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신라

● 풍월주 秘宝郞 ~ 三十二世 信功

오늘의 쉼터 2008. 11. 2. 20:06

〈秘宝 己巳生 壬寅花郞主〉

九世 秘宝郞者 比臺殿君之子也 母曰實宝娘主 乃未珍夫公之妹也 公與薛原公同年生 同學歌不及 學笛又不及 乃投文弩而學劒 遂爲高弟力輔 文弩爲仙花 以功爲其副 至是爲九世風月主 務遵文弩制法 力於拔微救弱 分遣郎徒以慰邊戍 時美生公以薛原公副弟久未居位 文弩公乃命讓位 公在位亦三年 郎徒惜之 時建福二年春正月也

公娶弩里夫公女細珍娘主 生子細好郞 生女細美細新而 病卒 又娶眞興大王女德明公主 其母乃加耶國月華公主也 生五子三女 子曰朋夫·宝夫·石夫·宝珠·眞珠 女曰紅珠·綠珠·明珠 庶子柳五郞·柳梅·賈奇·水同等 皆貴顯有名聲

柳五郞者公妾柳枝生也 柳枝善劒術 放浪多畜亂徒作擾 朝廷募士擒之不得 公以十八之年 詣其窟捕之 盖柳枝皃美而志高 見公之高標而自伏者也 公惜其人皆釋之 柳枝獨不去曰 但願從君死 不願逃他生 遂以爲妾者也 柳五郞有母風 淸秀有氣○○○(十八)之年 從智明法師入陳 求○○○○多藏書以來 以開後進沙門 其功亦大矣

○○國家泰平 穀登民饒 皆以爲公其○之主 及美生公就任則 春旱不得種 帝爲之減膳放囚而 乃雨 人以爲美生公貪故也

初公以冬臺公子大世有天才 欲以爲前方大花郞 而大世之母乃實宝之妹骨宝 故爲公從弟 人多嫌之而不得 及讓而 托于美生公而授之 未幾美生妾弟諸文郞欲之 以大世貪遊花而飮酒荒德責退之 大世乃怒 乃放于野而晦跡

大世與德明同年慕之 切密相通 公知之而不責 大世感其恩 遂絶德明 自比毛郞阮籍 飮酒輒哭 遊花多慕之 大世不拒其慕者

公知其傷而憐之 置之左方 未幾又擢爲右花郞而 示其將大用以世 荒酒勸節之 小至于可 及美生公初擢前方大花郞 而權不假焉 大世素不服於美生公 乃飮酒唾罵 指其貪癡成旱 美生公乃使心腹郎徒 攻其荒亂者也 公乃使沙門淡水視大世 時〃送酒慰之 大世乃發憤力學 欲得神仙之眞道 與友仇漆浮海而西 仇漆者亦公之花郞也 兩人退而 公之心徒多不安

公力撫之而 竟分黨派 公敀咎于己 欲免上仙之位 文弩公不許之曰 仙道之宗唯吾二人 君若退之 士氣不可勵也 及勸入? 公免諸文郞 未幾美生公亦知(難)○○○○○ 德明長子朋夫敀 骨宝以爲○○○○○贖責 夏宗公爲主 仙政緫問?○??室而決之 美室亦憂派議 會合諸上仙上花 以作列仙閣 通大議裁之 故派議雖多亦無事通之

公亦美室之臣 不敢背之 而至於不公不德之事 輒爭之 美室欲慰公多拔公所薦 菩利公·舒玄公·龍春公等 皆公所拔者也 公子細好郞久在花郞未拔 公謂人曰 仙路非吾家物也 只可立功垂百世 不可以父累名位 公終不使踐要地 人難之

建福二十年八月 高句麗來侵 帝親征 郎徒多從之 公與細好郞請爲先鋒 邀擊于漢水 大破之 帝以功欲報于公 公曰 臣愚㥘無所爲 乃帝力所致也 帝乃擢細好郞進阿湌之位 以爲掌大幢 公曰 今日始吾子也 亦不愧于爾母也 盖細珍常學劒于公而 敎細好郞曰 妻不可以不知夫事 子不可以不成父業云故耳 公終身不捨劒道 出門之徒多貴顯 出鎭四方 公常戒以愼政 公之沒 會者萬衆 盛矣 至矣

公之別傳行于世者多 荒誕不盡記


法興之孫 眞興之婿 位至上仙 劒道大擅 士氣以興 百世以師

父比臺角干 法興之庶子 其母曰玉珍宮主也 玉珍嫁英失公 時法興親行吉禮 見其美而○○○寵益重 而生比臺角干 不悅者以○○○○○欲拒殿君之位 比臺公及長 ○○○○○毁者不敢復言 比臺公以未珍夫公胞妹實宝娘主爲副妻 生公 實宝乃三葉公主女也 三葉乃碧花皇后女也 父乃法興大帝也


〈비보는 기사(己巳)년(549)생이고 임인(壬寅)년(582)에 화랑(花郞)의 주(主)146)가 되었다.147)〉

9세 (풍월주) 비보랑(秘宝郞)은 비대전군(比臺殿君)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실보낭주(實宝娘主)인데 곧 미진부공의 누이였다. 공은 설원공과 같은 해에 태어났다. 함께 노래를 배웠으나 설원공에게 미치지 못하였고, 피리를 배웠으나 역시 설원공에게 미치지 못하였다.

이에 문노에게 나아가 검을 배워 마침내 가장 뛰어난 제자가 되어 문노를 힘써 보좌하였다. 문노가 선화(仙花)가 되자, 그 공으로 그의 부제(副弟)가 되었다. 이에 이르러 9세 풍월주가 되었다. 문노의 법제를 힘써 따르고 미천한 자를 발탁하고 약한 자를 구하는데 힘썼다. 낭도를 나누어 보내어 변방을 지키는 이들을 위로하였다. 당시 미생공은 설원공의 부제로 오랫동안 위에 오르지 못하였다. 문노공이 이에 양위를 명하였다. 공은 또한 3년간 재위하니 낭도들이 아까워하였다. 때는 건복(建福) 2년(585) 춘정월이었다.

공은 노리부공(弩里夫公)의 딸 세진낭주(細珍娘主)를 아내로 맞아 아들 세호랑(細好郞)을 낳았고 딸 세미(細美)와 세신(細新)을 낳았는데, (세진낭주는) 병으로 죽었다. 다시 진흥대왕의 딸 덕명공주를 아내로 맞았다. 덕명공주의 어머니는 곧 가야국 월화공주이다. 다섯 아들과 세 딸을 낳았는데 아들은 붕부·보부·석부·보주·진주이고 딸은 홍주·녹주·명주였고, 서자는 유오랑·유매·가기·수동 등으로 모두 귀하게 영달하였고 명성이 있었다.

유오랑은 공의 첩 유지의 소생이다. 유지는 검술을 잘하였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며 난도(亂徒)를 많이 모아 소요를 일으켰다. 조정에서 군사를 모아 잡으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공은 18의 나이에 그 굴을 찾아가 생포하였다. 아마 유지가 미모에다 뜻이 높아, 공의 높은 풍모를 보고 스스로 항복하였을 것이다. 공은 그 사람들을 가련하게 여겨 모두 풀어 주었다. 유지는 홀로 가지 않고 말하기를 “다만 그대를 좇아 죽기를 원하고 다른 곳으로 도망하여 살기를 원치 않는다” 하였다. 마침내 첩이 되었다. 유오랑은 어머니의 풍모를 갖추어 용모가 맑고 빼어났고 …또한… 18살의 나이였다. 지명법사(智明法師)를 따라 진(陳)에 들어가 …을 구하고 많은 책을 가지고 와서 후진 사문들을 가르쳤으니, 그 공 또한 크다.

… 국가가 태평하고 곡식이 익고 백성이 배부르게 되었다. 모두 공을 그 …주(主)라고 생각을 하였다. 미생공이 취임함에 이르러 곧 봄에 가물어 곡식의 씨를 뿌리지 못하였다. (진평)제(帝)가 반찬의 수를 줄이고 죄수를 풀어 주자 비가 왔다. 사람들이 미생공이 욕심이 많은 때문이라 생각하였다.

처음 공이 동대공(冬臺公)의 아들 대세(大世)에게 천재가 있어, 전방대화랑으로 삼고자 하였다. 그런데 대세의 어머니는 곧 실보(實宝)의 손아래 누이인 골보(骨宝)였으니, 대세는 공의 종제가 되었다. 사람들이 불평을 하여 이루지 못하였다. 양위함에 이르러 미생공에게 부탁하여 대세에게 전방대화랑을 주었다. 얼마 안 되어 미생의 첩의 동생인 제문랑(諸文郞)이 그 자리를 원하여, 대세가 유화를 탐했으며 술을 마시고 행동이 거칠었다는 것으로 책임을 물어 물러나게 하였다. 대세는 이에 노하여 곧 들에 나아가 자취를 감추었다.
대세와 덕명은 같은 나이로 몹시 그리워하여 몰래 서로 정을 통하였다. 공은 알면서 꾸짖지 않았다. 대세는 그 은혜에 감동하여 마침내 덕명과의 관계를 끊었다. 스스로 모랑과 완적(阮籍)148)에 비교하였고, 술을 마시면 번번이 울었는데, 유화들 중에 그를 사모하는 자가 많았다. 대세는 자기를 사모하는 자를 거절하지 않았다.

(비보랑)공은 그 아픔을 알고 가엾게 여겨 좌방(화랑)으로 삼았다. 얼마 안 되어 다시 발탁하여 우(방)화랑으로 삼아 장차 크게 쓰일 것임을 보여 주고, 대세에게 술에 빠짐을 절제토록 권하였다. 잠시 괜찮게 되는 것 같았다. 미생공이 전방대화랑에 처음 발탁하고 나서 대세에게 권한을 주지 않았다. 대세는 본디 미생공에게 복종하지 않았는데, 이에 술을 마시고 (미생이) 탐욕스럽고 어리석어 가뭄을 불러왔다고 욕하였다. 미생공은 이에 심복 낭도를 시켜 그 황난 한 것을 공격케 하였다. 공은 곧 사문(沙門) 담수로 하여 대세를 보살피게 하고, 때때로 술을 보내어 위로하였다. 대세는 이에 발분하고 힘써 공부하여 신선의 참된 도를 터득하고자 하였다. 친우인 구칠과 더불어 바다를 건너 서쪽으로 갔다. 구칠 또한 공의 화랑이었다. 두 사람이 떠나가자 공의 심복 낭도들이 많이 불안해하였다.공이 힘써 달래었지만 마침내 당파가 나뉘었다. 공은 잘못이 자기에게 있다고 하여 상선의 지위에서 물러나고자 하였다. 문노공이 허락하지 않고 “선도(仙道)의 우두머리는 오직 우리 두 사람인데 그대가 만약 물러나면 사기(士氣)149)를 장려할 수 없다” 하며, 권하여 …에 들어가게 하였다. 공은 제문랑을 해직하였다. 얼마 안 되어 미생공 또한 어려운 것을 알고 …. 덕명의 장자인 붕부는 돌아왔다. 골보는 생각하기에 … 죄를 면제받았다. 하종공이 (풍월)주가 되자, 선정(仙政)을 모두 … (미)실에게 물어 결정하였다. 미실 또한 파의(派議)를 염려하여, 제 상선(上仙)과 상화(上花)를 회합하여 열선각(列仙閣)을 만들고 대의를 통과시켜 결단하였다. 그러므로 파의(派議)가 비록 많았으나 또한 무사히 지나가게 되었다. 공 또한 미실의 신(臣)으로 배반할 수 없었으나, 불공정하고 부도덕한 일이 있으면 반드시 다투었다. 미실이 (비보랑)공을 위로하기 위하여 공이 추천한 자를 많이 뽑았다. 보리공·서현공·용춘공 등은 모두 공이 추천한 사람들이다.

공의 아들인 세호랑은 오랫동안 화랑으로 있었는데, 뽑히지 않았다. 공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선로(仙路)는 나의 가물(家物)이 아니다. 단지 공을 세워 백세에 이르는 것이 옳고 아비로서 명위를 더럽히는 것은 옳지 않다” 하였다. 공은 끝내 세호랑을 중요한 자리에 오르지 않도록 하였다. 사람들이 공을 어렵게 여겼다.

건복(建福) 20년(603) 8월 고구려가 침범하여 왔다. 제(帝)가 친히 정벌하였는데, 낭도들이 많이 따랐다. 공과 세호랑이 선봉이 될 것을 청하여 한수(漢水)에서 맞아 싸워 크게 이겼다. 제(帝)가 공에게 보답코자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신은 어리석고 겁이 많아 한 일이 없습니다. 곧 제(帝)의 힘으로 이룬 것입니다” 하였다. 제(帝)는 이에 세호랑을 발탁하여 아찬(阿湌)의 관위를 주고 대당(大幢)을 장악하도록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오늘에야 비로소 나의 아들이다. 또한 너의 어머니에게도 부끄럽지 않다” 하였다. 대개 세진은 늘 공에게서 검을 배워 세호랑을 가르치며 말하였다. “처는 지아비의 일을 알지 않으면 안 되고, 아들은 아버지의 업을 이루지 않으면 안 된다” 말했기 때문이다. 공은 죽을 때까지 검도를 버리지 않았다. 문하에서 나온 무리 중에 출세한 사람이 많아 사방으로 나아가 다스렸는데, 공은 늘 정사에 삼가 할 것을 경계하였다. 공이 죽자 모인 자가 만여 명이 되었다. 성대하고 지극하다! 공의 별전이 세상에 돌아다니는 것이 많은데 거짓된 것이 많아 다 기록하지는 않는다.150)

법흥의 손이고 진흥의 사위이다. 위가 상선(上仙)에 이르렀고 검도(劍道)로 크게 떨쳤다. 무사의 기풍이 일어났고 백세의 스승이다.

아버지는 비대 각간인데 법흥의 서자이다. 비대각간의 어머니는 옥진궁주이다. 옥진이 영실공에게 시집갔다. 당시 법흥이 친히 길례(吉禮)151)를 행하였는데, 그 아름다움을 보고 …하여 총애가 더욱 두터워졌고, 비대 각간을 낳았다. 좋아하지 않는 자들이 …로서 전군의 지위를 막고자 하였다. 비대공이 자라자 … 헐뜯는 자들이 감히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비대공은 미진부공의 친 손아래 누이인 실보랑주를 부처(副妻)152)로 삼아 공을 낳았다. 실보는 곧 삼엽공주의 딸이다. 삼엽은 곧 벽화황후의 딸이고, 아버지는 곧 법흥대제이다.



146) 화랑주는 풍월주를 가리킨다.

147) 필사본 『화랑세기』에 나오는 풍월주 중 처 시작부분에 본문의 위쪽 여백에 이와 같은 기록이 나오고 있다.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원래 원본 『화랑세기』에 이 같은 기록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148) 완적(阮籍): 중국 삼국시대 위(魏)나라 사람으로 죽림7현의 한 사람. 사마의(司馬懿)의 종사중랑(從事中郞). 봉은 관내후(關內侯), 뒤에 소(昭)의 대장군, 종사랑중. 보병주(步兵廚)에 술 3백석이 저장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보병교위로 자원할 만큼 술을 좋아하였다고 한다.

149) 무사의 씩씩한 기운을 의미한다.

150) 전해지고 있는 9세 풍월주 비보랑의 별전에는 황탄한 것이 많아 기록하지 않는다고 한 것은 『화랑세기』가 믿을 수 있는 자료를 토대로 작성된 것을 보여준다.

151) 고대 5례 중의 하나, 신을 제사하는 예를 의미한다.

152) 정처가 아닌 부처가 흥미롭다.

 

 

〈美生 庚午生 乙巳花郞主〉

十世美生郞者 未珍夫公之子也 公之姊曰美室宮主 有大寵于眞興大王 以故公亦被上寵 累召入宮 與銅太子金太子等同學于ꟙ含公 皃美善媚 兩太子亦寵愛之 學舞于萬德 得其宗 思道皇后使諸公主從而學之 公主多爲所私 帝欲問之則 后曰 此吾家風流蝶也 何須問乎 帝且迷于美室 故竟不問 故他不敢言

美室命公從斯多含公爲郎徒 時年才十二 不能上馬 未珍公欲退之 美室曰 何妨吾弟一車乎 斯多含亦不得已許之 文弩責之曰 凡爲郎徒者 力不能上馬使劒 一朝有事 當何用乎 斯多含謝之曰 此吾愛人之弟也 皃美善舞 亦足以慰衆人 無乃可乎 文弩不復爭 公不喜劒道 內忌文弩 不爲之禮 斯多含難之

及世宗公代之 以公爲前方花郞 欲傳其位 以悅美室之心 文弩諫之 不得 美室乃行賂于郎徒 以立公地 好利者多敀之 而美室未幾寵愛薛花郞 使公事之 故公不得爲副

至是乃爲十世風月主 公年已三十六歲也 公笑曰 斯多含公十六爲主 天下榮之 予以十三爲前方花郞 天下尤榮之 以爲年未十六而必主之 豈謂三十六年而得乎 美室曰 以我寵時汝尙如此 况我寵衰 誰爲夏宗計乎 乃以夏宗副之

時郎徒尙有爭論 其一曰 不拘貴賤 內外拔用人才 以强國力者 謂之統合元流 林宗·大世·修日等主之 盖文弩派中最銳者也 欲奉大元神統者 乃美室一派也 夏宗·仇輪公等主之 是爲其二 欲奉眞骨正統者 乃文弩一派 而遵只召太后旨者也 最有權力而守舊規者 菩利郞·叔里夫等主之 是爲其三 雖然文弩亦忠于世宗 故不敢爭夏宗 統合派以夏宗爲不才 亦不服於美生公 〃不能鎭之 又一派欲立貞肅太子 以圓光副之 乃文弩正派及統合派中混成者也 名曰 二花流 又一派 欲立天柱公 以舒玄郞副之 乃統合派中加耶派也

公居位三年 議論不一 上仙多憂之 乃讓于夏宗公 而退居養眞 公生長富貴 不識下情 性又好色貪財 故衆望不重 雖然久在仙門 郎徒多出門下 故莫敢背之也 公多妻妾 有子百人 不能盡記 美生記曰 公眉目淸秀 言下有韻 每詣南桃 遊花之願爲效死者千百計 公一眄則 未嘗有不從之女 時人以公爲天奸星 平居侍妾數○?(分)黛鵞黃 其享樂過于天子 陳使○○○○○爲上國亦未有如此宰相也 ○○○○?爲上國使節 博採其制而來 故○○?公孝于母姊 不敢少懈公之奴嘗偸公之玉盃 將治之 奴越墻而走 傷足流血 公之母主見而責公曰 奴婢者手足也 器皿者所玩也 何以物傷人乎 外戚者衆人之所忌也 爾以母姊之內寵 富有四海而不能下士愛衆 吾切恥之 公乃下堂釋其奴 親自護之 厚施醫治 自後凡有盜者 皆不問曰 吾恐傷其足也 盜乃自息

公嘗與銅太子出入漁色 時有奈麻唐斗之妻有色 有人告于公 公與太子夜詣其家 召幸之 太子旣薨 公欲以爲妾 召入邸宅 唐斗乃訴于美室曰 有子幼艾朝暮呼母 願爲色供之妾 美室乃責公曰 太子事後 吾亦自懼 豈無他色 而乃奪人妻乎 公乃敀女于唐斗 女不能忘公 而私自逃來 公慰以好言而還之

恐唐斗復訴 累薦唐斗于祖主以擢拔之 斗感其恩欲獻之 公曰 姊主命也 不敢 斗出語人曰 人謂公好色 我謂公孝悌 乃願爲公臣 公入調府 以斗司簿 政大擧 帝乃嘉之賜酒 公曰 非臣之能 唐斗之功也 帝乃特授斗大奈麻 以爲調府右卿

其妻生公三子 公皆不取 命斗子之 斗亦不能子之 時人美之 公久在調府○○?者斗力也 致財累鉅萬亦斗力 ○○○○?家與斗圍碁 斗善碁 輒一?○○○○?行酒微醉 公怡然曰 吾與汝爲○○?家財用足焉

吾與汝妻爲天下國家人物繁焉 盖謂其善子也 斗乃乘間退之 使其妻受幸以媚公 其妻弟萬世亦以公故拔之 公嘗謂人曰 唐斗吾子房也 萬世吾陳平也 萬世之妻妹亦爲公妾 有寵善歌 與公子白生公通之 公欲與之 萬世諫其非道 公曰 彼與兒年相若 能復與老 大我好乎 遂與之

公多子而 愛子之情倍人 雖有過失未嘗責 任其性而己 每以歲時率諸子朝母于大堂 母主不能盡辨其母 有似不肖者則 問其何肖汝者 公輒對以所肖者以護之 故諸子皆戀公隨之 公每出 藏數兒而至府 終日與其兒遊戱而敀 人指之曰 護兒令

然未嘗責一吏 故吏亦多以爲好宰相 建福二十六年卒 壽六十 公子白生·月生·發生等 皆公主生也

玉珍之孫 大元神統 有子百人 有徒萬衆 食肉富貴 花柳一生


父曰未珍夫 祖曰阿時 曾祖曰善牟 高祖曰章伊者 卜好公之庶子也 卽宝美宮主出也 章伊之妻曰首里 乃美海公女也 善牟之妻曰宝兮 乃習宝公女也 阿時之妻曰三葉公主者 法興大帝女也 其母乃炤知皇后碧花○○也 公之母曰妙道宮主 乃玉珍○○○○○玉珍爲法興寵妾而號令○○○○○○ 姊美室亦以妙道之女 爲眞興?○○?天下三十年 公之富貴 肇基于此也

妙道爲思道之姊而 色厲心佛 能戒公姊弟不至大過 嘗謂公曰 吾家世以色供之臣 寵幸極矣 未有如汝之享富貴也 汝尙有所可羨乎 公曰 子於叔母未如和文 於姊未如薛原 於郎徒未如文弩 豈無可羨乎 妙道笑曰 此三人者 亦有可羨於汝矣 盖其富而多妾多子女之謂也 以示諷戒之意也 妙道之父英失公者 法興之妹普賢公主之子也 其父曰守知公也 卽登欣公之孫也

〈미생은 경오(庚午)년(550) 생이고 을사(乙巳)년(585)에 화랑의 주가 되었다.〉

10세 (풍월주) 미생랑은 미진부공의 아들이다. 공의 손위 누이는 미실궁주라고 하는데, 진흥대왕에게서 커다란 총애를 받았다. 그런 까닭에 공 또한 왕의 총애를 받았다. 왕이 여러 번 불러 입궁하여 동태자·금태자 등과 더불어 토함공에게 함께 배웠다. 얼굴이 아름답고 아양을 잘 부려 두 태자 또한 총애하였다. 만덕에게 춤을 배워 그 근본을 터득하였다. 사도황후가 여러 공주들에게 이를 배우도록 하였다. 공주들이 많이 사사로이 관계를 가졌는데, (진흥)제(帝)가 문초하려 한 즉 (사도황)후(后)가 말하기를, “이는 우리 집의 풍류접(風流蝶)153)입니다. 어찌 모름지기 문초를 하겠습니까?” 하였다. 제(帝)는 또한 미실에게 빠져 있었던 까닭에 마침내 문초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도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미실이 (미생)공에게 명하여 사다함공을 따르게 하여 낭도가 되었다. 당시 나이가 겨우 12살이었는데 말에 오를 수 없었다. 미진부공이 쫓아내려 하자, 미실이 말하기를 “어찌 나의 아우를 한번에 내칩니까?” 하였다. 사다함 또한 부득이 받아들였다. 문노가 꾸짖어 “무릇 낭도란 자의 힘이 말에 오를 수 없고, 검을 사용할 수 없다면, 하루아침에 일을 당할 때 어디에 쓸 것인가?” 하였다. 사다함이 용서를 빌며 말하기를 “이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아우입니다. 얼굴이 아름답고 춤을 잘 추어 또한 여러 사람을 위로할 수 있으니, 이에 받아들일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문노가 다시 따지지 않았다. 공은 검도를 좋아하지 않았다. 속으로 문노를 꺼려하여 경의를 표하지 않았기에, 사다함이 곤란하게 어려워하였다.

세종공이 (풍월주의) 대를 잇자 공을 전방화랑으로 삼아, 그 위를 전하여 미실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 하였다. 문노가 간하여 이룰 수 없었다. 미실은 이에 낭도들에게 뇌물을 주어 공의 지위를 일으키니, 이해에 밝은 자들이 많이 따르게 되었다. 그런데 얼마 안 되어 미실이 설화랑을 총애하게 되자, (미생)공에게 그를 섬기도록 하였다. 그 까닭에 (미생)공은 부제(副弟)가 되지 못하였다.

이에 이르러 곧 10세 풍월주가 되었는데, 공의 나이는 이미 36살이었다. 공이 웃으며 말하였다. “사다함공이 열여섯 살에 (풍월)주가 되자 천하가 명예롭게 여겼는데, 내가 열세 살에 전방화랑이 되자, 천하가 더욱 명예롭게 여겨 나이 열여섯 살 이전에 반드시 (풍월)주가 된다고 하였습니다. 어찌 36살에 된다고 할 수 있었겠습니까?” 미실이 말하기를 “내가 총애를 받을 때 네가 이와 같은데, 하물며 나에 대한 총애가 식으면 누가 하종(夏宗)을 위한 계책을 마련할 것인가?’ 하였다. 이에 하종을 부(제)로 삼았다.그 때에 낭도들 간에는 여전히 쟁론이 있었다. 그 하나는 귀천에 거리끼지 않고 내외에서 인재를 뽑아 등용하여 국력을 강하게 하려는 자들로, 통합원류(統合元流)라 불렀다. 임종·대세·수일 등이 중심이었는데, 대개 문노파(文弩派) 중 가장 정예들이었다. 대원신통(大元神統)을 받들려고 하는 자들은 곧 미실일파(美室一派)인데 하종·구륜공 등이 중심이었다. 이 것이 그 두 번째이다. 진골정통인 자를 받들려고 하는 자들이니 곧 문노 일파로, 지소태후의 명령을 따르는 자들이다. 가장 권력이 있으며 옛 규정을 지키는 자들이다. 보리랑·숙리부 등이 중심이었다. 이것이 그 세 번째이다. 그렇지만 문노 또한 세종에게 충성을 바쳤기 때문에 하종과 감히 다투지 않았다. 통합파(統合派)는 하종이 재주가 없다고 하고, 또한 미생공에게 불복하였으나 공은 이를 진압하지 못하였다. 또 한파가 있어 정숙태자를 (풍월주로) 세우고 원광을 부제로 삼으려 하였는데, 이는 문노정파(文弩正派)와 통합파 중에서 혼성된 자들로 이화류(二花流)라 하였다. 또 한파는 천주공을 (풍월주로) 세우고 서현랑을 부제로 삼으려 하였는데, 곧 통합파 중 가야파(加耶派)이다.154)

공은 3년 동안 (풍월주의) 위에 있었는데 의론이 일치하지 않아 상선(上仙)이 많이 걱정하였다. 이에 하종공에게 양위하고 물러나 양진(養眞)155)을 하였다.

공은 부귀하게 나고 자라 아래 사람의 마음을 몰랐다. 성품 또한 색을 좋아하고 재물을 탐한 까닭에 뭇 사람들의 신망이 크지 않았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선문(仙門)156)에 있었기에, 낭도들이 문하에서 많이 배출되었다. 그러므로 감히 배반하지 못하였다. 공은 처첩이 많았고 아들이 백 명이나 되었기 때문에 모두 기억할 수 없었다. 『미생기(美生記)』에 “공의 용모가 수려하고 말에 운치가 있었다” 하였다. 남도(南桃)에 갈 때마다 유화로서 목숨을 바치기를 원하는 자가 천백을 헤아렸다. 공이 한번 눈길을 주면 따르지 않는 여자가 없었다. 당시 사람들이 공을 천간성(天奸星)157)이라고 하였다. 평상시에 거하는데 시첩 수(십인이) 눈썹을 그리고 아름답게 화장을 하였으니 그 향락함이 천자보다 더하였다. 진(陳)나라의 사신이 …상국에도 또한 아직 이와 같은 재상이 없다고 하였다. … 상국의 사절이 되어 그 제도를 두루 수집하여 왔다. 그러므로 ….

(미생)공은 어머니와 손위 누이에게 효도하기를 감히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공의 노(奴)가 일찍이 공의 옥배를 훔쳤다. 공이 막 처벌하려하자, 노가 담장을 넘어 도망하다가 다리를 다쳐 피를 흘렸다. 공의 어머니(묘도)가 보고 공을 꾸짖어, “노비는 수족이요, 그릇은 가지고 노는 것이다. 어찌 물건 때문에 사람을 상하게 하느냐? 외척158)은 본래 사람들이 꺼리는 바인데, 너는 어미와 손위 누이가 왕의 총애를 받은 덕분에 천하(四海)의 부를 가졌으면서도 자신을 낮추고 현사(賢士)를 높이고 무리를 사랑할 수 없으니, 내가 매우 부끄럽다” 하였다. 공은 이에 마루에서 내려가 종을 풀어 주고 친히 스스로 보살펴 친절하게 병을 고쳐 주었다. 그 후 무릇 도둑질하는 자가 있어도 모두 문제 삼지 않고 말하기를 “내가 그 다리를 다치게 할까 걱정이다” 하였다. 도둑질은 이내 스스로 그쳤다.공은 일찍이 동태자(銅太子)와 더불어 여색을 탐하러(漁色) 다녔다. 그 때 나마(奈麻) 당두(唐斗)의 처가 아름다움이 있다고 공에게 알려주는 사람이 있었다. 공은 태자와 함께 밤에 그 집을 찾아가 불러서 관계(幸)를 맺었다. 태자가 죽고 나서, 공은 첩으로 삼고자 하여 저택에 불러들였다. 당두는 이에 미실에게 호소하여 말하기를, “아이가 있는데 아침저녁으로 어미를 찾습니다. 색공 만 하는 첩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하였다. 미실이 곧 공을 꾸짖어 말하기를 “태자의 사건이 있은 후 나 또한 두려워하는데, 어찌 다른 계집이 없어서 남의 처를 뺏느냐” 하였다. 공은 이에 여자를 당두에게 돌려보냈다. 여자는 공을 잊을 수 없어 혼자 스스로 도망하여 왔다. 공이 좋은 말로 위로하여 돌려보냈다.

당두가 다시 호소할까 염려하여 여러 번 당두를 조주(祖主)159)에 천거하여 발탁하였다. 당두는 그 은혜를 고맙게 여겨 (아내를) 바치려 하였다. 공이 “손위 누이의 명령이라 감히 그럴 수 없다” 하였다. 당두가 물러나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사람들은 공이 색을 밝힌다고 말하지만 나는 공이 효도하고 우애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였다. 이에 공의 신하가 되기를 원하였다. (미생)공이 조부(調府)160)에 들어가자, 당두를 사부(司簿)로 하여 정치를 크게 바로 잡았다. (진평)제(帝)가 이에 훌륭하게 여겨 술을 내렸다. 공이 말하기를 “신의 능력이 아니라 당두의 공입니다” 하였다. 제(帝)는 이에 당두에게 대나마(大奈麻)161)를 특별히 주고 조부의 우경(右卿)162)으로 삼았다.

그의 처는 공의 세 아들을 낳았다. 공은 모두 거두지 않고 당두의 아들로 삼을 것을 명하였다. 당두 또한 아들로 삼을 수 없었다. 그 때 사람들이 아름답게 여겼다. 공은 오랫동안 조부에 있으며 … 한 것은 당두의 힘이었다. 누만금의 재물을 모은 것 또한 당두의 힘이었다. … 집에서 당두와 바둑을 두었다. 당두는 바둑을 잘 두었다. 문득 … 술을 마셔 조금 취하자, 공은 흡족하여 “내가 너와 더불어 …하여 집안의 재산은 쓰기에 족하다.내가 너의 처와 더불어 천하와 국가를 위하여 인물을 번성하게 하겠다” 하였다.

대개 당두의 처가 아들을 잘 놓는 것을 말한 것이다. 당두는 이내 틈을 타서 물러나서 그 처로 하여금 공에게 사랑을 받고 아양을 떨게 하였다. 그의 처남인 만세(萬世) 또한 공으로 인하여 발탁되었다. 공은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당두는 나의 자방(子房)163)이고, 만세는 나의 진평(陳平)164)이다” 하였다. 만세의 처제 또한 공의 첩이 되어 총애를 받았고, 노래를 잘하였다. 공의 아들인 백생공과 통하였다. 공이 백생공에게 주려고 하자, 만세가 그것은 도가 아니라고 간하였다. 공이 “그 녀와 내 아이는 나이가 서로 같아 다시 해로할 수 있으니, 나에게는 큰 기쁨이다” 하였다. 마침내 주었다.공은 아들이 많았는데, 아들을 사랑하는 정이 다른 사람의 배가 되었다. 비록 잘못이 있어도 나무라지 않고 그 성품에 맡길 따름이었다. 매번 명절에는 여러 아들을 거느리고 대당(大堂)으로 어머니165)를 뵈러 갔는데, 어머니가 아이들의 어미를 다 구별하기 힘들었다. 공과 닮지 않은 아이가 있으면 곧, “그 아이가 어디가 너와 닮았느냐?” 물었다. 공은 번번이 닮은 바를 대답하여 감싸주었다. 그러므로 여러 아들이 공을 사모하여 따랐다. 공은 매번 출근할 때 수명의 아이를 거느리고 조부(調府)에 이르러 종일 그 아이들과 더불어 즐겁게 놀다가 돌아왔다. 사람들이 가리켜 말하기를 ‘호아령(護兒令)’이라 하였다.

그러나 한 사람의 관리도 책망을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관리들 역시 좋은 재상이라고 생각하였다. 건복 26년(609)에 세상을 떠났다. 나이가 60이었다. 공의 아들인 백생(白生)·월생(月生)·발생(發生) 등은 모두 공주의 소생이다.

옥진의 손자이고 대원신통이다. 아들이 백 명이고 낭도는 만 명이다. 풍족하고 부귀로운 화류(花柳)의 일생이다.


아버지는 미진부이고 할아버지는 아시이고 증조는 선모이다. 고조는 장이인데 복호공의 서자이며 보미궁주 소생이다. 장이의 처는 수리인데 곧 미해공의 딸이다. 선모의 처는 보혜인데 습보공의 딸이다. 아시의 처는 삼엽공주인데 법흥왕의 딸이다. 그 어머니는 곧 소지황후인데 벽화○○이다. 공의 어머니는 묘도궁주인데 곧 옥진 ….166) 옥진이 법흥의 총첩이 되어 …을 호령하였다. …167) 누이인 미실 또한 묘도의 딸로 진흥의 …이 되어 천하를 30년 동안 …하였다. 공의 부귀는 이에 기초가 비롯되었다.

묘도는 사도의 손위 언니로 얼굴이 근엄하고 마음이 부처와 같아서 공과 공의 누이와 동생들에게 주의를 주어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게 하였다. 한 번은 공에게 일러 말하기를 “우리 집은 대대로 색을 바치는 신하168)로 총애와 사랑이 지극하였다. 아직 네가 누리는 부귀와 같은 것은 없었다. 너는 아직도 부러운 것이 있느냐?”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제가 숙모에 대하여는 화문만 못하고, 누이에 대하여는 설원만 못하고, 낭도에 대하여는 문노만 못합니다. 어찌 부러운 것이 없겠습니까?” 하였다. 묘도가 웃으며 말하기를 “이 세 사람 또한 너에게 부러운 것이 있다” 하였다. 대개 그 부유함과 첩이 많고 자녀가 많은 것을 말한 것인데, 풍자하여 훈계하는 뜻을 보인 것이다. 묘도의 아버지인 영실공은 법흥왕의 누이인 보현공주의 아들이다. 그 아버지는 수지공이니 (영실공은) 곧 등흔공의 손자가 된다.





153) 풍류접(風流蝶)은 미실과 미생의 집안이 대원신통으로 왕의 혼인 대상을 배출한 집안의 유풍을 갖고 있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154) 10세 풍월주인 미생이 재위하고 있을 때 화랑도는 5개의 파로 나뉘었다.
1 통합원류(통합파)-임종·대세·수일 등이 중심-귀천을 가리지 않고 인재 등용하여 국력을 강하게 하려는 파로 문노파 중 가장 용맹한 자들이며, 하종이 재주가 없다고 하고 미생공에게 불복하였으나 미생공이 이를 제압을 하지 못함.
2 미실일파-하종·구륜공 등이 중심-대원신통인 자를 받들려고 하는 파.
3 문노일파-보리랑·숙리부 등이 중심-진골정통으로 받들려는 파로 지소태후의 명을 따르고 가장 권력이 많고 옛 규정을 지키려는 파, 문노가 세종에게 충성을 바쳤기에 하종과는 다투지 않았음.
4 이화류-정숙태자를 풍월주로 삼고 원광을 부제로 삼으려는 파-문노정파 및 통합파 중 혼성된 자들로 이루어짐.
5 가야파-천주공을 풍월주로 하고 서현랑을 부제로 삼으려는 파-통합파 중의 가야파.

155) 천성을 기르는 것을 의미한다.

156) 여기서 말하는 선문(仙門)은 화랑도와 관련된 것이고 도교 등과는 관계가 없다.

157) 하늘의 간사한(간음할) 별을 의미한다.

158) 외척은 황후 또는 어머니의 친정 친척을 의미한다.

159) 『삼국사기』 38, 雜志 7, 執事省은 본명이 稟主인데 혹은 祖主라 하였다고 되어 있다. 조주라 부른 시기를 찾으면 『화랑세기』의 신빙성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160) 조부는 진평왕 6년(584)에 설치되었는데 진덕왕 5년(651)에 령 2인을 두었다(『삼국사기』 38, 잡지 7, 직관 상). 161) 『삼국사기』 직관 상의 조부조에는 조부의 경이 될 수 있던 관위는 병부대감과 같은 것으로 나오고 있는데 병부대감은 00에서 아찬까지로 되어 있다. 병부대감이 될 수 있던 하한 관위는 기록이 탈락되어 있으나 집사성의 차관인 전대등의 관등이 나마에서 아찬까지였던 것으로 보아 나마였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대나마의 관등을 가지고 당두가 조부의 경이 되어 문제가 없다. 162) 조부는 진평왕 6년(584)에 설치된 것으로 나오고 있다. 조부의 경은 2인이었는데 문무왕 15년(675)에 1인을 더하였다. 이에 당두가 경일 때는 2인의 경이 있었고 그 중 한 자리를 우경이라고 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다른 관부의 복수 관직명이 어떠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미생(550-609)은 585년에 10세 풍월주가 되었고 588년 물러났다. 이에 미생이 풍월주의 지위를 물러난 이후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조부의 령이 되었다는 사실은 문제가 없다.

