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신라

51. 진성여왕(眞聖女王)

오늘의 쉼터 2008. 10. 27. 23:27

 

51. 진성여왕(眞聖女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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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성여왕(眞聖女王)

 

 생존기간 : (?~897)
 재위기간 : (887~897)

 ◐본문설명

신라 51대 왕으로서 성은 김(金)이고 휘(諱;임금의 이름)는 만(曼) ·원(垣)이다. 경문왕(재위 860-875년)의 딸이며, 헌강왕(憲康王;재위 875-886년) ·정강왕(定康王;재위 886-887년)의 누이동생이다. 정강왕이 후사(後嗣) 없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최치원문집(崔致遠文集) 제2권 사추증표(謝追贈表)에 말하였다. 『신(臣) 탄(坦)은 말씀을 올립니다. 엎드려 칙지(勅旨)를 받음에, 죽은 아버지 신 응(凝)[경문왕]을 추증하여 태사(太師)로 삼고 죽은 형 신 정(晸)을 태부(太傅)로 삼았습니다.』 또 납정절표(納旌節表)에서 말하였다. 『신의 큰 형인 국왕 정(晸)[헌강왕]은 지난 광계(光啓) 3년 7월 5일에 갑자기 성스러운 시대를 버렸고, 신의 사내 조카 요(嶢)는 아직 돐도 되지 않았으므로 신의 둘째 형 황(晃)[정강왕]이 임시로 이 변방의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으나 또한 1년이 지나지 않아서 밝은 시대를 마다하고 멀리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로써 말하면 경문왕의 이름은 응(凝)인데 본기(本紀)에서는 경응(膺廉)이라 하고, 진성왕의 이름은 탄(坦)인데 본기에서는 만(曼)이라 하였다. 또한 정강왕 황(晃)은 광계(光啓) 3년에 죽었는데 본기에는 2년에 죽었다고 말하니 어느 것이 옳은지 모두 모르겠다.>

즉위 직후 주(州)·군(郡)에 1년간 조세를 면제하고, 황룡사(皇龍寺)에 백좌강경(百座講經)을 설치하는 등 민심수습에 노력하였다. 겨울에 눈이 오지 않았다.

888년 2월에 소량리(少梁里)의 돌이 저절로 움직여 갔다. 왕은 평소 삼촌인 각간 위홍(魏弘)과 더불어 정을 통해 왔는데, 이때 이르러서는 늘 궁궐에 들어와 일을 마음대로 처리하였다. 이에 그에게 명하여 대구화상(大矩和尙)과 함께 향가(鄕歌)를 모아 편찬하도록 하였는데, 그 책을 일러 삼대목(三代目)이라 하였다. 위홍이 죽자 혜성대왕(惠成大王)으로 추존하였다. 이후에는 젊은 미남자 2∼3명을 몰래 끌어 들여 음란한 짓을 하고는 그들에게 중요한 관직을 주어서 나라의 정치를 맡겼다. 이로 말미암아 아첨하여 임금의 총애를 받게 된 사람들이 뜻을 마음대로 펴게되어 뇌물이 공공연하게 행해지고, 상(賞)과 벌(罰)이 공정하지 못하여 나라의 기강이 무너지고 느슨해졌다. 그때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떤 사람이 당시의 정치를 거짓으로 비방하는 글을 지어 조회 들어가는 길에 붙혀 놓았다. 왕이 사람들에게 명하여 찾아내게 하였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어느 사람이 왕에게 말하였다. “이는 문인(文人)으로서 뜻을 얻지 못한 자가 한 짓임이 틀림없습니다. 아마 이는 대야주(大耶州)에 은거하고 있는 사람 거인(巨仁)이 아닐까 합니다.” 왕이 명하여 거인을 묶어서 서울의 감옥에 가두고 장차 형벌을 집행하려고 하자, 거인(巨仁)이 분하고 원통하여 감옥의 벽에 다음과 같이 썼다.

『우공(于公)이 통곡하자 3년 동안 가물었고,
추연(鄒衍)이 슬픔을 머금으니 5월에 서리가 내렸도다.
지금 이내 가슴 속 깊이 품은 근심은 옛날과 비슷한데
하늘은 아무 말 없이 다만 푸르기만 하구나!』

그날 저녁에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끼고 천둥이 치고 우박이 내렸다. 왕이 두려워하여 거인(巨仁)을 석방하여 돌려 보냈다.

3월 초하루 무술에 일식이 있었다. 왕이 병환이 들어, 죄수의 정상을 살펴 사형죄 이하를 사면하고 60명에게 승려가 되는 것을 허락하니

왕의 병이 나았다.

5월에 가물었다.

