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신라

49. 헌강왕(憲康王)

오늘의 쉼터 2008. 10. 27. 23:24

 

49. 헌강왕(憲康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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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강왕(憲康王)



◐ 생존기간 : [?~886]

◐ 재위기간 : [875~886]



 ◐ 본문설명

신라 49대 왕으로 성명은 김정(金晸)이며 아버지는 경문왕(재위 860-875년)이며 어머니는 헌안왕(憲安王;재위 857-860년)의 큰 딸 문의왕후(文懿王后)이다. 비는 의명부인(懿明夫人)으로서 즉위하자 문치에 힘썼으며, 서자로 요(嶢)가 있어 뒤에 효공왕이 되었고, 딸은 신덕왕의 비가 되어 의성왕후(義成王后)에 봉하여졌다.

875년 즉위하였는데 왕은 성품이 총명하고 민첩하였으며 책보기를 좋아하여 눈으로 한번 본 것은 모두 입으로 외웠다.

이찬(;2등급) 위홍(魏弘)을 상대등으로 삼고 대아찬(;5등급) 예겸(乂謙)을 시중으로 삼았다.

중앙과 지방의 사형죄 이하의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876년 2월 황룡사(皇龍寺)에 백고좌(百高座:큰 법회)를 베풀어 불경을 강(講)하게 하였다. 7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877년 정월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송악군(松岳郡)에서 탄생했다.

878년 4월에 당나라 희종(僖宗)이 사신을 보내 왕을 사지절(使持節)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검교태위(檢校太尉) 대도독계림주제군사(大都督林州諸軍事) 신라왕(新羅王)으로 책봉하였다. 7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회하려다가 황소(黃巢)가 난을 일으켰다는 말을 듣고 그만 두었다. 8월에 일본국 사신이 이르렀으므로 왕이 조원전에 불러 접견하였다.

879년 2월에 국학(國學)에 거둥하여 박사(博士) 이하에게 명하여 강론케 하였다. 3월에 나라 동쪽의 주와 군을 순행(巡幸)하고 있었는데,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네 사람이 왕의 수레 앞에 와서 노래부르고 춤을 추었다. 생김새가 해괴하고 옷차림과 두건이 괴상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산과 바다의 정령(精靈)이라 일컬었다.<고기에 이르기를 『왕의 즉위 원년의 일이다.』라고 하였다.>

 6월에 일길찬(;7등급) 신홍(信弘)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목베여 죽임을 당하였다.

10월에 준례문(遵禮門)에 나아가 활쏘기를 관람하였다.

11월에 혈성(穴城)의 들판에서 사냥하였다.

880년 2월에 금성[太白]이 달을 침범하였다. 시중 예겸(乂謙)이 관직에서 물러났으므로 이찬 민공(敏恭)을 시중으로 삼았다.

8월에 웅주에서 상서로운 벼이삭[嘉禾]을 바쳤다.

9월 9일에 왕이 좌우의 신하들과 함께 월상루(月上樓)에 올라가 사방을 둘러보았는데, 서울 백성의 집들이 서로 이어져 있고 노래와 음악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왕이 시중 민공(敏恭)을 돌아보고 말하였다.

“내가 듣건대 지금 민간에서는 기와로 지붕을 덮고 짚으로 잇지 않으며, 숯으로 밥을 짓고 나무를 쓰지 않는다고 하니 사실인가?”

민공이 “신(臣)도 역시 일찍이 그와 같이 들었습니다.” 하고는 아뢰었다.

 “임금께서 즉위하신 이래 음양(陰陽)이 조화롭고 비와 바람이 순조로와 해마다 풍년이 들어, 백성들은 먹을 것이 넉넉하고 변경은 평온하여 민간에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거룩하신 덕의 소치입니다.” 왕이 기뻐하며 말하였다.