163) 한나라 때 장량(張良)의 자(字)이다.

164) 전한의 정치가로 처음 항우를 섬겼으나 후에 한 고조 유방을 섬겨 도위가 되었고 여태후(呂太后)가 죽은 후 주발과 힘을 합하여 여씨 일족의 반란을 평정하였다.

165) 미생랑의 어머니는 묘도다.


166) 묘도궁주는 옥진의 딸이다.

167) 미생이 있어야 한다.

168) 색공지신(色供之臣)은 묘도와 사도의 집안이 왕에게 색공을 하는 집안인 것을 잘 보여준다. 이는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이해가 가지 않는 사실이지만 신라시대의 담론이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사실을 잘 보여준다.

 

 

 

〈夏宗 甲申生 戊申花郞〉

十一世夏宗者 世宗殿君之子也 母曰美室宮主

初法興帝與英失公蹴毬內庭 玉珍宮主以睡眼亂髮而至 引帝手曰 有好夢 必生貴子 可以偕 帝曰 何夢 曰 七色鳥入胸中也 帝笑曰 七色雜也 鳥者女也 嬪妾之兆也 可與爾夫偕 玉珍不悅 帝曰 爾夫與朕一軆 生子則當立太子 生女則可以爲嬪 玉珍乃喜 遂與英失入帳成好 果生女 玉珍以帝爲神 乃名妙道 及長 帝以約幸之 而幺窄不能稱 帝又太陽 故妙道當夕 而輒難之 帝不多幸

時未珍夫公與母三葉公主 常入侍宮中 與妙道隔殿而居 妙道望????慕之 乘未珍夫公之過廊??○○○?入之相通 大相稱 誓爲同穴?○○○?來 及帝崩 太后欲近阿時公 許○○○久未生子 一日玉珍宮主夢見七色鳥 自其胸中飛入妙道 驚起異之 詣妙道寢室而窺之 時妙道與未珍公 方在和好中 玉珍宮主乃喜而告之曰 爾夫婦今也可生貴女 果生美室

容皃絶妙豊厚似玉珍 亮明似碧花 美妙似吾道 可謂鍾百花之神 萃三美之精 玉珍曰 此吾兒 可以興吾道也 不離左右 而敎以媚道歌舞 及以太后命將入世宗之宮 玉珍憂之曰 吾所以敎汝者 將以媵汝叔母 豈謂事殿君乎 美室曰 嬪妾之道自有色供 安知不得奉帝乎 玉珍大喜而撫背 曰 此兒足以言道 吾無憂矣

及至宮中媚事太后殿君 殿君沈淪不能起 太后恐殿君之不能當 命出居于宅

美室不以爲意 私通斯多含 約爲夫婦

太后乃命殿君改娶肜明 殿君思慕美室成病 太后不得已復召入 遂生夏宗 殿君愛重之

不敢復幸肜明 肜明怒而出 公生未幾 美室以思道命色供于太子 有娠

燕鸎之態益復悽絶 帝謂后曰 汝姪有不天之色而 何不媵汝而他適乎 后乃以三代之席薦美室于帝 帝一幸再幸 不使離側 乃命殿君復肜明 而賜美室殿主之名 ○○?后寵傾四海

帝出入必同 皇后○○○○宮誓爲三柱之神 殿主善文辭○○○○帝出朝視事 殿主侍側 閱狀參決○○其善 朝野權敀玉珍宮 大元神統復赫然而起

及生太子女 帝不知之 以爲己女而封爲艾松公主 公以艾松之兄 年才三歲而 賜以舍知之位 得入宮中以爲艾松之友 公雖小 友愛至篤 公主泣 輒隨泣 帝以此寵愛之 般若之生 公陞爲大舍 蘭若之生 陞爲奈麻 壽宗殿君生 陞爲大奈麻 先是帝使公主等呼公以兄 公以位卑不敢自居

是時殿君始生 帝大喜 乃封公以殿君 以悅殿主之心 殿主內不勝喜 而外施謙讓 時三好公掌內秩爭之曰 私子之殿君已僣矣 况私子之子乎 帝可其言而止之 美室乃召三好 責之曰 叔以我之故掌內秩 妨吾兒何也 三好笑曰 不可得而得 亦非祥也 急滿則傾 徐成則完 雖非殿君亦可以作駙馬 何必越制拂衆情以後可乎 美室怒猶未解 三好乃辭內秩

美室乃引英失公子弩同掌內秩 帝知美室之欲封公 乃以公爲帝假子 授殿君之位 以慰美室之心 美室乃喜 殿君封禮行于壽宗殿君七十七日 帝與美室殿主壽宗殿君及公同車 至神宮行禮 美室喜極而 仆于帝懷曰 一日而爲兩殿君之母 帝撫○?(之)曰 朕與一體 豈特兩殿君乎 ?○○○○可爲爾子也

是夕帝設宴于?○○○○親賀 命太子以下王子殿君 皆拜(美室)而呼母 太子與美室有私 故勉强拜之 美室起止之曰 太子與他殿君不同 何可如是 帝乃命太子許一拜 他皆四拜而起 帝歡甚而醉 美室亦醉 相引而入帳 太子以下山呼而退

時宝明宮主常爲太子所慕 而不肯相許 太子乃與壯士數人 超宮墻而入 宮主自知不得與美室爭寵 不敢力拒太子而事諧 自後太子連夜超入 至第七夜太子獨入無伴 爲獒犬所咬 宮主抱至宮中 至曉而薨

帝乃按太子從人 多美室·美生之郎徒 美室之醜行多出從人之口 帝始疑之 將成大獄美室懼禍及己 號泣出宮 公亦辭殿君之位 思道皇后諫之曰 三柱之誓在焉 何以賤徒之亂言 欲割寵妾之恩 而傷亡兒之靈 帝乃詔勿問 尋復思美室 帝親幸之 美室涕泣扶上謝罪 帝亦許之

時世宗公自外召還 帝欲復爲殿主 而恐失信于世宗公 止之 美室亦感世宗公之至誠 欲與公父子取團欒之樂 避居海宮 公事父母至孝 世宗公乃與美室禱公之壽于海神 時壽宗殿君以幼隨在海宮 帝托見壽宗而累召之 美室上書列己罪而辭之

帝乃親幸海宮 相見○○泣下美室感而復動 遂與帝還(○)○(世宗公)爲兵部右令以慰之 未幾帝○○○○?明宮主 築新宮于皇后宮左園 ?○○母宮 入宮爲公主殿君之友 時美室已娠世宗公子已數月 故請解而入 帝不許乃入宮産玉宗公 以爲帝摩腹子 於是美室寵復如故 悉引心腹 復授要地 帝皆許之 又命世宗公入宮居之

美室乃與思道皇后專內政 世宗·薛原·美生專外政 帝以風疾不視內外事 唯與思道·美室·宝明·玉理·月華五宮耽樂宮中 政事悉出于思道·美室 初思道后與美室約爲三生一體 至是帝頗不豫 美室乃勸世宗受幸于思道 世宗力辭不得 乃通于后帝崩而思道·美室·世宗·美生秘之 太子未得知 思道先使美室通太子 約不二情而立之 自居帝位 而制新王 以末宝之夫荒宗公爲上大等 以鎭衆望 時荒宗之女允宮爲美室之心腹 允宮之妹允玉爲美生之妾 允宮之弟允荒娶思道女月輪公主 故推之也 居柒夫公年老 悉委于大等弩里夫·弩同公等 故美室權不失焉 授公以級湌之位

公年十五而入花郞 學史于ꟙ含公 學歌于二花公 學劒于文弩公 學舞于美生公 皆得其精

常思先帝之寵幸 每當誕忌 率所郎徒詣陵寢 輒有淚下 雖風雨而不廢 聞?○?不重之 公自幼善推人 情不偏?○○○?衆望

公之母乃美室宮主 故(亦爲○大元)神統 文弩派不服 故美室欲調○ (以二)花公子菩利公副之 菩利公之母叔明公主 故眞骨正統也 眞骨以只召爲宗 大元以思道爲宗 眞骨之祖出玉帽 大元之祖出乎宝美

雖然兩骨互相混雜而 所主者只出於各徇其情也 不充其所欲則 雖和而內違 朋黨益甚 公雖少 深鑑于此 務盡均愛 一時稍可 雖然主兄與副弟異派 故自然不和漸露 欲引菩利公而出 菩利素善于公 不肯于心而 爲其屬徒所迫 泣而訴情 公乃詣二花公請善裁之敎 二花公曰 仙道本出于宇宙淸元之氣 非是非相爭之謂也 吾兄毛郞公 唯得其全 不幸早卒 予以不肖不能盡聞其道 爾等皆以權地襲位 無以御下 予竊恥之 不如捨位求道 以令眞生可也

公乃欲棄位專道 郎徒以爲二花公自主之計而亂焉 美室宮主憂之 乃以思道太后詔大會郎徒 使二花·世宗兩公享之以調之 多用不服之人以鎭之 以此加耶派漸復有力 乃命舒玄郞爲前方花郞 亦大元神統也 此是二花·美室·加耶三派團結也

時宮中有三太后行政 大王仁孝承順 故郎徒之好進者多付太后宮 太上太后·思道法主 以美室宮主爲法雲 故政令多出美室宮而 法主之女阿陽公主乃舒玄之母也 爲加耶派之日光而 分美室之勢 萬呼太后大王之母 故尤有上寵而 爲眞骨正統之首主 智道太后出入於太上萬呼之間 以扶文弩正派

故秘宝郞推智道子龍春公 欲代菩利公 而萬呼太后不聽 雖不得位而 郎徒多敀之 舒玄郞曰 龍春公乃先君之子也 我何敢敵之 辭其郞以讓之 於是加耶派亦敀于龍春公 亦大元神統 故美室派不爭之 郎徒皆賀曰 得其人矣 菩利公亦愛龍春公 誓不黨異 眞骨·大元之論 始緩于此 夏宗公雖孝于母主 察勢趨之 內贊其論 而外不敢言

時銀輪公主失寵于上 乃太上之季女也 太上慮大元命公奉之 生子孝宗公 先娶薛原公女美毛娘主 生子毛宗 孝宗之妹曰夏姬·月姬 毛宗之妹曰柔毛·令毛 公淸儉愼色 能愛下恭上 大有世宗風 故初有不服而終乃敀之

居三年而讓于菩利公曰 先位皆以大聖 猶居三年 我何敢久乎 菩利公曰 主兄則美室源花之子也 安可與凡仙同例乎 公固辭之 菩利公乃就位 菩利公乃予曾祖也 嘗稱夏宗公于先考曰 今世無此孝子忠臣也

盖美室宮主歷事三朝 兄弟異種 動輒多難 銀輪公主亦恃骨放蕩 公一如世宗公之待美室而不問 太陽公主以銀輪之兄 與公隣居 惑之甚而 公一不投足 公之淸守如此云爾



淸謹守德 以保令名 世宗之子 美室之生

詳見世宗·美生條




〈하종은 갑신년(564) 생이고 무신년(588)에 화랑이 되었다.〉

11세 (풍월주) 하종(夏宗)은 세종전군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미실궁주이다.

당초에 법흥제(法興帝)와 영실공이 내정에서 축구(蹴毬)를 하고 있는데 옥진궁주가 졸린 눈으로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이르러 제(帝)의 손을 이끌며 “좋은 꿈을 꾸었는데 반드시 귀한 아들을 낳을 것입니다. 함께 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였다. 제(帝)가 “무슨 꿈인가?” 하였다. 말하기를 “7색조가 가슴으로 들어 왔습니다” 하였다. 제(帝)가 웃으며 “7색은 섞인 것이고, 새는 여자다. 빈첩(嬪妾)의 조짐이다. 네 지아비와 더불어 함께 하라” 하였다. 옥진이 기뻐하지 않았다. 제(帝)가 말하기를 “네 지아비와 나는 일체이다. 아들을 낳으면 곧 태자로 삼고 딸을 낳으면 곧 빈(嬪)으로 삼을 것이다” 하였다. 옥진이 이에 좋아하며 마침내 영실과 장막 안으로 들어가 사랑을 이루었다. 과연 딸을 낳았다. 옥진은 제(帝)를 신이라고 여겨 묘도(妙道)라 이름 하였다. 묘도가 자라자 (법흥)제(帝)가 약속한대로 사랑(幸)을 하였다. 그런데 작고 좁아(幺窄) 맞을 수 없었고,169) 또 제(帝)가 양기가 너무 강하였기 때문에, 묘도는 저녁이 되면 괴로워하였다. 제(帝)가 자주 사랑하지 않았다.

그 때 미진부공이 어머니 삼엽공주(三葉公主)와 늘 궁중에서 입시하여, 묘도와 전(殿)을 사이에 두고 머물렀다. 묘도가 바라보고 … (미진부공)을 사모하였다. 미진부공이 회랑을 지나가는 것을 틈타 … 들여서 상통하였다. 대상(大相)이 같이 동혈의 …이 되기를 맹세하였다. …왔다. (법흥)제(帝)가 죽자(崩) 태후가 아시공과 가까이 하고자 하여 …을 허락하였는데, 오랫동안 아들을 낳지 못하였다. 하루는 옥진궁주가 꿈에 칠색조가 자기의 가슴속에서 날라 묘도에게 들어가는 것을 보고, 놀라 일어나 이상하게 여겨 묘도의 침실에 가서 엿보았다. 그 때 묘도와 미진부공이 바야흐로 함께 사랑(好)을 나누는 중이었다. 옥진궁주는 이에 기뻐서 알려주며 “너희 부부는 이제 귀녀(貴女)를 낳을 것이다” 하였다. 과연 미실을 낳았다.

용모가 절묘하여 풍만함은 옥진을 닮았고, 명랑함은 벽화를 닮았고, 아름다움은 오도(吾道)를 닮아서 백화의 영검함을 뭉쳤고, 세 가지 아름다움의 정기를 모았다고 할 수 있었다. 옥진이 “이 나의 아이는 나의 도(吾道)를 일으킬 만 하다” 말하고, 좌우에서 떠나지 않으며 교태를 부리는 방법(媚道)과 가무를 가르쳤다. 태후의 명으로 세종의 궁으로 들어가려 할 때 옥진이 근심하여 말하기를 “내가 너를 가르친 것은 장차 너의 숙모의 잉첩이 되게 하려는 것이지 어찌 전군을 섬기라고 한 것이겠느냐?” 하였다. 미실이 “빈첩(嬪妾)의 도는 색공(色供)에 있는데 어찌 제(帝)를 받들지 못하겠습니까?” 하였다. 옥진은 크게 기뻐하여 등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이 아이는 족히 도를 말하니 나는 근심이 없다” 하였다.

(미실은) 궁중에 이르러 태후의 아들인 전군을 교태로 섬겼다. 전군은 깊이 빠져들어 기동하지를 못하였다. 태후가 전군이 감당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궁궐을 나가 집에 머물도록 명하였다.

미실은 개의하지 않고 사다함과 사통(私通)을 하고 부부가 되기로 약속을 하였다. 태후는 이에 전군에게 명하여 융명을 아내로 맞도록 하였다. 전군은 미실을 사모하여 병이 났다. 태후는 부득이 미실을 다시 불러들였다. 마침내 하종을 낳았는데, 전군이 미실을 애지중지하여 다시는 융명을 사랑(幸)하지 않았다. 융명은 노하여 궁궐 밖으로 나갔다. 공이 출생한지 얼마 안 되어, 미실은 사도(思道)의 명으로 태자에게 색공(色供)을 하여 임신을 하였다.(진흥제를) 사모하여 애태우는(燕鸎) 미실의 모습이 더욱 애처로웠다. 제(帝)가 (사도왕)후(后)에게 말하기를 “너의 조카는 하늘도 돕지 않는 여자인데, 어찌 너의 잉첩170)이 되지 못하고 다른 데로 시집갔는가?” 하였다. 후(后)는 이에 미실을 3대(부·자·손)를 모시는 자리로 제(帝)에게 추천하였다. 제(帝)가 한번 사랑(幸)하고 두 번 사랑하고는 곁을 떠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에 전군에게 명하여 다시 융명을 받아들이게 하였다. 그리고 미실에게 전주의 이름을 내렸는데 … 후(后)와 …. 사랑(寵)함이 천하171)를 뒤집을 만 하였다.

제(帝)가 출입할 때 반드시 동행시켰다. 황후는 … 궁과 삼주(三柱)의 신(神)이 될 것을 맹세하였다. 전주는 문장을 잘 지었다 …. 제(帝)가 조정에 나아가 업무를 볼 때, 전주가 옆에서 모셨다. 문서를 보고 참결하여 그 것이 옳은지를 …. 조야(朝野)의 권세가 옥진궁으로 돌아갔다. 대원신통(大元神統)이 다시 성하게 일어났다.

태자의 딸이 태어나자, 제(帝)는 알지 못하고 자기의 딸로 알고, 애송(艾松)공주로 봉하였다. 공은 애송의 형으로서 나이가 겨우 세 살이었는데, 사지(舍知)172)의 위를 내렸다. 궁중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고, 애송의 벗이 되었다. 공은 비록 나이가 어렸으나 우애가 지극히 도타워, 공주가 울면 곧 따라서 울었다. 제(帝)가 이로 인하여 총애하였다. 반야(般若)가 출생하자 공은 관위가 올라 대사(大舍)가 되었다. 난야(蘭若)가 출생하자 관위가 올라 나마(奈麻)가 되었다. 수종전군이 출생하자 관위가 올라 대나마(大奈麻)가 되었다. 이에 앞서 제(帝)는 공주 등에게 공을 형으로 부르게 하였으나 공은 위가 낮아 감히 형으로 자청하지 않았다.

이 때에 (수종) 전군이 처음 태어나자, (진흥)제(帝)가 크게 좋아하여 공을 전군(殿君)으로 봉하여 전주의 마음을 기쁘게 하려 하였다. (미실)전주는 속으로 기쁨을 이기지 못하였으나 겉으로 겸양을 베풀었다. 그 때 삼호공(三好公)이 내질(內秩)173)의 업무를 관장하고 있었는데, 따져 말하기를 “사자(私子)가 전군이 되는 것도 이미 참람 된 것인데, 하물며 사자(私子)의 아들이겠습니까?” 하였다. 제(帝)가 그 말이 옳다고 여겨 그만 두었다. 미실은 이에 삼호(三好)를 불러 꾸짖어 말하기를 “아재비는 나 때문에 내질을 관장하는데 나의 아이를 방해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였다. 삼호가 웃으며 말하기를 “얻을 수 없는 것을 얻는 것은 상서로운 일이 아닙니다. 급히 차면 기울어지고 서서히 이루어지면 완전합니다. 비록 전군이 아니더라도 또한 부마가 될 수 있습니다. 하필 제도를 넘어서서 뭇 사람들의 마음을 거슬린 후에 가하겠습니까?” 하였다. 미실의 노여움이 여전히 풀어지지 않았다. 삼호는 이에 내질을 사직하였다. 미실은 이에 영실공(英失公)의 아들인 노동(弩同)을 천거하여 내질을 관장케 하였다.

제(帝)가 공을 봉하려는 미실의 바램을 알고, 공을 제(帝)의 가자(假子)로 삼아 전군의 위를 주어 미실의 마음을 위로하였다. 미실은 이에 기뻐하였다. 전군으로 봉하는 예를 수종(壽宗)전군의 (탄생) 77일에 행하였다. 제(帝)와 더불어 미실(美室)전주, 수종(壽宗)전군 및 공이 함께 수레를 타고 신궁(神宮)에 이르러 예를 행하였다.174) 미실의 기쁨이 지극하여 제(帝)의 품안에 엎드러지며 말하기를 “하루에 두 전군의 어미가 되었습니다” 하였다. 제(帝)가 …를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짐과 더불어 한 몸인데 어찌 다만 두 전군뿐이겠는가? … 가히 너의 아들이 될 수 있다” 하였다.이날 밤 제(帝)는 …에서 잔치를 베풀어 … 친히 축하하고, 태자(太子) 이하 왕자(王子), 전군(殿君)175)에게 명하여 미실에게 절하고 어머니라 부르도록 하였다. 태자는 미실과 더불어 사통(私通)한 바 있는 까닭에 억지로 절하였다. 미실이 일어나 멈추며 말하기를 “태자는 다른 전군과 같지 않은데 어찌 이와 같을 수 있습니까?” 하였다. 제(帝)가 이에 명하여 태자에게는 일배(一拜)를 허락하였다. 다른 사람은 사배(四拜)하고 일어났다. 제(帝)가 몹시 기뻐 취했고, 미실도 역시 취하여 서로 이끌며 장막으로 들어가고, 태자 이하가 만세(山呼)를 외치고 물러갔다.

당시 보명궁주(宝明宮主)가 태자의 연모를 받았으나, 몸을 허락하려 하지 않았다. 태자는 이에 장사(壯士) 수인과 더불어 궁의 담장을 넘어 들어갔다. 궁주가 미실과 더불어 왕의 총애를 다툴 수 없음을 알고 감히 태자를 힘써 거부하지 않아 화합이 이루어졌다. 그 이후 태자가 매일 밤마다 넘어 들어왔다. 이레 째 밤에 태자가 아무도 거느리지 않고 혼자 들어가다가 큰 개에게 물렸다. 궁주가 안고 궁중으로 들어갔는데, 동틀 무렵 죽었다(薨).

(진흥)제(帝)가 태자의 종인들을 조사했는데, 미실과 미생의 낭도들이 많았다. 미실의 추잡한 짓이 종인들의 입에서 많이 나왔다. 제(帝)가 비로소 의심하여 큰 옥사를 일으키려 하자, 미실은 화가 자기에게 미칠까 두려워하여 목 놓아 울며 궁을 나갔다. 공 또한 전군의 위를 사퇴하였다. 사도(思道) 황후가 간하여 말하기를 “삼주(三柱)의 맹세가 있습니다. 어찌 천한 무리들의 어지러운 말로 총첩의 은혜를 빼앗고 죽은 아들의 혼령을 아프게 하려 합니까?” 하였다. (진흥)제가 이에 불문에 부치라는 조칙을 내렸다.

곧 다시 미실을 생각하고 제(帝)가 친히 거둥하였다. 미실이 눈물을 흘리고 울며 왕을 붙들고 사죄를 하였다. 제(帝)가 또한 받아들였다. 그 때 세종공이 지방으로부터 소환되었다. 제(帝)가 다시 미실을 전주(殿主)로 삼고자 하였으나, 세종공에게 믿음을 잃을까 염려하여 그만 두었다. 미실 또한 세종공의 지성에 감격하고 (하종)공의 부자와 단란176)한 즐거움을 가지려 하여 해궁(海宮)177)으로 피하여 가 살았다. 공은 부모를 지극한 효도로 섬겼다. 세종공은 이에 미실과 더불어 공의 장수를 해신(海神)에게 빌었다. 그 때 수종(壽宗) 전군이 어렸기에 따라가서 해궁에 있었다. 제(帝)가 수종을 본다는 핑계로 여러 번 불렀으나, 미실은 글을 올려 자기의 죄를 늘어놓고 거절하였다.

제(帝)가 이에 친히 해궁에 거둥하여 서로 보고 … 눈물을 흘렸다. 미실이 감동하고 다시 마음이 움직여 마침내 제(帝)와 더불어 …로 돌아갔다. 세종공을 병부우령(兵部右令)178)으로 삼아 위로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帝)가 …보명궁주(宝明宮主)를 …하고, 신궁(新宮)을 황후궁 좌원(左園)에 지어, … 모궁(母宮)…. 입궁하여 공주와 전군의 벗이 되었다. 그 때 미실은 세종공의 아들을 임신한지 이미 수 개월이 되었으므로, 해산을 하고 입궁하겠다고 청하였다. 제(帝)가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입궁하여 옥종공(玉宗公)을 낳아 제(帝)의 마복자(摩腹子)로 삼았다. 이에 미실에 대한 총애가 다시 예전과 같아졌다. 미실은 심복들을 모두 다시 끌어 모아 중요한 지위를 주었는데, 제(帝)가 모두 허락하였다. 또 세종공에게 명하여 입궁하여 살도록 하였다.미실은 이에 사도황후와 함께 내정을 마음대로 하였고, 세종·설원·미생은 외정을 마음대로 하였다. 제(帝)는 풍질(風疾)179)로 내외의 정사를 보지 못하고, 오직 사도·미실·보명·옥리(玉理)·월화(月華) 다섯 궁주180)와 더불어 즐거움에 탐닉하였다. 정사는 모두 사도와 미실로부터 나왔다. 처음에 사도후와 더불어 미실은 삼생(三生)181)의 일체가 될 것을 약속하였다. 이에 이르러 제(帝)가 자못 몸이 불편하였기 때문에, 미실은 세종에게 사도의 사랑(幸)을 받도록 권하였다. 세종은 힘써 거절하였으나 어쩔 수 없어서 후(后)와 통하였다.

(진흥)제(帝)가 죽자(崩) 사도·미실·세종·미생은 비밀로 하였다. 태자가 알지 못하였다. 사도가 먼저 미실로 하여금 태자와 통하게 하고, 다른 마음을 가지지 않기로 약속하고 태자를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몸소 제위(帝位)에 있으며 신왕(新王)182)을 통제하고, 말보(末宝)의 남편인 황종공(荒宗公)183)을 상대등(上大等)184)으로 삼아 중망185)을 눌렀다. 그 때 황종공의 딸인 윤궁(允宮)이 미실의 심복이 되었고, 윤궁의 누이인 윤옥(允玉)은 미생의 첩이었고, 윤궁의 남동생인 윤황(允荒)은 사도의 딸인 월륜(月輪) 공주를 아내로 맞았기 때문에 황종공을 추대한 것이다. 거칠부공(居柒夫公)186)은 나이가 많아 대등인 노리부(弩里夫)·노동공(弩同公) 등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그러므로 미실은 권세를 잃지 않았다. (하종)공에게 급찬의 위를 주었다.

(하종)공은 15살에 화랑에 들어가 역사를 토함공에게 배웠고, 노래를 이화공에게 배웠고, 검술을 문노에게 배웠고, 춤을 미생공에게 배워 모두 그 정수를 얻었다.

늘 선제(先帝)187)의 총애를 생각하여 매번 생일과 기일이 되면 낭도들을 거느리고 능침에 나아가 눈물을 흘렸는데, 비록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려도 그만두지 않았다. …을 듣고 … 중하게 여기지 않음이 출생하였다.190)

그렇지만 양골(兩骨)191)이 서로 뒤섞이어, 풍월주가 되는 사람은 각기 단지 그 당시의 정황에 따라서 나왔다. 바라는 바가 충족되지 않으면 비록 화합을 하나 안으로는 서로 반목하여 붕당이 더욱 심하여졌다. 공은 비록 젊었으나 이것을 깊이 경계하였다. 골고루 사랑하는데 힘을 다한 결과 일시적으로 상황이 나아졌으나, 주형(主兄)과 부제(副弟)가 다른 파인 까닭에 자연히 불화가 점차 드러나서 보리공을 끌어서 몰아내려 하였다. 보리는 평소에 공에게 좋게 보였기에, 마음으로 내키지 않았으나, 압박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보리가 울며 공의 인정에 호소하였다. 공은 이에 이화공을 찾아가 옳게 결단할 가르침을 청하였다. 이화공은 “선도(仙道)는 본래 우주의 청원(淸元)의 기(氣)에서 나왔다. 시비로서 서로 다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형인 모랑공(毛郞公)이 오직 그 전부를 얻었는데 불행하게 일찍 죽었다. 나는 못나서 그 도를 다 듣지 못하였다. 너희들은 모두 권세와 지위로써 위(位)를 계승하였기에, 아랫사람들을 다스릴 수 없다. 나는 마음속으로 그것을 부끄러워한다. 위(位)를 버리고 도를 구하여 참된 생이 되도록 하는 것만한 것이 없다” 하였다.

공은 이에 위를 그만두고 도에 전념하고자 하였다. 낭도들은 이화공이 스스로 풍월주가 될 계략으로써 공을 혼란시켰다고 생각하였다. 미실궁주가 걱정하였다. 이에 사도태후의 조칙으로 낭도대회를 열고 이화공과 세종공으로 하여금 연회를 베풀어 화합시키도록 하였고, 불복하는 사람들을 많이 등용하여 진정시켰없었다.188) 공은 어려서부터 사람을 잘 가렸고, 정이 치우치지 않아 …중망(衆望)이 있었다.(하종)공의 어머니가 미실 궁주였기 때문에 공 또한 대원신통이었다. 문노파가 불복하였기에, 미실은 화합토록 하고자 이화공의 아들인 보리공(菩利公)을 부제로 삼았다. 보리공의 어머니는 숙명공주였기 때문에, 보리공은 진골정통이었다. 진골은 지소(只召)를 종(宗)189)으로 삼았고, 대원신통은 사도(思道)를 종(宗)으로 삼았다. 진골(정통)의 조(祖)는 옥모(玉帽)로부터 출생하였고, 대원(신통)의 조(祖)는 보미(宝美)로부터 다. 이로써 가야파가 점차 다시 세력을 가지게 되어, 서현랑(舒玄郞)을 전방화랑(前方花郞)으로 삼았는데, 그 또한 대원신통이었다. 이것은 이화(二花)·미실(美室)·가야(加耶) 3파가 단결한 것이다.

그 때 궁중에는 삼태후가 있어 행정을 하였고, 대왕은 어질고 효성스러워서 어른들의 명을 받들어 따랐다. 그러므로 낭도 중 승진하기를 좋아하는 자들은 태후궁에 많이 붙었다. 태상태후(太上太后)인 사도법주(思道法主)192)는 미실궁주로서 법운(法雲)을 삼았다. 그러므로 정령(政令)이 미실궁에서 많이 나왔다. 그런데 법주의 딸 아양(阿陽) 공주가 곧 서현의 어머니였기에 가야파의 태양이 되어 미실의 세력을 나누었다. 만호태후(萬呼太后)는 (진평)대왕의 어머니193)로 더욱 상(上)의 총애가 있어서 진골정통의 수주(首主)가 되었다.

지도태후194)가 태상(太上)과 만호(萬呼) 사이를 출입하며 문노정파(文弩正派)를 도왔다. 그러므로 비보랑이 지도의 아들 용춘공을 천거하여 보리공을 대신하고자 하였는데, 만호태후가 들어주지 않았다. 용춘공이 비록 (부제의) 위에 오르지는 못하였으나, 낭도들이 많이 귀부하였다. 서현랑이 말하기를 “용춘공은 선군(先君)195)의 아들인데 내가 어찌 감히 상대가 되겠는가?” 하였다. 그 부제를 사양하여 용춘공에게 넘겨주었다.196) 이에 가야파가 또한 용춘공에게 돌아갔다. 역시 대원신통이었기에 미실파가 다투지 않았다. 낭도들이 축하하여 말하기를 “좋은 사람을 얻었다” 하였다. 보리공 또한 용춘공을 사랑하여 당을 달리하지 않기로 맹세하였다. 진골과 대원의 논쟁이 이에 비로소 완화되었다. 하종공이 비록 모주(母主)에게 효성스러웠으나 형세를 살펴서 따랐으므로 안으로는 그 논(論)에 찬성했으나 밖으로는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그 때 은륜공주가 왕의 총애를 잃었다. 곧 태상(太上)197) 태후의 막내딸이었다. 태상(태후)이 대원(신통)을 걱정하여 (하종)공에게 명하여 받들도록 하여 효종공을 낳았다. 이에 앞서 설원공의 딸인 미모낭주(美毛娘主)를 아내로 맞아 아들 모종을 낳았다. 효종의 누이는 하희와 월희라 하였다. 모종의 누이는 유모(柔毛)와 영모(令毛)라 하였다. 공은 검소하고 색을 삼갔으며 아랫사람을 사랑하고 윗사람을 공경하여 세종(世宗)의 풍모를 크게 가졌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공에게 복종하지 않는 사람도 끝내는 귀부하였다.

3년간 재위하다가 보리공에게 양보하며 말하기를 “앞선 풍월주들이 큰 성인이었는데도 오히려 3년간 재위하였는데 내가 어찌 감히 오래 머물겠는가?” 하였다. 보리공이 말하기를 “주형(主兄)은 곧 미실 원화의 아들이다. 어찌 뭇 화랑들과 더불어 같은 예로 하겠습니까?” 하였다. 공이 굳이 사양하였다. 보리공이 이에 풍월주의 자리에 올랐다. 보리공은 곧 나198)의 증조이다. 일찍이 나(김대문)의 아버지(오기공)에게 하종공을 칭찬하여 말하기를 “지금 세상에 이 같은 효자·충신은 없다” 하였다.
대개 미실궁주가 삼조(三朝)199)를 차례로 섬겼는데, 형제가 핏줄이 달라 움직이면 어려움이 많았다. 은륜공주 또한 골을 믿고 방탕하였다. 공은 한결같이 세종공이 미실을 대접하는 것처럼 하고 불문에 부쳤다. 태양공주는 은륜의 형으로 공과 더불어 가까이 살았는데 공을 유혹함이 심하였으나, 공은 한번도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공의 청렴과 지킴이 이와 같았다고 한다.

맑게 삼가고 덕을 닦아 훌륭한 명예를 지켰다. 세종의 아들이고 미실의 소생이다.


세종 조와 미생 조에 자세히 보인다.



169) 여성의 성기를 가리키는 것이라 생각된다.

170) 잉첩은 가까이 있어 시중드는 여자 종을 의미하나 여기서는 사도를 도와 왕을 모시는 것을 의미한다.

171) 사해(四海)로 되어 있다.

172) 사지는 관위로 보수를 주는 기준이다. 이에 3살인 하종에게 17등 중 13등인 사지를 준 것은 의미가 있다. 하종은 진골신분을 가졌다고 생각되는데 진골이 어떤 관등부터 갖게되는지 중요한 시사를 하여 주고 있다.

173) 내질(內秩)이 구체적으로 무슨 관직인지 알 수 없으나 내성(內省)의 장인 사신(私臣)이 아닌가 짐작이 간다.

174) 전군을 삼는 과정에 신궁에서 예를 행한 것을 주목할 수 있다.

175) 태자, 왕자, 전군으로 이어지는 왕의 아들들의 위계가 나타나 있다.

176) 단란(團欒): 친한 사람끼리의 모임.

177) 어디인지는 알 수 없으나 실제로 바닷가일 가능성이 있다. 이 경우 해신의 존재를 주목하게 된다. 한편 왕경 안에 있는 저택에도 연못들이 있어 그 중 어떤 저택을 해궁으로 부른 것은 아닌가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바닷가의 해궁의 존재를 생각하면 어디에 있었는지 고고학적인 관심의 대상이 된다.

178) 병부령은 법흥왕 3년(516)에 1인이 설치되었고 진흥왕 5년(544)에 1인을 더하였으며, 태종왕 6년(659)에 1인을 더하였다. 이 때는 병부령이 2인이 있었던 시기로 각기 우령과 좌령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179) 미치광이, 풍병(風患)을 의미하는데 풍병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180) 이들은 왕을 모시는 여자들로 각기 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보여준다.

181) 과거 현재 미래를 의미한다.

182) 진지왕을 의미한다.

183) 거칠부다.184) 『삼국사기』 4, 신라본기 4 진지왕 원년(576)이찬 거칠부(居柒夫)를 상대등으로 삼아 국사를 맡겼다고 나와 있다. 185) 중망(衆望)은 뭇 사람들의 촉망, 뭇 사람들로부터 받는 신용과 인망을 의미한다. 186) 거칠부는 황종의 향음이다. 오기공이 향음으로 『화랑세기』를 저술하였는데, 김대문이 한자로 바꾸는 과정에 이 곳에서는 거칠부를 그대로 둔 것을 볼 수 있다. 187) 진흥왕이다. 188) 글자를 모두 읽을 수 없어 문제가 된다. 그러나 하종공의 행동을 듣고 사람들이 중하게 여기지 않음이 없었다 정도로 해석이 되어야 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189) 당시 살아 있는 진골정통의 ‘으뜸’ 또는 ‘우두머리’ 정도로 해석된다. 190) 진골정통과 대원신통을 이어나가는 구조를 보여준다. 조(祖)는 진골정통과 대원신통의 시작이며 근본 기준이 되고 종(宗)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기준점이 된다. 191) 여기서 말하는 양골은 진골정통과 대원신통을 가리킨다. 192) 24대 진흥왕의 왕비이다. 193) 만호태후는 진평왕의 어머니이고 동륜태자의 부인이다. 194) 25대 진지왕의 왕비이다. 195) 진지왕을 가리킨다. 196) 12세 보리공 조에 서현랑이 부제의 지위를 용춘공에게 물려준 사실이 나온다. 197) 진흥왕의 왕비였던 사도태후를 의미한다. 198) 나(予)는 『화랑세기』를 저술한 김대문을 가리킨다. 199) 진흥 진지 진평의 세 왕을 모신 것을 의미한다.


