『국사』를 편찬할 것을 왕에게 건의하였고, 진흥왕 23년 가야가 반기를 들자 공격하여 항복을 받기도 하였다.

36) 상상(上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으나 상대등일 가능성도 있다. 『삼국사기』 7, 잡지 7, 직관 상에 나오는 상대등(上大等)은 상신(上臣)이라고도 불렀던 것으로 나오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법흥왕 18년(534) 이찬 철부가 상대등이 된 후 진지왕 원년(576) 거칠부가 상대등이 되기까지 상대등에 대한 임명 사실이 빠져 있다. 따라서 그 사이에 이사부가 상대등이 되었기에 상상(上相)으로 나오는 것은 아닌가 짐작이 간다.

37) 『삼국사기』·『삼국유사』에는 숙명을 황후로 임명한 기록이 없다.

38) 진흥왕 12년(551)에 개국(開國)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그보다 앞서 법흥왕 23년(536)에는 건원(建元)이라는 연호를 사용한 바 있다.

39) 진흥왕 순수비 중 창령비에는 창령지역을 비자벌(比子伐)로 표기하고 있다. 이 때 비자벌은 이미 신라에 속한 것을 알 수 있다.

40) 화랑도의 명단을 가리키며 『삼국유사』 2, 효소왕대 죽지랑조에 풍류황권(風流黃卷)으로 불린 낭적이 있었던 것으로 나오고 있다.

41) 귀한 집의 나이 어린 자제를 의미한다.

42) 풍월주와 다른 계통의 화랑의 우두머리이다. 신문왕 원년(681) 화랑도제가 폐지

      되었다 부활될 때 풍월주 대신 국선이 화랑 중의 화랑으로 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러한 사정으로 인하여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풍월주 대신 국선으로 나오고 있는 것으로 헤아려진다.

43) 진평왕 6년(584)에 건복(建福)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44) 하늘 위의 옥황상제(玉皇上帝)가 산다고 하는 가상적인 서울을 의미한다.

45) 여기서 말하는 나는 『화랑세기』의 저자인 김대문을 가리킨다.

46) 妹는 누이동생으로 여기서는 모두 누이라고 번역한다.

47) 청담은 속세를 떠난 고상한 이야기를 의미한다.

48) 풍월주를 배출하는 종족을 공족(公族)이라 불렀던 것이

     흥미롭다.

五世斯多含者 仇利知子也 初比梁公慕碧花后 常如其厠 法興大王愛比梁公 不禁之 果通后生子 故曰仇利知 美如碧后 膽如比公 及長好郎徒武事 通金珍娘主 生ꟙ含塞達斯多含 塞達者二花公之妾也

初吾○○○○○○○○○(法)興大帝 魏花郞○○○○○○○○○(玉)珍宮主 帝?乃○○○○○○○○○○○ 仇珍尋復與魏花郞悅○○○○○○○?金珍之美 雖下于玉(珍)○○○○○○ 玉珍事法興○子 立宗○○○○○○○ 乃肅訖宗也 法興崩 而立宗亦薨

(只召太后)踈玉珍兄弟 金珍乃退居蚊上 ○○仇利知聚郎徒 以圖源花 先是仇利知(以)宿衛頭上 常奉金珍之命于殿下 仇利知心欲之 發願于天柱寺凡五年 而金珍始寡居 仇利知乃日趣之 獻源花之計 金珍年方少 乃貪名利以許之

仇利知又○○○源花者俠物 不與郎徒示死心則○○○○也 金珍曰 ?以仇利(知)○○○○○○(于)娘主者 凡五年前事○○○○○○○之事 金珍乃歎曰 我欲○○○○○○○?臍下?乎 ○○○○○○○○○○??衆奉之 ○○○○○○○○○○○可爲爾妻足矣 ?○○○○○○○○○之 曰 爾令我○○○○○○○○○仇利知曰 臣(聞)未○○○○○○○○○?之身 許○○○○○○○○金珍○曰 爾我堂○○○○○○○以皇(后)之貴 許私于厠○○○○○○○○

仇利知曰 臣以弱年 東? ○○○ ○○○郞?何侮之 若是乎 金珍○○○○○?嘗滿也而已 前日以汝?○○○○○?父也 今日以汝爲不(足者)○○○○○○○ 仇利知乃喜曰 臣從此益勵○○○○○○○?情益濃焉 玉珍宮主○○○○○○不許相婚 金珍?當之 斯多含○○○ (仇利)知從將軍珠玲出征 獨山死之初仇利知有龍陽臣薛成者 美皃善媚 因仇利(知出)征不在 得通于金珍 生薛原郞 銅太子生 思道皇后 召金珍爲乳姆 以此斯多含兄弟亦長于宮中 時上春秋猶艾 太后不許嬪供 上亦與思道情殊 未嘗外幸 至是思道以産後三月不接 金珍乃媚上(?)瑟羅 以爲皇后宮〃人 未幾有娠 后知之 ○○(上)憂之 乃使(金)珍出居????○○

(金)珍乃密畜薛成等五人 ○○○○○○(之) 復召爲朝霞房夫人 時○○○○○○??諫其母 無?寺○○○○○○?言金珍不淨 上乃○○○○○ 金珍乃泣曰 妾不幸溷落 私○○○○○?有私奴薛成一人而已 ?○○○○○?女 以薛成爲奈麻 敀○○○○○○○○?從奴 以桑○○○○○○○○○奇之 ?復入朝霞(房)○○○○○○○○卒焉 斯多含乃積柴欲○○○○○○○○(金)珍質之 金珍泣告曰 長○○○○○?則薛成也 上乃取其長爲○○○○○? 薛成仍又幸之 是年二花(郞爲風月主)(ꟙ)含爲副 帝以斯多含亦屬○○○○○○○ 金珍又生帝女 是爲暖成公主○○○○○○?自與其徒從征百濟 有○○○○○○?湌之位 妻以(金)珍 斯多含?(猶)?○○○色是天也 母可獨無常匹乎 斯曰 (不)○?乎 ꟙ含曰 雖賤母之所欲 而帝之?許也 不可忽也 斯多含乃許金珍敀薛成 別居不入賜宅本庄 玉珍宮主聞之 大嘉之曰 此兒必貴其父

年十二從文弩 能擊劒 好愛人 有渠父之風 郎徒相謂曰 仇利公不食之福也 斯多含外剛內仁 篤於友愛 雖拂薛成而 事母至孝 金珍亦以此最○? 每當四節 入○遊宅之? 使??○○○爲之 帝知斯多含善舞○○○○○○ ○珍對歌看舞 受幸而敀 ○○○○○○○勝自喜 無幸而敀??○○泣以○? 金珍問曰 幸於?○○○○○? (斯曰) 母與天合 子何不榮○○○○○?天如是也 肅訖宗公將?○○○○○爲絡繹而過 金珍望而○○○○○○○?? 斯多含曰 母??○○○○○○○ 出而執肅之轡曰 ??○○○○○○○曰 母則母也 義己絶矣 ○○○○○○○○不可絶也 肅乃入見金珍○○○○○○○○有以母拜子乎 金珍○○○○○之???母子之情復焉 ?○○○○?泣以此?代幸 生女俊英 美????○??(公)?亦私之 而畏眞宗 不敢爲○○○○○○○?曰 瞽瞍之子有大舜○○○○○○○乎 乃率郎徒○英于肅訖宗○○○○○友急人如是也開國十一年???? (兩)花公主薨 嗣王道設智 以野女??與月光爭地 多率野人來 帝命苔宗公鎭之 斯多含請爲先鋒 帝以其少不許 斯乃私率其徒間行 金珍謂薛成曰 君以無品累蒙國恩 不以此時護吾兒則 非吾夫也 成曰 吾所願也 乃就其下 大破野人 帝嘉之 乃以斯多爲貴幢裨將 時年十六 率精兵五千 馳入栴檀門 堅白旗 加耶??○○○其城 虜道設智及野女○○○○○○?軍繼至 大破加耶軍 (九)○○○○以功賜田則 分給部下 所虜生口盡放爲良人 ?大王益重之 賜閼川地 則固辭不受 擇其不毛者數百頃?????受之曰 此足以令人勤也 ?○○○○??無事則入農 是吾徒○○○○

時二花公多上寵 倦於郎徒 乃以公爲五世風月主 以公胞弟薛原郞爲副 年十三也 ?薛成出戰 爲斯多含當○○○○○○○○(而)沒 至是衆推之曰 吾薛成○○○○

公臣武官郞亦多功 以微賤不報而卒 公爲之傷 金珍娘主素荒于色 多?郞???武官郞密納之 武難于斯多含???○○○○?慰之曰 非汝也母也 吾與○○○○○??友 何以小嫌爲 金珍聞○○○○○○?自知道理 所(以)寬我乃?(武官郞)○○○出入同之 郎徒多有非之 武欲逃而○?夜超宮墻 落于溝池而傷 未幾而卒

公哀通之 亦瘦瘁七日而盡 金珍乃抱公頓足曰 以吾之故傷汝心以至于此 吾何以生乎 公徐開眼曰 死生命也 吾何以母傷心乎 生不能報母大恩 死而當圖于彼界矣

盖公素愛未珍夫公女美室 美室亦好公 而以太后命嫁于世宗公 以此發(太后之)心不諫母修兄〈兄者肅訖宗也〉 作靑鳥歌○○○之 靑鳥者指美室也 公天而22)○○○○?衣而作歌送之故也 公?○郎徒請復立二花公 二花公曰 ○○○○○○○?之婿也 斯多含以○(命)○○ 諸骨中無有如世宗殿君也 ????之 衆乃立世宗爲主



比梁遺氣 魏花之孫 征虜功高 自居不毛 靑鳥山中 松柏長靑


父曰仇利知 祖曰比梁 曾祖曰比知 高祖曰比太?○○○○○○? 美海公女也 初奈勿王?○○○○○○後宮生山凰 實聖王命承奈(勿)○○○?王立 納于後宮 尋賜寵弟 實?○○?美海公 或曰 心凰者實相公女也 訥祗王乃命心凰爲奈勿神宮主 比知公以(此)?奈(勿)??孫 娶妙梁夫人 生比梁公 妙梁???王女也 亦出於大元神統也


5세 풍월주 사다함(斯多含)은 구리지(仇利知)의 아들이다. 처음  비량공(比梁公)이  벽화후(碧花后)를 그리워하여, 늘 후(后)의 뒷간에 갔다.  법흥대왕이  비량공을 사랑하여 금하지 않았다. 과연 후(后)와 정을 통하여 아들을 낳았다. 그래서 구리지라 하였다. 아름답기는  벽화후와 같고, 담력은  비량공과 같았다. 자라서 낭도의  무사(武事)를 좋아하였다.  금진낭주(金珍娘主)와 통하여 토함(ꟙ含)· 새달(塞達)· 사다함(斯多含)을 낳았다.  새달은 이화공의 첩이다.

  처음에 우리 …  법흥대제 ….  위화랑 …  옥진궁주 ….  제(帝)가 … 이에… 구진(仇珍)을 찾았다. 다시  위화랑과 더불어 좋아하여 … 금진의 아름다움은 비록 옥진보다 못했다 … 옥진은  법흥을 섬겨 아들을 낳았다. 입종(立宗)은 … 곧  숙흘종(肅訖宗)49)이다.  법흥이 죽었는데50) 입종 또한 죽었다51).

  ( 지소태후는) 옥진 형제와 친하지 않았다. 금진은 이에  문상(蚊上)에 물러나 살았다. …구리지는 낭도를 모아 금진을  원화(源花)로 삼고자 하였다. 이보다 앞서 구리지는  숙위두상(宿衛頭上)으로서 금진의 명을 전(殿) 아래에서 늘 받들었다. 구리지는 마음속으로 그녀를 원하여,  천주사(天柱寺)에서 무릇 5년을 발원하였는데, 금진이 비로소 홀로 살게 되었다. 구리지는 이에 날마다 가서  원화가 될 계책을 바쳤다. 금진은 나이가 또한 적었기에 명리를 탐하여 허락을 하였다.

  구리지는 또한 ….  원화라는 것은 의협의 인물로 낭도들과 더불어 죽음으로써 의리를 지킨다는 마음을 보이지 않으면 …. 금진이 말하기를 … 구리지… 낭주에게 …한 것이 무릇 5년 전의 일로 …의 일이다. 금진은 이에 한탄하여 말하기를 “나는 … 바라 … 무리가 받들었다…. 너의 처가 될 수 있는 것으로 족하다”고 하였다. … 말하기를 “네가 나로 하여금 …”라고 하였다. 구리지가 말하기를 “신은 … 아직 …의 몸 … 허락합니다” 하였다. 금진이 말하기를 “네가 나의 집 … 황후(皇后)의 귀함으로 뒷간에서  사통을 허락하여 …” 하였다.

  구리지가 말하기를 “신이 나이가 젊어 동(東) … 어찌 업신여김이 이와 같은가?” 하였다. 금진 … “ … 일찍이 가득했을 따름이다. 지난날에 너로서 … 아버지이다. 오늘은 너로서 부족한 자가 … 되었다” 하였다. 구리지가 이에 기뻐 말하기를 “신은 이로부터 더욱 힘써 …” 하였다. 정이 더욱 무르익었다.  옥진궁주는 … 서로 혼인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금진은 … 당하여 ….  사다함은 …. 구리지는  장군 주령(珠玲)을 따라 출정하여 독산에서 죽었다.52)처음에 구리지에게는 용양53)신(龍陽臣)인 설성(薛成)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모습이 아름답고 교태를 잘 지어 보였다. 구리지가 출정하여 자리를 비우자, 금진과 정을 통하여 설원랑(薛原郞)을 낳았다. 동(륜) 태자가 탄생하였을 때,  사도황후가 금진을 불러  유모(乳姆)로 삼았다. 이로 인하여  사다함 형제도 또한 궁중에서 자랐다. 그 때 왕의 나이가 아직 한창 때였는데 태후가 빈공(嬪供)을 허락하지 않았다. 왕도 또한 사도(思道)와의 정이 각별하여 아직 다른 사람을 총애하지 않았다. 이에 이르러 사도는 산후 3개월간 왕과 관계를 가지지 않았다. 금진은 이에 교태를 보이자 왕이  슬라(瑟羅)에 갈 때 황후궁의 궁인(宮人)으로 삼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임신을 하였다. 황후가 그 것을 알고 …, 왕이 그것을 걱정하였다. 이에 금진을 … 에서 나가 살게 하였다. …

  금진은 이에 설성 등 5인을 몰래 거느렸다. … 다시 불러  조하방부인(朝霞房夫人)으로 삼았다. 그 때 … 그 어머니에게 간언하여 …이 없도록 …. 금진이 깨끗하지 않다고 말하였다. 왕이 이에… 하였다. 금진이 이에 울며 말하기를 “첩이 불행히도 타락하였는데 … 사노(私奴) 설성(薛成) 한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하였다. …설성을  나마(奈麻)로 삼아 돌려보내고 …. … 노(奴)를 따랐다. 상(桑)을 … 뛰어났다. 조하방에 다시 들어가 …. … 죽었다.  사다함은 이에 땔나무를 쌓아 … 하고자 하였다. 금진에게 물었다. 금진은 울며 말하기를 “우두머리는 … 곧 설성입니다” 하였다. 왕은 이에 그 장(長)을 취하여 … 로 삼았다. … 설성은 인하여 또 사랑(幸)을 하였다. 이 해에  이화랑(이  풍월주가 되고)…토함을 부제로 삼았다. (진흥)제는  사다함 또한 …에 속하게…. (금진은) 또 帝의 딸을 낳았으니, 이가  난성공주(暖成公主)였다. … 스스로 그 도(徒)와 더불어  백제를 정벌하는데 따라가 (공)이 있었다. … ?찬(湌)의 위(位)를 주고 금진을 처로 삼게 하였다.  사다함은 “오히려…. … 색은 바로 만물의 근본54)입니다. 어머니는 홀로 정해진 배필이 없어야 되겠습니까?” 하였다.  사다함은 말하기를 “… 않는가” 하였다. 토함이 말하기를 “비록 천한 어머니의 바라는 바이나  제(帝)가 이미 허락하였으니 소홀히 할 수 없다” 하였다.  사다함은 이에 금진이 설성에게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고, 따로 살며 사택(賜宅)과 본장(本庄)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옥진궁주가 듣고 크게 칭찬하여, “이 아이는 반드시 그 아버지를 귀하게 할 것이다” 하였다.

