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와 역사/신라

48. 경문왕(景文王)

오늘의 쉼터 2008. 10. 27. 23:21

 

경문왕(景文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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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문왕(景文王)



◐ 생존기간 : (?~875)

◐재위기간 : (860~875)


◐본문설명

신라 48대 왕으로서 성은 김(金)이고 이름은 응렴(膺廉:凝廉)이다.

 아버지는 아찬(阿粥) 계명(啓明), 어머니는 신무왕(神武王)의 딸 광화부인(光和夫人)이며,

 할아버지는 희강왕(僖康王)이며 할머니는 충공(忠恭)의 딸인 문목부인(文穆夫人)김씨이다.

비는 헌안왕(憲安王;재위 857-860년)의 큰 딸 영화부인(寧花夫人) 김씨로서 8촌 재재종 근친혼이다. 뒤에 헌안왕의 작은 딸도 왕비로 삼았다.

아들은 황(晃: 정강왕) ·정(晸: 헌강왕) ·윤(胤), 딸은 만(曼: 진성여왕)이다.

동생으로 위홍(魏弘)이 있었다. 헌안왕에게 아들이 없었고, 여왕 선덕(善德) ·진덕(眞德)의

예를 따르지 않게 됨으로써 왕위를 계승하였다.

860년 즉위한 뒤 아버지 계명을 의공대왕(懿恭大王),

어머니 광화부인을 광의왕태후(光懿王太后)로,

왕비를 문의왕후(文懿王后)로 책봉하고 왕자 정을 태자로 봉했다.

861년 3월에 왕이 무평문(武平門)에 나가서 크게 사면하였다.

862년 정월 이찬(伊飡;2등급) 김정(金正)을 상대등(上大等)으로,

아찬(阿飡) 위진(魏珍)을 시중에 임명하였다.

 2월에 왕이 몸소 신궁에 제사지냈다.

 7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8월에 당나라에 가던 사신 아찬(阿飡) 부량(富良) 등의 일행이 익사하였다.

863년 2월에 왕이 국학(國學)에 거둥하여 박사 이하에게 경전의 뜻을 강론케 하고

물건을 차등있게 내려 주었다.

 10월에 복숭아꽃과 오얏꽂이 피었다.

 11월에 눈이 내리지 않았다. 영화부인(寧花夫人)의 동생을 맞아들여 둘째 왕비로 삼았다.

 뒷날에 왕이 흥륜사 승려에게 물었다.

 “스님께서 전에 말한 세 가지 이익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승려가] 대답하였다.

 “당시 왕과 왕비가 자기들의 뜻과 같이한 것을 기뻐하여 총애가 더욱 깊어진 것이 첫째요,

 이로 인하여 왕위를 잇게 된 것이 두번째이며 전부터 바라던 막내딸을 마침내 아내로

 삼을 수 있게 된 것이 세번째입니다.”

 그러자 왕이 크게 웃었다.

864년 2월에 왕이 감은사(感恩寺)에 거둥하여 바다에 망제(望祭)를 지냈다.

 4월에 일본국 사신이 이르렀다.

865년 4월에 당나라 의종(懿宗)이 사신 태자우유덕(太子右諭德) 어사중승(御史中丞) 호귀후(胡歸厚)와 부사(副使) 광록주부(光祿主簿) 겸 감찰어사(監察御史) 배광(裵光) 등을 보내 앞 임금의 죽음에 조문·제사하고, 아울러 1천 필을 부의(賻儀)로 주었으며, 왕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검교태위(檢校太尉) 지절(持節) 대도독계림주제군사(大都督林州諸軍事) 상주국(上柱國) 신라왕(新羅王)으로 책봉하였다.

그리고 왕에게 관고(官誥) 한 통, 정절(旌節) 한 벌, 채색비단 500필, 옷 두 벌, 금은그릇 일곱 개를 주었고, 왕비에게는 채색비단 50필, 옷 한 벌, 은그릇 두 개를 주었으며, 왕태자에게는 채색비단 40필, 옷 한 벌, 은그릇 한 개를 주었고 대재상(大宰相)에게는 채색비단 30필, 옷 한 벌, 은그릇 한 개를 주었으며 차재상(次宰相)에게는 채색비단 20필, 옷 한 벌, 은그릇 한 개를 주었다.