〈菩利 癸巳生 辛亥花郞主〉

十二世菩利公者 二花公之次子也 母曰叔明公主 乃只召太后女也 世宗公之胞姊也 公主夢見黃色神鹿而生公 生而穎異有大志 及長 與伯氏圓光法師力學不怠

圓光嘗敎之曰 吾爲佛爾爲仙則 可以安吾家國 公乃就夏宗公門 屬其郎徒 公少夏宗公九歲而情意相投 無異胞生 公之母叔明公主孝友出天 愛世宗公如嬰兒 世宗公事公主如太后

美室入宮而 世宗公出征 公主與美室不協而 夏宗公乃公主之姪 故特愛之如子 嘗謂曰 吾父苔宗角干卽汝祖也 不天不地之大英雄也 汝宜奉之爲神 盖諷之以學父而無學母也 夏宗公內明 故自知其所敎而 有若不辨者 美室以阿時公·玉珍宮爲其護神故也

公初屬夏宗公 引入神宮 拜法興與玉珍交神像 先拜玉 而後帝 公不可之曰 吾等今日之貴 皆先帝賜也 何後之乎 夏宗公曰 先帝亦曰 億兆以朕爲神 朕以玉珍爲神 雖英失公亦先拜于宮而拜帝 此其像也 盖美室之所敎也 公不得已從之 次拜阿時公 (理)○○苔宗公 公又疑其序 而不爭之 ?○○○母弟不孝母也 夏公曰 敀語叔(明) ○○○?與苔宗公可也 盖兩公孝母之心??也

時建福二年也 公年十三 夏宗公爲右方大花郞 故公特超右方花郞 美生公羨之曰 汝勝于我也 公盡忠于主兄 未嘗離側違命 美室亦稱之曰 公主有好子 幸多于我 每有宮中賜食 必招公授之曰 吾好姪也 善保爾兄 公主以此少緩舊感 晩相往來 盖公力也

時萬呼太后與公主 力贊眞骨正統 美室懼之 欲以艾含配公 萬呼不聽 以其女萬龍娘主爲嫡妻 公年才十三而萬龍七歲也 二花公以其幼嫌之 公主曰 思道亦以七歲配大帝而 尙有魚水之樂 何嫌之有 二花不復言

先是萬呼太后愛公之胞兄貞肅太子 生萬龍 至是聞美室女艾含將配于公 慮大元統之簒奪眞統 特欲授之 乃招萬龍于膝而 問之曰 思道太后七歲而嫁 能善事帝 汝亦能之乎 萬龍曰 夫誰也 以公對則 萬龍喜之曰 好吾兄也 願嫁之 太后乃親詣神宮 告之以公主禮 行吉于鮑祠 公常於太后宮負萬龍而遊 故吉禮畢 而萬龍請負于公 公喜許之 太后笑曰 昔兄妹而今夫妻也 妻不當如是 叔明曰 夫妻而兄妹也 何妨乎 遂命公負妻而朝太后 公與娘主朝??負而進之 時人美之

公之姊花(明)○○○與夏宗公善 美室旣失公于萬(龍) ○○○明以爲夏宗公嫡妻 萬呼不聽 皆納○○ 美室不悅 公以好言慰之曰 雖不婚姻 姪以叔母爲母 主兄爲胞兄也 如是而過 豈無又婚之日乎 美室喜而乃解曰 汝眞吾子也 又何婚乎 公間于兩統 而能和解彼此

美室乃勸夏宗公傳位 公辭之不得 乃得位 建福八年 春正月也 以舒玄郞爲副弟 舒玄郞者阿陽公主之子也 有英達之氣 太上太后愛之 命夏宗公爲前方花郞 建福二年 與公俱爲右方花郞 建福五年 夏宗公爲主 以公爲副弟 以舒玄郞爲右方大花郞 使屬于公 至是以爲副弟 以龍春公爲右方大花郞

時萬龍之兄萬明 年長而未許 乃與舒玄郞私之 萬呼素與阿陽不洽 故怒而不許 命公以龍春公代舒玄郞 舒玄亦辭其位 以讓于龍春公 而萬明之情愛愈篤 密相逐奔 萬呼乃欲囚萬明而 流舒玄于萬弩 萬明乃脫而同走 太后益怒將罪之 公與萬龍力解得保時公之女兄花明·玉明 皆事眞平大王有寵 故朝廷欲重用公 公不就曰 吾家世襲花郞足矣 又何用官乎

公淸潔自守 而娘主以太后愛女 賞與甚多 故家道甚侈 公謂娘主曰 我以郎徒之君 豈可獨享富貴乎 吾妻願察我心 娘主曰 夫婦一體 郞君之心卽妾之心 有何不可乎 乃盡散之 郎徒以此仰若父母 凡有患難之人 公與娘主偕往慰護 時人比之二聖之巡治 娘主以王妹之貴 能盡婦道 公有小疾 親自扶持 飮食衣服 親調涉進而必合旨味 故公感之 不育他色 情好無比

晩生一子一女 子曰禮元 女曰宝龍 乃卽我文武王后之母也 庶子菩太·菩好 庶女菩丹·利丹者 皆萬龍娘主枕婢厚丹生也 初比臺公女厚滿 通薛原公生厚丹 萬龍生 厚滿以秘宝郞庶妹入爲乳姆 以故厚丹爲枕婢 旣婚 太后以公年長而妻幼 命婢奉公 公拒之不親 娘主悶之 與厚丹築壇于苑 禱速長

公以建福八年春正月十五日 就主位 娘主才尙十三 公幼之而欲 竣南桃之禮 娘主曰 君爲郎徒之父 而妾不成母道恥也 乃行而成好 公奇之則 娘主曰 厚婢敎我以道也 願郞君妾之

公雖稱其功而未許 娘主乃請于帝 帝乃召公責之曰 厚丹雖婢比臺殿君之孫 而薛原上仙之女也 可以妾之 公乃幸生子 公歎曰 嫡未生而庶先出 是吾過也 娘主慰之曰 何有先後乎 若願吾出則取以爲子 不亦可乎 厚丹乃獻其子于娘主 而不敢受幸 日夜禱子于娘主 太后聞之 亦禱于宮中 卜之 卜者曰 郞君?○娘主故不暇産也 可有妾而間?○○○ 以此言諫公 公乃悟之 乃問于○○○○禮元公 命還厚丹子女 時公主等皆有○臣 妾無定夫而 唯公妻妾獨不二行 骨人美之

公居主三年而傳于副弟龍春公 位雖上仙 而身侵佛門以助伯氏 萬龍·厚丹亦皆落彩爲尼以奉公旨 萬龍常禱同日成佛 果如其言 於戱盛哉 公之晩年事 出高僧傳


菩利沙門 魏公之孫 德合萬龍 恩海如山 功高佛門 萬世唯尊
父曰二花郞 乃魏花郞之子也 母曰叔明公主 乃只召太后之女也 二花公以毛郞公妻弟 同事只召太后有寵 毛郞公卒 二花公繼毛郞爲太后私臣 叔明公主時以皇后之尊 沈服于二花公之美 棄骨品如草介 約以同穴之友 携手出宮 終身不二行 若狼狽之相倚 議者有非之 靜而思之 不亦壯乎 當其出宮相奔之際 帝怒赫 斧鉞在前 命如寸髮 猶能抱愛不屈 以生我神國大聖人圓光大法師 固天也而 盛矣 至矣


〈보리(菩利) 계사년(573) 생이고 신해년(591)에 화랑주가 되었다.〉

  12세 (
 풍월주)  보리공(菩利公)은 이화공의  차자(次子)이다. 어머니는  숙명공주(叔明公主)인데 곧  지소태후의 딸이다.  세종공과 한배의 맛 누나이다.

  (숙명)공주가 꿈에 황색의
 신록(神鹿)을 보고 공을 낳았다. 나면서 보통 사람보다 뛰어 났고 큰 뜻을 가졌다. 자람에 따라 맏형인  원광 법사와 더불어 배움에 힘써 게으르지 않았다.  원광이 일찍이 가르쳐 말하기를 “나는 부처(佛-실제는  승려)가 되고 너는 선(仙-실제는 화랑)이 되면 우리나라를 평안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200)

  (보리)공은 이에
 하종공(夏宗公)의 문하에 나아가 그 낭도에 소속되었다. 공은  하종공보다 9살이 적었는데, 감정과 생각이 서로 투합하여 같은 배에서 출생한 것과 다름이 없었다. 공의 어머니  숙명공주는 효성과 우애가 하늘로부터 타고나서,  세종을 어린아이처럼 사랑하였고,  세종공은 공주를 태후처럼 모셨다.

  미실이
 입궁하고  세종이 출정하자, (숙명)공주가 미실과 더불어 화합하지 않았으나,  하종공은 곧 공주의 조카인 까닭에 공주가 특별히 아들처럼 사랑하였다. 한 번은 말하기를 “나의 아버지인 태종 각간(苔宗角干)은 곧 너의 할아버지이다. 하늘에 다시없고 땅에도 다시없는 대 영웅이다. 너는 마땅히 받들어 신(神)으로 삼아야 한다” 하였다. 대개 아버지에게서 배우고 어머니에게는 배우지 말라는 것을 풍자하여 가르친 것이다.  하종공은 속으로 명석한 까닭에 그 가르침을 스스로 알았으나 알아듣지 못한 것처럼 한 것은 미실이  아시공 옥진궁(주)를  호신(護神)으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보리)공이 처음에
 하종공에게 속하였을 때  신궁에 따라 들어가서  법흥과 옥진의  교신상(交神像)201)에 절을 하는데, 옥진에게 먼저 절하고 후에  제(帝)에게 절을 하였다. 공이 옳지 않게 여겨 말하기를 “우리들이 오늘 귀한 것은 모두  선제(先帝)가 내려준 것인데, 어찌 그를 뒤로 합니까?” 하였다.  하종공이 “ 선제 또한 말하기를 ‘억조창생이 나를 신으로 여기는데 나는 옥진을 신으로 여긴다’ 하였으며  영실공 또한  옥진궁(주)에게 먼저 절하고 나서  제(帝)에게 절했다. 이것이 그 상(像)이다. 대개 미실이 가르친 바이다” 하였다. 공이 부득이 따랐다. 그 다음에  아시공에게 절을 하였다. … 태종공(苔宗公) ….202) 공은 또한 그 순서에 의심을 가졌으나 따지지 않았다. …하는 것은 모제(母弟)로서 어머니에게 불효하는 것이다.  하종공이 말하기를 “돌아가 숙명에게 말하기를 …  태종공과 더불어 …이 옳다고 말하라”203) 하였다. 대개 양공의 어머니에게 효도하는 마음 … 이다.

  그 때가
 건복(建福) 2년(585)으로 (보리)공의 나이 13살이었다.  하종공(夏宗公)이  우방대화랑(右方大花郞)이 되었다. 그러므로 공은 특별히 뛰어넘어  우방화랑이 되었다. 미생공이 부러워하여 말하기를 “너는 나보다 낫다” 하였다. 공은  주형(主兄)에게 충성을 다하여 곁을 떠나거나 명을 어긴 일이 없었다. 미실 또한 칭찬하여 말하기를 “(숙명)공주에게 좋은 아들이 있으니 행운이 나보다 많다” 하였다. 매번 궁중에서 음식을 내리면, 반드시 공을 불러 주며 말하기를 “나의 사랑하는 조카야! 너의 (하종) 형을 잘 도와라” 하였다. 공주는 이에 오래된 감정이 조금 누그러들었다. 만년에는 서로 왕래하였으니 대개 공이 힘쓴 때문이다.그 때  만호태후와 (숙명)공주는 힘써  진골정통을 도왔다. 미실이 두려워하여 애함(艾含)을 공과 결혼시키려 하였다. 만호가 거절하고 그의 딸  만룡 낭주를 공의  적처(嫡妻)204)로 삼았다. 공의 나이 겨우 13살이었고,  만룡은 7살이었다. 이화공이  만룡이 어리기 때문에 꺼렸다. 공주가 “사도 또한 7살에 (진흥)대제에게 시집갔는데, 오히려 부부의 즐거움이 있었다. 무엇 때문에 꺼리는가?” 하였다. 이화공은 다시는 말하지 않았다.

  이에 앞서
 만호태후는 공의  포형(胞兄)205)인  정숙태자(貞肅太子)를 사랑하여  만룡을 낳았다. 이에 이르러 미실의 딸인 애함(艾含)을 공에게 시집보내려 한다는 말을 듣고,  대원신통 진골정통을 빼앗을까 염려하여, 특히  만룡을 주려고 한 것이다. 이에  만룡을 불러 무릎에 앉히고 묻기를 “사도태후는 7살에 시집을 가서 (진흥) 제(帝)를 잘 모셨는데 너 또한 능히 할 수 있느냐?” 하였다.  만룡이 말하기를 “지아비가 누굽니까?” 하였다. (보리)공이라 대답하자,  만룡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나의 좋은 형입니다. 시집가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태후는 이에 친히  신궁에 가서 공주례를 고하고 포사(鮑祠)에서  길례(吉禮)206)를 행하였다.

  공은 늘
 태후궁에서  만룡을 업고 놀았다. 그러므로  길례가 끝나자  만룡이 공에게 업어 줄 것을 청하자, 공이 기뻐하며 허락하였다. 태후가 웃으며 “지난날  형매(兄妹)가 지금은 부처(夫妻)가 되었다. 처는 이와 같으면 안 된다” 하였다. 숙명이 “부처이자  형매입니다.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마침내 공에게 처를 업고 태후를 뵈러 가도록 명하였다. 공과 더불어  낭주가 (태후)를 뵈러 업고 나아가니, 당시 사람들이 아름답게 여겼다.

  (보리)공의 맛 누이
 화명(花明)은 …  하종공과 더불어 좋아하였다. 미실은 이미 (보리)공을  만룡에게 빼앗겼다. … (화)명을  하종공 적처로 삼으려 하였는데, 만호가 들어주지 않고 모두 …(으로)207) 받아들였다. 미실이 좋아하지 않았다. (하종208))공이 좋은 말로 위로하기를 “비록 혼인을 하지 않았으나, 조카( 보리공)가 숙모(숙명)를 어머니로 삼고,  주형(主兄,  세종)이  포형(胞兄, 숙명의 오빠)이 됩니다. 이러한 상태로 세월이 가면 어찌 또 혼인하는 날이 없겠습니까?” 하였다. 미실이 기뻐하고 마음을 풀며 말하기를 “너는 진정으로 나의 아들이다. 또 무슨 혼인을 하겠느냐?” 하였다. 공209)은 양 통210)의 사이에서 이쪽저쪽을 능히 화해시켰다.

  미실은 이에
 하종공에게  풍월주의 지위를 전하도록 권하였다. (보리)공은 사양하였으나 어쩔 수 없이  풍월주가 되었으니,  건복(建福) 8년(591) 정월이었다.  서현랑을 부제로 삼았다.  서현랑은 아양공주(阿陽公主)의 아들인데 영특하고 통달한 기풍이 있어,  태상태후가 사랑하였다.  하종공에게 명하여  전방화랑을 삼았다.  건복(建福) 2년(585)에 (보리)공과 더불어  우방화랑이 되었다.  건복(建福) 5년(588)  하종공 풍월주가 되자, (보리)공을 부제로 삼고  서현랑을  우방대화랑으로 삼아 공에게 속하도록 하였다. 이에 이르러 공이  서현랑(舒玄郞)을 부제로 삼고  용춘공(龍春公)을  우방대화랑으로 삼았다.그 때  만룡의 형인  만명(萬明)은 나이가 들었으나 혼인을 허락받지 못했는데  서현랑과 사(통)을 하였다. 만호는 원래 아양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러므로 노하여 불허하고 (보리)공에게 명하여  용춘공 서현랑에 대신하도록 하였다.  서현 또한 그 지위를 사양하여  용춘공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나 만명의 정과 사랑은 더욱 굳어져 몰래 서로 도망하여 만났다. 만호는 이에 만명을 가두고  서현 만노로 내치려 하였다. 만명은 탈출하여 함께 도망하였다. 태후는 더욱 노하여 벌을 주려 하였다. 공과  만룡이 힘써 태후의 노여움을 풀어 무사하게 되었다.

  그 때 (보리)공의
 여형(女兄)인  화명(花明)과  옥명(玉明)이 모두  진평대왕을 섬겨 사랑(寵)을 받았다. 그러므로  조정에서는 공을 중용하고자 하였다. 공은 나아가지 않고 말하기를 “우리 집은 화랑을 세습하는 것으로 족하다. 다시 무엇 때문에 관리로 등용 되겠는가?” 하였다.

  (보리)공이 청렴결백하며 지조를 지켰으나, (
 만룡) 낭주(娘主)는 태후의 사랑하는 딸이었기 때문에 내리는 재물이 심히 많았다. 그러므로 집안 생활이 몹시 사치스러웠다. 공이  낭주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낭도의 우두머리(君)로 어찌 홀로 부귀를 누리겠는가. 나의 아내는 나의 마음을 헤아려 주기 바란다” 하였다.  낭주가 말하기를 “부부는 한 몸입니다. 낭군의 마음은 첩의 마음입니다. 어찌 안 될 일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그 재물을 모두 나누어 주었다. 그 때문에 낭도들이 우러러보기를 부모와 같이 하였다. 무릇 근심과 재난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공과  낭주는 함께 가서 위로하고 구호하여 주었다. 그 때 사람들이 두 성인이 순행하며 다스리는 것에 비교하였다.  낭주는 왕의 누이라는 귀한 신분으로 지어미의 도리(婦道)를 다하였다. 공이 조금만 아파도 몸소 간호했으며 음식과 의복도 친히 조리하고 손질하여 올렸는데 반드시 공의 취향에 맞았다. 그러므로 공이 고맙게 여겨 다른 여자를 거느리지 않았고, 금슬이 비할 바 없이 좋았다.늦게 한 아들과 한 딸을 낳았는데 아들은 예원(禮元)이라 하고, 딸은  보룡(宝龍)이라 하였으니 곧 우리  문무왕후의 어머니이다.  서자 보태(菩太)와  보호(菩好)이고  서녀 보단(菩丹)과  이단(利丹)인데, 모두  만룡 낭주 침비(枕婢)  후단(厚丹)이 낳았다. 처음에 비대공의 딸  후만(厚滿)이 설원공과 통하여  후단을 낳았다.  만룡이 출생하자,  후만 비보랑 서매(庶妹)로 들어와  유모(乳姆)211)가 되었다. 이 까닭에  후단 침비가 되었다. 혼인을 하고 나서 태후가 공은 다 자랐으나 처는 어리다는 것을 고려하여 비(婢)에게 명하여 (보리)공을 모시도록 하였다. 공은 거절하고 동침(親)하지 않았다.  낭주가 걱정하여  후단과 더불어 뜰에 단을 쌓고 ( 낭주가) 속히 자라기를 빌었다.

  (보리)공은
 건복(建福) 8년(591) 춘정월 15일에  풍월주의 지위에 나아갔다. (만명) 낭주는 아직 겨우 13살이었다. 공은 어리다고 하여  남도(南桃)의 예를 멈추려 하였다.212)  낭주가 말하기를 “군(君)은 낭도의 아버지인데 첩이  모도(母道)213)를 이루지 못하면 수치입니다” 하였다. 이에 ( 남도의 예를) 행하고 사랑을 하였다. 공이 기이하게 여긴즉,  낭주가 “후비(厚婢)가 나에게 도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낭군이 그녀를 첩으로 삼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공은 비록 그 공을 칭찬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낭주가 ( 진평) 제(帝)에게 청하였다.  제(帝)는 이에 공을 불러 꾸짖어 말하기를 “ 후단(厚丹)이 비록 비(婢)이나 비대 전군의 손이고 설원  상선의 딸이다. 첩으로 삼을 수 있다” 하였다.214) 공은 이에 ( 후단을) 사랑(幸)을 하여 아들을 낳았다. 공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 적자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는데  서자가 먼저 나왔으니 이는 나의 잘못이다” 하였다.  낭주가 위로하여 말하기를 “어찌 선후가 있습니까. 만약 제가 낳기를 원하면 곧 데려다 아들을 삼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후단이 이에 그 아들을  낭주에게 바쳤고 감히 사랑(幸)을 받지 못하였다. 낮이나 밤이나  낭주에게 아들이 생기도록 빌었다. 태후가 듣고 또한 궁중에서 빌고 점을 치니, 점장이가 말하기를 “낭군(郞君)은  낭주를 … 때문에 출산할 겨를이 없습니다. 가히 첩이 있어 사이에…다” 하였다. 이 말을 공에게 간하니, 공이 이에 깨달았다. 이에 …에게 물었다.  예원공(을 낳자)  후단의 자녀를 돌려주도록 명하였다. 그 때 공주 등이 모두 ○신(○臣)을 가지고 있어 정해진 지아비가 없는데, 오직 공의  처첩이 유독 배반하지 않았다.  골인(骨人)들이 아름답게 여겼다.

  공은 3년간
 풍월주의 위(位)에 있다가, 부제인  용춘공에게 전하여 주었다. 위(位)는 비록  상선(上仙)이었으나 몸은  불문(佛門)에 바쳐  백씨(伯氏)를 도왔다.  만룡 후단 모두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어 공의 뜻을 받들었다.  만룡은 늘 같은 날  성불할 것을 기도하였는데, 과연 그 말과 같이 되었다. 공의 만년의 일은 『 고승전(高僧傳)』215)에 나온다.


보리 사문 위화랑공의 손이고 덕은  만룡과 화합하고 은혜는 바다나 산과 같고 공(功)은  불문에 높고 만세에 오직 우러러본다.

아버지는  이화랑인데 곧  위화랑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숙명공주인데 곧  지소태후의 딸이다. 이화공이  모랑공의 처의 동생으로 함께  지소태후를 섬겨 사랑을 받았다.  모랑공이 죽자 이화공이  모랑을 이어 태후의  사신(私臣)이 되었다.  숙명공주는 황후의 지위로 이화공의 아름다움에 깊이 빠져  골품(骨品)을 초개처럼 내버리고,216)  동혈(同穴)217)의 벗이 되기로 약속하여 손을 잡고  출궁하여 종신토록 배반하지 않는 것이 마치 랑(狼)과 패(狽)가 서로 의지하는 것 같았다.218) 평자(評者) 중에는 비난하는 자도 있으나, 가만히 생각하면 또한 장하지 않은가! 눈이 맞아  출궁했을 때, (진흥)제의 노여움이 혁혁하며 무거운 형벌이 앞에 있어 목숨이 털끝 같았으나, 오히려 부둥켜안고 사랑하며 굴하지 않아 우리  신국(神國)의 대성인  원광 법사를 낳았으니, 진실로 하늘의 뜻이다. 성대하고 지극하도다.


200) 화랑도가 불교와 관계를 갖게 된 것은 신라의 불교수용과 확장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것이 분명하다.

201) 신궁에는 화상, 신상 등이 있었던 것이 확인된다.

202) 아시공에게 먼저 절하고 태종공에게 절한 것은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203) 글자가 없어 정확한 문맥은 알 수 없다.

204) 嫡妻: 『화랑세기』에는 처첩의 구별이 분명하게 나오고 있다.

205) 숙명은 진흥왕과의 사이에 정숙태자를 낳았고, 이화랑과 사이에서 원광과 보리공을 낳았기에 보리공과 정숙태자는 아버지가 다른 즉 씨 다른 형제가 된다.

206) 고대 5례의 하나, 신을 제사하는 예(禮)를 의미한다.

207) 화명과 옥명은 진평왕의 후궁으로 들어간 바 있다.

208) 보리공의 어머니 숙명은 세종의 누이이며 세종이 미실과 혼인하여 하종을 낳았다. 따라서 하종이 아니라 보리공으로 보면 뒤의 기록에 나오는 인물들의 관계가 설명이 안 된다.

209) 보리공일 것으로 생각된다.

210) 진골정통과 대원신통을 가리킨다.

211) 乳姆는 원래 乳母일 수 있으나 姆의 뜻에 여스승이라는 의미가 있어 유모(乳母)의 의미가 단순히 젓어미인 유모(乳母)만을 의미하지는 않을 수 있다.

212) 원문을 사( )로 읽으면 미루려 하였다로 해석할 수도 있다.

213) 모도(母道)는 잘 알 수 없으나 성호(成好)하여 남녀관계를 갖는 것을 뜻한다.
214) 당시 첩이 될 수 있는 조건을 볼 수 있다.

215) 『삼국사기』 46, 열전 6의 뒷 부분에 김대문에 대하여 본래 신라의 귀문 자제이고 성덕왕 3년(704)에 한산주 도독이 되었다고 나오고 있고 이어 전기 약간 권을 지었다고 하며 『고승전』, 『화랑세기』, 『악본』, 『한산기』가 아직도 남아 있다고 나와 있다. 이에 『고승전』, 『화랑세기』 등의 책들이 『삼국사기』 편찬 당시까지 남아 있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216) 숙명은 진흥왕의 왕비인데 이화랑을 사랑하여 그 지위를 버린 것을 보여준다. 숙명은 골품을 초개와 같이 버리고 이화랑과 함께 출궁을 하였다. 진흥왕의 왕비였던 숙명은 성골이 분명하다. 그런데 골품을 버리고 출궁을 한 것은 성골신분을 버린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당시 성골들이 3궁으로 구성된 왕궁에 거주한 집단인 것을 볼 수 있다(李鍾旭, 「新羅 ‘部體制說’에 대한 비판」 - 하나의 새로운 新羅史體系를 위하여-, 『韓國史硏究』101, 1998, pp 9-12 참조).

217) 부부가 사이가 극히 좋은 것을 의미하고 부부가 죽은 뒤에 같은 구덩이에 묻힌다는 뜻이다.

218) 狼은 앞다리가 길고 뒷다리가 짧고 狽는 앞다리가 짧고 뒷다리가 길어 그 두 짐승이 나란히 걷다가 서로 떨어지면 넘어지게 되므로 당황함을 나타내는 말로 쓰고 도중에 실패하는 것,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몹시 딱한 형편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서로 의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龍春 戊戌生 丙辰郞主〉

十三世龍春公者 金輪王之子也 母曰智道太后 乃起烏公之女也 起烏公以善兮皇后之私子 娶思道太后胞妹興道娘主 生智道 初入銅太子宮 太子未薨而 與金輪王私之 及薨寵愈篤 及卽位以爲皇后生公

性慍恭好? 不與貪蕩之遊 眞平大王奇其?○○○(郞)輔導之 得二花·文弩之學 善○○○○之道 公姊龍明公主 乃眞興女也 事眞平有寵 極扶公地 使得主位

公兄龍樹殿君 或作銅太子子 或作金太子子 未詳其眞 殿君列記曰 公乃龍樹葛文王之弟也 金輪王以荒亂見廢 居幽宮三年而崩 公尙幼而不識其面 智道太后以太上太后命復事新王 公呼新王爲父 以此王憐之寵遇殊重 旣長乃慨然 入文弩之門 事秘宝郞爲兄 與庶弟鼻荊郞 務拾郞徒 以此大衆歸之 三派皆願戴之 以此舒玄郞以位讓之云

至是乃爲十三世 以虎林公副之 公乃革郎徒舊習 一以人材拔之 不拘骨品 曰 骨品者王位臣位之別也 郎徒何用骨品乎 有功者賞 法之常也 何用派爲 衆大洽曰 文弩之治 可以復明矣

先是美生公多嬖妾 九部郞頭皆用妾屬 故郎徒爭進其女屬以結花郞者 名之曰新善骨 菩利公憂之 雜用三派 以均其勢 名之均登 故雖有功者 若礙于均登 則沈滯之

時有大男甫者 勇敢能事 有急人之風 衆皆仰之 而無善骨之品 而又乏均登之力 或勸大曰 君女美 何不薦于新主而得骨品乎 大曰 吾輩賤人也 安敢以女色迷主乎 公聞之 奇其言 召郞頭別將問之曰 大男甫才可爲郎頭乎 曰 可矣 而無骨(品)○○○功何如 曰 有保上同徒出征之所○○ 對上尙未遷故不得也

公曰 對上誰也 曰 曹心甫也 公曰 曹功過大乎 別將曰 曹雖無功 爲大之對上 若遷大則 必先登曹 此三派均登之法也 公笑曰 以不才者爲才者之對上 而不遷其才則 才將腐矣 骨與派將何用 乃三遷大男甫 拜爲郎頭 不平者詣上仙 而欲規之 文弩公曰 法愈日新 吾等皆老 何窘新主乎 以此美生公亦不言 故舊習革矣

大男甫之女 爲公而自貞 不肯遊花 公悶之 累言不可 大曰 一女何足惱公乎 公曰 吾所以不幸 恐人之謂我私汝也 女聞而悲 自投于井 郞頭等乃叩頭于公曰 使至于此者 臣等之過也 公不得已納之 卽日免男甫曰 父女不可事一人也 男甫喜曰 知己則足矣 何須論位乎

帝聞之 乃擢男甫爲公宮舍知 以掌財用 男甫素富 盡傾其財以爲公用 得死士百人以護公 公未嘗知之 公一日與從者微服遊街 小兒唱之曰

納妻而富七子皆騎

納女而貧三子皆麻

公問之 從者不言

及至男甫家 其妻與三子績麻手皮 見公匿之 公乃責從者不直言 從者服之曰 唐斗之七子皆榮 而男甫三子皆賤 故巷有是謠 公惻然良久曰 是吾過也 乃薦其長子郝熱于乘府授烏知 復托其二弟?○○○ 曰 男甫爲我而貧 吾將辭位 君其○○ (虎)林公就位 皆用爲郎頭 男甫戒其子無辱父名 三子皆以忠節爲尙 建福二十年 公與秘宝郞 從帝于漢水之戰 男甫以功授大奈麻不受時大王無嫡子 欲以公之兄龍樹殿君爲婿以傳之 殿君問於公 公曰 大王春秋方强 倘有嗣則恐不幸也 殿君以此讓之 而摩耶皇后不聽 遂以殿君爲婿 卽天明公主之夫也

先是公主心慕于公而 私言于后曰 男子莫如龍叔 后以爲龍樹而誤嫁之也 公主乃私告于公曰 妾所本慕者乃君也 公曰 家道以長爲貴 臣何敢如兄乎 公主益愛公 扶公地于帝 累遷 公階位同龍樹公 龍樹公知公主意 欲讓公主于公 公力拒之 摩耶皇后夜宴于宮中 召公 使之混處公主 龍樹公亦常稱病 命公侍公主而慰公主之心 公未嘗自懈肆情 以此公益重於內

及以位讓虎林公 入居樞要 大舍以下多用郎徒之有才者 以此郎徒之登用者 亦甚重公 皆願死效

善德公主漸長 龍鳳之姿 天日之表 可以嗣王 時摩耶皇后已崩 無他嗣子 故大王屬意公 勸公主讓其位 公主孝順乃讓之而出宮 善德以爲公能扶己 請爲私臣 大王乃命公奉之 善德聰慧好情 公知不可當固辭 不得乃奉之而 果無嗣 請退 大王乃命龍樹公侍 亦無嗣

時僧滿皇后○○生子 欲代善德之位而夭殤 僧滿忌公兄弟 公乃出外 及出征高句麗有大功 進封角干 龍樹殿君臨薨 以夫人及子托于公 其子乃太宗我皇也 夫人乃天明公主也 初龍樹公娶天花公主 及娶天明公主 以天花公主賜于公 生子早卒 及侍善德公主 帝以天花公主賜白龍公 善德公主卽位 以公爲夫而 公以無嗣請自退 群臣乃議三婿之制 欽飯公·乙祭公副之 公素哀金輪荒色見廢 性不好色 無媚主之意 退意愈堅 善德乃委政于乙祭 而許公退居 公乃以天明公主爲妻 以太宗爲子

先是以王命 居昊明宮 生五女 無他嫡子 故太宗子之 庶子五人 曰龍山·龍石者 大氏生也 曰龍貴者 美生公女梅生生也 龍珠·龍凌者 秘宝郞公女紅珠生也 庶女十八人 龍山之妹龍泰 事太宗 生仁泰角干 龍珠之妹龍宝 事太宗 生車得·馬得兩公 公淸淡踈色 子孫自昌 人以爲有德者昌也 他不盡記而皆貴顯

公晩好琴碁 與天明·昊明兩宮 置酒山宮 圍碁彈琴 侍妾五人皆雍容奉事 太宗極盡其孝以致安樂 太和元年八月薨 壽七十 太宗卽位追尊葛文王 於戱盛矣 公之聖德 如天如地 永世不泯

葛文之德 日月幷明 三韓之業 賴以大成


〈용춘(龍春)은 무술(戊戌)년(578) 생이고 병진(丙辰)년(596)에 낭주(郎主)가 되었다.〉

  13세 (
 풍월주)  용춘공(龍春公)은 금륜왕(金輪王)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지도태후인데 곧  기오공(起烏公)의 딸이다.  기오공 선혜황후 사자(私子)로 사도태후의  포매(胞妹)인  흥도낭주(興道郎主)를 아내로 맞아 지도(智道)를 낳았다. 지도가 처음 동(륜) 태자 궁에 들어갔을 때  태자가 아직 죽지 않았는데, 금(륜) 태자와 더불어 사랑(私)을 하였다. 동 태자가 죽자 총애가 더욱 도타워졌다. 금 태자 즉위하자 황후가 되어 공을 낳았다.

  (용춘)공의 성품은 온화하고 공손하였으며 …를 좋아하였고 탐욕스럽고 방탕한 놀이에는 끼이지 않았다. 진평대왕이 그 …를 기특하게 여겨, …랑에게 (용춘)공을 지도하게 하였다. 이화(二花)와 문노(文弩)의 학(學)을 얻어 …의 도를 잘하였다. 공의 손 윗누이인 용명공주는 곧 진흥의 딸이다. 진(평)을 섬겨 총애가 있었다. 공의 처지를 열심히 도와 (풍월)주의 지위를 얻게 하였다.

  (용춘)공의 형인
 용수전군(龍樹殿君)은 혹은 동 태자의 아들이라고 하고 혹은 금 태자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그 진실은 알 수 없다. 『 전군열기(殿君列記)』에 이르기를 “공은 곧 용수  갈문왕의 동생이다. 금륜왕이 음란함에 빠졌기(荒亂) 때문에 폐위되어  유궁(幽宮)에 3년간 살다가 붕(崩)하였다. 공은 아직 어려 그 얼굴을 몰랐다.  지도태후 태상태후의 명으로 다시  신왕( 진평왕)을 섬기자 공은  신왕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이 때문에 왕이 가엾게 여겨 총애하고 대우함이 매우 도타웠다. 자라자 곧 슬퍼하며 문노의 문하에 들어가,  비보랑을 형으로 섬기고 서제인  비형랑(鼻荊郞)과 함께 힘써 낭도를 모았다. 그러자 대중이 따랐고 3파가 모두 추대하고자 하였으므로,  서현랑이 위를 물려주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13세 (
 풍월주)가 되었고,  호림공(虎林公)을 부제로 삼았다. (용춘)공은 곧 낭도의 구습을 고쳤다. 한결같이 인재를 뽑는데  골품에 구애받지 않았으며, 말하기를 “ 골품이란 것은  왕위 신위를 구별하는 것이다.219) 낭도에  골품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공이 있는 자에게 상을 주는 것이 법의 원칙이다. 어찌 파로서 다스리겠는가?” 하였다. 무리들이 크게 화합하여 말하기를 “문노의 다스림이 다시 밝아졌다” 하였다.
이보다 앞서 미생공은 많은
 폐첩(嬖妾)220)이 있었다. 9부  낭두(郎頭)들이 모두 첩을 통하여 청탁을 하였다. 그러므로 다투어 그 딸을 바치고 청탁을 하였는데, 화랑과 맺어진 낭도들을 이름 하여 ‘ 신선골(新善骨)’이라 하였다.  보리공이 염려하여 3파를 섞어 등용하고 그 세력을 고르게 하였는데, 이름 하여 ‘ 균등(均登)’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비록 공이 있는 자라도 만약  균등에 걸리면 진급을 시키지 않았다.그 때  대남보(大男甫)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용감하고 일을 잘 처리하였으며  급인지풍(急人之風)221)이 있어 무리들이 모두 우러러보았다. 그런데  선골(善骨)의 품이 없고 또한  균등의 힘이 없었다. 어떤 이가  대남보에게 권하여 “그대의 딸이 아름다운데 어찌  신주(新主)에게 바치고  득골품(得骨品) 즉 골품을 얻지 않는가?”222) 말하였다.  대남보는 “우리 무리는  천인(賤人)인데 어찌 감히  여색으로  풍월주를 미혹할 수 있는가” 하였다. 공이 듣고 그 말을 기특하게 여겨  낭두 별장(郎頭別將)을 불러 묻기를 “ 대남보의 재능이  낭두가 될 만 한가?” 하였다. 답하기를 “될 만합니다. 그러나 골품이 없습니다” 하였다. “… 공(功)은 어떠한가?” 답하기를 “윗사람( 풍월주)을 모신 같은 낭도로서 출정한 바 있는데 …  대상(對上)이 아직도 승진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어찌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공이 “대상이 누구인가?” 묻자, “조심보(曹心甫)입니다” 답하였다. (용춘)공이 “조심보가  대남보보다 공이 큰가?” 물었다.  별장이 말하기를 “조심보는 비록 공이 없으나,  대남보의 대상입니다. 만약  대남보를 승진시키려면 반드시 먼저 조심보를 승진시켜야 합니다. 이 것이 3파  균등의 법입니다” 하였다. 공이 웃으며 “재능이 없는 자를 재능이 있는 자의 대상으로 삼아 재능이 있는 자를 승진시키지 않는 것은 재능을 장차 썩히는 것이다. 골(骨)과 파(派)가 장차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였다. 이에  대남보를 세 번 승진시켜  낭두(郎頭)로 임명하였다. 불평을 하는 자들이  상선(上仙)을 찾아가서 바로 잡으려 하였다.  문노공은 말하기를 “법이 점점 더 날로 새로워지고 우리들은 모두 늙었는데 어찌  신주(新主)223)를 괴롭히겠는가?” 하였다. 이로 인하여 미생공 또한 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구습이 고쳐졌다.

  
 대남보의 딸은 (용춘)공을 위하여 스스로 정절을 지키고  유화(遊花)가 되기를 거부하였다. 공이 딱하게 여겨 여러 차례 말하였으나 안 되었다.  대남보가 “한 명의 여자로 인하여 어찌 공께서 걱정을 하실 수 있습니까?”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내가 사랑을 하지 않는 것은 사람들이 내가 너를 사사롭게 대한다고 할까 염려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딸이 듣고 슬퍼하여 우물에 스스로 몸을 던졌다.  낭두 등이 이에 머리가 땅에 닿도록 공에게 절(叩頭)하고 말하기를 “이같이 이르도록 만든 것은 신등의 잘못입니다” 하였다. 공은 마지못하여 거두었다. 그 날로 남보(男甫)를 해직하고 말하기를 “부녀가 한 사람을 섬길 수는 없다” 하였다. 남보는 기뻐하며 “나를 알아주면 충분합니다. 어찌 모름지기 지위를 논하겠습니까?” 하였다.