  나이 12살에 문노(文弩)를 따랐는데  격검(擊劍)에 능하였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좋아하였고, 아버지의 풍모가 있었다. 낭도들이 서로 일러 말하기를 “구리공의 음덕으로 받은 복이다” 하였다.  사다함은 밖으로 굳세고 안으로 어질었고 우애에 독실하였다. 비록 설성에게는 거역하였으나, 어머니를 섬기는 효도는 지극하였다. 금진 또한 이로서 가장 …하였다. 매번 4절(節)을 맞아 ○유택(○遊宅)55)에 들어가 …을 하도록 … 하였다.  제(帝)는  사다함이 춤을 잘 추는 것을 알고 … 금진은 짝하여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보고 사랑(幸)을 받고 돌아 왔다. … 스스로 기쁨을 이기지 못하였다. 사랑을 하지 않고 돌아 와도 …. …울며 …. 금진이 묻기를 “…에게 사랑을…” 하였다.  사다함이 말하기를 “어머니와 더불어 임금이 짝이 되었으니 아들이 어찌 영광이 아닙니까?” 하였다.

  숙흘종공이 장차…. … 돌아 연이어 지나갔다. 금진이 바라보고 ….  

사다함이 말하기를 “어머니 …” 하였다.

(사다함이) …나가  숙흘종의 고삐를 잡고 말하기를 “ … ”라고 하였다.

(숙흘종이) 말하기를 “어머니는 어머니이다. 의(義)는 이미 끊어졌다”라고 하였다. …. ( 사다함은) “… 끊을 수 없다” 하였다.  

숙흘종이 이에 들어가 금진을 보았다.

… “… 어머니로서 아들에게 절하는가” 하였다.

금진…. …모자56)의 정이 회복되었다. … 울었다.

이로써 …대신 사랑(幸)하여 딸 준영을 낳았다. 아름답기가 ….

…공 또한  사통하였다.

그러나 진종(眞宗)을 두려워하여 감히 …하지 못했다.

 …. …종(宗)이 말하기를 “고수(瞽瞍)의 아들 대순(大舜) …있습니다” 하였다.

이에 낭도를 거느리고 ?영(英)을  숙흘종에게 …. … 벗을 위함이 이와 같았다. 

개국(開國) 11년(561) … (양)화공주(兩花公主)가 죽었다57).  

왕위를 이은 임금인 도설지(道設智)가 야녀(野女)로서 …월광(月光)과 더불어

영토를 다투어  야인(野人)을 많이 거느리고 왔다.58)

제(帝)가  태종공(苔宗公)에게 명하여 진압하도록 하였다.

사다함이 선봉이 될 것을 청하였다.  제(帝)사다함이 어리기에 허락하지 않았다.  사다함은 이에 사사로이 그 낭도를 거느리고 몰래 갔다.

금진이 설성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무품(無品)59)인데 여러 차례 나라의 은혜를 입었다.

이 때에 나의 아이를 지켜주지 않으면 나의 남편이 아니다” 하였다.

설성이 말하기를 “내가 원하는 바입니다” 하였다.

 이에 사다함의 휘하에 나아갔다. 야인을 대파하니 제(帝)가 훌륭하게 여겼다.

이에 사다함귀당비장(貴幢裨將)으로 삼았다. 그 때 나이가 16살이었다.

정병(精兵) 5천을 거느리고 전단문(栴檀門)으로 달려 들어가 백기를 세웠다.

가야(加耶)…. 그 성을 …하고 도설지와  야녀를 포로로 하였다.

…군이 계속하여 이르러 가야군을 대파하였다. 구(九)…. 공으로 전(田)을 내려주자 부하들에게 나누어주었다.

 포로로 한 생구(生口)는 모두 풀어주어  양인(良人)으로 만들었다.

 (진흥)대왕은 더욱 중하게 여겼다.

 알천의 땅을 주자 굳게 사양하고 받지 않고 불모지 수백 경(頃)을 택하여 …을

받으며 말하기를 “이는 사람으로 하여금 족히 근면하게 할 수 있다.

 …일이 없으면 입농(入農)하는 것이 나의 무리들의 …이다” 하였다.

  그 때 이화공(二花公)은 왕의 총애를 많이 받아 낭도에 대하여 싫증이 났다.

이에 공을 5세 풍월주로 삼았다. 공의 포제(胞弟)60)인 설원랑(薛原郞)을 부제(副弟)로 삼았는데 나이가 13 살이었다. … 설성이 출전하여  사다함이 …에 당하여 …하고 죽었다. 이에 이르러 무리들이 기려 말하기를 그대의 설성은 …. ( 사다함)공의 신하인  무관랑(武官郞) 또한 공이 많았는데 미천하여 보답을 받지 못하고 죽었다. 공이 그 것 때문에 마음이 아팠다.

   금진낭주(金珍娘主)는 평소에 색에 빠졌다. 많이 ….  무관랑을 몰래 들였다.  무관랑은  사다함을 대하기가 어려웠는데 …. ( 사다함이) … 위로하여 말하기를 “네가 아니라, 어머니 탓이다. 나와 더불어 …. …벗으로 어찌 작은 혐의를 문제 삼겠는가” 하였다. 금진이 듣게 되어…. …스스로 도리를 알았다. 나에게 너그러운 것은 곧 …  무관랑 …. ( 사다함이) 함께 출입하였다. 낭도들 중에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았다.  무관랑은 도망하고자 하여 …밤에 궁의 담(宮墻)을 넘다가  구지(溝池)61)에 떨어져 다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공은 애통해 하였다. 공 역시 여위고 병들어 7일 만에 죽었다. 금진(金珍)은 이에 공을 품에 안고 발을 구르며 말하기를, “나 때문에 너의 마음이 상해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 내가 어찌 살겠는가?” 하였다. 공이 서서히 눈을 뜨고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운명입니다. 내가 어찌 어머니 때문에 마음을 상하였겠습니까? 살아서 어머니의 큰 은혜를 갚을 수 없었는데, 죽어서 저 세상에서 갚겠습니다’ 하였다.대개 공은 원래 미진부공(未珍夫公)의 딸인 미실(美室)을 사모하였다.

미실 또한 공을 좋아하였으나, 태후의 명으로  세종공(世宗公)에게 시집을 갔다.

 이로써 태후의 마음을 열었다.

… 어머니에게 간하지 않았고 형을 따랐다〈형은 숙흘종이다〉.

청조가(靑鳥歌)를 지었다.

… 청조(靑鳥)는 미실을 가리킨다. 공은…. … 옷과 … 노래를 지어 보낸 까닭이다. 공(公)….

  낭도들이 이화공을 복립할 것을 청하니, 이화공이 말하기를 “…의 사위이다.  

사다함은 …. …여러 골(諸骨)62) 중 세종전군(世宗殿君) 같은 이는 없다.”

…의 무리들이 이에 세종을 세워 풍월주로 삼았다.



비량(比梁)이 물려준 정기(精氣)이고 위화의 손이라.

적을 친 공이 높은데 스스로 불모지에 머물렀다.

청조가 산중에 있고 송백(松柏)이 길이 푸르도다.



아버지는 구리지(仇利知)이고 할아버지는 비량(比梁)이고 증조는 비지(比知)63)이고 고조는 (비)태(比太)이다. … 미해공(美海公)의 딸이다.

처음에 내물왕(奈勿王)…. …후궁으로 산봉(山鳳)을 낳았다.

실성왕(實聖王)이 명하여 내물(奈勿)…. ○○왕이 서자, 후궁으로 들이고,

이어 사랑하는 아우(寵弟)에게 내려주었다.

실○(實○)… 미해공(美海公) …. 혹은 말하기를 심황(心凰)은 실상공(實相公)의 딸이라고 한다.

눌지왕(訥祗王)이 이에 심황을 명하여 내물신궁(奈勿神宮)의 주(主)로 삼았다.

비지공은 이로서 … 내물… 손이다.

묘량부인(妙梁夫人)을 아내로 맞아  비량공(比梁公)을 낳았다.

묘량 …. … 왕녀이다. 또한 대원신통(大元神統)에서 나왔다.




49) 입종과 금진 사이에 낳은 아들이 숙흘종이다.

50) 붕(崩)한 것으로 나오고 있다.

51) 훙(薨)한 것으로 나오고 있다.

     한편 6세 풍월주 세종공의 세계에서 지소태후는 법흥왕의 유명으로 영실공을 계부(繼夫)로

     맞이한 것으로 나오고 있어 법흥왕이 죽기 전에 입종공이 죽은 것을 알 수 있다.

52) 『삼국사기』 4, 신라본기 4 진흥왕 9년(548) 2월조에 고구려와 예인이 백제의 독산성을 공격하자

    백제에서 구원을 청하여 진흥왕이 장군 주령(朱玲)에게 경졸(勁卒) 3천을 거느리고 격파하여

    죽이고 포로로 잡은 사람이 많았다고 나오고 있다.

53) 용양(龍陽)은 전국시대 위왕의 총신인데 남색으로 왕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신라에서 용양신이 남색관계에 있었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54) 천(天)은 중요한 것, 만물의 근본으로 해석될 수 있다.

55) 『삼국유사』 1, 기이 2에는 사절유택(四節遊宅)이 나오는데 봄에는 동야택(東野宅),

     여름에는 곡량택(谷良宅), 가을에는 구지택(仇知宅), 겨울에는 가이택(加伊宅)이

     있었던 것으로 나오고 있다.

56) 숙흘종은 금진과 입종 사이에 출생하였다.

     이에 숙흘종과 금진 사이의 정이 되살아난 것을 의미한다.

57) 훙(薨)으로 나오고 있다.

58) 야녀(野女)와 야인(野人)이 구체적으로 어떤 집단인지 알 수 없으나 왜와 관계가 있던 사람들로 여겨진다.

    이 경우 야인을 거느린 것은 가야의 지배세력들이었던 것으로 보아 야인들이 가야의 통제를 받았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59) 개국 11년(561) 가야를 공격할 때 설성은 무품(無品)이었던 것으로 두품신분도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당시 골(품)신분과 품신분이 나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골품제가 존재한 것을 확인해준다. 60) 어머니가 같은 씨 다른 동생을 의미한다. 사다함의 아버지는 구리지이고 어머니는 금진이며, 설원랑의 아버지는 설성이고 어머니는 금진이다. 그러므로 사다함과 설원랑은 아버지는 다르나 어머니가 같은 것을 알 수 있다. 61) 여기서 말하는 궁장은 대궁이 있던 월성의 궁장을 가리킨다. 그리고 구지(溝池)의 존재는 최근에 알려졌다. 1984년부터 1989년까지 1차 5개년 계획으로 실시한 월성해자 및 주변유적에 대한 발굴조사에 이어 실시된 2차 5개년 계획(1990-1994)에서도 월성해자가 발굴·조사되었다(경주문화재연구소, 『회의자료』, 1990, pp. 13-19). 해자(垓字)는 능원, 묘 따위의 지경, 성밖으로 판 못을 가리킨다. 그리고 구지(溝池)는 성곽구지(城郭溝池)의 구지로 적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성 밑에 파 놓은 못 또는 물길을 가리킨다. 1984년 이전 월성 주변에 구지가 있었던 사실은 알 수 없었다. 한편 지금까지 해자(垓字)라고 불러오던 것을 신라인들은 구지(溝池)라고 부른 것도 확인된다. 그리고 월성 밖에 보호시설로 만들어진 시설의 실제 구조상 해자보다는 구지가 더 적합한 용어인 것을 알 수 있다. 이 같은 구지에 대한 기록은 『화랑세기』의 신빙성을 확인해 주는 하나의 근거가 된다.(李鍾旭, 「『花郞世記』의 신빙성과 그 저술에 대한 고찰」, 『韓國史硏究』 97, p. 30 참조) 62) 골품신분을 가진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

63) 『삼국사기』 3, 신라본기 3에 나오는 기록에는 소지왕 19년(493) 백제왕 모대(동성왕)의 혼인 요청에 따라 이벌찬 비지(比智)의 딸을 보낸 것으로 나오고 있는데 그가 바로 『화랑세기』에 나오는 비지(比知)가 아닌가 짐작이 간다


 

六世世宗者 苔宗公子也 母曰只召太后也 與眞興大王大帝同胞?? 世宗殿君初名義宗 端雅美風儀 孝于太后 忠于大王 大王亦極愛之曰 吾末弟也 常命侍側 少不禁束 而公天姿極好 無有失焉

苔宗公嘗以事私朝于帝 公侍側 苔宗公先拜于帝 次拜于公 〃遑忙出扶 不敢受拜 帝曰 此老雖是重臣 乃吾臣也 ??之體 不無拜于汝也 公泣曰 父者??○?也 安可得以爲臣乎 欲報之德???? 苔宗驚曰 太后神聖 不夫而神化 殿君(爲)神子也 何敢以臣爲父乎 ??(抱)苔宗而泣曰 嘗於母后殿???我?(公)謂我父也 尙在耳矣 帝????神聖睿德 寵愛重臣 以有吾?○○ 亦吾家之慶幸也 老臣何必諱之 ○○○○?吾弟也 又許公呼父于○○○○○○? 公始行父子相見(禮)?○○○○○○?感天恩之無邊

公與?○○○○○○?而 先數月太后嘗擇公卿之美女 聚于宮中 而觀之所向 公最喜美室娘主 ○○?太后乃問於帝曰 美室之美???殿君乎 帝亦美之曰 唯母所定也 但?○○(苔)宗老臣不知也 太后亦然之 乃???? 美室(以)議之曰 娶婦不可無議于夫也 苔宗曰 陛下內事 臣何敢言 太后曰 此女乃英失(之)?也 自朕右君 英失多失 朕故忌之 而(爲)(不)喜也 所以難決而問也 苔宗曰 英失???寵臣也 遺命勿疎 不可深責也 殿君旣喜則 亦可以慰皇后〈思道也〉也 不亦可乎

太后大喜曰 微愛夫之敎 朕旣幾失矣 乃使美室入宮事之 不數日而與公相通 情意繆密 時太后愛叔明公主 將以承統 欲廢皇后 皇后乃美室之叔母也 乃洩其謀于皇后 皇后乃泣訴于帝 〃素愛后 故(不)?太后譖言 而益愛皇后 太后怒欲有而?爲 美室憂之 進諫于太后 太后乃悔?(美)室 乃召美室責之曰 以汝奉殿君者 只許奉衣供食也 乃敢私(自)色事惑亂殿君 罪不可赦也 乃命出宮 ??眞宗殿君女肜明以爲正妃 帝爭??○?涕泣隨之 美室旣敀 悲泣不食?○○??嘗以俊英事 爲美室所?○○○○○?如斯多含

至是美室?○○○○○○?嘗以爲取夫 當如斯多(含)○○○○○?乎 夫富貴者一時也 吾?○○○○○?時 雖王子殿君皆拜于前 今?○○?是也 乃召斯多含慰之 美室乃起(情)○以爲相(脫) 及其出征時 以歌送之曰

風只吹留如久爲都 郞前希吹莫遣

浪只打如久爲都 郞前打莫遣

早早敀良來良 更逢叱那抱遣見遣

此好 郞耶 執音乎手乙 忍麽等尸理良奴

斯多含乃慰萬端而行之殿君聞之痛? 太后恐傷 復召美室入宮 殿君喜狂欲走 太后不得已命復事之 美室恥爲元妃之妾 不肯色供 殿君乃請太后 以美室爲殿君夫人 肜明爲次妃 肜明不平 有退居之意 美室與殿君約不二情 遂逐肜明

斯多含及敀 美室已入宮中爲殿君夫人 故斯多含作靑鳥歌而悲之 辭悽愴 時人爭相傳誦 解曰

靑鳥靑鳥 彼雲上之靑鳥

胡爲乎 止我豆之田

靑鳥靑鳥 乃我豆田靑鳥

胡爲乎 更飛入雲上去

旣來不須去 又去爲何來

空令人淚雨 腸爛瘦死盡

(吾)死爲何鬼 吾死爲神兵

飛入(殿)(主)(護) 〃(神)

朝〃暮〃 保護殿君夫妻

萬年千年 不長滅

臨卒 二花公抱以哀之曰 爾弟尙幼 而爾若不起 誰爲之繼乎 斯曰 臣妹美室之夫 依毛郞公故事 則不亦可乎 二花公乃奏太后請立之 太后“不肯”曰 吾子幼弱 安能爲乎 美室乃勸世宗曰 從兄(斯多含)〈○姪而 時人相愛則兄弟 故呼之曰兄也〉慕我而死 臨死一言 不聽則非丈夫也 世宗然之 乃說太后得旨 乃爲六世風月主 仍以薛花郞副之