866년 정월에 왕의 죽은 아버지를 의공대왕(懿恭大王)으로 봉하고, 어머니 박씨 광화부인을 광의왕태후(光懿王太后)로 봉하였으며, 부인 김씨를 문의왕비(文懿王妃)로 삼았고 왕의 아들 정(晸)을 왕태자로 삼았다.

 15일에 황룡사에 거둥하여 연등을 구경하고 백관들에게 잔치를 열어 주었다.

 10월에 이찬(;2등급) 윤흥(允興)이 동생 숙흥(叔興)·계흥(季興)과 더불어 반역을 꾀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대산군(岱山郡)으로 달아났다.

 왕이 명을 내려 뒤쫓아가서 붙잡아 목베어 죽이고 일족(一族)을 멸하였다.

867년 정월에 임해전을 거듭 수리하였다.

 5월에 서울에 전염병이 돌았다.

 8월에 홍수가 났으며 곡식이 익지 않았다.

 10월에 사자를 여러 길[道]로 나누어 보내 위문하였다.

 12월에 객성(客星;혜성의 다른 이름)이 금성[太白]을 범하였다.

868년 정월에 이찬(;2등급) 김예(金銳)와 김현(金鉉) 등이 반란을 꾀하다가

 목베여 죽임을 당하였다.

 6월에 황룡사탑에 벼락이 쳤다.

 8월에 조원전(朝元殿)을 거듭 수리하였다.

869년 7월에 왕자 소판 김윤(金胤) 등을 당나라에 보내 은혜에 감사하고 아울러 말 두 필, 부금(金) 100량, 은 200량, 우황 15량, 인삼 100근, 대화어아금(大花魚牙錦) 10필, 소화어아금(小花魚牙錦) 10필, 조하금(朝霞錦) 20필, 사십승백첩포(四十升白布) 40필, 삼십승저삼단(三十升紵衫段) 40필, 사척오촌두발(四尺五寸頭髮) 150량, 삼척오촌두발(三尺五寸頭髮) 300량, 금채두오색기대(金釵頭五色帶)와 반흉(班胸) 각각 10조(條), 응금쇄선자(鷹金鎖子)와 분삽홍도(紛紅) 20부(副), 신양응금쇄선자분삽오색도(新樣鷹金鎖子紛五色) 30부, 응은쇄선자분삽홍도(鷹銀鎖子紛紅) 20부, 신양응은쇄선자분삽오색도(新樣鷹銀鎖子紛五色) 30부, 요자금쇄선자분삽홍도(子金鎖子紛紅) 20부, 신양요자금쇄선자분삽오색도(新樣子金鎖子紛五色) 30부, 요자은쇄선자분삽홍도(子銀鎖子紛紅) 20부, 신양요자은쇄선자분삽오색도(新樣子銀鎖子紛五色) 30부, 금화응령자(金花鷹鈴子) 200과(顆), 금화요자령자(金花子鈴子) 200과(顆), 금루응미통(金鏤鷹尾筒) 50쌍, 금루요자미통(金鏤子尾筒) 50쌍, 은루응미통(銀鏤鷹尾筒) 50쌍, 은루요자미통(銀鏤子尾筒) 50쌍, 계응비힐피(繫鷹緋皮) 100쌍, 계요자비힐피(繫子緋皮) 100쌍, 슬슬전금침통(瑟瑟鈿金針筒) 30구(具), 금화은침통(金花銀針筒) 30구, 침 1,500개를 바쳤다. 또 학생 이동(李同) 등 세 사람을 진봉사(進奉使) 김윤(金胤)에게 딸려 보내 당나라에 들어가 학업을 익히게 하고, 책 사는 비용으로 은 300량을 내려 주었다.

870년 2월에 사찬(;8등급) 김인(金因)을 당나라에 보내 숙위하게 하였다.

 4월에 서울에 지진이 일어났다.

 5월에 왕비가 죽었다. 7월에 홍수가 났다.