  (
 진평) 제(帝)가 이를 듣고 곧 남보를 등용하여 공을 위하여  궁사지(宮舍知)로 임명하여 재용(財用)을 관장하게 하였다. 남보는 원래 부유하였는데 그 재물을 모두 기울여 공이 사용하도록 하였으며, 결사대 백 명을 모아서 공을 호위하였으나, 공은 알지 못하였다. 공이 하루는  종자(從者)들과 더불어  미복224)으로 거리를 지나는데, 어린아이들이 노래(唱)하여 부르기를

  처를 바쳐 부자가 되고
일곱 아들 모두 말을 탄다네
딸을 바쳐 가난해지고
세 아들 모두 베옷을 입었네

  하였다. 공이 물었으나,
 종자들이 말하지 않았다.

  남보의 집에 이르자, 그 처와 세 아들이 삼을 쌓아 놓고 손으로 껍질을 벗기고 있다가 (용춘)공을 보자 그 것을 숨겼다. 공은 이에
 종자들이 바른대로 말하지 않은 것을 책망하였다.  종자들이 복종하여 말하기를 “ 당두(唐斗)의 일곱 아들은 모두 영달하였는데 남보(男甫)의 세 아들은 모두 천한 까닭에 거리에 이 노래(謠)가 있습니다” 하였다. 공이 오랫동안 슬퍼하다가 “이는 나의 잘못이다” 하였다. 이에 그 장자인  학열(郝熱)을  승부(乘府)에 천거하여  오지(烏知)225)를 주었고, 다시 그 두 동생을 …에 부탁하며 말하기를, “남보는 나를 위하다가 가난하여졌다. 나는 장차 위를 물려줄 것이다. 그대는 그…”라고 하였다.  호림공이 ( 풍월주의) 지위에 오르자, 모두 등용하여  낭두(郎頭)로 삼았다.

  남보는 그 아들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도록 타일렀다. 세 아들은 모두 충절을 숭상하였다.
 건복(建福) 20년(603) 공과  비보랑 제(帝)를 좇아  한수(漢水)의 전쟁에 나갔다. 남보에게 공으로  대나마를 주었으나 받지 않았다.그 때 대왕은  적자(嫡子)가 없어 (용춘)공의 형인 용수 전군(殿君)을 사위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려 하였다.226) 전군이 (용춘)공에게 물었다. 공이 답하기를 “대왕의 나이가 한창 강성할 때인데 혹시  왕위를 이으면 불행할까 염려가 됩니다” 하였다. 전군은 이에 따라 사양하였으나  마야황후가 들어주지 않고, 마침내 전군을 사위로 삼았으니 곧  천명공주의 남편이다.

  이보다 앞서 (천명)공주는 마음속으로 공을 사모하여 황후에게 조용히 말하기를, “남자는 용숙(龍叔)과 같은 사람이 없습니다” 하였다. 황후가 용수(龍樹)로 생각하여 시집을 잘못 보냈던 것이다. 공주는 이에 공에게 은밀히 말하기를 “첩이 본래 그리워한 사람은 곧 그대입니다”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가정의 법도는
 장자(長子)가 귀한 것인데 신이 어찌 감히 형과 같겠습니까?” 하였다. (천명)공주는 공을 더욱 사랑하여  제(帝)에게 공의 처지를 떠받쳐주게 하였고, 여러 차례 공의 관계(官階)를 승진시켜 위(位)가 용수공과 같게 하였다. 용수공이 (천명)공주의 뜻을 알고 공주를 (용춘)공에게 양보하려 하였으나 공이 힘써 사양하였다.  마야황후가 밤에 궁중에서 잔치를 베풀고 공을 불러 공주와 함께 묵도록 하였다. 용수공 또한 늘 병을 칭하고 공에게 공주를 모시고 공주의 마음을 위로하도록 명하였다. 공은 스스로 게으르거나 방자(肆)한 적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공은 대궐에서 더욱 신임을 받았다.

  
 호림공에게  풍월주의 지위를 물려주게 되자,  조정에 들어가 요직에 있었는데 대사 이하에 재능이 있는 낭도를 많이 등용하였다. 이로서 낭도로 등용된 자들이 또한 공을 심히 존중하여 모두 목숨을 바치기를 원하였다.
선덕공주(善德公主)가 점점 자라자 용봉의 자태와 태양의 위용이227)
 왕위를 이을 만 하였다. 그 때는  마야황후가 이미 죽었(崩)고  왕위를 이을 아들이 달리 없었다. 그러므로 대왕은 (용춘)공을 마음에 두고 (천명)공주에게 그 지위228)를 양보하도록 권하였다. (천명)공주는 효심으로 순종하였다. 이에 지위를 양보하고  출궁(出宮)을 하였다.229) 선덕은 공이 능히 자기를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하여  사신(私臣)이 되기를 청하였다. 대왕이 이에 공에게 공주의 뜻을 받들도록 명하였다. 선덕은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감정이 풍부하였다. 공이 감당하지 못할 것을 알고 굳이 사양하였으나 어쩔 수 없이 받들게 되었는데 과연 자식이 없어 물러날 것을 청하였다. 대왕은 용수공에게 모시도록 명하였는데 또한 자식이 없었다.

  그 때
 승만황후(僧滿皇后)가 … 아들을 낳자, 선덕의 지위를 대신하고자 하였는데 그 아들이 일찍 죽었다. 승만은 (용춘)공의 형제를 미워하였다. 공은 이에 지방으로 나갔다.  고구려에 출정하여 큰 공을 세우게 되자 승진하여  각간(角干)에 봉해졌다.  용수전군이 죽기(薨) 전에 부인과 아들을 공에게 맡겼다. 그 아들은 곧 우리 태종(太宗) 황제이고, 부인은 곧  천명공주이다. 처음에 용수공은  천화공주(天花公主)를 아내로 맞았는데,  천명공주를 아내로 맞게 되자  천화공주를 (용춘)공에게 주었다. 아들을 낳았는데 일찍 죽었다. 선덕공주(善德公主)를 모시게 되자  제(帝) 천화공주 백룡공(白龍公)에게 내려주었다. 선덕공주가  즉위하자 (용춘)공을 지아비로 삼았는데, 공은 자식이 없다는 이유로 스스로 물러날 것을 청하였다. 군신(群臣)들이 이에 삼서(三婿)의 제도를 의논하여,  흠반공(欽飯公)과  을제공(乙祭公)이 보좌(副)하도록 하였다.

  (용춘)공은 본디 금륜(金輪)이 색에 빠져 폐위된 것을 슬퍼하였고 성품이 색을 좋아하지 않아 왕에게 아첨할 생각이 없었기에 물러나려는 뜻이 더욱 굳어졌다. 선덕은 이에 정사를 을제230)에게 맡기고 공에게 물러나 살기를 허락하였다. 공은 이에
 천명공주를 처로 삼고 태종을 아들로 삼았다. 이에 앞서 왕명으로  호명궁(昊明宮)에 살았다.딸 다섯을 낳았고 달리  적자(嫡子)는 없었다. 그러므로 태종을 아들로 삼았다.  서자는 다섯인데  용산(龍山)과  용석(龍石)은  대씨(大氏)가 낳았다.  용귀(龍貴)는 미생공의 딸  매생(梅生)이 낳았다.  용주(龍珠)와  용릉(龍凌)은  비보랑공의 딸  홍주(紅珠)가 낳았다.  서녀는 18명이었다.  용산의 누이  용태(龍泰)는 태종을 섬겨  인태(仁泰)  각간을 낳았다.  용주의 누이  용보(龍宝)는 태종을 섬겨  차득(車得)과  마득(馬得) 양공을 낳았다. 공은 청렴하고 담백하여 색을 멀리 하였는데 자손이 저절로 창성하였다. 사람들이 덕이 있는 사람은 창성한다고 말하였다. 나머지 자손은 다 기록하지는 않지만 모두 귀하게 영달하였다.

  공은 만년에 거문고와 바둑을 즐겼다. 천명(天明)·
 호명(昊明) 양궁과 더불어  산궁(山宮)에서 술상을 차려놓고 바둑을 두고 거문고를 탔다.  시첩 다섯이 온화한 모습으로 받들어 섬겼다. 태종은 효성을 극진히 하여 안락하게 모셨다.  태화(太和) 원년(647) 8월 세상을 떠나(薨)니 수가 70살이었다. 태종이  즉위하자  갈문왕(葛文王)으로  추존하였다.231) 아, 성대하다! 공의 성스러운 덕은 하늘과 같고 땅과 같아 영원히 다하지 않을 것이다.

 갈문왕의 덕 일월과 아울러 밝고,  삼한의 업이 힘입어 크게 이루어지도다.


219) 여기서 말하는 골품은 성골과 진골을 가리킨다.

220) 아양을 부려 사랑을 받는 첩(嬖 )을 가리킨다.

221) 남의 위급함을 구해주는 의협스러운 풍채를 의미한다.

222) 득골품(得骨品)은 당시 골품제하에서 신분상승의 가능성이 있었던 사실을 잘 보여준다.

223) 용춘공을 가리킨다.


224) 어떤 목적으로 남의 눈에 잘 나타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입는 남루한 옷을 의미한다.

225) 신라 17관위 중 15등은 대오(大烏)(또는 대오지(大烏知))이고 16등은 소오(小烏)(또는 소오지(小烏知))인데 여기서는 오지(烏知)로 나오고 있어 어느 것인지 알 수 없다. 만일 『삼국사기』를 보고 『화랑세기』를 위작하였다면 대오와 소오 중 하나를 기록하였을 것이나 그렇지 않은 것을 주목할 수 있다.

226) 용수와 용춘이 형제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5, 신라본기 5 태종무열왕 즉위조에는 무열왕이 진지왕의 아들인 이찬 용춘(一云 용수라고도 한다)의 아들이라고 하고 있다. 『삼국유사』 왕력편에는 용춘은 一作 용수라고 되어 있다고 나오고 있다. 이와 같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은 용춘과 용수가 동일인으로 볼 수 있으나 『화랑세기』를 통하여 형제인 것을 알 수 있다.

227) 龍鳳之姿 天日之表는 임금의 人相을 의미한다.

228) 진평왕이 세상을 떠났을 때 성골집단에는 아들이 없었다. 따라서 천명과 선덕이 한 대에 한하여 성골신분을 가지고 왕위계승권을 가졌던 것을 잘 보여준다(李鍾旭, 「新羅 中古時代의 聖骨」, 『震檀學報』 50, 1980, p. 9).

229) 당시 성골집단은 왕궁인 3궁에 거주하였고 출궁을 하면 신분적인 지위를 유지할 수 없었던 것으로 헤아려진다. 그 결과 진평왕의 딸이며 선덕왕의 언니인 천명은 출궁(出宮)하여 왕위를 포기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때 천명의 신분이 성골에서 진골로 되었다고 여겨진다.

230) 『삼국사기』 5, 신라본기 5 선덕왕 원년 2월조에 대신인 을제에게‘총지국정(摠持國政)’토록 한 것으로 나오고 있다.


231) 태종이 즉위하며 용춘을 갈문왕으로 추존한 사실이 『화랑세기』에 나오고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된다.

 

 

虎林 己亥生 癸亥主〉
十四世虎林公者 福勝公之子也 母曰松花公主 乃只召太后女也 或曰公主私子 故未詳其父 或曰秘宝郞之子也 公多勇力好擊劒 早入文弩之門 率儉自居 不以骨品自高 公之嫡兄摩耶夫人 時以皇后有寵 龍春公乃擢爲副弟 至是爲十四世 乃眞骨統也

執心淸直 散財施衆 時人稱以脫衣地藏 公謂郎徒曰 仙佛一道也 花郞亦不可不知佛也 如我彌勒仙花菩利沙門 皆吾師也 公乃就菩利公受戒 以此仙佛漸相融和

公初娶文弩公女玄剛娘主 早卒 再娶夏宗公女柔毛娘主 時美室宮主春秋已高 極愛娘主 願見貴子 命公造千部觀音而禱子 乃生善宗郞 長爲律家大聖人 公崇佛益重 乃讓位于庾信公 自號茂林居士

不干朝廷 然國有大事 必奉之而問 與閼川公·林宗公·述宗公·廉長公·庾信公·宝宗公 等等 作七星友 會遊南山 統一之業 多從公等始焉 盛矣 至矣哉

太后之孫 眞骨之流 福入佛仙 功垂千秋


父曰福勝者 山宗公之子也 山宗公娶法興女沙道美生之 山宗公卽法興之異父同母弟也 山宗之父曰毗處大王 故公爲毗處曾孫 母曰松華公主 其父英失角干爲只召太后繼夫 而生之 故公爲只召太后外孫 沙道美之母沙龍者 沙梁宮主之孫也


〈호림은 기해(己亥)년(579) 생이고 계해(癸亥)년(603)에 (풍월)주가 되었다.〉

  14세 (
 풍월주)  호림공(虎林公)은  복승공(福勝公)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송화공주(松花公主)인데 곧  지소태후의 딸이다. 혹 말하기를 “공주의  사자(私子)이기 때문에 그 아버지는 잘 알 수 없다” 하고, 혹은  비보랑(秘宝郞)의 아들이라고 한다. 공은 용력이 많고  격검을 좋아하여 일찍 문노의 문하에 들어갔다. 검소하게 지냈으며  골품으로 뽐내지 않았다. 공의  적형(嫡兄) 마야부인은 그 때 ( 진평왕의) 황후로 총애를 받았으므로,  용춘공(龍春公)이 부제로 발탁하였다. 이에 이르러 (호림)공은 14세  풍월주가 되었으니 곧  진골정통이다.

  (호림)공은 마음가짐이 청렴하고 곧았으며 재물을 풀어 무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 때 사람들이 탈의
 지장(脫衣地藏)이라고 하였다. 공은 낭도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 선불(仙佛)은 하나의 도(道)이다. 화랑 또한 불(佛)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  미륵선화(彌勒仙花)와 보리 사문(菩利沙門) 같은 분은 모두 우리들의 스승이다” 하였다. 공은 곧  보리공에게 나아가 계를 받았다. 이로서  선불이 점차 서로 융화하였다.

  (호림)공은 처음
 문노공의 딸 현강랑주(玄剛娘主)를 아내로 맞았으나, 일찍 죽었다.  하종공의 딸  유모랑주(柔毛娘主)를 다시 아내로 맞이하였다. 그 때  미실궁주의 나이가 이미 많았는데  낭주를 매우 사랑하여 귀한 아들을 보기를 원하였다. 공에게 명하여  천부관음(千部觀音)을 만들어 아들을 기원하도록 하였다. 이에  선종랑을 낳았는데 자라서  율가(律家)의 대성인이 되었다. 공은 부처를 숭상함이 더욱 깊어졌다. 이에  유신공에게  양위를 하고 스스로 ‘무림거사(茂林居士)’라 불렀다.

  
 조정의 일에 간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국가에 큰 일이 있으면 반드시 받들어 물었다.  알천공(閼川公)· 임종공(林宗公)· 술종공(述宗公)· 염장공(廉長公)· 유신공(庾信公)· 보종공(宝宗公) 등과 더불어  칠성우(七星友)를 이루어  남산에서 만나 자적하였다.233) 통일의 기초가 공 등으로부터 많이 시작되었다. 성대하고 지극하도다.

태후의 손이고
 진골정통의 무리이다. 복되게  불선(佛仙)에 들어갔으니 공이 천추에 드리운다.


아버지는
 복승인데  산종공(山宗公)의 아들이다.  산종공 법흥의 딸인  사도미(沙道美)를 아내로 맞아 낳았다.  산종공은 곧  법흥 이부동모제(異父同母弟)이다. 산종의 아버지는 비처대왕이다. 그러므로 (호림)공은 비처의 증손이다. 어머니는  송화공주인데 그 아버지는 영실(英失)  각간으로  지소태후 계부(繼夫)가 되어 낳았다. 그러므로 공은  지소태후 외손이 된다.  사도미의 어머니인  사룡(沙龍)은  사량궁주(沙梁宮主)의 손이다.


232) 『三國遺事』 奈勿王 一作 那密王 金堤上 조에는 …至望德寺門南沙上 放臥長號…라고 나오고 있다.

233) 『삼국유사』 1, 기이 2, 진덕왕 조에는 진덕왕대에 알천공, 임종공, 술종공, 호림공(虎林公), 염장공, 유신공의 6인이 남산 오지암에서 국사를 논의한 것으로 나오고 있다. 그런데 『화랑세기』에는 호림공이 스스로 무림거사(茂林居士)로 바꾼 것을 알 수 있다. 그런가 하면 『화랑세기』에는 보종공이 들어 있어 칠성우를 만든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삼국유사』의 기록보다는 『화랑세기』의 기록이 역사적 사실을 잘 전하는 것이 분명하다. 칠성우들이 남산에서 만나 유(遊)하였다는 것을 놀았다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노는 것이 단순한 놀이일 수는 없다.

十五世庾信公者 舒玄角干之子也 母曰萬明夫人 卽萬呼太后私女也 父曰肅訖宗 亦立宗葛文王之子也
初萬明與舒玄 野合而有娠 太后以舒玄爲大元流 欲不許 乃逃萬弩 凡二十月而生 多有夢祥 眞平大王以私妹受苦 封舒玄公于萬弩 (庾信)公旣長 有天日之表 太后欲見之 許敀而見之 喜曰 是眞吾孫也 以是加耶派遂奉之 虎林公副弟宝宗公者 美室宮主末子也 父曰薛原 以公有衆望讓其位 盖宮主欲慰太后而命之也 時公年十五而有大度 能服郎徒

加耶徒有貪進者 語之曰 主以加耶正統 何不私我乎 公正色曰 我乃太后之孫 爾何言乎 且大人無私 有功則 雖微可遷 何不立功乎 徒大慚而退 或告徒將反 公曰 非義而付之 不若反也 雖然徒有貪進之色 必能立功也 後果然 公以是能洽各徒 常謂徒曰 我國偏于東海 不能統合三韓 是其恥也 安可苟〃爭骨品徒屬乎 麗濟平則 國無外憂而可享富貴也 不可忘也

衆願以身獻公 乃簡智勇之徒 周行天下而務結高士 入中岳受秘訣于老人 身邊常有神兵擁衛

及還 虎林公請以位讓 公辭不得 乃爲十五世 太后命娶夏宗公女令毛以慰美室宮主 令毛者乃柔毛之妹也 兄弟俱爲仙花之君 時人榮之 卽建福二十九年壬申也 公就位 日與郎徒造兵具練弓馬

龍春公乃擢爲私臣 公誓以報國 不避矢石而從之 龍樹公亦以其子托之 公大喜曰 吾公之子三韓之主也 未幾善德公主爲嗣 龍春公爲皇婿 天明公主○○○主不安 公說春秋公曰 天道自在○○○一時事有違忠孝也 春秋公然之 乃慰天明以解之 公謂春秋公曰 方今之時 雖王子·殿君 不有郎徒 無以立威 春秋公乃娶公妹文姬 以爲公副弟

先是宝宗公未立而讓于公 故大元派多有不平 公乃以位讓于宝宗公 巡行列國以募志氣之士 統合三韓 公之事業功德 皆在史冊 故畧之

加耶之宗 神國之雄 統合三韓 一匡五東 赫〃功名 日月?同

父曰舒玄角干 祖曰武力角干 曾祖曰仇衝大王 高祖曰鉗知大王

鉗知有兄弟五人 皆娶我國骨品之女 內附于我 鉗知王元年 王姪納水公娶我德知公女桂凰 甚美 王亦願我姬 王母邦媛不許 初王父銍知大王英明善政 金官大治 銍知娶白欣公妹通里爲后 卽美海公女也 其母堤上公長女靑我也 甚相愛 恨不早子 通里乃引白欣公女河喜爲妾 亦生女 不能生子 未幾通里生子善通 銍知大喜以爲太子

善通好騎射 獵于野 遇雨入沙干金相家 金相者坐知王外孫也 金相之女邦媛能嬌有色 誘善通相通歲餘生女 通里聞之納爲太子妃 未幾通里善通俱沒 銍知乃以邦媛爲后 先是邦媛密通于銍知 至是生子鉗知 故銍知大喜以爲后 邦媛好?? 銍知老不理政 朝廷遣使責之 以此(邦媛)怨我 不許鉗知娶于我 鉗知十年邦媛崩

鉗知王乃遣納水請婚 朝廷以出忠角干女淑氏許之 鉗知悅其美以爲后 生仇衝 娶桂凰女桂花爲后 生武力·武得 皆遊我國 朝廷禮遇之 武力娶眞興帝女阿陽 生舒玄 娶萬呼太后女萬明生公 故公實爲眞骨·大元·加耶三派之孫也

金官加耶始于首露靑裔王 娶黃龍國女黃玉 生居登 娶泉府卿申輔女慕貞 生馬品 娶宗正監趙匡孫女好仇 生居叱彌 娶阿躬阿干孫女阿志 生伊品 娶司農卿克忠女貞信 生坐知 坐知好色 娶各國女爲后 我國亦以道寧阿湌女福壽送之 生子吹希 坐知大悅立爲正后 金官以我女爲后 自此始 吹希繼立 福壽以太后執政 多用我國人 金官人亦多歸我 和好漸密 吹希娶我進思角干女仁德 生銍知 是爲公五世祖也



15세 (
 풍월주)  유신공(庾信公)은  서현(舒玄)  각간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만명부인인데 곧  만호태후 사녀(私女)이다.

  아버지는
 숙흘종(肅訖宗)인데 또한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의 아들이다. 처음 만명과  서현 야합하여 임신을 하였는데, (만호)태후는  서현 대원신통류이기 때문에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만노(萬弩)로 도망하여 무릇 20개월 만에 낳았는데 꿈의 상서로움이 많았다.

  
 진평대왕은  사매(私妹)가 괴로움을 받자  서현공을  만노(萬弩)에 봉하였다. 공은 자라자 태양과 같은 위용이 있었다.234) 태후가 보고 싶어 하여 돌아올 것을 허락하여 보고는 기뻐하며, “이는 참으로 나의 손자이다” 하였다. 이로써  가야파가 마침내 받들었다.

  
 호림공의 부제인  보종공 미실궁주의 막내아들인데 아버지는 설원이었다. 공이  중망(衆望)이 있다고 하여 그 지위를 양보하였다. 이는 대개 (미실)궁주가 (만호)태후를 위로하기 위하여 명한 것이다.

  그때 공의 나이가 15살이었는데 커다란 도량을 가지고 있어 낭도들을 능히 다스렸다.
 가야파의 낭도로서 승진하기를 탐하는 자가 말을 하기를 “어른( 풍월주)께서는 가야정통(加耶正統)으로 어찌 저를 사적으로 돌보지 않습니까?” 하였다. 공이 정색을 하며 “나는 곧 태후의 손자인데 네가 무슨 말을 하는가? 또한 대인은 사애(私愛)를 하지 않는다. 공이 있으면 비록 미천하여도 승진을 할 것이다. 어찌 공을 세우지 않는가?” 하였다. 낭도는 크게 부끄럽게 여기며 물러났다. 어떤 이가 고하기를 그 낭도가 장차 배반할 것이라고 하였다. 공은 “옳지 않으면서 붙는 것은 배반하는 것만 못하다. 그렇지만 그 낭도가 승진을 탐하는 기색으로 보아 반드시 공을 세울 것이다” 하였는데, 후에 과연 그렇게 되었다. 공은 이로써 능히 각도(各徒)를 화합하였다. 늘 도(徒)에게 일러 “우리나라는 동해에 치우쳐 있어 3한을 통합할 수 없다. 이것이 부끄러운 것이다. 어찌 구차하게  골품과 낭도의 소속(徒屬)을 다투겠는가.  고구려 백제가 평정되면 곧 나라에 외우(外憂)가 없을 것이니, 가히 부귀를 누릴 수 있다. 이 것을 잊으면 안 된다” 말하였다.

  무리들이 공에게 몸을 바치기를 원하였다. 이에 지혜와 용기가 있는 낭도를 뽑아서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고 고사(高士)들과 힘써 결속을 맺었으며,
 중악(中岳)에 들어가 노인에게서  비결(秘訣)을 받았다. 신변에는 늘  신병(神兵)들이 있어 좌우에서 호위하였다.

  돌아오자,
 호림공 풍월주의 지위를 물려주겠다고 청하였다. 공은 사양을 하였으나 어쩔 수 없었다. 이에 15세  풍월주가 되었다. (만호)태후가  하종공의 딸  영모(令毛)를 아내로 맞이하도록 명하여  미실궁주를 위로하려고 하였다.  영모는 곧  유모(柔毛)의 동생이었다. 형제가 모두  선화(仙花)의 아내가 되었다. 그 때 사람들이 영화롭게 여겼다. 곧  건복(建福) 29년 임신년(612)이었다. 공이  풍월주의 위에 올랐다. 날마다 낭도들과 더불어 병장기를 만들고  궁마를 단련하였다.

  
 용춘공이 이에  사신(私臣)으로 발탁하였다. 공은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는데 시석(矢石)을 피하지 않기로 맹세를 하고 따랐다. 용수공 또한 그 아들을 맡겼다. 공은 크게 기뻐하며 “우리 용수공의 아들은  삼한의 주인입니다” 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덕공주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용춘공은 왕의 남편(皇婿)이 되었다.  천명공주는 …. …주가 불안하였다. 공이  춘추공을 설득하기를 “천도(天道)가 제 스스로 있어 …은 한 때의 일로 충효에 어긋남이 있었다” 하였다.  춘추공이 그렇게 여겼다. 이에 곧 천명을 위로하여 근심을 없앴다. 공이  춘추공에게 말하기를 “바야흐로 지금은 비록  왕자 전군(殿君)이라 하더라도 낭도가 없으면 위엄을 세울 수 없습니다” 하였다.  춘추공은 이에 공의 누이인 문희(文姬)를 아내로 맞았고 공의 부제가 되었다.

  이보다 앞서
 보종공 풍월주가 되기 전에 공에게 양보를 하였다. 그러므로  대원파가 불평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공이 이에  풍월주의 위를  보종공에게 물려주었다.  열국(列國)을 순행하여 뜻과 기개가 있는 사람들을 모집하여  삼한을 통합하였다. 공의 사업과 공덕은 모두  사책(史冊)에 있으므로 생략한다.

가야의 우두머리이고
 신국 영웅이다.  삼한을 통합하여  오동(五東)235)(吾東 우리 신라)의 질서를 바로 잡아 통치하니 혁혁한 공명은 해와 달과 아울러 함께할 것이다.

아버지는
 서현  각간이고 할아버지는 무력  각간이고 증조는  구충대왕이며 고조는  겸지대왕(鉗知大王)이다.

  겸지는 다섯 형제가 있었는데 모두 우리나라의
 골품(骨品)이 있는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여 우리나라  조정에 복종하여 따랐다. 겸지왕 원년(492) 왕의 조카  납수공(納水公)이 우리  덕지공(德知公)의 딸  계황(桂凰)을 아내로 맞았는데 매우 아름다웠다. 왕 또한 우리나라 여자를 원하였는데 왕의 어머니  방원(邦媛)이 허락하지 않았다. 처음에 왕의 아버지인  질지대왕(銍知大王)이 영명하여 선정을 베풀어 금관(金官)이 잘 다스려졌다. 질지는  백흔공(白欣公)의 손아래 누이인  통리(通里)를 왕후로 삼았다.

  곧
 미해공(美海公)의 딸이다. 그 어머니는  제상공(堤上公)의 장녀인  청아(靑我)이다. 서로 매우 사랑하였는데 일찍 아들이 없는 것을 한으로 여겼다.  통리는 이에  백흔공의 딸인  하희(河喜)를 데려다 첩으로 삼았는데, 또한 딸을 낳고 아들을 낳지 못했다. 얼마 안 있어  통리가 아들  선통(善通)을 낳았다. 질지가 크게 기뻐하여  태자로 삼았다.

  
 선통은 말 타기와 활쏘기를 좋아하였는데 들에서 사냥을 하다가 비를 만나  사간(沙干) 김상(金相)의 집에 들어갔다. 김상은 좌지왕(坐知王)의  외손이었다. 김상의 딸  방원은 교태에 능하고 아름다웠는데,  선통을 유혹하여 상통을 하였다. 1년 남짓하여 딸을 낳았다.  통리가 듣고 거두어  태자비로 삼았다. 얼마 안 있어  통리 선통이 모두 죽었다. 질지가 이에  방원을 왕후로 삼았다. 이에 앞서  방원은 질지와 밀통을 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아들 겸지(鉗知)를 낳았다. 그러므로 질지는 크게 기뻐하여 왕후로 삼은 것이다.  방원은 …을 좋아하였다. 질지는 늙어 정치를 다스리지 않았다. (신라)  조정에서는 사신을 보내어 책망하였다. 이 때문에  방원은 우리나라를 원망하여 겸지가 우리나라에서 아내를 맞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겸지 10년(501)에  방원이 죽었다(崩).

  겸지왕이 이에
 납수공을 보내어 청혼을 하였다.  조정에서는 출충(出忠)  각간의 딸  숙씨(淑氏)를 허락하여 보냈다. 겸지는 그 아름다움을 좋아하여 왕후로 삼아 구충(仇衝)을 낳았다. 구충은 계봉의 딸인  계화(桂花)를 아내로 맞아 왕후로 삼아  무력(武力) 무득(武得)을 낳았다.236) 모두 우리나라에 왔는데  조정에서 예로써 대접하였다. 무력은 진흥제의 딸  아양(阿陽)을 아내로 맞아  서현을 낳았다.  서현 만호태후의 딸 만명을 아내로 맞아 (유신)공을 낳았다. 그러므로 공은 실로  진골(眞骨)· 대원(大元)· 가야(加耶) 3파의 자손이다.

  
 금관가야 수로청예왕(首露靑裔王)에서 비롯하였는데  황룡국(黃龍國)의 여자인  황옥(黃玉)을 아내로 맞아  거등(居登)을 낳았다.  거등 천부경(泉府卿) 신보(申輔)의 딸  모정(慕貞)을 아내로 맞아  마품(馬品)을 낳았다.  마품 종정감(宗正監) 조광(趙匡)의 손녀  호구(好仇)를 아내로 맞아  거질미(居叱彌)를 낳았다.  거질미는 아궁(阿躬) 아간의 손녀  아지(阿志)를 아내로 맞아  이품(伊品)을 낳았다.  이품 사농경(司農卿) 극충(克忠)의 딸  정신(貞信)을 아내로 맞아  좌지(坐知)를 낳았다. 좌지는 색을 좋아하여 각국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 왕후로 삼았는데 우리나라에서도 도령(道寧)  아찬의 딸  복수(福壽)를 보내어 아들인  취희(吹希)를 낳았다. 좌지가 크게 기뻐하여  정후(正后)로 삼았다. 금관(金官)에서 우리나라의 여자를 왕후로 삼는 것이 이로서 비롯하였다.  취희 왕위에 오르자  복수는 태후로서  집정을 하여 우리나라 사람을 많이 등용하였다. 금관인 또한 우리나라에 많이 왔으며 사이좋게 친한 관계가 점점 깊어졌다.  취희는 우리나라 진사(進思)  각간의 딸  인덕(仁德)을 아내로 맞아 질지(銍知)를 낳았는데, 곧 (유신)공의 5세조이다.



234) 天日之表는 임금의 人相으로 김유신에게 그와 같은 모습이 있었다고는 하나 해석을 달리 하였다.

235) 오동(五東)은 오동(吾東)의 오자로 우리 동방 즉 신라를 뜻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236) 『삼국유사』 2, 기이 2, 가락국기에는 세종(世宗) 각간, 무도(武刀) 각간, 무득(武得) 각간을 낳은 것으로 나오고 있다. 『삼국사기』 4, 신라본기 4, 법흥왕 19년(532) 조에는 김구해(金仇亥)가 노종(奴宗), 무덕(武德), 무력(武力)을 거느리고 항복한 것으로 나오고 있다. 『화랑세기』에는 무력(武力)과 무덕(武德)이 나오고 있다. 이에 『삼국유사』의 기록에 문제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삼국유사』에 나오는 장자인 세종(世宗)은 6세 풍월주인 세종(世宗)과는 다른 인물인 것이 틀림없다. 풍월주 세종은 지소태후와 태종공(苔宗公)의 아들이다.

 

 

十六世宝宗公者 亦美室宮主之私子也 鴻濟八年 思道太后親政 宮主爲璽主 閱書于政堂 晝夢白羊入懷 知其爲吉 急引帝入帳 帝年尙幼 不得稱快 乃命衿荷薛原郞復入侍 生公 〃長皃猶衿荷 故宮主賜衿荷以爲子 宮主以其爲末子極愛公 夏宗公亦篤愛之 公初呼帝爲父 及長敀衿荷 帝以爲??子賞賜甚重
公性淸雅 好文章 多情? 爲人笑啼 溫良若婦女 見人疾苦 哀憐若己痛 至於禽獸亦然 未嘗害一虫一草 不辨善惡利害 不好飮酒好色 常跨小靑驪吹笛過市 人指之謂眞仙公子 面如冠玉 手若白荑 善畵 人物山水妙入神境 虎林愛之爲副弟 情若夫婦 自恨不爲女以事之

宮主嘗問其所欲 公曰 願與母同死 宮主笑曰 爾不好色而願與我同死 抑何意 公曰 愛我莫如母 母死不可生也 宮主曰 爾無所愛之女 故專情于母也 擇美者以居之 不然 吾何以見孫乎 公曰 何之爲美乎 宮主曰 如汝者美也 面若玉膏 唇若赤脂 眼有嬌彩 言有情根者 不亦可乎 公曰 情根多岐 嬌彩易詐 赤脂玉膏非護身之寶也

宮主乃以允宮女玄剛侍公 公未嘗接 引虎林公同棲之 虎林公乃通玄剛 生女桂林 公乃以玄剛讓于虎林公 不自娶 宮主患之 募於宗女曰 有能親吾子者 賞之 宗女爭戱于公 皆不得 宝明宮女良明公主 乃以計誘公通之 公始知女色 宮主大喜 乃重賞良明 生二女宝羅·宝良 因不近之

公爲花郞 呼郎頭以叔 一不更其秩 以廉長公爲副弟 反事之如兄 色常如嬰兒 常餐豆粥 不喜食肉 朝起視園中多種古木 養魚飼鶴 逍遙其間 畏庾信公如嚴父 庾信公笑曰 兄何畏弟乎 公曰 公是天上日月 我是人間微塵 敢不畏敬乎 遂以位讓之 庾信公謂郎徒曰 爾等欲學仙 當從宝宗兄公 欲護國立功 當從我矣 美室宮主嘗謂庾信公曰 我子癡弱 願爲扶之 庾信公曰 臣實癡也 兄雖弱矣 道其大矣 勿慮也

宮主薨 公自以不能相從爲罪 閉門獨處 寫宮主所述手記七百卷 藏之于家 又寫宮主眞像掛之 朝夕拜謁 列上仙之會 輒居下席 唯唯〃而已 雖然深察宇宙之眞氣 魚鳥花木生〃之理 莫不精通 庾信公有病 公輒自治之曰 吾公國寶也 不可秘吾術也 以此皆知其有扁鵲之學也

國有大事 庾信公開七星會 必問於公 〃曰 我是魚鳥友 何知國事 唯從諸公而己 然庾信公重公一言 未嘗不問 公之德亦大矣

魚鳥爲友 達觀天理 不言而化 不謀而美 赤松之子 其唯公耳

父系詳薛原 母系詳世宗美生


16세(
 풍월주)  보종공(宝宗公)은 또한  미실궁주 사자(私子)이다.  홍제(鴻濟) 8년(579)에 사도태후가 친정(親政)을 하였다.237)  미실궁주 새주(璽主)238)가 되어 정(사)당239)에서 문서들을 보다가 낮 꿈을 꾸었는데  백양이 가슴으로 들어 왔다. 그것이 길한 꿈임을 알고 급히 ( 진평) 제(帝)를 끌고 장막 안으로 들어갔다.240) ( 진평)제는 나이가 아직 어려서 궁주의 기분에 따라 주지 못했다. 이에  금하(衿荷) 설원랑(薛原郞)에게 다시 들어가 모시도록 하여 공을 낳았다. 공은 자라면서 모습이 금하와 같았다. 그러므로 (미실)궁주가 금하에게 내려주고 아들을 삼게 하였다. 궁주는 공이 막내아들이 되기 때문에 매우 사랑하였다.  하종공 또한 공을 도탑게 사랑하였다. (보종)공은 처음에는 ( 진평)제를 불러 아버지라고 하였다. 자라자 금하에게 돌아갔다.  제(帝)는 (보종을) 아들로 생각하여 내리는 재물이 심히 많았다.

  (보종)공의 성품은
 청아하였고 문장을 좋아하였고 …정이 많았다. 사람들을 위하여 웃고 울었으며, 온화함과 순량함은 마치 부녀와 같았다. 사람들이 병들어 고통을 받는 것을 보면, 슬프고 불쌍하게 여기는 것이 마치 자기가 아픈 것 같았다. 새와 짐승에 대해서도 또한 그러하였다. 한 마리의 벌레나 한 포기의 풀도 해친 적이 없었다. 선과 악, 이(利)와 해를 나누지 않았다. 술과 여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늘 작은  청려(靑驪)에 걸터앉아 피리를 불며 시가를 지나가면 사람들이 공을 가리켜 ‘진선 공자(眞仙公子)’라고 하였다. 얼굴은 관옥과 같았고 손은 마치 하얀 새싹241)과 같았다. 그림을 잘 그렸는데, 인물과 산수의 절묘함은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 호림이 사랑하여 부제로 삼았다. 정이 마치 부부와 같아 스스로 여자가 되어 섬기지 못하는 것을 한스러워 하였다.

