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신라

54. 경명왕(景明王)

오늘의 쉼터 2008. 10. 27. 23:29

54. 경명왕(景明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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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명왕(景明王)

 

◐ 생존기간 : (?~924)
◐ 재위기간 : ( 917~924)

◐본문설명

신라 54대 왕으로서 성은 박씨이며 이름은 승영(昇英)이고 신덕왕(재위 912-917년)의 태자이며, 어머니는 헌강왕(憲康王;재위 875-886년)의 딸인 의성왕후(義城王后)이다. 그리고 후삼국(後三國)이 정립(鼎立)하여 패권을 다투던 때인 917년 왕위에 올랐다.

918년 2월에 일어난 일길찬(;7등급) 현승(玄昇)이 반역하다가 목베여 죽임을 당하였다.

6월에 궁예 휘하에 있던 사람들의 마음이 갑자기 변하여 태조(太祖)를 추대하였으므로 궁예가 달아나다가 아랫사람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태조가 즉위하여 원년을 일컬었다.

7월에 상주(尙州)의 도적 우두머리 아자개(阿玆盖)가 사자를 보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919년 사천왕사(四天王寺)의 흙으로 만든 상(像)이 쥐고 있던 활시위가 저절로 끊어지고, 벽에 그려진 개가 마치 개짖는 것과 같은 소리를 내었다. 상대등(上大等) 김성(金成)을 각찬(角飡)으로 삼고 시중 언옹(彦邕)을 사찬(;8등급)으로 삼았다.

[고려] 태조가 송악군으로 도읍을 옮겼다.

920년 정월에 왕과 태조(太祖)가 서로 사람을 보내 우호를 맺었다. 2월에 강주장군(康州將軍) 윤웅(閏雄)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10월에 후백제 왕 견훤이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대야성(大耶城)을 쳐서 함락시키고 진례(進禮)에까지 진군하였으므로, 왕이 아찬 김률(金律)을 보내 태조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태조는 장군에게 명하여 군사를 내어 구원하게 하니 견훤(甄萱)이 듣고서 돌아갔다.

921년 정월에 김률이 왕에게 아뢰었다.

“제가 지난해 고려에 사신으로 갔을 때 고려 왕이 저에게 묻기를 ‘듣건대 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三寶]이 있다고 하는데, 이른바 장륙존상(丈六尊像)과 구층탑(九層塔) 그리고 성대(聖帶)가 그것이라고 한다. 장륙존상과 구층탑은 아직도 있으나 성대는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다.’고 하였으므로 제가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왕이 그것을 듣고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다. “성대(聖帶)라는 것이 어떤 보물인가?” 그러나 알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때 황룡사에 나이가 90세 넘은 사람이 있어 말하였다. “제가 일찍이 그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보배로운 띠는 곧 진평대왕이 착용하던 것인데, 대대로 전해져 남쪽 창고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왕이 마침내 창고를 열도록 하였으나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른 날에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제사를 지낸 다음에야 그것을 보게 되었는데, 그 띠는 금과 옥으로 장식된 것으로 매우 길어서 보통 사람이 맬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2월에 말갈 별부(別部) 달고(達姑)의 무리가 북쪽 변경에 와서 노략질하였다. 그때 태조의 장군 견권(堅權)이 삭주(朔州)를 지키고 있었는데, 기병을 이끌고 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깨뜨려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왕이 기뻐하여 사신을 보내 글을 전하여 태조에게 감사하였다. 4월에 서울에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8월에 누리[메뚜기]의 재해가 있었고 가물었다.

922년 정월에 하지성(下枝城) 장군 원봉(元逢)과 명주(溟州) 장군 순식(順式)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태조(太祖)가 그들의 귀순을 생각하여 원봉의 본래 성(城)을 순주(順州)로 삼고, 순식(順式)에게는 성(姓)을 내려 왕씨(王氏)라 하였다. 이 달에 진보(眞寶) 장군 홍술(洪述)이 태조에게 항복하였다.

923년 7월에 명지성(命旨城) 장군 성달(城達)과 경산부(京山府) 장군 양문(良文) 등이태조(太祖)에게 항복하였다. 왕이 창부시랑(倉部侍郞) 김락(金樂)과 녹사참군(錄事參軍) 김유경(金幼卿)을 후당(後唐)에 보내 조회하고 토산물을 바치니, 장종(莊宗)이 물품을 차등있게 내려 주었다.

924년 정월에 후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천주절도사(泉州節度使) 왕봉규(王逢規) 역시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6월에 조산대부(朝散大夫) 창부시랑 김악(金岳)을 후당에 보내 조공하니, 장종이 조의대부(朝議大夫) 시위위경(試衛尉卿)의 관작을 주었다. 8월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경명(景明)이라 하고 황복사(黃福寺) 북쪽에 장사지냈다. 태조가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제사지냈다.

그 뒤를 이어 경명왕의 친동생이 경애왕이 되었다.


※ 본문참고 : 두산대백과사전
※ 본문출처 : 차석찬의 역사창고
※ 이미지출처 : www.tourguid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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