 겨울에 눈이 오지 않았고, 나라 사람들이 전염병에 많이 걸렸다.

871년 정월에 왕이 관리에게 명하여 황룡사탑을 고쳐 만들게 하였다.

 2월에 월상루(月上樓)를 거듭 수리하였다.

872년 2월에 몸소 신궁에 제사지냈다. 4월에 서울에 지진이 일어났다.

 8월에 나라 안의 주(州)와 군(郡)에 누리[메뚜기]가 곡식을 해쳤다.

873년 봄에 백성이 굶주리고 또 전염병이 번졌으므로, 왕이 사자를 보내 진휼하였다.

 9월에 황룡사탑이 완성되었는데, 9층으로 높이가 22장(丈)이었다.

874년 정월에 상대등(上大等) 김정(金正)이 죽었으므로 시중 위진(魏珍)을 상대등으로 삼고,

 인흥(藺興)을 시중으로 삼았다.

 4월에 당나라 희종(僖宗)이 사신을 보내 유지(諭旨)를 선포하였다.

 5월에 이찬(;2등급) 근종(近宗)이 반역을 꾀하여 궁궐을 침범하였으므로

 궁궐을 지키는 군사[禁軍]를 내어 그들을 공격하여 깨뜨렸다.

 근종은 그 무리들과 함께 밤에 성을 나갔으나 뒤쫓아가 그를 붙잡아 거열형(車裂刑)에 처하였다.

 9월에 월정당(月正堂)을 거듭 수리하였다. 최치원(崔致遠)이 당나라에서 과거에 급제하였다.

875년 2월에 서울과 나라의 동쪽 지방에 지진이 일어났다.

 살별[;혜성의 옛이름]이 동쪽에 나타나 20일만에 없어졌다.

 5월에 용이 왕궁의 우물에서 나타났는데, 잠시 후에 구름과 안개가 사방에서 모여 들었다가

 날아가 버렸다.

 7월 8일에 왕이 죽어 시호를 경문(景文)이라 하였다.

한편 왕의 정치를 도운 사람들 중에는 국선출신이 많았는데,

곧 요원랑(邀元郎), 예흔랑(譽昕郎) 등이다.

이들은 국토를 유람하면서 왕을 위하여 치국의 뜻을 노래로 짓고,

 이를 다시 사지(舍知)인 심필(心弼)을 시켜 대구화상(大矩和尙)에게 보내어

(현금포곡 玄琴抱曲), (대도곡 大道曲), (문상곡 門詳曲) 등 3수의 노래를 짓게 하였는데,

경문왕이 이를 보고 크게 기뻐하여 칭찬하였다고 하는데 가사는 현재 전하지 않는다.

그리고, 경문왕은 산 뱀을 가슴에 덮고 자는 나쁜 습성이 있다고 알려져 있을 뿐 아니라,

당나귀 귀와 같은 큰 귀를 가졌다는 소문도 퍼져 있었다.

그 뒤를 이어 태자가 헌강왕이 되었다.


※ 추가설명

신라 48대 임금인 경문왕은 왕이 된 뒤부터 귀가 점점 길어지더니 결국 당나귀 귀같이 되었다.
이 사실은 오직 복두 만드는 사람만이 알고 있었는데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어명 때문에

그는 누구에게도 말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너무 답답해서 병이 날 지경에 이르자,

그는 대나무 숲으로가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 큰소리로 마구 외쳤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그날 이후, 바람이 세게 부는 날이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라고

외치는 소리가 대나무 숲에서 들려왔다.
마침내 모든 신하들이 왕의 비밀을 알게 되자 왕은 대나무를 모조리 베고 산수유를 심게 했다.

이 설화에서 경문왕이 당나귀 귀로 묘사된 것은 귀가 얇아 남의 말을 잘 듣고 변덕이 심했음을

뜻한다.
또 대나무를 모두 베어내고 산수유를 심었다는 것은 반대파를 모조리 없애고

자신의 비위를 맞추는 세력들만 곁에 두었다는 암시이다


※ 본문참고 : 두산대백과사전
※ 본문출처 : 차석찬의 역사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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