  궁주가 일찍이 그 바라는 바를 물었더니, 공이 답하기를 “어머니와 더불어 같이 죽는 것입니다” 하였다. 궁주가 웃으며 “네가 색은 좋아하지 않고 나와 같이 죽기를 원하니, 또한 무슨 뜻인가?” 하였다. 공은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무도 어머니만 못합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살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궁주가 말하기를 “네가 사랑하는 여자가 없는 까닭에 오로지 어미에게 정을 쏟는 것이다. 아름다운 사람을 택하여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어찌 손자를 볼 것인가?” 하였다. 공이 “무엇을 아름답다고 합니까?” 하자, 궁주가 “너와 같은 사람이 아름답다. 얼굴은 옥과 같이 아름답고 입술은 마치 붉은 연지와 같고 눈은 아리땁게 빛나고 말에는 정(情)의 뿌리가 있는 자이면, 또한 가하지 않겠느냐?”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정의 뿌리는 갈래가 많고, 아리땁게 빛나는 것은 속기 쉽고, 붉은 연지와 옥과 같은 아름다움은 몸을 지키는 보배가 아닙니다” 하였다.

  (미실)궁주는 이에
 윤궁(允宮)의 딸 현강(玄剛)에게 (보종)공을 모시도록 하였으나, 공은 접촉한 일이 없이  호림공을 불러 함께 살았다.  호림공은 이에 현강과 통하여 딸  계화(桂花)를 낳았다. 공은 이에 현강을  호림공에게 넘겨주고 스스로 아내를 맞지 않았다. 궁주가 근심을 하여 종실의 여자(宗女)들을 모아 말하기를 “나의 아들과 친할 수 있는 사람은 상을 주겠다” 하였다. 종실의 여자들이 다투어 공을 재미있게 해주려 하였으나 모두 이루지 못하였다.  보명궁의 딸  양명공주(良明公主)가 꾀를 내어 공을 유혹하여 통하였다. 공이 비로소  여색을 알게 되었다. 궁주가 크게 기뻐하여 이에 양명에게 큰상을 주었다.  보라(宝羅)와 보량(宝良) 두 딸을 낳고는 또한 가까이 하지 않았다.

  공은 화랑이 되어
 낭두를 아재비(叔)라 불렀고 한번도 그 차례242)를 바꾸지 않았다.  염장공을 부제로 삼았는데 오히려 형과 같이 섬겼다. 얼굴이 늘 어린아이와 같았다. 늘 콩죽을 먹고 고기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정원의 여러 종류의 고목을 보고 물고기를 기르고 학을 기르며 그 사이를 거닐었다.  유신공을 엄한 아버지와 같이 두려워하였다.  유신공이 웃으며 “형이 어찌 제(弟)를 두려워합니까?” 하자, 공이 말하기를 “(유신)공은 바로 천상의 일월이고 나는 곧 인간의 작은 티끌입니다. 감히 두려워하고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말하였다. 드디어  풍월주의 위(位)를 물려주었다.  유신공이 낭도에게 일러 말하기를 “너희들이 선(仙)을 배우고자 하면 마땅히 보 종형공(宝宗兄公)을 따라야 하고, 나라를 지켜 공을 세우려면 마땅히 나를 따라야 할 것이다” 하였다.  미실궁주가 일찍이  유신공에게 일러 말하기를 “나의 아들은 어리석고 약하니 도와주기를 바란다” 하였다.  유신공이 말하기를 “신이 실로 어리석습니다. 형은 비록 약하나, 그 도(道)는 큽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였다.(미실) 궁주가 죽자(薨), 공은 스스로 더불어 따르지 못한 것을 죄로 생각하여 문을 잠그고 홀로 거처하며  궁주가 쓴  수기(手記) 7백 권을 베껴 집에 간직하였다. 또한  궁주의 초상을 그려서 걸고 아침저녁으로 절하였다.
역대
 상선들의 모임에서는 번번이 아랫자리에 앉아서 오직 “예”, “예” 할뿐이었다. 그러나 우주의 진기(眞氣)를 깊이 살펴서 어조(魚鳥)와 화목(花木)이 끊임없이 생기는 이치에 정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유신공이 병이 나자 공이 문득 몸소 치료하며 “우리 공은 국가의 보배이니 나의 의술을 숨길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로써 그가  편작(扁鵲)243)의 학(의학)을 갖추었음을 모두 알게 되었다.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유신공 칠성회(七星會)를 열어 반드시 공에게 물었다. 공은 “나는 물고기와 새의 벗으로 국사를 어찌 알겠습니까. 오직 여러 공을 따를 뿐입니다” 하였다. 그러나  유신공은 (보종)공의 한마디를 중하게 여겨 묻지 않는 적이 없었으니, 공의 덕 또한 크다.


어조(魚鳥)의 벗으로 천리를 달관하니, 말없이도 교화하고 도모하지 않아도 아름답다. 적송(赤松)244)의 아들은 오직 공뿐이다.

 부계(父系)는 설원 조에 상세하고,  모계(母系)는  세종 조와 미생 조에 상세하다.245)



237) 사도태후는 진흥왕의 왕비로 25대 진지왕을 폐위시키고 26대 진평왕을 즉위케 하고 정국을 장악한 것을 보여준다.

238) 璽主는 옥새를 관장하던 임무를 가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239) 政堂은 政事堂일 수 있다. 왕궁에 정당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240) 정사당에 임금이 있는 곳에 신하들과 거리를 두기 위한 장막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241) 백이(白荑)는 깨끗한 새싹과 같은 손을 가리킨다. 이지(荑指)는 작고 얌전한 손가락을 뜻한다.

242) 칭호일 수 있다.

243) 전국시대의 명의를 의미한다.

244) 적송자(赤松子)는 중국 전설시대 仙人의 이름, 神農 때의 雨師로서 후에 곤륜산에 입산하여 선인이 되었다고 한다.

245) 부계와 모계라는 용어는 『화랑세기』에 있는 것인지 필사자가 사용한 용어인지 확인할 길이 없다.

 

 

 

〈公建福丙午生 辛巳郞主 太和元年戊申薨 春秋六十三〉

十七世廉長公者 天柱公之子也 母曰 知道太后 故公爲龍春公異父同母弟也 公好風采 善言辭 有御衆承上之才 知道太后愛之 托于龍春公 使屬虎林公

時公年十四 少宝宗公六歲 而俊秀畧相似 公愛宝宗公之美 自願爲其弟 宝宗不以兄處 反事公如兄 ?言無不聽 情若夫婦 及虎林公爲主 宝宗爲副弟 公爲前方大花郞 時年十八 有勇力能服衆 身長已大于宝宗公 公常負宝宗公如嬰兒 及宝宗讓位庾信 公獨不肯而欲保宝宗 虎林公難之 美室宮主乃招公解之

庾信公爲主 以宝宗爲左方大花郞 欲以公爲副弟 公力推宝宗公爲副 自爲左方 宝宗未常視事 公皆代行之 宝宗淡于內事 使配良明與公混居 生子長明 夏宗公女夏姬慕宝宗之美 而數來挑之 宝宗曰 若能與吾廉長好 我亦與之好 夏姬乃敀于公 生夏長·閏長·春長 皆貴 宝宗公爲主 公副之 而實主之 時年三十一 洽得衆望 宝宗不一年而欲讓之 公笑曰 我實主之 何必讓乎 宝宗乃止之

公在副六年 爲主六年 前後十一年實主郎政 務合三派 互相交婚 遂成和同 而郎權之大者 盡敀于加耶 眞骨·大元皆靡于其中 亦天也 奈何

公外公內私托以務 合取三派郎頭女爲妾 庶子甚衆 視宝宗公家 取其財用之 以庾信公副弟 春秋公爲副弟 以傳其位 陰附于善德公主 靖柒宿之亂 以功拔之 善德卽位 入令調府 以給庾信·春秋兩公而 亦私致富 時人指公家爲水望宅 謂其金入望如洪水也 世有以公比美生公 而美生窮極奢侈 而公以儉約率身? 其富勝於美生公矣


儉身而富 ?公而忠 交友七星 戮力贊同 統一之業 實賴于公
父天柱公者 眞興大帝子也 其母月華宮主乃加耶異腦王女也 卽我兩花公主生也 入爲眞興小妃 生天柱公 有大度 加耶派累欲戴之 以派異不肯 智道太后寡而事新帝 寵衰乃敀天柱公 生公兄弟三人 皆有天柱之風 母系詳龍春公



공은  건복(建福) 병오년(586) 생이고 신사년(621)에 (화)랑주가 되었다.  태화(太和) 원년 무신년(648)에 죽었다. 나이가 63세였다.246)

  17세 ( 풍월주)  염장공(廉長公)은  천주공(天柱公)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지도태후(知道太后)이다. 그러므로 공은  용춘공(龍春公)의  이부동모제(異父同母弟)가 된다. 공은 풍채가 좋고 말을 잘하였으며, 무리를 다스리고 윗사람을 잘 섬기는 재능이 있었다.  지도태후가 공을 사랑하여  용춘공에게 맡겨  호림공에게 속하게 하였다.

  그 때 공은 나이가 14살로  보종공보다 6살이 적었으나, 준수하기는 대체로 비슷하였다. 공은  보종공의 아름다움을 사랑하여 자원하여 그의 아우(弟)가 되었다. 보종은 형으로 처신하지 않고 오히려 공을 형처럼 섬겼다. 공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 것이 없었고 정은 마치 부부와 같았다.  호림공이  풍월주가 되자,  보종공이 부제가 되었고 공은  전방대화랑이 되었다. 그 때 나이 18살이었는데, 용기와 힘이 있어 능히 무리를 복종시킬 수 있었다. 키가 이미  보종공보다 커서  보종공을 아이처럼 늘 업어 주었다.  보종공이  유신공에게  양위를 하자247),  염장공이 홀로 받아들이지 않고  보종공을 보호하려 하였다.  호림공이 곤란하게 여겼다.  미실궁주가 이에  염장공을 불러 달랬다.

   유신공이  풍월주가 되자 보종을  좌방대화랑으로 삼고  염장공을 부제로 삼고자 하였다. (염장)공이  보종공을 힘써 추천하여 부제가 되게 하고 스스로는  좌방대화랑이 되었다.  보종공은 일을 본 적이 없고, 공이 모두 대행하였다.

  보종은 내사248)에 욕심이 없었다. 양명(良明)과 결혼시켰는데,  염장공과 혼거하여 아들  장명(長明)을 낳았다.  하종공의 딸인  하희(夏姬)가 보종의 아름다움을 사모하여 여러 차례 와서 유혹하였다. 보종이 말하기를 “만약 우리 염장과 좋아한다면 나 또한 더불어 좋아할 것이다” 하였다.  하희는 이에 공에게 시집가서  하장(夏長)· 윤장(閏長)·춘장(春長)을 낳았는데, 모두 귀하게 되었다.

   보종공이  풍월주가 되자 공이 부제가 되었으나 실제로는  풍월주 역할을 하였다. 그 때 나이가 31살이었는데,  중망(衆望)을 널리 얻었다. 보종이 1년이 안되어 물려주려 하였다. (염장)공이 웃으며 “내가 실제로는  풍월주 역할을 하고 있는데 어찌 반드시 물려주려 하십니까?” 하였다. 보종은 이에 그만 두었다.

  공은 부제로 6년간 있었고  풍월주로 6년을 있었기에 전후 11년간 실제로  낭정(郎政)을 주관하며 3파를 화합시키는데 힘쓰고 서로 교혼을 시켜 마침내 동화를 이루었다. 그러나  낭권(郎權)의 큰 것은 모두  가야파에게 돌아가고  진골과 대원은 모두 그 안에서 소멸해 버렸으니, 또한 운명이다. 어떻게 하겠는가?

  공의 외척과 처족들이 일을 사사로이 청탁하여 3파  낭두의 딸들을 모아 첩으로 삼았기 때문에  서자가 매우 많았다.  보종공의 집안일을 보아주고 그 재물을 취하여 사용하였다.  유신공의 부제로서  춘추공을 부제로 삼아 그 지위를 넘겨주었다. 선덕공주에게 몰래 붙어 칠숙(漆宿)의 난을 다스리고, 공으로 발탁되었다. 선덕이  즉위하자, 들어가  조부(調府)의 령249)이 되어 유신과 춘추에게 재물을 공급하여 주었고 또한 사적으로 치부를 하였다.250) 그 때 사람들이 공의 집을 가리켜  수망택(水望宅)251)이라 하였다. 금이 들어가는 가는 것을 바라보면 홍수와 같은 것을 말한 것이다. 세상에서는 공을 미생공과 비교한 바 있는데 미생은 극도로 사치를 하였으나 공은 검약을 몸소 실천하였으니 그 부유함이 미생공보다 훌륭하였다.

몸소 검소하여 부유하였고 (보종)공에게 충성스러웠고 칠성(七星)과 교유하여 힘을 다하여 찬동하였다. 통일의 업적이 실로 공에게 힘입었다.
아버지  천주공은 진흥대제의 아들이다. 그 어머니는 월화 궁주(月華宮主)로 가야  이뇌왕(異腦王)의 딸이다. 곧 우리  양화공주(兩花公主)의 딸이다. 진흥의  소비로 들어가  천주공을 낳았다. 커다란 도량이 있어  가야파가 여러 차례 추대하려 하였으나 파가 달라 허락받지 못하였다.  지도태후가 홀로 되어 신제(新帝)252)를 섬겼는데, 총애가 쇠하자  천주공에게 시집가서 공의 형제 3인을 낳았다. 모두 천주(天柱)의 풍모를 지녔다.  모계는  용춘공조에 상세하다.




246) 이 기록은 필사본 『화랑세기』의 본문이 아니라 위에 기록된 것으로 원본 『화랑세기』의 내용이 더욱 자세한 것일 가능성을 말해준다.

247) 유신공 조에 14세 풍월주 호림공의 부제였던 보종공이 부제의 지위를 유신공에게 양보한 것으로 나오고 있다. 이는 나아가 풍월주의 지위도 양보한 셈이 된다.

248) 內事는 房事로 침실 안에서의 일, 규중의 비밀된 일, 남녀가 성교하는 일을 의미한다.

249) 17세 풍월주인 염장공은 선덕왕(632-647)이 즉위하자 조부의 령(令)으로 되었는데 조부의 령은 2인인데 진평왕 6년과 진덕왕 5년에 설치된 것을 볼 수 있다. 이에 선덕왕대에는 좌령·우령의 구분이 없었던 것을 알 수 있다.

250) 당시 정치지배세력들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는 내용을 생각할 수 있다.

251) 『삼국유사』 1, 기이 2, 진한 조에 부유한 큰 집을 말하는 35 금입택 중에 수망택이 있다.

252) 진평왕을 뜻한다.

 

 

十八世春秋公者 我武烈大王也 王面如白玉 溫言善辭 有大志 少言語 動靜有度 庾信公大器之 奉之爲君 王謙讓居于副弟 庾信公退位而 宝宗·廉長兩公尙在 故王讓而待之 至是就位 宝齡二十四也 以庾信公妹文姬爲花君 生長子法敏 乃我文武帝也

先是文姬姊宝姬 夢登西岳 見大水瀰滿京城 以爲不吉 文姬以錦裙易之 後旬日庾信與公 蹴鞠宅前 乃正月午忌日也 庾信故踏公裙 裂其襟紐 請入縫之 公從入之 庾信欲命宝姬而 因病不得 文姬乃進奉針 庾信避不見 公乃幸之 歲餘有娠 時公之正宮夫人宝羅宮主 乃宝宗公女也 有美色 與公甚相得 生女古陀炤 甚有寵 不敢納文姬而秘之

庾信乃積薪于庭 將以焚妹而問娠主 火烟連天 時公從善德公主遊南山 公主問烟 左右以告 公聞之色(變) 公主曰 汝所爲也 盍往救之 公乃???救之

行吉于鮑祠 未幾宝羅宮主以産故薨 文姬繼爲正宮 至是爲花君生子 宝姬悔易夢而不嫁他人 公乃爲之妾 生子知元·皆知文 此說出于文明皇后私記 在主位四年 傳于副弟欽純公 卽庾信公之胞弟也 王之大業在史冊 不記于是

濟世之主 英傑之君 一匡天下 德被四藩 就之如日 望之如雲
父龍樹公者 金輪王之子也 母天明夫人 眞平大帝之女也 天明之母曰摩耶者 福勝公女也


18세 ( 풍월주)  춘추공(春秋公)은 우리 무열대왕이다. 얼굴이 백옥과 같고 온화한 말로 말을 잘하였다. 커다란 뜻이 있었고 말이 적었으며 행동에는 법도가 있었다.  유신공이 위대한 인물로 여겨 받들어 군(君)253)으로 받들었으나, (무열)왕이 사양하여 부제가 되었다.  유신공이 퇴위하였으나 보종과 염장 양 공이 있었기에 왕은 양보하여 기다렸다. 이에 이르러  풍월주에 오르니  보령이 24살이었다.  유신공의 누이인 문희(文姬)를  화군(花君)254)으로 삼아 장자인 법민(法敏)을 낳았는데 곧 우리 문무제(文武帝)이다.

  이에 앞서 문희의 언니
 보희(宝姬)가  서악(西岳)에 올랐는데 큰물이  경성에 가득한 것을 보고 불길하다고 생각하였다. 문희가 비단치마로 바꾸었다. 그 후 열흘 만에 유신이 공과 더불어 집 앞에서  축국(蹴鞠)255)을 하였는데 곧 정월  오기일(午忌日)이었다. 유신은 일부러 공의 치마(裙)를 밟아 옷섶의 옷고름을 찢었다. 들어가서 꿰매기를 청하니, 공이 따라 들어갔다. 유신이  보희에게 시키고자 하였는데 병 때문에 할 수 없어서 문희가 이에 나아가 바느질을 하여 드렸다. 유신은 피하고 보지 않았다. 공이 이에 사랑(幸)을 하였다. 1년쯤 되자 임신을 하였다. 그 때 공의  정궁부인(正宮夫人)인  보라 궁주(宝羅宮主)256)는  보종공의 딸이었다. 아름다웠으며 공과 몹시 잘 어울렸는데, 딸  고타소(古陀炤)257)를 낳아 공이 몹시 사랑하였다. 감히 문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비밀로 하였다.

  유신은 이에 장작을 마당에 쌓아놓고 막 누이를 태워 죽이려 하며 임신한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물었다. 연기가 하늘로 올라갔다. 그 때 공은 선덕공주를 따라
 남산에서 놀고 있었다. 공주가 연기에 대하여 물으니, 좌우에서 고하였다. 공이 듣고 얼굴색이 변하였다. 공주가 “네가 한 일인데 어찌 가서 구하지 않느냐?” 하였다. 공은 이에 …하여 구하였다. 포사(鮑祠)에서  길례를 행하였다.

  얼마 안 있어
 보라 궁주258)가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 문희가 뒤를 이어 정궁(正宮)이 되었다. 이에 이르러  화군(花君)이 되어 아들을 낳았다.  보희는 꿈을 바꾼 것을 후회하여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가지 않았다. 공은 이에 첩으로 삼았는데 아들  지원(知元) 개지문(皆知文)을 낳았다. 이 이야기는 『 문명황후사기(文明皇后私記)』에 나온다.  풍월주로 4년간 있었는데 부제  흠순공에게 물려주었다. 그는 곧  유신공 포제(胞弟)이다. 왕의 대업은  사책(史冊)에 있어 여기에는 기록하지 않는다.



세상을 구제한 왕이고 영걸한 임금이다. 한번 천하를 바로 잡으니 덕이 사방을 덮었다. 나아가면 태양과 같고 바라보면 구름과 같다.
아버지는 용수공으로 금륜왕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천명부인으로  진평대제의 딸이다. 천명의 어머니는 마야(摩耶)인데  복승공(福勝公)의 딸이다.


253) 군(君)은 풍월주를 가리킨다.
254) 실제는 화주였으나 춘추공이 왕이 되었기에 높여 화군이라 한 것으로 생각된다.

255) 제기차기를 의미한다.

256) 원래 宝良宮主라고 된 것을 필사자가 宝羅宮主로 수정하였다.

257) 고타소(古陀炤)는 선덕왕 11년(642) 백제의 군대가 대량주를 함락할 때 죽은 품석의 부인이었다(『삼국사기』 41, 열전 1, 김유신 상).

258) 원래 보량궁주(宝良宮主)로 필사되어 있는 것을 필사자 자신이 보라궁주(宝羅宮主)로 바꾸었다.


十九世欽純公者 庾信之弟也 初爲廉長公副弟 以庾信公命讓于春秋公 至是就位

是年公父舒玄公及兄庾信 伐娘臂有大功 公奮然曰 使我守此空器 將何爲 吾亦從此出矣 盖時人好功不究仙道 公亦其人 以此公在位四年 一不治政 率郎徒在外 副弟禮元公代行郎政 公乃傳于禮元公曰 實行者可主之 公性豁達 不拘淸濁 人皆畏慕庾信公 公獨不然曰 愚兄何足畏也 雖然庾信公友愛至篤 愛公如?兒

公年十八爲前方花郞 歷拜上仙 至我菩利祖時 禮元公庶?菩丹娘主 方年十六 禮元公方九歲 公謁菩祖于亭上 菩丹引禮元公在亭下池畔 窈窕若神仙 公流眄良久而去 ?數日來謁菩祖請爲? 菩祖壯其???之曰 男子之所愼者色也 汝能愛吾女 而不多寵則 可以與之 不然則 不可與 公誓之 菩祖乃以菩丹?公

菩丹有菩祖之風 才色絶人 淑德粲備 公喜不自勝 不能自政 皆聽于菩丹而決之 生七子皆英勇能肖 入室有團欒之春風 公常謂人曰 吾能立功國家 有吾妻之陰助也 庾信公有大事 過門不入家 公有大事 必先到家 與娘主話而去 公常冒矢石在外多而 娘主不爲怨 在家而禱 及? 渾家喧樂

公少好酒 娘主親自釀酒 藏于樓上而供之 一日公索酒 娘主上樓不下 公怪而上樓 有大蛇入酒甕而醉 娘主驚倒不能起 公乃負娘主而下 遂不復飮

菩祖聞之曰 愛妻若是則 可以賜二女 乃以娘主之妹利丹 復?于公 生三女二子 兄弟事一夫 故無猜妬之氣 公在家則唯作好好爺 與二娘主及子女遊戱如?兒 誰知是爲三韓之大英傑乎 臨戰草木皆戰 入門鷄犬皆狎者 公之謂也

公拙於財 常求於廉長公 廉長公笑曰 汝以我爲庫 不育吾子則 我其損也 公乃以諸子娶廉長公女 分其財而? 菩丹曰 廉兄好色貪財 取其女 恐傷家風 公曰 好色性也 吾亦無汝則 當如廉兄 貪財則家富 不使汝苦 不亦可乎 菩丹不能? 其女果無行 公亦不深責

公三子獨棄?而 娶庾信公女令光 生子令胤 乃盤屈公也 父子竟以戰亡 遺芳百世 四子元帥 六子元宣 皆爲中侍 皆菩丹生也 九子元訓亦中侍 乃利丹生也 皆公陰德所致也

公累經大戰 未嘗敗 愛士卒如赤子 朝廷以公爲三寶之一 文武帝二十年二月 與菩丹娘主同上天界 壽八十三 娘主少二歲 子孫百數 吊者萬數 可不欽乎

淑斤裂뒬 패적裂寄 ?莖댕묘 兩黨솅??顆무裂돠 逞黨?各


同庾信公



19세 (  풍월주)   흠순공(欽純公)은 유신의 동생이다. 처음에   염장공의 부제가 되었는데   유신공의 명으로   춘추공에게 양보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풍월주의 위에 이르렀다.
그 해에 공의 아버지
  서현공과 형 유신이 낭비(娘臂)를 쳐서 큰 공을 세웠다. 공은 분연히 말하기를 “나로 하여 이 같은 빈 그릇만 지키라고 하니 장차 무엇이 될 것인가? 나도 또한 지금부터 나갈 것이다” 하였다. 대개 그 때 사람들이 공세우기를 좋아하고   선도(仙道)를 탐구하지 않았는데, 공 또한 그러한 사람이었다.

  이로써 (흠순)공의 재위 4년 동안 한결같이
  낭정(郎政)을 돌보지 않고 낭도를 거느리고 지방에 머물었다. 부제인   예원공(禮元公)259)이   낭정을 대행하였다. 공은 이에   예원공에게 물려주며 “실제로 (  낭정을) 행하는 사람이   풍월주가 되어야 한다” 하였다. 공은 성품이 활달하였고, 청탁에 구애되지 않았다. 사람들이 모두   유신공을 두려워하고 공경하였으나 공은 홀로 그러지 않고 “어리석은 형이 어찌 두려운가?” 하였다. 그러나   유신공의 우애는 지극히 돈독하여 공을 마치 어린아이처럼 사랑하였다.

  (흠순)공은 나이 18살에
  전방화랑(前方花郞)이 되어   상선(上仙)을 두루 배알하였다. 나의 보리(菩利) 할아버지260)를 찾았을 때   예원공  서자(庶?)인   보단랑주(菩丹娘主)는 바야흐로 나이가 16살이었고   예원공은 9살이었다. 공은 보리 할아버지를 정자 위에서 배알하고,   보단  예원공을 데리고 정자 아래 연못가에 있었는데, 그윽한 아름다움이 마치   신선과 같았다. 공은 곁눈으로 오랫동안 보다가 갔다. … 수일 만에 와서 보리 할아버지를 만나 뵙고 사위가 될 것을 청하였다. 보리 할아버지는 그 …을 장하게 여겨 …하며 말하기를 “남자가 삼가야 할 것은 색이다. 네가 나의 딸을 사랑하되 다른 여자들을 많이 거느리지 않는다면 곧 줄 수 있고, 그렇지 아니하면 줄 수 없다” 하였다. 공이 맹세를 하였다. 보리 할아버지는 이에   보단을 공에게 시집보냈다.

  
  보단은 보리 할아버지의 풍모가 있어 재능과 아름다움이 남이 따를 수 없이 뛰어났고 미덕을 많이 갖추고 있었다. (흠순)공은 기쁨을 스스로 이기지 못하였다. 스스로 다스리지 못하는 일이 있으면 모두   보단의 의견을 듣고 결정을 하였다. 일곱 아들을 낳았는데 모두 아름답고 용감하며 아버지를 닮아서 집에 돌아오면   단란하고 화목한 분위기가 있었다. 공은 늘 사람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가 능히 국(國)과 가(家)를 위하여 공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나의 처가 뒤에서 도운 때문이다” 하였다.   유신공은 큰 일이 있으면 집에 들어가지 않고 문을 그냥 지나갔는데, 공은 큰 일이 있으면 반드시 먼저 집에 이르러   낭주(娘主)와 이야기를 하고 나서 갔다. 공은 늘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지방에 많이 있었는데   낭주는 원망하지 않고 집에 있으며 기도 드렸다. 집에 돌아오면 한집안 식구들이 떠들며 좋아하였다.(흠순)공은 젊어서 술을 즐겼다.   낭주가 친히 술을 빚어 다락 위에 두고 드렸다. 하루는 공이 술을 찾자   낭주가 다락에 올라갔다가 내려오지 않았다. 공이 이상하게 여겨 다락에 올라가니 큰 뱀이 술독에 들어가 취하여 있었고   낭주는 놀라 넘어져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공은 이에   낭주를 업고 내려왔다. 마침내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보리 할아버지가 듣고 “처를 사랑함이 이와 같으면 곧 둘째 딸을 주어도 좋다” 하였다. 이에
  낭주의 동생인   이단(利丹)을 또 공에게 시집보내어 세 아들과 두 딸을 낳았다. 형제가 한 지아비를 섬긴 까닭에 시기하고 질투하는 기색이 없었다. 공은 집에 있으면 오직 좋은 아버지가 되어 두   낭주 및 자녀들과 노는 것이 마치 어린아이와 같았으니, 그가   삼한의 대영걸인 줄 누가 알겠는가? 전쟁에 임하면 초목이 모두 떨고 집안에서는 닭과 개가 모두 업신여긴다고 한 것은 공을 두고 한 말이다.

  공은 재물에는 어두워 늘
  염장공에게 구하였다.   염장공은 웃으며 “네가 나를 곳간으로 삼는데 나의 아이를 기르지 않는다면 나는 손해이다” 하였다. 공은 이에 여러 아들에게   염장공의 딸을 아내로 맞게 하여, 그 딸들이   염장공의 재산을 나누어 시집오게 하였다.   보단은 “염(장공) 형은 색을 좋아하고 재물을 탐하니 그 딸을 맞으면 가풍을 상하게 될까 염려됩니다” 하였다. 공은 “색을 좋아하는 것은 성품이다. 나 또한 그대가 없었다면 곧 염형261)과 같았을 것이다. 내가 재물을 탐했다면 곧 집이 부유해져서 그대로 하여금 고생을 하지 않게 했을 것이니, 호색탐재(好色貪財) 또한 할만하지 않는가?” 하였다.   보단은 막을 수 없었다. 그(  염장공)의 딸은 과연 행실이 없었다. 공 또한 심하게 책망하지 않았다.
공의 셋째 아들만이 홀로 (
  염장공의 딸)을 버리고   유신공의 딸   영광(令光)을 아내로 맞아 아들인 영윤(令胤)을 낳았으니 그가 곧   반굴공(盤屈公)이다.262) 부자가 마침내 전쟁에서 죽었으니, 아름다운 이름이 백세에 남을 것이다. 넷째 아들 원수(元帥), 여섯째 아들 원선(元宣)은 모두   중시(中侍)가 되었는데   보단의 소생이다. 아홉째 아들   원훈(元訓) 또한   중시였는데 곧   이단(利丹)의 소생이다. 모두 공의 음덕이 이룬 것이다.

  공은 여러 차례 대전을 거쳤으나 패한 일이 없었고 사졸을 사랑하기를 어린아이같이 하였다.
  조정에서는 공을 3보(?)의 하나로 삼았다. 문무제(文武帝) 20년(680) 2월   보단  낭주와 더불어 함께 천계(天界)로 올라갔다. 나이가 83살이었는데   낭주는 2살이 적었다. 자손이 백을 헤아렸고 조문하는 사람이 만을 헤아렸다. 공경할 만 하지 않은가!


유신의 동생이고 보리의 사위이다. 하늘을 뒤집는 큰 공은 좋은 짝을 얻는데서 비롯되었다. 오직 공의 덕은 만세에 이르리라.


  유신공과 같다.





259) 원래 禮元公으로 되어 있는 것을 후에 누군가 體元功으로 바꾸었으나 예원공이 맞는 것으로 생각되어 원래대로 기록하였다.

260) 보리조(菩利祖)의 조가 할아버지이면 이 책의 필자는 오기공(吳起公)이 되고 증조를 칭한다면 김대문(金大問)이 된다.

261) 염장공을 의미한다.
262) 『삼국사기』 47, 열전 7, 김영윤(金令胤) 조에 김영윤의 아버지는 급찬 반굴이고 할아버지는 흠춘 (또는 흠순)이었다고 나오고 있다.


259) 원래 禮禱무으로 되어 있는 것을 후에 누군가 ?禱묘으로 바꾸었으나 예원공이 맞는 것으로 생각되어 원래대로 기록하였다.

260) 보리조(패적籬)의 조가 할아버지이면 이 책의 필자는 오기공(?픗題?이 되고 증조를 칭한다면 김대문(金댕??)이 된다.

261) 염장공을 의미한다.

262) 『삼국사기』 47, 열전 7, 김영윤(金令慢) 조에 김영윤의 아버지는 급찬 반굴이고 할아버지는 흠춘 (또는 흠순)이었다고 나오고 있다.

 

 

二十世禮元公者 菩利公之子也 從欽純爲花郞 廉長公主之 欽純公以副弟 以公爲前方花郞 性端雅溫詳 屈己下人 律身以道 郎徒賀之曰 二花之孫也 事欽純公如胞兄 少無相違 欽純公主之 以副代行 多革弊政

加耶派之不正者 以爲眞骨復興之政而非之 公欲自免 欽純公怒斥其徒黜之曰 副弟卽吾身也 豈有少差乎 且今四海一家 安有眞骨·加耶乎 乃大進眞骨舊頭用之 加耶頭多聚于廉長公 哀求之 廉長乃請公 賜酒慰之曰 聞汝年少善政 不禁喜也 時加耶頭多在堂下侍之 廉指之曰 此輩皆吾所使也 恃吾而不順于汝 罪當嚴治 汝宜杖其甚者

公曰 無有不順而 臣亦無?意 但主兄怒造言者 累及于彼也 兄怒(小)歇則臣當皆可差定也 廉笑而撫公背曰 誠吾好弟也 吾固知仙宗與凡主不同也 郎徒者本汝家物也 豈有派乎 此輩均是汝奴 不亦悶乎 郎頭皆叩頭 死罪願爲副主效死 公曰 爾等無罪而罷 吾知其寃也 各敀而待也 頭等喜而退

廉亦大喜 强酒于公曰 愚女有可妾者 汝其擇之 乃進公庶女三人 拜于公 〃謝曰 臣母至嚴 不敢自擇 廉稱之曰 有是子 母其無憂矣 乃命三女 皆以其所手之衣進于公而媚 公不敢拒 取而敀 皆廉妾加耶頭女所生也 廉公有妾十七人 眞派五人 元派四人 加派八人 皆郎頭女也 互相爭寵求乞

公累爲公召而 謁于堂則 公擁妾而坐曰 某實此妾之兄也 汝其爲我護之 吾將爲妾等困苦死也 吾心本無私而 奈妾等不許何 公以溫言陳情而退 廉見公之出 顧謂其妾曰 禮元雖少有大體 爾等不可强我而失體也 妾等知公孝于母 乃以重賂欲媚公母萬龍娘主

萬龍亦皆撫而順之 費心實多 萬龍素與美室女蘭若宮主善 其女雨若公主乃眞平帝生也 萬龍命公娶之 公亦愛其美 而相和如漆 不肯有妾而 廉公苦欲妾其女 恐相惡而萬龍勸取之 雨若亦勸之 公不得已取廉公女察己爲妾 乃加耶頭察忍女生也 萬龍見其有禮皃?而定之

公之副弟善品公 亦美室宮主女宝華公主生也 宝華與蘭若同母而 與雨若同父 帝故愛公殊甚 公長善品二年 志趣相得 遂爲兄弟 恩愛日重 輒引爲花弟而 同去就 善品爲元派 故郎徒有諫之者 公正色拒之 公爲主引爲副弟

時加耶派眞珠公 久居左方未主 故或勸讓之 公笑曰 眞珠吾兄也 豈有以兄弟之乎 眞珠乃謝花郞而入兵部 公與善品互相爲政 均用三派 大洽衆望 仙道從宝宗 武道從庾信 居三年而讓于善品公 入禮部又轉調府 善德大王寵幸之 擢爲衿荷臣 大王崩 退居養眞時春秋公將入唐 選能文章好風采者 仙花三人 僧侶三人從之 無主之者 不得其人 欽純公曰 非吾禮元 誰可當之 春秋公大喜選之 公謝以閑居 春秋公曰 當此有事之時 安可閑居乎 公乃隨之 朝廷以唐人好色 選遊花三人 飾以載之 假稱宗室女 公曰 誘人以色非道 况欺骨品乎 爭之不得

途遇風浪 舟人以爲女可入海 公拒之曰 人命至重 豈妄殺乎 時良圖亦以仙花同舟 爭之曰 兄以重女而不重主公乎 若危則將奈何 公晏然曰 危則俱危 安則俱安 寧有殺人而謀生乎 言訖而風靜 人以爲海神聞公之言而息怒

及入唐 人多以公爲圓光之姪善文章 重之 柳享問神仙之道 公答以宝宗能得是道 又問燕書 公誦與之 又問我邦婚道 公答以神宣 問何神始祖 日光之神也 柳曰 日光與金天氏同歟 盖前使以我國奉金天氏爲祖云故也 公曰 金天氏何如神乎 柳不能對

唐相問 爾國與百濟相婚 今何相爭 公曰 百濟爲麗所逐而南下 我國借兵與地以保之 故始則臣附于我 稍安反侵我地 且加耶本我附庸 今已入我而百濟取其西地不返 盖貪而無道 故欲得天兵而誅之 問 爾國建元稱帝自何時乎 公曰 遠自上古也 前使對以法興始之者 只以文字言也

又問加耶以爾國爲附庸 爾國以加耶爲附庸孰是乎 公曰 我國始于漢宣帝五鳳元年 加耶始于漢光武建武十八年 可知孰是也 唐相以爲然

及敀 唐人以遊花不通言語不習風土 雖美而不可居 遊花欲伴敀 從者欲棄之 公曰 父母兄弟在 安可棄乎 途過敵兵 使溫君解爲紀信之計而解之

以功進爵 復居稟主二載 出令禮部 尋令理府 累居樞要 品至伊湌 文武帝十三年 以執事部大等卒于官 壽六十七 帝痛 以上大等禮葬之 嗚呼 聖人固不可壽乎 以公之德未得上壽 惜乎

公恥我邦婚道 對以神宣 敀議改之而 習久難革 常以爲憂 戒子孫不復爲陋風 公子吳起公娶從妹雲明 公怒不見 欽純公笑曰 善品之女 汝當子之 反爲怒何也 生者不安 死者亦寃 汝其察也 公不得已許之 雲明乃大問之母也 大問生 公喜曰 天也 抑善品欲点此孫而使汝等迷乎 遂不復言婚道

公女溫喜嫁春長公 星喜嫁元帥公 雨喜嫁摩次公 庶女察喜·察燕·察美·察亥 庶子察德·察元皆顯達



仙花之宗 文章之粹 淸儉好德 爲國盡? 欲問神仙 非公而誰 欲問聖賢 非公而誰

父曰菩利沙門 母曰萬龍娘主 萬龍之父曰貞肅太子 母曰萬呼太后 貞肅之父曰眞興大帝 母

曰叔明 公主也





20세 ( 풍월주)  예원공(禮元公)263)은  보리공의 아들이다. 흠순(欽純)을 따라 화랑이 되었다.  

염장공이  풍월주가 되자  흠순공이 부제가 되어 공을  전방화랑(前方花郞)으로 삼았다. 성품이 단아하고 따뜻하고 자상하였다.

자신을 굽혀 다른 사람보다 낮추었고 도로써 자신을 다스렸다. 낭도들이 축하하여 “과연 이화(二花)의 손자264)입니다” 하였다.  

흠순공을 섬기기를 같은 배에서 난 형처럼 하여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다.