追福斯多含于天柱寺中 是夜美室果夢 斯多含公入懷曰 吾與汝願爲夫婦 可托于爾腹而生 乃告于公 〃亦異之 乃成之而生夏宗公 夏宗公皃酷類斯多含 故世或有以爲通于斯時已有娠而入宮生者也 非也世宗(雖)玉葉之貴 能繼斯公撫恤之道 多拔郎徒爲幢 勉以道義 上下浹然 美室實居內導之也 時銅太子已長 太后乃以萬呼公主欲配之以續眞骨正統 思道皇后欲續大元神統 陰與相議曰 吾兒善子 可與太子相親 有子則當以汝爲后也 美室大喜 與太子相通有娠 大王不知之 亦使美室入侍色供 美室善陰事 承寵日重 擢以爲皇后宮殿主 其位與皇后同 美室乃使人?世宗立功于外 世宗乃求出征 郎徒多從之

美室乃使薛原郞留而代世宗事 恃寵放蕩 乃通薛原郞及其弟美生 大王不知之 美室乃與薛原計曰 吾與爾等私 若失郎徒之望 則外議不可收也 爾等何不奉我以源花乎 薛等?○? 美室乃說上曰 昔先帝以妾之?○○○○○寵妾 使郎徒奉之 同朝南○○○○○○妾受陛下寵極矣 未有○○○○○○(世)宗多率郎徒在外 若以妾?○○○○?有變 妾願自爲源花 緫率(郎徒)???嘉之 詔世宗免風月主 以美室奉爲源花 以薛原美生爲奉事郞 金珍爲花母

世宗乃盡觧其徒而敀之曰 新源花卽舊夫人也 爾等勿嫌善事之 郎徒有涕泣不能去? 帝命薛原美生二郞統率郎徒萬衆而朝之 大王與殿主具兗冕而出 受朝于南桃 大賜燕饗 源花之制 廢二十九年而復興

乃改元曰大昌 是夕帝與美室合歡于南桃正宮 使郎徒遊花達曉踏歌相奔 城中美女之出者亦萬衆 燈明連天地 歡聲湧四海 帝與源花當欗而賞之 郎徒各携一遊花 抃舞而過其下 輒山呼震之 帝樂甚 與源花投彩錢于衆曰 彼皆各雌雄也 吾與汝亦雌雄也 美室完轉入懷曰 雖以叔母之尊 未有如此之樂也 盖美室色麗善媚 大有玉珍之風 時以爲斯多含之靈 常在美室之懷 而授之好計云矣

美室素?太子 貞母入爲殿主 恐帝百歲後爲?子? 不敢拒太子而密相續好 太子無?求之益甚 美室恐大繁爲露 乃與美生計太子外遊 擇遊花之美者 多薦之?○○子與美生之徒日事外荒 及爲鴻濟元年三月 銅太子以宝明獒事卒 大王乃索 太子從人多屬美室郎徒 美室?○○○○○○大王亦漏聞 美室放蕩無○○○○○(世)宗 乃召入之 許美室辭源花 而?○(世)宗

復世宗爲風月主 美室乃勸世宗(曰 吾)已辭源花 殿主欲靜處共君 君何更爲 不如早傳薛郞也 世宗乃傳位于薛原 時金太子亦好美室交結 薛原美生等爲方外友 美室雖已出宮 聲言淨業而未嘗閑居 遂與金太子約以後事 帝亦未幾而不能自制 復召入?

帝崩而金太子卽位 仍納美室而 以外議不能封以皇后 且荒于外 不甚寵 美室怒其違約 遂與思道太后發郎徒廢之 立銅太子之子白淨公 是爲眞平大帝 〃幼 美室已衰而自當後宮 而多弄朝廷事

世宗公終始獨守淸節 雖以美室之意 出將入相 淡然無私意 有大失體事 輒諫美室 涕泣而見誠 美室亦感而重之 晩復相和 噫世宗公孝于太后忠于大王 皇后(之)子 (貞)于美室 自以爲一生事 平生未嘗責一人誤一訟 眞花郞中花郞也



太后私子 相國寵胤 淸雅高標 花郞典型



母曰只召太后 初名息道夫人 乃法興王女也 初嫁立宗公 生眞興大王 大帝以法興遺命 以英失公爲繼夫 生黃華公主 以英失公不棄 ?○○○○○權臣以斥之 乃以兵部令○○○○○○叔明公主及公 苔宗之父(曰阿珍宗 乃習宝)公之子也 母曰宝玉公主 ?○○○○之女也 習宝公乃奈勿王孫也 只召之母曰保道皇后 乃炤知王女也 保道之(母曰)善兮皇后 乃宿公女也 善兮之母鳥生夫人 訥祗王女也 鳥生之母曰阿老 阿老之母曰內留 內留之母曰光明 光明之母曰阿爾兮 阿爾兮之母曰紅帽 紅帽之母曰玉帽 味鄒大王以光明爲皇后 詔後世曰非玉帽之姻統 則不爲皇后 故世以斯統爲眞骨正統 玉帽夫人乃召文國王女雲帽公主敀于仇道公而生者也 非古之眞骨也




6세 (풍월주) 세종(世宗)태종공(苔宗公)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지소태후(只召太后)이다.

진흥대왕(大帝)과 같다. 대제(大帝)와 같은 배(同胞)64)로서  세종전군의 초명(初名)은 의종(義宗)이다.

 단아한 아름다움과 멋진 풍채를 가졌다. 태후에게 효성스럽고 대왕에게 충성스러웠다.

 대왕 또한 매우 사랑하여 말하기를 “나의 막내아우다” 하였다. 항상 곁에 있으며 (대왕을) 모시도록 하였다.

조금도 금지하고 묶어두지 않아도, 공의 타고난 바탕이 극히 좋아 잘못됨이 없었다.

   태종공이 일찍이 일이 있어 사사로이 (진흥)제를 찾아뵐 때, 공이 시측하였다.  태종공은  제(帝)에게 먼저 절하고(先拜) 공에게 다음 절(次拜)을 하였다. 공은 황망히 나아가 부축하며 감히 절을 받지 않았다.  제(帝)가 말하기를 “이 노인은 비록  중신(重臣)이기는 하나 나의 신하이다. … (지위로) 너에게 절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공이 울며 말하기를 “아버지는 …입니다. 어찌 신으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덕에 대한 보답을 하고자 …”라 하였다.  태종공이 놀라 말하기를 “태후는 신성하여 지아비 없이도 전군을 신화(神化)할 수 있습니다.65) 전군은 신자(神子)입니다. 어찌 감히 신하가 아비가 되겠습니까?” 하였다. ( 세종은)  태종공을 안고 울며 말하기를 “일찍이  모후의 전(殿)에서 … 나에게 …를 나의 아버지라고 하셨는데, 아직도 귀에 쟁쟁합니다” 하였다.  제(帝)는 “… (태후)의 신성과 예덕(睿德)으로  중신을 총애함으로써 나의 …이 있으니, 또한 나의 집의 경사스러운 행운이다. 늙은 신하는 어찌 반드시 피하는가. ( 세종은) … 나의 아우이다” 하였다. 또한 공에게 허락하여 ( 태종공)에게 아버지라 부르도록 하였다. …공은 처음으로 부자의 상견례를 (행하여) … 왕의 은혜가 끝이 없음을 감사하였다.

  공(公)은 …와 더불어 …. … 몇 달 전에 태후는 일찍이 공경(公卿)의 미녀들을 택하여 궁중에 모아 두고 공이 누구에게 마음이 향하는가를 보았다. 공은 미실 낭주를 가장 좋아하였다. … 태후는 이에  제(帝)에게 물어 말하기를 “미실의 아름다움 …전군(殿君)을 …합니까?” 하였다.  제(帝) 또한 아름답게 여겨 말하기를 “오직 어머니가 정할 바 입니다. 단 … 태종(苔宗) 노신이 알지 못해서 …” 하였다. 태후 또한 그렇게 여겼다. (이에 태종(苔宗)을 불렀다.) 미실로서 의논하여 말하기를, “며느리를 얻는데 지아비에게 의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태종은 말하기를 “폐하의 집안일에 어찌 감히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하였다. 태후가 말하기를 “이 처녀는 곧 영실(英失)의 손입니다. 나의  우군(右君)66)으로 영실은 나에게 잘못이 많았기에 꺼렸습니다. 그리하여 좋아하지 않게 되어 결정하기 어려운바 되어 묻는 것입니다” 하였다. 태종이 말하기를 “영실은 ( 법흥)의 총신입니다. 유명(遺命)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지나치게 나무라서는 안 됩니다. 전군이 이미 좋아한다면 또한 황후〈사도(思道)이다〉를 위로할 수 있으니 옳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태후가 크게 기뻐하여 말하기를 “사랑하는 지아비(夫)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나는 잘못할 뻔 했습니다” 하였다. 이에 미실로 하여금 궁에 들어오게 하였다. 섬긴 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 공과 더불어 상통하였고, 정의(情意)가 얽혀 깊어졌다.

  그 때 태후는  숙명공주를 사랑하여 장차 통(統)을 이으려 (사도)황후를 폐하고자 하였다. (사도)황후는 곧 미실의 숙모67)였다. 이에 그 계책을 황후에게 누설하였다. 황후는 이에 울면서  제(帝)에게 원통함을 호소하였다.  제(帝)는 본래 황후를 사랑했기 때문에 태후의 헐뜯음을 듣지 않고 황후를 더욱 사랑하였다.

  태후가 노하여 … 미실을 위하여 걱정하여 태후에게 나아가 간하였다. 태후는 이에 미실을 (불러들인) 것을 후회하였다. 이에 미실을 불러 꾸짖어 말하기를 “너로 하여 전군을 받들게 한 것은 단지 옷을 드리고 음식을 받드는 것이다. 그런데 감히 사사로이  색사로 보여 전군을 …어지럽혔으니, 죄를 용서할 수 없다” 하였다. 이에  출궁을 명하였다. … 진종전군(眞宗殿君)의 딸  융명(肜明)으로  정비(正妃)68)를 삼았다.  제(帝)가 따졌으나…. ( 세종은) … 눈물을 흘리며 울며 따랐다. 미실이 이미 돌아와서는 슬퍼 울면서 먹지 않고 …. …일찍이 준영(俊英)의 일로서 미실에게 …한 바 되어…. … 사다함과 같았다.이에 이르러 미실은…. “…일찍이 지아비를 맞는 데는 마땅히  사다함과 같이…하여야 한다. 무릇 부귀라는 것은 한 때이다. 나는 …. 한 때  왕자와 전군을 모두 앞에서 배견하였으나 지금은 … 이와 같다.” 이에  사다함공을 불러 위로하였다. 미실은 이에 정○이 일어나 서로 벗어났다.69) 출정할 때에 이르러, 노래로서 보냈다. 이르기를70):

  바람이 불다고 하되 임 앞에 불지 말고
물결이 친다고 하되 임 앞 치지 말고
빨리빨리 돌아오라 다시 만나 안고보고
아흐, 임이여 잡은 손을 차마 물리라뇨

   사다함은 이에 온갖 방법(萬端)으로 위로받고 갔다. 전군이 듣고 …괴로워하였다. 태후가 전군이 상심할까 두려워하여 미실을 다시  입궁 시켰는데, 전군은 기뻐 미친 듯 달려가려 하였다. 태후는 부득이 다시 섬기도록 명하였다. 미실은  원비(元妃)의 첩이 된 것을 부끄럽게 여겨  색공(色供)에 응하지 않았다. 전군은 이에 태후에게 청하여 미실을  전군부인(殿君夫人)으로 삼았고  융명은  차비(次妃)로 삼았다.71)  융명이 불만으로 여겨 물러나 살 뜻을 가졌다. 미실과 더불어 전군과 정을 배반하지 않기로 약속하고 마침내  융명을 내쫓았다. 사다함이 돌아 왔을 때 미실은 이미 궁중에 들어가  전군부인이 되어 있었다. 까닭에  사다함은  청조가(靑鳥歌)를 지어 슬퍼하였다. 내용이 몹시 구슬퍼 그 때 사람들이 다투어 서로 암송하여 전하였다. 해(解)72)하여 이르기를

  파랑새야 파랑새야 저 구름 위의 파랑새야
어찌하여 나의 콩밭에 머무는가
파랑새야 파랑새야 나의 콩밭의 파랑새야
어찌하여 다시 날아들어 구름위로 가는가
이미 왔으면 가지 말지 또 갈 것을 어찌하여 왔는가

  부질없이 눈물짓게 하며 마음 아프고 여위어 죽게 하는가
나는 죽어 무슨 귀신 될까. 나는 죽어  신병 되리
( 전주)에게 날아들어 보호하여  호신(護神)73) 되어
매일 아침 매일 저녁 전군부처 보호하여
만년 천년 오래 죽지 않게 하리

  라 하였다.

  죽음에 임하여 이화공(二花公)이 감싸 안고 슬퍼하며 말하기를 “그대 아우는 아직 어린데, 그대가 만약 일어나지 못한다면 누가 계승할 것인가?” 하였다.  사다함이 말하기를 “신의 누이인 미실의 남편74)이,  모랑공(毛郞公)의 고사(故事)에 의거하면, 또한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이화공이 이에 태후에게 아뢰어 ( 풍월주로) 세우기를 청하였다. 태후가 말하기를 “나의 아들은 어리고 약하다. 어찌 능히 될 수 있는가?” 하였다. 미실이  세종에게 권하여 말하기를 “ 사다함(斯多含)  종형(從兄)〈종질(從姪)이다. 당시는 그 당시 사람들이 서로 좋아하면 형제라 하였다. 그러므로 형이라 불렀다〉이 나를 사모하여 죽었다. 죽음에 임하여 한 말 한마디를 들어주지 않으면 곧 장부가 아닙니다” 하였다.  세종이 그렇게 여기고 태후를 설득하여 허락을 얻어, 6세  풍월주가 되었다. 인하여  설화랑(薛花郞)을 부제로 삼았다. 사다함이 돌아 왔을 때 미실은 이미 궁중에 들어가  전군부인이 되어 있었다. 까닭에  사다함은  청조가(靑鳥歌)를 지어 슬퍼하였다. 내용이 몹시 구슬퍼 그 때 사람들이 다투어 서로 암송하여 전하였다. 해(解)72)하여 이르기를

  파랑새야 파랑새야 저 구름 위의 파랑새야
어찌하여 나의 콩밭에 머무는가
파랑새야 파랑새야 나의 콩밭의 파랑새야
어찌하여 다시 날아들어 구름위로 가는가
이미 왔으면 가지 말지 또 갈 것을 어찌하여 왔는가

  부질없이 눈물짓게 하며 마음 아프고 여위어 죽게 하는가
나는 죽어 무슨 귀신 될까. 나는 죽어  신병 되리
( 전주)에게 날아들어 보호하여  호신(護神)73) 되어
매일 아침 매일 저녁 전군부처 보호하여
만년 천년 오래 죽지 않게 하리

  라 하였다.

  죽음에 임하여 이화공(二花公)이 감싸 안고 슬퍼하며 말하기를 “그대 아우는 아직 어린데, 그대가 만약 일어나지 못한다면 누가 계승할 것인가?” 하였다.  사다함이 말하기를 “신의 누이인 미실의 남편74)이,  모랑공(毛郞公)의 고사(故事)에 의거하면, 또한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이화공이 이에 태후에게 아뢰어 ( 풍월주로) 세우기를 청하였다. 태후가 말하기를 “나의 아들은 어리고 약하다. 어찌 능히 될 수 있는가?” 하였다. 미실이  세종에게 권하여 말하기를 “ 사다함(斯多含)  종형(從兄)〈종질(從姪)이다. 당시는 그 당시 사람들이 서로 좋아하면 형제라 하였다. 그러므로 형이라 불렀다〉이 나를 사모하여 죽었다. 죽음에 임하여 한 말 한마디를 들어주지 않으면 곧 장부가 아닙니다” 하였다.  세종이 그렇게 여기고 태후를 설득하여 허락을 얻어, 6세  풍월주가 되었다. 인하여  설화랑(薛花郞)을 부제로 삼았다. 천주사(天柱寺)75)에서  사다함의 명복을 빌었는데, 그날 밤 과연 미실이 꿈을 꾸었는데  사다함공이 품에 들어오며 말하기를 “나와 네가 부부가 되기를 원하였으니, 너의 배를 빌어 태어날 것이다” 하였다. 이에 (미실이) ( 세종)공에게 아뢰었다. ( 세종)공 또한 이상하게 여겼다. 바로 임신이 되어  하종공(夏宗公)을 낳았다.  하종공은 모습이  사다함과 심히 비슷하였다. 그러므로 세상에서는 혹  사다함과 정을 통할 때에 이미 임신을 하고서  입궁하여 낳은 아들이라 하나, 그렇지 않다.