889년 나라 안의 여러 주와 군에서 공물과 조세[貢賦]를 보내오지 않아, 나라의 창고가 텅 비어 나라의 씀씀이가 궁핍하게 되었으므로 왕이 사자를 보내 독촉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도적들이 곳곳에서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에 원종(元宗)과 애노(哀奴) 등이 사벌주를 근거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왕이 나마 영기(令奇)에게 명하여 붙잡게 하였다. 영기가 적의 보루(堡壘)를 멀리서 바라보고는 두려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였으나, 촌주(村主) 우련(祐連)은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왕이 칙명을 내려 영기를 목베고 나이 10여 세된 우련의 아들로 촌주의 직을 잇게 하였다.

890년 정월에 햇무리가 다섯 겹으로 둘러졌다. 15일에 황룡사에 거둥하여 연등(燃燈)을 구경하였다.

891년 지방에서는 조세가 걷히지 않고 병제(兵制)가 법대로 시행되지 않아, 나라 안이 소란해져 지방 각지에 군웅이 할거하였다.

이 때 10월 북원(北原)에서 양길(梁吉)과 궁예(弓裔)가 봉기하자, 이를 토평(討平)하려다가 도리어 실패하였다.

892년에 완산(完山:全州)에서 견훤(甄萱)이 일어나 세력을 확보함으로써, 신라는 삼국이 정립하는 형세에 이르렀다.

893년 병부 시랑 김처회(金處誨)를 당나라에 보내 정절(旌節)을 바치게 하였으나 바다에서 빠져 익사하였다.

894년 2월에 최치원(崔致遠)이 시무(時務) 10여 조를 올리자 왕이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최치원을 아찬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 제의는 받아들여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진골귀족의 반대로 시행되지는 않았다. 최치원의 개혁안은 육두품 중심의 유교적 정치이념을 강조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는 것이어서 진골귀족의 이익과는 배치될 수 있었다. 이 개혁이 시대적 한계성 때문에 시행되지 못함으로써 신라의 붕괴는 막을 수 없었고 후삼국이 정립하게 되었다.

10월에 궁예가 북원(北原)으로부터 하슬라(何瑟羅)에 들어갔는데, 그 무리가 600여 명이나 되었으며 스스로 장군(將軍)이라 일컬었다.

895년 8월 궁예(弓裔)가 저족(猪足), 성천의 두군을 취하고 철원 (鐵圓)등 10여 군현을 쳐서 공취하였다.

10월 임금이 조카인 헌강왕의 서자 요(嶢;효공왕)를 태자로 봉했다. 일찍이 헌강왕(憲康王;재위 875-886년)이 놀며 사냥하러 가는 길가에서 한 여자를 보았는데, 용모가 아름다워 왕이 마음으로 그를 사랑하였다.

 이에 명을 내려 뒷수레에 태워 장막으로 만든 임시 궁전에 도착하여 야합(野合)하여 곧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다.

성장하자 체모가 우뚝 뛰어났으므로 이름을 요(嶢)라 하였다.

진성왕이 듣고서 대궐로 불러 들여 손으로 그의 등을 어루만지며 말하였다.

“내 형제자매의 뼈대는 남들과 다르다. 이 아이의 등에 두 뼈가 불룩하게 솟아 있으니 진실로 헌강왕의 아들이구나!” 이에 담당 관청에 명을 내려 예를 갖추어 책봉하여 받들게 하였다.

896년 도적들이 나라의 서남쪽에서 일어났는데, 그들은 바지를 붉은 색으로 하여서 스스로를 [다른 사람과] 다르게 하였으므로 사람들은

그들을 적고적(赤袴賊)이라 불렀다. 주현(州縣)을 무찔러 해치고 서울의 서부 모량리(牟梁里)에까지 이르러 민가를 약탈하여 갔다.

897년 6월에 왕이 좌우의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근년 이래로 백성은 곤궁하고 도적들은 벌떼같이 일어나니, 이는 내가 덕이 없는 탓이다.

어진 이에게 자리를 비켜 왕위를 양보하고자 하는 나의 뜻은 결정되었다.” 이에 왕위를 태자 요(嶢)에게 물려주었다. 그리고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글을 올려 아뢰었다. 『신(臣) 아무개는 말씀을 올립니다. 희중(羲仲)의 관직은 신의 본분이 아니고, 연릉(延陵)의 절조를 지키는 것이 곧 신의 좋은 방책입니다.

신의 사내 조카 요(嶢)는 신의 죽은 형 정(晸)의 자식인데, 나이가 거의 15세가 되었고 자질은 종사(宗社)를 일으킬 만하므로 밖에서 구하여 데려오지 않고 안에서 천거하게 되었습니다. 근래에 이미 정치를 임시로 맡겨 다스리게 하여 나라의 재앙을 진정시켰습니다.』

12월 을사에 왕이 북궁(北宮)에서 죽었다. 시호를 진성(眞聖)이라 하고 황산(黃山)에 장사지냈다.

그 뒤를 이어 헌강왕의 서자인 요가 효공왕이 되었다.



※ 본문참고 : 두산대백과사전
※ 본문출처 : 차석찬의 역사창고
※ 이미지출처 : 에듀넷 멀티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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