   흠순공이  풍월주가 되자 부제로서 ( 낭정을) 대행하여 폐정을 많이 개혁하였다.  가야파의 옳지 않은 자들이 진골(정통)을 부흥하는 일이라 하여 비방을 하였다. (예원)공이 스스로 물러나려 하자  흠순공이 노하여 그 무리를 내쫓고 말하기를 “부제는 곧 내 몸이다. 어찌 나와 조그마한 차별이라도 있겠는가? 또한 지금 천하가 한집이 되었는데 어찌 진골과 가야가 있겠는가?” 하였다. 이에  진골정통의 옛  낭두(郎頭)들을 대거 진출시켜 등용하였다.

   가야파의  낭두들이  염장공에게 많이 모여 간절히 구원을 청하였다. 염장은 이에 (예원)공을 청하여 술을 내리며 위로하여 말하기를 “듣건대 네가 나이가 어리나  낭정을 잘 한다고 하니 기쁨을 금할 수 없다” 하였다. 그 때  가야파의 많은  낭두들이 당하에서 모시고 있었는데  염장공이 그들을 가리키며 “이 무리들은 모두 내가 거느리는 바이다. 나를 믿고 너에게 불순하니 죄를 마땅히 엄히 다스려야 한다. 너는 심한 자를 매로 다스려야 마땅하다” 하였다.

  (예원)공은 “순종하지 않는 자는 없으며 신 또한 (처벌)265)할 뜻이 없습니다. 단지  주형( 염장공)이 노하도록 말을 만든 것이 누차 귀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형의 노함이 조금 가라앉으면 곧 신은 마땅히 모두 제자리에 임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염장공이 웃고 공의 등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진실로 나의 좋은 아우이다. 나는 이미  선종(仙宗)266)이 보통  풍월주들과 같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낭도들은 본래 너의 집의 무리(物)이니 어찌 파가 있겠느냐? 이 무리가 고르게 너의 노(奴)들이니 또한 걱정이 되겠는가?” 하였다.  낭두들이 모두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고 죽을죄를 지었다며  부주(副主)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기를 원하였다. 공이 “너희들은 죄가 없는데 쫓겨났다. 내가 그 억울함을 알았으니 각자 돌아가서 기다려라” 하였다.  낭두들이 기뻐하며 물러났다.

   염장공 또한 크게 기뻐하며 (예원)공에게 술을 억지로 권하며 “첩으로 삼을만한 어리석은 딸들이 있으니, 네가 택해 보아라” 하였다. 곧  서녀(庶女) 세 사람을 나아가 공에게 절하게 하였다. 공은 사양하며 말하기를 “신의 어머니가 매우 엄하여 감히 스스로 택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염장공이 칭찬하며 “이 같은 아들이 있으니 어머니는 걱정할 것이 없다” 하였다. 곧 세 딸에게 명하여 손수 만든 옷을 공에게 바치고 애교를 부리게 하였다. 공이 감히 거절하지 못하고 거두어 돌아왔다. 모두가  염장공의 첩인  가야파  낭두의 딸들의 소생이다.  염장공은 17명의 첩이 있었다.  진골정통파가 5명,  대원신통파가 4명,  가야파가 8명이었으며 모두  낭두(郎頭)의 딸이었는데, 서로 총애를 다투어 구걸하였다.267)  예원공이 여러 차례  염장공의 부름을 받고 당(堂)에서 배알을 하면  염장공은 첩을 품고 앉아서 “누구(某)는 실은 이 첩의 형이다. 너는 나를 위하여 (그를) 보호하여 주기 바란다. 나는 장차 첩들 때문에 곤란하여 고생하다가 죽을 것이다. 나의 마음은 본래 사사로움이 없는데 첩들이 그냥 두지 않으니 어쩌겠는가?” 하였다. 공은 따듯한 말로 사정을 아뢰어 올리고 물러났다. 염장공은 공이 나가는 것을 보고 그 첩에게 말하기를 “예원은 비록 어리나 의리가 있다. 너희들은 나를 강요하여 체면을 잃게 하지 말라” 하였다. 첩들은 (예원)공이 어머니에게 효성스러운 것을 알고 값비싼 뇌물로 공의 어머니인  만룡랑주(萬龍娘主)에게 잘 보이려 하였다.  만룡 또한 모두 어루만지고 순종케 하는데 마음을 씀이 실로 많았다.  만룡은 평소에 미실의 딸  난야궁주(蘭若宮主)와 잘 지냈다. 그 딸  우야공주(雨若公主)는  진평제의 소생인데,  만룡은 공에게 아내로 맞을 것을 명하였다. 공 또한 그 아름다움을 사랑하여 서로 화합한 것이 마치 아교나 옻으로 붙여 놓은 것 같아서268) 첩을 두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염장공이 그 딸을 첩으로 삼아주기를 너무 절실히 원하였으므로, 서로 사이가 나빠질까 염려하여  만룡이 취하기를 권하였고, 우야 또한 권하였다. 공은 부득이  염장공의 딸  찰기(察己)를 첩으로 삼았다. 곧 가야랑두(加耶郞頭)  찰인(察忍)의 딸의 소생이다.  만룡이 그 예의 바른 태도를 보고 … 정하였다.

  공의 부제  선품공(善品公) 또한  미실궁주의 딸인 보화(宝華) 공주의 소생이다. 보화는 난야와 어머니가 같고 우야와는 아버지가 같다. 그러므로 ( 진평) 제(帝)가 (예원)공을 사랑함이 유달리 심하였다. 공은 선품보다 2살이 많았다. 뜻과 취향이 서로 맞아 마침내 형제가 되었다. 은혜와 사랑함이 날로 두터워지자 문득 끌어들여  화제(花弟)로 삼고 거취를 같이 하였다. 선품은  대원신통파인 까닭에 낭도 중에 간하는 자가 있었는데, 공이 정색을 하며 거절하였다. 공이  풍월주가 되자 끌어들여 부제로 삼았다.

  그 때  가야파인  진주공(眞珠公)이 오랫동안 左方(화랑)으로 있었으나  풍월주가 되지 못하였는데, 어떤 자가 그에게 물려줄 것을 권하였다. (예원)공은 웃으며 말하기를 “ 진주(眞珠)는 나의 형이다. 어찌 형에게 동생에게 하는 것처럼 물려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진주는 이에 화랑을 물러나  병부(兵部)에 들어갔다.269)

  공과 선품은 더불어  낭정을 수행하였는데, 3파를  균등하게 등용하여  중망(衆望)을 크게 만족시켰다.  선도(仙道)는 보종을 따르고  무도(武道)는 유신을 따랐다. ( 예원공은)  풍월주에 3년간 있다가  선품공에게 물려주고  예부로 들어갔다가  조부(調府)로 옮겼다.  선덕대왕(善德大王)이 총애하여  내성사신270)으로 발탁하였다. 대왕이 붕하자 물러나  양진(養眞)271)을 하였다.그 때  춘추공이 장차 당나라에 들어가려 하여 문장을 잘하고 풍채가 좋은 사람을 선발하려 하였다.  선화(仙花) 3인,  승려(僧侶) 3인이 따라 가기 때문에, 그들을 주관하는 사람이 없으면 마땅한 사람을 선발할 수 없었다.  흠순공(欽純公)이 “우리 예원이 아니면 누가 그것을 감당하겠는가?” 하였다.  춘추공이 크게 기뻐하며 선발하였다. 공은 한가롭게 있으려 하여 사양하였다.  춘추공이 말하기를 “이 같은 유사시에 어찌 한가로이 살 수 있겠는가?” 하였다. 공은 이에 따랐다.  조정에서는 당나라 사람들이 색을 좋아한다고 하여  유화(遊花) 3인을 뽑아 꾸며 태우고 거짓으로 종실의 여자라고 이르게 하였다. 공이 “색으로 사람을 유혹하는 것도 도가 아닌데 하물며  골품(骨品)을 속이는가?”272) 하며 따졌으나 어쩔 수 없었다.

  도중에 풍랑을 만났는데 뱃사람이 여자를 바다에 빠뜨리면 된다고 생각하였다. 공이 막으며 “인명은 지극히 중한데 어찌 함부로 죽이겠는가?” 하였다. 그 때 양도(良圖) 또한  선화(仙花)로서 같이 배를 타고 있었는데, 다투어 말하기를 “형은 여자를 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주공(主公)273)을 중하게 여기지 않습니까. 만약 위험하면 장차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였다. 공이 침착하게 말하기를 “위험하면 함께 위험하고 안전하면 함께 안전하여야 한다. 어찌 사람을 죽여 삶을 꾀하겠는가?” 하였다. 말을 마치자 바람이 고요하여졌다. 사람들은  해신(海神)이 공의 말을 듣고 노여움을 풀었다고 생각하였다.

  당나라에 들어가자 많은 사람들은 공이  원광의 조카로 문장을 잘한다고 존중하였다. 유향(柳享)이  신선(神仙)의 도에 대하여 물었다. 공은 보종(宝宗)이 그 도를 능히 얻었다고 답하였다. 또한  연서(燕書)에 대하여 물었는데, 공이 암송하여 주었다. 또 우리나라의 혼인하는 도274)에 대하여 물으니, 공이 신의 뜻에 따른다고 답하였다. 어떠한 신이  시조냐고 묻자, “ 일광의 신이다” 하였다. 유향(柳享)이 말하기를 “ 일광과  금천씨(金天氏)275)가 같은가?” 하였다. 대개 전에 왔던 사신이 우리나라에서 금천 씨를 조상으로 삼는다고 한 때문일 것이다. 공이 말하기를 “금천 씨가 어떻게 신이 되겠는가?” 하였다. 유향이 답을 할 수 없었다. 당나라의  재상이 묻기를 “너희 나라와  백제는 서로 혼인을 하였는데, 지금 어찌하여 서로 다투는가?”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 백제가  고구려에 쫓겨 남쪽으로 내려왔는데, 우리나라가 군대와 땅을 빌려주어 보호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우리에게 신하로서 의지하였는데, 점차 안정이 되자 도리어 우리 땅을 침범하였다. 또한 가야는 본래 우리의  부용국이었고 지금은 이미 우리나라에 들어왔는데,  백제가 그 서쪽 땅을 빼앗고 돌려주지 않는다. 대개 탐욕스럽고 도가 없다. 그러므로 천병(天兵)을 얻어 토벌코자 한다” 하였다. 묻기를 “너희 나라에서  건원하고 칭제한 것은 언제부터인가?”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멀리  상고(上古)부터였다. 먼저 온 사신이  법흥왕부터 시작되었다고 대답한 것은 단지 문자사용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또 묻기를 “가야가 너희 나라를  부용국으로 삼았는지 너희 나라가 가야를  부용국으로 삼았는지 어느 것이 옳으냐?”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한(漢)  선제(宣帝) 오봉(五鳳) 원년(기원전 57)에 섰고, 가야는 한(漢) 광무(光武) 건무(建武) 18년(기원후 42)에 섰으니, 누가 옳은지 알 수 있다”’276) 하였다. 당나라의  재상이 그렇게 여겼다.

  돌아올 때 당나라 사람들은  유화가 말이 통하지 않고 풍토에 익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비록 아름다우나 살수가 없다고 하였다.  유화도 함께 돌아오려 하였다.  종자가 그들을 버리려 하였다. 공이 “부모와 형제가 있는데 어찌 버릴 수 있는가?” 하였다. 도중에 적병이 있는 곳을 지날 때  온군해(溫君解)로 하여금 기신(紀信)의 계책277)을 쓰게 하여 벗어났다.

  공으로  작(爵)이 오르고 다시  품주(稟主)가 되었다가 2년 후  예부의 영(令)으로 나갔다.278) 이어  이부(理府)의 영(令)이 되었다. 여러 차례 요직에 있었으며 품(品)이  이찬(伊湌)에 이르렀다. 문무제 13년(673)  집사부(執事部)의  대등(大等)279)(또는  위화부 금하)으로 있으며 관아에서 죽었다(卒). 나이가 67살이었다.  제(帝)가 슬퍼하여  상대등(上大等)의 예로서 장사를 지내 주었다. 오호! 성인은 진실로 수를 누리지 못하는구나. 공의 덕으로서도 상수(上壽)를 누리지 못했으니, 애석하도다!(예원)공은 우리나라의 혼인의 도를 부끄럽게 여겨 신의 뜻에 따른다고 대답하고 돌아와 의논하여 고치려 하였으나 관습이 오래되어 고치기 어려웠다. 항상 걱정하였다. 자손들에게 다시는 나쁜 풍습을 따르지 말라고 훈계하였다. 공의 아들인  오기공(吳起公)이 4촌 누이  운명(雲明)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공이 노하여 보지 않았다.  흠순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선품의 딸이니 네가 마땅히 자식으로 여겨야 하는데 도리어 노여워 하니 무슨 일인가? 산 자는 불안하고 죽은 자는 원망할 것이다. 네가 그 것을 살펴야 한다” 하였다. 공은 부득이 허락하였다. 운명은 곧 대문(大問)의 어머니이다.280) 대문을 낳자 공은 기뻐하여 말하기를 “하늘의 뜻이구나. 아니면 선품이 이 손자를 점지하려고 너희들을 사랑에 빠지도록 하였느냐?” 하였다. 마침내 다시는  혼도(婚道)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다.

  (예원)공의 딸인  온희(溫喜)는  춘장공(春長公)에게 시집갔고,  성희(星喜)는  원수공(元帥公)에게 시집갔고,  우희(雨喜)는  마차공(摩次公)에게 시집갔다.  서녀(庶女)는  찰희(察喜)· 찰연(察燕)· 찰미(察美)· 찰해(察亥)이다.  서자(庶子)인  찰덕(察德)· 찰원(察元)은 모두 출세를 하였다.



 선화의 으뜸이요 문장이 뛰어났다. 청빈한 호덕(好德)을 나라를 위하여 다 바쳤네.  신선을 물으려 하면 공이 아니고 누구이며, 성현을 물으려 하면 공이 아니고 누구인가.



아버지는 보리  사문이고 어머니는  만룡 낭주이다.  만룡의 아버지는  정숙태자이고 어머니는  만호태후이다. 정숙의 아버지는 진흥대제이고 어머니는  숙명공주이다.





263) 원래 禮元公으로 필사되어 있는 것을 體元公으로 고쳤으나 禮元公이 맞는 것이 분명하여 바로 잡는다.

264) 이화랑의 아들이 보리공이고 보리공의 아들이 예원이다.

265) 글자를 읽을 수 없으나 벌을 주지 않겠다는 의미는 분명하다.

266) 1세 풍월주 위화랑, 4세 풍월주 이화랑, 12세 풍월주 보리공, 20세 풍월주 예원으로 이어지는 풍월주의 가문 출신을 뜻한다.

267) 예원공에게 청탁을 해달라고 염장공을 조르는 것을 가리킨다.

268) 如漆은 如膠似漆의 준말로 사랑이 너무 깊어 뗄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을 말한다.

269) 화랑을 물러나 병부에 들어가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270) 원래의 필사본에는 衿荷臣으로 되어 있는 것을 후에 內省私臣으로 고쳤다.

271) 천성을 기르고 타고난 진심을 기르는 것을 의미한다.

272) 종실의 여자는 골품이 있었던 것을 의미한다.

273) 춘추공을 의미한다.

274) 혼도(婚道)의 구체적인 내용 중 문제로 삼은 것은 동기(同氣)가 상합(相合)하는 풍습으로 근친혼인 것을 알 수 있다(22세 풍월주 양도공전 참조).


275) 『삼국사기』 41, 열전 1 김유신 상에는 신라인들이 스스로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의 후손이라 하였던 것으로 나오고 있다.

276) 신라와 가야의 건국시기를 당시 이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건국년대와 같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다.

277) 紀信은 漢 高祖의 신하인데 고조가 하남성 榮陽에서 項羽의 군사에게 포위되었을 때 자기를 희생하여 그를 구해낸 사람이다. 고조의 수레에 타고 초군을 속여 마침내 고조를 대신하여 죽었다.

278) 『삼국사기』에는 김춘추가 당에 다녀온 것은 진덕왕 2년(648)이었기에 예원이 품주로 있었던 시기는 648년부터 2년간이었다. 그런데 『삼국사기』 직관 상에는 집사부는 본래 품주였는데 651년 집사부로 고친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품주로 있었던 시기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어긋나지 않아 『화랑세기』의 신빙성을 확인할 수 있다.


279) 位和府 衿荷로 고쳐 있다. 그런데 執事部의 장은 中侍였는데 大等이라고 한 것은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당시 각 행정관부의 장들이 대등회의의 구성원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280) 『화랑세기』를 원래 쓰기 시작한 오기공은 적어도 이 부분까지는 직접 기록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二十一世善品公者 仇輪公之子也 從禮元公入花郞 容皃絶妙 言行極佳 好文章 通仙佛 眞上骨之人也 禮元公以妹宝龍妻之 傳其位 公居主四年 一遵禮元公制度 傳于副弟良圖公 從禮元公入內省 尋登禮部 仁平十年奉使入唐 得病而敀 尋卒 壽三十五 王痛之 進爵阿湌

後以公女慈義爲文武帝后 追贈波珍湌 公之次女雲明嫁禮元公子吳起 三女夜明亦事文武帝爲宮主 一子順元貴顯 初公卒 宝龍寡居 時文明太后生仙元殿君 請乳於宝龍 文武帝以此見宝龍之美而悅之 宝龍乃許以長女 仍自爲尼 帝惜之 及爲太子 以其女慈訥爲妃 立宮曰慈義 命宝龍入宮爲監 順元以此長于宮中 與仙元幢元殿君等 一例進爵榮幸極矣 人皆謂享公不食之功


宝 華之子 眞興之孫 有祿不食 福及子孫
父曰 仇輪 母曰宝 華 仇輪之父曰眞興 母曰思道 宝 華之父曰眞平 母曰美室也




21세 (
 풍월주)  선품공(善品公)은  구륜공(仇輪公)의 아들이다.  예원공을 따라 화랑(도)에 들어갔다. 용모가 절묘하고 언행이 매우 아름다웠다. 문장을 좋아하고  선불(仙佛)을 통달하였으니 진실로 높은  골품의 인물이다.  예원공이 누이  보룡(宝龍)을 처로 삼게 하여  풍월주의 지위를 물려주었다. 공은 4년간  풍월주로 있으며 한결같이  예원공의 제도를 따랐다. 부제  양도공에게 ( 풍월주를) 전하여 주고  예원공을 따라  내성(內省)에 들어갔다가 얼마 후  예부의 관직을 가졌다.  인평(仁平) 10년(643)에 왕명을 받들어 사신으로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병을 얻어 돌아와서 곧 죽었다(卒). 나이가 35살이었다.281) 왕이 마음 아프게 생각하여 작을  아찬(阿湌)으로 올렸다.

  후에 (선품)공의 딸 자의(慈義)가 문무제의 후(后)가 되자
 파진찬(波珍湌)으로  추증하였다. 공의  차녀  운명(雲明) 예원공의 아들 오기(吳起)에게 시집을 갔다. 3녀 야명(夜明) 또한 문무제를 섬겨  궁주(宮主)가 되었다.282) 외아들  순원(順元)은 높은 자리에 올라 이름을 날렸다. 처음 공이 죽고  보룡(宝龍)이 혼자 살았다. 그 때  문명태후 선원 전군(仙元殿君)을 낳고283)  보룡에게 젓을 먹여줄 것을 청하였다. 문무제가 이로서  보룡의 아름다움을 보고 좋아하였다.  보룡 제(帝)에게 장녀를 허락하고 스스로 여승이 되었다.  제(帝)가 애석하게 여겼다.

  문무가
 태자가 되자  보룡의 딸 자눌(慈訥)을 비(妃)로 삼아 궁(宮)을 세워(立宮) 자의(慈義)라 하고,284)  보룡(宝龍)에게 명하여  입궁(入宮)하여 감(監)이 되도록 하였다.  순원(順元)285)은 이로써 궁중에서 자랐으며  선원(仙元)286)· 당원(幢元)287)  전군과 더불어 같은 예로 작이 올라가니 영화와 행운이 지극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일러 공의 음덕의 공을 누린 것이라 하였다.



보화의 아들이고 진흥대왕의 손자이다. 녹이 있으나 받지 않아 복이 자손에 미쳤다.


아버지는 구륜이고 어머니는 보화이다. 구륜의 아버지는 진흥이고 어머니는 사도이다. 보화의 아버지는  진평이고 어머니는 미실이다.


281) 필사본에는 원래 35로 된 것을 36으로 고쳤다.

282) 야명이 문무제를 섬겨 궁주가 된 것을 통하여 당시 왕을 모시게 된 여자들 중 독자적으로 하나의 궁을 가지게 되어 궁주가 되는 것을 알 수 있다.

283) 김춘추와 문명황후 사이에 출생한 아들 중 선원(仙元)이나 원래썼던 당원(幢元)은 나오고 있지 않아 문제가 된다(『삼국유사』 1, 기이 2, 태종춘추공). 『화랑세기』에 나오는 것과 같이 문명태후가 낳은 것으로 미루어 선원(仙元)의 아버지는 김춘추가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26세 풍월주 진공(眞功)전에는 당원(幢元)은 보룡이 낳은 것을 알 수 있다.

284) 자눌이 왕비가 되어 입궁(立宮)하여 자의라고 한 것은 당시 왕비들이 각기 궁을 가지게 되었고 그에 따라 이름을 붙인 것을 의미한다.

285) 대아찬 순원(順元)은 효소왕 7년 당원(幢元)의 뒤를 이어 중시가 되었다(『삼국사기』 8, 신라본기 8, 효소왕 7년).

286) 선원(仙元)은 신문왕 10년(690)에 중시가 되었다(『삼국사기』 8, 신라본기 8, 신문왕 10년).

287) 당원(幢元)은 효소왕 5년(696) 중시가 되었는데 7년(698) 대아찬 순원(順元)이 중시가 될 때까지 재임하였다(『삼국사기』 8, 신라본기 8, 효소왕 5년, 7년).

 

 

二十二世良圖公者 毛宗公子也 少善品公一歲 初從廉長公爲花郞 年才十二而能知上下之禮 及至欽純公時 命屬禮元公 善品公爲主 以禮元公命爲副弟 事善品公 務盡承順 及爲主 多專橫 時人多不稱之 公性善事人 明於推移 好崇佛 重功名 有文章 能擊劒 常慷慨言天下 若一世之雄 及鞠躬上仙之時 完如嬰兒嬌婦 洽盡上歡

事父母至孝 母良明公主眞平大帝女也 帝愛公聰明 常召入宮中 多內賜 公未嘗自点 輒奉于公主而 與同氣均分 公主初爲美室宮主嫁其子宝宗公 生女宝羅宝良 宝宗公不喜內事 副弟廉長公通而生子長明 時宝宗公之姪毛宗公 乃夏宗公之子也 俊美有才 宝宗公愛之如己 敎以文章畵法 公主亦與之同學

一日公主夢得鸞祥 以爲吉兆 言于宝宗公而引之 宝宗公笑曰 吉兆何獨在我乎 遂仰臥而睡 時毛宗公?傍畵墨忽汚 公主乃引而洗之 遂與之? 生公 盖宝宗公知公主之意在毛宗公 故蹴硯池而成其好也 毛宗公少公主五歲 公主極愛之 呼曰弟公 及公生 宝宗公名以良圖曰 畵莫如弟公之子也 公主喜而許其名

公幼而穎悟 七歲問其所以名 公主無以對 乃掩之曰 欲汝善圖畵而名也 公乃奮發力作 好陳圖 兵仗甚精 故謀事從多周密 遂爲干城之將

公主以宝宗公爲夫 廉長·毛宗兩公爲私臣 故公常呼毛宗公以叔公 及長乃知爲親父 起敬盡孝 恨不得早知而孝 毛宗公曰 汝實吾子而籍系仙父 無至分愛可也 盖宝宗公以公爲嗣子故也

公以故越兄長明 先擢郎階 公悶其兄而欲讓之 廉長公不肯曰 家國皆有嗣子 不順父命 雖友於兄而得罪于父也 戒長明無以兄居 長明乃屈身事公 公益復起孝盡友 事廉長公亦以父道

初長姊宝良入眞平後宮 承寵生殿君宝路 僧滿后妬之 命退居 將嫁宗臣 宝良素愛公 不願他適 公主乃請于帝曰 若使宝良配良圖則 宝宗之血嗣可得 帝許之 宝宗公亦願之 公素惡同氣相合之風而 不肯之 宝良爲之疾作 公主怒叱之 公不得已曰 吾非不愛姊而 恐爲人譏也 吾爲夷狄則 嚴父慈母愛姊皆好 吾爲中夏則嚴父慈母愛姊皆怨 吾其爲夷狄也 公主乃?而抱公曰 眞吾子也 神國自有神國道 安用中夏爲乎 乃以宝良妻 公生子良孝公未嘗以妻待之 事之益勤 宝良怒曰 爾謂我年長而不愛乎 爾我同居三年 生子如此佳妙 父母極喜 吾未嘗造次不愛汝 〃一向以姊事我 敬之 尊之 我非金人神像 敬何爲乎 爾不聞乎 百斗敬不如一升愛 夫婦之間敬何爲乎 公笑而抱宝良而 慰之曰 生死同穴 豈有不愛之理乎 吾聞大愛敬之如神 小愛弄之如玉 吾欲以大愛同君 非以爲長姊而然也 宝良乃自愧謝之 事公如君 不敢以猥事戱前 曰 吾夫天下之佳士也 爲女子而死此人之事 榮莫大也 雖窮冬盛暑 必躬自調味以適公口 雖小疾微恙 力憂彈誠 常以宝刀自隨 以懷從殉之志

及公爲主 自以爲色衰 欲抽能宝爲花主 能宝素以宝良枕婢 陞爲暖房故也 公不許曰 吾以仙父之嗣子得統而 眞統在君 〃非花主而吾何爲風月主乎 宝良乃喜而就位 與公受賀 時公年二十八 宝良年三十四 公多以郎政委宝良 自以大事任之 不知者以爲花主執政 公實決其大政

就位初改郎頭七級爲九級 國初庶民之子 俊秀則赴郎門爲徒 十三四而爲童徒 十八九而爲平徒 二十三四而爲大徒 大徒中入望者曰望頭 有功才??擧以臣頭 臣頭不得爲郞頭 唯望頭爲之 大徒至三十則屬兵部 或敀農工 長於鄕里

入望之法 非上仙上郞之摩子則不得 故郎頭之妻 有娠則 以生雉爲幣于仙門 入爲湯婢數日或數月 得幸則退 〃時其夫傾財爲禮而迎之 名曰謝函 生子三月而復入 以羊豕爲幣 名曰洗函 數日或數月得幸則退 其夫又爲謝函而迎之 以此郎頭多産則傾其産 輕薄之女 欲遊仙門而詐稱有身 而入爲湯婢 恐無娠 而私于仙門隸卒 或得仙種而敀 弊益甚焉 公始革入望之法 取以人材 禁謝函之風 郎徒大悅

初郎頭有郎頭·大郎頭·郎頭別將·上頭·大頭·都頭之級 至是公加其上以大都頭·大老頭 都頭以下各置別將 以廣其路而尊其位

郎頭之女皆入仙門 名曰奉花 不得上幸則不能敀嫁 故爭爲靑禮而媚之 得幸者曰 奉露花 生子者奉玉花 非玉露則 郎頭之新進者不娶爲妻 盖以因妻以貴也 奉花不爲靑禮則 老于仙門 落于隸卒 公乃禁靑禮玉露之弊 庶民之女俊美者 屬郎門爲遊花 不至三十則 不敀田舍 公又矯其弊 鄕里大悅雖然仙門之頑迷者 以爲專橫 多不悅 廉長公憂之 戒公以無太速 公直諫曰 美生公有摩子??人 人以爲多 今父主摩子百人 得不爲乎 廉長公笑曰 彼悅而求之 不亦可乎 治衆若治水 順之則可也 速之則潑也

時都頭世己之妻道里 少有嬌名 生廉長公二子 出爲世己妻 長世己十二歲 視世己如奴僕 不稱其旨則 捶撻世己 無所不至 世己有妾三人 生子則道里疾妬之 以鐵器亂打 世己不能起視郎務 公怒捕道里 將笞之 道里曰 妾雖罪重而 曉長·劉長之母也 國法生仙種之女 無露臀受笞之道

公怒曰 爾罪當三棍 爾言又可三棍 乃下其裳而縛之 宝良諫曰 廉父知之 恐傷其心 吾等豈以位治人 而反陷不孝乎 公曰 不治此人 無以懲衆 乃召世己責之曰 爲人之夫 不能正其妻 爾罪當罷 欲棍爾妻而花主止之 宜罷爾以懲之

道里恐其見罷而泣曰 妾願受笞而保夫 公笑曰 夫婦之義當如是也 爾若事世己如我 不敢自肆則 當免笞而保爾夫也 道里以此屈伏其夫 變肆爲順 不復妬妾 外他郎頭之妻 皆不得恃仙而肆夫 郎頭相賀曰 新主之德化及深閨 莫不爲公致命

雖然公內實好色 郎頭之妻多生公子 嬖臣察儀上犯宝良而不之禁 郎頭多以情私發登 政事多出專橫 上仙議于雲上 三派爭于幕下 公乃謂宝良曰 治衆如逐蠅除草也 不久而?無奈何 宝良笑曰 郞君能於制衆 而不?自制故也 公亦笑曰 孰謂吾妻不妬乎 吾於郎政休矣 乃讓于副弟軍官曰 爾能莊重自制 可勝于吾也 公居位四年 改革舊弊者甚多 安可曰無功乎 公愛憎深偏 有慍於中則 終身不許 故爲其下者不能自弛

公就位之時 文忠·善祭等皆爭副位 公獨引廉長公子閏長爲副弟 閏長之妹春花爲公愛妾 故閏長年少輕薄恃寵 犯法再三 廉長公命廢之 文忠·善祭·天眞·夏長等 又爭副位 公獨引軍官爲副弟 上仙多不許 公不奉命曰 普賢宮嗣孫不得爲副弟則 誰可爲之乎 乃以其妾天雲妻軍官 以固之

初公與軍官之姊明蘭有私 公旣娶宝良 明蘭適長明 以長明不如公 怨其母 昔明卽良明之異父兄也 軍官乃說長明敀明蘭于公 〃以此賢軍官而拔之 故人皆誹之曰 妾其嫂而拔其媒 雖然軍官沈重有大智 能服上下 公之明豈拘於明蘭哉 以此軍官奉公如天 出入必相依 軍官有勇善戰 公之勳業 亦多出軍官之手

嘗奉使于唐 途遇卜者 点之則曰 二公皆有將相之運 但死非命 公笑曰 大丈夫馬革褒尸 不死兒女子手 固當然也 ○公果卒于唐獄 軍官以点之神小心翼〃 卒連欽突事賜死 噫 盛衰窮達 抑亦運乎

公有七子?女 庶子女各十餘人 軍官亦娶公妹二人 有子十八人 多連欽突獄 公之妻宝良誤聞公之戰死而 伏劒而卒 公之三子二女 皆爲沙門奴婢 盖知公之家風也


美室之昆 眞平之孫 爲國干城 功盖乾坤 臨難捨身 萬里招魂 大人無賞 與天地存
父毛宗之父曰夏宗 養父宝宗之父曰薛原 母良明之母曰宝明者 只召太后與枕臣仇珍生者也 宝明美而柔軟有香 歷事三帝 寵不衰焉 眞平帝卽位 春秋十三而壯大有溢 思道太后命宝明·美室導帝 美室以位卑骨微 讓宝明以上導 宝明時有昔明三月 故固辭之 美室乃先受幸 帝旣通暢 自至宝明宮求導 宝明不敢違乃受幸 是歲九月 帝以宝明·美室爲左右后 宝明旣生昔明而 專寵三年 而良明生焉 良明多肖宝明 故帝極愛之 常在帝側 年過二十而 始嫁宝宗公 生宝羅·宝良 二十八通毛宗公 生公 以爲寶鸞 慈愛尤深 公亦至孝 終身無違命





22세 ( 풍월주) 양도(良圖)는  모종공(毛宗公)의 아들이다.  선품공보다 한 살이 적었다. 처음  염장공을 따라 화랑이 되었다. 나이 겨우 12살에 상하의 예를 알았다.  흠순공 때에 이르러  예원공에게 속하도록 명하였다.  선품공이  풍월주가 되자,  예원공의 명으로 부제가 되어  선품공을 섬겼는데 힘을 다하여 받들고 순종하였다.  풍월주가 되자 전횡이 많아 당시 사람 중에 칭찬을 하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 공의 성품은 사람 섬기기를 잘하고 일의 추이에 밝았다. 부처를 숭상하는 것을 좋아하였고 공명(功名)을 중히 여겼다. 문장을 잘하였고  격검에 능하였다. 늘 강개하여 천하를 말하니, 마치 한 세대의  영웅과 같았다.  상선들에게 몸을 굽혀 존경을 표할 때는 어린아이가 어머니에게 재롱을 떠는 것 같아서 윗사람들의 기분을 다 맞추었다.

  지극한 효성으로 부모를 섬겼다. 어머니  양명공주(良明公主)는  진평대제의 딸이다.  제(帝)는 공의 총명함을 사랑하여 늘 궁중에 불러 들여  내사(內賜)288)를 많이 하였다. 공은 스스로 가지지 않고 번번이 공주에게 바쳐 동기들과 고르게 나누었다.  양명공주는 처음에  미실궁주를 위하여 그의 아들  보종공에게 시집을 가서 딸 ( 보라와) 보량을 낳았다.  보종공이  내사(內事)289)를 좋아하지 않아, 부제인  염장공과 통하여 아들  장명을 낳았다. 그 때  보종공의 조카  모종공은 곧  하종공의 아들이었는데, 빼어난 용모에다 재주가 있어  보종공이 자기처럼 사랑하였다. 문장과 화법(畵法)을 가르쳤는데, 공주 또한 더불어 같이 배웠다.

  하루는 공주가 꿈에 난새의 상서로움을 얻고 길조(吉兆)라 여겨  보종공에게 말하고  보종공을 끌어 당겼다.  보종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길조가 어찌 홀로 나에게만 있느냐?” 하고는 반드시 누워 자버렸다. 그 때  모종공이 …옆에서 묵으로 그림을 그리다가 갑자기 옷이 더럽혀졌다. 공주가 이에 이끌어 그 옷을 빨아 주었다. 마침내 더불어 (사랑)290)하여 공을 낳았다. 대개  보종공이 공주의 마음이  모종공에게 있는 것을 알고 일부러 벼루(硯池)291)를 발로 차서 사랑(好)을 이루도록 한 것이다.  모종공은 공주보다 다섯 살292)이 적었다. 공주는 지극히 사랑하여 아우님(弟公)이라고 불렀다. 공이 태어나자  보종공은 양도(良圖)라고 이름 지으며 말하기를 “그림은 아우님(弟公)의 아들만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하였다. 공주가 기뻐하여 그 이름을 허락하였다.

  공은 어려서 뛰어나게 총명하였다. 7살에 이름을 지은 까닭을 물었다. 공주가 대답할 것이 없어 숨겨서293) 말하기를 “네가 그림을 잘 그리기를 바라고 이름 지은 것이다” 하였다. 공이 이에 분발하여 힘써 그림을 그렸다. 진도(陳圖)를 잘 그렸는데 병장기가 매우 정밀하였다. 따라서 일을 하는 것도 몹시 치밀하였다. 마침내 나라를 지키는  장군이 되었다.
(양명)공주는  보종공을 지아비로 하고  염장공과  모종공을 사신으로 하였다. 그러므로 공은 늘  모종공을 숙공(叔公)이라고 불렀다. 커서는 곧 친아버지인 것을 알고 더욱 존경하고 효를 다하였고 일찍 알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기며 효도하였다.  모종공이 말하기를 “너는 실제로 나의 아들이지만 적(籍)은  선부(仙父)를 이었으니 사랑을 나누지 않는 것이 옳다” 하였다. 대개  보종공이 공을  사자(嗣子)로 삼은 까닭이다.공은 그러므로 형  장명(長明)을 뛰어넘어 먼저  낭계(郎階)에 발탁되었다. 공이 그 형을 걱정하여 양보를 하려고 하자,  염장공이 허락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집과 나라에는 모두  사자(嗣子)가 있으니, 아버지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비록 형에게 우애롭다고 하더라도 아버지에게 죄를 얻을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장명에게 형으로 처신하지 않도록 타일렀다.  장명은 이에 몸을 굽혀 공을 섬겼다. 공은 한층 더 효도를 하고 우애를 다하였다.  염장공을 섬기기를 또한 아버지에 대한 도리로 하였다.

  처음에  장명의 손위 누이 보량(宝良)이  진평의 후궁으로 들어가 총애를 받아  전군인  보로(宝路)를 낳았다. 승만후가 질투를 하여 물러나 살 것을 명하고 장차  종신(宗臣)에게 시집보내려 하였다. 보량은 평소에 공을 사랑하여 다른 곳으로 시집가기를 원치 않았다. 공주가 이에  제(帝)에게 청하여 말하기를 “만약 보량으로 하여금 양도를 배필로 맞게 하면 곧 보종의 혈통을 이은자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였다.  제(帝)가 허락하였다.  보종공 또한 원하였다.

  공은 본디 동기(同氣)간에 서로 결합(相合)하는 풍습을 싫어하여 따르지 않았다. 보량이 그 때문에 병이 생겼다. 공주가 성을 내어 책망을 하니 공이 부득이 말하기를 “저는 누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사람들이 나무랄까 걱정이 됩니다. 제가 오랑캐(夷狄)의 풍속을 따르면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사랑하는 누나 모두 좋아할 것이지만, 중국(中夏)의 예를 따르면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사랑하는 누나가 모두 원망할 것입니다. 저는 오랑캐가 되겠습니다” 하였다. 공주는 이에 … 공을 감싸 안으며 말하기를 “참으로 나의 아들이다.  신국(神國)에는  신국의 도(道)가 있다 어찌 중국의 도로서 하겠느냐” 하였다. 이에 보량을 처로 삼아 아들 양효(良孝)를 낳았다.

  (양도)공은 보량을 처로서 대우한 적이 없고 섬기기를 더욱 열심히 하였다. 보량이 노하여 말하기를 “너는 내가 나이가 많다고 사랑하지 않느냐? 너와 내가 같이 산지 3년이며 이 같이 아름답고 예쁜 아들을 낳아 부모가 매우 기뻐하고 내가 너를 잠시라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는데, 너는 한결같이 나를 누나로서 섬기고 존경한다. 내가 불상도 신상294)도 아닌데 공경은 무엇 때문에 하느냐? 너는 듣지 못했느냐, 백말의 공경은 한 되의 사랑만 못하다는 것을? 부부 사이에 공경은 해서 무엇하겠느냐?” 하였다.