   세종은 금지옥엽의 귀함이 있었지만, 능히  사다함공의 어루만짐의 도를 이어 낭도를 많이 뽑아  당(幢)을 이루었고, 도의에 힘써 상하에 두루 미쳤다. 미실이 실로 대내76)에 거하며 이끌어준 것이다.

  그 때 동(륜) 태자(銅輪太子)가 이미 장성하였다. 태후는 이에 만호공주(萬呼公主)를 짝지어  진골정통(眞骨正統)을 잇고자 하였다.  사도황후(思道皇后)는  대원신통(大元神統)을 잇고자 하여 몰래 서로 더불어 의논하여 말하기를, “나의 아들은 좋은 아이이니,  태자와 더불어 서로 친하여 아들을 갖게 되면 곧 너를 후(后)로 삼을 것이다” 하였다. 미실이 크게 기뻐하여  태자와 더불어 상통(相通)하여 임신을 하였다. (그런데) 대왕이 이를 알지 못하고 또한 미실을 들어오게 하여  색공(色供)으로 모시도록 하였다. 미실은  음사77)를 잘하여 총애가 날로 중하여 황후궁  전주에 발탁되었다. 그 지위는 황후와 같았다. 미실은 이에 사람을 시켜  세종이 밖78)에서 공을 세우도록 설득하였다.  세종은 이에 출정할 것을 구하였는데, 낭도들이 많이 따랐다.79)

  미실은 이에 설원랑으로 하여금 머물러 있으며  세종의 일을 대신하도록 하였다. (미실은) 총애를 믿고 방탕하여 설원랑과 그의 동생인 미생과 통(通)하였으나, 대왕은 이를 알지 못하였다. 미실은 설원랑과 의논하여 말하기를 “내가 너희들과  사통하였는데, 만약 낭도들의 우러러 봄(望)을 잃는다면 곧 세상의 여론을 거둘 수 없을 것이다. 너희들은 어찌 나를  원화로 받들지 않는가?” 하였다. 설원랑 등이 …. 미실은 이에 왕을 설득하여 말하기를 “옛날 선대의  제(帝)들은 첩의 …80). …  총첩(寵妾)을 낭도로 하여금 받들게 하여 함께 남(도)(南桃)에서 조알을 받았습니다. … 첩은 폐하의 총애를 지극히 받았습니다. 아직 … 없습니다.  세종이 낭도를 많이 거느리고 지방에 있는데, 만약 첩이 … 변고가 있으면 첩이 원컨대 스스로  원화가 되어 낭도를 모두 거느리는 것입니다(總率). … 기쁘게 여겼다.  세종을 불러  풍월주에서 물러나게 하고 미실을 받들어  원화로 삼았고, 설원과 미생을  봉사랑(奉事郞)으로 삼고 금진을  화모(花母)81)로 삼았다.

   세종은 이에 그 낭도를 모두 해산하고 돌아가게 하며 말하기를 “새로운  원화는 곧 옛 부인이다. 너희들은 불평하지 말고 잘 섬기도록 하라” 하였다. 낭도들은 눈물을 흘리며 울며 물러가지를 못하였다. (진흥) 제(帝)가 설원과 미생 두 화랑에게 명하여 낭도의 많은 무리(萬衆)를 통솔하고 조알케 하였다. 대왕과  전주(殿主)는 함께 곤룡포와 면류관을 갖추어 입고 나와,  남도(南桃)에서 조알을 받고 잔치(燕饗)를 크게 베풀었다.  원화의 제도는 폐한지 29년 만에 다시 부활하였다.

  이에  연호를 고쳐  대창(大昌)82)이라 하였다. 이날 밤 (진흥)제와 미실은  남도(南桃)의  정궁(正宮)에서 합환83)을 하였다. 낭도와  유화(遊花)들로 하여금 새벽까지 돌아다니며 노래하고 서로  야합토록 하였다. 성중의 미녀로서 나온 자가 또한 만중(萬衆)이었다. 등불의 밝음이 천지에 이어졌고, 환성이 4해의 물이 끓어오르게 하였다. (진흥) 제(帝)와 (미실)  원화가 난간에 다다라 구경을 하였다. 낭도들이 각기 한 명의  유화를 이끌고 손뼉을 치고 춤을 추며(抃舞) 그 아래를 지나갔는데, 그 때마다 만세 소리(山呼)가 진동하였다.  제(帝)의 기쁨이 매우 커서  원화와 함께  채전(彩錢)을 무리에게 던져 주며 말하기를, “저들도 각기 자웅(雌雄)이고 나와 너도 또한 자웅이다” 하였다. 미실은 몸을 완전히 돌려 품에 들어가며 말하기를 “비록 숙모84)의 존귀함이라도 이와 같은 즐거움은 없었을 것입니다” 하였다. 대개 미실이 색이 아름답고 교태를 잘 부리는 것은 옥진(玉珍)의 기풍을 크게 가진 때문이다. 당시 사람들은  사다함의 영혼이 늘 미실의 가슴 안에 있으며 좋은 계책을 주는 때문이라고 하였다.미실은 평소에 ( 동륜) 태자를 …85)(피)하였는데 정숙한 어머니로서, 들어가  전주가 되었다. (진흥) 제(帝)가 백년 후 …할까 염려하여,86) 감히  태자를 거부하지 못하고 몰래 서로 이어 좋아하였다.  태자는 …87)함이 없이 구함이 더욱 심하여졌다. 미실은 심하게 많은 것이 탄로될까 염려하여 미생과 의논하여 ( 동륜) 태자가 밖으로 나가 놀 때  유화 중 아름다운 사람을 택하여 많이 천거하였다. ( 동륜태)자와 더불어 미생의 무리가 날마다 밖에서 황음한 짓을 일삼았다.  홍제(鴻濟) 원년(572) 3월 동 태자(銅太子)가  보명궁(宝明宮)의 큰 개에 물리는 일(獒事88))로 인하여 죽었다. (대왕이)  태자의  종인(從人)을 가려보니 미실의 낭도에 속한 자가 많았다. 미실 …. 대왕 또한 새어 나온 말을 얻어들은 바로는 미실의 방탕함이 …이 없어….  세종이 부름을 받아 들어와 미실이  원화를 물러나는 것을 승인하였다.

  그리고 …하여 다시  세종을  풍월주로 삼았다. 미실은 이에  세종에게 권하여 (말하기를 “내가) 이미  원화와  전주를 물러났으며, 그대와 함께 조용한 곳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는데, 그대는 어찌 다시  풍월주가 되려 하는지요. 빨리 설원랑에게 물려주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하였다.  세종은 이에 설원에게  풍월주의 지위를 전하여 주었다. 그 때 금 태자(金太子)89) 또한 미실과 서로 사귀어 정을 맺는 것을 좋아하여 설원·미생 등과  방외우(方外友)90)가 되었다. 미실이 비록 이미  출궁을 하여 깨끗하게 살 것(淨業=念佛)을 공언하였으나 가만히 있지 않고 금 태자와 더불어 후사(後事)를 약속하였다. (진흥) 제(帝)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 자제할 수 없어 미실을 다시 (궁에) 불러들였다.

  (진흥) 제(帝)가 죽고91) 금 태자가  왕위에  즉위하였다. 인하여 미실을 받아들였는데 세상의 여론(外議) 때문에 황후로 봉하지 못하였다. 또한 다른 사람에 빠져 미실을 심히 총애하지 않았다. 미실은 그 약속을 어긴 것에 노하여 마침내 사도태후(思道太后)와 함께 낭도를 일으켜 ( 진지왕을) 폐위하고 동 태자의 아들인 백정공(白淨公)을  즉위시키니, 이가  진평대제(眞平大帝)이다.  제(帝)는 어리고 미실은 이미 늙었기에 스스로 후궁(後宮)의 일을 맡았는데,  조정의 일을 제 마음대로 함이 많았다.

   세종공은 처음부터 끝까지 청렴결백한 절조를 홀로 지켰다. 비록 미실의 뜻에 따라  출장입상(出將入相)92)하였으나, 깨끗하여 사사로운 마음이 없었다. 크게 체모를 잃는 일이 있으면 즉시 미실에게 간언을 하는데, 눈물을 흘리며 참된 마음을 보였다. 미실 또한 감동하여 그를 중히 여겼다. 나이 들어 다시 서로 화합하였다.

 아!  세종공은 태후에게 효도하고, 대왕에게 충성스러웠으며, 황후의 아들로 미실에게 정절을 바쳤다.

스스로 그 것을 일생의 일로 삼았다.

평생토록 한 사람도 책망하지 않았고, 하나의 소송도 그릇되게 판결하지 않았다.

진실로 화랑 중의 화랑이었다.


어머니는 지소태후인데 초명(初名)은 식도부인(息道夫人)이고 법흥왕의 딸이다.

처음에 입종공(立宗公)에게 시집을 가서 진흥대왕을 낳았다.

대제(大帝)는 법흥대왕의 유명으로 영실공계부로 맞이하여 황화공주(黃華公主)를 낳았다.

영실공이 멀리하지 않았는데 …. 권신(權臣)들이 물리쳤다.

 이에 병부령(兵部令)93)을…. … 숙명공주 및 공(公)…. 태종(苔宗)의 아버지는 아진종(阿珍宗)이며

곧 습보공(習宝公)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보옥공주(宝玉公主)인데 …의 딸이다.

습보공은 곧 내물왕의 손자이다.94)

지소(只召)의 어머니는 보도황후(保道皇后)이며 소지왕(炤知王)의 딸이다.

보도(保道)의 어머니는 선혜황후(善兮皇后)인데 내숙공(乃宿公)95)의 딸이다.

 선혜의 어머니는 조생부인(鳥生夫人)인데 눌지왕의 딸이다.

조생(鳥生)의 어머니는 아노(阿老)이고, 아노의 어머니는 내류(內留)이며, 내류의 어머니는 광명(光明)이고,

광명의 어머니는 아이혜(阿爾兮)이고, 아이혜의 어머니는  홍모(紅帽)이다.

홍모의 어머니는 옥모(玉帽)이다.

미추대왕(味鄒大王)이 광명을 황후로 삼으며 후세에 알려 말하기를 “옥모(玉帽)의 인통(姻統)96)이 아니면

곧 황후로 삼지 말라” 하였다.

까닭에 세상에서 이 계통을 진골정통(眞骨正統)97)이라 한다.

옥모부인(玉帽夫人)은 곧 소문국(召文國)98)의 왕녀인 운모공주(雲帽公主)가 구도공(仇道公)에게 시집가서

낳은 사람이다. 옛날부터의 진골(眞骨)이 아니다.99)




64) 동포는 씨가 다르고 어머니가 같은 것을 뜻한다. 진흥왕의 아버지는 입종이고 어머니는 지소태후이며,

세종의 아버지는 태종공이고 어머니는 지소태후이기에 동포(同胞)가 된다.

65) 성골집단의 신성함을 유지하는 모습을 읽을 수 있다.

66) 법흥왕의 유명으로 지소태후가 영실을 계부(繼夫)로 맞았기에 우군(右君)으로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67) 현재로 보면 이모가 된다.

68) 정비(正妃)의 존재는 신라시대에 혼인관계에 처첩(妻妾)을 구별하는 등 일정한 질서가 있었던 것을 잘 보여준다.

69) 필사본에는 상탈(相脫)로 되어 있으나 상열(相悅)로 읽을 수도 있다. 이 경우 서로 기뻐하였다로 해석될 수 있다.

70) 『화랑세기』에 나오고 있는 이 향가의 이름은 정연찬(鄭然粲) 선생님의 교시에 의하여 『풍랑가(風浪歌)』 또는 『송출정가(送出征歌)』로 부를 수 있게 되었다(이종욱, 「『花郞世記』의 신빙성과 그 저술에 대한 고찰」, 『韓國史硏究』 97, 1998, p. 27). 아울러 향가의 해석도 정연찬 선생님이 한 것이다. 신라시대의 오래된 향가의 중요성은 말할 수 없이 큰 것이 분명하다.

71) 원비(元妃)나 차비(次妃)의 존재 역시 신라시대의 일정한 혼인질서가 지켜진 것을 보여준다.

72) 해(解)는 노래의 한 단을 가리킨다. 따라서 다해와 단해가 있으며 청조가는 두 단으로 되어 있다.

73) 12세 풍월주 보리공 조에는 미실이 아시공과 옥진궁주를 호신으로 삼은 예가 나오고 있다.

74) 세종을 가리킨다.75) 『삼국유사』 1, 기이 2, 천사옥대 조에는 내제석궁(內帝釋宮)을 천주사(天柱寺)라고도 하며 진평왕이 세운 것으로 나오고 있다. 76) 왕궁을 의미한다. 77) 后妃와 女官이 밤에 군주의 부름에 응하는 것, 방사(房事)를 의미한다. 78) 왕경 밖의 지방을 의미한다. 79) 풍월주와 그가 거느린 낭도들이 출정한 사실을 알 수 있다. 80) 원화를 삼았다는 내용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81) 화모(花母)가 된 금진은 설원랑의 어머니가 된다. 풍월주의 부인이 화모가 되어야 하나 여자인 미실이 원화가 되었기에 금진을 화모로 삼았다. 82) 대창(大昌) 원년은 568년이다. 83) 기쁨을 같이 함, 남녀가 동거 함을 의미한다. 84) 사도황후를 가리킨다. 85) 피하였거나 거리를 두었다는 뜻일 것이다. 86) 진흥왕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염려한 것이라 생각된다. 87) 조심함이라 생각된다. 88) 큰개, 키가 4자가 넘는 개, 맹견에 물려 죽은 사건을 가리킨다. 89) 금태자는 금륜태자를 가리키며 『삼국사기』 진지왕 즉위조에는 사륜(舍輪)으로 나오고 있고 혹은 금륜이라고도 한다고 되어 있다. 『삼국유사』 왕력편에도 사륜이 먼저 나오고 일작 금륜이라고 있어 사륜을 중시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화랑세기』에는 사륜은 없다. 이는 금륜이 타당한데 후일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초 자료가 된 사료에 획이 변경되어 사륜으로도 나오는 것으로 생각된다. 90) 신분을 떠난 친구를 의미한다. 91) 붕(崩)으로 나오고 있다. 92) 出將入相은 난시에는 싸움터에 나가서 장군이 되고 평시에는 재상이 되어 정치를 하는 것을 의미한다.


93) 『삼국사기』 직관 상에 따르면 병부령은 법흥왕 3년(516)에 설치되었고 진흥왕 5년에 1인이 늘어난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 병부령으로 나오는 것을 보아 진흥왕 5년(544) 이전에 임명된 것을 알 수 있다.

94) 『삼국사기』 4, 신라본기 4 지증마립간 즉위조에는 지증은 습보 갈문왕의 증손으로 나오고 있고 습보 갈문왕의 아들로 나오고 있다. 따라서 『화랑세기』에 나오는 습보가 내물왕의 손이라는 기록은 『삼국사기』의 기록과 일치한다. 그에 비하여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지정(智訂) 마립간의 아버지는 눌지왕의 동생인 기보 갈문왕이라고 나오고 있어 『화랑세기』의 기록과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95) 『삼국사기』 3, 신라본기 3 조지마립간 즉위조에는 내숙(乃宿) 이벌찬의 딸로 나오고 있다. 그에 비하여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기보 갈문왕의 딸로 나오고 있다. 여기서 『화랑세기』와 『삼국사기』의 기록이 일치하고 있는 사실을 알 수 있다.

96) 인통(姻統)은 왕비를 배출하는 계통으로 철저하게 모계에 의하여 그 계통이 전하여졌다.