 “이는 경들이 도와준 결과이지 짐(朕)이 무슨 덕이 있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부유함은 신라 전체가 아닌 이른바 금입택(金入宅)과 같은

진골귀족의 부강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지만 오히려 신홍 등의 반란은 하대사회의 모순을 드러내는 것으로 생각된다

서울의 민가는 모두 기와로 덮고 숯으로 밥을 짓는 등 사치와 환락의 시대가 이룩되었으나, 이때부터 신라는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881년 3월에 임해전(臨海殿)에서 여러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술이 얼근하게 취하자 임금이 거문고를 타고 좌우의 신하들은 각기 가사(歌詞)를 지어 바치며 매우 즐겁게 놀다가 그쳤다.

882년 4월에 일본국 왕이 사신을 보내 황금 300량과 야광주[明珠] 10개를 바쳤다. 12월에 고미현(枯彌縣) 여자가 한꺼번에 아들 셋을 낳았다.

883년 2월에 왕이 삼랑사(三郞寺)에 거둥하여 문신(文臣)들에게 명하여 각자 시 한 수를 짓도록 하였다.

885년 2월에 호랑이가 궁궐의 뜰에 들어왔다. 3월에 최치원이 돌아왔다. 겨울 10월 임자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황소(黃巢)의 도적 무리를 깨뜨린 것을 축하하였다.

886년 봄에 북진(北鎭)에서 아뢰기를 “적국인(狄國人)이 진(鎭)에 들어와 나무조각을 나무에 걸어놓고 돌아갔습니다.”라 하고는 그것을 가져다 바쳤다. 그 나무조각에는 15자가 쓰여 있었는데, 이르기를 『보로국(寶露國)과 흑수국(黑水國) 사람들이 함께 신라국과 화친을 통하겠다.』고 하였다.

6월에 왕이 몸이 편치 않아 나라 안의 죄수를 사면하고, 또 황룡사에서 백고좌회(百高座會)를 열어 불경을 강설하였다.

7월 5일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헌강(憲康)이라 하고 보리사(菩提寺) 동남쪽에 장사지냈다.

헌강왕이 후사 없이 죽어 그 뒤를 이어 경문왕(재위 860-875년)의 둘째 아들인 헌강왕의 동생이 정강왕이 되었다.

※ 추가설명

처용가(處容歌)

서울 밝은 달밤에

밤 늦도록 놀고 지내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로구나.

둘은 내 것이지만

둘은 누구의 것인고?

본디 내 것(아내)이다만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



배경설화

신라 제49대 왕인 헌강왕이 개운포(開雲浦:지금의 울산)에 나가 놀다가 물가에서 쉬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해져 길을 잃었다.
왕이 괴이히 여겨 좌우 신하들에게 물으니, 일관(日官)이 아뢰기를 “이것은 동해용의 조화이니 마땅히 좋은 일을 해주어서 풀어야 할 것입니다.”라 했다. 이에 왕은 일을 맡은 관원에게 용을 위해 근처에 절을 세우도록 명했다. 왕의 명령이 내려지자 구름과 안개가 걷혔으므로 이에 그곳 이름을 개운포라 했다.
동해용이 기뻐하여 아들 일곱을 거느리고 왕의 앞에 나타나 덕을 찬양하여 춤추고 음악을 연주했다. 그 가운데 한 아들이 왕을 따라 서울로 가서 왕의 정사를 도왔는데 그의 이름이 처용이다. 왕은 처용에게 미녀를 아내로 주고, 그의 마음을 잡아 두려고 급간(級干) 벼슬을 주었다.
그런데 그의 아내가 무척 아름다웠기 때문에 역신(疫神)이 흠모하여 사람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밤에 그의 집에 가서 몰래 같이 잤다. 처용이 밖에서 돌아와 잠자리에 두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처용가〉를 부르며 춤을 추면서 물러났다.
그 때 역신이 모습을 나타내고 처용 앞에 꿇어앉아, “내가 공의 아내를 사모하여 지금 범하였는데도 공은 노여움을 나타내지 않으니 감동하여 아름답게 여기는 바입니다. 맹세코 지금 이후부터는 공의 형상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에 들어가지 않겠습니다.”라고 했다. 이로 인하여 나라 사람들은 처용의 모습을 그려 문에 붙여 사기(邪氣)를 물리치고 경사스러움을 맞아들였다는 것이다.



※ 본문참고 : 두산대백과사전
※ 본문출처 : 차석찬의 역사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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