  (양도)공이 웃고 보량을 감싸 안으며 위로하여 말하기를 “같은 굴에서 생사를 하는데 어찌 사랑을 하지 않을 까닭이 있습니까? 제가 듣기를 큰사랑은 공경하기를 신과 같이 하고 작은사랑은 희롱하기를 옥(玉)과 같이 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큰사랑으로써 그대와 함께 하기를 원하지 그대를 큰누나로 생각하여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보량은 이에 스스로 부끄러워 사과하고 공을 섬기기를 임금과 같이 하며 감히 외설스런 일로써 공 앞에서 희롱하지 않고 말하기를 “나의 지아비는 천하의 훌륭한 사람이다. 여자가 되어 이러한 사람을 섬기다 죽으면 더 큰 영광이 없다” 하였다. 비록 한겨울이나 한더위에도 반드시 몸소 음식을 조리하여 공의 입맛에 맞추었으며 조그만 아픔과 작은 병도 걱정하며 정성을 다했다. 늘 보도(寶刀)를 지니고 다니며 따라서 죽을 뜻을 품고 있었다.

  (양도)공이  풍월주가 되자 스스로 색(色)이 쇠하였다고 생각하여  능보(能宝)를 뽑아  화주(花主)295)로 삼으려 하였다.  능보는 본디 보량(宝良)의  침비(枕婢)였는데 승진하여  난방(暖房)이 되었기 때문이다. 공이 허락하지 않고 말하기를 “나는  선부(仙父)의  사자(嗣子)로 통(統)을 얻었는데, 진(골정)통이 그대에게 있다. 그대가  화주(花主)가 아니면 내가 어찌  풍월주가 되겠는가” 하였다. 보량은 이에 기쁘게  화주의 지위에 올라 공과 더불어 축하를 받았다. 그 때 공의 나이는 28살이었고, 보량의 나이는 33살296)이었다. 공은  낭정을 보량에게 많이 맡겼으나 큰일은 스스로 맡았다. 그것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화주297)가  집정하였다고 생각하지만 공은 실제로 큰  낭정을 결정하였다.

   풍월주가 된 후, 처음에  낭두(郎頭)298) 7급을 9급으로 고쳤다. 국초에  서민(庶民)의 아들들도 준수하면 곧  낭문(郎門)299)에 나아가 (낭)도가 되었다.300) 13·4살에  동도(童徒)가 되었고, 18·9살에  평도(平徒)가 되었고, 23·4살에  대도(大徒)가 되었는데,301) 대도 중  입망자(入望者)는  망두(望頭)라고 하였다. 공과 재주가 있는 자를 천거하여  신두(臣頭)로 삼았다. 신두는  낭두가 될 수 없었고, 오직  망두 만이  낭두가 되었다.  대도(大徒)가 30살이 되면 곧  병부(兵部)에 속하거나 혹은  농공(農工)에 종사하는 일로 돌아가거나  향리의 장(長)302)이 되었다. 입망(入望)의 법에는  상선(上仙)과  상랑(上郞)의  마복자(摩腹子)가 아니면 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낭두의 처들은 임신을 하면 곧 산 꿩을 예물로 하여  선문(仙門)에 들어가  탕비(湯婢)가 되었는데, 몇 날 또는 몇 달 만에 총애(幸)를 얻으면 물러났다. 물러날 때 그 남편은 재물을 들여 예를 갖추고 맞이하였다. 이름 하여  사함(謝函)이라 하였다. 아들을 낳아 석 달이 되면 다시 들어가는데 양과 돼지를 예물로 하였으며, 또  세함(洗函)이라고 하였고 몇 날이나 몇 달 만에 총애(幸)를 받으면 물러났다. 그 남편은 또  사함(謝函)을 하여 맞았다.

  이로써  낭두가 아이를 많이 낳으면 곧 그 재산이 기울게 되었다. 경박한 여자는  선문(仙門)에서 놀고자 하여 임신을 하였다고 거짓으로 칭하고 들어가  탕비가 되었는데 임신이 안 될까 염려하여  선문의  예졸(隸卒)들과  사통을 하였으며, 혹은  선종(仙種)303)을 얻어 돌아가니 폐단이 더욱 심하였다. 공이 비로소  입망의 법을 개혁하여 인재를 뽑고,  사함의 풍속을 금하였다. 낭도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처음에는  낭두에  낭두(郎頭)·대 낭두(大郎頭)· 낭두 별장(郎頭別將)·상두(上頭)·대두(大頭)· 도두(都頭)의 등급이 있었다. 이에 이르러 공이 그 위에 대도두(大都頭)·대노두(大老頭)를 더하였다.  도두(都頭) 이하는 각기  별장을 두어 그 벼슬길을 넓혔고 그 지위를 높였다.

   낭두의 딸은 모두  선문에 들어갔는데 이름 하여  봉화(奉花)라 하였다. 위304)로부터 총애(幸)를 받지 못하면 시집을 갈 수 없었다. 그러므로 다투어  청례(靑禮)를 하기 위하여 아양을 떨었다. 총애를 받은 자는  봉로화(奉露花)라 하였고 아들을 낳은 자는  봉옥화(奉玉花)라 하였다.  옥로(玉露)305)가 아니면  낭두에 새로이 오른 자들이 아내로 맞아 처로 삼지 않았다. 대개 처로 인하여 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봉화는  청례를 하지 못하면  선문에서 늙어  예졸들에게 떨어졌다. 공은 이에  청례와  옥로의 폐단을 금하였다.

   서민의 딸들로 빼어나게 아름다운 자들은  낭문(郎門)에 속하여  유화(遊花)가 되었고,306) 30살이 되기 전에는 집(田舍)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공이 또한 그 폐단을 바로 잡으니  향리(鄕里)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다. 그렇다고는 하나  선문(仙門)의 완고하고 사리에 어두운 자들 중에는 전횡한다고 생각하여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  염장공이 걱정을 하여 공에게 지나치게 빨리 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다. 공은 직간하여 말하기를 “미생공은  마복자(摩腹子)가 …인이었는데 사람들이 많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지금 부주(父主)께서는  마복자가 백인이니 옳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염장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저들이 좋아 요구하였으니 또한 가하지 않겠는가? 사람들을 다스리는 것은 마치 물을 다스리는 것과 같아, 순리대로 하면 되고 서두르면 물이 샌다” 하였다.

  그 때  도두(都頭)  세기(世己)의 처  도리(道里)는 어려서부터 아리땁다는 명성이 있었다.  염장공의 두 아들을 낳고 나와서 세기의 처가 되었다. 세기보다 12살이 많았다. 세기를  노복과 같이 보아서 그 뜻에 맞지 않으면 세기를 매질하였는데 못하는 짓이 없었다. 세기에게는 첩이 3인 있었는데 첩이 아들을 낳으면 도리가 질투를 하고 철기로 세기를 난타하여 세기는 일어나서  낭무(郎務)를 볼 수 없었다. 공이 노하여 도리를 잡아다 막 볼기를 치려 하는데, 도리가 말하기를 “첩의 죄가 비록 중하나  효장(曉長)과  유장(劉長)의 어미입니다.  국법에  선종(仙種)을 낳은 여자가 볼기를 내놓고 매를 맞는 도리는 없습니다”307) 하였다.공이 노하여 말하기를 “너의 죄는 곤장 세대에 해당하나 너의 말 때문에 곤장 세대를 더 한다” 하였다. 이에 그 치마를 내리고 묶었다. 보량(宝良)이 간하여 말하기를 “염부(廉父)308)가 알면 마음이 상할까 염려됩니다. 우리들이 어찌 지위로서 사람을 다스리고 도리어 불효에 빠질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이 사람을 다스리지 않으면 무리(衆)를 징계할 수 없다” 하였다. 이에  세기(世己)를 불러 꾸짖어 말하기를 “사람의 지아비가 되어 처를 바로잡지 못하였으니, 너의 죄는 파면해야 마땅하다. 너의 처를 곤장치려 하였는데  화주(花主)가 중지시켰으니 마땅히 너를 파면함으로써 너의 처를 징계할 것이다” 하였다.

  도리는 세기가 파면되는 것을 두려워하여 울면서 말하기를 “첩이 볼기를 맞을 것이니 지아비를 파면시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공이 웃으며 말하기를 “부부의 의리는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 만약 네가 세기를 나와 같이 섬기고 감히 방자한 행동을 않는다면 당연히 볼기맞는 것을 면하고 너의 지아비를 보호할 수 있다” 하였다. 도리가 이로서 그 지아비에게 굴복하여 방자함이 변하여 순종하게 되었고 다시는 첩들에게 강새암을 하지 않았다. 그 밖에 다른  낭두의 처들도 모두 선(仙)309)을 믿고 지아비에게 방자할 수 없게 되었다.  낭두들이 서로 축하하여 말하기를 “ 신주(新主)의 덕화가 안방까지 깊이 미쳤다” 하고, 공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공은 실제로는 색을 좋아하여  낭두의 처들이 공의 아들을 많이 낳았으며  폐신(嬖臣)  찰의(察儀)가 위로 보량(宝良)을 범하는데도 금하지 않았다.  낭두들이 많이 정으로 사사롭게 높이 올랐다.  낭정(郎政)의 일이 전횡에서 많이 나왔다.  상선(上仙)들이 운상(雲上)에서 의논을 하고 3파가 막하(幕下)에서 다투었다.

  공은 이에 보량에게 “무리를 다스리는 것은 마치 파리를 쫓고 풀을 뽑는 것과 같다. 오래지 않아 …이 없어질 것인데 어찌할 것인가” 말하였다. 보량이 웃으며 말하기를 “낭군은 무리를 다스리는 데는 능하나 스스로는 통제하지 못한 때문입니다” 하였다. 공 또한 웃으며 “누가 나의 처를 강새암하지 않는다고 하겠는가? 나는  낭정에서 물러날 것이다” 하였다.

  이에 부제인 군관에게 물려주며 말하기를 “너는 능히 장엄하고 정중하여 자제력이 나보다 뛰어나다” 하였다. 공은 4년간  풍월주로 있으며 오래된 폐단을 개혁한 것이 매우 많으니 어찌 공이 없다고 하겠는가? 공의 사랑하고 미워함은 심히 치우쳐, 마음속에 성이 나면 종신토록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아래 사람들이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공이  풍월주에 오를 때  문충(文忠)과  선제(善祭) 등이 모두 부제의 지위를 다투었는데,310) 공이 홀로  염장공의 아들  윤장(閏長)을 끌어서 부제로 삼았다.  윤장의 누이  춘화(春花)가 공의 애첩이었으므로,  윤장은 나이가 어리고 경박하여 총애를 믿고 법을 어기기를 여러 번 하였다.  염장공이 명하여 부제를 그만두게 하였다.  문충(文忠)· 선제(善祭)· 천진(天眞)· 하장(夏長) 등이 다시  부위(副位)를 다투었다. 공이 홀로 군관(軍官)을 끌어서 부제로 삼았다. 여러  상선(上仙)들이 허락하지 않았다. 공은 명을 따르지 않고 말하기를 “ 보현궁(普賢宮)의  사손(嗣孫)이 부제가 되지 못한다면 곧 누가 될 수 있습니까?” 하고, 곧 그 첩  천운(天雲)을 군관의 처로 삼아서 뜻을 공고히 하였다.

  처음에 (양도)공과 더불어 군관의 누나  명란(明蘭)이 사(통)을 하였는데, (양도)공이 이미 보량을 아내로 맞이하였기에  명란이  장명에게 시집갔다. 그러나  장명이 공만 하지 못하여 그 어머니를 원망하였다. 석명은 곧 양명(良明)의  이부형(異父兄)이었다.311) 군관은 이에  장명을 설득하고  명란을 공에게 돌아가게 하였다.

  공은 이에 군관을 현명한 사람이라고 여겨 발탁하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모두 비방하여 말하기를 “남의 부인312)을 첩으로 삼고, 중매한 자를 발탁하였다” 하였다. 그렇다고는 하나 군관이 침착하고 중후하고 커다란 지략을 가지고 있어 위아래 사람을 다스릴 수 있었으니 공의 현명함이 어찌  명란(明蘭)에 구애를 받았겠는가? 이로써 군관은 공을 받들기를 하늘과 같이 하였고, 출입할 때는 반드시 서로 도왔다. 군관은 용기가 있어 전쟁을 잘하였기에 공의 훈업 또한 군관의 손에서 많이 나왔다.

  일찍이 당나라에 사신을 가다가 도중에 점장이를 만나, 점을 친즉 말하기를 “두 공은 모두  장상(將相)의 운을 가졌습니다. 단 비명에 죽겠습니다” 하였다. (양도)공은 웃으며 “대장부가 말가죽으로 송장을 싸야지 아녀자의 손에 죽는 것이 아니다. 진실로 당연하다” 말하였다. 공은 과연 당나라의 옥에서 죽었다.313) 군관은 점이 신통하게 맞는 것을 보고 소심해져서 조심하였다. 마침내  흠돌(欽突)의 난에 연루되어 사약을 받고 자살하였다. 아! 성하고 쇠하고 막히고 통달하고가 문득 또한 운명이구나!

  공은 일곱 (명의) 아들과 … (명의) 딸이 있었으며  서자녀(庶子女)는 각기 10여명이 있었다. 군관 또한 공의 누이 2인을 아내로 맞아 아들 18인을 두었는데,  흠돌의 옥사에 많이 연루되었다. 공의 처 보량은 공이 전사한 것으로 잘못 듣고 칼로써 자결하였다. 공의 세 아들과 두 딸은 절(沙門)의  노비가 되었다. 대개 공의 가풍을 알 수 있다.


미실의 후예이고  진평의 손이다. 나라를 지키는  장군(干城)이 되어 공은 하늘과 땅을 덮었다. 어려움에 임하여 몸을 던졌고 만리에서 혼을 불러 장사지냈다. 대인은 기림이 없으니 천지와 더불어 남으리라.

아버지인 모종의 아버지는 하종(夏宗)이고, 〈어머니는  미모(美毛)이고〉,314)  양부(養父) 보종(宝宗)의 아버지는 설원이다.

  어머니인 양명(良明)의 어머니는 보명(宝明)인데,  지소태후와  침신(枕臣)  구진(仇珍)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보명은 아름답고 부드러워 향기가 있었다. 세 명의  제(帝)를 섬겼으나 총애가 쇠하지 않았다.

   진평제가  즉위하였을 때 나이가 13살이었는데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넘쳤다. 사도태후가 보명과 미실에게 명하여 ( 진평) 제(帝)를 도(導)315)하도록 하였다. 미실은 위가 낮고 골이 천하여 보명에게 상도(上導)를 양보하였다. 보명은 그 때 석명(昔明)을 가진지 3개월이었기에 굳이 사양하였다. 이에 미실이 먼저 사랑(幸)을 받았다.  제(帝)는 양기(陽氣)가 통하게 되자(通暢) 스스로  보명궁에 이르러 도(導)할 것을 구하였다. 보명이 감히 어길 수가 없어 사랑(幸)을 받았다. 이 해 9월 ( 진평) 제(帝)는 보명과 미실을  좌우후로 삼았다.

  보명은 석명(昔明)을 낳고나서 3년간 총애를 한 몸에 받아 양명(良明)을 낳았다. 양명은 보명을 많이 닮았다. 그러므로 ( 진평) 제(帝)가 매우 사랑하여, 늘  제(帝)의 곁에 있었다. 나이가 20살이 넘어 비로소  보종공에게 시집을 가서 보량(宝良)을 낳았다. 28살에  모종공과 통하여 공을 낳았는데, 보배로운 난새로 생각하여 어머니로서의 사랑이 더욱 깊었다. 공 또한 지극한 효성으로 종신토록 명을 어긴 바 없었다.


288) 임금이 신하에게 물건을 내리어 주는 것을 의미한다.

289) 內事는 房事와 같은 의미이다. 房事는 침실 안에서의 일, 閨中의 비밀된 일, 남녀가 성교하는 일을 의미한다.

290) 원래 글자를 읽을 수 없으나 사랑(好)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91) 벼루의 물을 담아 두는 곳을 의미한다.

292) 원래는 5살이 아니었으나 후에 수정된 것이다.

293) 아버지의 이야기를 드러내지 않은 것을 말한다.

294) 불상을 의미한다.

295) 풍월주의 처를 가리킨다. 나름대로 화랑도와 관련된 임무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296) 원래는 34살로 되어 있는데 33살로 고쳤다.

297) 『삼국유사』 2, 기이 2, 효소왕대 죽지랑조에 조정(朝廷)의 화주(花主)가 나오고 있다. 이것을 정부의 관리로 알았는데 『화랑세기』에 따르면 풍월주의 처로 여자였던 것을 알 수 있다.

298) 화랑도 조직 중 화랑이 아닌 낭도 중 우두머리를 낭두라고 하였는데 그들이 일정한 세력집단으로 되어 화랑도의 낭정에 영향을 미치는 등 점차 그 지위를 확대하여 나갔다.

299) 郎門은 화랑이 속한 仙門과는 달리 낭도들이 속한 곳이다.

300) 낭도 중에는 신분이 평인 백성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301) 화랑도의 연령에 따른 조직을 알 수 있다. 그 중 동도는 아직 어려 군대에 갈 나이가 아니었다고 여겨진다. 그에 비하여 평도와 대도는 군대에 나갈 수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30살이 넘으면 화랑도의 활동을 공식적으로 마친 것도 확인된다.

302) 향리의 장은 촌락의 차촌주 또는 진촌주가 된 것을 의미할 수 있다(李鍾旭, 「南山新城碑를 통하여 본 新羅의 地方統治體制」, 『歷史學報』 64, 1974, pp. 49-67).

303) 화랑의 아이를 갖게되는 것을 의미한다.

304) 화랑을 의미한다.

305) 봉옥화와 봉로화를 의미한다.

306) 서민은 평인 백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지며 평인 백성의 여자들이 유화가 되어 낭문(郎門)에 들어간 것이 확인된다.

307) 선종(仙種)을 낳은 여자에 대한 처벌규정이 있었던 것은 일종의 특권을 부여한 것으로 선종(仙種)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장치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308) 염장공을 가리킨다.

309) 관계를 맺었던 화랑을 가리킨다.

310) 22세 풍월주인 양도공 대에 이르러 화랑도의 조직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것을 볼 수 있다.

311) 양도의 어머니가 양명이고 군관의 어머니가 석명인데 양명과 석명의 어머니는 보명이다. 양명의 아버지는 진평왕이고 석명의 아버지는 진지왕이다.

312) 嫂는 형수이나 우리나라에서는 부인의 뜻으로도 쓰인다.

313) 『삼국사기』 6, 신라본기 6, 문무왕 10년 정월에 당 고종이 흠순은 환국을 시키고 양도는 잡아 두어 원옥(圓獄)에서 죽은 것으로 나오고 있다.

314) 이 부분은 필사본에 추기된 것이다.

315) 도(導)에는 이끌, 인도할, 통할, 다스릴, 열어줄 등의 뜻이 있다. 색사를 가르쳐 준다는 의미일 것이다

 

 

 

二十三世軍官公者 冬蘭公子也 母曰昔明公主 眞智帝女也 少良圖公三歲 豊隆有德 有只召太后之典型 十五能射 膂力絶人 好讀兵書 人皆異其器 昔明曰 吾夢海馬而生此子 必吾家千里駒也

公自幼好從良圖公遊 昔明嘗在眞平後宮時 與良明同居 約爲三生兄弟 生子互子之 至是昔明謂良明曰 吾姊妹之心此子通之也 乃命公與良圖公約爲三生兄弟 良圖公超位 必引公代其位 時閏長亦以良圖公愛弟 與公並立 公自知勢不可當 事〃讓于閏長 閏長與公同年而先一月 公事之以兄 閏長性好色貪財 多奸宗女遊花 因女私而咎無罪 聲聞九重 廉長公爲之待罪 良圖公乃引公爲副 命與宝良共治郎政 公愼重處事 一遵良圖公心法

時良圖公嬖臣察儀 美皃善媚 內通宝良 頗多專橫 公拔劒欲斬之 儀走入廊下 不敢出 宝良曰 誅此小雛 恐累及吾夫妻也 自此儀不敢復言郎政 時人快之

公性不好色飮酒 人無敢窺其私 宝良常謂軍官者誠吾夫妻之臣也 善德帝嘗於內宴 密謂宝良曰 聞汝嬖兒 其美果何如 宝良對曰 臣聞天子不問臣下之內事 陛下若固問之則 臣妾有一私臣 可以見之 異日引軍官而見 盖帝意在察儀 而以軍官見之 帝問軍官曰 人言汝美 有何術乎 軍官曰 臣之美不在外皃 只在心裡 帝曰 汝心裡有何美乎 軍官曰 臣願爲宝良夫妻死 宝良夫妻願爲陛下死 所謂美者只此而已 帝稱善賜食 顧謂宝良曰 汝有一兒 勝我十兒 幸善畜之

初廉長公妹天長娘主嫁水品公 生女天雲 有傾國之色 天雲之弟天光 亦色美多才 爲良圖公嬖臣 良圖公心慕天雲 自求于天長娘主而爲妾 愛不暫離 宝良爲之憂 公乃諫以妻妾之道 良圖公乃以天雲妻公 〃辭之不得 天光又屬于公 〃就位 良圖公命以天光爲副弟 公曰 引妻之弟 恐有公議 良圖公曰 非汝之爲也 乃我命之也 公不得已以天光爲副弟 因謂天雲曰 汝爲花主而汝弟爲副 郎徒必以我謂好私而不信也 天雲笑曰 郞君亦非主君之妾弟乎 吾等一膚片髮 無非主君之恩也 何敢違主君之命乎 郞君只可謹愼奉命 而無使天光放肆則 不亦可乎 公曰 汝言善矣公居位四年 專以奉命爲主 一遵良圖公舊政 郎頭出陟 無有少變 雍〃然過也 然良公之政皆出宝良 天雲雖在花主 實擁虛器 不平之徒 作歌而誹之曰

宝良門中人如雲

天雲堂上白雲過

天光每言宝良行私 郎頭不平之狀則 天雲叱之曰 汝敢言恩主之欠乎 天光曰 欲報其恩 故不欲示欠也 公徐慰之曰 汝姊之見與我相同 不久汝當爲主 任汝爲之 無示吾夫妻欠可也 以此天光不敢言一事 公莊重有大志 不屑〃於小事 震怒則雷霆起焉 內實柔美溫厚 可以泣婦人 夫婦極和諧 歷代之主皆畜郎頭妻女 公獨不一幸 時人風之曰

天雲高〃 難作人間雨

雖然公與良公皆入侍善德帝 超授爵位 識者短之

普賢之後 金輪之孫 一依良公 生死同原 赫〃有功 一朝含寃 嗚呼蒼天 此何業根

父曰冬蘭 祖曰冬宗 曾祖曰五宗 五宗公者梭失公主之子也 普賢公主少時與法興大帝和好 生梭失公主 法興大帝配梭失于立宗公 生五宗公 五宗公卽眞興大帝之異母弟也 五宗娶比次夫女比蘭 生女五蘭 取荒宗公子冬宗爲子 以配五蘭 生冬蘭 公實爲普賢·梭失之嫡嗣也 昔明公主初事眞平帝 生二女而出宮 冬蘭公時以音聲署長 善鄕歌 公主學歌舞于冬蘭公 遂至相愛 生女昔蘭 帝許與之婚 冬蘭公不敢妻之 事之以君 連生子女 公居其四 昔明之母曰宝明 事金輪帝 夢玄鳥而生昔明 故公實爲荒宗之曾孫 而仇珍之外裔也

23세 ( 풍월주)  군관공(軍官公)은  동란공(冬蘭公)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석명공주(昔明公主)이니 진지제의 딸이다.  양도공보다 세 살이 적었다. 인품이 넉넉하고 후덕한 것이  지소태후 전형(典型)316)이 있었다. 15살에 활을 잘 쏘았고 힘이 세서 당할 자가 없었다.  병서를 읽는 것을 좋아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그 그릇이 크다고 하였다. 석명이 말하기를 “내가  해마(海馬)의 꿈을 꾸고 이 아이를 낳았다. 반드시 우리 집의  천리구317)가 될 것이다” 하였다.

  (군관)공은 어려서부터
 양도공(良圖公)을 따라 노는 것을 좋아하였다. 석명(昔明)이 일찍이  진평의 후궁으로 있을 때 양명(良明)과 더불어 함께 살며 3생318)의 형제가 되기로 약속하고 아들을 낳으면 함께 아들로 삼기로 하였다. 이에 이르러 석명이 양명에게 “우리 자매의 마음을 이 아들이 알았다” 말하고는 공에게 명하여  양도공과 더불어  삼생형제(三生兄弟)가 될 것을 약속하게 하였다.  양도공이 위가 오르면 반드시 공을 자기가 있던 자리에 이끌어 앉혔다.

  그 때
 윤장(閏長) 또한  양도공의 사랑하는 아우(弟)로서 (군관)공과 나란히 경쟁하였는데, 공은 스스로 그 세를 당할 수 없는 것을 알고 일마다  윤장에게 양보하였다.  윤장은 공과 같은 나이인데 한 달 먼저 낳으므로 공은 형으로 섬겼다.  윤장은 색을 좋아하였고 재물을 탐하였으며  종녀(宗女)나  유화를 많이 범한 까닭에 여자의 사사로운 말을 듣고 죄 없는 사람에게 허물을 씌웠다. 소문이 궁중(九重)에 퍼졌다.  염장공이 그것 때문에 대죄(待罪)토록 하였다.  양도공이 이에 공을 이끌어 부제로 삼고 보량과 더불어  낭정을 함께 다스리도록 명하였다. 공은 일을 신중히 처리하였고 한결같이  양도공의 마음씨 쓰는 법을 따랐다.

  그 때
 양도공 폐신 찰의(察儀)가 미모로 아양을 잘 떨어 보량(宝良)과 내통하고 전횡을 많이 하였다. 공이 검을 뽑아 참하려 하자  찰의가 낭하에 달려 들어가 나오지 못하였다. 보량이 말하기를 “이 병아리를 죽이면 누가 우리 부부에게 미칠까 걱정이다” 하였다. 이때부터  찰의는 감히 다시  낭정에 대하여 말을 하지 못하였다. 그 때 사람들이 통쾌하게 여겼다.

  (군관)공의 성품은 주색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감히 그 사생활을 엿볼 수 없었다. 보량이 늘 “군관은 진정으로 우리 부부의 신하이다” 하였다. 선덕제(善德帝)가 일찍이 궁정의 연회(內宴)319)에서 조용히 보량에게 일러 말하기를 “듣건대 너의
 폐아(嬖兒)가 아름답다고 하는데 그 아름다움이 과연 어떠한가?” 하였다. 보량이 대답하여 “신이 듣건대  천자는 신하의 내사는 묻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폐하가 굳이 물으신다면 신첩에게 한 명의 사신이 있으니 보여 드리겠습니다” 말하였다. 다른 날 군관(軍官)을 데리고 뵈었다. 대개 (선덕)제의 뜻이  찰의에게 있었는데 군관을 뵈게 한 것이다.  제(帝)가 군관에게 “사람들이 말하기를 네가 아름답다고 하는데 무슨 재주가 있느냐?” 물었다. 군관이 말하기를 “신의 아름다움은 외모에 있지 않고 단지 마음속에 있습니다” 하였다.  제(帝)가 “네 마음속에 무슨 아름다움이 있는가?” 하자, 군관이 말하기를 “신은 보량 부처를 위하여 죽기를 원하고, 보량 부처는 폐하를 위하여 죽기를 원합니다. 소위 아름답다고 하는 것은 단지 이 것뿐입니다” 하였다.  제(帝)가 그 착함을 칭찬하며 음식을 내리고 보량을 보며 말하기를 “네가 데리고 있는 한 아이가 나의 열 아이보다 낫다. 잘 기르기를 바란다” 하였다.처음에  염장공의 누이  천장낭주(天長娘主)는  수품공(水品公)에게 시집가서 딸  천운(天雲)을 낳았는데, 천운은  경국지색320)이 있었다. 천운의 동생 천광(天光) 또한 얼굴이 아름답고 재주가 많아  양도공 폐신(嬖臣)321)이 되었다.  양도공이 마음으로 천운을 좋아하여  천장낭주에게 몸소 청하여 첩으로 삼고, 사랑하여 잠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보량이 그것을 걱정하였다. (군관)공이 이에  처첩의 도(道)로서 간하였다.  양도공이 이에 천운을 공의 처로 삼도록 하였다. 공이 사양하였으나 어쩔 수 없었다.

  천광 또한 공에게 소속되었다. 공이
 풍월주가 되자,  양도공이 천광을 부제로 삼으라고 명했다. 공이 말하기를 “처의 동생을 이끌어 주었다는 여론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하였다.  양도공이 말하기를 “네가 그렇게 한 것이 아니고 바로 내가 명령한 것이다” 하였다. 공은 부득이 천광을 부제로 삼았다. 그리고는 천운에게 말하기를 “너는  화주(花主)가 되었고 너의 동생은 부제가 되었으니, 낭도들이 반드시 나를 사적인 것을 좋아한다고 생각하여 믿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천운이 웃으며 “낭군 또한  주군(主君)322)의 첩의 동생이 아닙니까? 우리들의 살갗 한 점 머리털 한 오라기도  주군(主君)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어찌 감히 주군의 명을 어길 수 있습니까? 낭군은 단지 조심하며 명을 받들면 됩니다. 그리고 천광이 제멋대로 행동하지 못하게 하면 또 옳지 않겠습니까?” 말하였다. 공이 “그대의 말이 옳다” 하였다.

  (군관)공은
 풍월주로 4년간 재위하며 오로지 명을 받드는 것을 주로 하여 한결같이  양도공의 구정(舊政)을 따랐으며  낭두를 쫓아내고 승진시킬 때 조그만 변화도 없이 부드럽게 지나갔다. 그런데  양도공 낭정은 모두 보량에게서 나왔다.  천운(天雲)이 비록  화주(花主)의 자리에 있었지만 실제로는 빈 그릇을 끌어안고 있는 것과 같았다. 불평(不平)하는 낭도들이 노래를 지어 비방하기를

  보량의 문안에는 사람이 구름 같고
천운의 집 위에는 흰 구름이 지나간다

  고 하였다.

  천광이 매번 보량이 사사로움을 행하고
 낭두들이 불평하는 실상을 말하면, 곧 천운이 꾸짖어 말하기를 “네가 감히 은혜로운 주(군)의 흠을 말하는가?” 하였다. 천광이 말하기를 “그 은혜를 갚고자 하기 때문에 흠이 보이지 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였다. (군관)공이 천천히 위로하여 말하기를 “네 누나의 견해와 나의 견해가 같다. 머지않아 네가  풍월주가 되면 네 마음대로 하겠지만 지금은 우리 부부의 흠을 보지 않는 것이 좋다” 하였다. 이로써 천광은 감히 한 가지 일도 말하지 않았다.
(군관)공은 장엄하고 정중하며 큰 뜻이 있어 조그만 일에 얽매이지 않았다. 진노하면 천둥번개가 이는 것 같았으나, 마음은 실로 부드럽고 온후하여 부인을 감읍하게 할 수 있었다. 부부가 대단히 화목하여, 역대의
 풍월주들이 모두  낭두의 처와 딸들을 거느렸으나, 공은 홀로 한번도 사랑(幸)을 하지 않았다. 그 때 사람들의 소문에 이르기를,

  천운은 높고 높아
인간의 비가 되기 어렵다

  라 하였다. 그렇다고는 하나 (군관)공과
 양도공(良公)이 모두 선덕제(善德帝)를 입시(入侍)하여  작위를 뛰어 넘어 받았기 때문에 식자(識者)들이 그것을 잘못으로 여겼다.



 보현공주(普賢公主)의 후손이고 금륜왕(金輪王)의 손이다.  양도공에게 한결같이 의지하였고 생사도 같은 근본이다. 빛나는 공이 있는데 하루아침에 원통함을 머금었다. 오호! 푸른 하늘이여 이 무슨 업의 뿌리인가.


아버지는 동란(冬蘭)이고 할아버지는
 동종(冬宗)이다. 증조는 오종(五宗)이다.  오종공 사실공주(梭失公主)의 아들이다.  보현공주가 어렸을 때  법흥대제와 사랑(和好)하여  사실공주를 낳았다.

  
 법흥대제가 사실을 입종공(立宗公)에게 시집보내어  오종공을 낳았다.  오종공은 곧 진흥대제의  이모형(異母兄)이다. 오종이  비차부(比次夫)의 딸  비란(比蘭)을 아내로 맞아 딸  오란(五蘭)을 낳고,  황종공(荒宗公)의 아들  동종(冬宗)을 데려다 아들로 삼아  오란을 배필로 삼게 하여 동란을 낳았으니, 공은 실로 보현과 사실의  적사(嫡嗣)이다.  석명공주가 처음에  진평제를 섬겨 두 딸을 낳고  출궁하였다.

  
 동란공은 그 때  음성서(音聲署)의 장(長)323)으로  향가(鄕歌)를 잘하였다. 석명이  동란공에게 가무를 배웠다. 마침내 서로 사랑하여 딸  석란을 낳았다.  제(帝)가 허락하여 혼인을 하였으나  동란공은 감히 처로 대하지 못하고 군(君)으로 섬겨 자녀를 계속 낳았다. 공은 그 네 번째이다. 석명의 어머니는 보명인데 금륜제(金輪帝)를 섬겨  현조(玄鳥)324)의 꿈을 꾸고 석명을 낳았다. 그러므로 공은 실로  황종공의 증손이고  구진(仇珍)의  외예(外裔)가 된다.

  


316) 같은 부류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낸 型을 의미한다.

317) 천리구(千里駒)는 천리마를 가리키며 자질이 뛰어난 소년을 가리킨다.

318) 三生은 전생 이승 저승 또는 과거 미래 현재를 의미한다.

319) 內宴은 內進宴의 준말로 내빈을 모아서 베푸는 진연(進宴)을 의미한다.

320) 경국지색은 썩 뛰어난 미인을 의미한다.

321) 폐신의 원래 뜻은 아첨하여 임금의 신임을 받는 신하이나 여기서는 그 의미가 다소 다르다.

322) 풍월주를 가리킨다. 실제는 양도공이다.


323) 원래의 필사본에는 장(長)으로 되어 있는데 영(令)으로 수정하였으나 음성서에는 令이 없었다. 따라서 필사본을 수정한 사람이 신라사에 대한 지식인 없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 38 직관 상에는 음성서(音聲署)의 장(長)을 신문왕 7년(687)에 경(卿)으로 고친 것으로 나오고 있어 『화랑세기』가 적어도 687년 이전에 저술된 것을 알 수 있다.

324) 제비의 별칭 또는 학의 별칭이다.

 

二十四世天光公者 水品公之子也 顔如美花 嬌若婦人 言語丁寧 動止端雅 雖然內有俠氣 抑强扶弱 斷行己志 不爲上仙動搖

公年十四入欽純公主下 爲花郞 良圖公見而悅之 情若夫婦 至屬其下爲嬖臣 以此良圖公累至公家宿 公母天長娘主乃廉長公妹也 與公姊天雲迎良公而 消夜談樂不知天曉者累矣 天雲竟敀良公 良公欲報天長之恩而 命軍官公 以公爲副者也 公爲副弟 良公命公娶春花之妹尹華爲妻 至是爲花主 初閏長之弟夏長 與公爭副未得 至是良公命公以夏長之弟春長爲副 卽尹華之兄也 尹華之母夏姬 乃夏宗公女也 其母銀輪公主 乃思道太后女也 以此銀輪公主多私財 尹華得之敀于公 足用急人

自廉公以後 郎政多敀加耶 眞骨·大元多不振者 公慨然拔之 良公軍公之時 郎頭多用廉公摩子 至是公多斥之曰 郎頭郎政之重者也 豈獨重我翁 而不重郎政乎 被斥者皆詣廉公言公之短 廉公笑曰 汝等不依新主 吾亦何爲

〈察斗癸亥生 察石乙丑生〉 時加耶頭察忍年過六十 而尙居大老頭 妻妾子女以百數 出入起居完如上仙 其子察斗·察石 皆爲都頭 各妾數十人 郎頭多出于其子婿 大都頭唐甫亦爲察忍婿 其末子察儀爲良公嬖兒 勢莫當也 察忍妻玉斗里 以絶色事歷代上仙 所以致位也 公素疾察忍 至是先罷之 以眞骨舊頭萬德爲大都頭 唐甫爲大老頭 甫乃唐斗之子也 爲大元派 故加耶派大驚 爭赴上仙求護

公屹立不聽 新定其規 大老限六十 大都限五十五 都頭限五十 大頭·上頭限四十五 郎頭·大郞頭限四十 別將各依其位 人員均用三派 無至偏私 望頭隨才器不論摩子 大闢新進之門 人心大洽

時國事漸劇 公與諸郎頭率郎徒 親習弓馬 拔其萃者以補兵部 公居位五年 郎政多敀武事 善德帝疾大漸 毗曇·廉宗謀反 庾信公奉新主督戰 時京師兵少 公盡發郎徒 先突其陣 毗曇敗走亂平 公以功擢爲護城將軍

尋以主位傳于副弟春長 專務王事 出將入相 多有功績 中興二十八將之一也 可不欽哉 公性外柔內强 明察事理 愛恤士民 脫衣相贈 嗜酒不多飮 好色不亂房

尹華娘主生子女七人 公之妾五人 眞凁者眞福公妹也 孝月者孝宗公女也 京華者尹華之妹也 察言者察儀之妹也 萬水者萬德之女 各有子女 一門大昌 察忍雖失其位 而納女于公 而知公之至公無私 不敢怨尤 戒其子孫曰 新主誠罕世之英雄也 吾等安敢以一時之失 怏〃于心乎 所喜者得此好仙 以樹吾外孫則 吾族亦可昌也 以此三派和好相婚 皆頌公德 可不敬哉

父曰水品上大等 乃仇輪公子也 仇輪公娶般若公主 生水品公 般若之母美室宮主 仇輪之母思道太后 皆父眞興大帝 水品公娶天柱公女天長娘主 卽知道太后私生也 天柱公亦眞興大帝子也 系詳廉長公條

出自大元 入于加耶 扶護三郞 以安國家 唯公淸德 萬世方華



24세 ( 풍월주)  천광공(天光公)은  수품공(水品公)의 아들이다. 얼굴이 아름다운 꽃과 같고 교태는 마치 부인과 같았다. 말은 친절하고 거동은 단아하였다. 그러나 마음은  협기가 있어 강한 자를 누르고 약한 자를 도왔고, 자신의 뜻을 과감하게 실행하여  상선(上仙)으로 인하여 동요되지 않았다.