97) 진골정통은 황후를 배출하는 혼인을 위한 계통을 의미한다. 당시 진골정통과 대원신통은 여계계승의 원리에 의하여 이어졌다. 그러한 여계계승의 원리는 부계계승을 거울에 비춘 것과 같이 대칭되는 원리를 보여준다. 그리고 남자들은 어머니의 계통에 의하여 진골정통과 대원신통이 정해졌다. 그리고 남자들은 한 대에 한하여 그러한 계통을 이었다. 그 아들들은 다시 그 어머니의 계통에 의하여 그 계통이 정하여졌다. 따라서 남자들은 부자간에 계통이 달랐던 것을 볼 수 있다. 실제로 서현은 그의 어머니가 대원신통이었기에 그 계통을 이었다. 그러나 그의 아들인 김유신은 서현의 부인이며 유신의 어머니가 되는 만명부인이 진골정통이었기에 진골정통이 되었다. 그러한 사정은 용춘과 김춘추 사이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용수·용춘은 그 어머니가 대원신통이었기에 대원신통이 되었고 용수·용춘의 아들인 김춘추는 그 어머니가 진골정통이었기에 진골정통이 되었다.(李鍾旭, 「花郞世紀에 나타난 眞骨正統과 大元神統」, 『韓國上古史學報』 18, 1995 참조) 한편 이 같은 진골정통과 대원신통의 계승에 남자들이 한 대에 한하여 그 어머니의 계통을 잇는 것은 선덕왕과 진덕왕과 같은 여왕의 즉위도 한 대에 한하여 부계가계의 성원권을 갖고 왕위를 계승한 사정을 확인하게 된다.

98) 벌휴왕 2년(185)에 신라에 병합된 소국이고(『삼국사기』 2, 신라본기 2, 별휴 이사금 2년), 그 위치는 신라의 문소군(聞韶郡)이고 고려의 의성부(義城府)이며(『삼국사기』 34, 잡지 3, 지리 1) 현재의 의성이다.

99) 사로국 형성 이래 만들어져온 신분제를 바탕으로 법흥왕이 율령을 반포하여 골품제를 편성하였다고 보아 왔는데(李鍾旭, 「新羅 中古時代의 骨品制」, 『歷史學報』 99 100합집, pp. 25-38), 그 이전에도 진골이 있었을 가능성이 나타나고 있다.

 

 

 

 

七世薛花郞 初名薛原郞 金珍娘主之私子也 其父薛成以郎徒美皃善媚爲仇梨知40)龍陽臣 仍通于娘主而生也 美風彩善玉笛而 出微之故郎徒無奉意 而美室以上寵 號令郎徒 使之隸屬 郎徒不敢多言 美室常以珍寶下賜之物以遺薛原曰 母自有以懷汝郎徒也 薛原乃得數人爲心腹 及爲七世風月主 以美生爲副 乃屈折下士 散財懷人 郎徒咸服之而猶有未洽

美室乃勸原娶毛郞公寡妻俊華娘主 娘主時年三十八 寡居十八年 復得花郞爲夫 遂生子薛雄 於是諸徒賀之曰 魏公之孫 無復有不服之人

原素與美室相通 至是益無忌憚 俊華知之而不能禁 先是俊華女俊毛 因美室得通于銅太子 至是又欲納金太子 薛原沮之曰 事銅太子之事 聖上知之 又納金太子則 上知之則 必不悅于吾夫妻矣 俊華曰 郞君之言善矣 乃命俊毛爲尼 毛不肯 原乃誘以通之 歲餘有娠 俊華知之怒曰 沮納太子而自私之 是何道乎 原乃求乞于美室 美室乃使美生娶之而事平 俊毛乃生薛原女于美生 名美毛 郎徒不知之

時文弩一派從世宗于外 有戰功而不得位 不服於薛原郞 自立一門 於是郎徒遂分 薛派以爲正統在我 而文派以爲淸議在我 互相上下 美室憂之 使世宗和之 不得而 眞興大王崩 美室雖有寵於新主 而未若知道夫人 知道之父起烏公 與文弩爲從兄弟 故知道素服於文弩 乃勸王立文弩爲國仙 以秘宝郞副之

文弩之徒 好武事多俠氣 薛原之徒 善鄕歌好淸遊 故國人指文徒爲護國仙 指薛徒爲雲上人 骨品之人多從薛徒 草澤之人多從文徒 互相磨義爲主

眞智大王以美室之故得立 而好色放蕩 思道太后憂之 乃與美室議廢之 乃使弩里夫公行之 弩里夫公乃思道之兄也 與美室之夫世宗將擧大事 恐文弩之徒不服 以太后命合 兩徒爲一 復奉美室爲源花 世宗爲上仙 文弩爲亞仙 薛原秘宝爲左右奉事花郞 美生爲前方奉事花郞 以鎭之 以此文弩之徒 多以微賤之人 擢爲高官 草澤之人降順之徒 以爲出身之門 而奉文努如神

美室乃知薛原之不及文弩 乃命文弩爲仙道之師 使薛原美生等師事之 薛原之徒多有不平 原曰 寵主之命不可抗也 乃屈膝事之 以此文弩之徒 亦善服於薛原 美室喜之 使讓其位於文弩 文弩曰 國仙不下風月主 且子爲我弟 旣有以師受弟乎 薛原曰 國仙雖是前王所立 非風月正統也 且世宗殿君以王子之貴 尙繼斯多含公 况我奉事師兄以美室宮主之有命故也 今美室宮主 又命讓位 故不敢背也 文弩曰 宮主旣有命 臣亦何敢反乎 乃繼之

花郞之法 後繼者下拜于前主而稱臣 讓位之日 美室與世宗同車而至 薛原備服 捧印簿劒仗 以獻于美室·世宗而 先拜美室 次拜世宗而退立 世宗問於美室曰 文弩於薛原道脉則師 統脉則弟 當何居 美室曰 薛原我之寵臣且正統之兄也 文弩雖師 非正道也 安可不拜乎 世宗乃命薛原坐于美室之側 文弩備服 膝行詣之 先拜美室 次拜世宗 次拜薛原而 俯伏叩頭辭以不(材) 美室乃授印符曰 無忝爾兄 文弩受?○○ ○(宗)乃授簿書曰 無忝爾? ○○○○○○ (薛)原乃授劒仗曰 無忝爾? ○○○○○? (古)者必擇公主之未嫁者爲?○○○印簿 前主授劒仗 至是美室始行(三??)法 自此以後 必下拜于薛原而稱臣

美室聞而喜之 乃謂薛原曰 吾所以使汝先屈者 以有今日也 薛原拜謝曰 臣之一髮一膚無非寵主有也 又何多言乎文弩以國仙爲花郞之首 故曰仙花 弩徒有不平者 謂弩曰 仙花先師而後弟 無乃宮主所賣者乎 弩叱之曰 宮主乃殿君之所奉也 安敢有言乎 以此其徒莫敢復言 盖文弩之志非爲美室 而乃爲世宗也 世宗奉事美室 猶恐不及 故文弩不得不屈也

薛原旣讓位 從美室于永興寺 擇其手徒出入護之 以爲私臣頭上 後加號彌勒仙花 終始于美室者薛原也 終始于世宗者文弩也 盛矣至矣

公以建元十四年生 以建福二十三年七月卒 時美室宮主以奇疾數月不起 公晝宵侍側 夜必禱以身代 竟以其疾代身 美室及起哀之 自以衵服幷葬曰 吾亦不久從汝于天矣 時年五十八

公有五子七女 正宮夫人俊華娘主 生長子雄次子仍皮嫡女淨金娘主而卒 美室宮主命娶開元娘主 生子忠竹善竹 生女開○開川善月良月六人 美室宮主?○○○一宝宗殿君爲公所生蘭?○○○○○○ 雨若公主卽予祖母也 仍(皮)○○○(元曉)之祖也 薛氏於是而大昌 其?○○○于先也



美室之臣 仙花之始 托于佛門 以令其美 盛矣淸名 長在靑史 終始一忠 開天福祉


父薛成公不知所出 其先乃高耶村長虎珍公之後也 不識父 故從母姓也 母有秀色 嘗遊花于南桃 遇一好郎徒 相通而孕 仍相失 公旣長好花郞之戱 日與群兒習于川上 仇梨公過而見之 奇其皃 召而問其居 乃一小民家也

其母以賤服舂麥 足跣手毛 不敢仰視 仇梨公近而慰之 問其所夫則 嗚咽不能成言 淚沾搗杵 良久乃言 妾年十六遊花 逢好郎一接而生此兒 接時 郞以爲當問于父母而成好 但出征則可待三年也 其後待之 不來 父母以爲無信 而欲嫁他人 妾不肯 守信凡十四年 父母亦沒 母子相依而已

仇梨公曰 爾年尙少 何不嫁人而自苦乎 母曰 三十之女去將何去 唯待兒長而已 仇梨公曰 看爾 賤服雖垢 面目秀麗 肌理柔白 非溷中人物 若白玉之在塵堆 還爲可愛 汝之所謂好郞者 其美何如於予乎 母曰 貴人勿弄也 妾之醜安敢當高評 且好郞者 亦不過郎徒之 凡○○○比貴人之萬一乎

仇梨公曰 吾?○○○?好郞 則不必待郞也 吾當○○○○○○?貴 何出戱言乎 妾是何?○○○○○ 好郞則生必來也 而不來已久 ○○○征而死也 妾不待之已久矣

仇梨公? ○今日乃汝吉日也 可作麥飯而來也 母喜曰 賤食不足以奉供 而不敢不如命也 乃同床而盡野菜之味曰 吾婦之饋甚旨矣 遂引而欲幸之 母諫止之曰 妾淨身十四年 鄕中少輩爭欲犯之 而以妾志氣難屈 相戒護之 故以至今日 一朝誤之則 鄕中無賴者當??至 不知明日爲何漢之有 如此則母子絶也 貴人雖不知誰氏 而非敢不愛也 幸憐而赦之仇梨公笑曰 我乃比梁公寵子也 以汝爲妾 誰敢犯汝乎 母乃大驚曰 不意今日有此大慶也 妾不敢多言也 望吾君自好爲之 乃沐浴受幸 仇梨公乃築新室 而封其鄕 〃人榮之 名其鄕曰 大幸

以此薛成公得臣于仇梨公 仇梨公憂其出微 使屬于級干薛優暉之門 以通仕路 擢(?)知

及仇梨公通金珍娘主 薛成公奉命其間 金珍娘主愛其美而密通之 及仇梨公戰卒 仍與之偕 生公 薛成公之母亦生仇梨公庶子三人 豈非天乎

金珍之父乃魏花郞 母曰吾道娘主 吾道之母善兮皇后 父曰妙心郞 乃天柱公子也 色美善色事 多與後宮相通 (善兮皇后)以祝福詣寺 與法約爲三(生)○○○○○○? 妙心伏誅 后以眞骨正統○○○○○以爲祭主 妙心郞之先出于○○○? 南解王之從子後也





7세 (풍월주) 설화랑(薛花郞)은 처음 이름이 설원랑이다.  금진낭주(金珍娘主)의  사자(私子)이다. 그 아버지인 설성은 낭도로서 모습이 아름답고 교태를 잘 부려 구리지(仇梨知)의  용양신(龍陽臣)이 되었다. 인하여 낭주(娘主)와 통(通)하여 (설원랑을) 낳았다. 풍채가 아름답고 옥적(玉笛)을 잘 불었으나 출신이 한미하여 낭도들이 받들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미실이 임금의 총애로서 호령하여 낭도들을 예속시켰다. 낭도들은 감히 여러 말을 못하였다. 미실은 늘 진귀한 하사품을 보내주며 설원에게 말하기를 “너의 낭도를 잘 타일러 보겠다” 하였다. 설원은 이에 몇 명을 얻어  심복으로 삼았다. 7세  풍월주가 됨에 이르러 미생을 부제로 삼고, 아랫사람들에게 몸을 굽히고 재물을 풀어주어 사람을 위로하니 낭도들이 모두 복종하였는데, 오히려 미흡함이 있었다.

  미실은 이에 설원랑에게 권하여  모랑공(毛郞公)의 과처(寡妻)인  준화낭주(俊華娘主)를 아내로 맞도록 하였다. 낭주는 그 때 나이가 38살이었고 과부로 산지 18년이었다. 다시 화랑을 얻어 지아비로 삼아 마침내 아들인  설웅(薛雄)을 낳았다. 이에 여러 낭도들이 축하하여 말하기를 “ 위화랑공(魏花郞公)의 손자이다” 하였다. 다시 불복하는 사람이 없었다.

  설원랑은 평소에 미실과 더불어 상통(相通)하였는데, 이 때에 이르러 더욱 꺼리고 삼가는 것이 없게 되었다. 준화(俊華)가 이를 알았으나 금할 수 없었다. 이에 앞서 준화(俊華)의 딸  준모(俊毛)가 미실을 통하여 동 태자와 통(通)하였다. 이에 이르러 또 금 태자에게 바치려 하였다. 설원이 저지하며 말하기를 “동 태자를 섬긴 일을 성상(聖上)100)이 아는데 또 금 태자에게 바친 것을 알면 반드시 우리 부처를 좋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101) 준화가 말하기를 “낭군의 말이 옳습니다” 하였다. 이에  준모에게 명하여 여승이 되게 하였다.  준모는 따르지 않았다. 설원랑이 꼬여 정을 통하였는데, 1년 정도 지나 임신을 하였다. 준화가 알고 노하여 말하기를 “ 태자에게 바치는 것을 저지하고 자기가 갖는 것은 이 무슨 도리인가” 하였다. 설원랑은 이에 미실에게 구걸하였다. 미실은 미생에게 ( 준모를) 아내로 맞도록 하여 일이 평온하여졌다.  준모는 곧 미생에게 가서  미모(美毛)라고 하는 이름의 설원랑의 딸을 낳았는데, 낭도들은 알지 못하였다.그 때 문노(文弩)의 일파가  세종을 따라 지방에서 전공을 세웠는데 위(位)를 얻지 못하여, 설원랑에게 불복하고 자립하여  일문(一門)을 스스로 세웠다.102) 그리하여 낭도들이 마침내 나뉘었다. 설원랑의 파는 정통이 자기들에게 있다고 하였고, 문노의 파는  청의(淸議)가 자기들에게 있다고 하며 서로 상하를 다투니 미실이 걱정을 하여  세종에게 화합하도록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그런데 진흥대왕이 죽자103) 미실이 비록 새로운 왕( 진지왕)에게 총애를 받았다고는 하나 지도부인(知道夫人)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지도의 아버지인  기오공(起烏公)은 문노(文弩)와  종형제간이었다. 그러므로 본래 지도는 문노를 따랐다. 이에 왕에게 권하여 문노를 국선(國仙)으로104) 삼고  비보랑(秘宝郞)을 부제로 삼았다. 문노의 낭도들은  무사(武事)를 좋아하였고  협기(俠氣)가 많았다.

  설원랑의 낭도들은  향가(鄕歌)를 잘하고  청유(淸遊)를 즐겼다. 그러므로 국인들이 문도(文徒)를 가리켜  호국선(護國仙)이라고 하였고 설도(薛徒)를 가리켜  운상인(雲上人)이라 하였다.  골품(骨品)이 있는 사람들은 설도를 많이 따랐고 초택(草澤)의 사람들은 문도를 많이 따랐다.105) 서로 의(義)를 갈고 닦음을 주로 하였다.

  진지대왕(眞智大王)은 미실(美室) 때문에  왕위에 올랐는데106) 색을 밝혀 방탕하였다. 사도태후(思道太后)가 걱정을 하였다. 이에 미실과 폐위할 것을 의논하였다.107)  노리부공(弩里夫公)108)으로 하여금 행하도록 하였다.  노리부공은 곧 사도(思道)의 형109)이다. 미실의 남편인  세종과 더불어 장차 대사를 일으키려할 때, 문노의 도(徒)가 불복할까 염려하여 태후의 명령으로 두개의 도(徒)를 합쳐 하나로 만들었다.110) 다시 미실을 받들어  원화로 삼고  세종을  상선(上仙), 문노를  아선(亞仙), 설원랑과  비보랑을  좌우봉사화랑(左右奉事花郞), 미생을  전방봉사화랑(前方奉事花郞)으로 삼아 진정시키도록 하였다.111) 이로써 문노의 도(徒)는 미천한 사람으로 높은 관직에 발탁되는 사람이 많았다. 민간(초택)의 사람과 투항하고 귀순한 무리는 출세하는 문으로 삼았기에, 문노를 신과 같이 받들었다.112)미실은 이에 설원랑이 문노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알고 문노를  선도(仙道)의 스승(師)으로 삼는다는 명령을 내리고, 설원랑과 미생 등에게 스승으로 섬기도록 하였다. 설원랑의 도(徒) 중에 불평하는 자가 많았다. 설원이 말하기를 “ 총주(寵主-미실)의 명을 거역할 수 없다” 하고 무릎을 굽혀 섬겼다. 이로써 문노의 도(徒) 또한 설원에게 기꺼이 복종하였다. 미실이 기뻐하며 그 위(位)를 문노에게 물려주도록 하였다. 문노가 말하기를 “ 국선(國仙)은  풍월주(風月主)보다 아래가 아니고 또한 그대는 나의 아우인데, 어찌 스승으로 아우에게서 받을 수 있는가?” 하였다. 설원이 말하기를 “ 국선이 비록 전왕이 설치한 것이지만 풍월의 정통은 아니다. 또  세종 전군(世宗殿君)이  왕자의 귀함으로 오히려  사다함공의 뒤를 이었으니 하물며 내가 사형(師兄-문노)을 받들어 섬긴 것은 미실의 명이 있었던 까닭인데 지금  미실궁주가 다시  양위를 명하는 까닭에 감히 거역할 수 없다” 하였다. 문노는 “궁주(宮主)가 이미 명령했는데, 신(臣) 또한 어찌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 풍월주의 지위를) 이었다.

  화랑의 법에는 후계자가  전주에게 하배(下拜)를 올리고  칭신(稱臣)을 한다.  양위하는 날 미실과 더불어  세종이 수레를 같이 타고 이르렀다. 설원랑이 옷을 갖추어 입고  인부(印簿)와  검장(劒仗)을 받들어 미실· 세종에게 바치고, 미실에게 선배(先拜)하고  세종에게 차배(次拜)를 하고 물러나 섰다.  세종이 미실에게 물어 말하기를 “문노는 설원에게  도맥(道脉)으로는 스승이고  통맥(統脉)은 아우인데 어느 자리에 앉아 마땅한가” 하였다.113) 미실이 말하기를 “설원은 나의 총신이고 또 정통의 형이다. 문노는 비록 스승이나 정도가 아니다. 어찌 절을 하지 않을 것입니까?” 하였다.  세종이 이에 설원에게 명하여 미실의 옆에 앉도록 하였다. 문노가 옷을 갖추고 무릎으로 걸어 나아가서, 미실에게 먼저 절하고, 다음에  세종에게 절하고, 다음에 설원에게 절하고는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고 “자질이 없습니다”고 사양하였다. 미실이 이에  인부(印符)를 주며 말하기를 “네 형을 욕되게 하지 말라” 하였다. 문노가 …을 받았다. ( 세종이)… 이에 부서(簿書)114)를 주며 말하기를 “네 (형)을 욕되게 하지 말라” 하였다. … 설원은 이에  검장(劒仗)을 주며 말하기를 “네 (형)을 욕되게 하지 말라”고 하였다. … 옛날에는 반드시 공주 중 혼인하지 않은 자를 택하여 …을 삼아 …  인부(印簿)를 …하였다.  전주(前主)가  검장(劒仗)을 주었다. 이에 이르러 미실이 (天·地·人의) 삼재지법(三才之法)을 처음으로 행하였다. 이 이후 문노는 설원에게 하배를 하고  칭신을 하였다.

  미실이 듣고 기뻐하며 설원에게 말하기를 “내가 너로 하여금 먼저 굽히게 한 것은 오늘이 있기 때문이다” 하였다. 설원이 절하며 감사드리며 말하기를 “신의 머리카락 하나와 살갗 하나도  총주(寵主)의 소 유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또 어찌 많은 말을 하겠습니까?” 하였다.문노는  국선으로 화랑의 우두머리가 된 까닭에 선화(仙花)115)라 하였다. 문노의 도(徒)에 불평하는 자가 있어 문노에게 일러 말하기를, “선화(仙花)가 먼저 스승(師)이 되었다가 후에 제(弟)가 된 것은 궁주에게 팔아 먹힌 것이 아닙니까?” 하였다. 문노가 꾸짖어 말하기를 “궁주는  전군이 받드는 바이다. 어찌 감히 말이 있을 수 있는가?” 하였다. 이에 그 도(徒)는 감히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대개 문노의 뜻은 미실을 위한 것이 아니고  세종을 위한 것이었다.  세종이 미실을 지극히 받들고 섬기면서도 오히려 모자람이 있을까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문노는 굽히지 않을 수 없었다.

  설원은  양위를 하고 미실을 따라  영흥사(永興寺)로 갔다. (설원은) 거느린 낭도(手徒)를 택하여 미실이 출입하는 것을 호위하며 사신두상(私臣頭上)이 되었다. 후에  미륵선화(彌勒仙花)라는 이름을 더하였다. 미실에게 끝까지 처음과 같이 한 자는 설원이고  세종에게 끝까지 처음과 같이 한 자는 문노였다. 성하고 지극하다.

  공은  건원(建元) 14년(549)에 나서  건복(建福) 23년(606) 7월에 죽었다.116) 그 때  미실궁주가 이상한 병(奇疾)에 걸려 여러 달 동안 일어나지 못하였다. 공이 밤낮으로 옆에서 모셨다. 미실의 병을 자신이 대신하겠다고 밤에는 반드시 기도하였다. 마침내 그 병을 대신하였다. 미실이 일어나서 슬퍼하여 자신의 속옷을 함께 넣어 장사를 지내며, “나도 또한 오래지 않아 그대를 따라 하늘에 갈 것이다” 하였다. 그 때 나이가 58세였다.

  공은 5명의 아들과 7명의 딸이 있었다.  정궁부인(正宮夫人)  준화낭주(俊華娘主)는 장자인 웅(雄),  차자인  잉피(仍皮),  적녀(嫡女)인  정금낭주(淨金娘主)를 낳고 죽었다.  미실궁주가  개원낭주(開元娘主)를 아내로 맞도록 명하여 아들인  충죽(忠竹)과  선죽(善竹)을 낳았고 딸인 개○(開○)와  개천(開川),  선월(善月),  양월(良月) 6명을 낳았다.  미실궁주 …. … 보종 전군(宝宗殿君)은 공의 소생으로 되었다. 난○(蘭○) … .  우야공주(雨若公主)는 곧 나의 조모(祖母)이다.  잉피(仍皮) …  원효(元曉)의 할아버지이다.  설씨(薛氏)는 이 때에 크게 창성하였다.117) … 보다 앞섰다.


미실의 신하이고  선화의 시작이다.  불문에 의탁하여 그 아름다움을 더하였다. 훌륭하도다! 깨끗한 이름은  청사에 길이 남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인 충성은 하늘의 복을 열었다.


아버지는  설성공이며, 그 출신을 알지 못한다. 그 선조는  고야촌장(高耶村長)  호진공(虎珍公)의 후손이다. 아버지를 알지 못하여 어머니의 성을 따랐다(從母姓).118)어머니는 빼어난 미녀로 일찍이  남도(南桃)의  유화(遊花)로 있었는데, 우연히 좋은 낭도를 만나 상통(相通)을 하여 잉태를 하였는데, 그대로 서로 헤어졌다. 공이 자라자, 화랑의 놀이를 좋아하여 매일 냇가에서 아이들과 화랑의 놀이를 익혔다. 구리공(仇梨公)이 지나다가 그것을 보고 그 아이의 생김새를 기특하게 여겨 불러 그 집을 물었더니, 곧 한 작은 민가(民家)119)였다.

  그 어머니는 천복(賤服)을 입고 보리를 찧고 있었다. 맨발을 손으로 가리며 감히 쳐다보지 못하였다. 구리공이 가까이 가서 위로하며 그 남편에 대하여 물었다. 목이 메여 울며 말을 하지 못하고 눈물만 절구공이를 적시었다. 한참 후 말하기를 "첩은 나이 16살에  유화로 좋은 낭도를 만나 한번 관계를 가져 이 아이를 낳았습니다. 관계를 가질 때 그 낭도가 말하기를 부모에게 물어서 결혼을 하는데 다만 출정을 하면 3년을 기다려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후 기다렸으나 오지 않았습니다. 부모들은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내려 하였습니다. 첩은 따르지 않고 무릇 14년 동안 믿음을 지켰습니다. 부모 또한 죽고, 모자가 서로 의지하고 있을 뿐입니다 " 하였다.

  구리공(仇梨公)이 말하기를 "너는 아직 나이가 적은데 어찌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가지 않고 스스로 고생을 하는가? " 하였다. 그 어미가 말하기를 "30살 된 여자가 가면 장차 어디로 가겠습니까? 오직 아이가 자라는 것을 기다릴 뿐입니다 " 하였다. 구리공이 말하기를 "너를 보니 천한 옷은 비록 더럽지만 얼굴이 수려하며 살결이 부드럽고 희니 더러운 곳에 있을 인물이 아니고, 마치 먼지더미에 있는 백옥과 같아서 도리어 사랑할 만하다. 네가 말한 좋은 낭도는 그 아름다움이 나와 비교하여 어떤가? " 하였다. 어미가 말하기를 "귀인께서는 농담하지 마십시오. 첩의 추함이 어찌 감히 높은 평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좋은 낭도라는 사람 역시 낭도에 불과합니다…. 귀인(貴人)과 비교하여 만분의 일이라도 되겠습니까? " 하였다.

  구리공이 말하기를 "나는 … 그 좋은 낭도인즉 그 낭도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내가 마땅히 … " 하였다. … "귀하신 분이 어찌 희언(戱言)을 하십니까? 첩에게 이것이 무엇입니까? 그 낭도가 살았다면 반드시 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지 않은 것이 오래된 것은 …정(征)에서 죽은 것입니다. 첩은 기다리지 않은지 이미 오래 됩니다 " 하였다.

  구리공이 …말하기를 "오늘은 곧 너의 길일이다. 보리밥을 지어올 수 있는가 " 하였다. 어미가 기뻐 말하기를 "천한 음식을 받들어 올리기에 부족하지만 감히 명과 같이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하였다. 이에 한 상에서 야채로 된 음식을 다 먹고 말하기를 "우리 부인(吾婦)의 음식이 심히 맛있다 " 하였다. 마침내 이끌어 사랑을 하려하니, 어미가 간하여 멈추게 하며 말하기를 "첩은 몸을 지킨 지 14년이 되었습니다. 마을의 젊은이들이 범하고자 하였는데 첩의 의지와 기개를 굴복시키기 어려워 서로 경계하여 보호하여 준 까닭에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하루아침에 그것을 그르치면 마을의 무뢰한 자들이 당연히 … 이르면 내일 어떤 놈의 소 유가 될지 모릅니다. 이와 같이 되면 모자는 죽습니다.120)
귀한 분이 비록 어떤 사람인지 모르지만 감히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불쌍히 여겨 용서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 하였다.

  구리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나는 곧  비량공(比梁公)의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를 첩으로 삼는데 감히 누가 너를 범하겠는가? " 하였다. 어미가 크게 놀라 말하기를 "뜻하지 않게 오늘 이같이 큰 경사가 있습니다. 첩은 감히 여러 말을 않겠습니다. 바라건대 우리 어르신 스스로 좋을 대로 하십시오 " 하였다. 곧 목욕을 하고 사랑을 받았다. 구리공은 새로운 집을 짓고 그 향(鄕)을 봉하여 주었다. 향인들이 영광스럽게 여겼는데, 그 향을 "대행(大幸) "이라고 이름 지었다.

  그리하여  설성공은 구리공의 신하의 지위를 얻었다. 구리공은 그 출신이 한미한 것을 염려하여  급간 설우휘(薛優暉)의 문하에 소속시켜, 벼슬길을 열고 지( 知)121)로 발탁하였다. 구리공이  금진낭주와 통(通)하게 되자,  설성공은 그 사이에서 명을 받들었다.  금진낭주가 그 아름다움을 사랑하여 몰래 통하였다. 구리공이 전쟁에서 죽자, 곧 더불어 함께 살아 공을 낳았다.  설성공의 어머니 또한 구리공의  서자 3인을 낳았다.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금진의 아버지는  위화랑(魏花郞)이고 어머니는  오도낭주(吾道娘主)이다. 오도의 어머니는  선혜황후(善兮皇后)이고, 아버지는  묘심랑(妙心郞)인데 곧  천주공(天柱公)의 아들이다. 얼굴이 아름답고  색사(色事)122)를 잘하여 후궁들과 더불어 상통(相通)을 많이 하였다.  선혜황후가 복을 빌러 절을 찾아 법에 따라 약속하여 … 삼생(三生) … .  묘심(妙心)이  복주(伏誅)123)되었다. (선혜황)후는  진골정통으로 …. …  제주(祭主)로 삼았다.  묘심랑이 …보다 먼저 나오고 …. 남해왕의  종자(從子)124)의 후손이다.




100) 임금의 존칭이다.

101) 이는 신라시대에 남녀관계가 난잡한 것만이 아니라 일정한 기준이 있었던 것을 보여준다.

102) 화랑도에 파가 갈리는 장면이다.

103) 붕(崩)으로 나오고 있다.

104) 풍월주가 아닌 국선의 임명을 왕이 한 것을 볼 수 있다.

105) 화랑도에 파가 갈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106) 진지왕의 어머니인 사도(思道)가 대원신통이었기에 진지 역시 대원신통이었다. 미실도 그의 어머니인 묘도가 대원신통이었기에 진지왕과 같이 대원신통이었다. 그에 비하여 진평은 진골정통인 만호의 아들로 어머니의 계통을 이었다. 진지왕과 진평왕은 각기 대원신통과 진골정통으로 계통을 달리하였다.

107) 진지왕의 폐위는 진골정통과 대원신통의 문제가 아니라 왕으로서의 정당성을 가지지 못한 때문에 폐위된 것을 알 수 있다.

108) 『삼국사기』 4, 신라본기 4 진평왕 원년(579) 8월조에는 이찬 노리부를 상대등으로 삼은 것으로 나오고 있다. 『화랑세기』를 통하여 노리부가 진지왕의 폐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기에 상대등이 된 것을 알 수 있다.

109) 실제는 노리부공이 사도의 오빠다. 신라인들은 오빠를 형으로 부룬 것을 알 수 있다.

110) 당시 왕의 폐위에 화랑도가 개입된 것을 알 수 있다.

111) 화랑도가 원화, 상선, 아선, 좌우봉사화랑, 전방봉사화랑 등의 조직을 갖추게 된 것을 볼 수 있다.

112) 일반 백성들도 낭도가 되어 활동을 하면 관등을 부여받고 관직을 갖게된 것을 보여준다.

113) 도맥(道 )은 선도(仙道)의 맥을 뜻하고 통맥(統 )은 진골정통과 대원신통의 인통(姻統)을 뜻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114) 관청의 출납전, 관청의 문서를 의미한다.

115) 국선화랑을 의미한다.

116) 졸(卒)이라고 나오고 있다.

117) 잉피, 원효로 이어지는 설씨집안은 어머니의 성을 따라 설씨 성을 사용한 것으로 원래의 설씨집단과는 그 계통이 달랐던 것으로 신라인들이 인식한 것을 생각할 수 있다.


118) 신라사회는 부계제 사회이기에 대부분의 경우 아버지를 알기에 아버지의 성을 따르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아버지를 모를 때 이와 같이 종모성(從母姓)할 수도 있다. 7세 풍월주 설화랑의 세계에 나오고 있는 것과 같이 설성이 구리공에 의하여 출세의 길이 열렸던 것을 볼 수 있다.

119) 소민가는 신분적으로 평인 백성에 해당하는 사람의 집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

120) 絶은 관계가 끊어진다고 할 수도 있으나 죽는다는 것이 더 그럴듯하다.

121) 오지(烏知) 또는 사지(舍知)일 것이다. 사지일 가능성이 있다.

122) 남녀가 육체적인 교접을 하는 일을 의미한다.

123) 형벌에 복종하여 죽는 것을 의미한다.

124) 姨從, 조카, 형제의 아들을 의미한다.