  (천광)공은 나이 14살에  흠순공(欽純公)이  풍월주로 있을 때325) 화랑이 되었는데,  양도공이 보고 좋아하여 정이 마치 부부와 같았으며 그 아래에 소속되어  폐신(嬖臣)이 되었다. 이로 인하여  양도공(良圖公)이 여러 번 공의 집에 이르러 잤다. 공의 어머니 천장랑주(天長娘主)는 곧  염장공의 누이인데 공의 누나 천운과 더불어  양도공을 맞이하여 밤을 새워 이야기하며 즐겼는데 날이 밝아오는 것도 알지 못한 것이 여러 번이었다.  천운(天雲)은 마침내  양도공에게 시집을 갔다.

   양도공은 천장의 은혜를 갚고자  군관공에게 (천광)공을  부제(副弟)로 삼도록 명하였다. 공이 부제가 되었다.  양도공이 공에게  춘화(春花)의 누이 윤화(尹華)와 결혼하라고 명하여 공은 그녀를 아내로 삼았고 이에 이르러 윤화는  화주(花主)가 되었다. 처음에  윤장(閏長)의 아우  하장(夏長)이 공과 더불어 부제가 되려고 경쟁을 하였는으나 이기지 못하였는데, 이 때에 이르러  양도공이 (천광)공에게 명하여  하장의 아우인 춘장(春長)을 부제로 삼도록 하였다. 춘장(春長)은 곧 윤화의 형이다. 윤화의 어머니  하희(夏姬)는 곧  하종공의 딸이다. 그 어머니  은륜공주(銀輪公主)는 사도태후의 딸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재(私財)가 있었다. 윤화(尹華)가 그것을 얻어 공에게 시집을 갔기에, 곤란한 사람을 돕는데 넉넉하였다.

   염장공 이후  낭정이  가야파에게 많이 돌아갔으므로,  진골정통과  대원신통에는 출세하지 못한 자들이 많았기에, (천광)공이 개탄하여 발탁하여 주었다.  양도공과  군관공 때에  낭두들은  염장공의  마복자들이 많이 등용되었다. 이 때에 이르러 공이 그들을 많이 물리치며 말하기를 “ 낭두는  낭정(郎政)에 중요한 자들이다. 어찌 나의 옹(翁)326)만이 홀로 중하고  낭정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인가?” 하였다. 쫓겨난 자들이 모두  염장공을 찾아가 공의 허물을 말하였다.  염장공이 웃으며 “너희들이 새로운  풍월주를 따르지 않는데 나 또한 어찌 하겠는가?” 하였다.〈 찰두는 계해년(603) 생이고  찰석은 을축년(605) 생이다.〉

  그 때  가야파의 우두머리인  찰인(察忍)은 나이가 60이 넘었는데 아직 대노두로 있었고  처첩과 자녀가 백을 헤아렸으며, 출입하고 거동하는 것이 완전히  상선(上仙)과 같았다. 그 아들인  찰두(察斗)와  찰석(察石)이 모두  도두(都頭)가 되었는데 각기 첩이 수십 인이었다.  낭두들이 그 아들과 사위에서 많이 배출되었고, 대도두(大都頭)  당보(唐甫) 또한  찰인(察忍)의 사위였으며 그 막내아들인  찰의(察儀)가  양도공의  폐아(嬖兒)가 된 것 등 그 권세를 당할 자가 아무도 없었다.  찰인의 처  옥두리(玉斗里)는 절색으로 역대의  상선을 섬긴 까닭에 높은 지위에 올랐던 것이다. 공은 본디  찰인을 미워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먼저  찰인을 파면시키고,  진공정통의 구두(舊頭)  만덕(萬德)을 대도두로 삼고  당보도 대노두가 되었다.  당보는 곧  당두(唐斗)의 아들로  대원신통파였다. 그러므로  가야파가 크게 놀라 다투어  상선에게 가서 보호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다.

  공은 우뚝 서서 들어주지 않고 규칙을 새로이 정하였다. 대노두(大老頭)는 60살까지로 한정하고, 대도두(大都頭)는 55살까지로 한정하고,  도두(都頭)는 50살까지로 한정하고, 대두(大頭)와 상두(上頭)는 45살까지로 한정하고,  낭두(郎頭)와 대 낭두(大郎頭)는 40살까지로 한정하였다.  별장은 각기 그 지위에 따르게 하였다. 인원은 3파를 고루 써서 사리사욕에 치우치지 않도록 하였고,  망두(望頭)는 재주와 그릇에 바탕에 의거하고  마복자를 논하지 않도록 함으로써 신진의 문을 크게 열었다. 인심이 크게 흡족하였다.

  그 때 국사가 점차 어려워졌다. 공과 여러  낭두들이 낭도를 거느리고 친히 활 쏘고 말달리는 것을 익혔는데, 모인 자들을 선발하여  병부에 보충하였다.327) 공이 5년간  풍월주의 지위에 있는 사이에  낭정(郎政)은  무사(武事)로 많이 돌아갔다. 선덕제의 병이 몹시 위독해지자,  비담(毗曇)328)과  염종(廉宗)이 모반을 하였다.  유신공이  신주(新主)329)를 받들어 전쟁을 독려하였다. 그 때 서울(京師)의 군대가 적어 공이 낭도를 모두 동원하여 먼저 그 진으로 돌격하였다.  비담이 패하여 달아나고 난이 평정되었다. (천광)공은 그 공(功)으로 발탁되어  호성장군(護城將軍)이 되었다.

  곧  풍월주의 지위를 부제인 춘장에게 전하여 주고, 오로지  왕사(王事)에 힘써 변방에 나가 장군이 되고  조정에 들어와  재상이 되며(出將入相) 많은 공적이 있었기에  중흥 28장(將)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가히 공경할만하지 않은가! 공의 성품은 외유내강하고 사리를 분명히 살폈고 사민(士民)을 사랑하고 구휼하여 옷을 벗어 주기도 하였다. 술은 즐겼으나 많이 마시지 않았고 색을 좋아하였으나 방사(房事)에 어지럽지 않았다.

  윤화랑주(尹華娘主)가 자녀 7명을 낳았다. 공의 첩은 5명이 있었다.  진수(眞凁)는  진복공(眞福公)의 누이이다.  효월(孝月)은  효종공(孝宗公)의 딸이다.  경화(京華)는 윤화(尹華)의 누이이다.  찰언(察言)은  찰의의 누이이다.  만수(萬水)는  만덕(萬德)의 딸이다. 각기 자녀가 있어  일문이 크게 번창하였다.

   찰인은 비록 그 지위를 잃었지만 딸을 공에게 바쳤고, 공이 지극히 공적이고 사심이 없는 것을 알았기에 감히 원망하거나 허물하지 않고 그 자손을 타일러 말하기를 “ 신주(新主)는 진실로 세상에 드문  영웅이다. 우리들이 어찌 일시의 잃음을 가지고 원망을 마음에 두겠는가? 기쁜 것은 이 훌륭한 선(仙)을 얻었으니 우리  외손을 낳아서 기르면 나의 집안이 또한 번창할 수 있는 것이다” 하였다. 이로써 3파가 화합하고 좋아하여 서로 혼인을 하고, 모두 공의 덕을 칭송하였으니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버지는 수품(水品)  상대등330)인데 곧  구륜공(仇輪公)의 아들이다.  구륜공이  반야공주(般若公主)를 아내로 맞아  수품공을 낳았다. 반야의 어머니는  미실궁주(美室宮主)이고 구륜의 어머니는 사도태후인데, 모두 진흥대제가 아버지다.  수품공은  천주공(天柱公)의 딸 천장랑주(天長娘主)를 아내로 맞았으니 곧  지도태후의  사생(私生)이다.  천주공 또한 진흥대제의 아들이다. 세계는  염장공조에 자세하다.


 대원신통에서 나왔고  가야파에 들어갔다.331) 세 화랑을 도왔고 국가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오직 공의 맑은 덕은 만세에 바야흐로 빛날 것이다.



325) 629년에서 632년까지다.

326) 천광공의 어머니인 天長의 오빠인 염장공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염장공은 천광공의 외숙부가 된다.

327) 화랑도의 군사적인 임무가 커지고 낭도들이 병부로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328) 필사본에는 毗雲으로 되어 있으나 『삼국사기』5, 신라본기 5 善德王 16년조에 나오는 것과 같이 毗曇으로 바꾸었다.

329) 24세 풍월주인 천광공을 가리킨다.

330) 『삼국사기』 5, 신라본기 5 선덕왕 5년 춘정월 조에 이찬 수품을 상대등에 임명한 것으로 나오고 있다.


331) 월화궁주-천주공-천장-천광공으로 이어진 계보로 천광공이 가야파에 들어간 것을 알 수 있다.

 

 

 

二十五世春長公者 廉長公第三子也 公性寬仁好德 奉上至誠 不以己意行事 娶天光公妹天鳳娘主爲花主 爲政一依天光命行之 以天光公命擧察斗爲大都頭 萬德爲大老頭 加耶派之勢漸復昌焉 副弟眞功者 天光公愛妾眞凁之弟也

公委政於眞功 察斗日與娘主飮酒度日 娘主曰 吾兄爲主 朝暮奔忙 郞君爲主 日中無事何 公笑曰 忙自是忙 閑自是閑 何嘗有毫釐之加減乎 然公居家勤儉戒子弟 每與娘主督郎頭妻女 製征袍以送出戰郎徒 密行都鄙 救恤貧乏 人望大敀

居位六年 而傳于眞功 擢入倉部 俄轉執事以稱其職 累遷至中侍 公常自謙曰 如我者可謂幸運之兒也 無有一能而 只依父兄上仙之蔭澤而己 未嘗以功績自居

氣像多類於天柱公 故天長常謂天鳳曰 汝夫不類阿兄 而酷類於我 汝類汝父而不類於我 汝夫妻還似我夫妻也 其言蓋不虛也 公嘗慕宝宗公淸潔 以爲立德之標準 有暇 必與花主躬詣其祠 拜禱而歸 事宝良如事母 所請無不應焉 宝良乃以其女良時與公妾之 無他雜色 公之行亦可爲仙門師表也 可不欽乎

贊曰 (찬하여 말한다)

天柱之昆 有此聖人 執心以淸 爲以仁 內助雙美 福祿日新


世系 (세계)

父廉長公 母夏姬乃夏宗公女也 夏姬之母銀輪公主 眞興大帝女也


25세 ( 풍월주)  춘장공(春長公)은  염장공의 셋째 아들이다. (춘장)공의 성품은 너그럽고 어질고 덕을 좋아하였으며, 윗사람을 받드는데 지성으로 하고 자기의 뜻대로 일을 하지 않았다.  천광공(天光公)의 누이 천봉랑주(天鳳娘主)를 아내로 맞아  화주(花主)로 삼았다.  낭정(郎政)은 한결같이 천광(天光)의 명에 의거하여 행하였고,  천광공의 명으로  찰두(察斗)를 대도두(大都頭)로 삼았고  만덕을 대노두(大老頭)로 삼았으므로  가야파의 세력이 점차 다시 창성하게 되었다.  부제(副弟)  진공(眞功)은  천광공의 애첩  진수(眞凁)의 아우이다.

  (춘장)공은
 낭정 진공 찰두에게 맡기고, 매일  낭주와 더불어 술을 마시며 세월을 보냈다.  낭주가 말하기를 “나의 형332)이  풍월주로 있을 때는 아침부터 밤까지 바빴는데, 낭군이  풍월주가 되고는 낮에도 일이 없으니 무슨 까닭입니까?” 하였다. 공이 웃으며 “바쁘다면 자체가 바쁜 것이고, 한가하다면 자체가 한가한 것이지, 어찌 추호의 가감이 있겠소?” 하였다. 그러나 공은 집에서는 근검으로 자제를 훈계하였다. 늘  낭주와 더불어  낭두의 처와 딸들을 독려하여  정포(征袍)를 만들어 출전한 낭도들에게 보냈다. 몰래 서울과 시골로 다니며 가난하고 고달픈 사람을 구휼하였다. 인망이 크게 돌아왔다.

  
 풍월주로 6년간 있다가  진공에게 물려주고  창부(倉部)로 발탁되어 들어갔다. 곧  집사부(執事部)로 옮겼는데 그 일이 맞았으므로 여러 번 승진하여  중시(中侍)가 되었다. 공은 늘 스스로 겸손히 말하기를 “나와 같은 사람을 가히 일러 행운아라고 할 수 있다. 한 가지 재능도 없이 단지 부형과  상선(上仙)들의 음덕에 의지했을 뿐이다” 하였다. 공적을 스스로 내세운 적이 없었다.

  기상이
 천주공과 닮은 점이 많았다. 그러므로 천장(天長)이 늘 천봉(天鳳)에게 일러 말하기를 “너의 지아비는 형(阿兄333))을 닮지 않고 나와 몹시 닮았고, 너는 너의 아버지를 닮았고 나를 닮지 않았다. 너의 부부는 도리어 나의 부부와 흡사하다” 하였다. 그 말이 대개 빈 말이 아니었다. 공은 일찍이  보종공(宝宗公)의 청결함을 사모하여 덕을 세우는 표준으로 삼고 틈이 생기면 반드시  화주와 같이 몸소 그 사당에 나아가 절하며 기도하고 돌아왔다. 보량(宝良)을 섬기기를 어머니를 섬기는 것과 같이 하여 청하는 것은 들어주지 않는 것이 없었다. 보량은 이에 그 딸 양시(良時)를 (춘장)공에게 주어 첩으로 삼았고, 다른 잡스런 여자는 없었다. 공의 행실은  선문(仙門)의 사표(師表)가 될 만하다. 공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천주의 후예로 이 같은 성인이 있다. 마음가짐이 깨끗하였고 자애로써 …을 하였다. 내조가 짝이 되어 아름답고 복록이 날로 새롭다.

아버지는
 염장공이고 어머니는  하희(夏姬)인데 곧  하종공의 딸이다.  하희의 어머니  은륜공주는 진흥대제의 딸이다.



332) 천광공을 가리킨다.

333) 형을 친하게 부르는 말이다. 염장공을 가리킨다.

二十六世眞功者 思隣公之子也 初美室宮主事眞興大帝 生般若公主 天光公爲其嫡孫 又生壽宗殿君 後改以思眞 其子乃思隣 故眞功與天光公爲再從兄弟 般若嘗謂壽宗曰 母多子女而 同父兄弟唯汝與我也 約世〃不相負 故水品公亦愛思隣公如同胞 思隣之母好隣乃虎林公姊也 思隣初爲林宗公大舍 得通林宗公妾好明 生女眞凁 林宗公乃以好明妻思隣 生眞功

能文章 有風采 好奇計 善談兵 亦有驍勇 足以御衆 雖然好色內貪 多行陰私 人望未洽 與察斗結托 取斗女三人爲妾 又取斗子昇妻大氏爲妾 察·大兩族妻女之佳者 盡入供簿

先是功與達福公子欽突情好 欽突之姊欽信嫁宝路殿君 生二女而美 功與突以計通信 殿君不知 信母政姬乃庾信公之妹也 怒功無禮 將告庾信公而罪之 突大懼乃重賂察儀而說宝良 〃乃許而止政姬曰 露之則只足傷我子女 隱之則水泡自殘 何不思之甚也 政姬乃止 自此功益無忌憚

信亦以功爲英勇 棄宝路而敀功 〃乃使人說宝路曰 欽信有疾可棄 更娶好逑 路以爲然 乃娶庾信公三女酌光爲妻 功乃以欽信爲妻 及就位以爲花主 論者非之 功不顧 並以欽突爲副弟 欽突內嶮多譎計 人皆忌之

時加耶派大盛 察氏一門緫執郎政 察儀以都頭別將行大都頭 突與儀許以死友 得通宝良 以見于眞德帝 〃加其爵以寵之 先是突聞慈儀之美 欺宝龍之寡 而欲妾之 宝龍却之 未幾宝龍生幢元殿君 突使人聲言宝龍之醜而脅之 盖未知其爲有聖寵也 慈儀及爲太子妃 突懼將有禍 使人毁其無德而危之 時突爲文明皇后之姪 故權傾內外 慈儀宮小心翼〃 突說文明后曰 慈儀他日爲后立子則 大權復敀眞骨 加耶危矣 不若早立信光以安吾族 信光者庾信公之女而 爲太子之妾者也


 진공은 임오년(622)생이고 임자년(652)에 화랑334)이 되었다.〉

  26세 (
 풍월주)  진공(眞功)은  사린공(思隣公)의 아들이다. 처음  미실궁주가 진흥대제를 섬겨  반야공주(般若公主)를 낳았다.  천광공 반야공주 적손(嫡孫)이다. 또  수종전군(壽宗殿君)을 낳았는데 후에 사진(思眞)으로 고쳤다. 그 아들이 곧  사린이다. 그러므로  진공 천광공은 재 종형제가 된다.

  반야가 일찍이 수종에게 “어머니는 자녀가 많은데 같은 아버지의 형제는 오직 너와 나뿐이다” 말하고, 대대로 서로 저버리지 않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므로
 수품공 또한  사린을 사랑하기를 같은 배에서 난 형제처럼 하였다.  사린의 어머니인  호린(好隣)은 곧  호림공(虎林公)의 누나이다.  사린은 처음에  임종공(林宗公)의  대사(大舍)가 되었는데  임종공의 첩  호명(好明)과 통(通)하여 딸  진수(眞凁)를 낳았다.  임종공이 곧  호명 사린의 처로 삼게 하여  진공을 낳았다.

  (
 진공은) 문장에 능하였고 풍채가 있었고 기묘한 꾀를 좋아하였고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잘하였으며, 또한 굳세고 용맹스러워 무리를 다스리기에 족했다. 그러나 색을 좋아하였고 마음이 탐욕스러웠고 사사로운 비밀을 많이 행하여, 인망(人望)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찰두(察斗)와 결탁하여  찰두의 딸 세 명을 첩으로 삼았다. 또한  찰두의 아들 승(昇)의 처  대씨(大氏)를 첩으로 삼았다. 찰(察)과 대(大) 양족의 처와 딸 중 아름다운 자들은 모두 공부(供簿)335)에 올랐다.

  이에 앞서
 진공 달복공(達福公)의 아들  흠돌(欽突)이 사이가 좋았다.  흠돌의 누나  흠신(欽信)이 보로전군(宝路殿君)에게 시집가서 두 딸을 낳았는데 아름다웠다.  진공 흠돌이 꾀를 써서  흠신의 두 딸과 정을 통했으나,  흠신과 보로전군은 알지 못했다.  흠신의 어머니  정희(政姬)는 곧  유신공(庾信公)의 누이인데,  진공의 무례함에 노하여  유신공에게 고하여 벌을 주려 하였다.  흠돌은 크게 두려워하여 곧  찰의(察儀)에게 귀중한 뇌물을 주어 보량(宝良)을 설득하게 하였다. 보량은 이에 알아듣고  정희를 제지하며 말하기를 “폭로하면 단지 나의 자녀가 상처만 입지만 감추면 곧 물방울처럼 스스로 없어질 것입니다. 어찌 생각을 깊이 하지 않습니까?” 하였다.  정희가 곧 멈추었다. 이때부터  진공은 더욱 거리낌이 없어졌다.

  
 흠신은 또한  진공이 출중하고 용감하다고 생각하여  보로(宝路)를 버리고  진공에게 가려고 하였다.  진공은 이에 사람을 시켜 보로를 설득하여 말하기를 “ 흠신은 병이 있으니 버리고 다시 좋은 여자를 아내로 맞는 것이 좋다” 하였다. 보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곧 유신(庾信)의 3녀  작광(酌光)을 맞이하여 처로 삼았다.

  
 진공은 이에  흠신을 처로 삼았고  풍월주가 되자  화주로 삼았다. 논자(論者)들이 옳지 않게 여겼다.  진공은 개의치 않고 아울러  흠돌을 부제로 삼았다.  흠돌은 마음이 험악하고 간사한 꾀가 많아 사람들이 모두 꺼렸다.

  그 때
 가야파가 크게 성하여 찰씨(察氏)  일문에서  낭정을 모두 장악하였다.  찰의 도두별장(都頭別將)인데 대도두로 행세하였다.  흠돌 찰의와 죽음을 같이할 친구가 될 것을 허락하였다.  찰의가 보량(宝良)과 득통을 하고  진덕제(眞德帝)를 알현하였다.  제(帝)는 그  작(爵)을 올려 주고 총애하였다.

  이에 앞서
 흠돌은 자의(慈儀)의 아름다움을 알고  보룡(宝龍)의 어리석음을 속이고 (자의를) 첩으로 삼고자 하였으나  보룡이 막았다. 얼마 안 있어  보룡 당원전군(幢元殿君)을 낳았다.  흠돌은 사람을 시켜  보룡의 추함을 떠들게 하여 위협하였다. 대개  보룡에게 왕336)의 총애가 있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의(慈儀)가  태자비가 되자  흠돌은 장차 화가 미칠까 두려워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자의가 덕이 없다고 험담을 하여 궁지로 몰았다. 그 때  흠돌은 문명황후(文明皇后)의 조카였다. 그러므로 권세가 내외를 압도하였다.  자의궁(慈儀宮)은 마음을 졸이며 조심하였다.  흠돌이 문명후(文明后)를 설득하여 말하기를 “자의가 후일 후(后)가 되어 아들을 ( 태자로) 세우면 대권이  진골정통에게 다시 돌아갈 것이므로  가야파는 위태로울 것입니다.  신광(信光)을 일찍  태자비로 삼아 우리 집안(族)을 편안하게 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신광 유신공의 딸로  태자의 첩이 된 사람이다.




334) 화랑이 아니라 풍월주가 된 것을 뜻한다. 이 기록은 필사자에 의하여 작성된 것으로 원본 『화랑세기』에 있었는지 알 길이 없다. 만일 원본에 있었다면 필사본 『화랑세기』는 원본을 다시 발췌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335) 색공장부(色供帳簿)라고 생각된다.

336) 무열왕이다.


〈突 丁亥生 丙辰花郞〉

(二十七世 欽突) 信光之兄晋光乃突之妻 故突托言庾信公之功 而欲內固其黨 文明后頗傾之 而太子不肯 突計遂破 功居位五年而讓于突 時太孫昭明殿君已生 武烈帝極愛慈儀之賢 突不敢復言其計 乃納款于宝龍宮 而請以其女妾順元 宝龍宮畏其詐譎 好言却之 突又使人納款于夜明宮及考吳起公 以欲弊前惡 時夜明亦生仁明殿君 俊秀有龍鳳之姿 太子極愛之 突自言願爲仁明之臣 夜明不得已許之 時順元公爲突所欺 內私突女 故爲突說夜明者也 武烈帝崩 而文武帝立 以慈儀爲后 〃知突惡而孝于文明太后 故未嘗發一言

先是突以好元公子興元爲副弟 初太陽公主事眞平大帝 生太元·好元而不肖于帝 公主少事銅金兩太子私臣 事帝亦然 故兩君不得統焉 興元自以爲帝統在己 怨在朝廷 乃以妹妾突以結之



〈 흠돌은 정해년(627) 생이고 병진년(656)에 화랑이 되었다.〉

   신광의 형  진광(晋光)은 곧  흠돌의 처였다. 그러므로  흠돌은  유신공의 공(功)을 핑계대서 말하였으나 마음속으로는 그 무리를 굳게 하려 하였다. 문명후는 거의 기울었으나  태자가 받아들이지 않아  흠돌의 계책은 마침내 깨졌다.  진공(眞功)은  풍월주의 지위에 5년간 있다가  흠돌에게 물려주었다. 그 때  태손(太孫) 소명전군(昭明殿君)337)이 이미 태어났고, 무열제는 자의(慈儀)의 현숙함을 매우 사랑하였다.  흠돌은 감히 다시는 그 계책을 말하지 못하였다. 이에  보룡궁(?龍宮)에 정성을 바치고, 그 딸을  순원(順元)의 첩으로 들일 것을 청하였다.  보룡궁은 속임수를 두려워하여 좋은 말로 거절하였다.  흠돌은 다시 사람을 시켜  야명궁(夜明宮)과 나의 아버지  오기공338)에게 정성을 바치고 전에 저지른 악행을 덮으려 하였다.

  그 때에 야명(夜明) 또한  인명전군(仁明殿君)을 낳았는데 준수하고 용봉의 모습이 있었다.  태자가 매우 사랑하였다.  흠돌이 스스로 말하여 인명(仁明)의 신하가 되기를 원하였다. 야명(夜明)이 부득이 받아들였다. 그 때  순원공(順元公)이  흠돌에게 속아, 비밀히  흠돌의 딸과  사통을 하였다. 그러므로  흠돌을 위하여 야명을 설득한 것이다.
무열제(武烈帝)가 붕(崩)하고 문무제가  즉위하자, 자의(慈儀)를 후(后)로 삼았다. 자의는  흠돌의 악함을 알았으나,  문명태후에게 효도를 하였으므로 한마디 말도 발설하지 않았다.

  이에 앞서  흠돌은  호원공(好元公)의 아들  흥원(興元)을 부제로 삼았다. 애초에  태양공주(太陽公主)가  진평대제를 섬겨 태원(太元)과 호원(好元)을 낳았는데  제(帝)를 닮지 않았다. 공주는 어려서 금륜 태자(金輪太子)339)를 섬겼는데  사신(私臣)을 좋아 하였다.  제(帝)를 섬길 때도 역시 그러하였다. 그러므로 양군(태원과 호원)은 통(統)을 얻지 못하였다.  흥원은 제통(帝統)이 자기에게 있다고 혼자 생각하여  조정을 원망하고, 누이를  흠돌의 첩으로 삼아 결탁하였다.


337) 소명전군은 무열왕의 태손으로 문무왕의 아들이고 문무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신문왕이다.

338) 필사본에는 吳起公의 吳를 考로 바꾸고 그 뒤에 吳를 추가하였다.

339) 필사본에는 銅金兩太子를 수정하여 金輪太子好로 바꾸었다.

〈吳起 癸巳生 壬戌花郞〉

(二十八世 吳起公) 及款夜明宮 欲以仙位傳于我考吳起公 誘興元以計而讓之 考以郎政之敗 欲不受 眞骨派郎頭等叩頭流血以爭之曰 如公不就 臣等皆將自滅 慈儀皇后亦勸就之 乃受 突居位七年而 考始就位 實二十八世也

時郎政已亂 不可倉卒救之 眞功·欽突·興元等 皆擁郎徒私兵 專政于上 考知其不可救 居三年而讓于副弟元宣公


〈오기는 계사년(633) 생이고 임술년(662)에 화랑이 되었다.〉

  ( 흠돌은)  야명궁에 정성을 바치게 되자  선위(仙位)를 나의 아버지  오기공에게 전하고자,  흥원을 계책으로 꾀어 양보하게 하였다. 아버지는  낭정(郎政)이 무너졌기에 받지 않으려 하였다.  진골정통파의  낭두들이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하고 피를 흘리며 따져 말하기를 “공이 나아가지 않는다면 신(臣) 등이 장차 자멸할 것입니다” 하였다.

  자의(慈儀) 황후 또한 나아갈 것을 권하여 마침내 ( 풍월주의 지위를) 받았다.  흠돌은  풍월주로 7년간 있고 나서 아버지가 비로소  풍월주의 위에 나아갔는데 실제 28세 ( 풍월주)다.

  이 때  낭정(郎政)이 이미 어지러워졌기에 급작스럽게 바로잡을 수는 없었다.  진공(眞功),  흠돌(欽突),  흥원(興元) 등이 모두 낭도 사병(私兵)을 거느리고 위에서  낭정을 전횡하였다. 아버지는 바로 잡을 수 없는 것을 알고 3년간 재위하고 부제인  원선공(元宣公)에게 물려주었다.

 

元宣 丙申生 甲子花郞〉

(二十九世 元宣公) 〃亦居四年 亦讓于軍官公嫡子天官


〈원선(元宣)은 병신년(636) 생이고 갑자년(664)에 화랑이 되었다.〉

   원선공(元宣公) 또한 4년간 재위하고 역시  군관공(軍官公)의  

     적자인 천관(天官)에게 물려주었다.


〈天官 己亥生 丁卯郞〉

(三十世 天官) 〃之妻 乃突之女也 於是郎政復敀于突輩 官居八年而


〈천관은 기해년(639) 생이고 정묘년(667)에 낭(郎)340)이 되었다.〉

  천관의 처는 곧  흠돌의 딸이다. 그리하여  낭정(郎政)이 다시  

 

흠돌의 무리들에게 돌아갔다. 천관은 8년간  풍월주의 지위에 있었다.


340) 풍월주가 된 것을 의미한다.

 

 

 

欽言 乙巳生 甲戌郞〉

(三十一世 欽言) 突之子欽言代之 盖其妾言元生也 以興元之甥 取興元女爲花主 言居五年而


흠언은 을사년(645) 생이고 갑술년(674)에 낭(郎)341)이 되었다.〉

  그리고 (흠)돌의 아들 흠언(欽言)이 대신하였다. 대개 그 첩
 언원(言元)의 소생이기 때문이었다.  흥원(興元)의 조카로  흥원의 딸342)을  화주(花主)로 삼았다. 흠언(欽言)은 5년간 ( 풍월주로) 있었다.

341) 풍월주가 된 것을 의미한다.

342) 필사본에는 딸 이름을 元紅으로 추기하였다.

() 眞功之子 信功代之 乃突之甥 亦以興元爲花主

數年之內 郎政一?於三奸之手 突媚事文明太后 乃以其女爲庾信公外孫 故納于太子 太子與母后不悅突女 先是昭明太子以武烈帝命 約娶欽運女而早卒 欽運女自願爲昭明祭主 慈儀后許之 是爲昭明宮 太子與母后累幸昭明宮 太子悅之 遂生理恭殿君 后乃命昭明宮入東宮 改稱善明宮 寵右於突女 突女妬之

文明太后崩 而突等自知罪重 危懼不安 突女又失寵 突等乃謀不軌 假託夜明宮以爲擁立仁明 而內實欲自立者也 文武疾大漸而 考吳起公自北原入爲護城將軍 實出於慈儀皇后命也 時眞功以護城將軍 不出印符曰 主上寢疾上大等無文 安可重職輕與人乎 不肯退 盖賊謀已密故也 帝崩而秘不發之 使人密召京外軍入城 突等以兵圍夜明宮及軍官公邸 欲作亂

吳起公心服郎頭洩其謀于公 時侍衛三徒多?于賊 慈儀皇后憂之 吳起公乃與順知·愷元·幢元·元帥·龍元公等 密招私兵入衛 盡罷三徒大監治之 突等乃大驚 進圍大宮 舒弗邯眞福公引手兵 破圍而入曰 京外兵大至 汝等爲賊臣所迷 不免誅夷 時突等欺其衆曰 上大等軍官及角干眞福受帝密詔 以立仁明而 軍官不動 眞福破圍 衆疑相爭 乃聲言勤王者右 從賊者左 於是衆多右赴 突等知事不諧 欲解圍而退 吳起公等縱兵大破之 京外兵又至 賊乃捕三奸而進 亂始平而 三徒以此誅戮者甚多

慈儀太后命罷花郞 使吳起公籍郎徒盡屬兵部 授之以職 雖然地方郎政依舊自存 悉直最盛 未幾其風又漸京中 重臣皆以爲古風不可卒變 太后乃許 以得道爲國仙 花郞之風於是大變


〈신공(信功)은 기유년(649) 생이고 무인(678)년에 낭(郎)343)이 되었다.〉

  그리고 진공(眞功)의 아들 신공이 대를 이었는데 곧 흠돌의 조카로 또한 흥원의 딸344)을 화주(花主)로 삼았다.
수년 내에
낭정(郎政)은 한결같이 3간(三奸)345)의 손으로 들어갔다. 흠돌은 아첨하여 문명태후를 섬겼다. 이에 그의 딸이 유신공의     외손이므로 태자346)에게 바쳤다. 태자와 모후(母后)347)는 흠돌의 딸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에 앞서
소명태자(昭明太子)는 무열제의 명으로 흠운(欽運)의 큰 딸을 아내로 맞기로 약속하였으나 일찍 죽었다.

 흠운의 작은 딸은 스스로 소명제주(昭明祭主)가 되기를 원하였다. 자의후(慈儀后)가 허락하였다. 이것이 소명궁(昭明宮)이다.

 태자와 더불어 모후(母后)가 자주 소명궁으로 거둥하였다. 태자가 소명궁을 좋아하여 마침내 이공전군(理恭殿君)348)을 낳았다.

 후(后)가 이에 소명궁(昭明宮)에게 명하여 동궁(東宮)으로 들어가게 하고 선명궁(善明宮)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총애함이 흠돌의 딸보다 컸다. 흠돌의 딸이 투기를 하였다.

  
문명태후가 죽자(崩), 흠돌 등이 스스로 그 죄가 무거운 것을 알고 두렵고 불안하였다. 게다가 흠돌의 딸이 총애를 잃었다.

 흠돌 등이 이에 모반을 꾀하였다. 야명궁(夜明宮)을 핑계로 삼아 인명(仁明)을 옹립한다고 하였으나 실제로는 스스로 왕이

 되려고 한 것이다.

  문무제의 병이 크게 악화되자 아버지
오기공북원(北原)으로부터 들어와 호성장군(護城將軍)이 되었는데,

 실제로는 자의황후(慈儀皇后)의 명령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 때 진공호성장군으로 인부(印符)를 내어 주지 않으며 말하기를

 “주상(主上)이 병으로 누웠고 상대등이 문서를 내리지 않았는데 어찌 중요한 직(職)을 가벼이 넘겨주겠는가?” 하면서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대개 적(敵)들의 모의가 이미 치밀했기 때문이었다.
(문무)제가 죽었으나 비밀에 부쳐 발설을 하지 않고 사람들을 시켜 비밀리에 경외(京外)의 군대를 입성시켜
흠돌 등이 군사를 동원하여

야명궁군관공(軍官公)의 집을 포위하고 난을 일으키려 하였다. 오기공심복낭두가 그 계책을 공에게 발설하였다.

  그 때
시위삼도(侍衛三徒)는 적(賊)들 편에 많이 서 있었다. 자의황후가 걱정하였다. 오기공(吳起公)이 이에 순원(順元)·개원(愷元)·

 당원(幢元)·원수(元帥)·용원공(龍元公) 등과 더불어 비밀히 사병(私兵)을 불러 들어가 호위하고 삼도(三徒)대감(大監)을 모두 파면하여

 다스렸다.349) 흠돌 등은 이에 크게 놀라 진격하여 대궁(大宮)350)을 포위하였다.

  서불감(舒弗邯) 진복공(眞福公)이 수병(手兵)351)을 이끌고 포위를 깨고 들어와 말하기를 “경외(京外)의 병력이 크게 이르렀다.

 너희들은 적신(賊臣)에게 미혹되었으니 죽음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였다. 그 때 흠돌 등이 그 무리를 속여 말하기를

 “상대등 군관(軍官)과 각간 진복(眞福)이 (문무)제의 밀조(密詔)를 받아 인명(仁明)을 즉위시켰다” 하였다.

 그러나 군관(軍官)이 움직이지 않았고 진복은 포위를 깨뜨렸으므로 무리들이 의심하여 서로 다투었다. 이에 큰소리로 왕에게 충성할 자는 오른 쪽, 적(賊)을 따를 자는 왼 쪽으로 서라고 선포하였다. 그러자 무리 중에 오른 쪽으로 간 자들이 많았다.

 흠돌 등은 일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알고 포위를 풀고 물러가려 하였다. 오기공(吳起公) 등이 병사를 풀어 대파하였다.

 경외(京外)의 병력이 또 이르렀다. 적은 이에 3간(三奸)을 사로잡아 바쳤다. 반란이 비로소 평정되었고 삼도(三徒) 중에는 이로서 죽임을

 당한 자가 매우 많았다. 

 
자의태후(慈儀太后)가 화랑을 폐지하라고 명령을 하고 오기공(吳起公)으로 하여금 낭도(郎徒)들의 명단을 작성하여 모두 병부(兵部)에

속하게 하고 직(職)을 주었다.352) 그러나 지방의 낭정(郎政)은 옛날 그대로 스스로 남아 있었다.

실직(悉直)이 가장 성하였다. 오래지 않아 그 풍속이 다시 서울에 점점 퍼졌다. 중신(重臣)들이 모두 오래된 풍속을 갑자기 바꾸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태후가 이에 득도하여 국선이 되는 것을 허락하였다.353) 화랑의 풍속은 그리하여 크게 변하였다.


343) 풍월주가 된 것을 의미한다.

344) 필사본에는 딸이라는 기록이 없었으나 후에 女(次0)를 추기하고 있다. 필사본에 女가 빠진 것은 잘못이다.

345) 흠돌·진공·흥원을 의미한다.

346) 후일 즉위하여 신문왕이 된다.
347) 자의왕후다.

348) 32대 효소왕이다.

349) 시위삼도는 진덕왕 5년에 설치하였는데 그 장은 감(監)이었다. 그런데 신문왕 원년 감을 파하고 장군을 두었다(『삼국사기』 40, 잡지 9, 직관 하, 무관).

350) 大宮은 內省에서 관장하던 3궁 중의 한 궁(『三國史記』 39, 雜志 8, 職官 中, 內省조 참조)로 현재의 월성을 가리킨다.

351) 직접 거느린 부하, 손 아래 병대(兵隊)를 의미한다.

352) 낭도와 병부의 관계가 깊었던 것을 알 수 있다.

353) 이후 화랑의 대표가 되었던 풍월주는 폐지되고 국선으로 된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