七世 薛花郞 (7세 설화랑)

 

 

 

 

八世文弩者 比助夫公子也 母曰 加耶國文華公主也 或曰 文華公主者 野國王貢女也 好助公記作北國王女 而文弩自言以加耶爲外祖則 北國者 盖加耶之北國也 法興大帝分加耶爲南北 以異腦爲北國王 妻以兩花公主 以靑明爲南國王 未幾異腦之叔贊失 逐異腦而自立 時好助公使加耶責之 先是贊失爲野王婿 文華公主想必贊失之女也 初爲好助公妾 與比助夫公潛通而生公也

公自幼善擊劒好義氣 及加耶反 斯多含請同行 弩曰 安有以母之子困其外祖之民者乎 遂不行 國人有非之者 斯多含曰 吾師義人也 及入加耶 戒妄殺以報其意 及世宗繼之 以其徒屬焉

先是好助公善加耶事 多往使 比助公亦繼之 以功尙靑華公主女靑珍公主 有寵于法興帝 擢居要地 勢與七寵臣相上下 比助公善於覘勢 密附英失公 臣事之 建元二年帝將以英失公爲副君以讓之 恐有不順者 乃以比助公爲兵部令統兵 寵臣多有不肯者 事不成 只召太后執政 斥比助公不用 比助公乃與英失公退處○○○圍碁之屬 消其鬱懷

公自以爲?○○○○○? 乃聚加耶派一徒 以成○○○○○○者斥以非之

玉珍宮主憂之○○○○花郞保之 二花公乃以公爲斯多含之師 使郎徒敬事之 只召太后怪而問之 二花公曰 天子尙有不臣之臣 况仙徒耿介淸高 不可一律制之 是臣之別派遊軍也

開國四年 公以十七歲 從武力伐百濟 有功不報 不以爲意 五年出北漢伐高句麗 七年出國原又伐北加羅 皆有功不報 下有不平者則 慰之曰 夫賞罰者 乃小人之事也 爾等旣以我爲首 而何不以我心爲心乎

世宗及爲六世 親至于宅曰 吾不敢以君爲臣 請爲吾兄以輔我 辭甚懇切 公乃屈事之 世宗乃上言于帝曰 比助夫之子文弩 征麗濟累有功而 以母之故不能顯 爲國家可惜之事也 帝乃賜以級湌之位 不受

徒有金闡者 爲白雲·際厚私自戮人 朝廷將罪之 世宗公曰 出於義理可賞而不可罰 乃賜爵以褒之 以此公徒大敀于世宗公

思道皇后亦聞名暗助之 引以爲援 世宗公出征 從于北漢山 累敗麗兵 美室宮主欲招爲奉事 不肯之 眞智之立 智道皇后用事 擢拜一吉湌 不受

世宗受思道密詔 將廢眞智 召公問曰 ??上有擢用之恩 且與皇后爲至親○○○?詔 如之何則可乎 公曰 臣以○○○○○○命而已 安敢顧私情乎 及眞智之廢 以功進阿湌 始寵于美室 乃得仙花之位 卽八世風月主也

公好勇能文 愛下如己 不拘淸濁 敀之者盡懷之 故名聲大振 郎徒相勵願以死效 士風以是起秀 統一大業未嘗不萌于公也

公之時署郎徒部曲 以左右奉事郞爲左右大花郞 前方奉事郞爲前方大花郞 各率三部郎徒 又置眞骨花郞·貴方花郞·貴門花郞·別方花郞·別門花郞 以十二三歲俊傑之眞骨及大族巨門之子弟願敀者爲之 置左花郞二人 右花郞二人 各率小花郞三人 妙花郞七人 左三部掌道義·文事·武事 右三部掌玄妙·樂事·藝事 前三部掌遊花·祭事·供事 於是制度燦然備矣居三年 傳于秘宝郞 公久未娶 及爲國仙 奉允宮娘主爲內援 允宮者荒宗公女也 其母乃未珍夫公之胞妹 故與美室宮主爲從兄弟 同事銅輪太子 生女允實公主 寡居五年 鴻濟五年十月 公以知道皇后命爲國仙 奉允宮爲仙母

先是公侍世宗公出征而敀 世宗公憂公無娶 美室曰 吾妹允宮可合此人 而恨位卑也 允宮聞之曰 其人可則何論位品乎 公亦聞而悅之 公副弟秘宝郞亦與允宮爲從兄弟 乃爲公力勸允宮以公爲繼(夫) ○○○ 吾雖有意 奈五不義何 秘宝○○○○○○ 文弩位卑 故與允實絶子○○○○○○ 我之心充四節 而位卑則絶○○○○ 眞宗殿君寵我于三代榮席 今老?無可寵 累使人邀我 拒以貞君而他去三也 父君以宰相之貴 欲嫁我于好貴者 而拒之 而他去四也 金太子欲繼兄君之寵 而拒之 而他去五也 解此五者 吾往文弩也

秘宝敀語于公 公曰 娘主之言是也 吾其待矣 至是眞宗已薨 四節之義絶焉 公將大用 允宮意頗傾焉 乃與公相見于美室之宮 公曰 非吾娘主則無仙母也 不可就國仙 允宮曰 妾慕君久矣 腸已斷矣 雖骨塗而可爲 况仙母之貴乎 公喜曰 人謂我國仙爲榮 吾自有仙母榮也 允宮乃許身于公 生三子三女 曰大剛充剛金剛也

允宮外雖仙母 內實爲婦 力輔公事 公素不合于美室 允宮諫之曰 君臣于世宗殿君 而反于美室宮主非也 殿君以宮主爲命 如君以我爲命也 君之徒若是君而非我則 君以爲何如 公曰 仙母無宮主之過 徒豈非之乎 允宮乃力護美室之過曰 人皆有長短且過失者 勢有所不得已也 君長在矢石之中 唯以鐵腸爲法 無妻子之樂 不通世故也 吾今孕君之子 君一向墨守 而逆于權門 此腹之子 將置何地 ○○○?兒好父而從我也

公吁然曰 ?○○○○○志氣奉母 母以世故護我者○○○○○孫者私也 情私行則義理藏○○○散 雖然吾母許臣之義 可以誓死 寧??衆 不可逆母也 吾其情私乎 允宮笑曰 非情則 君與我安可以色事相犯乎 夫義出於情 而情出于志 三者未嘗相反也 故曰 大情爲義 大私爲公 若不私于衆 則無以收也 君何嘗無私乎 與君同枕之夜 吾夢大鐵牛 必生虎子也 以君之英雄 豈可無好種乎 大衆亦人之子也 重人之子而不重垂愛之子 非義也 損己而好名 亦出乎私也 君與我相愛者 情之純也 衆之倚君 情之錯也 請爲吾兒好父而從我也

公大覺曰 母眞聖人也 臣幾愚矣 於是情益濃焉 公乃屈事美室 許與薛原

果生大剛 后至宰相 充剛亦至高位 金剛最貴 位極人臣 玄剛信剛皆嫁貴門榮貴 允宮之言果驗矣

公旣生大剛 益感情私之眞 每事輒問于允宮而行之 或有非之者曰 無初年氣象 公聞而笑之 吾亦嘗短殿君之聽順於宮主也 吾自當之而知之也 爾等亦宜自當而知之 不以爲意

公之參于廢立之功 及爲仙花 皆允宮多有內助 位至阿湌始得骨品 允宮喜曰 以君爲夫之日近矣 美室果請于帝 詔以允宮爲公正妻 眞平大王與世宗殿君親臨鮑石祠 大?○○○○○而喜曰 今日始得爲郞君 ?○○○○○之貴 安可當此慶乎 允宮曰 妾身○此有同骨之主 當有取敀 昨日以前郞君爲妾之臣 故多從于妾 今日以後妾爲郞君之妻 當從郞君之命矣 遂不敢復爭于公 務從公命 節儉撫衆 手自縫衣以給郎徒 公患瘇 吮而治之

公以風月之主 無一遊花之染 居家雍容 若鴡鳩鴛鴦 及讓位 公與允宮常同車出野外 逍遙而敀 公素不飮酒 允宮嘗謂公曰 妾聞英雄好酒色 郞君無酒節色 妾竊恥之 公笑曰 好色則君可妬也 好酒則君多事也 允宮曰 丈夫當自好也 安可以一女子爲念乎 枕妾則可代妾勞 可喜不可妬也 爲夫多事 妻之榮也 請行之 公乃小飮 有枕妾一人 而未嘗亂焉

少時極方正嚴密 自以允宮爲妻 變作好〃人 〃皆以爲婦人之化男子若是 雖然世稱夫婦 必擧公夫妻曰 擇夫當如文仙花 娶妻當如允娘主

畵像于鮑石祠 庾信統合三韓 以公爲士氣之宗主 追贈角干 行大祭于神宮仙壇 盛矣至矣

公以建福二十三年卒 壽六十九 娘主亦以是年從公上仙 少公十歲




加耶外孫 義氣之宗 以仙爲花 振我國風

父曰比助夫 祖曰好助 曾祖曰比知 好助之母乃登欣公之妹助里也 亦爲?○○○○○善兮皇后 以妙心事 廢居?○○○○○監相通而生比助夫及兩花公主 比助夫亦通好助公之妾文華而生公 文華公主北國王女也 一云野國王女 史失其世系




8세 (풍월주) 문노(文弩)비조부공(比助夫公)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가야국(加耶國) 문화공주(文華公主)다.

혹은 문화공주야국왕(野國王)이 조공한 여자(貢女)라고 한다.125)

  『호조공기(好助公記)』에는 ‘북국왕녀(北國王女)’라고 되어 있는데, 문노는 스스로 가야가 외조라고

말하였으니,  북국은 가야의 북국일 것이다.  

법흥대제가 가야를 나누어 남·북으로 하였는데,126) 이뇌(異腦)를 북국왕(北國王)으로 삼고 양화공주(兩花公主)를 처로 삼게 하고, 청명(靑明)을 남국왕(南國王)으로 삼았다.

얼마 되지 않아 이뇌의 숙부인 찬실(贊失)이 이뇌를 내쫓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그 때 호조공(好助公)이 가야에 사신으로 가서 책망하였다.

 이보다 앞서 찬실야국왕의 사위가 되었는데, 문화공주는 생각하건대 틀림없이 찬실의 딸일 것이다.

처음 호조공의 첩이 되었는데,  비조부공과 더불어 몰래 통하여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격검(擊劍)을 잘 하였고 의기(義氣)를 좋아하였다.

가야가 반기를 들자,  사다함이 동행을 청하였다.

문노가 말하기를 “어찌 어미의 아들로서 외조(外祖)의 백성들을 괴롭히겠는가?” 하였다.

마침내 가지 않았다. 나라 사람 중에 비난하는 자가 있자,  사다함이 “나의 스승은 의인(義人)이다” 하였다.

가야에 들어가자 함부로 죽이지 말도록 주의를 주어 그 뜻에 보답하였다.

세종이 (풍월주의 지위를) 잇자, 그 낭도가 그에게 속하였다.

  앞서 호조공이 가야의 일을 잘하여 자주 사신으로 갔다. 비조공(比助公) 역시 (그 뒤를) 이었는데,

공을 세워 청화공주(靑華公主)의 딸인 청진공주(靑珍公主)에게 장가들었다.  

청진공주법흥제의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비조공은 요직에 발탁되었다.

그 권세가 일곱 총신과 더불어 막상막하였다.

비조공은 형세를 잘 엿보아 몰래 영실공(英失公)을 따랐으며 신하로서 섬겼다.  

건원(建元)127) 2년(537) 제(帝)가 장차 영실공부군(副君)으로 삼아 왕위를 넘겨주려 하였는데,

따르지 않는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여 비조공(比助公)을 병부령(兵部令)으로 삼아 군대를 통솔하게 하였다.

총신 중에 옳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지소태후가 정권을 장악하자 비조공을 물리치고 등용하지 않았다.

비조공은 이에 영실공과 더불어 물러나 머무는 곳에서…바둑 따위를 두며 답답한 마음을 달랬다.

  (문노)공은 스스로 …이 되어 가야파 일도(一徒)를 모아 …을 이루었다. … 자가 배척하고 비난하였다.
 옥진궁주가 …을 근심하여 …화랑에게 보호하게 하였다.

 이화공이 공을  사다함의 스승으로 삼고 낭도로 하여금 공경하여 받들도록 하였다.  

지소태후가 이상하게 여겨 물으니,

이화공이 “천자에게도 오히려 신하 노릇을 하지 않는 신하가 있는데,128) 하물며 선도는 지조가 굳고

인격이 결백하고 기품이 높으니 한 가지 법으로 규제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신의  별파유군(別派遊軍)129)입니다” 하였다.

 개국(開國) 4년(554) 공이 17세에 무력을 따라  백제를 쳤다.

공이 있었는데 보답을 받지 못하였으나 개의치 않았다. 5년(555) 북한(北漢)에서 나가 고구려를 쳤다.

7년 국원에서 나갔고, 또 북가야를 쳤다. 모두 공이 있었으나, 보답을 받지 못하였다.

부하 중 불평하는 자가 있으면, 위로하여 말하기를 “대저 상벌이라는 것은 소인의 일이다.

그대들은 이미 나를 우두머리로 삼았는데 어찌 나의 마음으로 그대들의 마음을 삼지 않는가?” 하였다.

  세종이 6세 (풍월주)가 되자, 친히 집으로 찾아와 말하기를 “나는 감히 그대를 신하로 삼을 수 없소.

청컨대 나의 형이 되어 나를 도와 주시요” 하였다. 말이 심히 간절하여, 공이 이에 굽혀 섬겼다.  

세종은 이에 (진흥)제에게 말씀을 드려 이르기를 “비조부의 아들 문노는 고구려백제를 치는데

여러번 공이 있었으나 어미로 인하여 영달하지 못하였으니,130) 나라를 위하여 아까운 일입니다” 하였다.

(진흥)제가 이에 급찬(級湌)의 위(位)를 내렸는데, 받지 않았다.

  낭도 중에 금천(金闡)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백운(白雲)과 제후(際厚)를 위하여 사사로이 사람을 죽였다.

조정에서 벌주려 하였다.  

세종공이 말하기를 “의리 때문에 일어난 일이니 상은 가하나 벌은 불가하다” 하였다.

이에 작(爵)을 주어 기렸다.

이로써 공의 낭도들이 많이 세종공에게 귀의하였다.

사도황후 역시 이름을 듣고 몰래 도우며, 이끌어 자기편으로 삼았다. 

  세종공이 출정하자, 북한산에 따라가 고구려 병을 여러 차례 무찔렀다.

미실궁주가 불러서 봉사(奉事)로 삼으려 하였으나, 승락하지 않았다.

진지(眞智)가 즉위하자 지도황후가 일을 꾸미고 발탁하여 일길찬(一吉湌)을 내렸으나, 받지 않았다.

  세종이 사도의 밀조를 받고 장차 진지를 폐위시키려 하며 공을 불러 묻기를

“… 위로는 발탁하여 등용한 은혜가 있고, 또한 황후와 더불어 근친이 되어

 … 조(詔)를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신은 … 명(命)으로 …할뿐입니다.

 어찌 감히 사사로운 정을 돌아보겠습니까” 하였다.

  진지가 폐위됨에 이르러, 공으로 아찬(阿湌)으로 진급했고,

비로소 미실(美室)에게 총애를 받아 선화(仙花)의 위(位)를 얻게 되니 곧 8세 풍월주였다.

  공은 용맹을 좋아하고 문장에 능하였으며, 아랫사람을 사랑하기를 자기를 사랑하는 것처럼 했으며,

청탁에 구애되지 않고, 자기에게 귀의하는 자는 모두 어루만져 주었다.

그러므로 명성이 크게 떨쳤고, 낭도들이 죽음으로써 충성을 바치기를 원했다.

사풍(士風)이 이로써 일어나 꽃피었다.  

통일대업이 공으로부터 싹트지 않음이 없었다.131)

  공의 때에 낭도의 부곡(部曲)을 두었다.  

좌우봉사랑(左右奉事郞)을 좌우대화랑(左右大花郞)으로 만들고, 전방봉사랑(前方奉事郞)을

전방대화랑(前方大花郞)으로 만들어서 각기 3부(部)의 낭도를 거느리게 하였다.

진골화랑(眞骨花郞), 귀방화랑(貴方花郞), 별방화랑(別方花郞), 별문화랑(別門花郞)을 두었고,

12·3 살의 빼어난 진골(眞骨)132) 및 대족(大族)133)의 자제로서 속하기를 원하는 자로써 이를 삼았다.

좌화랑(左花郞) 2인, 우화랑(右花郞) 2인을 두었으며 각기 소화랑(小花郞) 3인, 묘화랑(妙花郞) 7인을 거느렸다.

좌삼부(左三部)는 도의(道義)·문사(文事)·무사(武事)를 맡았고, 우삼부(右三部)는 현묘(玄妙)·악사(樂事)·

예사(藝事)를 맡았고, 전삼부(前三部)는 유화(遊花)·제사(祭事)·공사(供事)를 맡았다.

이에 제도가 찬연히 갖추어졌다.

  3년간 재위하고 비보랑에게 전하였다.

공은 오랜 동안 아내를 맞지 않았다.  

국선(國仙)이 됨에 이르러 윤궁낭주를 받들어 내원(內援)134)으로 삼았다.

윤궁황종공의 딸이다. 그 어미는 곧 미진부공의 친누이였으니, 미실궁주와는 종형제간이 되었다.

함께 동륜태자를 섬겨 윤실공주를 낳았다. 과부로 5년을 살았다.

홍제(鴻濟) 5년(576) 10월 공이 지도황후의 명으로 국이 되고, 윤궁을 받들어 선모(仙母)로 삼았다.

이에 앞서 공이 세종공을 모시고 출정하였다 돌아 왔다.

세종공은 공이 아내를 맞지 않은 것을 근심하였다.

 미실이 말하기를 “나의 동생인 윤궁이 이 사람에게 어울리는데, 지위가 낮은 것이 걱정이다” 하였다.

윤궁이 듣고 말하기를 “그 사람이 좋다면 어찌 위품(位品)135)을 논하겠는가?” 하였다.

공 또한 듣고 기뻐하였다.

공의 부제 비보랑 또한 윤궁종형제였는데, 공을 위하여 공을 계부(繼夫)로 맞이하도록 힘써 윤궁에게

권하였다.

  … “내가 비록 뜻이 있으나 다섯 가지 의롭지 못한 것이 있으니 어찌할 것인가?” 비보(랑)…136).

 “문노는 위가 낮다. 그러므로  윤실과 더불어 자식의 관계를 끊는 것이 첫 번째 불의다.

나의 마음은 사철 내내 만족하지만, 위가 낮은즉 …를 끊어야 하는 것이 두 번째 불의다.  

진종전군이 삼대의 영석(榮席)에서 나를 총애하는데, 지금 늙어 … 사랑할 만한 것이 없으나,

누차 사람을 시켜 나를 부르는데, 정군(貞君)137)을 거절하고 다른 데로 가는 것이 세 번째 불의다.

아버지가 재상의 귀함으로 나를 좋고 귀한 사람에게 시집보내려는데, 거부하고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

네 번째 불의다.

금 태자가 형군(동륜태자)의 총애를 이으려는데 거부하고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 다섯 번째 불의다.

이 다섯 가지가 풀리면 나는 문노에게 갈 것이다” 하였다.

  비보가 돌아와 공에게 말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 낭주의 말이 옳다. 나는 기다릴 것이다” 하였다.

이 때에 진종(眞宗)이 이미 세상을 떠났고, 네 가지 의(義)138)의 문제도 사라졌다.

공이 장차 크게 기용되려하자  윤궁의 뜻이 자못 기울었다.

 이에 공과 더불어 미실의 궁에서 서로 보았다.

공이 말하기를 “우리 낭주가 아니면 선모(仙母)는 없으니, 내가  국선에 나아가지 못합니다” 하였다.

(그러자) 윤궁이 말하기를 “내가 군(君)을 그리워한지 오래되어 창자가 이미 끊어졌습니다.

비록 골을 더럽힌다고 해도 할 수 있는데, 하물며 선모의 귀함입니까” 하였다.

공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사람들이 나에게  국선이 영예롭다고 하나, 나는 스스로  선모의 영예를 가집니다” 하였다.  

윤궁은 이에 공에게 몸을 허락하여 3자·3녀를 낳았다.

대강(大綱)·충강(充剛)·금강(金剛)이라 하였다.

 윤궁은 밖으로는 비록 仙母였으나, 안으로는 실제로 부인이 되어 공의 일을 힘써 도왔다.

공이 평소에 미실과 맞지 않았다.

윤궁이 간하여 말하기를 “군(君)은 세종전군의 신(臣)인데 미실궁주를 반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전군(殿君)이 궁주(宮主)를 자기 목숨처럼 여기는 것은 군(君)이 나를 목숨처럼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군(君)의 낭도가 만약 군을 따르고 나를 그르다고 하면 군은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선모는 궁주와 같이 잘못이 없으니 낭도들이 어찌 비난하겠습니까?” 하였다.  

윤궁은 이에 힘써 미실의 잘못을 감싸며 말하기를

“사람이 모두 장단과 과실이 있는 것은 형세가 부득이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군(君)이 오랫동안 전쟁터(矢石)에 있어서 오직 철석같이 매우 굳은 정신만을 법으로 삼고 처자의 즐거움이

없는 것은 세상과 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 군의 아들을 가졌는데, 군(君)이 한마음으로 뜻을 굳게 지키고 권문에 거스른다면 이 뱃속의 아이는

장차 어떤 처지에 있겠습니까?. … 아이의 좋은 아버지로서 나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하였다.

공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 의지와 기개로 선모를 받드는데, 선모는 세상일로 나를 감싸는 것 … 손은

사사로움입니다.

정이 사사로이 행해지게 되면 의리가 감추어지게 되고 …은 흩어집니다.

그렇지만 나의  선모가 신(臣)에게 허락한 뜻은 가히 죽음으로써 맹세한 것입니다.

차라리 …무리를 … 할지언정  선모를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내가 사사로운 인정에 끌려야 하겠소?” 하였다.  

윤궁은 웃으며 말하기를

“정이 아니면 군(君)과 내가 어찌  색사(色事)로서 서로 범할 수 있겠습니까.

무릇 의(義)는 정(情)에서 나오고, 정은 지(志)에서 나오니, 세 가지는 서로 반대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큰 정(大情)은 의가 되고 큰 사사로움(大私)은 공(公)이 된다고 했습니다.

만약 무리에게 사사롭지 않으면 무리를 거둘 방법이 없습니다.

군(君)은 어찌 일찍이 사사로움이 없겠습니까?

 군과 더불어 동침한 밤에 나는 대철우(大鐵牛) 꿈을 꾸었는데, 반드시 호랑이 새끼를 낳을 것입니다.

그대의 영웅스러움으로써 어찌 좋은 씨앗이 없으면 되겠습니까?

 대중 또한 사람의 자식입니다.

 남의 자식은 소중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아들에게 중하게 여김이 미치지 않는 것은 의가 아닙니다.

자기를 손상시켜 명예를 좋아하는 것은 역시 사사로움에서 나옵니다.

군과 더불어 내가 서로 사랑하는 것은 정의 순수함입니다.

무리들이 군(君)에게 의지하는 것은 정이 얽힌 것입니다.

청컨대 내 아이의 좋은 아버지가 되어 나의 말을 들어주십시오” 하였다.

 공이 크게 깨달아서 말하기를

“ 선모는 진실로 성인입니다. 신은 자못 어리석을 뿐입니다” 하였다.

이에 정이 더욱 무르익었다.

공은 이에 굽혀 미실을 섬기고 설원을 받아드려 주었다.

 과연 대강을 낳았는데 후에 재상에 이르렀다.

충강 역시 높은 지위에 이르렀다.

금강은 가장 귀하게 되어 백성과 신하로서는 가장 높은 지위에 올랐다.139)

(윤강(允剛))·현강(玄剛)· 신강(信剛)은 모두 귀한 집안에 시집가서 영화롭고 귀하게 되었다.

윤궁의 말이 과연 들어맞았다.

공은 대강을 낳고 나서 사사로운 정의 진실 됨을 더욱 크게 느끼고, 모든 일을 번번이 윤궁에게 물어서 행하였다. 혹 옳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 있어 말하기를

 “초년의 기상이 없어졌다” 하였다. 공이 듣고 웃으며, “나도 지난날 (세종)전군궁주의 말을 듣고

따르는 것을 보고 흉을 보았는데, 내가 스스로 그렇게 되고 보니 알겠구나.

너희들 또한 스스로 당하면 알 것이다” 하고 마음에 두지 않았다.

  공이 (진지왕을) 폐립하는데 참여한 공으로 선화(仙花)가 되기에 이르렀다.

모두 윤궁의 내조가 많았다.

 관위(位)가  아찬(阿湌)에 이르러 비로소 골품을 얻었다.140)  

윤궁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그대가 지아비가 될 날이 멀지 않습니다” 하였다.

미실이 과연 (진평)제(帝)에게 청하자,

 조(詔)를 내려 윤궁을 공의 정처(正妻)로 삼도록 하였다.

진평대왕과 세종전군이 친히  포석사(鮑石祠)에 나아가 크게 …,

그리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오늘 비로소 낭군이 되었으니 …의 귀함이 어찌 가히 이 경사에 미치겠습니까?” 하였다.  

윤궁이 말하기를

 “첩의 몸은 … 이에 같은 골의 남편을 갖게 되었으니, 붙좇아야 합니다.

어제 이전에 낭군(郎君)은 첩의 신(臣)이었으므로 첩을 따르는 것이 많았으나,

오늘 이후 첩은 낭군의 처로서 마땅히 낭군의 명을 따라야 합니다” 하였다.

마침내 감히 다시 공과 다투지 않고 공의 명령을 힘써 따랐다.

검소하고 무리를 사랑하여, 손으로 직접 옷을 만들어 낭도에게 주었다.

공이 종양을 앓았는데 입으로 빨아서 낳게 하였다.

  공은 풍월주로서 유화(遊花)로 인하여 더럽혀진 일이 한번도 없었다.

집에 있으며 마음이 화락하고 조용한 모습이 마치 물수리와 원앙 같았다.

양위함에 이르러 공은 윤궁과 더불어 늘 수레를 같이 타고 야외로 나가 노닐고 돌아왔다.

 공은 본디 술을 마시지 않았다.  

윤궁이 일찍이 공에게 말하기를

“첩이 듣건대 영웅은 주색을 좋아한다고 하는데 낭군은 술을 안 마시고 색을 절제하니

첩이 속으로는 부끄러워합니다” 하였다.

공이 웃으며

“색을 좋아하면 그대가 질투를 할 것이며 술을 좋아하면 그대의 일이 많아질 것이다” 하였다.

윤궁이 “장부는 마땅히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해야지, 어찌 한 여자를 염두에 두겠습니까?

잠자리를 모시는 첩이 있으면 저의 일을 대신하게 되니, 기쁜 일이지 투기할 일이 아닙니다.

지아비를 위하여 일이 많은 것은 처의 영광입니다. 행하기를 청합니다” 하였다.

공은 이에 술을 조금씩 마시고 한 명의 침첩(枕妾)을 두었으나, 난잡한 적이 없었다.

(문노는) 젊어서 지극히 방정하고 빈틈이 없었는데, 윤궁을 처로 맞이한 후로 시비를 가리기보다는

화목함을 더 좋아하는 사람으로 변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부인이 남자를 이렇게 변화시켰다고 생각하였다.

그렇지만 세상에서 부부를 말할 때는 반드시 공의 부처를 들며 말하기를,

“지아비를 택하는 데는 마땅히 문선화와 같아야 하고, 처를 얻는 데는 마땅히 윤랑주와 같아야 한다” 하였다.

  포석사(鮑石祠)141)에 화상을 모셨다. 유신이 삼한을 통합하고 나서 공을 사기의 으뜸(宗主)으로 삼았다.

각간(角干)으로  추증(追贈)하고,142)  신궁(神宮)의  선단(仙壇)143)에서 대제를 행하였다.144)

성대하고 지극하도다!

공은  건복(建福) 23년(606)에 세상을 떠났으며, 나이가 69세였다.

낭주는 이해에 공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선(仙)이 되었다.

공보다 10살이 적었다.145)


아버지는 비조부(比助夫)이고, 할아버지는 호조(好助)이며, 증조는 비지(比知)이다.  

호조의 어머니는 곧 등흔공(登欣公)의 누이인 조리(助里)이다.

또한 …이 되다.  

선혜황후묘심의 일로 폐하여 살게 되고 …. …감과 상통하여 비조부양화공주를 낳았다.  

비조부 또한 호조공의 첩인 문화공주(文華公主)와 통하여 공을 낳았다.  

문화공주북국왕(北國王)의 딸이다.

또는 야국왕(野國王)의 딸이라고 한다.

역사기록에 그 세계가 없다.



125) 문노의 어머니의 계통일 가능성 중의 하나인 야국왕의 공녀라는 설은 당시의 국제관계를 밝혀주는 단서가 된다. 야국왕이 왜왕이라고 하면 왜국에서 신라에 왕녀를 공녀(貢女)로 바친 것이 되고 그와 같은 공녀를 신하의 첩으로 삼도록 한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신라와 왜국과의 관계의 한 단면을 말해주는 것이 틀림없다. 설령 문노의 어머니가 야국왕의 왕녀인 공녀가 아니더라도 그와 같은 관계를 하나의 가능성으로 밝힌 것은 당시 신라인들이 신라와 왜 사이에 실제로 있었던 관계를 밝힌 것이 틀림없다. 왜국은 왕녀를 신라에 공녀로 바치던 관계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126) 당시 신라의 세력은 가야 소국들을 남북으로 나눌 수 있는 정도였던 것을 잘 보여준다.

127) 建福 2년(585)이 되면 시간적으로 너무 늦다. 따라서 건복 2년은 建元 2년(537) 법흥왕 24년이 타당하다.

128) 불신지신(不臣之臣)은 신하로 여기지 않는 신하를 의미한다. 사다함이 문노를 생각하는 모습이 흥미롭다.

129) 일정한 소속없이 필요에 따라 아군을 지원하고 적군을 공격하는 군대 또는 일정한 부서를 맡지 못하고 대기하고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130) 골품제 사회에서 모계가 가지는 의미를 읽을 수 있다.

131) 3국통일의 대업이 문노의 화랑도가 가지고 있던 사풍(士風)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은 비록 『화랑세기』에는 화랑도의 활동으로 그와 같은 내용이 구체적으로는 나타나 있지 않으나 화랑도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132) 골품제 신분의 진골신분을 가리킨다.

133) 진골과 같은 신분은 아니지만 세력을 갖고 있고 문노와 같이 아찬 이상의 관등을 갖게 되면 골품을 얻어 진골로 될 수 있는 세력을 가리킨다.

134) 처를 의미한다. 처음에 윤궁은 신분이 높아 문노를 도와주는 위치에 있었다.135) 신분을 논하지 않고 위품을 논한 것은 일정한 위품을 갖게 되면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헤아려진다. 특히 3국통일 이전 골품제하에서는 문노의 예와 같이 아찬 이상의 일정 관위를 갖게 되면 골품을 얻게 되어 진골이 된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중고시대는 골품신분으로 모든 신라인을 편제하지 못하고 그와 같은 과정을 밟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136) 비보랑이 물으니 윤궁이 답하였다 정도의 기록이 있었다고 생각된다. 137) 앞에 나온 정모(貞母)는 어머니로서의 정도를 지키는 것이라면 정군은 진종전군에게 절조를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138) 의리라고 할 수도 있다. 139) 금강은 태종무열왕 2년(655) 정월에 이찬(伊湌)으로 상대등(上大等)이 되었다(『삼국사기』 5, 신라본기 5, 태종무열왕 2년 춘정월). 그리고 태종무열왕 7년 정월에 세상을 떠났는데 금강의 뒤를 이어 이찬(伊湌) 김유신을 상대등으로 임명하였다.(『삼국사기』 5, 신라본기 5, 태종무열왕 7천 춘정월). 상대등은 군신(群臣)화의인 대등회의의 의장으로 가장 높은 관직이다. 140) 이는 아찬이 되어 윤궁과 같은 진골신분이 된 것을 의미한다. 중고시대에 골품신분제의 운용의 실상을 볼 수 있다. 당시 모든 사람이 골품을 갖었던 것은 아니나 공을 세워 아찬의 관등을 갖게되면 골품을 얻었다는 사실은 골품제의 이해에 있어 중요한 의미가 있다. 삼국통일 이후에는 신라인들이 골품신분으로 편제되어 신분적인 유동성은 크게 줄어든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141) 포석정이 포석사와 관계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 포석사에는 왕들이나 문노와 같은 중요한 사람들의 화상 등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삼국사기』 12, 신라본기 12 경애왕 3년 9월에는 견훤이 고울부(영천)에 침입하였는데 겨울 11월에 왕경으로 쳐들어온 것으로 나오고 있다. 그 때 경애왕은 비빈(妃嬪) 종척들과 함께 포석정에 가서 잔치를 베풀고 논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기록의 잘못이고, 견훤이 가까이 쳐들어와 있는 상황에서 포석사에 나아가 나라를 위하여 제사를 지내고 빌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142) 관위를 각간으로 추증하여 올린 것은 그 일족들에게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143) 선단은 화랑들을 모신 제단이 아닌가 생각된다. 신궁에는 다양한 시설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144) 신궁의 기능 중 왕이 아닌 문노와 같은 사람을 위한 대제를 지낸 것을 볼 수 있다. 145) 또는 ‘낭주 또한 이 해에 공을 따랐다. 상선(上仙)은 공보다 10살이 적었다’라고 할 수도 있으나 갑자기 상선보다 10살이 적었다는 사실이 나오는 이유가 이해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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